③ 하나 - 거리에서 만난 안경제조사
하루는 거리를 걷다가 이상한 광경을 보게 되었다. 한 사람이 거리를 비틀거리며 주위를 뱅뱅도는 것이다. 그에게 가까이 다가가 보니 그는 희안한 안경을 끼고 있었다. 지나가던 사람들도 그가 신기했는지 그의 주위에 모이기 시작했다. 그러자 그는 자신이 쓰고 있던 희안한 안경을 벗으면서 말하였다.
“ 여러분 나는 안경을 만드는 사람입니다. 이번에는 아주 새로운 안경을 하나 만들어 보았습니다. 멀리도 보고 자세히도 볼 수 있는 안경입니다. 한번 보시겠습니까?”
구경하고 있던 사람 중 하나가 그가 건네주는 안경을 받아 써보았다. 그 사람은 안경을 쓰자마자 비틀거리기 시작했다. 얼마후 그 사람은 안경을 벗어 주인에게 돌려준 후 투덜거리며 가던 길을 가버렸다. 그 때 다른 구경꾼 하나가 안경주인에게 물었다.
“ 아니 당신이 만든 안경이 도대체 무슨 안경입니까? 안경을 쓰자마자 저리 정신이 없으면 무슨 소용이 있겠소?”
그러자 안경주인은 주위에 있는 구경꾼에게 말했다.
“ 방금 전에 안경을 쓰신 분은 이 안경의 원리를 모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안경 쓰는 방법을 알려드리지요. 원리는 간단합니다. 오른쪽에는 현미경 알을 달았고, 왼쪽에는 망원경 알을 달았지요. 그러니까 멀리보고 싶으시면 왼쪽 눈을 감으시고 오른쪽 눈으로만 보시면 십리밖에서 일어나는 일도 훤히 보이고, 자세히 보고 싶으면 오른쪽 눈을 감고 왼쪽 눈으로만 보시면 손바닥에 있는 세균 수도 알아낼 수 있습니다. 인류가 여지껏 만들어낸 발명품 중에 최고라고 할 수 있지요. ”
구경하던 사람들은 이 희안한 렌즈 세공사와 말을 듣고 재미있어했다. 한 사람이 물었다.
“ 그런데 당신은 어쩌다가 그런 안경을 만들게 되었소?”
사물거시증과 사물혐오증
그의 대답은 구경꾼의 기대했던 것과는 달리 심각한 것이었다.
“ 나는 원래 안경알을 전문적으로 만드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세상을 살다보니 안경을 맞추면서 별별 주문을 하는 사람이 많더군요. 어떤 사람은 세상을 멀리볼 수 있는 안경을 맞춰 달라고 하고, 어떤 사람은 세상을 자세히 볼 수 있는 안경을 맞춰달랍니다. 그래서 나는 앞 사람에게는 망원경 알로 안경을 맞춰주고, 뒷 사람에게는 혐미경 알로 안경을 맞춰주었습니다. 그런데 문제가 발생했지요.”
그의 이야기는 점점 우리에게 흥미를 던져주었다.
“ 무슨 문제인지? ”
“ 글쎄 망원경 알을 쓰고 사는 사람들은 사물거시증에 걸려서 제 앞가림을 못하는 거예요.”
“ 사물거시증이라뇨? ”
“ 거 있잖습니까? 사물을 멀리만 보고 자세히 보지 못하니까, 모든 사물이 비슷해보이고, 당장 자기 앞에 돌덩어리가 있어도 못보고 지나치다 넘어지기 일쑤고. 그래서 그 사람은 지금 집안에서 밖을 내다보며 ‘햐 - 좋다’만 연발할 뿐 집 밖으로는 한발짝도 못 나온답니다.”
“ 거 참 안됐군요. 다른 사람은요? ”
“ 그 사람도 불쌍하기는 마찬가지 입니다. 그 사람은 사물혐오증에 걸렸으니까요.”
“ 사물혐오증이요?”
“ 네, 사물을 너무 자세하게 보니까, 사물의 전체를 보지 못하고, 부분 부분만을 보면서 그 사물에 대하여 판단을 내리게 되었지요. 얼마전에는 어여쁘게 생긴 아가씨가 지나가는 걸 보면서, 글쎄, ‘저기 박테리아가 지나간다!’라고 소리소리 지르지 않겠어요. 그리고는 문을 꼭 걸어닫고 안나오더랍니다. 모두가 제 잘못이지요. 그런 문제를 한번에 해결할 방법을 찾고 있는 중입니다. 그래서 이번에는 한 쪽은 망원렌즈로 다른 한쪽은 현미경렌즈를 달았는데 문제는 이 안경을 쓰고서는 두눈을 모두 한꺼번에 뜰 수 없다는 것입니다.”
망원경 철학 현미경 철학
위의 우화에서 나오는 두 인물의 태도를 철학에 비유하자면 망원경철학과 현미경철학이라고 볼 수 있다.
망원경철학은 ‘숲은 보되 나무는 보지 못하는’ 철학이다. 이러한 철학은 낭패를 당하기 쉽상인데, 마치 시험에 임하는 학생이 시험범위의 전체적인 윤곽만을 공부하고 들어갔다가 세부적인 문제가 나왔을 때 낭패를 당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물론 망원경은 매우 유용하다. 전쟁터에서 망원경이 없다면 멀리서 접근하는 적군의 동태를 살피지 못하여 패배하게 되는 치명적인 실수를 범할 수도 있다. 망원경의 위력은 이러한 사태를 예방할 수 있다는 점에서 참으로 놀라운 것이다. 망원경철학은 이처럼 사물을 멀리 그리고 넓게 볼 수 있고 그에 따른 예측을 할 수 있다는 측면에서 힘이 있다. 그러나.....
현미경철학은 역으로 ‘나무는 보되 숲을 보지 못하는’ 철학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철학 역시 낭패 당하기 쉽상인데, 이번에는 지엽적인 문제에만 공부하다가 전체적인 맥락을 묻는 문제에 부딛쳐 곤란을 겪는 학생과 비유할 수 있다. 물론 현미경 역시 맨눈으로는 볼 수 없는 미세한 것들을 관찰할 수 있다는 측면에서 위력을 발휘한다. 이러한 측면에서 보자면 현미경철학은 일반적인 시각에서는 관찰할 수 없는 감추어진 비밀을 드러낸다는 측면에서 힘이 있다. 그러나 역시 그러나 .....
그렇다고 이 두가지 철학을 짬뽕하면 정답이 나올까? 즉 위에 나온 안경제조사의 노력은 성공할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그것은 사냥꾼이 두마리의 토끼를 한꺼번에 잡는 것 만큼이나 불가능하다. 위의 우화가 실패로 끝난 것처럼.
그러나 우리는 종종 망원경철학이나 현미경철학을 찾으려는 것에 더욱 매력을 느낀다. 남들보다 더 멀리 내다볼 수 있다거나 더 세밀히 관찰할 수 있다는 것은 얼마나 매력적인가. 그래서 많은 사람들은 망원경철학이나 현미경철학을 추구하게 되는 지도 모른다. 그러나 한번만 더 생각해 본다면 우리에게 일상적으로 필요한 것은 망원경이나 현미경이 아니라 우리의 시각에 맞는 안경이다. 안경은 망원경이나 현미경처럼 사물을 과장되게 보게 하는 것이 아니라 사물 그대로를 보게 만든다. 사물을 바라보는 우리의 눈이 침침할 때 시각교정을 위해서 필요한 것도 안경이다. 철학도 이 안경과 같다.
위의 우화에 나오는 안경제조사는 자신의 본연의 자세로 돌아가야 한다. 자신이 잘못 맞추어 준 안경을 벗겨내고 그들의 시각에 맞는 안경으로 바꾸어주어야 한다. 자신의 방에 갇혀있는 그들을 일상의 자리로 되돌려야 한다.
철학을 공부하다보면 때로 망원경철학이 필요하기도 하고 현미경철학이 필요하기도 하다. 그러나 그러한 철학이 필요한 것은 바로 우리가 딛고 있는 현실에 올바로 정착하고 출발하기 위해서이다. 생각해보자. 우리는 어떤 안경을 끼고 살아왔는가? 즉 우리는 어떤 철학을 갖고 살아왔는가? 망원경철학? 현미경철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