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스마스
-여태천
두 손을 높이 들고
불안은 고드름처럼 자란다.
당신은 맨발이었고
나는 유령처럼 당신을 안았다.
굴뚝과 굴뚝처럼 우리는 꽁꽁 얼어붙어 있었다.
불안. 고드름. 맨발. 유령. 굴뚝. 꽁꽁.
행복해야 한다고 다짐하는 때 제목을 통해 시인이 완성한 본문.
저 시를 읽으면 펄펄 내리는 눈이 떠오른다. 뽀드득, 눈을 밟으면 펑펑 내리지 않고 펄펄 서럽게 내리는 눈 위로 어떤 흡혈귀 소녀의 피가 떨어질 것 같다.
영화평론가 이동진이 일컬은 '피와 눈물의 연금술'.
세상 모든 열두 살이 따스하거나 연민이 따스함의 외피를 쓴 것은 아니다.
스웨덴 영화 '렛 미 인'은 열두 살 소년 오스카와 열두 살 그 언저리 즈음 되었다고 말하는 흡혈귀 이엘리의 이야기다. 영화 전에 스웨덴 원작 소설 렛 미 인이 있었다. 영화 후에 미국 버전 렛 미 인도 있었고 그 뒷이야기도 언젠가는 나올지도 모른다. 모리씨의 노래를 흥얼거리며 수많은 세상의 렛 미 인을 떠올려 본다.
LET THE RIGHT ONE SLIP IN-MORRISEY
Let the right one in
Let the old dreams die
Let the wrong ones go
They cannot
They cannot
They cannot do what you want them to do
Oh ...
Let the right one in
Let the old dreams die
들어가도 되니?
소설 속 이엘리와 소설 밖 이엘리가 물어볼 때.
글씨가 그것을 읽는 내 머릿속에서 모락모락 피어올랐고 영상이 그것을 보는 내 눈 밖에서 스프레이처럼 퍼져 나갔다. 아닌게 아니라 씨네 21의 이화정 기자가 쓴 스페셜 기사를 보면 촬영감독은 스프레이 라이트로 이 촉촉한 아날로그를 만들어 냈다 전한다. 모든 것이 사라진 다음의 풍경은 순간과 영원, 동화와 호러, 혈관 속 피가 흐르는 아이와 피를 마시는 아이 사이 내리는 하얀 눈으로 남아 그곳을 지켰다.
먹기 위해 죽여야 하고 자신의 사랑하는 방식이 마음에 들지 않아 우는 존재. 여기에 숭고미를 덧입힐 수도, 로맨티시즘을 깔아줄 수도, 호러를 장착할 수도 있다. 분명한 것은 죽은 것도 아니고 산 것도 아닌 이 이미지가 찰나를 살 수밖에 없는 인간에게 꽤 매력적인 존재라는 것. 브람 스토커의 드라큘라, 보덴부르크의 꼬마 흡혈귀 시리즈, 아벨 페라라의 영화, 박찬욱의 박쥐, 앤 라이스의 연작 등, 이 계보는 앞으로도 다양한 표정으로 나타날 것이나 그 어느 것도 이만큼 부옇게 슬프기는 어려울 것 같다. 수많은 대답하기 어려운 질문에 가장 간단히 답해야 하는 경우의 난처한 표정. 추운 것을 잊어버린 아이와 하얀 입김을 더 하얀 눈 속에 내뿜는 아이의 이야기.
용기 대신 연민, 동정 대신 동조.
어떤 엇갈림은 설명을 생략한다. '그러니까', '어쩌면', '그래서'와 같은 부사를 뺀다. 형용사와 부사를 제외하고 남은 것은 명사와 동사다. 영화의 강점이 그 간결한 압축과 보여주기에 있다면 소설의 강점은 서사를 덮는 깊이의 공간이다. 영화와 소설이 이렇게 만날 때, 종종 글씨와 영상 중 어느 것을 먼저 보아야 할까 고민하는 때도 있는데, 어느 것을 먼저 보아도 무관한 경우가 '렛 미 인'일 것이다. 같은 나무가 설원에 서 있는데, 그 나뭇가지 끝 맺힌 눈송이의 모양이 약간 다르다. 영화 '렛 미 인'의 눈송이의 모양은 그것을 둘러싼 촉촉한 어둠, 쏟아지는 피에 따라 달라진다. 소설 '렛 미 인'의 눈송이의 모양은 그 아래 먼저 기다리고 있던 쏟아지는 눈빛에 따라 더 분명해진다.
이 작품의 장르를 무엇이라 해야 할까. 영화를 살펴보자면 이 감독은 쿠엔틴 타란티노처럼 장르에 취미를 지닌 감독도 아니며 현란한 그래픽을 과시하고자 하는 욕망도 없는 듯 하다. 대신 에로티시즘과 장르적 습성을 제거하고 이야기의 핵심인 두 아이를 그저 바라볼 뿐.
피를 마시지 못해 꼬르륵 소리가 나고 이상한 냄새가 나도 오스카를 앞에 두고 침만 꼴깍 삼키고 스스로를 노려보는 이엘리. '내가 만약 초대 안 하면 어떻게 되는데?'라고 묻다가도 '들어와, 들어와, 들어와도 돼'라고 말하는 오스카. 이 두 아이를 보고 있으면 만날 수 없는 두 개의 눈송이가 허공에서 잠시 엇갈리는 것 같다.
또렷하게 손끝에 앉았던 눈송이가 몇 년도 지난 지금, 유월의 끝자락에 녹는다. 고드름처럼 자라던 불안은 이제 싹을 틔웠나. 살아있는 아이의 순간과 그렇지 않은 아이의 영원은 만나서 '가벼운 키스'라는 모르스부호를 똑똑, 보냈는데 어떤 이의 터널과 어떤 이의 영원은 어떤 생채기를 남겼을까. 삼 초 만에 녹든, 삼 년 만에 녹든, 영원의 관점에서 보면 거기서 거기일 뿐. 영화 올드 보이에서 나온 말과 같이, 모래알이든 돌덩이든 가라앉기는 마찬가지다.
이엘리의 맨발이 밟던 눈송이. 오스카의 언 손이 만지던 루빅 큐브.
한 존재의 위장을 채울 피, 한 존재의 혈관을 채울 피.
그 둘의 대화를 엿들었다.
Oskar: Who are you?
Eli: I'm like you.
Oskar: What do you mean?
Eli: What are you staring at? Well?
Eli: Are you looking at me?
Eli: So scream! Squeal!
Eli: Those were the first words I heard you say.
Oskar: I don't kill people.
Eli: No, but you'd like to. If you could... To get revenge. Right?
Oskar: Yes.
Eli: Oskar, I do it because I have to.
Eli: Be me, for a while.
[pause]
Eli: Please Oskar... Be me, for a little while.
상대가 된다는 건 어떤 걸까. 나도 너와 같아. 해야 하니까 하는 거야. 라고 말하는 건 어떤 걸까. 말해주어야 안다는 건, 하루키가 1Q84에서 덴고의 아버지를 통해 들려주었듯이 설명해 주어도 모른다는 것일 수도 있다. 가장 온전한 대화는 침묵이었고 가장 잘 된 이해는 모르스부호였다. 그 모든 것이 이루어지던 물안개 같은 빛. 쏟아지는 어둠. 내리는 눈조차 소리를 삼가고 그 동세만 남길 것 같은 눈부신 어둠. 영하 삼십도, 낮은 불과 다섯 시간. 오스카가 지르는 비명은 이상할 만치 괴괴하게 퍼졌다. 세상에 없을 듯한 일과 한계 서로 부딪히는 순간, 세상의 모든 다채로운 색상에 덧입히는 작가와 감독의 무채색이 선명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