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 주정뱅이
권여선 지음 / 창비 / 201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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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 안은 따뜻했고 희미한 먼지 냄새가 났다. 그녀는 젖은 옷과 양말을 벗고 실내복으로 갈아입었다. 컵에 담긴 양초에 불을 붙이자 길쭉한 심지가 타들어가면서 타닥타닥 소리를 냈다. 그 소리는 장작 타는 소리 같기도 하고 아득히 먼 곳에서 터지는 폭죽 소리 같기도 했다. 그녀는 침대에 앉아 마른 수건으로 젖은 머리카락을 문질렀다. 찬비가 끝없이 내리는 낯선 숲속에 누구의 방해도 받지 않고 열쇠로 문을 따고 들어와 쉴 수 있는 그녀만의 따뜻하고 보송한 공간이 있다는 게, 그래, 나쁘지만은 않아, 하고 그녀는 중얼거렸다.

 그녀는 가방을 열어 옷과 책을 정리하고 커피잔에 소주를 부어 천천히 마셨다. 소주를 다 마시고 침대에 누워 책을 읽다 두어 페이지도 못 읽고 잠에 빠져들었다. 자세를 바꾸느라 잠시 깨었을 때 그녀는 한두시간 뒤면 식당에서 따뜻한 저녁을 먹을 수 있다는 생각을 했고 그러자 휘진 몸에 따스한 쾌감이 온천수처럼 잔잔하게 퍼져가는 걸 느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그녀는 몹시 땀을 흘리며 잠에서 깨어났다. 

-역광





 책장을 펼치면 술 냄새가 오를 것 같은 까닭에 읽는 내도록 술을 마시며 읽었던 책이 있다. 짧은 이야기 속 주인공들은 자기보다 나이가 많은 대학원생과 사귀다 헤어지기도 하고, 환영을 보기도 한다. 또는 가까이 있는 것은 보지 못하고 멀리 있는 것을 보기도 하고, 남동생의 도박 빚으로 신용불량자가 되어 집에서 나와 자기만을 위해 살아내기를 결심하거나 작정했다는 듯 술을 마시다 알코올성 치매에 걸리거나 어느 날 헤어지지 않고 헤어진 남자친구가 왜 사라졌는지를 술을 먹다 알게 되기도 한다. 

 소설 속의 대부분의 고전적인 서사는 사람들 삶의 어떤 질서가 무너지고, 이야기는 그 질서를 되찾기 위한 방향으로 나아가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러나 권여선의 단편에서 어떤 질서는 조금씩 인생의 악희를 통해 더 나빠지는 방향을 드러내기도 하고, 또 어떤 단편에서는 그 모든 것이 환영이었음을 종이를 찢듯 보여주기도 한다. 필연을 찾으려는 인간은 인생이 건네는 농담 앞에 얼마나 무력한가. 이 소설집의 일곱 편의 단편은 그런 면에서 삶과 닮았다.




삶 속의 물음을 이 책 속의 사람들은 조심스레 건넨다. 




그게...... 내 탓은 아니잖아요? 그렇잖아요?

-층




 일상적이지 않았던 통화를 하필이면 그 여자가 엿들었을 때, 하필이면 '미친년'이라고 욕설을 할 때, 그것은 그의 탓도, 그녀의 탓도 아니었다. 반듯하다고 생각했던 남자의 폭력성을 오인하기에 충분한 우연이었다. 거꾸로 말하자면, 그 남자가 욕설할 때 전화통화를 엿듣게 된 것은 그 여자의 탓이 아니다. 그 남자가 하필이면 그때 욕설을 한 것도 그의 탓은 아니다. 오히려 지적장애 누이가 있다는 것부터가 지독한 우연이었는데, 우리 생의 어떤 단면에서는 '하필'이 필연처럼 펼쳐진다. 

 이런 비극은 삶의 질서를 흔들어 위태롭게고 불안하게 만든다. 롤러코스터가 높이 올라갈수록 위치 에너지가 증가하듯 높이와 에너지가 비례한다고 믿었던 때가 젊은 날이었다면, 이제는 그 롤러코스터는 양의 에너지를 가져올 수도 있지만, 음의 에너지를 가져올 수도 있다고 생각하는 때가 온 것이다. 그것은 의지가 아닌 성격의 영역일 수도 있으며 인간은 삶의 농담을 견뎌내기에는 종종 그 껍데기가 너무 얇다. 

 이를테면 쇠심줄처럼 튼튼해지는 것이 아니라 닳은 밧줄처럼 너덜너덜해지는 것이다. 






그런데 그게 뭘까...... 나를 살게 한...... 그 고약한 게......

-이모





 그 너덜거리는 마음을 어떻게든 부여잡고 버티려는 사람의 이야기가 '이모'이다. 

 대학 1학년 때부터 가장 노릇을 해왔지만 서른아홉 살에 남동생의 도박 빚으로 신용불량자가 되었던 사람, 이후 오십이 되자 더는 자신을 찾지 말라며 원하는 대로 살기로 했던 사람. 다른 사람에게 기대려고 하지도, 기대게 해주지도 않겠다고 결심했으나 살아가는 일은 죄책감과 불가해성, 무례함과 성가심으로 점철되어 있다. 한마디로 내가 들였던 노력이 반드시 내게 돌아온다는 보장도 없고, 어떤 우연한 사건이 필연이 될지 우연으로 끝날지도 알 수 없음이 '이모'의 일생을 통해 드러난다. 마침내는 그대로 있어서는 안 된다는 생각에 기억을 더듬고 더듬어 대학 1학년 때 귀찮다는 이유로 무신경하게 자기를 좋아했던 남학생의 손바닥에 담배를 비벼 끈 일을 기억해낸다. 

 어느 겨울날의 무례한 이웃들, 짜증나는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보낸 시간이 어쩌면 자기 앞의 생과 같다는 결론에 이르렀을 때, 이대로는 안 된는 전언에 가까운 결론에 스스로 놀라게  되기까지, 그 사람은 얼마나 긴 둘레길을 걸었을까. 




 가까스로 다다른 통찰. 거울에 비친 자기 얼굴, 지구에서 보이지 않는 달의 뒷면. 






이런 얘기 해도 되나?

-실내화 한 켤레





 그러나 어떤 삶의 부분은 그 얼굴과 뒷면이 예상 밖으로 심술궂다. 

 소설집 전체를 아우르는 기운이 있다면 이러한 종류의 전언이다. 또한 전언을 전하는 자의 심술궂음, 카산드라의 미소. 결국, 해서는 안 될 이야기를 일부러 한 박자 늦게 꺼내는 악희는 우리 삶의 저변에 의도치 않게 깔린 안개 같다. 그래서 비누 거품 같았던 인간은 어느새 제각각의 성격, 혹은 제각각의 결함을 지닌 채 이에 대항하려 하지만 어떤 이는 그것을 우연히 피해가고, 어떤 이는 맞서야만 한다. 그게 내 탓은 아니라고 말하면서도 그게 뭐였을지를 생각해 내야 하고, '이런 얘기 해도 되나?' 하는 삶의 심술궂음에 애써 스스로 다잡아야 하는 삶. 어쩌다 열린 술판 같은 자리. 맨정신이었다면 들을 일이 없었을 다른 이의 비밀, 볼 일이 없었던 모르는 사람과의 대화, 우연히 얻어걸린 어떤 사건들. 

 '실내화 한 켤레'의 세 사람은 고등학교 수학 선생의 모진 수업을 견뎌내려 만나게 되고, 어른이 되어 우연히 만나 술자리를 갖는다. 그러나 알면서도 일부러 발설하지 않다가 그날 만난 남자가 지독한 성병에 걸렸다는 말을 하는 선미의 얼굴은 심술궂은 인생의 우연 같다. 그래서 그 남자와 잤을 것으로 추정되는 혜련에 대해 선미가 '혜련이가 너무 걱정돼, 경안아. 아직 애도 없는데.'라고 말할 때, 실은 우리가 가졌던 술자리는 찰나의 진실이 아닌 어젯밤의 차악이 되기도 한다. 






 우연히 가게 된 술자리, 내 옆에 누가 앉을지는 나도 모를 일. 술자리에서 나는 주로 먼저 집에 가자는 말을 하지 않고 은근슬쩍 사라지곤 한다. 인생에서도 그러고 싶으나 나의 차악, 나의 물음이 다른 사람이 건네는 농담, 공감과 적절히 만날지는 나도 모를 일이다. 술자리에서 슬쩍 빠져나와 이 책이 건네는 농담과 위로를 읽고 있자니, 내가 생각해본 적이 없었던 바닥에 깔린 내가 은근슬쩍 술을 따라주는 느낌이다. 언제나 그랬듯이.





비에 흠뻑 젖은 그녀의 모습을 보고 사무실 여직원이 놀라 자리에서 일어났다.

 "선생님, 왜 이렇게 젖으셨어요? 전화를 주셨으면 모시러 갔을텐데요."

 그녀는 여직원이 내미는 수건을 사양하고 그가 언제 오는지를 물었다.

 "어느 분이시라고요?"

 그녀가 그의 이름을 말하자 여직원은 벽에 걸린 화이트보드를 보고 고개를 갸웃했다.

 "그런 분은 안 오시는데요."

 근는 그의 이름이 적히지 않은 화이트보드를 뚫어져라 보았다. 여직원이 책상 서랍에서 서류철을 꺼내 뒤적였다.

 "그런 분은 올해 아예 입주 신청도 안하셨어요."

 그녀는 열쇠를 받아 사무실을 나왔다. 1층 로비를 지나 문을 열고 나와 계단으로 향했다. 비가 들이치는 실외 계단을 올라가 2층 9호 처마 밑에서 열쇠로 문을 열려다 그녀는 등 뒤에 어떤 기척을 느끼고 돌아보았다. 맞은편 공용 발코니에는 아무도 없었다. 발코니 앞 단풍나무가 영원한 작별의 불가피성을 안다는 듯 젖은 손바닥 모양의 나뭇잎을 은밀하게 반짝이고 있었다. 그녀는 문을 열고 비틀거리며 방으로 들어갔다.

-역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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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lanca 2017-12-16 08: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책 참 좋았죠? 저나 쟌느님이나 다 어떤 상승, 삶의 기쁨 뒷면의 무게를 가늠하게 되는 나이가 되어버렸나봐요.

Jeanne_Hebuterne 2017-12-22 06:15   좋아요 0 | URL
블랑카님, 술마실 때면 꼭 펴놓고 읽게 되는 본격 주정문학입니다. 작가의 의도도 아마 이렇지 않았을까 싶어요. 요즈음엔 한국말의 맛이 새롭게 다가와서 엊그제 한국 소설책을 주문했습니다.
십여년 전의 감정들이 강렬하고 날카로웠다면 지금은 약간의 한숨을 쉬며 먼 곳을 바라보려고 해요. 제대로 되지는 않지만 노력하고 있습니다.

2017-12-16 08:3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7-12-22 06:1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7-12-16 08:38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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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12-22 06:20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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