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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마을 언어학교 - 영화보다 재미있는 언어학 강의
강범모 지음 / 동아시아 / 2003년 4월
평점 :
절판
생각이 잡(雜)스러운 사람들은 글쓰기도 잡(雜)스럽다. 역사서에 시가 출몰하고, 철학서에 미술이 등장한다. 과학서적에 음악이 등장하고, 언어학책인지 영화관련 책인지 혼란스러울 때가 있다. 나 역시 이런 잡스러운 글쓰기를 즐기는 편이다. 잡스러운 글쓰기의 장점은 무엇보다 열린 사고를 확보할 수 있다는 데 있다. 각기 다른 장르가 만나면서 빚어내는 화음, 또는 충돌하는 불협화음은 독자의 상상력을 자극한다. 또다른 장점은 읽기가 즐겁다는 것이다. 일상적인 얘기를 하는 듯 하다가 은근슬쩍 끼어드는 전문적 언술이 어색하지가 않다. 일석이조의 효과라고나 할까. 나는 이런 글쓰기를 ‘퓨전 글쓰기’라고 명명하고 싶다.(누가 먼저 이 용어를 사용한 적이 있던가? 모르겠다.) 퓨전글쓰기의 특징은 (예술)문화를 글쓰기의 배경음으로 사용하는 것이다. 이는 문화현상에 친숙한 현대인에게 유용한 접근법이 될 것이다. 이 퓨전 글쓰기는 일시의 유행현상이 아니라, 학문분과간의 소통과 파괴가 계속되는 한 주류의 글쓰기 중 하나가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일찍이 시인 김정환은 장편의 한국역사서를 쓰면서 이러한 시도를 한 바 있다. 그에게 있어 역사란 과거적 사실 이전에 상상력으로 빚어내는 현재이다. 이는 역사서를 서술하는 그의 시적 문체에서 확인할 수 있다. 그의 아포리즘적인 문체는 젊은 시절 나를 얼마나 매료시켰던가. 이러한 퓨전 글쓰기를 전문적으로(?) 잘하는 작가는 이진경이다. 그는 <필로시네마 혹은 탈주의 철학에 대한 7편의 영화>(새길)에서 7편의 영화를 통해 현대철학의 특징들을 매력적으로 설명한 바 있다. 또 최근에는 <철학과 굴뚝청소부:증보판>(그린비)을 내면서 이전의 같은 제목의 책(새길) 사이 사이에 본문 내용과 호응하거나 충돌하는 도판을 삽입하기도 했다. 진중권도 이러한 퓨전 글쓰기에서 빼놓을 수 없는 작가다. 그의 <미학 오딧세이>(새길)는 철학과 미학이 얼마나 가까이 있는지 알 수 있게 만든다.
이 외에도 물리학자인 정재승의 <과학 콘서트>(동아시아)는 다양한 현실 세계의 예로부터 과학적 원리를 쉽게 접근하게 만드는 탁월한 책이다. 이와 같은 종류의 과학서적으로는 고중숙의 <싸이언스 크로키>(해나무)가 재미있게 읽히는 책이다.
한편 자칭 잡종교수라 칭하는 홍성욱의 문화에세이 <하이브리드 세상 읽기>(안그라픽스)는 이러한 잡스러운 글쓰기의 사상적 배경을 쉽게 설명한 잡서(雜書)다. 이 책을 읽다보면 왜 최근의 젊은 인문 작가들이 잡스러운 글쓰기를 선호하는 지 알게 된다.
퓨전 글쓰기에 해당하는, 가장 최근의 읽은 책은 언어학자 강범모의 <영화마을 언어학교>(동아시아)이다. 어찌 보면 참으로 지루하고 까다로운 언어학적 지식들을 영화이야기를 통해 자연스럽게 접근하게 한다. 전달하기 어려운, 배우기 지루한 내용들을 자연스럽게 배우는 재미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