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즈를 위하여 - 새롭게 읽는 공산당 선언
황광우.장석준 지음 / 실천문학사 / 2003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실천문학사와 인연이 있긴 있었다. 그러니까 내가 『삶이 보이는 창』에 한국철학의 연재를 끝내고, 아예 내용을 보충하여 단행본을 만들 심산으로 초고본을 가지고 인휘형과 함께 실천문학사를 방문했었다. 그때가 아마 2년이 넘었을 것이다. 어쨌든 출판사에서 대표인 김영현 선배를 만나 이런 저런 얘기를 하던 차, 이곳에서는 나의 책을 내기 힘들겠구나 판단할 수 있었다.

왜 내가 이런 너저분한 얘기를 하냐하면, 당시 얘기 도중 내가 한국철학책 뿐만 아니라 마르크스와 관련하여 책을 한 권 내고 싶다고 은연 중에 이야기했던 것이 기억이 나서다. 당시 나는 마르크스의 저술 중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을 뽑아서 나의 삶이나 오늘날의 현실과 연관된 명상서(?) 겸 해설서를 가벼운 마음으로 날씬하게 만들고 싶었다. 아마도 가제목으로 『마르크스를 달린다』 쯤으로 잡았던 것으로 기억나는데, 어찌되었든 유야무야되고 말았다. 지금도 그 마음을 잃은 것은 아니지만. 그러던 차, 실천문학사에서 황광우와 장석준이 함께 쓴『레즈를 위하여 - 새롭게 읽는 공산당 선언』이 금년 5월달에 출판되어 사서 읽어보게 되니 당시의 나의 모습이 떠올랐던 것이다.

각설하고. 누가 나에게 지금까지 읽었던 책 중에서 가장 아름다운 글을 하나만 꼽아보라고 한다면, 나는 그 중에 하나로 분명히 『공산당 선언』을 선택할 것이다. 내용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문장의 구성력이나 탄탄한 논리력, 그리고 사람을 매료시키는 문체가 삼위일체가 되어 고전의 전범이 되기에 충분한 책이다. 나는 사상적으로 공산당 선언에 매료되었다기보다는 문학적으로 그 책에 매료되었다. 오죽했으면 독일어를 못하는 것을 한탄하며 영어로 된 서적을 찾아 일독을 감행했겠는가. 지금도 그때의 흥분이 고스란히 살아오는 것 같다.

“하나의 유령이 유럽을 배회하고 있다. 공산주의라는 유령이.”라는 괴기스런 문장으로 시작되는 공산당선언은 1장 처음에 “지금까지 모든 사회의 역사는 계급투쟁의 역사다.”라는 단언을 거쳐 “프롤레타리아가 잃은 것이라곤 쇠사슬뿐이요, 얻을 것은 세계이다. 만국의 노동자여, 단결하라!”로 대미를 장식하는 이 선언문은 마르크스가 30살에 작성한 것이다. 젊은 나이에 전세계를 뒤흔들 문장을 작성했던 마르크스가 놀랍고, 부럽고, 그를 대하는 내가 참으로 부끄러웠던으로 기억한다. 지금은? 놀라움과 부러움은 많이 누그러들었지만 부끄러움은 변함이 없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실천문학사에서 나온 <레즈를 위하여>는 오늘날의 젊은이들에게 읽히기 위해 쓰여진 책이다. 그러나 굳이 젊은이들만을 위해서라고 한정할 필요는 없겠다. 청년시절부터 사회운동에 헌신했던 황광우씨가 담담한 수필형식으로 공산당 선언의 명제들을 차분히 해설하고 있는 것이 미덕이라면 미덕이다. ‘선언’도 새롭게 번역해서 실려 있고, 선언과 관련된 오늘날의 논쟁구도도 체계적으로 설명하고 있다. 나는 이 책을 읽으면서 ‘선언’을 읽었다기보다는 황광우씨의 삶의 고백을 보았다고 말하는 것이 더 정직할 것이다.(어디서부터 황광우씨가 쓴 것이고, 어디가 장석준씨가 쓴 것인지 분명하지는 않지만.)

신념을 가지고 산다는 것은 아름다운 일이다. 더욱이 사회가 외면하는 불온한(?) 신념을 가지고 일관된 삶을 산다는 것은 눈물나게 아름다운 일이다. 지은이(들)은 일말의 의심도 없이 자신의 신념을 내보이고 있다. 그(들)의 삶이 놀랍고 부럽다. 그리고 나의 삶이 다시금 부끄럽다. 그런 의미에서 ‘공산당 선언’을 처음 읽었을 때의 나의 감정은 지금도 진행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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