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보 외서부에서 존재와 무를 샀다. Being and Nothingness. 사르트르는 책 제목에 관한한 나와 상극이다. 존재와 무, 구토, 변증법적 이성 비판, 자유에의 길... 지하철에서 펴들고 읽기에는 책 제목이 너무 야하다. 

Introduction을 다 읽었다. 마치 시사 주간지를 읽는 것처럼 속도감있게 읽힌다. 그렇게 읽었다고 착각하고 있다가 잠시 책을 내려 놓고 보면 머리에 남아 있는 것이 아무 것도 없음을 깨닫게 된다. 지하철 안이다. 읽은 페이지의 두께에 흐뭇해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

대학 1학년 안팎 때 한국어판 "존재와 무" 서론을 읽었던 것 같다. 그 뒤로 몇번 다시 시도를 했을 것이지만 서론 이상을 읽은 기억은 없다. 서론의 처음 몇 페이지는 그럭 저럭 읽었을 것이고, 그 뒤 페이지들은 그저 눈으로 활자를 따라 읽는 정도였을 것이다. 

사실 서론의 그 몇 페이지가 사르트르에 대한 나의 이해의 거의 전부다. 그리고 그 몇 페이지는 내게 어마어마한 영향을 끼쳤다. 지금 이 블로그에도 그 흔적이 곳곳에 남아 있다. 

예를 들면 이렇다. 본질이란 현상을 파고 들어가야 발견할 수 있는 그런 것이 아니다. 그것은 드러난 것들의 총체다. 프루스트가 천재라고 할 때, 그 천재는 작가로서의 탁월한 능력 따위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프루스트가 생산한 것들의 총체를 뜻한다. 이는 굉장히 엄정한 윤리학을 내포한다. 그것은 변명의 가능성을 폐기한다. "그는 뛰어난 재능을 갖고 있었지만..." 이런 말은 불가능하다. "그를 돕고 싶었지만..." 이런 말도 불가능하다. "나는 원래 이런 사람이지만..." 이런 말 하지 말라! 당신의 존재란 what you are가 아니라 all you've done일 뿐이다.

나는 아직도 이 이론 근방에서 헤매고 있다. 아마 내가 무지하게 게으른 사람임을 뜻하는 것이리라. 영문판 "존재와 무"를 읽으며 나 자신의 그런 게으름, 혹은 변화에 있어 철저한 무능력 따위를 느꼈다. 부지런해야 겠다. 이 책 무지하게 두텁다. 역시 부지런해야 한다는 자각을 준다. 이 책, 숱하게 오해되고 있다고 겉표지에 나와 있다. 가짜가 되기는 정말 쉽다는 뜻으로 받아들인다. 읽지도 않은 책 표지들을 죽 나열하는 것처럼 자기비하적인 일이 또 있을까? 이런 자기비하를 일삼는 사람들은 매우 흔하다. 책의 표지를 사진으로 찍는 것은 그 책을 통독하는 것보다 훨씬 쉽기 때문일 것이다. 나는 그런 사람들을 존경하지 않는다. 스피노자 말대로 추구할 가치가 있는 것은 힘들고, 힘든 만큼이나 드문 것이리라. 부지런 하자. 그런 면에서 사르트르는 존경할 만한 사람이다. 아마 사르트르가 글을 쓰던 카페에 가서 사진을 찍는 사람보다 거기 앉아서 1000 페이지 분량의 책을 써대던 사르트르가, 어떤 관점에서는 더 훌륭한 사람이리라. 이 논리의 정당화를 요구하는가? 나는 불가능하다. 반대로 내가 당신에게 당신 논리의 정당화를 요구해도 되겠는가? 당신은 나의 시선을 피하는 것 같다. 당신은 열심히 책 표지를 사진으로 찍어 올리며 "앞으로 읽을" 책이라고 말하라. 그리고 나를 피하라. 누구든, 그러므로 나도 어떤 식으로든 당신을 판단할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나는 당신을 당신이 찍어 놀린 책 표지 사진으로가 아니라 what you've read로 판단하게 될 터이니까. 부지런해야 겠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투표날 오전에 테레비에서 총선에서 새누리당이 참패하면 박근혜 대세론이 흔들릴 것이며 그러면 대안으로 김문수 등등이 부각될 것이라는 이야기가 나오더라. 그때 나는 어라, 그러면 안되는데... 하는 생각을 했었다. 박근혜가 여권 대통령 후보로 나와줘야지, 비박근혜면 여당이 대선에서 이길 지도 모른다... 차라리 새누리당이 총선에서 선전해서 박근혜가 새누리당의 유일한 대안으로 계속 남아있는 게 낫겠다...


그런데 총선 결과는 새누리당의, 누구도 짐작 못한 압승. 그리고 그것은, 누구도 토달 여지 없이 완벽한 박근혜의 승리. 더 커다란 낭패는, 여당에 과반마저 넘겨주어 대선에서 야당이 승리한다 하더라도 정권의 힘을 미리부터 반감하고 들어가야 한다는 것. 아마 최악의 낭패는, 이제 박근혜의 힘을 인정하고, 그가 대통령이 되는 것도 충분히 가능하고, 설사 그렇게 되더라도 그다지 나쁘지 않을 것이라고, 조지 오웰의 "1984" 마지막 장면처럼 체념해 버린 사람들이 무척 많아졌다는 것. -우리는 우리 시대에서 상상도 못했던 엄청난 괴력을 가진 사람의 존재를 인식하게 되었다. 자, 이제 그 앞으로 가서, 하찮은 자존심때문에 차마 인정하지 못했던 우리의 경외를 고백하자!


갑자기 대선까지 시간이 너무 짧게 남았다는 위기감이 든다. 박근혜가 보여준 초인간적인 괴력의 기억이 엷어지기에는 너무 짧은 시간이다. 야권이 준비하고 있을 박근혜 침몰 프로젝트(정수 장학회 문제 등등)는 오히려 역풍을 맞을 것이다. 그리고 이 괴력의 기억을 증폭할 궁리를 하고 있을 새누리당 사람들은 분명 이런 문제들을 가장 극적인 방식으로 털고 갈 수 있도록 무대를 마련하고 있을 것이다. 자, 대의를 위해 이런 사소한 시비꺼리는 과감하게, 깨끗하게 털어버립시다! 과연! 그릇이 된 사람이야! 


그러나 이명박이 재앙이듯 박근혜도 재앙이라는 사실은 전혀 변하지 않는다. 박근혜는 사안을 합리적으로 판단할 능력이 전무하다는 우리의 확신을 단 한번도 배신한 적이 없다. 그리고 그를 신처럼 받아들이는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있다("친박"이라는 이름의 당이 출현했었다는 사실이 무엇을 뜻하는가?). 이보다 확실하게 실패할 조건을 구비하고 있는 정치인이 있었는가? 


쳇... 야당은 카리스마 있고, 전 연령대에 감동을 줄 수 있는 대선 주자를 중심으로 뭉쳐야 할 거다. 이명박을 까지도 말고, 박근혜를 까지도 말고, 너무 진보적인 정책도 내놓지 말고, 인물 대 인물로 붙어서 박근혜보다 더 감동을 줄 수 있는 후보를 내놓아야 할 거다. -정책이 아니라 인물에 기대야 한다고 주장하는 나는 확실히 늙었다. 다른 대안이 있느냐고 항변하는 이 논리는 언젠가 많이 들어본 흘러간 곡조다. 쳇...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1. 거기 있는 한 대목. 이 노트가 내 사후에 출판되어 사람들이 읽고 나서 이렇게들 말하겠지, 사르트르라는 인간 참 피곤한 성격이군. 그때 당신(보봐르)이 사르트르도 나름 부드러운 남자였다는 주석을 달아주어야 할 거요...


2. 그러나... 사르트르의 이 일기를 편집하여 거기에 주석을 달 권리를 가진 사람은 보봐르가 아니라 사르트르의 마지막 여인이자 수양딸인 아케임(이름이 맞나?)이었다는 거...


3. 아마 사르트르보다 더 멍청한 짓을 하고 있는 것은 나일 듯. 정말 피곤한 성격의 사람임을 이렇듯 뻔뻔하게 공개하고 있으니...  


4. 오늘 총선. 야당을 찍었지만 현재 보아하니 지는 분위기. 실망. 그러나 크게 실망하지는 않는다. 각자에게는 각자의 몫이 있으니. 그 몫은 다른 누가 지는 것이 아닐 테니. 우리는 이명박이라는 크나큰 수업료를 내고 민주주의에 대해 공부했다. 그러나 충분히 배우지는 못한 것 같다. 우리는 기꺼이 더 큰 수업료를 낼 준비를 하고 있으니. 그러나 이 또한 건방진 말이다. 수업료 운운은 한국 국민들의 일반 수준이 나보다 낮다는 것을 전제하고 있는 것이니. 그러나 위악보다는 거만이 나을 듯 하다. 사람들은 한국은 아직 멀었다고 말한다. 내가 보기에는 철없는 낙관같다. 시간이 지나면 나아질 거라는 근거 없는 낙관. 여기까지 말하자.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교보 외서부에 비트겐쉬타인의 "탐구"를 사러 갔는데 "Jean-Paul Sartre War Diaries Notebooks"가 눈에 뜨였다. 이런 책이 있다는 것도 처음 알았다. 책 뒷표지를 보니, 사르뜨르는 이 노트에 철학, 문학, 정치, 역사, 자전적 이야기 등의 다양한 주제에 대해 적어놓았다고 되어 있다. 영국에서 비트겐쉬타인에 대한 논문을 쓸 때 생각이 났다. 비트겐쉬타인의 비공식적 육성들(그가 직접 쓴 노트들, 편지들, 구술한 메모들, 그와 대화를 나눈 사람들이 기록해 놓은 노트들 등등)을 참조할 수 없었다면 나는 내가 지금도 그 진리성을 확신하고 있는 나의 작은 논문을 결코 써내지 못했을 것이다. 바로 사버릴 수 밖에 없었다. 


(나는 나의 작은 논문을 쓰면서 진행 상황을 어느 정도 이 블로그에 기록해 놓았고, 또 초고의 몇 가지 버전을 나에게 보내는 메일의 첨부 형태로 저장해 놓았다. 그럼에도 그러한 것들의 총합내지 점진적 발전이 완성고를 형성하지 못한다는 것을 안다. 즉, 매일 매일, 매 시간 단위로 진전을 기록하더라도 진전들 사이에, 부정합처럼, 점진적인 방식으로는 도저히 기록할 수 없는 비약이 있을 수 밖에 없음을 나는 안다. 그러한 비약이 없다면 그 작품은, 말 그대로 "ordinary"할 뿐일 게다. 그러한 비약을 통해서 작품은 나에게서 독립한다. 나는 작품에 대해 타자가 된다. 우리는 그 타자성을 추구해야 하고, 나의 경험으로 볼 때 그러한 타자성의 경험은, 역설적이게도 내가 나 자신 안으로 깊게 침투함을 통해서만 이루어 질 수 있다. 그리고 자기 안으로 깊게, 철저하게, 무자비하게 침투해 들어가기 위해서는 용기가 필요하다. 혹자는 그것을 실존, 고독, 단독자 개념으로 이야기할 지도 모르겠다만... -와, 이렇게 거창하게 이야기하다니! 나는 내가 이룬 것에 대해서 말하는 것이 아니라(그것은 너무도 너무도 보잘 것이 없다) 내가 느낀 타자성의 경험에 대해서 얘기하는 것이니까... 양해를.)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1. 커플들.
지하철 옆자리에 대학생으로 보이는 커플이 앉아 있다. 여자가 남자에게 무엇인가를 계속 이야기한다. 머리 모양, 잠바 색깔… 이런 사소한 것들 일텐데 나는 책을 읽느라 듣지를 못한다. 그러다 잠시 암전. 그리고 남자의 낮고 분명한 목소리. 나는 화내고 싸우고 이런 것 싫어한다, 너는 왜 자꾸 나한테 화를 내느냐. 여자의 당황한 목소리. 싸우고 그래야 발전도 있고 그런 거 아니냐. 여자가 남자를 무척 좋아하는 것 같다. 남자의 몸이 여자의 몸에서 공간적으로 멀어지는 것을 느낀다. 나는 책으로 얼굴을 가리다 급기야 자리에서 일어나 딴 칸으로 가야 했다. 웃음을 참을 수 없었으므로.

지하철 안. 서서 책을 읽고 있었다. 내 앞에 자리가 났다. 황급히 나를 제지하는 손길을 느낀다. 대학생 정도로 보이는 젊은 남자. 나는 책장으로 다시 눈길을 돌린다. 남자가 여자를 데려와 빈 자리에 앉힌다. 남자는 내 옆에 서 있다. 두 손에 커피 두 잔을 들고. 여자는 자리에서 스마트폰을 만지작거리고 있다. 자신이 소중하게 다루어지고 있다는 사실에 행복을 느끼고 있겠지. 아니면 너 정도 스펙에 나 정도 여자와 같이 있으려면 그 정도는 해야 해, 라고 생각하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감히 말하자면, 커플1의 여자와 커플2의 남자는 사랑을 하는 방법, 혹은, 같은 말이지만 사랑을 표현하는 방법을 모르는 것 같다. 그대의 사랑의 표현이 상대방을 힘들게 하거나, 스스로를 비참하게 만든다면, 그리하여 스스로를 사랑받는 사람으로 만들지 못한다면 그것은 사랑이 아니라, 차라리 비극이다. -칼 마르크스의 말이다. 덧붙이자면 비극은 미성숙의 표현이다. 성숙한 사람만이 사랑을 할 수 있다. 스피노자나 동양의 수많은 사상서들이 다루고 있는 주제가 바로 이것이다.

추상적인 물음이 있다. 성숙한 사람, 즉 현자나 군자란 어떤 사람인가? 현자나 군자가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별로 의미있는 질문은 아니다. 상상력을 통해 해결가능한, 혹은 상상력을 통해서만 해결가능한 질문은 의미있는 질문이 아니기 때문이다. 내가 느끼기에 불교가 주로 다루고 있는 질문이 이런 것들이다. 유마경을 보라!

실질적인 물음이 있다. 소인들의 세계에서 군자는 어떻게 행동하는가? 이에 대한 답은 추상적으로 다뤄질 수 밖에 없다. 이러 저러한 맥락에서 벌어지는 이러 저러한 상황들을 모두 고려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추상이 구체화될 수 없으면 그 추상은 단지 말장난일 뿐이다. 추상이 구체화되는 과정을 해석, 혹은 적용이라고 한다. 그리고 그렇게 추상이 구체화되는 환경, 혹은 사건을 “역(change)"이라고 한다. 아다시피 주역이라는 책의 주제가 이것이다. -그러므로 주역은 심각하게 엘리트주의적인 관점에서 작성된 책이다. 그러므로 이에 대해서 더 이야기하고 싶지는 않다. 내가 주역의 관점에 동의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그것에 동의할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동의할 수 밖에 없음에도 머뭇거리는 것도 미성숙의 적나라한 표현이다.

(너무 나갔다. 저 일화는 스냅샷일 뿐이다. 우리는 점 몇 개를 갖고 그래프를 완성할 수는 없다.)

2. 조선일보.
내가 자주 이용하는 식당은 조선일보를 구독한다. 그래서 나도 조선일보를 자주 본다. 물론, 혐오스러운 장면도 많다. 예를 들면, 결혼 문화를 바꾸어야 한다고 캠페인을 하는 것이나 이러 저러한 고전을 읽자고 캠페인을 하는 것. 왜 이리 캠페인이 많은가? 이런 장면들, 그리고 정치적으로 대단히 유치한 기사들은 그저 지나친다. 그러고 나면 다른 신문에서도 얼마든지 읽을 수 있는 정도의 것들만 남는다. 남들과 겹쳐질 수 있는 것들만이 조선일보의 가치를 형성한다. 그 반대가 아니고!

애플의 하청 공장인 폭스콘에 대한 기사. 주당 노동 시간이 60여 시간에 달한다든지, 11일 연속으로 일하는 경우도 흔하다는 이야기들. 그 기사를 읽고 미소를 지은 사람이 나뿐만은 아닐 것이다. 내 마지막 직장의 경우 주5일은 12시간, 토요일은 오후 4시까지, 그리고 격주로 일요일에도 일해야  했다. 내가 일했던 대부분의 공장들이 하루 12시간, 그러니까 주야반으로 돌아간다. 가장 심했던 공장은 주야 체계로 돌아가되, 월 평균 2회 휴일, 그리고 한달에 한 두번 철야(즉, 24 시간 근무)가 있었다. 급여는 최저 임금을 기준으로 하기 때문에 계산해 보면 얼마인지 바로 답이 나올 것이다. 모두 삼성이나 엘지의 하청 공장이었다. 대기업에서 장비를 대주고 하청 기업에서 노동자를 부려 제품을 만들어 납품하는 구조.

한국의 노동자 평균 임금 수준은 결코 낮지 않다. 그러나 하청 공장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은 잔업 없이는 용돈 수준을 벌어갈 수 있을 뿐이다. 불행하게도 장시간, 저임금으로 고착된 구조의 한 원인은 대기업 노동자들의 고임금이다. 이러한 이중 구조는 사회 곳곳에 있다. 사회적 유동성을 최대한 억제하는 구조들. 기득의 영역으로 들어가는 좁은 틈새 주위에서 벌어지는 엄청난 경쟁들, 에너지의 소모들, 스트레스들. 한국 사회는 그러한 스트레스를 통해 기득권을 가진 세력들이 기타의 구성원들에게서 최대의 결과물을 최소의 비용으로 뽑아내어 유지되는 구조인 것 같다. 쉽게 말하면, 나 자신을 보호하는 가장 꾀바른 방법은 다른 사람들을 그들끼리만 경쟁하도록  만드는 것. 정부가 학생들 교과서를 어렵게 만들고, 일제 고사를 치르게 하는 이유. 청년 실업이 정권의 안위에 아무런 위협이 되지 않는 이유…

위장, 보호색에 관한 기사. 어떤 책 소개였는데 거기 소개된 일화 하나가 재미있었다. 피카소가 일차대전때 위장색을 칠한 군용 차량을 보고는 저걸 최초에 한 것이 입체파라고 말했다는 이야기. 나는 요즘 세잔의 채석장 그림에 관심이 가서 그걸 노트북 바탕 화면으로 해놓았었다. 그러다 곧장 원상 복귀. 세잔의 그림이 너무 정신 사나왔기 때문이었다. 붓칠이 깔끔하게 되어 있지 않아 이곳 저곳에 미완성인 듯 작은 틈들이 있었고, 나뭇잎의 초록색은 바위의 황갈색과 채도가 맞지 않아 위화감이 있어 보였다. 바위 굴곡들의 오른쪽은 검정에 가까운 진한 그림자가 져 있었는데 세잔은 그러한 효과를 화면 이곳 저곳에서 실험하고 있었다. 그러한 그림자가 튀어나옴을 표현한 것인지, 들어감을 표현한 것인지는 직접 관찰해 볼 일이다. 직접 관찰해 보면 일상의 물건들, 그림자가 진 일상의 물건들이 다르게 보일 것이라는 점은 장담해 줄 수 있다. 그 움푹 들어감이 시각의 효과인지 촉각 경험과 어우러진 효과인지 의문이 든다면 세잔의 그림을 다시 바라보라. 그가 실험하고 있었던 것이 무엇인지 알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저것이 이렇게 보인다고 말한다. 세잔은 그렇지 않다고, 그것은 그대의 눈이 덜 예민하고 선입견에 쌓여 있어서 그렇다고 말한다. 그리고 그가 발견한 것들을 양식화하여 하나의 미적 구조로 구체화한다. 그리고 우리는 세잔 앞에서 당황한다. 세잔은 우리의 미적 경험을 배신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똑같이 위장색 앞에서 당황한다. 그것이 어느 정도 멀리 있는 것인지 가늠할 수 없기 때문이다. 아무튼 놀라고 당황하는 것은 좋다. 치매에도 좋다고 하더라. 스님들은 그걸로 깨달음을 얻을 수 있다고 말하기도 한다.

3. 프로스트.
한 친구가 어느 미술 전시회에서 산 책에서 프로스트의 시를 읽고 내 생각이 났단다.

I shall be telling this with a sigh
Somewhere ages and ages hence:
Two roads diverged in a wood, and I -
I took the one less traveled by,
And that has made all the difference.

(Robert Frost, "The Road Not Taken" 중에서)

아름답고 분위기 있는 시다. 그러나 그뿐이다. 나는 항상 사람들이 덜 다닌 길을 택해 걸었다. 또다른 갈림길이 나오면 나는 또다시 사람이 다닌 흔적이 덜한 쪽 길을 택해 걸었다. 그러다 드디어 길이 끝나고 무성한 잡풀과 잡목 속에 갇힐 때도 많았다. 되돌아 가야 할 때도 있었고, 어떻게든 새 길을 내야 할 때도 있었다. 그 곳에서 뱀과 다람쥐와 사슴과 내가 동시에 서로의 움직임에 긴장해야 했었다.

그러나 물론 저 시의 강조점은 사람이 덜 다닌 길을 택했다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택함에 대한 한 설명일 뿐이다. 프로스트는 다른 길을 선택할 수도 있었다. 그는 자신이 선택하지 않은 길 쪽을 오래 바라보면서 자신이 택한 길을 따라 걸었을 뿐이다. 다음 번에는 저쪽 길을 택해야지, 택할 수 있을 거야, 하는 기대감을 가지고. 그러한 일은 벌어지지 않는다. 프로스트는 한 길을 선택했지만, 그 선택이 자신의 삶에 큰 계기가 되었음을 나중에 깨닫게 된 것일까? 아니, 그렇지 않다. 그는 아직 그렇게 늙지 않았다. 그는 여전히 갈림길에 있다. 거기서 주저하고 있다. 택하지 않을 길을 오래 바라보고 있다. 이 선택이 장래에 혹 한숨을 만들지 않을까 걱정하고 있다.

선택을 하는 가장 자연스러운 방법은 우연에 따르는 것이리라. 공중에서 사과가 떨어지듯이. 계곡을 타고 물이 흐르듯이. 그것이 우리가 주사위를 던지는 이유이리라. 나는 문득 문득 그러한 점들이 매끈한 곡선을 형성함을 깨닫고 놀라곤 한다. 점들에서 곡선을 본 것은 나 자신임에도. 점들을 이어서 곡선을 만드는 것을 "이야기 하기"라고 한다. 그리고 "이야기 하기"를 해석이라고 한다. 거울을 들여다 보면 거기에 항상 내가 있다. 당연하면서도 놀랍다. 추상이 해석될 수 있는 이유가 그것일 것이다. -나는 프로스트가 저 시를 아주 젊었을 때 썼으리라고 믿는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