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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ong Goodbye-camel


 
입적(入寂)


이렇게 한 번 가슴을 쓸어내리는 것이라면 좋겠네
자귀나무 잎새들의 그 기나긴 입맞춤이 끝나고 나면
그것으로 타임아웃의 휘슬이 불어지면 좋겠네
일렬종대로 서있는 가로수들이여
어쩌면 生은 라인 밖에 있었는지도 모르는 것이니
부디 똥볼을 질러다오
저 함성과 아우성의 그라운드 바깥으로
내겐 어떤 불멸도, 어떤 루즈타임도 필요없으니
한 번의 휘슬 그것이라면 좋겠네
갈팡질팡 떨어진 잎새를 질질 끌고다니는 바람 앞에서
대체 소멸 이후는 무엇인지
화환도 없이, 갈채도 없이 
어떤 루즈타임도 더는 없었으면 좋겠네
음악이 끝나면 또 침묵의 음악
그 꽁꽁 얼어붙은 시간의 심장 속이라면 좋겠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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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복의 시
보르헤스 / 우석균 옮김
-마리아 에스테르 바스케스에게



누구도 눈물이나 비난쯤으로 깎아 내리지 말기를.
책과 밤을 동시에 주신
신의 경이로운 아이러니, 그 오묘함에 대한
나의 허심탄회한 심경을.

신은 빛을 여읜 눈을
이 장서 도시의 주인으로 만들었다.
여명마저 열정으로 굴복시키는 몰상식한 구절구절을
내 눈은 꿈속의 도서관에서 읽을 수 있을 뿐.

낮은 무한한 장서를 헛되이
눈에 선사하네.
알렉산드리아에서 소멸한 원고들같이
까다로운 책들을.

(그리스 신화에서) 샘물과 정원 사이에서
어느 한 왕이 굶주림과 갈증으로 죽어갔네.
높고도 깊은 눈먼 도서관 구석구석을
나도 정처 없이 헤매이네.

백과사전, 아틀라스, 동방,
서구, 세기, 왕조,
상징, 우주, 우주론을
벽들이 하릴없이 선사하네.

도서관에서 으레
낙원을 연상했던 내가,
천천히 나의 그림자에 싸여, 더듬거리는 지팡이로
텅 빈 어스름을 탐문하네.

우연이라는 말로는 형용할 수 없는
무엇인가가 필시 이를 지배하리니.
어떤 이가 또다른 희뿌연 오후에
이미 수많은 책과 어둠을 얻었지.

느릿한 복도를 헤매일 때
막연하고 성스러운 공포로 나는,
똑같은 나날, 똑같은 걸음걸음을 옮겼을
이미 죽고 없는 그라고 느낀다.

여럿인 나, 하나의 그림자인 나,
둘 중 누가 이 시를 쓰는 것일까?
저주가 같을지면
나를 부르는 이름이 무엇이 중요하랴?

그루삭이든 보르헤스이든,
나는 이 정겨운 세상이
꿈과 망각을 닮아 모호하고 창백한 재로
일그러져 꺼져 가는 것을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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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vid Darling - Darkwood VII: New Morning    
 
저녁 무렵에 오는 첼로 
     - 박남준  




그렇게 저녁이 온다
이상한 푸른빛들이 밀려오는
그 무렵 나무들의 푸른빛은
극에 이르기 시작한다

바로 어둠이 오기 전 너무나도 아득해서
가까운 혹은 먼 겹겹의 산 능선
그 산빛과도 같은 우울한 블루
이제 푸른빛은 더이상 위안이 아니다

그 저녁 무렵이면 나무들의 숲
보이지 않는 뿌리들의 가지들로부터
울려나오는 노래가 있다
귀 기울이면 오랜 나무들의...
고요한 것들 속에는
텅 비어 울리는 소리가 있다

그때마다 엄습하며 내 무릎을 꺽는
흑백의 시간
이것이 회한이라는 것인지
산다는 것은 이렇게도 흔들리는 것인가

이 완강한 것은 어디에서 오는 것이냐
나는 길들여졌으므로
그의 상처가 나의 무덤이 되었다
검은 나무에 다가갔다
첼로의 가장 낮고 무거운 현이
가슴을 베었다 텅 비어 있었다
이 상처가 깊다

잠들지 못하는 검은 나무의 숲에
저녁 무렵 같은 새벽이
다시 또 밀려오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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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vid Darling - Darkwood VII: New Morning    
 
저녁 무렵에 오는 첼로 
     - 박남준  




그렇게 저녁이 온다
이상한 푸른빛들이 밀려오는
그 무렵 나무들의 푸른빛은
극에 이르기 시작한다

바로 어둠이 오기 전 너무나도 아득해서
가까운 혹은 먼 겹겹의 산 능선
그 산빛과도 같은 우울한 블루
이제 푸른빛은 더이상 위안이 아니다

그 저녁 무렵이면 나무들의 숲
보이지 않는 뿌리들의 가지들로부터
울려나오는 노래가 있다
귀 기울이면 오랜 나무들의...
고요한 것들 속에는
텅 비어 울리는 소리가 있다

그때마다 엄습하며 내 무릎을 꺽는
흑백의 시간
이것이 회한이라는 것인지
산다는 것은 이렇게도 흔들리는 것인가

이 완강한 것은 어디에서 오는 것이냐
나는 길들여졌으므로
그의 상처가 나의 무덤이 되었다
검은 나무에 다가갔다
첼로의 가장 낮고 무거운 현이
가슴을 베었다 텅 비어 있었다
이 상처가 깊다

잠들지 못하는 검은 나무의 숲에
저녁 무렵 같은 새벽이
다시 또 밀려오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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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가장 예뻤을 때 나는 바나나파이를 먹었다

내가 가장 예뻤을 때 나는 바나나파이를 먹었다
겨울이면 나타나는 별자리 이름의 제과회사에서 만든 것이었다 질 나쁜 노란색의 누가코팅 속에는 비누 거품같이 하얀 머시멜로가 들어 있었다 그 말랑하고 따뜻한 느낌, 달콤하고 옅은 바나나 향이 혀에 자꾸 들러붙었다

내가 가장 예뻤을 때 나는 짝짝이 단화를 신고 다녔다
연탄불에 말려 신던 단화는 아주 미세한 차이로 색이 달랐다 아이보리와 흰색의 저만치 앞에서 보면 짝짝이라고 할 수도 없는 그런 단화. 아이보리색의 오른쪽 신발은 유한락스에 며칠이고 담가 놓아도 여전히 그런 색이었다

내가 가장 예뻤을 때 나는 우물이 제일 무서웠다
우물에 빠져 죽은 아이의 꿈을 날마다 꾸었다 그 아이는 아버지 없는 아이였고 아이를 낳은 엄마는 절에 들어가 공양보살이 되었다고 했다 학교에서 돌아오는 길에 그 우물엔 누가 버렸는지 알 수 없는 쓰레기가 가득 찼고 눈동자가 망가진 인형의 손이 우물에서 비어져 나왔다

내가 가장 예뻤을 때 길가의 망초꽃은 늘 모가지가 부러져 있었다
학교가 끝나고 집에 가는 길은 멀고도 멀었다 나는 하얀 버짐 핀 얼굴을 하고서 계란 프라이 같은 꽃봉오리를 따다가 토끼에게 간식으로 주었다 토끼의 집 위로는 먼 산이 흐릿했고 토끼눈 같은 해가 지고 있었다

내가 가장 예뻤을 때 봄은 할아버지 같았다
해소천식을 몇 십 년을 앓고 있는 할아버지의 방에 창호지는 봄만 되면 노랗게 노랗게… 개나리나 산수유꽃도 그렇게만 보였다 할아버지는 봄만 되면 더욱 노란 가래를 뱉어 내었고 할아버지의 타구(唾具)를 비울 때는 자꾸 졸음이 쏟아졌다

내가 가장 예뻤을 때 사월 하늘의 뿌연 바람은 아라비아의 왕이 보내는 줄로만 알았다
모든 사막은 아라비아에서 시작해서 내가 사는 마을로 왔다 언젠간 나도 모래구덩이의 낙타처럼 죽을지 모른다는 생각에 밤새도록 리코더를 불고 싶었다

내가 가장 예뻤을 때 나는 어두운 방의 하얀 테두리를 좋아하였다
문을 닫으면 깜깜한 방의 문틈으로 들어오는 빛의 테두리. 창이 없는 그 방은 구판장집을 지나 마즘재 너머 큰집의 건넌방이었는데 늘 비어 있었다 할머니의 오래된 옷장과 검은 바탕에 야자수가 수놓아진 액자와 인켈 오디오가 있는 방이었다 라일락이 피던 중간고사 때 그 방에서 나는 양희은의 「작은 연못」과 들국화의 「행진」을 처음으로 들었다

내가 가장 예뻤을 때 안개꽃은 너무나 슬퍼서 쳐다보지도 않았다
서늘한 피부의 여인이 그 꽃을 들고 가는 것을 보았는데 무덤가의 이슬 같고 청상과부의 한숨 같아서 보기만 해도 가슴에 안개가 피어났다 그 즈음 주말의 명화에서는 클린트 이스트우드가 나오는 「황야의 무법자」를 했고 늦게 일어난 일요일 아침, 하얀 요에 묻은 초경의 피를 보았다

내가 가장 예뻤을 때 나는 별자리 이름의 바나나파이를 먹었는데
이제 바나나파이 같은 건 어디서도 팔지 않고 검게 변한 바나나는 할인매장에 쌓여만 간다
나는 이제 노을색 눈을 가진 토끼는 키우지도 않고 혼자 오는 저녁길은 아직도 쓸쓸하다
여전히 사월엔 노란 바람이 불어오지만 아라비아 왕 같은 건 시뮬레이션 게임에나 나오는 캐릭터가 된 지 오래다
그리고 이제 죽음 같은 건 리코더 연주로도 어쩔 수 없는 것임을 알게 된 것이다

*내가 가장 예뻤을 때: 이바라기 노리코의 시, 신이현의 소설
 

 


                                                   Liseuse a la table jaune; 1944 Henri Matisse
연 등

바람이 불지 않는
오월의 저녁
손목이 뒤틀어진 소아마비의 사내가
종이와 펜을 내밀며 길을 묻는다

"잠실… 어떻게 가야 해요?"
"저 연등을 따라가세요
계속 가다 보면 불 켜진 등 아래
누에가 고치를 틀고 있는 밭이 보여요"
나는 채도가 낮은 빛깔의 목소리로
그에게 말한다
연꽃 같은 웃음을 떨구며
연등행렬 속으로 사라지는 사내
한쪽만 진한 발자국이 내 앞에 남는다

별도 보이지 않았다
그가 태어난 날도 그랬을까
오지 않을 버스를 기다리는 사람들은
어딘가의 먼 절에 있다는
오백 나한의 얼굴들을 하고 있었다

다리를 절던 그는 어디쯤 가고 있을까
연등 속에서 불 밝히던 성충들은
이미 환태하여
날아가고 없었다.


흑룡강성에서 온 연이 엄마

연이 엄마는 왼손으로 밥주걱보다 견고하지 못한 삶을 사느라 입술이 터진다 터진 입술 사이로 거칠게 흘러나오는 흑룡강의 물결 붉디 붉은 강물결 따라 남지나해 서해 군산 앞바다 쿨럭쿨럭 쏟아지는 찬물에 손 담그다 간밤 천둥소리에 울고 있을 연이를 떠올린다

엄마와 함께 놀던 파밭을 서성이다 눈물이 쏟아진다 눈물이 멎질 않아 눈이 멀어 버린 연이 아무리 불러 봐도 엄마는 먼 어머니의 나라에 있다

기름때 진 사내들에게 밥을 퍼 줄 때마다 데인 가슴을 수챗물로 씻어내고 철수세미처럼 딱딱한 손바닥에 새겨진 고향의 지도를 본다 어느새 손금을 타고 내려오는 강물 고향에 간다

풀풀 날리는 십일월 눈 속에 파꽃이 묻힐 때 만두 장사가 지나가다 팔다 남은 만두를 연이에게 주고 간다 모락모락 피어나는 훈김이 뿌옇게 앞을 가려 손에서 주걱을 놓친다 고슬하게 지어진 밥알이 흩어진다

차가운 밥그릇에 몰아치는 흑룡강의 눈발


인어횟집

#1
청과물상 방정식 임옥순 씨 부부가 일하러 나간 사이 아이들은 불놀이를 한다 지나가는 사람들의 발목만 보이는 창 하루에 삼십 분밖에 볕이 들어오지 않는 방에서 아이들의 비명이 곰팡이 핀 제비꽃 무늬 벽지 속으로 스며든다 활활 타오르는 제비꽃 만발하던 일요일 저녁 스테이크 전문점에서는 소백산에서 사육된 안심로스를 판다 광합성을 하게 된 한우는 충분한 햇빛과 맑은 공기 속에서 키운 것이 상등급 소뿔이 장식된 테이블에 분홍 소매와 남색 무릎을 가진 아이들을 데리고 온 김주만 하미란 씨 부부가 푸른 즙이 질컥거리는 스테이크를 씹는다 여보 다음주엔 당신 동창모임이 있어요 어디서? 인어횟집이라는군요

#2
우리 업소에선 태평양 연안의 뱅크에서 잡힌 인어만을 취급하지요 인어의 하체엔 발톱 같은 비늘이 달려 있어서 회 치기에 여간 힘든 게 아니에요 비싼 칼날을 망쳐 버리면 살 길이 막막한 횟집의 요리사는 인어회를 시키는 사람들에게 붉은 장을 내놓으며 말한다 인어횟집만의 특별 서비스입니다 인어의 차가운 간을 녹여 만들었지요 사람들은 붉은 간을 간장을 풀며 시월혁명에 대한 얘기를 한다 너 어제 그거 봤어? 시월은 혁명 하기 좋은 계절이라는데? YTV의 특별기획 다큐멘터리 이야기군 하긴 적그리스도가 태어나는 달도 시월이라더니, 왜 그는 오지 않는 거지! 고래 힘줄 같은 넥타이를 풀며 인어회를 장에 찍어 먹는다 붉은 장이 입술가로 흘러내린다

#3
남은 인어의 상체는 어떻게 하나요? 냉동 보관해서 블라디보스토크 항으로 보냅니다. 남태평양의 인어 상체는 북극의 썰매 끄는 개들에게 아주 인기거든요 그런데 유통회사는 어디를 거래하시죠? AMEX를 이용하지요 세계적으로 체인이 가장 많잖아요 아 그래요 저는 KOEX에 다니고 있습니다 주로 AMEX의 거래처를 뚫지요 물류비용이 AMEX의 반값입니다 아 대단히 민족주의적인 기업이군요 KOEX 직원의 미끌거리는 명함을 받는 요리사의 빨갛게 구멍난 웃음.


마추픽추

<존재의 강시>를 노래하는 시인의 시집을 읽다가 지하철 안에서 졸았다 열차가 삼송역을 지나 지축역에 도착했을 때 나는 선잠에서 깨어났다 사람들은 각자 앉은 자리에서 신문을 보거나 화장을 고치거나 책을 읽거나 멍하니 앞좌석에 앉아 있는 사람의 신발을 바라보고 있었다 신들은 자꾸 발을 두고 도망가고 있었다 내 신도 나를 두고 도망가려 했다 신을 따라 허겁지겁 창 밖을 보자 그곳엔 잉카의 마지막 왕이 웃고 있었다 열차는 곧 깜깜한 지하동굴로 들어갔다 고장난 샤워꼭지처럼 남은 꿈들이 머리통에서 질질 흘러나왔지만 닦을 생각은 없었다 껌팔이가 모두에게 껌과 종이를 주며 지나간다 종이에는 <너의 꿈은 마추픽추 산에 잠들어 있다>고 씌어 있었다 다음 칸으로 사라지는 그의 뒤를 잉카의 왕이 황금팔찌를 흔들며 뒤따라갔다 신에게 버림받은 사람들이 지하철을 갈아타려고 충무로에서 내리고 나머지 사람들은 코리아헤럴드 신문을 말아 쥐고 티티카카 호수에서 여름휴가 보낼 궁리를 하고 있었다 ●
올해도 과꽃이 피었습니다
          유형진



과꽃의 씨방에 사는 한 사람을 압니다 그는 분홍과꽃의 말라비틀어진 씨방에 삽니다 그의 등은 호미처럼 굽었고 손등은 딱정벌레의 껍질처럼 딱딱합니다 그의 등과 손등이 언제부터 그렇게 굽고 딱딱해졌는지 모릅니다 과꽃 잎사귀에 이슬이 내릴때 그는 꽃잎을 타고 일터로 갑니다 그의 일터는 프라모델 탱크를 만드는 공장입니다 그는 탱크의 바퀴를 만드는 일을 합니다 그가 만든 탱크 바퀴는 과꽃을 닮았습니다 그는 탱크 바퀴의 전문가입니다 그가 만든 탱크 바퀴는 진흙탕도 달릴 수 있습니다 비탈언덕도 쉽게 오를 수 있습니다 과꽃의 씨방에 사는 그는 과꽃을 타고 출근해서 과꽃같은 탱크 바퀴를 만듭니다 톱니가 있고, 굴러가고, 아이들이 좋아하고, 쉽게 잊혀지고, 잊은 후에는 다시 떠오르지 않는 탱크의 바퀴를 만듭니다 아이들이 그가 만든 탱크를 가지고 꽃밭에서 놉니다 바퀴에 꽃잎이 깔립니다 꽃들이 지고 꽃 진 자리에 다시 꽃이 핍니다 과꽃의 씨방에 사는 한 사람은 등이 호미처럼 굽었고 손등은 딱정벌레 처럼 딱딱합니다 올해도 과꽃이 피었습니다 꽃밭가득 예쁘게 피었습니다


냉장고의 심장


자주색 벽돌 다리를 지나면 호수가 나오지요 예, 예, 그길로 직진 하세요 호수가 보이나요? 호수에 머리를 감고 있는 버드나무가 보이지요 예, 우회전이예요 그 버드나무 앞에 주차하세요 차는 버드나무 앞에 세워두셔도 됩니다 아무도 견인해 가지는 않아요 이제 다 왔네요 거기서부터 위로 백미터예요 허공 뿐이라고요? 예 맞아요 그곳이예요 허공에 손을 짚어 보세요 뭔가 잡히지요? 그걸 잡고 올라오세요 예, 수직으로 백미터면 꽤 되는 거리죠 사다리는 절대 끊어지지 않아요 똑바로 잡고 오른다면 말이죠 올라오는 중에는 절대로 밑을 내려다 보지 마세요 해산한 여자처럼 머리를 풀어헤친 버드나무 같은건 내려다보지 마세요 왜요? 무서우세요? 그럼, 냉장고의 심장을 얻는 일이 그렇게 쉬울 줄 알았어요? 애초에 생각을 말았어야지요 자주색 벽돌 다리는 건너지 말았어야지요. 저따위 고물 자동차가 그렇게 걱정 되나요? 글쎄 아무도 견인해 가지 않는다니까요? 삼십년이라구요? 참 내, 답답하기는. 냉장고의 심장만 얻는다면 고물 차와의 삼십년은 아무것도 아니예요 알고 있잖아요 벌써 십미터는 올라 오셨네요. 예, 그렇게 하면 되요. 예, 예 아주 잘하고 있어요. 이제 당신이 냉장고의 심장을 욕망하게 된 계기를 말해보세요. 아니, 아니 고물자동차에 대한 애착은 이제 집어 치우고요. 욕망에 몰두하면 허공을 오르는 공포 따위는 없어질거예요 그렇지요 아주 잘하고 있어요 땀이 난다고요? 축축해서 자꾸 미끄러지는 것 같다고요? 겁낼 것 없어요 착실히 위로 오르기만 하면 절대로 떨어질 일은 없으니까요 이 사다리에 오른 이상 다시는 내려갈순 없어요 당신이 내려가려는 순간 사다리는 없어진답니다. 그 사실을 미리 말 안했던가요? 이런. 진행상에 뭔가 착오가 있었나 보네요 죄송합니다 하지만 이젠 정말 어쩔 수 없어요 미련을 버리세요. 알아요. 잘 안된다는걸. 당신이 이렇게 망설이고 있는 사이 누군가 또 자주색 벽돌 다리를 건너고 있을거에요 오! 이런 이런, 흔들리고 있군요!

채석강 오후 푸가형식의 식사


격포에 다녀온 일이 있지요 그리움의 더께 같은 채석강의 퇴적층을 보았지요 날 선 바닷바람이 적층 사이를 가르는 비명이 꼭 내가 지르는 것만 같았지요 방파제 위에서 파는 조개구이를 먹었지요 가스불에 탁, 탁 벌어지는 조개껍질의 무늬가 채석강의 퇴적층 빛을 띄우고 있었지요 조갯살을 씹으며 생각했지요 당신이 들려주었던 푸가, 퇴적층 같은 오후에 벗겨내는 시간의 껍질 같은 맛이라 생각했지요 초장을 찍은 대합살이 미끄러지듯 식도를 내려가고 채석강에 내리는 눈은 적층이 되어 쌓였지요 눈이 내리고 그리움이 쌓이고 눈이 내리고 그리움이 쌓이고 눈이 내리고 그리움이 바다모텔에 방을 잡았지요 모텔 방에서 격포 앞바다까지 격포 앞바다에서 하늘 끝까지 미친 눈송이들이 마구잡이로 휘날리고 어둠 속에 쌓이는 눈 때문에 눈의 적층은 더욱 선명해졌지요 얼어붙은 눈의 적층을 달려 집으로 돌아왔지요 돌아와 동글한 퇴적층 같은 양파를 깠지요 격포의 파도같은 칼날은 단번에 양파를 갈랐지요 엷은 슬픔의 막 같은 껍질을 벗겨내고 쌀뜸물에 흰 된장을 풀고 조개를 넣고 양파를 넣고 퇴적층 같은 오후에 푸가형식의 식사를 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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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형진 : 1974년 서울에서 태어났고, 2001년 서울산업대학교 문예창작과를 졸업했다.


***

[현대문학]에서 퍼 온 것으로, 유형진의 등단 작품
예쁘고 상큼한 상상력이 읽는 맛을 더욱 좋게한다 .
 
화전 간다

-안현미


좌석이 없는 좌석버스를 타고 간다
삼표연탄 이름만 남아 있는 자리
백미러 같은 낮달 떠 있다
'이번 정류장은 수색극장 앞입니다 다음 정류장은 구름다리입니다'
콘크리트로 만들어진 구름다리 건너
검문소 앞에서 검문 당하는 靑春
이등병의 배지를 달고 있다
물빛처럼 푸른 군복
수색엔 온통 일렁이는 것들만 살고 있다
'...... 다음 정류장은 항공대학교입니다'
빨간 에나멜 구두를 신고
파란 종이비행기를 날려보내던,
삼표연탄보다 활활 타오르던 시절 어디에도 없다

좌석이 없는 生을 타고 간다
꽃밭은 없고 이름만 남아 있는
花田 간다



카만카차*

-안현미


안개를 달여드려요
칠레 행 비행기를 타고 목요일에서 수요일로 날아오세요
망명정부의 소설가처럼 수염을 길러도 좋아요
이곳은, 지도엔 없는 마을 '카만카차'
안개광장을 가로질러 가스등이 켜진 골목
카페 '세상 끝 등대'로 오세요
연애소설 읽는 노인과 패튼 장군 세풀베다가
열대의 안개를 마시며
감상적 킬러의 고백을 듣고 있는
바로 그 집이에요
자, 서둘러요
이곳은 안개의 마을 카만카차
안개로 차를 달이고
안개로 빨래를 하고
안개로 홰나무를 기르는 마을
카만카차에선 가이드북 같은 건 필요없어요
안개 때문이죠
삶이 홰나무 구멍 속으로 들어가 꾸는 한 장의 꿈이라면
안개를 달인 한 잔의 차가 삶이기도 하죠
어디선가 자정을 알리는 시계소리가 들려요
목요일이에요
다음 비행기는
짙은 안개 때문에 결항이에요

*칠레의 어떤 마을에서는 안개를 '카만카차'라고 부른다



식판 공장의 프레스기계들과
언니의 검은 란제리를 위한 노래


-유형진


물오른찔레나무새순을꺾어/나무의맑은피를손톱에칠하고
새로자란토끼풀꽃들을뜯어/시계랑반지를만들어끼웠어

시간은째깍째깍시들어가고/기타도베이스도드럼도없이
굶주린거미같은올겐만으로/잊혀져가는낮의변주를했어

언니는우물가시멘트바닥에앉아/검은란제리를빨고있었어
쭈그러진노란세숫대야에/란제리는불은미역같았어

노을이가지색으로멍들어가는/식판공장기계들이춤추는저녁
사람들에게식판은늘모자랐기에/밤새도록기계들은춤을추었어

아기잃고젖몸살을앓는언니가/구름을불러달을덮어주었어
그믐달이자고있는우물속으로/죽은별처럼눈물이떨어졌어

꽃시계는드디어멈춰버렸고/파란철길위로막차가지나갔어

물고기보다투명한손톱들이/메마른건반위로떨어졌어
건전지가다된전자올겐은/비오는날버려진고양이처럼울었어

공장마당엔발목잘린비둘기들이/깃털빠진늙은비둘기들이
마지막기차의장화를신고/아주먼곳으로가고싶어했어

쿵덕쿵덕프레스기계소리/철벅철벅두레박올리는소리
철길을지우는안개와함께/기차의꼬리에붙어따라가고

하얀빨래비누는불어가는데/익사체의살처럼뭉그러지는데
식판공장프레스기계들은/공장문이닫혀도춤을추는데
숲처럼검은란제리를빨던/언니는영영오지않는데
------------------------
 
질 나쁜 연애-문혜진 첫 시집에서
 

 
<질 나쁜 연애>

이 여름 낡은 책들과 연애하느니
불량한 남자와 바다로 놀러 가겠어
잠자리 선글라스를 끼고
낡은 오토바이의
바퀴를 갈아 끼우고
제니스 조플린*의 머리카락 같은
구름의 일요일을 베고
그의 검고 단단한 등에
얼굴을 묻을 거야

어린 시절 왜 엄마는 나에게
바람도 안 통하는
긴 플레어스커트만 입혔을까?
난 다리가 못생긴 것도 아닌데

회오리바람 속으로
비틀거리며 오토바이를 몰아 가는
불량한 남자가 좋아
머리 아픈 책을
지루한 음악을 알아야 한다고
지껄이지도 않지
오토바이를 태워줘
바다가 펄럭이는
바람 부는 길로
태풍이 이곳을 버리기 전에
검은 구름을 몰고
나와 함께 이곳을 떠나지 않겠어?

* 27살에 요절한 여성 록가수. 그녀는 날것의 음성으로 노래하는 최초의 여성 록커였다.



<뒤통수 조심해라>

가슴에 피어싱이라도 주렁주렁 달고 막살아 보고 싶은 날. 믹서에 감기약이라도 갈아서 밀가루 반죽에 넣어 마구 휘젓고 싶은 날. 곱게 갈린 가루를 파우더 통에 넣고 볕 좋은 곳에 앉아 화장을 하자 화장하다 심심하면 마당의 개나 붕붕 타지 뭐 개를 타다가 싸이가 생각났어 내가 좋아하는 싸이는 남대문 뒷골목에서 S정과 러미라*를 사다가 구속 수감된 가수야 암스테르담엔 널린 게 약이라던데. 연신내 사는 내 친구 미나노는 할머니랑 다정하게 종이에 말아 맞담배 피웠다는데. 오늘도 9시 뉴스에선 남대문 뒷골목의 초라한 약장수와 더러운 오리털 파카를 뒤집어쓴 불안한 중독자의 손이 오버랩된다 나를 뜯어먹을 기세로 미친 듯 손을 떤다 피해망상은 닳고 닳은 누구나의 누더기 껌! 씹고 있는 당신의 껌도 이미 히스테리로 너덜너덜해져. 이런 날은 누구나 뒤통수 조심해라!

* 감기약이지만 수십 알씩 먹으면 환각 증세가 오는 값싼 환각제.


<껌요리>

  자, 그럼 껌요리를 시작해 볼까?
  재료 : 어린아이 머리칼에 엉겨 붙은 껌, 지하도 바닥에 눌어붙었다가 도루코 칼에 인양된 껌, 걸인의 썩은 이빨에 눌러앉아 단물 빠진 껌 (그 외에 잡다한 껌딱지들과 풍선껌!)

  껌을 씹는다 분홍색 단물이 스며 이가 쑤시고 잇몸이 부어도 멈추지 않는다 단물이 빠지고 접착력이 강해지면 검지에 돌돌 말아 되도록 길게 길게 늘여본다 뗐다가 붙인다 사람과 개를, 똥과 밥을, 나물 망태기와 뱀을, 나르시시즘과 모멸감을, 사시(邪視)와 벌어진 앞니를, 독재자의 군화와 적진에서 죽은 어린 병사의 눈동자를, 너의 크고 작은 뼈들과 나의 예민한 영혼을 마구마구 붙였다 떼어본다 세상 모든 바닥을 걸레처럼 쓸고 다닌 늙은 도둑고양이의 앞발과 폐타이어의 잔등에도 어느 한순간 엉겨붙어 떨어지지 않는 곤란한 치욕 있으라!


<문신>

사람들은 죽겠다고 시를 쓰지
시에 대한 시가 얼마나 촌스러운지도 모르고
시를 천 편쯤 써서 여기저기 뿌려야
루이비통 가방 하나쯤 살 수 있을까?
시를 써서 부자가 될 수 없어
그것은 교복 입은 전인권과
자갈 언덕 위에서 섹스하는 것만큼이나 어려운 일이지
지우고 싶어도 지워지지 않는
다친 신경 세포 속 문신
토할 것 같아
죽을 것만 같아
나는 지금 문신을 새기고 있어
전기의자에 앉아 온몸에 침을 꽂고 고문당하는 기분이야
나부랭이들은 이걸 두고
'몸시'라고 하겠지
그래 나는 몸으로 시를 쓴다
그것도 '벌거벗고'
춤이라도 추고 싶군
파우스트가 빨래를 널고
백설 공주는 거울을 보며 면도를 해대고 있어
마돈나가 앉아서 아인슈타인의 검을 머리털을 젓가락으로 참을성 있게 뽑아주고
에미넴이 '나인 인치 네일수'로 뻑큐를 하다가
자기 코를 찔러 코피를 질질 흘리는 동안
당신을 뭘 했는데?
남 얘기가 아니지
이런 토할 것 같은 세상에서 도망쳐!
무거운 뇌의 하수인이 되지 말고
내치지 못한 지긋지긋한 그에게서 도망치자고!
그것만이 살길이야



<탕진>

가끔씩 난
똑같은 노래를 반복해서 부르곤 해.
같은 노래를 부르고 또 부르고
그러면 어떤지 알아?
하드보일드하게 지루하지 뭐.
전인권의 <행진>을 탕진으로 바꿔 부르는데
그것도 지루하면 펭귄으로 불러.
그럼 정말 썰렁해지지.
전인권은 왜 행진에서 한 발짝 더 나가지 못했을까?
그러면 탕진이 됐을 텐데.
스카이 라이프 광고에서 선글라스를 벗은 전인권은
애송이 개그맨의 폭탄 맞은 개그 같아.
펑크스타일로 뇌쇄적이야.
제대로 서글프다는 이야기지.
그 폭탄 머리를 만드는 데
노련한 코디네이터가 몇 시간을 주물러댄다지?
그의 선글라스를 벗길 수 있는 건
태양도, 비도 섹시한 허벅지도 아니야.
스타일리스트로 사는 것도
돈 앞에선 귀찮아진 거겠지.
하지만 누가 그를 비난하겠어?
탕진을 흥얼거리며 스니커즈가 닳도록 걷다가 문득,
지금 내가 부르는 이 노래는
원유를 잔뜩 부은 베트남식 커피 같아.
하드보일드하게 기분이 좋아진다는 이야기지.
그래. 피 한 방울 남기지 않고 모두 써버리겠어.
아무것도 아끼지 않겠어.
우리 동네 미대사관 앞 전경 아저씨들도 탕진!
우리 삼촌을 닮은 과일가게 총각도 탕진!
붕어빵 파는 뚱뚱한 아줌마도 탕진!
피스!로 인사를 대신하던 시대는 갔어.
아무리 외쳐도 평화 따윈 오지 않잖아?
탕진!



<환생>

  로트레아몽이 <말도로르의 노래>를 쓸 때 나는 그의 애인이었어. 나는 그의 딸을 낳았고 우리는 사나운 동물의 무리를 찬양했으며 가끔 외출할 때 늑대에게 아이를 맡기기도 했지. 그 늑대가 지금 우리 아버지로 환생했어. 그때 우리는 이 세계에 모멸감을 느꼈고 사는 게 지루해서 빨리 죽어버렸지. 그는 난폭한 시인이었지. 난 그 난폭함을 사랑했어. 이런 야비한 세상에서 다시 어떻게 죽어가야 할까? 독한 술과 얼린 나비 가루로도 치료할 수 없는 병이 있어. 그것은 광기와 환멸 사이 어디쯤에서 겉도는 마음. 푸른 안개가 피어오르면 해로운 마음이 사나운 발톱을 세우고 일어나지. 오래고 오랜 피. 지금은 분열된 몸과 마음이 서로 피 터지게 싸우는 시간. 막막한 마음이 죽어가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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