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 삽화가 하나 있는데 네게 보여주고 싶었어,존.내가 늙은 라스콜리니코프에 대해 했던 말 기억하지?"
"그가 총으로 놈들을 다 쏴 죽여야 했다고 했었지"
순간 리버스는 그 말의 숨은 뜻을 깨달았다. 그가 이 단서를 잘못 해석한 것이었다/237쪽 <매듭과 십자가>에서 '죄와벌'을 만나게 될 줄 몰랐다. 예전에 읽은 책들이 현재..지속적으로 소환(?)되는 기쁨을 누리고 있다. <죄와벌>을 마지막으로 읽은 것이 2016년이었는데, '매듭과 십자가' 덕분에 나의 감상기를 읽으면서..라쟈에 대해 작가도 아주 후한점수를 주지는 않은 것 같은 생각이 들어 반가웠다. 로쟈가 살해후 이름을 바꾼 대목이..'매듭과 십자가'에서도 나온다(왠지 오마주한 것 같은 기분..^^
2012년 <죄와벌>을 읽을 당시 친구와 나는 호들갑을 조금 떨었던 것 같다.이렇게 재미나게 읽어낼 줄 몰랐다면서..그러면서 십년 후에 다시 읽어 보기로 약속까지 했었는데...너무도 빨리(?) 죄와 벌을 다시 읽게 되고 말았다.이게 다 영화 <이레셔널 맨> 때문이다.우디알렌은 그저 살짝 죄와벌의 소재를 차용했을 뿐인지도 모르겠다.그러니까 내가 조금더 확대 해석을 하게 된 것일지도 모르는 거다.중요한 건 영화를 함께 본 지인이 ..죄와벌의 결말을 물어 왔을때 ..내가 할 말이 없었다는 거다.읽었다면서 어떻게 결말도 기억해 내지 못할수 있을까? 그저 로쟈가 광기에 사로잡혀 노파를 죽이고..로쟈의 친구 라주미힌이 어떤 성격의 인물이 어떤 유형히고..정도에서 나는 멈췄던 걸까? 분명 내가 감동하고 흥분했던 기억은 로쟈가 노파를 죽이는 장면은 아니었을 텐데..당시에는 흥분만 했을 뿐 '죄와벌'에 대한 리뷰도 남겨 놓지를 않았다.아마도 도선생님의 책을 드디어 읽는 다는 그 자체만으로도 행복했던 것 같다.그런데 다시 읽는'죄와벌' 은 조금 힘들었다. 최근 우리나라에서 벌어지는 일련의 묻지마 살인들이 나를 공포로 엄습해왔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고리대금업자인 노파를 죽여야 하는 것을 자신의 운명인것처럼 혹은 무슨 계시인것처럼 라스콜니코프는 말한다.그런데 그렇게 그가 늘어 놓는 이유 어떤 것에도 그럴수 있어 라는 교감이 생기질 않았다.만약 그가 정말 노파를 죽인 것이 아니라 고리대금업이 사회의 악이라 생각해서 처단한 것이라면 그녀를 죽인 후 그는 당당하게 자수를 했어야 하는거 아닌가 물음이 따라온다.(물론 그렇다해도 살인은 어떤 식으로도 이해받을수 없다고 생각하지만.) 영화 이레셔널 맨이 자연스럽게 따라오는 부분이기도 했다.철학과 교수는 정의롭지 못한 판사를 죽이는 것이 사회를 위해 필요한 거라고 스스로에게 격려를 한다.그러나 엉뚱하게 다른 이가 누명을 쓰고 감옥에 갇히게 된 사실을 알게 되면서도 그는 자수를 권하는 제자까지 죽이려고 했다. 그리고 우디알렌은 가볍(?)게 교수에게 벌을 내린다.안타까웠던 건 교수는 분명 벌을 받았는데..본인이 지은 죄를 명확하게 알지 못했다는 거다.이런 생각을 하며 <죄와 벌>을 읽고 있으려니 죄를 지은 건 노파(그녀는 욕심이 많은 사람이었을 뿐) 아니라 라스콜니코프 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는 거다. 2부에선 로쟈에 대한 벌이 어떤식으로든 그려지지 않았을까? 소냐가 그를 위해 뭔가 구원의 손길을 내민 것도 같은데 톨선생의 '부활'과 또 묘하게 겹치는 것 같아 우선 거기까지는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요는 1권에서 도선생이 우리에게 보여준 건..아니 그려내건 한 청년이 광기에 사로잡혀 노파를 살해하고 이후 악몽에 시달리면서도 끝임없이 여러개의 자아 속에서 혼돈을 겪는 과정까지다.재미난건 노파를 죽일 당시 라스콜니코프가 소냐의 가족에게 자비를 베푼 후 자신을 로지온이라고 불러다는 대목이었다.뭔가 새로 태워나고 싶은 로쟈의 염원같은것이 느껴졌다고 해야 할까? 로쟈를 정신병자라는 인물로만 놓고 보면 죄와벌은 읽기가 너무 힘들수 밖에 없을지도 모른다.도선생은 왜 살인을 저질렀을까에만 집착하기 보다 어떻게 하면 그렇지 않게 사회가 돌아갈수 있을까를 생각해 보게 하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 '조화로운 인간'이란 텍스트를 읽으면서 든 생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