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주말

보헤미안 랩소디를 보고, 김이듬시인 낭독회와 부산비엔날레를 다녀오다.
아 그리고 지난 목요일 독서노트 모임도 있었네.

그래 한 친구는 발달장애를 다룬 책을 이야기했고,
이듬시인은 어린시절 진주에서 아기인형을 업고 다니는 미친년이야기를 했지.
그리고 수직식물정원으로 꾸며진 미술관에서 난민과 아프리카청년의 절규를 들었지.

그러다 페소아 이야기를 잠깐 나누었고, 아니 두 번씩이나 나누었네.
브레히트도 에밀리 디킨슨도 만났네.

표류하는 흑발을 다시 보았지. 무척 처절한 내용이었고, 아니나 다를까 시인이 요구한
페미니스트와 파르티잔, 개의 화자에 집중해보았는데
그녀의 진주사투리와 말 밖으로 나타나는 성격, 일련의 삶의 시선에서 여실히 읽을 수 있었지.

비엔날레는 사실 별로였고, 영상과 설치물 위주라 더 더욱....발품을 한참 팔아야했지.
그 가운데 건질 것이라고는 몇 작품이 없었네. 큐레이터의 설명을 일부러 들어도 그 생경함은 줄어들지 않았지.
이민휘&최윤의 영상작품, 나스치우 모스키토의 아프리카선언, 스마다 드레이푸스의 영상 정도였어.
이내 말라버리는 눈물처럼
흝고 지나치는 감정들처럼

흔적이 자욱, 아니 자국으로...아니면 화인으로 번지면 싶었는지도 몰라.
서정시를 쓰기 힘들어지는지도 모르겠어. 자꾸. 번갈아 뭔가 자꾸 걸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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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의 편지

[ ] 공명- 그와 같은 난세에 깊은 산속에서 책을 읽고 지내는 인간의 삶이 허락되었다는 것은 나에게 놀라움이다. 현실의 삶의 소용돌이를 자기 정신 속에서 진실하게 반영하면서도 그 소용돌이에서 직접 비켜선 자리나 개인을 허락하는 것, 그것이 문화다.....현실세계를 고도의 반성과 사유를 통해서 체계적으로 정리하려는 개인이 자기 바깥의 어떤 권력이나 권위에 의해서 한낱 동원의 대상으로 내몰리지 않아야 된다....자기의 삶을 자신의 손으로 ‘경작‘할 수 있는 자유! 자기 생활의 독립과 품위를 보장하는 문화! 221

[ ] 길에 관한 명상: ‘길들인다‘는 것은 주체가 아닌 것을 주체에게 본질적인 것으로 만든다는 뜻인데, 그 현상을 우리말에서는 ‘길들인다‘고 나타낸다. 밖에 있는 길을 안에 들여놓는다는 표현이다. ‘안‘이란 물론 인간의 안, 인간의 의식, 인간의 감각의 ‘안‘에 ‘들여놓는다‘는 뜻이다. 31 길 ...>길들이기..> 기르기, 이렇게 ‘길‘은 인간의 곁에 가까워지고마침내 인간 자체의 능력, 인간이 자기 안에 갖추게 되는 ‘기술‘이 된다. 이 과정에서 객체였던 것이 주체의 내용이 된다. 32

[ ] 길:하늘에도 길이 있고, 물에도 길이 있고, 땅에도 길이 있고, 짐승들에게도 길이 있으며 짐승과 식물과 사람 사이에도 길이 있게 되었다. 이처럼 ‘길‘이라는 말에는 운동과 규칙성, 객체적인 것과 주체적인 것 그리고 ‘관계‘따위의 - 인간 의식이 세계를 파악하는 중요한 인식 형식이 모두 들어 있다. 그뿐만 아니라 마침내 ‘길‘은 ‘길이‘라는 추상적인 형식에까지 이르는데 이것은 일차적으로 공간적인 개념이면서도 시간적인 개념으로도 사용된다. 그러니까 ‘길‘이라는 말은 실체, 관계, 운동, 시간, 공간, 기술이라는 개념을 모두 가지고 있다. 32, 33

[ ] 길:언어체계란 인간의 경험인 머릿 속의 산과 벌판, 강과 바다를 시간과 공간의 축 위에 표시하기 위한 좌표계이고 낱낱의 단어는 그 지점의 좌표 값이다. 이렇게 해서 인간은 ‘마음‘이라는 혼돈의 공간에 가로세로 줄을 긋고 그 줄의 교차점마다 이정표를 세우는데 그 이정표의 문면이 우리가 낱말이라 부르는 사물이다. 인간의 마음은 그렇게 해서 길을 가지게 되었다. 이제 길은 마음 속에도 있다. 이 마음속의 길은 비가 와도 허물어지지 않고 지진에도 영향을 받지 않는다...‘말‘이라는 것은 어느 문명에서나 신성하고 신비한 힘을 가진 실체로 오랫동안 믿어왔는데, 그것은 이처럼 ‘말‘이라는 것이 ‘길‘이 내면화된 것으로 인류의 경험의 요약이며, 자신의 지식이기 때문이다. ‘길‘은 ‘진리‘ ‘지식‘ ‘힘‘과 같은 뜻으로 쓰이게 된다. 이렇게 쓰일 때의 ‘길‘이란 곧 ‘말‘이다. ‘길‘ ...> ‘말‘..> ‘진리‘라는 길을 밟는다. 35

[ ] 혁명의 본질: 포석 조명희; 타성을 휘어잡고, 그것의 주인이 되자고 할 때 비로소 인간은 짐승에게서 갈라선다. 마음이 없으면 마음의 아픔도 없다. 마음은 아직, ‘밖‘에는 없는 것을 자기 안에서 꿈꾼다. 이 꿈과 현실을 비교한다. 꿈이 현실이 되게 하려고 행동한다. 그는 성공하기도 하고, 좌절하기도 한다. 좌절하더라도 그는 인간이었기 때문에 좌절한 것이다. 그는 인간답게 살았다. 257 노예제도가 나쁘다는 아무런 윤리적 선험 원칙도 없다. 노예들이 싫다고 할 때 비로소 원칙이 생기는 것이다. 노예가 되느냐 자유민이 되느냐, 그것은 취미의 문제다. 적어도 형이상학적인 아무런 근거도 없다. 어느 쪽이 ‘옳다‘는, 다만 노예든 자유민이든 그 속에 있는 자는 계속 그렇게 있고 싶은 타성을 지닌다. 그것을 바꾸려는 시도가 오히려 귀찮음으로 대해지는 경우가 흔히 있다. 316 노예의 달력에는 늘 여름만 있고 자유민의 달력에는 겨울도 있다. 겨울과 폭풍을 두려워하는 자 - 그것이 노예이다. 322 이상 감정이 흐르는 하상에서

볕뉘

흔적들을 다시 보면서 많은 느낌들이 생겨난다. 몇 편의 소설 속에서 작가로서 위상보다는 끊임없이 사유하는 모습이 더 감겨오른다. 아포리즘도 그러하다. 어쩌면 그의 흐름들이 온전히 담겨있는 이 책으로 갈증을 목축이고 있다는 느낌. 더 살펴볼 수밖에 없는 아릿함이 배이기도 한다. 아직 옮기지 못한 밑줄들도 그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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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도일기.아침의 피아노

1. 애도일기

[ ] 주체는 (이건 점점 분명해지는 사실인데) ˝인정을 받으려는˝ 목적을 따라서 행위를 하는 (애를 쓰는) 존재다. 143

[ ] 애도의 슬픔을 (비참한 마음을) 억지로 누르려 하지 말 것(가장 어리석은 건 시간이 지나면 그것들이 없어질 거라는 생각이다), 그것들을 바꾸고 변형시킬 것, 즉 그것들을 정지 상태(정체, 막힘, 똑같은 것의 반복적인 회귀)에서 유동적인 상태로 유도해서 옮겨갈 것.

[ ] 이 슬픔은 절대적 내면성이 완결된 것이다. 그러나 모든 현명한 사회들은 슬픔이 어떻게 밖으로 드러나야 하는지를 미리 정해서 코드화했다. 우리의 사회가 안고 있는 패악은 그 사회가 슬픔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165

[ ] 영혼을 믿지 않는다는 건, 영혼들의 불멸을 믿지 않는다는 건 얼마나 야만적인 일인가! 유물론은 진리이지만 그러나 그 진리는 또 얼마나 어리석은 진리인지! 169

[ ] 누구나 자기만이 알고 있는 아픔의 리듬이 있다. 172

[ ] 마망은 내게 가르쳐 주었었다. 누군가를 사랑하면, 그 사람을 절대로 아프게 해서는 안 된다는 걸. 179

[ ] 아름다움이란 우리가 머릿속에서 상상할 수 있는 최상의 유형. 그러니까 우리가 상상으로 눈앞에 떠올리는 어떤 추상적인 것이 아니다. 아름다움은 그와는 반대로 우리가 상상해볼 수 없는 어떤 새로운 유형. 그러니까 실제가 직접 우리에게 드러내는 어떤 것이다. 프루스트, 생트-뵈브 193

[ ] 마망의 죽음은, 모든 사람들은 죽는다는, 지금까지는 추상적이기만 했던 사실을 확신으로 바꾸어주었다. 그리고 여기에는 그 어떤 예외도 없으므로, 이 논리를 따라서 나 또한 죽어야만 한다는 확신은 어쩐지 마음을 편하게 해준다. 216

[ ] 사진은 어떻게 성스러워지고 모범이 될 수 있는지를 ..> 사진으로 기억되는 건 동일성이 아니다. 그건 그 동일성 안에 들어 있는 믿기 어려운 표현, ˝덕성 virtus˝이다. 230

[ ] 슬픔의 자기순환적인 길 안에 갇혀 있었다. 그러나 나는 언제나 한권의 책을 씀으로써 하나의 작별을 마무리짓곤 했었다. 그것이 나의 방식이었다. - 집요함, 은밀함. 241

[ ] 머리가 뛰어나다는 게 무엇이겠는가. 자기와 함께 지내는 사람에게 아무런 거리낌도 느끼지 않게 해주는 것, 그것보다 더 높은 지능이 어디 있을까. 262


2. 아침의 피아노

[ ] 사랑은 한 단계 더 높아져서 정신이 되어야 한다. 정신으로서의 사랑. 사랑은 정신이고 그럴 때 정신은 행동한다. 27

[ ] 사는 건 늘 새로운 삶을 꿈꾸는 것이었다. 남겨진 시간, 흐르는 시간, 새로운 시간, 그 한가운데 지금 나는 또 그렇게 살아 있다. 28

[ ] 누군가는 말했었다. ˝음 하나를 더하면 기쁨이 되고 음 하나를 빼면 슬픔이 되는 것, 그게 인생이야.˝ 33

[ ] 생의 명랑성 - 우렁찬 정신은 야채 장수처럼 목청으로 제 존재를 보여준다. 그 목청의 정신을 배울 때다. 35

[ ] 사진은 마술이다. 찍으면 아무것도 아닌 것이 사건이 된다. 45

[ ] 물들은 급한 곳에서는 우렁차고 평평한 곳에서는 잠시 머물러 조용히 파문을 만든다. 그러면서도 낮은 곳으로 흐르른 걸 잊지 않는다. 정신이 무엇이고 마음이 무엇인지 알겠다. 정신과 마음이 만나면 아름다움이라는 것도 알겠다. 생이 음악이라는 것도 알겠다. 48 흐르는 것만이 살아 있다. 흘러가는 ‘동안‘의 시간들. 그것이 생의 총량이다. 51

[ ] 사건은 그런 책들 속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그건 위기를 만난 마음속에서 태어나는 ‘사건들‘이다. 이 사건들은 놀랍고 귀하다. 정신과 몸이 함께 떨리는 울림. 이 울림은 모호하지 않다. 종소리처럼 번지고 스미지만 피아노 타음처럼 정확하고 자명하다. ....마음의 사건 - 그건 문장과 악보의 만남이기도 하다. 53

[ ] 정확한 때 정확한 곳을 베어야 합니다. 그러면 칼은 춤이 됩니다....나의 삶은 나만의 것이 아니라 타자들의 것이기도 하다. 79 나의 몸은 관계들 속에서 비로소 내 것이기도 하다. 80

[ ] 환자의 주체성은 패러독스의 논리를 필요로 한다. 생의 근원적 덧없음과 생의 절대적 존재성, 그 사이에서 환자의 주체성은 새로운 삶의 영토를 연다. 83 투병이라는 말은 옳지 않다...사랑이 그렇듯 병과도 잘 이별하는 일이 중요하다. 잘 헤어지고 잘 떠나보내는 일이 중요하다. 미워하지는 않지만 함께 살 수는 없는 것이 있다. 그것들과의 불가능한 사랑이 필요하다. 90 환자는 투명한 주체다. 그는 그에게 일어나고 다가오는 모든 것을 통과시킨다. 환자의 주체는 종결을 각오한다. 그러나 그 종결에게 항복하지 않는다. 환자의 주체는 사랑의 주체다. 그는 사랑의 마음을 결코 잃어버리지 않는다. 환자의 주체는 미적 주체다. 그는 자기와 세상의 아름다움을 포기하지 않는다. 101

[ ] 하모니는 관계다. 관계는 모두가 음악이다. 105

[ ] 삶의 향연이다. 너는 초대받은 손님이다. 귀한 손님답게 우아하게 살아가라. 119 생은 과정이지 미리 결정된 시스템이 아니다. 121

[ ] 롤랑바르트의 애도일기: 슬픔의 셀러브레이션이다. 이 텍스트가 말하고자 하는 건 명확하다. 그건 무력한 상실감과 우울의 고통이 아니다. 그건 사랑을 잃고 ‘비로소 나는 귀중한 주체가 되었다‘는 사랑과 존재의 역설이다. 186

[ ] 선한 사람이 된다는 건 온전히 기쁜 사람이 된다는 것이다. 선함이 사랑하는 정신의 상태라면 기쁨은 사랑받는 육체의 상태이기 때문이다. 194

[ ] ˝...허리가 아픈데 어떻게 바다 일을 하시나요? ˝늙은 해녀가 말한다.˝물질을 사람 힘으로 하는가. 물 힘으로 하는 거지....˝ 216

[ ] 그래. 나는 사랑의 주체다. 사랑의 마음을 잃지 말 것. 그걸 늘 가슴에 꼭 간직할 것. 268


볕뉘. 철학아카데미 대표의 작고소식을 듣다. 검색하다보니 그가 번역한 롤랑바르트의 애도일기. 그리고 아침의 피아노가 들어왔다. 두 권의 애도일기. 가까운 지인을 보낸지 해 반이 가까워온다. 아직도 여진이 있어 울컥거리기도 하고, 그 시장통을 지나면 못내 그립다. 벗의 말 가에 그가 걸리기라도 하면 그만.... 제목은 김진영고인의 책의 마지막 대목이다. ‘내 마음은 편안하다.˝ 삶은 죽음 부근에서 점점 더 선명하게 다가오기도 한다. 두 편의 일기는 그 자장 속에 있는 슬픔이 삶을 얼마나 애잔하게 하고, 흔히 잊혀지는 삶의 농밀함을 다시 불러낸다. 어머니에 대한 간절함. 아니 분신이기도 했던 아들 바르트 역시 몇 년 뒤에 교통사고로 세상을 뜨게 된다. 그렇게 죽음은 불쑥불쑥 다가오기도 한다. 마음을 여미며 밑줄을 옮겨본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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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원주의자의 우주

1.

[ ] 진리는 ‘절대적‘ 실재 안에서 발견되고 실재를 반사하는 종류의 진리가 아니라, 삶의 구체적인 맥락 안에서 개인들이 특정한 실제적 결과를 추구하면서 행동할 때 선택하고 결정함으로써 획득한 산물이다. 다시 말해 성공적일 경우 개인들은 실천을 통해 진리를 생성한다고 말할 수 있다. 29 제임스가 파악하는 실재는 인간과 협력 관계를 유지하면서 주변 환경 안에서 시간을 따라 ‘성장‘한다. 30 진리의 ‘현금가치‘ 30 프래그머티스트의 진리가 인간 중심적인 것으로 축소되지 않는 이유는 우리의 경험들이 개별적으로 이루어짐에도 불구하고 그 결과물들은 계기적 흐름 속에서 하나의 전체를 이루기 때문이다. 전체론자인 제임스는 이 순간, 이 상황에서의 만족이나 실용성을 한 개념이 지닌 모든 것이라고 보지 않기 때문이다. 31

[ ] 첫째. 변화무쌍한 감각 경험들의 흐름이다. 이 재료에 대한 우리의 믿음은 진리-생성으로 귀결된다. 둘째 부분은 감각들 간의, 그리고 그것들의 심적 표상들 간에 형성되는 관계들이다. 영원한 불변적 관계들...이 관계들은 고정된 것임에도 우리는 자유롭게 강조점을 달리하거나 상이한 조합을 만들어낼 수 있다. 마치 작곡가들이 조옮김을 하거나 전조 또는 이조할 수 있는 것처럼 말이다. 셋째 부분은 과거의 진리들로서, 우리가 당면한 새로운 탐구가 설명하거나 보충해야 할 주제 항목들이다. 우리가 실재라고 부르는 것은 이 세 종류의 가닥들이 서로 맞물리면서 산출되는 결과물들이다. 31

[ ] 경험된 삶의 실재적 단위들은 지성주의적 논리학이 계산하는 단위들과 같은 것이 아니다. 어떤 단위들을 발견하려 한다면, 넓게 시간적 격차를 두고 관측해야 한다. ....그 격차 자체는 지성주의적 허구일 뿐으로, 그 중간 시간이 채워지는 경험의 연속적 낱장으로부터 추상함으로써만 얻어질 수 있다. 그것은 처음에는 윌리엄과 헨리에 의해, 그 다음에 윌리엄, 헨리, 그리고 존에 의해, 그리고 그 다음에는 헨리와 존, 그리고 그 다음에는 존과 피터, 그런 식으로 따로 운반된 통나무와도 같다. 그러나 경험의 모든 실재적 단위들은 중첩된다. 39

[ ] 개인적 역사는 시간적 변화의 과정이고, 변화 자체는 직접 경험되는 사물들 중 하나이다. 그러나 연속적 전이는 일종의 연접 관계이다. 그리고 급진적 경험주의자가 된다는 것은 다른 모든 것을 충성스럽게 견지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 관계를 견고히 지킨다는 것은 그것을 액면가로 취급하는 것을 뜻한다. 43 몸의 활동성을 개시함을 통해서만 사고와 느낌은 세계의 나머지 부분들의 활동을 변화시키기 시작할 수 있다. 몸은 폭풍의 눈, 조직들의 기원, 모든 경험 행렬에서 항상 강세가 주어지는 지점이다. 모든 것은 몸을 중심으로 돌고, 그것의 관점에서 체험된다. 44


2. 베르그송과 지성주의에 대한 비판:



[ ] 단순명료한 스타일: 단순 명료성이란 보플이나 주름없이 사고를 뒤따르는 언어 구사력의 유연성이라는 것을 그 논평자는 깨닫지 못했던 것 같다. 맨 처음에 독자들은 사물들을 묘사하는 베르그송의 방식이 보여주는 명료성에 강한 인상을 받게 되어 있다...그것은 기적이고, 그는 진짜 마술사이다. 223

[ ] 제논의 역설, 칸트의 이율배반....우리가 즉각적으로 얻게 되는 우리의 모든 감각 경험은 지작의 비연속적인 맥에 따라 변하고, 일정한 양의 증가나 감소 자체를 감지할 수 있으므로, 각각에 대해 우리는 특정한 정도의 증가나 감소를 실제로 느껴가면서, ‘좀 더 많이, 많이, 많이‘ 또는 ‘좀 더 적게, 적게, 적게˝라고 말한다. 225 감각 경험은 한 방울씩 우리에게 다가온다. 시간 자체도 한 방울씩 다가온다. 226 물론 신체는 운동을 통해 그 지점에 도달한다. 하지만 숫자상으로 얼마나 증배되든지, 사고된 지점들은 운동의 요소를 전혀 포함하지 않고, 따라서 논의에서 오직 위치만을 고려하는 제논은 우리의 지성이 운동을 비-실재로서 부정해버린다는 것 외에 달리 어떤말도 할 수 없다. 228 불연속적인 것으로부터 연속적인 존재를 만들 수 없고, 당신이 가진 개념들은 불연속적이기 때문이다. 229 정말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느지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 우리는 간격들을 들여다보아야 한다고 베르그송은 끈질기게 주장하지만, 수학자는 간격들의 끄트머리만을 본다. 그는 다만 몇 가ㅣ 결가를 고정시킨 다음, 곡선에 점을 찍고 보간하고, 투사지 그림으로 실재를 치환할 뿐이다. 230우리의 지성이 감각 자료에 요구하는 무한성은 구조에 관한 과거와 현재의 무한성이라고보다는 미래의 잠재적 무한서이다 232

[ ] 칸트는 그 해결책을 우리의 경험 외부와 경험 이전에, 즉 우리의 경험의 원이 되는 물자체에서 찾았던 반면, 그의 일원론적 계승자들은 모두 경험의 절대적 완성으로서 경험이후에, 또는 그것이 아니라면 이념적 유의미성으로 경험 안에 바로 지금도 암묵적으로 내재하는 것으로 생각했다. 233 논리학은 일차적으로 개념들 간의 관계를 구축하고, 자연적인 사실들 간의 관게에 대해서는 이차적으로만, 혹은 사실들이 이미 개념에 의해 동일시되고 그것에 의해 정의되는 한에서 관계를 구축하기 때문에, 당연히 그 관계들은 개념적 방법에 적합하거나 부적합하거나 할 수밖에 없다....개념들에 의해 삶을 이해하는 것은 삶의 움직임을 정지시키고, 마치 가위로 자르듯 그것을 조각내고, 그 조각들을 우리의 논리적 식물 표본집 안에 고정시켜놓는 것과도 같은데, 그렇게 되면 우리는 그 조각들을 건조된 표본처럼 서로 비교하면서, 그들 중 어느 것이 정태적으로 포함되고 어느 것이 제외되는지를 구별할 수 있다. 이런 식의 취급 방법은 회고적이고 사후검시 같은 거시 된다. 236 실제로 우리가 하는 일은 실재를 더 잘 운용하기 위해 우리의 개념 체계로 실재에 마구를 씌우는 것이다239 도덕적 사실들을 개념적으로 다루려면, .우리는 우선 그 개념을 변형시켜 뇌도해나 물리적 은유로 대체하고, 관념을 원자로, 관심을 기계적 힘으로, 우리의 의식적인 ‘자아‘를 ‘흐름‘으로, 하는 식으로 다루어야 한다. 239

[ 2 ] 개념적 대상이라고 하는 것들 간의 관계는 차이 또는 동일성, 일치 또는 모순, 포함 또는 배제 같은 , 오로지 비교할 뿐인 정태적 관계이기 때문이다. 개념의 영역에서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거기 있는 관계들은 ‘영원한‘ 것들 뿐이다. 242 개념화를 떠나 지각소와 결합함으로써 고차적 감각들은 ..우리의 눈과 귀 또한 독자적인 영광의 세계로 나아가는 문을 열어준다. 즉 그 덕택에 음악과 장식 미술이 탄생하고, 삶의 가치가 믿을 수 없을 정도로 고양될 수 있게 된다. 심지어 개념적인 세게는 가치와 동기의 새로운 영역을 우리의 삶에 선사한다....새로운 관심들과 면려, 그리고 힘과 숭고, 그리고 찬탄의 감정들이 샘솟는 것이다. 243 활동과 변화의 삶 전체의 내면으로 개념적 탐구가 침투할 수 없다는 것, 그리고 바로 그 사실이 직접적인 감성의 손으로 공감적인 감지로 나아가는 길을 스스로 열어준다. 244 당신이 실재를 알고자 한다면, 실재의 흐름 자체, 즉 오직 불변적인 것만이 탁월하다는 기이한 신념때문에 플라톤주의가 늘 경시해온 그 흐름 안으로 다시 뛰어들어야 한다고 베르그송은 말한다. 245

[ 1 ] 개념화할 때 우리는 자르고 고정하며, 우리가 고정한 것 외에 다른 모든 것을 배제한다. 개념이란 그것-그리고-그 외의 다른 것은 없음을 의미한다. 개념적으로, 시간은 공간을 배제하고, 운동과 정지는 서로를 배제하며, 점근은 접촉을, 현전은 부재를, 통일은 다자성을, 독립은 연결을, ‘나의 것‘은 ‘너의 것‘을, 이 연결은 저 연결을 - 이런 식으로 무한정하게 계속된다. 그 반면에 삶의 진짜 구체적인 감각 흐름에서 경험들은 서로에 침투하므로 어느 것이 배제되고 어느 것이 배제되지 않았는지 파악하기가 쉽지 않다. 예를 들면 과거와 미래는 우리가 현재라고 이름 붙인 경계에 의해 개념적으로 분리되고, 그 경게의 반대편들을 점유하는 것으로 정의되지만, 아무리 짧은 순간이라 해도, 경험 전체를 통틀어 그 둘은 어느 정도 서로 공존한다. 246, 247 경험의 모든 조각은 고유한 특질, 지속, 연장, 강도, 긴급성, 명료성, 그리고 그 밖의 다른 많은 국면들을 갖고 있어서, 그 조각들 중 어느 것도 언어화된 우리의 논리학이 견지하는 고립상태로 존재할 수 없는 것이 아닌가? 그것들은 오직 뒤섞인 채로만 존재한다. 실재는 항상 동일성과 차이의 삼투 또는 회류 상태에 있다.248 삶에서 개별 사물들은 매 순간 서로 소통할 수 있고 또 실제로 소통한다. 250

[ 3 ] 생동하는 공감에 의해 한 인물의 팽창하는 중심부, 또는 베르그송이 한 인간의 엘랑 비탈이라고 부르는 것에 다가서보라....마찬가지로 어떤 사람의 철학적 비전의 중심부에 당신 자신을 위치시켜보라..그러면 당신은 그 비전이 그 사람으로 하여금 쓰거나 말하게 만들었던 상이한 모든 것을 즉시 이해할 수 있다..당신은 마치 건물 위를 기어다닌 근시안적인 개미처럼, 사물의 표면을 기면서 미시적인 균열이나 틈새 속을 헤집고 들어가, 오직 비일관성만을 발견할 뿐, 중심부가 존재한다는 것을 전혀 짐작하지도 못한다...진실로 존재하는 것은 이미 만들어진 것들이 아니라 만들어지고 있는 것들이다. 253 어느 경우이든지 한 번 이런 생명의 움직임에 적응하면, 당신은 사물이 생겨나고 자라가는 것을 가리켜 베르그송이 드브니르 레알:실재적 생성이라고 부른 것이 무슨 뜻인지 알게 될 것이다. 철학은 실재의 운동을 이런 식으로 생동적으로 이해하도록 진력해야 한다. 254 태초에 행위가 있었다. 254


볕뉘. 급진적 경험주의(근본적 경험론에 관한 시론)에 이어 경험의 흐름, 경험의 방울에 대한 부분을 응시해본다. 그 근저는 베르그송으로 이어져 있다. 짧은 단락이지만 앞 뒤장 의식의 복합성이나 경험의 연속성....그리고 부록의 일부는 급진적 경험주의에 있는 내용들이 포함되어 있다. 올해 작고하신 최인훈의 [바다의 편지]도 함께 보고 있는데 감정이 흐르는 하상이라는 대목이 그의 아포리즘으로 가득하다. 모두가 언어는 그 위로 감정이 흘러가는 하상이라고 시작하며 그 바닥(하상)의 곡절을 다루고 있다. 어쩌면 우리는 감정이 흐르는 강물을 보려고 하거나 그 위에 스스로를 띄워보려는 노력조차 하지 않은 것일수도 있겠다싶다. 위의 글가운데 2번 대목(2.1, 2.2, 2.3)이 베르그송을 반복하면서 간결하게 소개한 대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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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이라기보다 그림이었고 찍은 것이라기보다 그린 것에 가까웠고 작 가들의 일관된 작품세계가 돋보인다. 짧은 전시였고, 알려지지 않아 아쉬운 전시. 제2회 사진의 섬, 송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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