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 일 없이 사는 아줌마의 사생활
최강윤정 지음 / 부크크(bookk) / 202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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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노자의 도덕경을 공부하는 모임을 4개나 만들어 진행하고 있습니다. 그 중에 제일 나중에 만들어진 모임이 행복한 책방일산점의 책방지기인 신혜진의 도움으로 만들어진 아줌마들의 모임입니다. 6명으로 구성된 모임은 나이와 성격과 활동이 다르지만, 책을 좋아한다는 것, 아니면 적어도 책방을 아지트로 삼아 활동한다는 점에서 일치합니다.

그 맴버 중 한 명인 최강윤정님이 최근에 POD방식으로 사진에세이집을 냈습니다. 제목은 별 일 없이 사는 아줌마의 사생활입니다. 책을 펼치지 안쪽 날개에 작가소개가 재밌습니다. “골목을 달리던 다섯 살 여자 아이는 좁은 길 사이 시간을 달려 반백의 아줌마로 자랐다. 부실한 다리로 동네를 어슬렁거리는 별 일 없는 아줌마로, 잘 하고 싶은 것도, 그리 대단히 잘 살아야 한다는 목표없이 공중분해하는 시간 속에 부유하는 먼지처럼 산다. 그래도 사는 건 재밌고 설렌다는 걸 아는 사람.”

소개글만 보아서는 유한(有閑)마담 같아보이지만, 별 일 없는경지에 도달하기 전에 그에게 온갖 별 일들이 벌어졌음을 글 읽는 내내 절감합니다. 몽골로 간 남편의 사업이 무너지자, 돈이 없어 집을 처분한 후 달랑 20만원을 들고 두 어린 아이들과 해인사 근처로 기차타고 내려간 일, 그곳에서 다행히 좋은 스님을 만나 거지신세는 면했지만, 삶은 늘 가난의 연속이었습니다. 하지만 그 가난 속에 파묻히지 않고 하루하루를 온전히 아이들과 지내며 살아냅니다. 남편이 있는 몽골로 무작정 건너가서 지냈던 시절도 결코 녹록치 않습니다. 계절의 바뀜처럼 총천연색의 삶이 아니라 온통 잿빛 먼지가 뒤덮은 나날을 겨우 살아냅니다. 무심히 창문을 바라보며, 거리의 한산함과 우울함을 무심히 카메라에 담으며. 몽골에서의 삶은 불안과 두려움의 나날이었지만, 오히려 자신의 삶보다는 몽골민중의 희망없음에 더 안타까워합니다.

 

가난한 나라의 백성은 흘러 다니는 눈물 같다. 나라는 개인의 고충을 모른 채 하고, 나라님은 일개 개인의 고충 따위 안중에 없다. 제 배 부르고 자기집 장판에 차곡차곡 돈 쌓아두기만 바쁘다. 아이의 가방엔 가망 없는 미래만 가득 채워져 있지만, 아무도 아이의 미래엔 관심 없다. 당장 모두의 오늘이 허기로 가득 할 테니.”(144)

 

그렇게 아무 것도 없이 빈손으로 국내로 돌아와서 살림살이가 나아진 것도 아닙니다. 부실한 몸과 세월 속에 늙음을 얻어 하루하루 살아갑니다.

이렇게 써놓고 보니 책의 내용이 온통 우울과 비탄, 상처와 원망으로 뒤덮여보일 듯 하지만, 오히려 글은 정반대입니다. 곳곳에서 생명이 싹트고, 웃음소리가 들리고, 하루하루 즐기며, 자신의 불행을 관조하여 행복으로 뒤바꾸는 놀라운 낙관성이 있습니다. 노자가 아줌마로 돌변하면 이런 글을 쓰지 않을까 눈을 비비게 됩니다. 가난 속에서도 풍자와 웃음을 잃지 않았던 장자가 여인이 되었다면, 이런 글이 나올 수 있지 않을까 상상하게 됩니다.

가령, 행복은 유난스럽지 않다. 그저 마주 보며 웃을 수 있는 시간이 있고, 오늘 하루 수고했다. 위로의 말 전할 수 있는 자리가 있어 만족한 한 끼 든든히 채우면 그 뿐이다. 평범한 일상으로 만족하는 사람들은 보통의 삶을 챙기면 그만이다. 행복은 소소한데서 온다. 단순하게 사고, 소소하게 살고, 나누면서 살다보면 무거운 마음은 덜어지고, 가벼운 마음은 채워지게 되어 있더라. 그러면 너무 많은 걱정에 치이지 않아도 좋다.”(248)라는 글을 읽을 때, 그래서 가난은 괜찮다. 돈으로 산 선물이 아닌 마음을 명품으로 만들려 애쓰니까. 그 마음 아는 이들과 나눌 수 있으니 가난은 부족해서 족한 것이더라.”(215)라는 글이 밑줄을 그을 때, 나는 이 목표없이 공중분해하는 시간 속에 부유하는 먼지처럼살아가는 아줌마의 모습에서 화광동진(和光同塵)’의 노자를 읽어내고, ‘부실한 다리로 동네를 어슬렁거리는 별 일 없는 아줌마의 모습에 소요유(逍遙遊)’의 장자를 읽습니다.

 

이 책을 보고(사진집이므로) 읽는(에세이집이므로) 내내 나의 별 일 없이 사는 하루가 반짝생기를 얻었다고 말해야겠네요. 그래서 게으른 몸을 살짝 잊은 채, 늦지 않게 짧은 글을 남겨 이 별 일 없는아줌마에게 응원의 박수를 보냅니다. POD형식으로 책을 냈으니 주문생산이다. 찍는데 일 주일 걸립니다. 참을성이 없고 시간이 아까운 사람은 e-book으로 주문하면 바로 읽을 수 있지요.

"가난한 나라의 백성은 흘러 다니는 눈물 같다. 나라는 개인의 고충을 모른 채 하고, 나라님은 일개 개인의 고충 따위 안중에 없다. 제 배 부르고 자기집 장판에 차곡차곡 돈 쌓아두기만 바쁘다. 아이의 가방엔 가망 없는 미래만 가득 채워져 있지만, 아무도 아이의 미래엔 관심 없다. 당장 모두의 오늘이 허기로 가득 할 테니."(144쪽)

"그래서 가난은 괜찮다. 돈으로 산 선물이 아닌 마음을 명품으로 만들려 애쓰니까. 그 마음 아는 이들과 나눌 수 있으니 가난은 부족해서 족한 것이더라."(215쪽)

"행복은 유난스럽지 않다. 그저 마주 보며 웃을 수 있는 시간이 있고, 오늘 하루 수고했다. 위로의 말 전할 수 있는 자리가 있어 만족한 한 끼 든든히 채우면 그 뿐이다. 평범한 일상으로 만족하는 사람들은 보통의 삶을 챙기면 그만이다. 행복은 소소한데서 온다. 단순하게 사고, 소소하게 살고, 나누면서 살다보면 무거운 마음은 덜어지고, 가벼운 마음은 채워지게 되어 있더라. 그러면 너무 많은 걱정에 치이지 않아도 좋다."(24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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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대한 일들이 지나가고 있습니다 - 땅과 이웃, 시 이야기, 2022 ARKO 문학나눔 선정도서 한티재 산문선 4
김해자 지음 / 한티재 / 202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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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해자 시인(나는 누나라고 부른다)의 세 번째 에세이집 《위대한 일들이 지나가고 있습니다》(한티재, 2022)을 읽습니다. 늘 그리운 사람의 목소리를 글로나마 만나서 가슴이 두근두근하고 온몸이 따뜻해집니다. 코로나 3년 동안 이렇게 살고 계셨구나 새소식을 듣습니다. 그 사이 큰 수술을 또 받으셨구나 알게 되고, 무심한 후배의 속절없는 마음이 아파집니다. 나 힘들다 말할 때 누나는 더 힘든 시기를 넘어오고 있었습니다. 그런데도, 그럼에도 주변에 속 깊고 마음 따뜻한 이웃이 있어 웃으며 지내는 누나를 상상하며 안도의 한숨을 쉽니다. 살아계셨군요.     


3부로 구성된 에세이집은 부담없는 크기에 230쪽 밖에 되지 않아 순식간에 읽힙니다. 1부 ‘시를 심는 사람들’은 시인들의 이야기가 아니라 주변에서 서로를 보살피며 지내는 농촌의 이웃들의 이야기입니다. 이분들의 보살핌 덕분에 누나가 웃음을 잃지 않고 지내고 있다고 생각하니 마치 내 누이들을 보는 듯 마음이 푼푼해집니다. 고스란히 전해지는 이웃분들의 목소리가 정겹습니다. 시는 쓰지 않았지만 시처럼 사시는 분들의 이야기지요. 2부 ‘환하고 맛있고 즐거울 겁니다’는 자장을 조금 넓혀 세상의 이야기로 확장됩니다. 누나가 사는 ‘텃밭 공화국’이야기도 있습니다. ‘귀촌을 묻는 당신께’ 전해주는 팁도 정겹습니다. 백수로도 살 수 있겠구나 생각됩니다. 아내와 더불어 누나가 있는 곳으로 한 번 가봐야겠다 생각했습니다.

3부 ‘방주에 실린 해피랜드’는 더 자장을 넓어 코로나 정국을 이야기하고, 그 속에서 문학하는 자리를 톺아봅니다. 시론(詩論)이라 할 수도 있고, 시론(時論)이라고도 할 수 있는 이야기가 담담하게 펼쳐집니다. 아픈 사람들에게 눈길을 돌리고, 힘든 사람과 함께 하려는 누나의 마음이 전해집니다. 인류의 ‘구원’은 기한이 지나버렸고, 이제 ‘구조’의 시간이 도래했음을, 모두가 낡아버린 한 배를 타고 이 시대를 건너가지만, 그래도 ‘해피랜드’의 ‘희망’을 버리지 않는 이야기입니다.     


읽어볼만 하냐구요? 나는 책을 평가할 자리에 있지 않습니다. 누나는 나에게 종교와 같습니다. 더도 덜도 말고 김해자 누나처럼만 살고 싶습니다. 이 분의 옆자리에 앉아 있는 것만으로도 나는 구원을 받을 수 있을 것만 같습니다. 그러니 책의 품질이나 가치를 묻지 마시기를. 그냥 김해자 시인이 뭔가를 책으로 엮어냈다면 통장을 깨서라도(^^) 구입하시기를 바랍니다. 시인의 책을 구입해서 얼마나 시인에게 도움이 될지는 모르지만, 시인의 생각을 널리 전하는 것은 아마도 시인이 간절히 바라는 것일 겁니다. 책을 읽다보면, 여러분도 저처럼 김해자 시인의 신봉자가 될지도 모르겠네요.      


<추신> 책을 다 읽고 뒷표지까지 읽다가 피식 웃었습니다. 초판 발행일이 3월 21일로 되어 있는데, 내가 이 책을 읽고 있는 날이 3월 18일입니다. 어럅쇼. 나오지도 않은 책을 구입하여 읽고 있네.       

저는 이반 일리치처럼 "지구상에서 지워져 버린 주체에 대해, 그 흔적이 짓밟혀 버렸거나 바람에 날아가 버린 사람들"에 대해 생각합니다. "농민과 유목민, 마을 문화와 가정 생활, 여성과 아이"들의 비밀스런 이야기를, 아무리 역사학자가 연구하려 해도 흔적이 남아 있지 않아 땅속에 묻힌 평범한 사람들의 삶을, 뼈만 앙상한 역사 속에서 숱한 사람들이 속담과 이야기와 수수께끼와 노래 속에 귀를 기울이며 그들의 삶을 조각하려 노력해봅니다.(6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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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개탄에 고기를 구워 먹었다
이수연 지음, 주노 그림 / 소울하우스 / 202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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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은 글과 달라 강한 물질성을 띤다. 글로 볼 때는 별로였던 글도 책으로 엮이면 근사해 보인다. 그래서 사람들은 책을 쓰나보다. 나 역시 30여권에 책을 썼으니, 새로 나온 책을 쥐게 될 때 감동도 덜 하련만. 매번 새 책을 받아보면 가슴이 떨리곤 한다. 이 책이 세상에 나왔으니 많은 독자를 만나 행복했으면 바란다.

내 책도 내 책이거니와, 나와 함께 글을 나누는 글벗이 쓴 책은 받아보는 재미는 쏠쏠하다. 대부분의 작가들은 자신만의 방에서 글을 쓰고 모아 책을 내지만, 나는 글을 쓰고 같이 보고 이야기를 나누는 글벗 모임을 2년이나 지속하고 있다. 처음에는 어색했던 관계가 이제는 제법 친숙해져, 다른 벗들이 써놓은 원고들을 돌려가며 한 두 마디씩 자연스럽게 내뱉게 되었다. 처음에 글쓰기 모임을 가질 때는 주로 내가 글을 읽고 떠들었지만, 이제 세월이 흘러 선생과 제자 관계가 아닌 함께 글을 쓰는 글벗이 되었다. 서로 쓴 글을 이야기하는 분량도 n분에 1정도다. 누가 선생인지 누가 학생인지 이제 구분하지 않는다. 서로 선생이며 학생이다.

때로 쓴소리도 하고, 글이 너무 좋아졌다며 박수도 치고, 글모임 후에는 함께 밥도 먹고 술도 먹는 이 관계는 이제 인생에 둘도 없는 글식구들처럼 되어버렸다. 이번에 나온 이수연 작가의 나는 번개탄에 고기를 구워 먹었다도 우리가 돌려가며 읽고 이야기를 나눴던 글들이 대부분이다. 이미 충분히 이야기를 나눴기에 별반 새로울 것도 없는데, 떡 하니 책으로 나오니 모든 것이 새롭다. 함께 이야기를 나누며 지적한 부분들은 새롭게 단장되어, 근사하게 제 자리를 차지하고 빛나고 있다. 낱글들이 모여 모임글이 되니 질감이 확실히 다르다. A4용지나 휴대폰 화면에서 보았던 글과는 완전 딴판이다.

글쓰기 모임에서 새로 나온 책을 현금 박치기(^^)로 구매하고, 저자 사인을 해달라고 졸라대며, 모임 후에 함께 축하하는 식사를 하며 우리는 연신 좋아 싱글벙글이다. 그래, 우리 모두 글쓰기를 정말 잘했어. 이 얼마나 보람있고 즐거운 일인가. 곁에 있던 다른 글벗들도 연신 군침을 삼키며 자신의 책들도 어서 만들어지기를 속으로 다짐한다.

거의 다 읽은 글인데, 처음부터 찬찬히 다시 읽어본다. 한 꼭지 한 꼭지 읽을 때마다 초고(草稿)를 읽으면서 나누었던 장면들이 자연스럽게 떠오른다. 그래 우리가 여기까지 왔구나. 이수연이 힘써 쓴 글인데, 우리가 함께 쓴 것처럼 착각을 한다. 그래 이 문장이 참 좋았지. 이 문장을 읽을 때 우리 또한 조금은 우울했던 것 같아. 이 문장을 봐. 우리가 킬킬댔던 문장이야. 과연 이 글을 이렇게 고쳤군. 우리는 이 책에 담긴 역사를 안다. 우리가 함께 걸어온 길이다.

하여, 우리는 자신있게 이 책을 독자들에게 권한다. 이 소박하고 아름다운 책을 부디 구매하시라. 그래서 안에 있는 글을 보며 우리처럼 가슴 졸이고 울고 킬킬대며 웃어보시라. 웃는 사이에 각자의 차가운 슬픔이 서서히 녹아내리고, 크지는 않지만 오늘 하루를 살아갈 용기가 생길 것이다. 왜 아니겠는가. 우리 또한 그러했거늘.

 

우리의 글벗 이수연의 세 번째 에세이책 나는 번개탄에 고기를 구워 먹었다가 세상에 나옴을 진심으로 축하한다. 이수연 만세다.

 

<추신> 안쪽 표지에 찍힌 사진은 정말 매력적이다. 항상 이 웃음이 떠나지 않기를. 글벗들과 함께 즐거운 하루하루가 이어지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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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그릇도 배달됩니다 열린어린이 청소년소설 2
박채란 지음 / 열린어린이 / 202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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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호는 평소의 모습으로 되돌아간다. 이젠 상점을 받기 위해 선생님 심부름을 도맡아 하지 않는다. 일주일에 세 번은 배달을 하고, 가끔 운동장 스탠드에서 혼자 오카리나를 분다. 가희는 멀리서 그런 민호를 보곤 한다. 이제야 가희는 민호가 자신과 좀 다른 존재라는 걸 받아들이게 되었다. 이 세계의 질서 바깥에 살고 있는, 온순하지만 누구도 길들일 수 없는. 가희는 알고 있다. 민호와 다시 가가운 사이가 되지는 못할 거라는 것을. 하지만 민호 같은 애가 세상에 있어서 참 다행이라고, 그걸로 충분하다고, 가희는 오래오래 생각했다.(123)

 

박채란 작가의 청소년소설 한 그릇도 배달됩니다를 읽었다. 내가 청소년 철학소설이라는 형태로 5권이나 책을 냈지만 다른 작가의 청소년소설을 읽은 것은 참으로 오랜만에 일이었다. 내 아이들이 청소년 시절에는 청소년소설을 가끔 읽었지만, 아이들이 성장하여 청년이 되어버린 후에는 더욱 청소년소설을 읽지 않은 것 같다.

그럼에도 박채란의 청소년소설을 읽은 이유는 그가 나와 같은 지역에서 활동하는 작가라는 점, 그 활동내용이 나름 매력적이라는 점, 게다가 작년 말에 페미니즘 모임을 같이 했던 점 등 몇 가지를 들 수 있을 것이다. 가장 결정적인 이유는 나의 삶의 태도가 작년 말쯤 조금 바뀌었다는 걸 들어야겠다. 그것은 나의 작품들이 응원을 받아서 내 삶이 풍성해진 것처럼, 내 주변에 소중한 사람들의 작품이나 활동을 응원해주어야겠다는 일종의 작은 다짐이다. 책 한 권 산 것이 얼마나 응원이 되겠냐마는, 작가에게 가장 큰 응원은 바로 그 작품을 구입하여 읽는 것이다.

나는 내가 살고 있는 지역의 문화생태계가 건강하기를 간절히 바란다. 그 소중한 첫걸음은 작가에게는 작품을 구입하여 읽는 것이 될 터이고, 강사에게는 강의를 시간내어 찾아가 듣는 것이 될 터이며, 예술가에게는 예술작품을 감상하는 것이 될 것이다. 이 소소한 응원이 바로 문화생태계를 살리는 길이다.

이번에 박채란의 청소년소설집에는 4편의 단편작품이 수록되어 있다. <사랑은 떨림>, <하루에 추선 번 아니 수만 번>, <한 그릇도 배달됩니다> <횡단보도 앞에 서다> 등이다. 마지막 작품의 주인공이 교사임용고시를 5년째 준비하는 청년이라는 점만 빼면, 모두가 고등학생이 주인공으로 설정되어 있다. 사랑의 대상을 선택하든, 문이과를 선택하든, 취업과 입시를 선택하든, 진로선택의 지속이냐 중단이냐를 선택하든, 모든 작품은 선택의 기로에 놓여있는 주인공들의 이야기다.

어느 시기가 되었든 삶의 기로에서 선택을 하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다. 선택을 하려면 자신의 능력뿐만 아니라 다양한 상황과 변수들도 고려해야 하고, 특히 그 선택이 자신이 진정으로 원하는 것인지 확신이 필요하다. 하지만 그 확신이라는 것이 과연 변하지 않는 것인지 알 수 없다. 특히 다양한 경험이 부족한 청소년들에게는 꿈(이나 확신)이 막연한 경우가 태반이다. 그래서 선택에는 두려움이 따라오기 마련이다. 박채란 작가는 소설 속 청()년을 따뜻한 시선으로 세심하게 바라본다. 그리고 소리없이 응원한다. 그러면서도 손쉬운 해결책을 제시하지는 않는다. 쉽게 연애는 성사되지 않고, 진로선택에 있어서도 난관에 부닥치며, 취업의 길도 만만치 않음을 그대로 드러낸다. 희망은 쉽게 발견되지 않지만, 그래도 따뜻한 관계가 있어 선택에 온기를 부여한다.

어차피 선택은 각자의 몫이지만, 그 어려운 선택을 말없이 따뜻하게 바라보고, 들어주는 것만으로도, 뒤에서 응원해주는 것만으로 무거운 짐을 조금은 덜 수 있을 것 같은 예감이다. 가족의 응원이 되었든, 친구간의 응원이 되었든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해결책이 아니라 따뜻한 온기임을 이야기해주고 있다. 박채란 작가의 건필을 응원한다.


코로나 시기에 이 책이라도 많이 팔려 작가의 집안에 온기가 돌았으면 좋겠다. 박채란 작가의 장기인 빵과 과자만들기의 재료값은 충당되려나?

민호는 평소의 모습으로 되돌아간다. 이젠 상점을 받기 위해 선생님 심부름을 도맡아 하지 않는다. 일주일에 세 번은 배달을 하고, 가끔 운동장 스탠드에서 혼자 오카리나를 분다. 가희는 멀리서 그런 민호를 보곤 한다. 이제야 가희는 민호가 자신과 좀 다른 존재라는 걸 받아들이게 되었다. 이 세계의 질서 바깥에 살고 있는, 온순하지만 누구도 길들일 수 없는. 가희는 알고 있다. 민호와 다시 가가운 사이가 되지는 못할 거라는 것을. 하지만 민호 같은 애가 세상에 있어서 참 다행이라고, 그걸로 충분하다고, 가희는 오래오래 생각했다.(12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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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 나의 작은 테이블이여
김이듬 지음 / 열림원 / 202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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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도 울면서 이 글을 쓰고 있다. 나는 내 몸에서 흐르는 것들을 좋아한다. 노래가 입술에서 흘러나오는 날은 적어졌지만, 눈물과 땀을 흘리는 날이 곱절 많아졌지만, 아무튼 내 몸에서 배출되는 물기들이 좋다. 피와 냉, 오줌도. 글도 내 몸에서 손가락을 통해 흘러나오는 물질 같다. 흘러나오는 이것들이 이따금 구질구질하고 지저분해 보이기는 하지만 살아 있음을 느끼게 해준다. 일기도 아니고 넋두리도 아니고 시는 더더욱 아닌 이 글을 나는 쓴다. 열심히는 아니고 마치 배가 고파서 밥을 먹는 아이처럼. 뭔가 쓰는 것은 사람의 기본적이고 자연스러운 욕구다.(80쪽)    

 

책이 나오기도 전에 미리 구매한 책을 며칠 전에 찾아가 받았다. 농가에서는 이러한 구매법을 ‘입도선매(立稻先賣)’라고 하고, 문화계에서는 예매(豫買)라고 한다. 책방을 운영하는 김이듬 시인의 산문집이다. 표지는 하드카버이고 그림도 분위기 있다. 제목이 《안녕, 나의 작은 테이블이여》 (열림원, 2020)이다. 시인은 산문집을 나에게 주면서 너무 두껍지 않냐고 물었다. 340쪽 되는 분량이니 두꺼워 보이지만, 시원한 편집 덕에 금새 읽힐 것 같다. 게다가 정가가 13,400원. 분량에 비해 겁나(^^) 싸다. 


책방이듬은 얼마 전까지만 해도 일산 호수공원 근처에 있었는데, 월세의 압박을 이기지 못해, 대화동으로 이사하여 두 번째 둥지를 틀었다. 월세는 줄었는데, 평수는 넓어졌고 훨씬 쾌적하다. 이 책은 호수공원 근처에서 책방을 운영했던 1천 여일 동안 썼던 시인의 내밀한 기록(?)이다. 시도 있고, 일기도 있고, 산문도 있고, 단상도 있다. 글의 분량도 제각각이다. 한쪽도 못 되는 것도 있고, 서너 쪽을 넘기는 것도 있다. 부러 분량을 늘이거나 줄이지 않은 시인의 글쓰기가 퍽이나 마음에 든다. 딱 필요한 분량만큼만 쓸 수 있었던 것은 발표를 염두에 두지 않았던 탓이기도 하겠지만, 시인의 환경과 생각의 리듬에 따라 자유롭게 글을 쓴 결과라는 생각이 든다. 나는 김이듬 시인의 이러한 자유로움을 좋아한다.

글에는 호수공원도 종종 등장하는데 – 사실 나도 호수공원이 좋아 일산으로 이사했다 – 시인이 바라보는 호수공원이 신선하다. 너무 좋아 종이 끝을 접어두었던 문장은 이렇다. “관광객들이 보트를 타고 호수에 들어가는 오후에도, 아무도 오지 않는 계절에도, 나는 호숫가에 서 있다. 호수를 좋아하지만 접촉하지 않는다. 내가 몰라도 되는 것을 증명하는 사람과 비밀이 없는 사람을 신뢰하지 않는다. 나는 선을 유지하며 증상 없는 사랑을 실험한다.”(113쪽)

‘증상 없는 사랑’이라는 말은 많은 생각을 하게 한다. 그것은 삶이 무뎌진 결과가 아니라, 삶을 온전히 받아낸 사람이 쓸 수 있는 말이라는 생각이 든다. 작가들이 치기어린(?) 마음으로 시작했던 많은 공간들이 얼마 못 가 현실적인 어려움을 겪으며 무너져내리는 것을 하도 많이 봐와서 3년 넘게 수익도 거의 나지 않는 책방을 운영하고 있는 김이듬시인이 신기했다. 이제는 무너질 만도 한데, 왠 걸, 다시 출발한다. 그것은 고집이 아니라 사랑이다. 시절 지난 인연은 사라졌지만, 새로운 인연들이 빚어내는 이 기적과 같은 새출발의 시점에 바로 이 산문집이 나왔다. 절묘한 타이밍이다. 글은? 물론 놀랄 만큼 좋다. 시인이 산문을 쓰면 이렇게 쓰는구나. 이 책을 읽으며 자주 놀란다.

내 주변에 에세이를 쓰고 싶어하는 예비작가들이 많은데, 그들에게 가장 먼저 추천하고 싶은 책의 목록에 올려놓았다. 길게 쓰지 않아도, 뭔가 교훈을 주지 않아도, 강제로 끝맺음을 하지 않아도 글 자체로 빛날 수 있다는 것을 김이듬의 산문은 증명하고 있다. 세상을 바꿀 만한 사상이 없어도, 삶을 뒤집을 만한 경험이 없어도, 독자를 깜짝 놀라게할 표현이 없어도, 이처럼 절묘하게 자신의 일상을 그려낼 수 있다는 걸 김이듬 시인은 보여주고 있다.

편편이 좋아서 맛있는 음식을 아껴먹듯 야금야금 책을 읽었다. 줄치고 싶은 문장들이 너무 많아 차라리 안 치는 게 낫다고 생각했다. 살짝 그 매력 – 혹은 마력 –을 소개하기 위해 나는 <『사라진느』를 읽고>를 선택한다. 이 글은 한쪽도 안 되는 분량이지만 변화하는 계절 속에 인생관을 담은 빛나는 글이다. 후하게 3문단 중 뒤의 2문단을 소개한다.     


“지난여름 내내 암울했지만, 삶이 없었다고 말해버리면 안 되겠다. 울고 있었지만 지워지는 건 없었다. 빗물에 씻긴 과일의 단맛은 사라진 게 아니다. 달고 따뜻한 빗물로 풀벌레들을 살찌웠다.

이어서 혹한이 닥칠 것이다. 사람은 예견할 수 있다. 영원히 자취를 감추는 것은 없다. 내가 확인할 수 없을 뿐. 사람이라면 깨닫는다. 사라지면서 찰나적으로나마, 순간적 숭고, 순간적 완성이 반복되다 보면 되고 싶은 존재와 되어가는(becoming) 신비가 발생하리라. 성스러움은 인간의 본질이다.”(216~217쪽)    

지금도 울면서 이 글을 쓰고 있다. 나는 내 몸에서 흐르는 것들을 좋아한다. 노래가 입술에서 흘러나오는 날은 적어졌지만, 눈물과 땀을 흘리는 날이 곱절 많아졌지만, 아무튼 내 몸에서 배출되는 물기들이 좋다. 피와 냉, 오줌도. 글도 내 몽에서 손가락을 통해 흘러나오는 물질 같다. 흘러나오는 이것들이 이따금 구질구질하고 지저분해 보이기는 하지만 살아 있음을 느끼게 해준다. 일기도 아니고 넋두리도 아니고 시는 더더욱 아닌 이 글을 나는 쓴다. 열심히는 아니고 마치 배가 고파서 밥을 먹는 아이처럼. 뭔가 쓰는 것은 사람의 기본적이고 자연스러운 욕구다.(80쪽)

"관광객들이 보트를 타고 호수에 들어가는 오후에도, 아무도 오지 않는 계절에도, 나는 호숫가에 서 있다. 호수를 좋아하지만 접촉하지 않는다. 내가 몰라도 되는 것을 증명하는 사람과 비밀이 없는 사람을 신뢰하지 않는다. 나는 선을 유지하며 증상 없는 사랑을 실험한다."(113쪽)

"지난여름 내내 암울했지만, 삶이 없었다고 말해버리면 안 되겠다. 울고 있었지만 지워지는 건 없었다. 빗물에 씻긴 과일의 단맛은 사라진 게 아니다. 달고 따뜻한 빗물로 풀벌레들을 살찌웠다.

이어서 혹한이 닥칠 것이다. 사람은 예견할 수 있다. 영원히 자취를 감추는 것은 없다. 내가 확인할 수 없을 뿐. 사람이라면 깨닫는다. 사라지면서 찰나적으로나마, 순간적 숭고, 순간적 완성이 반복되다 보면 되고 싶은 존재와 되어가는(becoming) 신비가 발생하리라. 성스러움은 인간의 본질이다."(216~21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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