하인리히 와 바냐 라는 이름이 너무 각력하게 각인되어 있는 탓인지..자꾸만 바냐삼촌이 생각나고, 하인리히 (뵐) 이름을 가져온 것 같은 기분이 들어서... 체홉의 <바냐삼촌>을 다시 꺼내 나의 리뷰를 읽다가 '증오'에 시선 고정 공교롭게 바냐의 입으로 증오에 대한 언급이 나와서 "화내지 말게,하지만 웃지도 마.난 이렇게 생각해.그거아나? 우린 모두 헐벗은 영혼들이야.친구, 우리는 무엇으로 사나? 벌것벗은 증오로 살지. 사랑이란 걸 우리는 할 수가 없어(....)"/39쪽




 영화(드라이브 마이카)를 보려면 체홉의 '바냐 외삼촌'을 읽고 가는 것이 도움(?) 될 거란 글을 읽었다.(영화 스토리는 스포일러가 포함 되어 있을지 몰라 자세히 읽지 않았다^^) 영화는 하루키 소설을 원작으로 했다고 했는데..(점점 영화가 더 궁금해진다^^) 해서 체홉의 희곡부터 꺼내 읽게 되었다.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너무 사실적인 작품인 것 같아 깜짝깜짝 놀라며 읽었다.사실 제목이 그닥 흥미를 유발하지 않아서 체홉의 다른 작품은 연극으로도 한 번씩 만났지만 바냐..는 아직이었는데, 무대에 올려진다는 소식을 듣게 되면 무조건 예매할 생각이다. 밑줄 긋고 싶은 장면이 너무 많았다.그래서 덕분(?)에  '괴로움' 이란 화두가 보이게 된 것 같다. 교수는 자신의 늙음에 대해 괴롭고, 삼촌은 이뤄질수 없는 사랑에 괴로워한다. 의사아스트로프는 인류애가 넘쳐 괴롭고 괴로운 이유는 저마다 다른데 삶이 지옥처럼 느껴지는 건 모두 비슷하게 느끼는 모양새다.교수의 젊은 아내 생각은 그래서 고개가 절로 끄덕여졌던 것 같다... "세상은 강도나 화재 때문에 파멸하는 게 아니라 증오, 적대감 온갖, 사소한 말다툼 때문에 파멸한다는 사실을 말이죠"/495쪽 모두가 자신들의 괴로움 속에 몸부림 치느라 타인의 괴로움은 보이지도 않을 뿐 더러, 원망과 분노가...그런데 이 작품은 염세적으로만 흐르지 않았던 것 같아 좋았다. 극과 극의 감정이 균형을 맞춘 듯한 느낌을 받았다고 해야 할까..소냐가 바냐 삼촌을 위로하는 감정은 작위적이란 느낌보다, 아픈 사람의 마음은 아픈 사람이 더 잘 알고 있다는 느낌을 갖게 했다. 해바라기 사랑으로 똑같이 괴롭지만, 그 상황을 바라보고 이해하는 방식은 달랐고..결국 소냐의 긍정이 바냐 삼촌의 불안을 잠재워 주었다는 느낌... 우리가 괴로워지는 건 어느 순간 찾아오는 나태함에 비롯될 수 있다는 설정도 흥미로웠다.희곡 자체의 내용도 흥미로웠지만, 숲에 대한 체홉의 생각과, 이미 저 오래전부터 환경문제에 대한 고민이 있어 왔다는 사실을 알게 된 점도 이 작품을 흥미롭게 읽을수 있는 부분이었던 것 같다. "창조할 수 없는 것을 파괴하는 것은 무분별한 야만인이나 하는 짓이에요.자신에게 주어진 것을 증가시키려고 인간은 이성과 창조력을 부여받았습니다.그러나 지금까지 인간은 창조가 아니라 파괴만 일삼아 왔습니다.숲은 점점 더 줄어들고 강은 말라가고 야생동물은 사라지고 기후는 망가져버렸습니다"/485쪽 '숲의 수호신'을 개작한 작품이라고 해서 궁금했는데..읽으면서 저절로 이유를 알게 된 기분이다. 자연을 무분별하게 파괴하는 이야기로 읽어도 전혀 무방하겠지만,저다마의 인생에 빗대어 생각해도 전혀 낯설지 않은 이야기였다.아름다움이 세상을 구원할 것이다..라고 도선생도 말씀하셨지만,자신의 삶에 스스로 창조자가 되어 살아가는 것이 왜 중요한지를...차가우면서도 따뜻하게 그려낸 작품이란 생각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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