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저런 책을 검색하다 마주한 <끝내주는 괴물들> 목차를 살피다,보바리부인이 아닌 보바리씨에 대한 이야기가 있어 읽고 싶어졌다. 지난해 <마담 보바리>를 다시 읽으면서..욕망의 화신이 오로지 보바리부인만이였을까? 라는 생각을 하게 되어서였다. 당연히 보바리씨에 대한 생각도 이전과는 좀 다른 시선으로 보게 되었다. 그 역시 보바리부인을 향한 욕망..으로 가득했던 건 아닐까.그녀의 죽음 이후 그가 더 이상 살 희망을 이어가지 않았다는 것에..보바리씨를 가혹하게 바라보고 싶었던 모양이다. 그런데 망겔 선생은..보바리씨의 문제는 욕망보다 상상력의 부재가 그를 힘들게 만들었다고 생각한 듯 하다.
"문제는 샤를 보바리에게 상상력이 부족하다는 점이다. 과히 둔감한 그의 행동거지는 흑백으로 이루어진 단조로운 삶의 산물이다.(..)선생님이 자기 이름을 묻든 데 대답도 못 할 만큼 어설프고 소심한 성격으로 묘사한다(...) 보바리 씨는 자기가 내려야 할 결정을 다른 사람들에게 내맡기는 사람이다"/33쪽
열정, 상상력, 독창성, 매력.... 보바리 씨는 이 모든 것을 갖추지 못했지만 그렇다고 사랑을 모르는 사람은 아니다.보바리 씨는 아내를 사랑한다. 에마가 죽은 뒤 그는 아내를 잊지 않으려 안간 힘을 쓰지만 (...)슬픔에서 헤어나오지 못한다"/35쪽
"플로베르는 고인을 모욕이라도 하듯 이 불쌍한 남자에게 악의적인 클리셰를 덧입힌 셈이다"/36쪽 망겔 선생의 시선으로 보자면, 나는 플로베르가 덧입힌 클리셰가 넘어간 1인일게다. 그가 에마를 사랑한 마음보다, 그녀를 가졌다는 만족감이 더 컸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샤를과 그의 어머니는 피곤했지만 저녁에 아주 오랫동안 이야기를 나누었다.그들은 지난날과 앞날에 대해 이야기했다. 그녀는 용빌에 와 살면서 집안일을 해 주겠다고 했고, 다시는 모자가 서로 헤어지지 말자고 했다. 아주 오래전에 자신의 손에서 빠져나갔던 애정을 되찾은 것을 내심 기뻐하면서 그녀는 재치있고 다정하게 굴었다(...)"/ 522쪽
처음 읽을 때와 다른 느낌이 들거라 예상 했지만, 생각했던 것 이상이다. <플로베르의 앵무새>를 읽은 덕분이다. 보바리 부인..에 대한 줄거리는 욕망으로 대표되는 '보바리즘'이라는 용어와 불륜에 관한 이야기라는 정도가..내가 기억하는 전부다. 그런데 플로베르..에서 언급된 보바리..는 놀라웠다. 우선 샤를이 에마를 만나기전 결혼한 이력이 있었다는 사실도 까마득하게 잊고 있었는데..그가 결혼하게 된 이유가,또다른 보바리 부인의 욕망에서 비롯되었다는 사실에 더 충격이었다. 그러니까 이 소설에는 두 명(?)의 보바리부인이 등장하고 있었던 거다. 처음 읽을 때도 또렷하게 기억하고 있었던 건...과연 에마의 욕망만이 문제였을까... 에마를 부추긴 약사 오메, 뢰뢰.그녀와 ...즐긴 남자들 모두 욕망의 화신들로 봐야 하지 않을까... 그런데 이번에는 샤를의 마음이 궁금해졌다. 에마가 자신을 사랑한다고 어쩜 그렇게 철썩 같이 믿을수 있었던 건지...."그는 사람들이 틀림없이 그녀를 무척 좋아했을 거라고 생각했다. 분명히 모든 남자가 그녀를 탐냈으리라.그러자 그녀가 더욱 아름답게 보였고 그녀에 대한 격렬한 욕망이 끊임없이 느껴졌다.그 욕망은 이제 실현될 수 없기에 더더욱 끝이 없었고 절망을 끓어오르게 했다"/525쪽 샤를은 자신이 소망한 거대한 욕망을 이미 가지고 있었다고 생각했던 건 아니였을까...에마가 욕망의 전부가 아니었다면..딸을 위해 남자는 살아야 했다...그러나 자신의 욕망이 사라진 순간..그는 더이상 살 의욕을 느끼지 못했다. 그런면에서..욕망이 삶에 의욕이 되는 오메와 뢰뢰 같은 사람이 차라리..나은 걸까... 싶지만 숨막히는건 마찬가지다. 처음 읽을 때는 에마의 무지에 가까운 욕망과 만족을 모르는 욕심에 숨이 막혔는데, 그런 무지를 악용하는 뢰뢰가 더 무섭게 느껴졌다. 보바리즘이 아니라 뢰뢰리즘이라고 말하고 싶을 만큼...조금이라도 내것이 아닌 것에 욕망을 품는 순간 뢰뢰와 같은 인물이 따라 올 것 같은 기분... 인간의 나약함을 귀신같이 알아차리는 이들이 있지 않은가.. 경험해 보지 않은 이상..나는 에마처럼 살지 않을 자신이 있다고 사람들은 말하겠지만...오메와 뢰뢰 같은 사람들은 그런 약점까지 뚫고 들어간다. 왜냐하면 그들의 욕망은 자신에게만 있는 것이 아니라..타인으로 부터 자신의 욕망을 관철시키려 하기 때문이다. 오로지 자신에 대한 욕망이 고팠던 이들만이 불행해졌다는 것이 그 반증은 아닐까....(물론 누군가의 욕망으로 인해 선의의 피해자가 생겨나기도 하지만 말이다. 그럼에도 굳건히 살아가는 것으로 믿고 싶게 한 이폴리트와 앞으로의 삶을 상상하고 싶지 않은 어린 보바리양(베르트)의 운명이 제일 잔인하다는 생각을 했다. (라고 맺으면서, <마담 보바리>는 이제 그만 읽어도 되겠다고 생각하면서도, 보바리 씨에 대해 여전히 나는 온전히 알고 있지 않았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물론 정답은 없지만..플로베르가 일부러 보바리 씨..에 대한 어떤 장치를 해 둔 거라면.. 왜 그랬을까.라는 질문으로 이 소설을 한 번 더 읽어야 할 것 같다.다시 읽어도 여전히 보바리 씨를 이해할 수 없다면.. 플로베르가 덧입힌 세계안에 머무르는 것으로 만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