쾌락 - 세계의 고전 사상 7-001 (구) 문지 스펙트럼 1
에피쿠로스 지음, 오유석 옮김 / 문학과지성사 / 1998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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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생 동안의 축복을 만들기 위해서
지혜가 필요로 하는 것들 중에서 가장 위대한 것은
우정의 소유이다.
- 에피쿠로스, [중요한 가르침] ⅩⅩⅦ

일찍이 아나톨 프랑스는 “모든 사람이 칭찬하고 존중하는 책, 그런 책은 아무도 읽지 않은 책일 가능성이 높다”라고 말했다. 오래된 고전의 경우가 더욱 그러한데, 예를 들면 마르크스를 이야기하는 사람치고 [자본]을 처음부터 끝까지 읽은 사람이 얼마나 될지 나는 의문이다. 예수를 믿는 사람들은 성경을 안 읽고, 부처를 믿는 사람들은 불경을 읽지 않는다. 사실 그래도 삶을 사는 데는 별 지장이 없다.

문제는 책을 안 읽어서 오해를 낳게 되는 경우이다. 그러한 책 중에 하나가 바로 에피쿠로스의 『쾌락』이다. 나는 이 책을 오유석이 번역한 ‘문학과 지성사’판으로 읽었는데, 작은 포켓북 형태로 되어 있어서 들고 다니며 읽었다. 그런데 사람들은 내가 이 책을 읽고 있는 모습을 보면서 묘한 표정들을 연출하는 것이 아닌가. 아뿔싸, 책 제목이 ‘쾌락’이었으니.

우스개 소리 : 보드리야르가 쓴 『섹스의 황도』는 우리나라 고등학교 학생들에게 많이 팔렸다는데, 그 이유는 우리나라 고등학생들이 이 제목을 오해해서 ‘섹스의 왕도’로 알았기 때문이라는 믿지 못할 이야기. 하지만 보드라야르의 『섹스의 황도』는 왠만한 지식인이라도 쉽게 읽을 수 있는 책은 아니다.

에피쿠로스의 『쾌락』은 과연 ‘쾌락’에 관한 책이다. 그러나 에피쿠로스가 추구하는 쾌락은 일상적인 사람들이 추구하는 쾌락의 정반대에 위치해있다. 일상인의 쾌락이 순간적이고 육체적인 것이라면, 에피쿠로스의 쾌락은 지속적이고 정적인 것이다. 욕망을 키우는 쾌락이 아니라 욕망을 조절하는 쾌락. 풍요롭게 소비하는 쾌락이 아니라, 최소한의 것에 만족하는 쾌락. 그런 의미에서 에피쿠로스의 쾌락은 불교의 선(禪)적인 측면과 많이 닿아있다. 그는 욕망을 잘 선택하고 계산하라고 한다. 어떤 욕망은 만족을 주지만, 어떤 욕망은 오히려 고통을 낳기 때문에. 예를 들어 좋은 차를 사고 싶은 욕망은 그에게 결핍의 고통을 주지 않는가. 그래서 에피쿠로스는 ‘아타락시아’, 즉 마음이 동요되지 않고 평안한 상태를 추구한다.

나는 『쾌락』을 읽으면서 에피쿠로스가 ‘감각’을 진리의 기준으로 삼고 있는 것에 놀라웠다. 근대 합리주의 철학은 끊임없이 감각을 추방하고 그 자리에 이성을 세우려한다. 감각은 불완전하며 일시적인 현상에 불과하다고 판단한다. 그러나 에피쿠르소는 그 감각이야말로 우리가 세상을 인식하는 최초의 것이자, 최후의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또 하나 놀라운 점은 그는 단순 인과론적 사고에서 벗어나 있다는 점이다. 그는 하나의 현상에 둘 이상의 원인이 있을 수 있으며 그러한 현상을 미신적인 방법이 아니라 자연학적인 방법으로 추구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어찌되었든, 에피쿠로스의 『쾌락』은 나에게 책읽기의 쾌락을 선사한 책이다. 때로는 잠언적으로, 때로는 산문적으로 에피쿠로스는 미신에 저항하고 진정한 쾌락이 무엇인지 성찰하게 만들었다. 내가 줄을 그어 놓은 두 부분을 인용하며 끝내자.

“ 사려깊고 아름답고 정직하게 살지 않고서 즐겁게 살 수는 없다. 반대로 즐겁게 살지 않으면서 사려 깊고 아름답고 정직하게 살 수는 없다. 사려 깊고 아름답고 정직하게 살기 위한 척도를 가지지 않은 사람은 즐겁게 살 수 없다.”[중요한 가르침Ⅴ]

“어떠한 쾌락도 그 자체로 나쁘지는 않다. 하지만 많은 경우에, 쾌락들을 가져다주는 수단이, 쾌락보다는 고통을 가져다준다.”[중요한 가르침 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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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퀴엠 - CJK - 죽은자를 위한 미사
진중권 지음 / 휴머니스트 / 200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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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중권의 새로운 책이 나왔다. 『레퀴엠』(휴머니스트)이라는 이름을 달고 나온 이 책은 전쟁과 죽음에 관한 이야기이다. 총 8장으로 구성되어 있고 각장마다 전통적인 레퀴엄(진혼곡)의 가사로 시작하여 전쟁과 죽음을 소재로 한 종교예술작품을 수록하고 있으며, 미학의 관점에서 전쟁이라는 현상을 기록하고 있다. 전쟁은 인류의 역사 만큼 오래된 것이고, 그에 따른 죽음 역시 낯설지 않다. (나의 죽음과 연결되기 때문에 낯설지 않은 것인지, 아니면 역설적으로 나의 죽음과 연결되지 않기 때문에 낯설지 않은 것인지 딱 꼬집어 말할 수 없지만.)

가깝게는 미국이 침범한 이라크 전쟁 때문에 쓰여진 책이겠지만, 조금 멀리는 우리와 전쟁이 그리 멀지 않기 때문에 전쟁에 대한 성찰이 필요하다고 판단했기에 쓰여 졌을 이 책에서, 진중권은 그의 평소의 어투와는 달리 머뭇거린다. 그 머뭇거림이 오히려 거침없음보다 신뢰가 간다. 가령, 서문은 이렇게 끝난다.

“야만은 아직 우리의 것인지도 모른다. 우리는 과연 평화주의자인가? 반전시위에 나갔던 우리는 이번 전쟁에 반대한 것일까? 아니면 모든 전쟁에 반대한 것일까? 모르겠다. 우리는 왜 이 전쟁에 반대했을까? 그것이 ‘전쟁’이기 때문에? 아니면 그 전쟁이 ‘부당’하기 때문에? 모르겠다. 아직도 우리는 ‘정의로운 전쟁’이 있다고 믿는 것일까? 아니면 모든 전쟁은 정의롭지 못하다고 믿는 것일까? 역시 모르겠다. 어쩌면 우리는 마음 속 깊은 곳에서 아직 평화주의자가 아닌지도 모른다. 선뜻 모든 전쟁에 반대한다고 말하지 못하고 머뭇거리는 그만큼, 야만은 우리의 것이다.//그 야만의 희생자들에게 영원한 안식을…….”

한 문단 안에 물음표가 7개나, 모르겠다는 표현이 5번이나 적혀있다는 것은 조심스런 자기 부정이 아니면 성실한 성찰일 것이다. 어쩌면 전자가 후자와 연결됨으로 완성되는 것이겠지만. 진중권은 그렇게 전쟁에 대하여 조심스럽게 접근하고 있다. 이 책은 그러므로 전쟁에 대한 -특히 이라크 전쟁을 둘러싼 - 보고서이자 미학적으로 포장된 성찰서이다. 진중권은 미국의 폭압뿐만 아니라 우리의 무지와 야만을 괴로워한다. 그것은 이론 이전에 마음의 울림을 수용하고 있다는 말이다. 그래서 진중권의 다음과 같은 결말은 과학적이라기보다는 시적이다.

“그 어떤 무기도 그 어떤 군대도 미군이 지키는 그 성(이라크의 바그다드 성)의 견고한 벽을 무너뜨리지는 못할 것이다. 하지만 소총 대신 촛불을 들고, 수류탄 대신 장미꽃을 꽂고, 폭탄 대신 의약품을 보내는 시민들의 평화시위 앞에서는 그 견고한 요새의 성벽도 언젠가 힘없이 무너져 내릴 것이다. 예리고 성을 무너져내리게 한 것은 노랫소리였다. 미군이 지키는 제국의 아성을 무너뜨리는 것 역시 요란한 포성이나 찢어지는 총성이 아니라 고요한 반전평화의 노랫소리다. 사악한 자들이 날뛰는 시대에 야훼든 알라든 만약 신이 존재한다면, 그는 아마 이런 식으로 역사(役事)할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아직 이라크의 전쟁은 끝나지 않았다. 독재자 후세인을 몰아내었지만, 제국주의자 미국이 여전히 그곳에 있기 때문이다. 아마도 이라크 민중의 평화와 자주를 향한 조용하고 강한 전쟁은 지금 한창 진행 중일 것이다. 우리의 전쟁이 아직도 진행 중이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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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즈를 위하여 - 새롭게 읽는 공산당 선언
황광우.장석준 지음 / 실천문학사 / 200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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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천문학사와 인연이 있긴 있었다. 그러니까 내가 『삶이 보이는 창』에 한국철학의 연재를 끝내고, 아예 내용을 보충하여 단행본을 만들 심산으로 초고본을 가지고 인휘형과 함께 실천문학사를 방문했었다. 그때가 아마 2년이 넘었을 것이다. 어쨌든 출판사에서 대표인 김영현 선배를 만나 이런 저런 얘기를 하던 차, 이곳에서는 나의 책을 내기 힘들겠구나 판단할 수 있었다.

왜 내가 이런 너저분한 얘기를 하냐하면, 당시 얘기 도중 내가 한국철학책 뿐만 아니라 마르크스와 관련하여 책을 한 권 내고 싶다고 은연 중에 이야기했던 것이 기억이 나서다. 당시 나는 마르크스의 저술 중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을 뽑아서 나의 삶이나 오늘날의 현실과 연관된 명상서(?) 겸 해설서를 가벼운 마음으로 날씬하게 만들고 싶었다. 아마도 가제목으로 『마르크스를 달린다』 쯤으로 잡았던 것으로 기억나는데, 어찌되었든 유야무야되고 말았다. 지금도 그 마음을 잃은 것은 아니지만. 그러던 차, 실천문학사에서 황광우와 장석준이 함께 쓴『레즈를 위하여 - 새롭게 읽는 공산당 선언』이 금년 5월달에 출판되어 사서 읽어보게 되니 당시의 나의 모습이 떠올랐던 것이다.

각설하고. 누가 나에게 지금까지 읽었던 책 중에서 가장 아름다운 글을 하나만 꼽아보라고 한다면, 나는 그 중에 하나로 분명히 『공산당 선언』을 선택할 것이다. 내용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문장의 구성력이나 탄탄한 논리력, 그리고 사람을 매료시키는 문체가 삼위일체가 되어 고전의 전범이 되기에 충분한 책이다. 나는 사상적으로 공산당 선언에 매료되었다기보다는 문학적으로 그 책에 매료되었다. 오죽했으면 독일어를 못하는 것을 한탄하며 영어로 된 서적을 찾아 일독을 감행했겠는가. 지금도 그때의 흥분이 고스란히 살아오는 것 같다.

“하나의 유령이 유럽을 배회하고 있다. 공산주의라는 유령이.”라는 괴기스런 문장으로 시작되는 공산당선언은 1장 처음에 “지금까지 모든 사회의 역사는 계급투쟁의 역사다.”라는 단언을 거쳐 “프롤레타리아가 잃은 것이라곤 쇠사슬뿐이요, 얻을 것은 세계이다. 만국의 노동자여, 단결하라!”로 대미를 장식하는 이 선언문은 마르크스가 30살에 작성한 것이다. 젊은 나이에 전세계를 뒤흔들 문장을 작성했던 마르크스가 놀랍고, 부럽고, 그를 대하는 내가 참으로 부끄러웠던으로 기억한다. 지금은? 놀라움과 부러움은 많이 누그러들었지만 부끄러움은 변함이 없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실천문학사에서 나온 <레즈를 위하여>는 오늘날의 젊은이들에게 읽히기 위해 쓰여진 책이다. 그러나 굳이 젊은이들만을 위해서라고 한정할 필요는 없겠다. 청년시절부터 사회운동에 헌신했던 황광우씨가 담담한 수필형식으로 공산당 선언의 명제들을 차분히 해설하고 있는 것이 미덕이라면 미덕이다. ‘선언’도 새롭게 번역해서 실려 있고, 선언과 관련된 오늘날의 논쟁구도도 체계적으로 설명하고 있다. 나는 이 책을 읽으면서 ‘선언’을 읽었다기보다는 황광우씨의 삶의 고백을 보았다고 말하는 것이 더 정직할 것이다.(어디서부터 황광우씨가 쓴 것이고, 어디가 장석준씨가 쓴 것인지 분명하지는 않지만.)

신념을 가지고 산다는 것은 아름다운 일이다. 더욱이 사회가 외면하는 불온한(?) 신념을 가지고 일관된 삶을 산다는 것은 눈물나게 아름다운 일이다. 지은이(들)은 일말의 의심도 없이 자신의 신념을 내보이고 있다. 그(들)의 삶이 놀랍고 부럽다. 그리고 나의 삶이 다시금 부끄럽다. 그런 의미에서 ‘공산당 선언’을 처음 읽었을 때의 나의 감정은 지금도 진행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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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의 노래 1
김훈 지음 / 생각의나무 / 200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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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훈의 <칼의 노래>(생각의 나무) 두 권을 마침내 다 읽었다. 아침에 짬짬이 읽을 생각이었는데, 한 번 잡으니 놓을 수가 없었다. 김훈의 힘!

소설의 부제(副題)격으로 달려있는 말이 새삼 눈에 들어온다. ‘이순신-그 한없는 단순성과 순결한 칼에 대하여’ 김훈은 이 소설로 ‘가장 오랜 전통, 가장 높은 권위, 가장 많은 상금의 문학상’ 동인문학상을 받았다. 소설을 두르고 있는 ‘가장 상업적인’ 띠지가 눈에 거슬리지 않은 것은 아니었지만 김훈의 작품이기에 참았다.

심사위원들은 수상촌평에서 이렇게 이 소설을 평가하였다. “김훈씨의 <칼의 노래>는 작가의 신체적 나이와 관계없이, 아주 젊은 소설이다. 그렇다는 것은 그 작품이 한국문학이 여태 만나지 못했던 세 겹의 대극(對極)을 창조했다는 것을 뜻한다. 그 대극의 하나는 제목이 가리키고 있듯이 칼과 노래 사이의 그것이다. 그 둘은 역사적 인간의 고독한 내면을 그림으로써 첨예하게 빚어진 역사와 개인 사이의 대극이다. 그 셋은 순수한 문체의 힘만으로 황잡한 세상과 맞선 데서 솟아난 이야기와 문체 사이의 대극이다. (……) 이 전혀 예고된 적인 없는 새로운 세계의 출현은 자발적인 유배를 택한 작가의 장인적 정신의 승리이자, 오랫동안 반복의 늪 속을 부유하고 있는 한국문학에 벼락처럼 쏟아진 축복이라 할 것이다.”

하지만 나는 심사위원들의 말의 성찬보다 김훈의 ‘책 머리에’ 실린 글이 더욱 이 소설을 읽는데 유용하다고 생각한다 : “2000년 가을에 나는 다시 초야로 돌아왔다. 나는 정의로운 자들의 세상과 작별하였다. 나는 내 당대의 어떠한 가치도 긍정할 수 없었다. 제군들은 희망의 힘으로 살아 있는가. 그대들과 나누어 가질 희망이나 믿음이 나에게는 없다. 그러므로 그대들과 나는 영원히 남으로서 서로 복되다. 나는 나 자신의 절박한 오류들과 더불어 혼자서 살 것이다.” 나는 소설을 읽으며 소설의 이순신과 현실의 김훈이 자꾸 겹쳐졌다. 김훈화된 이순신? 이순신화된 김훈? 어찌 되었든 좋다. 나는 이 1인칭 주인공시점의 독백체 소설을 읽으며 가슴이 아팠고 뭉클했고, 울었다. 한 시대의 아픔에서 비켜서지 않으면서 온몸으로 부닥쳐야 했던 한 인물이 살아났다.

김훈은 이순신의 독백을 간결체로 처리하였다. 이순신이 무인이었기 때문일까? 나는 그 간결체가 마음에 들었다. 너무나 많은 생각이 담겨있기에 짧을 수밖에 없는 그 문체. 나는 소설을 읽으며 밑줄을 그었다. 이도 내 버릇에서는 없었던 이상한 짓. 그 중 하나 : “내가 적을 이길 수 있는 조건들은 적에게 있을 것이었고, 적이 나를 이길 수 있는 조건들은 나에게 있을 것이다.” 나는 지금 삶의 전투를 벌이고 있는 것일까? 평소에는 긋지 않을 곳에 밑줄이 그어져 있다.

나는 김훈의 소설을 문학적으로 평가할 위치에 있지 않다. 다만 나는 그의 소설을 읽을 뿐이다. 그것이 나의 임무인양. 나는 읽는다, 읽고 또 읽는다. 나는 이제 김탁환의 <불멸>(미래지정) 4권을 읽을 것이다. 역시 이순신에 대한 이야기. 하지만 김훈의 <칼의 노래>가 독주(獨奏)라면 김탁환의 <불멸>은 교향곡(交響曲)이다. 김탁환의 소설은 임진왜란을 둘러싼 정치사와 전쟁사를, 그리고 문학사를 아우르고 있다. 선조와 유성룡, 정철이 나오고, 이순신과 권률, 원균이, 허준과 허균이 등장한다. 김탁환은 욕심이 많은 사람이다. 그 김탁환의 소설을 이제 읽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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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마을 언어학교 - 영화보다 재미있는 언어학 강의
강범모 지음 / 동아시아 / 200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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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이 잡(雜)스러운 사람들은 글쓰기도 잡(雜)스럽다. 역사서에 시가 출몰하고, 철학서에 미술이 등장한다. 과학서적에 음악이 등장하고, 언어학책인지 영화관련 책인지 혼란스러울 때가 있다. 나 역시 이런 잡스러운 글쓰기를 즐기는 편이다. 잡스러운 글쓰기의 장점은 무엇보다 열린 사고를 확보할 수 있다는 데 있다. 각기 다른 장르가 만나면서 빚어내는 화음, 또는 충돌하는 불협화음은 독자의 상상력을 자극한다. 또다른 장점은 읽기가 즐겁다는 것이다. 일상적인 얘기를 하는 듯 하다가 은근슬쩍 끼어드는 전문적 언술이 어색하지가 않다. 일석이조의 효과라고나 할까. 나는 이런 글쓰기를 ‘퓨전 글쓰기’라고 명명하고 싶다.(누가 먼저 이 용어를 사용한 적이 있던가? 모르겠다.) 퓨전글쓰기의 특징은 (예술)문화를 글쓰기의 배경음으로 사용하는 것이다. 이는 문화현상에 친숙한 현대인에게 유용한 접근법이 될 것이다. 이 퓨전 글쓰기는 일시의 유행현상이 아니라, 학문분과간의 소통과 파괴가 계속되는 한 주류의 글쓰기 중 하나가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일찍이 시인 김정환은 장편의 한국역사서를 쓰면서 이러한 시도를 한 바 있다. 그에게 있어 역사란 과거적 사실 이전에 상상력으로 빚어내는 현재이다. 이는 역사서를 서술하는 그의 시적 문체에서 확인할 수 있다. 그의 아포리즘적인 문체는 젊은 시절 나를 얼마나 매료시켰던가. 이러한 퓨전 글쓰기를 전문적으로(?) 잘하는 작가는 이진경이다. 그는 <필로시네마 혹은 탈주의 철학에 대한 7편의 영화>(새길)에서 7편의 영화를 통해 현대철학의 특징들을 매력적으로 설명한 바 있다. 또 최근에는 <철학과 굴뚝청소부:증보판>(그린비)을 내면서 이전의 같은 제목의 책(새길) 사이 사이에 본문 내용과 호응하거나 충돌하는 도판을 삽입하기도 했다. 진중권도 이러한 퓨전 글쓰기에서 빼놓을 수 없는 작가다. 그의 <미학 오딧세이>(새길)는 철학과 미학이 얼마나 가까이 있는지 알 수 있게 만든다.

이 외에도 물리학자인 정재승의 <과학 콘서트>(동아시아)는 다양한 현실 세계의 예로부터 과학적 원리를 쉽게 접근하게 만드는 탁월한 책이다. 이와 같은 종류의 과학서적으로는 고중숙의 <싸이언스 크로키>(해나무)가 재미있게 읽히는 책이다.

한편 자칭 잡종교수라 칭하는 홍성욱의 문화에세이 <하이브리드 세상 읽기>(안그라픽스)는 이러한 잡스러운 글쓰기의 사상적 배경을 쉽게 설명한 잡서(雜書)다. 이 책을 읽다보면 왜 최근의 젊은 인문 작가들이 잡스러운 글쓰기를 선호하는 지 알게 된다.

퓨전 글쓰기에 해당하는, 가장 최근의 읽은 책은 언어학자 강범모의 <영화마을 언어학교>(동아시아)이다. 어찌 보면 참으로 지루하고 까다로운 언어학적 지식들을 영화이야기를 통해 자연스럽게 접근하게 한다. 전달하기 어려운, 배우기 지루한 내용들을 자연스럽게 배우는 재미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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