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만과 편견>을 조선시대 판 드라마로.

 

오만과 편견은 상상력의 보고인지,

좀비판도 나오고 스릴러 판도 나오던데.

 

오만과 편견과 좀비를 쓴 작가는 센스 앤 센서빌리티와 바다괴물들도 쓰고 에미브라함 링컨과 뱀파이어도 쓰던데.....아, 넘치는 B급 상상력이 참 멋있다.

 

어릴 때 <오만과 편견>이 끔찍하게도 싫더니

나이드니 왜 이렇게 좋은지 ^^

요새 유행하는 조선시대 가상 왕의 로맨스 사극의 보다가

아...저런 유치한 거 말고 (그래도 구지 닥본사 하지만)

저작권도 없는 <오만과 편견>으로 누가 조선시대 판 드라마 좀 만들어주지 싶다.

 

한 가지 유감인건,

그 뉘앙스를 다 살린 번역판이 있을까 싶다.

번역판을 다 찾아보진 못했지만,

어릴 적 어느 삼류 출판사에서

오만과 편견 번역을 새로 낸다면서

기존 번역판 세 권을 펼쳐놓고 그 한글 내용을 짜집기 하고 있는 걸 본 적 있다.

 

그 세 권을 첫 페이지만 그떄 슥  봤는데,

오오...첫 페이지부터 이상했다.

빅토리아 시대 (몰락은 했어도) 귀족 부부 (베넷 부부)의 그 현대적 말투하며,

그 땐 젠틀맨이 신사라는 뜻이 절~~대 아닌데 신사라고 번역해 버리는

오역들을 첫 페이지부터 보고는....ㅠ.ㅠ

[그 중 하나는 괜찮더라....젠틀맨이란 용어는]

그 세 권이 다 메이저 출판사 거 였는데 말이다.

 

전공자를 좀 번역에 썼음 좋겟다.

하지만 나도 어설프게 전공은 했다만....

전공자들이 영어는 쪼금 되어도 한글이 안 되는 현실을 보자니

뭐....할 말은 없다. (내가 지금 남의 한글을 탓할 주제가 못 된다. 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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냄새에 대한 기억이 제법 오래 가더라.

 

난 내 아이 목덜미 냄새가 젤로 좋더라.

 

쨍쩅 햇빛에 말린

황금빛 모래알 같은 냄새가 난다. ^^

(아니 났었다....ㅠ.ㅠ)

 

녀석 작년 후반기부터 이제

호르몬이 분비되는지

냄새가 변했다....흑흑.

머리칼에서 남자 냄새가 난다. 흑흑.

 

아직도 팔베게 한다고 자겠다고 떼쓰는 놈인데

막상 요로콤 품에 폴딱 안으면

폴폴 풍기는 녀석의 남자 냄새에

에미가 놀란다. 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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랜덤 하우스에서 원서의 표지를 그대로 얹어서 나오네요.

북폴리오에서 낸 동일 작가의 <트왈라잇> 표지보다 훨 낫지요.

순정만화 취향의 한글판 <트왈라잇> 표지는 역겨워서 -_-ㅋ

 

<트왈라잇>보다는 <호스트>가 훨 낫습니다.

 

기생생명체에 대한 작품들이 SF계열에 많지요.

무시무시한 <신체 강탈자의 침입>에서부터

제가 좋아하는 인본만화 <기생수>까지 말입니다.

(* 기생수는 18금. 야하지는 않은데 유혈장면이 섬뜩해서 말입니다.

    이 기생수 작가가....한 필력합니다. 새로 집필 중인 <히스토리에> 압권이지요.

    알락산더 대왕의 모사였던 노예출신의 일대기를 그리고 있습니다.)

 

<호스트>는 기생 외계인의 localization (나중에 이렇게 부르더군요...ㅎㅎ)이

주목할만합니다.

인간에게 몸을 돌려주기 위해 자신을 희생하는 외계인이 나오지요.

그리고 외계인 + 지구인의 로맨스 라인이 나옵니다. (뭐 가히 로맨스 소설이라고 해도

무색하지 않을 지경이지요. 작가가 누구입니까...뱀파이어조차 사랑하는 사람이니까.)

 

인간의 대부분이 기생 생명체에게 몸을 빼앗긴 지구에서

저항군으로 살아가는 소수 사람들 틈에 섞여 들어간

외계기생 생명체의 이야기입니다.

 

원래 이미 여덞번의 기생 생명의 삶을 다른 행성에서 마친

주인공 기생생명체 ('소울'이라고 부릅니다. 주인공 소울의 이름은 'Wanderer'이지요.

 줄여서 나중에 '완다'라는 이름을 얻습니다만. 여덞 개의 삶을 거치면서도

 뼈를 묻을(?) 정착을 하지 못해 얻은 이름이고, 기생생명체에게도 굉장히

 드물게도 여러 행성을 돌아다닌 외계인이지요.)는

멜라니라는 저항군 여성의 몸에 기억을 탐색해서

저항군들의 기지를 알아내라고 삽입됩니다.

 

하지만 남아있는 멜라니의 정신과 조우하게 되지요.

저항군에 대한 기억을 탐색할 때마다

기억을 막아가며 맹렬하게 저항을 하니까요.

그리고, 멜라니가 목숨을 걸고 지키는 하나의 이름과

만나게 됩니다. '자레드.'

멜라니의 기억과 멜라니의 감정을 고스란히 이어받는

완다는 멜라니와 마찬가지로 자레드를 사랑하게 되지요.

 

그리고 멜라니와 함께(?) - 머릿속에서 완강하게 버티고 설득하는 멜라니와 함께 -

자레드를 찾아 자신의 모든 지위를 버리고 저항군들이 있는 사막으로 들어갑니다.

저항군들을 찾아내지만,

기생생명체가 삽입된 것을 알고 자레드조차 <완다와 멜라니>를 죽이려고 하지요.

 

목숨을 건 시험을 거쳐서

완다는 자신 속에 멜라니의 정신이 남아있다는 것을 자레드와 유일한 피붙이인

제이슨에게 알립니다.

그렇게 자레드와 제이슨이 자신을 받아들여 갈 수록

그들을 사랑하고 인간들에게 동화되어가는 자신을 느끼는데,

멜라니에게 몸을 돌려주기 위해

완다는 자신이 죽어야 합니다.

 

그리고 이안이 있지요.

멜라니가 아니라 완다를 사랑하는.

자신의 생명수단인 숙주의 몸을 숙주에게 돌려주려는 외계생명체를 사랑하는

지구인 남자가 있습니다. 어떤 숙주의 몸을 하고 온들 개의치 않는.

 

다행히도 해피엔딩으로 끝납니다.

<트왈라잇>보다 훨 낫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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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 해안의 여왕


1장. 코난, 해적이 되다


봄에 깨어나는 녹색 봉오리들아,

가을이 잎들을 칙칙한 불로 물들이는 것을 믿으라.

내 뜨거운 욕망을 한 남자에게 불태우기 위해

내 심장을 순결하게 지켰음을 믿으라.

                                - 벨리트의 노래


 말발굽 소리가 선창으로 이어진 경사진 거리를 따라 우레 소리같이 들려 왔다. 소리를 지르며 혼비백산 흩어진 사람들은 검은 종마를 탄 갑옷 입은 사람 한 명이 바람에 넓은 진홍색 망토 자락을 휘날리며 지나가는 것만 언뜻 보았을 뿐이었다. 멀리 거리 위쪽에서는 추격자들의 고함 소리와 말발굽 소리가 들려왔다. 하지만 말 탄 이는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쫓기는 남자는 선창으로 한달음에 말을 몰아 내려가더니, 잔교(棧橋) 바로 앞에서 고삐를 잡아 당겼다. 종마가 뒷발로 일어서며 멈추었다. 뱃사람들은 뱃머리가 높고 통이 넓은 갤리 선의 버팀줄들과 줄무늬 돛에 매달려 주어진 일을 하다가 이 자를 놀라 바라보았다. 검은 수염의 건장한 선장은 이물에 서서 배의 갈고리 장대를 가지고 선창 말뚝에서 배를 풀었다. 말 탄 이가 안장에서 훌쩍 뛰어내리더니 펄쩍 뛰어 중갑판에 반듯하게 내려앉자, 선장이 화가 나서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누가 당신더러 배에 타라고 했어?”

 “출항해!” 침입자가 팔을 힘껏 휘둘러 넓은 검에 묻은 피를 털어내며 소리 질렀다.   “이보셔. 이 배는 쿠쉬로 가는 배야!” 선장이 타이르듯 말했다.

 “그러면 나도 쿠쉬로 가지. 출발하라니까 그러네!” 상대가 재빨리 길 위쪽을 곁눈질 했다. 말 탄 무리가 부리나케 말을 몰아 내려오고 있었고, 그 한참 뒤로 어깨에 석궁을 맨 궁사들이 힘들게 쫓아오고 있었다.

 “승선료를 낼 수 있어?” 선장이 다그쳤다.

 “내 검으로 내겠다!” 갑옷을 입은 남자가 태양빛 아래 시퍼렇게 번뜩이는 큰 검을 휘두르며 고함을 질렀다. “크롬 신의 이름으로 말하는 데, 출발하지 않으면, 이 배를 선원들 피로 피갑 칠을 해주지!”

 선장은 사람을 보는 눈이 있었다. 분노로 굳어진 상대방의 흉터 진 구리 빛 얼굴을 스윽 훑어보더니 재빨리 소리쳐 명령을 내리며. 선창을 세게 밀어 배를 출발 시켰다. 갤리선은 물위로 둥실 떠 나아갔고, 노들이 리듬에 맞춰 삐걱거리며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바람 한 줄기가 반짝이는 돛을 가득하게 부풀리자 가벼운 배는 바람과 같은 방향으로 나아갔다. 마치 백조처럼 미끈하게 항로를 잡더니 속도를 내며 물살을 갈랐다.

 선창에서는 말을 타고 온 병사들이 검을 흔들며 소리 지르며 배를 돌리라고 협박과 명령을 해대다가, 궁사들에게 배가 사정거리를 벗어나기 전에 서두르라고 외쳐댔다.

 “버럭버럭 악 좀 써 보라지.” 칼잡이가 웃음기 없는 얼굴로 말했다. “조타수 양반, 원래 항로대로 가고 있는 거요?”

 선장은 이물들 사이에 있는 작은 갑판에서 내려와 노를 젓는 이들 사이를 헤치고 나와 중갑판에 올라섰다. 낯선 이는 돛대에 등을 대고 서 있었지만, 눈은 경계하느라 가늘게 뜨고 검을 쥐고 있었다. 선장은 이 자가 허리에 차고 있는 장검을 신경 쓰지 않으려 애쓰면서 그를 찬찬히 훑어보았다. 크고 건장한 체격에 검은 쇠미늘 갑옷을 입고 있었다. 갑옷의 정강이받이는 번쩍였고, 황소 뿔이 달린 푸른빛이 감도는 무쇠 투구는 광이 나도록 닦여 있었으며, 미늘 갑옷을 입은 어깨에는 진홍색 망토가 달려 바람에 휘날리고 있었다. 황금 혁대쇠가 달린 넓은 상어가죽 혁대에는 지니고 다니는 칼을 넣은 칼집을 차고 있었다. 뿔 달린 투구 아래에서 네모 바듯하게 잘린 검은 머리카락에 이글거리는 푸른 눈이 두드러졌다.

 “함께 여행할 거라면,” 선장이 운을 뗐다. “사이좋게 지내는 게 좋겠네. 내 이름은 티토야. 아르고스 항의 인가를 받은 선장이지. 구슬, 실크, 설탕, 청동 검자루가 달린 검들을 흑인 왕들에게 팔고, 상아, 말린 대추야자, 구리 원석, 노예와 진주를 사러 쿠쉬로 향하고 있어.”

 그러자 검사는 고개를 돌려 빠르게 멀어지는 부두를 힐긋 바라보았다. 부두에서는 사람들이 여전히 헛되이 손짓들을 해대며 법석이고 있었다. 빠른 갤리선을 따라 잡을 수 있을 만큼 잽싼 배를 찾지 못한 게 분명했다.

 “난 코난이네. 심메리아인이고.” 그 자가 대답했다. “일자리를 찾아 아르고스로 왔네만, 전쟁이 일어날 기미가 보이지 않으니 할 일은 별로 없었지.”

 “왜 근위병들이 당신은 쫓는 거지?” 티토가 물었다. “우리가 알 바는 아니지만, 내 생각에는 아마도 -”

 “뭐, 숨길 것은 없어.”심메리아인이 대답했다. “크롬 신의 이름을 걸고 말하지만, 내 비록 당신네들 문명인들 사이에서 꽤나 많은 시간을 보냈지만, 당신에 방식들은 여전히 이해하기 어렵더군.

  그러니까 어젯밤 술집에서 왕실 근위대의 한 장교가 한 젊은 군인의 연인에게 손찌검을 했어. 당연히 그 젊은 군인이 칼을 뽑았지. 그런데, 근위병을 죽이면 안 된다는 망할 법이 있더군. 그래서 군인과 그 애인은 도망을 쳤고. 문제는 내가 그네들과 함께 있는 것을 누군가 봤다고 소문이 나서 오늘 법정에 끌려갔게 됐어. 그 젊은 군인이 어디로 갔냐고 판관이 내게 묻더군. 그래서 내, 대답했지. 난 친구를 배신할 수는 없다고. 그렇게 말하니 법정이 분노로 일렁이더군. 판관이 국가와 사회와 그 밖에 다른 것들에 대해 내가 잘 모르겠는 소리를 한참을 주워섬기고는 내 친구가 어디로 도망갔는지 말하라고 명령했어. 이쯤 되니 나도 슬슬 화가 나더군. 이미 내 입장을 설명했는데 말이야.

 하지만 화를 참고 침착하게 있었더니 판관이 내가 법정을 모독했다고 소리를 질러대면서 지하 감옥에 쳐 박혀서 친구를 배신할 때까지 썩어보라고 했어. 보아하니 다들 미쳤더구먼. 그래서 칼을 뽑아 그 판관 놈 두개골을 갈라 줬지. 그리고 칼을 휘둘러 법정을 빠져 나와서는 고위 장관 나리의 말이 근처에 묶여 있기에 냅다 타고 부두로 달려 온 거지. 여기 오면 외국 항구로 가는 배를 찾을 수 있을 것 같아서.“       

 “흠,” 티토가 대뜸 말했다. “그 놈의 법정이 부유한 상인들하고 소송이 붙기만 하면 나는 빚진 게 아무것도 없는데도 생돈을 뜯어간 게 한 두 번이어야 말이지. 이 항구에 다시 정박하게 되면 심문을 받게 되겠군. 하지만 협박을 당해 어쩔 수 없었다고 증명 할 수 있어. 검은 치우는 게 어떤가. 우리는 모두 평화로운 뱃사람들이고, 자네랑 싸울 이유가 없어. 그리고 자네 같은 전사가 배에 있는 것도 괜찮지. 선미 갑판으로 올라가서 맥주나 한 잔씩 걸치자고.”

 “좋지.” 코난이 검을 검집에 집어넣고 흔쾌히 대답했다.

 아르구스 호는 작고 단단한 배였다. 해안을 끼고 돌아다니며 절대 탁 트인 대양 멀리 나서는 모험을 하지 않았다. 징가라와 아르고스, 남쪽 해안들의 부두들 사이를 돌아다니는 전형적인 무역선이었다. 고물은 높고, 이물 역시 높은 곡선 모양 이었다. 배의 중간 부분은 불룩 튀어나왔다가 이물과 고물로는 아름답게 경사가 진 모습을 하고 있었다. 선미루 갑판에서 이어진 긴 버팀줄이 배를 움직이고 있었고, 작은 돛의 도움을 받는 넓은 줄무늬 비단 돛이 배의 주 추진력이었다. 노들은 작은 만과 내포에서 방향을 바꾸어 돌아 나오거나 바람이 없을 때 사용되고 있었다. 노는 옆면에 각각 열 개, 작은 중갑판의 선수와 후미에 각각 다섯 개 씩 있었다. 화물 중 가장 중요한 물건들이 이 갑판과 선수 갑판 아래에 단단히 묶여서 실려 있었다. 선원들은 갑판 위나 노꾼들이 앉는 벤치 사이에서 잤고, 악천 후 시엔 차양을 쳐서 머리를 피했다. 스무 명이 노를 저었고, 세 명이 버팀줄을 담당했으며, 선장이 까지해서 선원을 완벽히 갖추고 있었다.

 아르구스 호는 계속 남쪽으로 나아갔다. 날씨는 계속 화창했다. 태양은 매일 맹렬한 열기를 쏘아대는 가운데, 차양이 세워졌다. 빛나는 돛과 이물과 이물을 따라 있는 번쩍이는 금박 장식과 잘 어울리는 줄무늬 비단 차양이었다. 

 솀의 해안이 눈에 들어왔다. 멀리 도시의 하얀 탑들을 흰 왕관처럼 쓰고 있는 구릉진 목장 지대가 길게 펼쳐져 있었다. 검푸른 수염과 매부리 코의 기병들이 해안을 따라 말안장에 앉아 갤리 선을 의심쩍게 바라보고 있었다. 아르구스 호는 해안에 배를 대지 않았다. 솀인들과의 거래에는 이문이 거의 남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티토는 스틱스 강이 대양으로 어마어마한 물을 쏟아내고 거대한 케미의 검은 성들이 푸른 물을 굽어보는 넓은 만에도 배를 대지 않았다. 배들은 이 항구에 허가를 받지 않고는 배를 댈 수가 없었다. 이곳은 암흑의 마법사들이 피로 얼룩진 제단에서 영원히 피어오르는 희생물의 검은 연기 속에서 끔찍한 주문들을 외우는 곳이었다. 벌거벗은 여인들이 희생의 제단에서 비명을 지르고, 하이퍼보리아 인들에게는 대 악마요, 스티지아 인들에게는 숭배하는 신인 옛 뱀, 세트 신이 숭배자들 가운데 빛나는 똬리를 틀고 있다고들 하는 곳이었다.

 티토 선장은 유리가 깔린 것 같이 물결이 잔잔한 그 환상적인 만에 절대 배를 정박 시키지 않았다. 이물이 뱀모양인 곤돌라가 성들이 들어선 곶에서 쏜살같이 달려와 머리에 빨간 꽃을 꽂은 벌거벗은 검는 여인들이 선원들을 부르며 노골적인 몸짓을 한다 해도 꿈쩍하지 않았다.    

 이제는 내륙에 솟은 빛나는 탑들이 더 이상 보이지 않았다. 스티지아의 남쪽 국경을 지나 쿠쉬 해안을 따라 항해 중이었다. 바다와 바다의 이치는 북쪽 고지대의 산악지역에서 태어나 자란 코난에게는 끝없는 신비였다. 하지만 코난과 같은 종족을 본 적이 거의 없는 다부진 뱃사람들에게는 코난 역시 마찬가지로 관심의 대상이었다.

 이들은 작고 다부진 체격의 전형적인 아르고스의 뱃사람들이었다. 코난은 이들을 굽어볼 정도로 키가 컸고, 이들 둘을 합쳐도 코난의 힘에 당할 수 없었다. 이들도 강하고 튼튼했지만, 코난의 힘은 늑대의 지구력과 생기였고, 근육은 강철같이 단단했고, 배포는 세계에서 손꼽히는 거친 황무지의 삶의 역경으로 갈고 닦은 터였다. 코난은 잘 웃고 화도 불같이 잘 냈으며, 대담무쌍한 참호병였으며, 독한 술은 코난에게 있어 열정이자 약점이었다. 여러 면에서 어린 아이처럼 순진했으며, 문명의 복잡함을 잘 몰랐다. 타고난 지능은 뛰어났으며, 자신의 권리를 탐했고, 배고픈 호랑이처럼 위험했다. 나이는 젊었지만, 많은 전쟁과 방랑으로 단련되어 있었고, 많은 나라를 떠돌았던 흔적은 걸치고 있는 옷에 여실히 드러났다. 뿔 달린 투구는 노드하임의 금발머리 애시르 인들이 쓰는 것 이었고, 쇠사슬 갑옷과 정강이받이는 코스 장인들의 빼어난 솜씨로 만든 것이었으며, 팔과 다리에 걸친 멋진 사슬 갑옷은 니메디아의 것에, 허리에 찬 검은 아퀼로니아의 날 넓은 검이고, 멋진 진홍빛 망토는 오피르 이외에서는 짜지 못하는 옷감이었다.

 아르구스 호는 남쪽으로 나아갔고, 티토 선장은 흑인들 마을의 높은 벽들을 찾기 시작했다. 하지만 해안에는 연기가 피어오르는 폐허와 벌거벗은 흑인들의 시체들뿐이었다. 티토가 욕설을 내뱉었다.

 “지난 번 여기서 교역을 했었는데. 해적들 짓거리야.”

 “우리가 해적들과 마주치면 어떻게 할 건데?” 코난이 칼집에서 큰 검을 뽑으며 말했다.

 “이 배는 전투함이 아냐. 우리는 싸우지 않고 도망치지. 하지만, 위기에 처하면 전에도 약탈자들을 물리친 적이 있으니 싸워야지. 벨리트의 티그레스 호만 아니면 말이지.”

 “벨리트가 누군데?”

 “악명 높은 여자 해적이지. 표식을 잘못 읽지 않았다면 저 만의 마을을 파괴한 건 그 여자가 거느린 해적떼야. 살다 보면 그 여자가 활대 끝에 매달리는 꼴을 보는 날도 있겠지. 벨리트는 검은 해안의 여왕이라 불리는 여자야. 솀 족 여인인데 흑인 해적무리를 이끌지. 그 해적 무리는 짐배들을 약탈하고 많은 선량한 무역상들을 저승으로 보냈어.”

 선미루 갑판 아래에서 티토는 누빈 가죽조끼, 쇠투구와 활과 화살 등속을 꺼내 왔다.

 “잡히면 저항해도 거의 소용이 없을 테지만,” 티토가 투덜거리며 말을 이었다. “하지만 싸워보지도 않고 죽는 건 속이 편치 않아서 말이지.”

 

 파수꾼이 경고의 외침을 지른 것은 막 동이 텄을 때였다. 기다란 배 한 척이 우현으로 보이는 섬의 긴 곶을 돌아서 미끄러지듯 물살을 헤치고 오고 있었다. 길쭉한 뱀 모양의 갤리선으로 이물부터 고물까지 높은 갑판이 이어져 있었다. 측면마다 40개의 노가 물살을 빠르게 헤치며 배를 움직이고 있었고, 낮은 난간에는 벌거벗은 흑인들이 노래를 하고 창으로 타원형 방패를 두들기며 우글거렸다. 돛대에는 진홍색 긴 깃발이 휘날리고 있었다.                     

 “벨리트야!” 티토가 하얗게 질리며 외쳤다. “서둘러라! 기수를 돌려! 강어귀로 들어간다. 저들이 우리를 잡기 전에 해변으로 배를 올리면 살아서 도망칠 기회가 생겨.”

 그래서 아루구스 호는 급선회를 해서 야자수가 늘어선 해안을 따라 철썩거리는 파도를 향해 전속력을 냈다. 티토는 정신없이 왔다 갔다 하며 가쁜 숨을 몰아쉬는 노꾼들에게 더 힘을 내라고 재촉해 댔다. 선장의 검은 수염은 일어서 있었고, 눈은 이글거리고 있었다.

 “나한테 활을 주게.” 코난이 요청했다. “남자가 쓸 무기라고 생각하지 않지만, 하이르카니아 인들과 함께 지낼 때 활쏘기를 배웠으니까. 저 쪽 갑판에 사람을 못 맞춘 다해도 저쪽이 애는 좀 먹게 만들어야지.”

 코난은 선미루 갑판에 서서 잽싸게 물살을 헤치며 달려오는 뱀 모양의 배를 지켜보았다. 뱃사람이 아니었어도 코난의 눈에도 아르구스 호가 이 경주를 절대 이길 수 없으리라는 것은 뻔히 보였다. 해적의 갑판에서는 이미 화살들이 날아와 이쪽 배의 고물에 채 스무 걸음도 남겨놓지 않고 휙휙 소리를 내며 바다로 떨어지고 있었다.    

 “맞서는 게 상책이야!” 코난이 고함을 질렀다. “안 그러면 우리 모두 칼 한번 휘두르지 못하고 등에 화살을 맞아 죽게 돼.”

 “힘을 내라, 얘들아!” 티토가 억센 주먹을 격하게 휘두르며 소리쳤다. 노꾼들은 투덜거리며 노를 힘껏 끌어올렸다. 근육들이 솟아오르며 뭉쳤고, 땀이 송골송골 피부에 맺히기 시작했다. 사람들이 물살을 가르고 거칠게 배를 몰자 작고 튼튼한 갤리선의 목재가 삐걱거리며 신음 소리를 냈다. 바람이 이미 잦아들어서 돛은 맥없이 늘어져 있었다. 약탈자들은 점점 더 가까이 다가오고  있었고, 파도까지는 1마일은 족히 남았을 때 키잡이 중 하나가 목에 긴 화살이 꽂히며 버팀줄 너머로 쓰러졌다. 티토가 얼른 뛰어가 그 자리를 메웠다. 코난은 들썩이는 선미루갑판에 단단히 발을 딛고 서서 활을 들어 올렸다. 코난은 적들은 이제 똑똑히 볼 수 있었다. 노잡이들은 배 측면을 따라 세워놓은 짧은 방패로 보호받고 있었지만, 좁은 갑판에서 펄쩍거리는 전사들은 온전히 다 드러나 보였다. 이들은 몸에 칠을 하고 깃털을 꽂고 있었으며, 거의 벌거벗다시피 하고 창과 점무늬 방패를 흔들고 있었다.

 이물의 높은 단 위에 한 늘씬한 사람이 서 있었다. 그 하얀 피부가 주변의 번들거리는 흑단 피부들 가운데 눈이 부시도록 두드러지며 빛났다. 코난은 활줄을 귀까지 잡아 당겼다. 그리고는 알 수 없는 변덕이나 거리낌 때문인지 손을 멈추었다가  여자 옆의 키 큰 깃털 장식을 한 창을 든 이에게 화살을 날려 관통시켰다.

 해적들의 갤리선은 티토의 갤리선을 차츰 따라잡고 있었다. 아르구스 호 주변에는 화살이 비 오듯 쏟아졌고, 선원들이 비명을 질러댔다. 키잡이들은 모두 활살을 맞아 쓰러졌고, 티토 혼자서 거대한 버팀줄들을 다루고 있었다. 지독한 욕설을 퍼붓는 티토의 다리에는 근육들이 뭉쳐 불끈거렸다. 순간 헉, 하는 소리와 함께 티토가 주저앉았다. 긴 화살이 티토의 튼튼한 심장을 꿰뚫었던 것이다. 아루구스 호는 앞으로 더 나아가지 못하고 파도가 일렁이는 대로 흔들렸다. 사람들이 혼란 속에 소리를 지르자 코난이 예의 명령을 내리기 시작했다.

 “기운 내!” 코난이 화살을 윙, 소리가 나게 쏘아 보내며 고함을 쳤다. “무기를 잡아라. 우리 목이 따이기 전에 이 개자식들에게 쓴 맛을 보여주자고. 이제는 노를 더 저어봤자 소용없어. 노를 저어 도망가도 곧 저들이 배에 오를 것이다!”

 자포자기해서 선원들은 노를 포기하고 무기들을 잡았다. 용감하기는 했지만 소용없는 짓이었다. 해적들이 덮치기 전에 화살을 한 바탕 날린 시간뿐이었다. 버팀줄을 조종하는 이가 한명도 없기에 아르구스 호의 뱃전은 흔들거리고 있었는데, 해적선의 뾰족한 강철 이물이 가운데 부분을 들이 받아 왔다. 갈고리가 달린 닻들이 배의 측면을 긁으며 날아들었다. 높은 뱃전에서 검은 해적들은 화살들을 날려 선원들의 누빈 조끼들을 뚫었고, 창을 들어 학살을 마무리 하려 했다. 해적선의 갑판에는 코난이 열심히 활을 날려서 여섯 구의 시체가 나동그라져 있었다.

 아르구스 호 선상에서의 싸움은 짧은 유혈전이었다. 다부진 선원들은 키 큰 야만인들의 상대가 되지 못하고 쓰러져 갔다. 전투는 다른 곳에서 극적으로 변했다. 코난이 있는 선미루 갑판은 높아서 해적선 갑판과 높이가 같았다. 강철 이물이 아르구스 호를 들이받자, 그 충격에 코난은 몸을 움츠려 넘어지지 않도록 발에 힘을 주었다가 들고 있던 활을 버렸다. 키 큰 해적 하나가 난간너머로 튀어나오다가 허공에서 코난의 칼을 받았다. 칼은 해적의 상반신을 깨끗이 갈라 그 몸은 두 동강이 나면서 떨어져 나갔다. 그리고는 코난은 분노로 달려들어 뱃전에 엉망이 된 시신들을 수북이 쌓여 있는 난간을 넘어 티그레스 호의 갑판에 섰다.

 일순 코난은 찔러오는 창과 내려치는 몽둥이세례 중앙에 서 있었다. 그러나 코난은 검을 눈이 멀도록 휘두르며 움직였다. 창들이 갑옷을 찌르며 구부러지거나 허공을 갈랐고, 코난의 검은 죽음의 노래를 불러댔다. 자신의 종족 특유의 전투의 광기에 취하고 이글거리는 눈앞에 붉은 안개로 밀려드는 맹목적인 분노에 휩싸여 코난은 두개골을 가르고, 가슴을 짓이기고, 사지를 잘라내고, 내장을 쏟게 만들며 갑판을 피와 뇌수로 범벅이 된 도살장으로 만들었다.

 돛대에 등을 대고 갑옷을 입어 끄떡없이 적들이 분노와 공포로 헐떡이며 뒤로 물러설 때까지 발치에 으스러진 시신들의 더미를 쌓았다. 그리고 적들이 던지려고 창들을 들자 코난은 적들에게 덤벼들어 그 중에서 죽으려고 몸을 긴장시키고 있었다. 그때 날카로운 목소리에 창을 든 팔들이 얼어붙었다. 이들은 동상들처럼 가만히 서 있었다. 흑인 거한들은 창을 던지려고 팔을 치켜들고, 갑옷을 입은 검사는 피가 뚝뚝 듣는 검을 든 상태로.

                

 벨리트가 흑인들의 창을 쳐 내리며 앞으로 뛰어 나왔다. 그리고는 코난을 향해 돌아섰다. 가슴을 들썩이며 눈을 빛내고 있었다. 코난의 심장은 놀라서 멈추는 듯 했다. 날씬한 벨리트는 마치 여신과 같은 형상이었다. 나긋나긋하면서도 요염했다. 걸치고 있는 옷이라고는 허리에 두른 넓은 실크 허리띠뿐이었다. 하얀 상아빛 팔 다리와 봉긋하게 솟은 가슴을 보자, 노기어린 전투의 헐떡임 속에서도 맹렬한 열정의 고동이 코난의 맥을 훑고 지나갔다. 스티지아의 밤처럼 새까만 그녀의 머리는 나긋나긋한 등까지 물결치며 흘러내리고 있었고, 검은 눈동자는 코난을 응시하며 타오르고 있었다.

 여인은 사막의 바람처럼 길들여 지지 않고 자유로웠고, 암표범처럼 유연하고 위험했다. 자기 편 전사들의 피가 뚝뚝 듣는 코난이 든 큰 검은 아랑곳 않고 여인이 코난에게 가까이 다가왔다. 여인의 부드러운 허벅지가 칼을 스칠 만큼 가까이 이 키 큰 전사 가까이 접근해 왔다. 여인은 코난의 위협적인 눈을 빤히 들여다보며 그 붉은 입술을 열었다.

 “당신은 누구지?” 여인이 물었다. “이쉬타르 여신의 이름으로 말하는 데, 난 징가라의 해안에서부터 남쪽 끝의 타오르는 불까지 돌아다녀 봤지만, 당신 같은 이는 본 적이 없어. 어디서 왔지?”

 “아르고스에서 왔다.” 코난이 함정에 빠질까 경계하며 짤막하게 대답했다. 허리에 차고 있는 보석 박힌 단도로 그녀의 가느다란 손이 움직이기라도 하면 맨손으로, 여인을 때려 눕혀 의식을 잃고 갑판에 쓰러지게 만들어 놓을 준비가 되어 있었다. 그러나 마음속으로는 아무것도 두렵지 않았다. 문명인이건 야만인이건 여인들을 그 강철 근육이 불끈거리는 팔로 수도 없이 품어 본 지라 이 여인의 눈에서 타오르는 빛을 알아채지 못할 리가 없었다.

 “당신은 물러빠진 하이보리아인은 절대 아냐!” 여인이 외쳤다. “회색 늑대처럼 강하고 단단한 걸. 그 눈은 도시의 불빛으로 흐려져 본 적 없는 눈이고, 그 근육들은 대리속 벽들에 둘러싸여 풀어진 적이 없는 근육이야.”

 “난 심메리아인 코난인다.” 코난이 대답했다.

 이국인들에게 북쪽은 반쯤은 신화 속에나 존재하는 알 수 없는 지역이었다. 검과 횃불을 든 푸른 눈의 맹렬한 거한들이 얼음처럼 빠르게 내려오는 곳이었다. 북구인들은 솀이 있는 곳까지 남쪽으로 내려온 적이 없었기에 이 솀인의 딸은 애시르인, 바니르인, 심메리아인을 구별하지 못했다. 태고적 여성의 흔들림 없는 본능으로 여인은 자신의 연인을 찾았다는 것을 알았다. 먼 이국의 매력을 띠고 있다는 점을 제외하고는 그가 어느 종족 출신이지는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난 벨리트.” 여인이 누가 묻기라도 한 양 외쳤다. “난 여왕이야!”

 “날 봐, 코난.” 여인이 팔을 활짝 펴며 말했다. “나는 벨리트고, 검은 해안의 여왕이지. 당신은 북쪽의 호랑이처럼 당신을 키운 눈 덮인 산만큼이나 차갑군. 당신의 강렬한 사랑으로 날 이끌어서 안아 줘. 나와 함께 이 땅 끝까지 바다의 끝까지 가보자고! 나는 불과 쇠와 살육으로 여왕이야. 그러니까 당신이 내 왕이 되어 줘.

 코난은 눈을 들어 피에 물든 무리들이 행여  분노나 질투의 표정을 짓나 살펴보았다. 그런 표정은 찾을 수 없었다. 검은 얼굴들에서 분노는 사라지고 없었다. 이 자들에게 벨리트는 단순한 여인 이상임을 깨달았다. 벨리트는 그들에게 의문의 여지없는 여신이었던 것이다. 코난은 아르구스 호를 힐긋 바라보았다. 아르구스 호는 진홍빛 바닷물에 기우뚱거리며 네 갈고리 닻들이 꽂혀 갑판은 내려앉고 바닷물이 갑판으로 넘어 들어오는 채 저 멀리 매달려 있었다. 이번에는 푸른 숲이 우거진 해안과 아찔한 녹색의 대양과 눈앞에 서 있는 생명이 넘치는 여인을 바라보았다. 코난 내부의 야만의 영혼이 들썩였다. 이 하얀 피부의 젊고 빛나는 암삵쾡이  같은 여인과 빛나는 푸른 바다에서 모험을 즐긴다니...사랑하고 웃고 떠돌고 약탈하며.

 “당신과 함께 하지.” 코난이 투덜거리듯 말하며 검에서 핏방울을 털어버렸다.

 “이봐, 은야가!” 벨리트의 목소리는 튕겨져 나가는 화살 같았다. “가서 약초를 가지고 와서 주인님의 상처를 싸매드려. 나머지는 약탈물을 싣고 줄을 끊어버려.”

 코난이 선미루 갑판 난간에 등을 기대고 앉자 늙은 주술사가 와서 손과 팔 다리에 베인 상처들을 치료해 주었다. 불운한 아르구스 호의 화물들은 재빨리 티그레스 호로 옮겨져 갑판 아래 작은 선실들에 보관되었다. 선원들과 해적들의 시체들은 몰려든 상어떼에게 던져 주었고, 부상당한 흑인들은 치료를 기다리며 상갑판에 눕혀졌다. 네 갈고리 닻을 아르구스 호에서 떼어내자, 배는 피로 물든 바다 속으로 조용히 가라앉았고, 티그레스 호는 노를 리듬에 맞춰 삐걱거리며 저으며 남쪽으로 기수를 돌렸다.

 유리같이 깊고 잔잔한 푸른 바다로 나오자 벨리트가 선미루 갑판으로 왔다. 장신구와 샌들과 실크 허리띠를 벗어서 코난의 발치에 던지는 그녀의 눈은 암흑 속 표범의 눈처럼 빛나고 있었다. 발끝으로 서서 팔을 쭉 치켜 든 채 그 하얀 나신을 떨며 애타는 무리에게 소리를 쳤다.

 “푸른 바다의 늑대들아, 내 춤을 보아라. 아스칼론 왕의 자손, 벨리트가 추는 사랑의 춤이다!”

 그리고 그녀는 춤을 추었다. 사막의 회오리바람이 부는 것처럼, 꺼질 줄 모르는 불꽃이 튀는 것처럼, 창조의 힘과 죽음의 힘이 어우러진 것처럼 춤을 추었다. 그녀의 하얀 발이 피로 물든 갑판 위를 맴돌자 죽어가는 남자들이 그녀를 쳐다보느라 죽음도 잊었다. 푸른 벨벳 같은 어스름을 헤치고 하얀 별들이 빛나기 시작하자 춤을 추는 그녀의 몸은 상아빛 불꽃이 되었다. 그녀가 거칠게 소리치며 코난의 발치에 몸을 던지자, 코난은 헐떡이는 그녀를 검은 갑옷을 입은 가슴으로 억세게 끌어당겨 안으며 솟구치는 맹목적인 욕정에 모든 일을 잊었다. 


2장. 검은 연꽃


돌무더기가 쌓인 그 죽음의 요새에서

그녀의 눈은 부정한 광채에 끌렸나니,

또 다른 연인이 검으로 찌르듯

알 수 없는 광기가 내 목을 채었다.

                      - 벨리트의 노래


 티그레스 호가 바다를 이리저리 돌아다니자, 흑인들의 마을은 벌벌 떨었다. 밤이면 북소리가 울려 악마 같은 여인에게 연인이, 분노하면 상처 입은 사자처럼 포효하는 짝이 생겼노라 알렸다. 살육당한 스티지아 배들의 생존자들은 벨리트의 이름을 부르며 욕설을 내뱉었고, 타오르는 듯한 푸른 눈을 가진 백인 전사가 있었노라 말했다. 그리하여 스티지아의 군주들은 이 남자를 이후로도 오래도록 기억했고, 훗날 이 쓰디 쓴 기억은 핏빛 열매를 맺게 되었다.

 그러나 떠도는 바람처럼 표표히 티그레스 호는 남쪽 해안들을 따라 항해했고, 그러다 한 음산한 넓은 강어귀에 정박을 했다. 강둑에는 신비로운 정글이 빽빽이 우거져 있었다. 

 “이 강은 자르크헤바 강이야. 죽음이라는 뜻이지.” 벨리트가 말했다. “이 물은 독성이 있어. 저 강물이 얼마나 시커멓고 흐린지 한번 봐. 독 있는 파충류들만 이 강에서 살아. 흑인들은 이 강을 피해 다녀. 한 번은 스티지아 배 한 척이 우리 해적선에서 도망쳐서 강을 따라 올라갔다가 사라졌어. 우리 배는 바로 여기에 닻을 내리고 기다렸지. 며칠 후 그 갤리 선이 검은 물을 따라 흘러내려왔어. 갑판은 피투성이에 사람은 하나도 안보이더라고. 딱 한 사람만 타고 있었는데, 미쳐서 알 수 없는 말을 중얼거리며 죽었어. 화물은 손도 안댄 채 그대로 였는데, 선원들은 침묵과 신비 속으로 사라져 버렸지.

 코난. 나는 이 강 어디인가에 도시가 있다고 믿어. 용기를 내서 강을 반쯤 따라 올라갔던 선원들이 거대한 탑들과 벽들을 얼핏 보았다는 이야기들을 들었어. 우린 두려울 게 없잖아, 코난. 가서 그 도시를 털자!”

 코난은 동의했다. 벨리트의 계획에는 대체로 동의하는 편이었다. 그녀가 약탈을 지휘하는 머리 역할을 하면, 그의 팔이 그녀의 생각대로 움직였다. 항해하며 싸우기만 한다면, 어디를 항해하는지, 누구와 싸우는지는 코난에게 중요치 않았다. 삶이 만족스러웠다.

 전투와 약탈로 선원들 숫자는 줄어들어 있었다. 팔십 명의 창병들이 남아서 긴 갤리선을 간신히 움직일 수 있었다. 그러나 벨리트는 해적들을 충원하는 섬 왕국이 있는 남쪽으로 시간을 내 가려고 하지를 않았다. 그녀는 최근 모험에 한껏 도취되어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티그레스 호는 강어귀로 들어갔다. 노꾼들이 힘껏 노를 잡아당기자 배는 커다른 조류를 가르고 돌진했다.

 이름모를 모퉁이를 감아 돌자 바다가 더 이상 보이지 않았다. 이상한 피충류들이 똬리를 틀고 있는 모래톱들을 피해 배가 느린 흐름을 애써 거슬러 올라갈 때 석양이 뉘엿거리고 있었다. 악어 한 마리도 눈에 띄지 않았다. 네발짐승이나 새 한 마리조차도 물을 마시러 물가로 오는 모습을 볼 수가 없었다. 달이 떠오르기 전 펼쳐진 어둠을 헤치고 칠흑 같은 암흑의 장막이 드리워진 강둑 사이로 이들은 계속 앞으로 나아갔다. 강둑에서는 알 수 없는 부스럭대는 소리, 살금거리는 발걸음 소리가 들렸고, 어두운 눈이 번뜩거리는 것이 보였다. 인간의 것이 아닌 목소리, 유인원의 울부짖음이 끔찍한 조롱이라도 하는 듯 들려오자 벨리트는 악한 이들의 영혼이 과거 저지른 죄에 대한 벌로 인간처럼 생긴 동물의 육신에 갇혀 있는 거라 말했다. 하지만 코난은 그 말을 믿을 수가 없었다. 이전에 하이르카니아의 한 도시에서 금빛 창살 우리에 갇힌 동물을 보았기 때문이었다. 깊은 슬픔을 지닌 그 동물을 사람들은 유인원이라 불렀고, 지금 저 어두운 정글에서 메아리치는 찢어지는 듯한 웃음소리 속에 맴도는 덕과 같은 악의는 그 유인원에게서는 한 치도 찾아볼 수 없었다. 

 이윽고 달이 떠올랐다. 검은 테가 둘러진 핏빛 원으로 떠올랐다. 정글이 온통 법석을 떨며 달을 맞으러 깨어났다. 울부짖는 소리, 으르렁거리는 소리, 찢어지는 외침에 흑인 전사들이 벌벌 떨었다. 코난이 보아하니 이 소리들은 모두 정글의 속 저 멀리에서 들려오고 있었다. 인간이 아닌 짐승들은 자르크헤바의 검은 물을 모두 피하는 듯 싶었다.

 나무들이 이루는 빽빽한 어둠과 넘실거리는 잎들 위로 달이 떠올라 강물 위에 은빛으로 부서졌다. 배가 지나간 자리에는 보석이 부서지며 길이 만들어져 넓게 퍼져 가는 것처럼 인광성 거품이 물결을 일으키며 번쩍였다. 노들은 빛나는 물속에 잠겼다가 차가운 은빛 막으로 덮여 물 위로 솟구치기를 반복하고 있었다. 전사가 머리에 쓴 투구에 꽂힌 깃털은 바람에 까딱거렸고, 검자루에 박힌 보석과 갑옷이 차갑게 반짝거렸다.

 벨리트가 갑판 위에 깔린 표범 가죽위에 누워 그 유연한 몸으로 기지개를 켜자 그 숱 많은 검은 머리채에 차가운 달빛이 부서져 얼음 불꽃이라도 지피는 것 같았다. 팔꿈치를 괴고 손바닥에 턱을 묻은 채 벨리트는 옆에서 쉬고 있는 코난의 얼굴을 가만히 올려다보았다. 코난의 검은 머리칼이 희미한 미풍에 날리고 있었다. 벨리트의 눈은 달빛 속에서 타오르는 검은 보석 같았다.

 “신비와 공포가 주변에 도사리고 있어. 코난, 우리는 지금 죽음과 공포의 땅으로 들어가고 있는 거야. 두려워?”

 코난은 갑옷을 걸친 어깨를 으쓱해 보이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나도 안 무서워.” 벨리트가 생각에 잠긴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두려워 해본 적 없어. 죽음의 적나라한 송곳니를 너무도 자주 봤거든. 코난. 신을 두려워 해?”

 “신들의 그림자를 밟고 싶지는 않아.” 코난이 보수적인 대답을 했다. “어떤 신들은 강해서 해를 끼치고, 어떤 신들은 강해서 도와주지. 최소한 그렇다고 신을 모시는 자들이 말해잖아. 하이보리아인들이 섬기는 미트라 여신은 강한 신이야. 하이보리아 인들이 전 세계에 걸쳐 도시를 세운 것을 보면. 하지만 하이보리아인들조차도 세트 신은 두려워하지. 그리고 도둑의 신인 벨 신도 좋은 신이야. 내가 잠모라에서 도둑 행세를 했을 때 벨 신을 알게 됐어.”

 “당신이 믿는 신은 누군데? 당신이 믿는 신 이름을 부르는 걸 들은 적이 없어.”

 “내가 믿는 신들의 왕은 크롬이야. 크롬 신은 위대한 산에 살아. 의지해도 소용없어. 인간이 죽든 살든 크롬은 신경 쓰지 않거든. 크롬을 부르느니 입을 다무는 게 낫지. 크롬은 행운을 보내는 게 아니라 죽음을 보내거든. 크롬은 음울하고 냉정하지만, 인간이 태어날 때 싸우고 사람의 영혼을 도륙할 힘을 불어 넣어 주지. 인간이 그 밖에 신에게서 바랄 게 더 뭐가 있겠어?”

 “하지만 죽음의 강 너머에 있는 이승은 어쩌고?” 그녀가 끈질기게 물었다.

 “우리 종족의 종교에는 여기나 여기 이후에 가게 되는 곳에도 희망은 없어.” 코난이 대답했다. “이 세상에서 인간은 헛되이 투쟁하고 고통 받으며, 전투의 빛나는 광기 속에서나 기쁨을 구하지. 죽어가면서 인간의 영혼은 구름과 차가운 바람이 어우러진 뿌연 회색 지대로 들어가 영원의 세계를 기쁨 없이 맴도는 거야.”

 벨리트가 몸을 부르르 떨었다. “삶은 아무리 지독해도 그런 운명보다는 나아. 코난, 당신은 뭘 믿는 거지?”

 코난은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나는 많은 신들을 보아 왔는데, 신을 부정하는 자도 신을 지나치게 믿는 자 만큼이나 장님이더군. 난 죽음 너머의 세계는 구하지 않아. 니메디아의 회의론자들이 말하는 데로 죽음 너머는 암흑일지도 모르고, 크롬 신의 얼음과 구름일지도 모르고, 노드하임인들이 믿는 발할라 신의 눈 덮인 평원과 웅장한 전당일지도 모르지. 죽음 너머가 어떨지는 난 알지도 못하고, 알고 싶지도 않아. 살아있는 동안 삶에 취해 살고 싶어. 붉은 고기에서 뚝뚝 듣는 육즙과 혀를 톡 쏘는 포도주와, 하얀 팔들의 포옹과, 시퍼런 칼날이 불꽃을 일으키며 진홍빛 피보라를 일으키는 순간 전투의 광기어린 환희를 느끼며 살면, 그걸로 족해. 선생이나 사제나 철학자들이나 현실과 환상에 대한 문제들을 고민하라고 해. 내가 아는 것은 이거야. 삶이 환상이라면, 나도 환상에 지나지 않는 다는 거지. 그리고 그렇다면 환상은 내게 실재인 거야. 나는 살아가고, 삶으로 불타오르고, 사랑하고, 살육하고, 그리고 만족할 따름이야.”

 “하지만 신들은 정말로 있어.” 벨리트가 자신의 생각을 밀어붙이며 말했다. “그리고 신들 중의 신은 솀인들의 신인 이쉬타르 여신, 아쉬토레쓰 신, 데르케토 신, 그리고 아도니스 신이야. 벨 신도 솀인들의 신이야. 아주 오래전 고대 슈미르에서 태어나, 곱슬거리는 수염과 장난기어린 지혜로운 눈으로 웃으며 나아와 고대 왕들의 보석들을 훔쳤으니까.

 죽음 너머에도 삶이 있다는 것을 난 알아. 그리고, 심메리아인 코난, 내가 아는 것은 또 뭐냐면,” 벨리트는 나긋나긋하게 몸을 일으켜 무릎으로 선 채 표범처럼 유연하게 코난을 감싸 안으며 말을 이었다. “내 사랑은 어떤 죽음보다도 강하다는 거야! 난 당신 팔에 안겨 격렬한 사랑을 맛보았어. 당신은 나를 안고 정복했지. 멍들 정도로 격렬한 키스를 해서 당신 입술로 내 영혼을 앗아갔어. 내 심장과 당신의 심장은 하나야. 내 영혼은 당신 영혼의 일부고. 내가 죽는다면 당신이 목숨을 걸고 싸울 때 죽음에서 돌아와 당신을 도울 거야. 내 혼이 천상의 수정 바다 위에서 보랏빛 돛을 나부끼며 떠다닌다 해도, 아니면 지옥의 뜨거운 불꽅 속에서 몸부림친다 해도 난 돌아올 거야. 난 당신 것이고, 어떤 신도 어떤 영원도 우리를 갈라놓지는 못해!”

 

 이물에 있는 파수꾼이 날카롭게 비명을 질렀다. 벨리트를 옆으로 밀어놓고 코난은 튀어 오르듯 일어났다. 그의 검이 달빛 속에서 길게 은빛으로 빛났다. 눈앞에 벌어지는 일에 코난의 머리칼이 온통 곤두섰다. 그 흑인 전사는 갑판 위에 대롱대롱 매달려 있었다. 뱃전 난간 위로 몸을 드리운 굵고 부드러운 검은 나무줄기 같은 것에 매달려 있었던 것이다. 다음 순간 코난은 거대한 뱀이 번쩍이는 몸을 이물 측면에 대고 올라와 그 운 없는 전사를 낚아 채 턱에 물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물이 뚝뚝 듣는 뱀의 비늘은 뱀이 갑판 위로 높이 몸체를 곧추 세우면서 달빛에 번쩍거렸다. 잡힌 사람은 구렁이 입에 놓인 쥐처럼 비명을 지르며 꿈틀거렸다. 코난은 급히 이물로 달려가 큰 검을 휘둘러서는 남자의 몸통보다도 굵은 뱀의 거대한 몸체를 거의 잘라버렸다. 죽어가는 괴물이 몸부림을 치면서 난간이 피로 물들었다. 뱀은 먹이를 그대로 입에 물고 똬리를 튼 채 강 속으로 가라앉아 버렸다. 물보라를 일으켜 핏빛 거품이 일어나다가 뱀과 사람이 함께 사라져 버렸다.

 이후로 코난이 직접 파수를 섰지만, 검고 깊은 강에서는 어떤 공포스러운 존재도 기어 올라오지 않았다. 새벽이 정글 위로 하얗게 밝아 올 때, 나무들 사이로 검은 탑들이 뾰족하게 솟은 것이 보였다. 코난이 벨리트를 부르자, 코난의 진홍빛 망토를 감고 갑판에서 자던 벨리트는 벌떡 일어나 눈을 빛내며 그의 옆으로 왔다. 입술을 열어 창과 방패를 들라고 전사들에게 명령을 내리려고 하다가, 그 아름다운 눈이 휘둥그레 해졌다.

 이들이 정글이 빽빽한 튀어나온 곶을 지나 안으로 굽어진 해안으로 향해 나아갈 때 눈에 들어온 것은 유령 도시였다. 한 때 거리요, 넓은 광장이요, 넓은 법정이었던 곳에는 잡초와 제멋대로 자란 강가의 풀들이 무너진 선창의 돌들과 흩어진 포석들 사이에 자라고 있었다. 강 쪽으로 트인 부분만 제외하고는 사방에서 정글이 도시로 뻗어 들어와 쓰러진 기둥들을 뒤덮었고, 무너져가는 언덕들은 유독성 식물이 우거져 있었다. 여기저기에 기울어져 가는 탑들이 아침 하늘을 배경으로 술 취한 듯 흔들리고 있었고, 썩어가는 벽들 위로 무너진 기둥들이 삐죽빼죽 튀어나와 있었다. 중앙의 빈 터에는 기둥 하나가 받치는 대리석 피라미드 하나가 솟아 있었고, 그 첨탑 꼭대기에는 무엇인가 앉아있거나 웅크리고 있었다. 코난은 처음에는 동상인 줄 알았지만, 예리한 눈으로 한참을 살펴보고서야 살아있는 생명체라는 것을 알다.

 “커다란 새인뎁쇼.” 전사 중 한 명이 이물에 서서 말했다.

 “괴물 박쥐야.” 다른 전사가 우겼다.

 “유인원이다.” 벨리트가 끼어들었다.

 바로 그때 그 생물이 넓은 날개를 펼치더니 날개를 치며 정글 속으로 사라져 버렸다.

 “날개 달린 유인원이군요.” 은야가가 불안해하며 말을 이었다. “여길 오느니 칼을 물고 죽는 게 낫습니다요. 여긴 유령이 나와요.”

 벨리트가 은야가의 미신을 비웃으며 갤리선을 해안으로 몰아 무너져가는 선창에 배를 정박시키라고 명령했다. 벨리트가 가장 먼저 뭍으로 뛰어 내렸고, 그 뒤를 바짝 쫓아 코난이 내렸다. 검은 피부의 해적들이 우르르 이들 뒤를 따랐다. 아침 바람에 깃털을 나부끼며 창을 들고는 주위 정글을 의심스럽다는 듯 살펴댔다.

 잠자는 뱀의 침묵만큼이나 불길한 고요함이 감돌았다. 벨리트가 폐허들 가운데 멋있게 자세를 잡고 섰다. 그녀의 나긋나긋한 몸에 넘쳐흐르는 생명이 주변의 황막함과 부패와 기묘하게 대조를 이루었다. 태양은 하늘 높이 솟아 이글거리며 음산하게 빛났다. 멍한 황금빛으로 탑들에 내리쬐는 햇살은 휘청거리는 벽들 아래에 꾸물거리는 그림자들을 만들어냈다. 벨리트는 기반이 썩어가면서 휘청 기운 가늘고 둥근 탑 하나를 가리켰다. 여기저기 갈라지고 풀들이 자란 넓은 석판 길이 군데군데 쓰러진 기둥들을 거느리고 그 탑까지 이어져 있었다. 탑 앞에는 거대한 제단이 서 있었다. 벨리트는 이 고대의 석판길을 빠르게 걸어 그 제단 앞에 섰다.

 “옛 신들의 사원이야. 봐. 제단 양 옆에 핏물이 빠지는 고랑이 있잖아. 만 년을 내린 비에도 그 때 생긴 핏 자국이 안 지워졌어. 벽들은 이미 다 허물어졌는데, 이 돌제단은 시간과 자연의 기본 구성에 어긋나는 군.”

 “그런데 이 옛 신들이 누구야?” 코난이 물었다.

 벨리트는 가느다란 손을 체념하듯이 펴 보이며 말했다. “이 도시는 전설 속에도 언급이 안 돼 있어. 하지만 제단 양쪽 끝에 손잡이를 봐! 사제들은 보물들을 종종 제단 아래에 숨기곤 하거든. 거기 네 명이 어디 들어 올릴 수 있나 한번 당겨 봐.”

 벨리트는 이들을 들어설 자리를 내주느라 뒤로 물러나서는 머리 위에 술 취한 듯 기우뚱 드리워진 탑을 올려다보았다. 가장 힘센 흑인 세 명이 돌 속에 새겨진 손잡이를 잡았다. 아상하게도 인간의 손에 맞지 않았다. 그때 벨리트가 뒤로 펄쩍 물러서며 날카로운 비명을 질렀다. 사람들이 그 자리에 얼어붙었고, 제단을 움직이는 것을 도우려던 코난이 놀라 욕설을 내뱉으며 재빨리 몸을 돌렸다.

 “풀숲에 녹색 뱀이 있어.” 뒤로 몰러나며 블레트가 말을 계속했다. “와서 죽여 줘. 나머지는 있는 힘껏 제단의 돌을 옮겨 봐.”

 

 

 코난은 재빨리 벨리트 곁으로 가자 다른 이가 코난의 자리를 맡았다. 코난이 초조하게 뱀을 찾아 풀밭을 훑는 동안 흑인 거한들은 발에 힘을 주고 투덜거리며 검은 피부 아래 근육들을 불끈거리며 힘을 주었다. 제단은 땅에서 떨어지지 않다가 갑자기 한 쪽으로 돌았다. 그리고 동시에 귀에 거슬리는 소리가 우르릉 나더니 탑이 무너져 내려서 떨어지는 돌조각에 네 명의 거한을 깔아뭉갰다.

 공포의 외침이 이들의 동료들로부터 솟아올랐다. 벨리트의 가느다란 손가락이 코난의 팔근육을 파고들었다. “뱀은 애당초 없어.” 벨리트가 속삭였다. “당신을 불러내려는 계책이었어. 걱정이 됐거든. 고대인들은 자기들 보물을 원래 단단히 지켜. 이제 저 돌들을 치우자고.”

  엄청나게 힘을 써서 이들은 으깨진 네 명의 시체를 들어냈다. 그리고 이들의 피로 범벅이 되어서 이들은 시체 아래에서 하나의 돌을 파내서 만든 지하 공간을 발견했다. 제단은 돌로 된 막대와 구멍이 신기하게 경첩을 이루며 한 쪽에 붙어 있어서 뚜껑 역할을 하고 있었다. 처음 봤을 때에 지하 공간은 번쩍거리는 수백만 개의 보석들이 아침 햇살을 받아 타오르는 액체로 테를 두른 듯 보였다. 꿈에서도 차마 보지 못했던 엄청난 보화가 놀라서 입을 벌린 해적들 앞에 놓여 있었다. 다이아몬드, 루비, 혈석, 사파이어, 터키석, 월석, 오팔, 에메랄드, 자수정, 그 밖에 알 수 없는 보석들이 사악한 여인들의 눈들처럼 빛나고 있었다. 그 지하 공간에 입구까지 채워진 빛나는 보석들은 아침 햇살에 일렁이는 불꽃처럼 광채를 발했다.

 소리를 지르며 벨리트가 지하 공간 가장자리 피 묻은 돌들 틈에 털썩 주저앉아서는, 보석들 속으로 어깨가 묻힐 만큼 그 하얀 팔을 밀어 넣었다. 팔을 거두어들이자 또 한 번 외침이 그녀의 입술에서 터져 나왔다. 벨리트는 그 손에 두꺼운 황금실에 얼어붙은 핏방울이 덩어리가 꿰어진 것 같은 긴 선홍색 보석 목걸이를 움켜쥐고 있었다. 보석들의 광채 속에서 황금빛 햇살은 핏빛 아지랑이로 변했다.

 벨리트의 눈은 황홀경에 빠진 여인의 눈 같았다. 솀인은 부와 물질적인 영광에 눈부시게 취하는 사람들이고, 이 보화는 사실 슈샨의 배부른 황제의 영혼도 뒤흔들어 놓을만했다.

 “보석들을 챙겨라!” 벨리트가 감정에 겨워 새된 소리로 외쳤다.

 “보세요!” 한 흑인이 근육질의 검은 팔로 티그레스 호 쪽을 가리켰다. 벨리트는 맞수인 다른 해적인 보화를 뺏으려 달려들기라도 하는 것처럼 선홍색 입술로 으르렁거리며 돌아섰다. 그러나 티그레스 호의 뱃전에서 시커먼 형체가 날아오르더니 정글 위로 솟구치는 것이 보였다.

 “저 유인원 악마가 우리 배를 뒤졌나봅니다.” 흑인들이 불안해하며 중얼거렸다.

 “그게 뭐 어쨌다고?” 벨리트가 허둥지둥 손으로 보석들을 긁어모으며 욕설을 퍼부었다. “창하고 망토로 들것을 만들어서 이 보석들을 나르도록 해. 그런데 당신은 어디 가는 거야?”

 “갤리선을 살펴보려고.” 코난이 무뚝뚝하게 대답했다. “저 박쥐 놈이 배 바닥에 구멍을 내놓았는지도 모르잖아.”

 코난은 재빨리 갈라진 선창을 달려 내려가 배 위로 뛰어 올랐다. 갑판 아래를 빠르게 점검하고는 코난은 한바탕 욕을 퍼부으며 그 박쥐 괴물이 사라진 방향을 어둔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코난은 지하 공간의 보화를 옮기는 것을 지휘하고 있는 벨리트에게 돌아갔다. 벨리트의 목에는 목걸이를 칭칭 감겨 있었고, 벌거벗은 하얀 가슴에는 핏방울 같은 보석이 어둡게 빛나고 있었다. 덩치 큰 흑인이 보화로 가득 찬 지하공간에 가랑이까지 파묻히게 서서는 위에 선 이들에게 보석들을 퍼서 건네주고 있었다. 얼음 같은 무지개 빛 줄들이 그 검은 손에 늘어져 있었고, 붉은 불꽃 방울들이 손에서 뚝뚝 떨어졌으며, 별빛과 무지개빛이 수북이 쌓여 있었다. 마치 검은 거인이 양손 가득 별을 들고 지옥의 눈부신 무저갱에 다리를 벌리고 서 있는 것 같았다.

 “그 날개 달린 악마가 물통에 부수었어.” 코난이 말했다. “우리가 이 보석들에 정신이 팔리지 않았으면, 그 부수는 소리를 들었을 거야. 배를 지키라고 한 명을 배에 두고 오지 않은 게 잘못이야. 이 강물은 마실 수 없잖아. 내가 스무 명을 데리고 가서 이 정글에 마실 물이 있는지 찾아볼게.”

 벨리트는 코난은 흐릿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그 눈에는 기묘한 열정의 공허한 불꽃이 타오르고 있었고, 손가락은 가슴께에 늘어진 보석을 더듬고 있었다.

 “알았어.” 벨리트가 코난의 말을 건성으로 들어 넘기며 무심히 대답했다. “난 보화들을 배에 실어 둘께.”

 

 무성한 정글을 헤치고 들어서니 황금색 햇빛이 회색으로 바뀌었다. 휘어진 녹색 가지에는 파충류들이 구렁이처럼 늘어져 있었다. 전사들은 검은 유령들이 흰 유령 뒤를 따르듯이 원시의 여명을 헤치고 기다시피 하며 일렬로 늘어서서 정글로 들어섰다.

 수풀 아래는 코난이 기대했던 것보다 빽빽하지 않았다. 땅은 푹신 거렸지만, 진창은 아니었다. 강에서 멀어질수록 땅은 점점 높아졌다. 점점 더 깊이 이들은 넘실대는 녹색 잎들을 헤치고 들어갔다. 하지만 흐르는 시내이건 고여 있는 웅덩이이건  물이 있는 기미는 보이지 않았다. 코난이 갑자기 멈춰 섰고, 전사들은 현무암 동상들처럼 얼어붙었다. 긴장 속에 침묵이 이어지더니 코난이 화가 난다는 듯 머리를 흔들어 댔다.

 “계속 가자.” 코난이 투덜거리며 추장 다음 서열인 은고라에게 말했다. “내가 안보일 때까지 앞으로 쭉 가서 멈춰 서서 나를 기다려. 누군가 우리를 따라오고 있어. 무슨 소리가 들려.”

 흑인들은 불안하게 발뒤꿈치들을 끌었지만, 시키는 대로 했다. 이들이 앞으로 계속 나가가자 코난은 재빨리 큰 나무 뒤에 숨어서 자신들이 지나온 길을 노려보았다. 잎이 무성한 녹음 속에서는 어떤 것이든 튀어나올 것 같았다. 하지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앞으로 나아가는 창 든 용사들의 소리가 멀리서 희미해져 갔다. 코난은 공기 중에 낯설고 이국적인 향이 떠도는 것을 문득 느꼈다. 무엇인가 부드럽게 코난의 관자놀이를 스쳤다. 코난은 재빨리 돌아섰다. 이상한 녹색 잎들이 우거진 가지에서 커다란 검은색 꽃들이 까딱거리고 있었다. 이 꽃들 중 하나가 코난에게 닿았던 것이다. 꽃들은 나긋나긋한 가지를 코난 쪽으로 뻗어 올리며 코난에게 인사라도 하는 듯 했다. 바람 한 점 없는데도 꽃들이 흩어지며 부스럭거렸다.

 즙은 독약요, 향기는 꿈에 홀린 잠을 가져다주는 검은 연꽃을 알아보고는 코난은 움츠려 들었다. 하지만 이미 알 수 없는 무기력감이 자신을 은근슬쩍 감싸는 것을 느꼈다. 뱀 같은 줄기를 베어버리려고 검을 들려고 했지만, 팔은 양 옆에 늘어져 꼼짝도 하지 않았다. 입을 열어 전사들에게 소리를 치려고 했지만, 희미하게 달각거리는 서리만 나왔다. 다음 순간 소르끼치도록 갑자기 정글이 그의 눈앞이 흔들거리더니 어두워졌다. 코난은 멀지 않은 곳에서 끔찍한 외침이 터져 나오는 비명 소리를 듣지 못했다. 무릎이 꺾이면서 사지를 늘어트리고 땅으로 풀썩 쓰러졌다. 쓰러진 코난 위로 거대한 검은 연꽃들이 바람도 없는데도 까딱거리고 있었다.


3장. 정글 속의 공포


그 검은 연꽃은 가져다 준 것은 정녕 꿈이었던가?

 그렇다면 내 둔한 생명을 취한 꿈이여, 저주받으라.

그리고 진홍으로 물든 칼날에서 뜨거운 피가 시커멓게 듣는 것을

 보지 못한 더딘 시간이여, 저주받으라.

                               - 벨리트의 노래


 처음에는 완전히 텅 빈 어둠뿐이었다. 우주로 이어진 공간에 차가운 바람들이 스치고 지나갈 뿐이었다. 그리고 어둠이 물질적인 형태라도 취하는 양, 희미하고, 흉측하고, 미미한 형체들이 광대하게 뻗은 무(無)속에 흐릿한 파노라마처럼 펼쳐졌다. 바람이 불며 아우성치는 소용돌이 속에 어둠의 피라미드들이 생겨났다. 형체가 자라 모양과 차원을 갖추었다. 그리고 갑자기, 구름이 흩어지는 것처럼 어둠이 양쪽으로 몰려나가더니 진녹색 돌로 지은 도시가 끝도 없이 펼쳐진 평원을 감아 흐르는 거대한 강의 강둑에 솟아올랐다. 낯선 존재들이 이 도시를 지나다녔다.

 인간의 모양으로 빚어지기는 했으나, 이들은 분명히 인간이 아니었다. 이들은 날개가 달려있었고, 거대한 풍채를 지니고 있었다. 인간의 계보에서 정점을 이루는 진화의 줄기에서 뻗어나간 가지가 아니라, 그 줄기와는 별도로 이질적인 계보에서 원숙한 진화를 이룬 종족이었다. 날개 이외에도 신체적인 용모에서도 인간이 진화의 계보 꼭대기에서 유인원들을 닮은 것처럼 이들은 인간과 닮았었다. 영적, 미적, 그리고 지적 발전에서 이들은 인간이 고릴라보다 우월한 것처럼 인간보다 우월했었다. 그러나 이들이 이 거대한 도시를 세웠을 때, 인간의 아스라한 조상은 원시 바다의 진흙을 벗고 올라오지도 못한 상태였다.

 이 존재들은 피와 살로 된 모든 존재들이 그렇듯이 불멸이 아니었다. 이들은 비록 개개인의 수명은 엄청나게 길었지만, 살고, 사랑하고, 죽었다. 그리고 헤아릴 수 없는 영겁의 시간이 지나고, 변화가 시작되었다. 보이는 광경이 그림 위에 드리워진 막이 바람에 펄럭이는 것처럼 빛을 내며 떨렸다. 파도가 해변으로 밀려오는 것처럼 세월이 도시와 대륙 위로 흘러지나갔고, 매번 파도가 일 때마다 변화가 생겨났다. 행성의 어느 부분에서인가 자기중심이 바뀌고 있었다. 거대한 빙산과 빙판들이 새로운 극점을 중심으로 모여들었다. 

 거대한 강의 연안이 바뀌었다. 평원은 파충류들의 역한 냄새가 나는 늪으로 바뀌었다. 비옥한 평원이 펼쳐졌던 곳에는 숲들이 솟아올라 축축한 정글로 자라갔다. 이렇게 변화하는 세월은 도시의 거주민들에게도 자취를 남겼다. 이들은 새로운 땅으로 이주하지 않았다. 인간은 이해할 수 없는 이유에 속박 당해 이들은 고대의 도시에 남아 최후를 맞았다. 한때 풍요롭고 강성했던 땅이 햇볕이 안 드는 정글의 검은 수렁 속으로 깊이 더 깊이 빠져 들어가면서 아우성치는 정글의 생명체들이 도시민들을 잠식해 갔다. 끔찍한 대변동이 지구를 강타했고, 화산들이 폭발하며 검은 지평선을 붉은 기둥으로 물들이는 섬뜩한 밤들이 찾아왔다.

 지진이 도시의 외벽과 가장 높은 탑들을 무너뜨리고 강이 범람해 넘치면서 땅 속 깊은 무저갱이 뱉어낸 흉측한 물질들이 여러 날 강물에 섞여 흐른 후, 주민들이 수천만 년을 변치 않고 마셔왔던 물에 무시무시한 화학적 변화가 일어났다.

 물을 마신 많은 이들이 죽었고, 살아남은 이들은 물을 마시고 서서히 눈에 띄지 않게 점점 어두운 존재로 변화했다. 변화하는 조건에 적응하는 과정에서 이들은 자신들의 기원보다 더 하등의 존재로 이미 전락한 터였지만, 치명적인 물은 이들은 훨씬 더 끔찍하게 변모시켜 야수에 가까운 존재가 되어버렸다. 날개 달린 신들이었던 존재들이 날개 달린 악마로 변했고, 조상들의 남긴 광대한 지식은 왜곡되고 뒤틀리고 타락해서 악의 길로 인도했다. 이들은 인간이 차마 꿈꿀 수 있었던 것보다 더 높이 비상했다가 인간이 지닌 최악의 광기가 빚어내는 악몽이 도달할 수 있는 것보다도 더 깊이 추락했다. 식인 풍습으로 빨리 죽어갔으며, 한밤중 정글의 어둠 속에서는 끔찍한 혈투들이 벌어졌다. 그러다 마침내 오로지 한 명만 남아, 자연에 어긋나는 혐오스러운 타락의 축소판으로 이끼가 자라는 도시의 폐허를 어슬렁거리게 되었다.    

 그리고는 인간이 처음 등장했다. 검은 피부에 매처럼 날카로운 얼굴의 사람들이 구리와 가죽 무구를 걸치고 활을 들고 있었다. 선사시대 스티지아의 전사들 오십 명이었다. 이들은 굶주림과 오랜 행군으로 초췌하고 수척했다. 정글을 헤매느라  더러워지고 긁혀 있는 데에다 격렬한 전투를 말해주는 피 묻은 붕대들을 감고 있는 몰골들이었다. 낯선 종족에 밀려 남쪽으로 내려온 이들이었다. 전쟁과 패배와 도주의 사연을 마음속에 담고 정글 속에 들어왔다가 푸른 대양 속에서 길을 잃고 말았던 것이다.

 이들은 만신창이가 된 몸을 폐허 가운데 눕혔다. 백년 에 한 번씩 핀다는 붉은 꽃이 만개해서 만월 속에 흐느적거리고 있었다. 잠이 이들을 덮쳤다. 이들이 잠자는 동안 붉은 눈의 사악한 형체가 어둠 속에서 기어 나와 돌아다니며 잠자는 이들 하나하나에 기묘하고 끔찍한 의식을 베풀었다. 그늘진 하늘에 달이 정글을 붉고 검게 물들이며 걸려 있었다. 잠든 이들 위에서 선홍색 꽃들이 핏물처럼 깜박였다. 그리고 달이 지자, 마법사의 눈은 밤의 칠흑 속에 박힌 붉은 보석처럼 빛났다.

 새벽이 그 하얀 너울을 강에 드리우자 사람은 한 명도 보이지 않았다. 단지 떨리는 주둥이를 창백한 하늘을 향해 쳐들고 지옥에 떨어진 영혼들 마냥 울부짖는 점박이 하이에나 쉰 마리 가운데에 날개달린 털북숭이 괴물 한 마리가 쭈그리고 앉아있었을 뿐이었다. 

 그리고 이어지는 장면들은 너무도 빨리 스쳐지나가 한 장면이 미처 지나가기 전에 다른 장면과 맞물리며 돌아갔다. 혼돈스러운 움직임이 검은 정글, 녹색 돌의 폐허, 시커먼 강물을 배경으로 빛과 그림자 속에 꿈틀거리고 녹아 내렸다. 흑인들이 이물에 흉측한 미소를 띤 해골을 달고 기다란 배를 타고 강을 올라오거나 창을 들고 나무를 헤치며 살금살금 몸을 굽히고 다가왔다. 이들은 붉은 눈과 침이 뚝뚝 흐르는 송곳니를 피해 비명을 지르며 어둠을 헤치고 달아났다. 죽어가는 이들의 울부짖음에 그림자가 떨렸다. 숨죽인 발걸음 소리가 어둠을 헤치고 자박거렸고, 흡혈귀 같은 눈은 붉게 타올랐다. 달 아래 소름끼치는 향연이 벌어졌으며, 붉게 휘영청 달이 뜬 하늘을 거대한 박쥐같은 생물이 끊임없이 날아올라 살처럼 긋고 있었다.

 그리고 갑자기 이 얼비치는 인상적인 장면들과는 대조적으로 선명하게 도드라지는 영상이 떠올랐다. 하얗게 지펴 오르는 새벽에 기다란 갤리선 한 척이 정글의 곶을 돌아 올라왔다. 빛나는 검은 피부의 흑인들이 줄지어 있었고, 이물에는 시퍼런 검을 참 하얀 피부의 거한이 서 있었다.

 자신이 꿈을 꾸고 있다는 것을 깨달은 것은 바로 이 즈음에서였다. 이 순간이 되기 전에는 개별적인 존재로서의 의식이 없었다. 하지만 티그레스 호 선상을 왔다 갔다 하는 자신의 모습을 보면서 코난은 잠에서 깨지는 못했어도 자신의 존재와 꿈을 인식하게 되었다.

   그렇게 꿈꾸며 의아해 하는 새 장면은 다시 급작스레 정글의 한 빈터로 바뀌었다. 은고라와 열아홉 명의 흑인 전사들이 누군가를 기다리는 것처럼 서 있었다. 그들이 기다리는 것은 바로 자신이라는 것을 깨닫는 순간 하늘에서 공포가 이들을 휩쓸듯 덮쳤고, 꿈쩍 않던 전사들이 두려워 비명들을 질러댔다. 공포로 정신이 나간 것처럼 이들은 무기를 던지고는 날개를 퍼덕이고 침을 뚝뚝 흘리는 공중의 괴물에 바짝 쫓겨 정글을 비집고 미친 듯 달려갔다.


혼돈과 혼란이 이 장면 뒤에 이어졌다. 그동안 코난은 깨어나려고 미약하나마 몸부림을 쳤다. 자신이 까딱거리는 검은 꽃들 아래 누워있고, 덤불숲에서 한 흉측한 형체가 자신을 향해 살금살금 다가오는 것이 희미하게나마 보였다. 필사적인 노력으로 코난은 자신을 꿈에 묶어두던 보이지 않는 끈을 끊고는 벌떡 일어나 앉았다.

 주변을 둘러보는 이글거리는 코난의 눈 속에는 당황한 기색이 서려 있었다. 가까이에서 검은 연꽃이 흔들거렸다. 코난은 황급히 꽃들에서 멀어졌다.

 근처의 푹신거리는 땅에는 동물 한 마리가 덤불 뒤에 숨어 있다가 튀어나올 준비를 하다가 물러난 자취로 발자국이 남아 있었다. 믿을 수 없이 커다란 하이에나의 발자국처럼 보였다.

 코난은 소리를 질러 은고라를 찾았다. 태고의 침묵만 정글에 감돌았다. 그 침묵 속에서 코난의 외침은 조롱소리처럼 공허하게 흩어졌다. 태양은 보이지 않았지만 황무지에서 단련된 본능으로 하루가 저물어가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자신이 몇 시간 동안 의식을 잃고 쓰러져 있었다는 생각에 공포가 치밀어 올랐다. 코난은 급히 축축한 진흙에 또렷이 남아있는 전사들의 발자국을 따라갔다. 이들이 한 줄로 달려간 자국이었다. 그렇게 따라가다가 빈터에 들어섰다. 코난은 우뚝 멈추어 섰다. 이 공터가 연꽃 향에 취해 꾼 꿈속에서 본 빈터라는 것을 깨닫는 순간 뒷목에 소름이 돋았다. 허둥지둥 도망하느라 떨어뜨린 듯 방패와 창들이 여기저기 흩어져 있었다.

 발자국은 공터를 벗어나 정글의 요새 속으로 더 깊숙이 이어져 있었다. 전사들이 정신없이 도망쳤음을 알 수 있었다. 그러다 놀랄 정도로 갑작스럽게 정글을 벗어나 가파르게 경사 진 집채만한 바위 위로 나서게 되었다. 경사가 갑작스레 꺾어져 족히 사십 피트는 떨어지는 높이였다. 그리고 무엇인가 그 절벽 끄트머리에 웅크리고 있었다.

 처음에 코난은 그것이 거대한 검은 고릴라인 줄 알았다. 하지만 다시 보니 거대한 흑인이 유인원처럼 웅크리고 앉아 긴 팔을 늘어뜨리고 벌어진 입에서 침을 줄줄 흘리고 있었다. 그 생물이 흐느끼는 듯한 소리를 지르며 늘어졌던 팔을 쳐들어 코난을 향해 돌아설 때야 비로소 코난은 은고라를 알아보았다. 이 흑인이 공격해 들어오자 코난이 소리를 질렀으나 알아듣지 못했다. 눈은 뒤집혀 있었고 인간 같지 않은 표정을 띤 얼굴에는 하얀 이빨이 드러나 번뜩였다.

 광기가 멀쩡한 사람에 스며들었다는 공포에 소름이 돋는 것을 느끼며 코난은 칼을 뽑아 흑인의 몸을 갈랐다. 그리고 은고라가 쓰러지며 갈고리 손톱을 뻗자 코난은 이를 피해 절벽 끝으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잠시 삐쭉빼쭉 솟은 절벽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은고라의 전사들이 사지가 으깨지고 뼈가 부러져 늘어지고 꺾인 자세로 쓰러져 있었다. 아무도 움직이지 않았다. 검은 파리 떼가 구름처럼 몰려와 피가 튀신 돌 위에서 시끄럽게 웅웅거리고 있었다. 개미들은 이미 시체들을 갉아대기 시작한 후였다. 나무에는 시체를 먹는 새들이 앉아있었고, 자칼 한 마리가 고개를 들어 절벽 위의 사람을 보더니 슬금슬금 물러갔다.                    

 코난은 꼼짝없이 서 있었다. 그러다 몸을 휙 돌려 왔던 길을 되짚어 달려갔다. 큰 풀에 온 몸을 스쳤지만 가는 길에 뱀처럼 꾸물거리는 파충류들을 몰기라도 하듯 정신없이 달렸다. 죽음이 맴도는 거대한 정글과 황량한 폐허 사이를 코난은 진홍빛 망토를 날리고 시퍼런 쇠를 번쩍이며 비집고 달렸다. 어둠속에서 강가의 희미한 어스름으로 뛰쳐나왔을 때 자신이 가쁘게 숨을 몰아쉬는 소리 외에는 엄청난 고독 속에서 어떤 소리도 들려오지 않았다.

 갤리선이 무너져가는 선창에 맴도는 것이 보였다. 폐허는 침침한 회색 불빛 속에서 술 취한 듯 휘청거렸다.

 그리고 어느 무심한 손이 누가 선홍색 물감을 찍어 뿌리기라도 한냥 선명한 핏빛이 바닥에 깔린 돌 여기저기 흩어져 있었다.  

 다시 코난은 죽음과 파괴를 바라보았다. 자신의 앞에는 전사들이 쓰러져있었다. 일어나 맞는 이가 하나도 없었다. 정글 가장자리부터 강둑까지, 썩어가는 기둥들 사이, 무너진 부두를 따라, 찢기고 으깨지고 반쯤 뜯어 먹히고 씹힌 사람들의 시체가 늘어서 있었다.

 시체와 시체 조각들이 널브러진 곳 사방에 하이에나의 발자국 같은 거대한 발자국들이 온통 찍혀 있었다.

 코난은 조용히 부두 위로 올라섰다. 희미한 어스름 속 갤리선 갑판 위에 무언가 상아빛 하얀 물체가 매달려 빛나고 있었다. 말을 잃고 코난은 검은 해안의 여왕이 자기 배의 활대에 매달려 있는 것을 바라보았다. 활대부터 그녀의 하얀 목까지 진홍빛 핏방울 같은 목걸이가 회색 빛 속에 피처럼 번뜩거리며 드리워져 있었다.


4장. 하늘에서 덮쳐오다


침이 뚝뚝 듣는 턱들을 벌리고,

그림자들이 시커멓게 그를 둘러쌌다.

빗방울보다 굵은 핏방울이 뚝뚝 들었다.

그러나 내 사랑은 죽음의 검은 주술보다 강하니,

지옥의 무쇠 벽도 내가 그이 옆에 가는 것을 막지 못하리라.

                                        - 벨리트의 노래


정글은 그 검은 팔 안에 엉망인 된 폐허를 껴안은 거상(巨象)같았다. 달은 떠오르지 않고 있었다. 죽음의 냄새가 밴 숨 막히는 하늘에 별들만 진한 호박색으로 무수히 빛났다. 무너진 탑들 사이 피라미드 위에 심메리아인 코난은 주먹으로 턱을 받치고 무쇠 동상처럼 앉아 있었다. 멀리 검은 그림자 속에서 살금살금 발걸음 소리가 자박거리고 붉은 눈들이 빛났다. 죽은 자들은 쓰러진 그대로 누워 있었다. 그러나 티그레스 호 갑판에는 부서진 의자와 창자루로 쌓은 장작더미와 표범 가죽위에는 코난의 진홍색 망토에 싸인 검은 해안의 여왕이 마지막 잠에 취해 있었다. 약탈한 보화 - 실크, 금빛 천, 은 목걸이, 보석 상자, 금화, 은괴, 보석 박힌 단도와 금이 신전 제단처럼 높이 사방에 쌓여 있는 가운데 그녀는 여왕처럼 누워 있었다.

 그러나 코난이 욕설을 퍼부으며 이 저주받은 도시의 약탈물들을 어디에 던져버렸는지는 자르크헤바의 어두운 강물만이 말할 수 있었다. 이제 코난은 보이지 않는 적을 기다리며 피라미드 꼭대기에 묵묵히 앉아있었다. 그의 영혼을 감싸는 분노가 두려움은 몽땅 몰아내 버렸다. 어떤 형체가 어둠으로부터 솟아오를지 몰랐고, 개의치도 않았다.

 더 이상 검은 연꽃이 보여준 영상을 의심하지 않았다. 은고라와 전사들이 빈터에서 기다리다가 날개달린 괴물이 하늘에서 솟구쳐 내려와 더치면서 공포에 질려 맹목적으로 도망가다가 절벽 아래로 떨어진 것을, 은고라만이 절벽에서 떨어지는 운명을 면했지만, 광기의 공격은 피하지 못한 것을, 그 와중에 혹은 이 일 직후나 직전에 강둑에 있던 자들도 죽어갔다는 것을 코난은 알고 있었다. 강변에서 일어난 살육은 전투라기보다는 학살이었다는 것이 확실했다. 흑인들은 이미 미신적인 공포에 사로잡혀 무장해제 되어서는 인간이 아닌 적들이 공격을 했을 때 방어하느라 제대로 무기 한번 휘둘러보지 못하고 죽어간 것 같았다.

  강을 다스리는 사악한 존재가 슬픔과 공포로 코난을 괴롭히기 위해 계속 살려두는 게 아니라면 왜 자신만 이렇게 오래 살려두는 건지 코난은 알 수가 없었다. 모든 정황이 인간 혹은 초인의 지능이 개입되었음을 나타내고 있었다. 병력이 나뉘도록 하기 위해 물통을 깨뜨리고, 흑인들을 절벽 너머로 몰아넣었으며, 마지막이자 가장 눈에 띄는 짓은 진홍빛 목걸이로 교수용 올가미를 만들어 벨리트의 하얀 목을 매단 그 사악한 조소였다.                             

 코난을 가장 값진 희생물로 아껴놓고 정신적인 고통의 마지막 한 방울까지 짜내면서 이 알 수 없는 적은 다른 희생자들에 뒤이어 코난을 마지막으로 죽여서 이 연극을 마무리하고 싶어 하는 것 같았다. 이런 생각에 코난의 굳은 입술에는 미소는 떠오르지 않았지만, 대신 코난은 무쇠 같은 웃음을 터뜨리며 눈을 빛냈다.

 달이 떠오르며 달빛이 코난의 뿔 달린 투구에 불길로 부서지는 듯했다. 어떤 소리도 울려 퍼지지 않고 조용했다. 그리고 갑자기 밤이 긴장하고 정글이 숨을 죽이는 듯 했다. 코난은 본능적으로 칼집에서 칼을 뽑았다. 그가 서 있는 피라미는 네 개의 면이 있었는데, 한 면이 넓은 계단이 새겨져서 정글 쪽으로 뻗어 있었다. 코난의 손에는 솀인들의 활이 들려 있었다. 벨리트가 자신의 해적들에게 사용법을 가르친 활이었다. 화살이 한 무더기 코난의 발치에 쌓여 있었다. 화살의 깃털 달린 쪽들이 한 무릎을 꿇고 앉은 코난을 향하고 있었다.

 나무 아래 어둠 속에서 무언가 움직였다. 떠오르는 달을 배경으로 시커멓게 윤곽이 드러나는 머리와 어깨가 보이고, 짐승들의 형상이 드러났다. 그리고 이제 그림자 속에서 검은 형체들 - 스무 마리의 거대한 하이에나들이 조용히 빠르게 몸을 낮추고 달려 올라왔다. 달빛에 이들의 송곳니가 번뜩였고, 눈은 그 어떤 진짜 야수보다도 더 이글거렸다.

 스무 마리. 그렇다면 해적들의 창이 이 무리의 수를 줄여놓은 것이 틀림없었다. 이런 생각을 하며 코난은 활의 오늬를 귀까지 당겼다. 화살이 윙,하고 튕겨 나가자 이글거리는 눈을 가진 그림자 하나가 펄쩍 뛰어 올랐다가 쓰러지며 몸부림을 쳤다. 나머지 하이에나들을 이에 머뭇거리지 않고 계속 올라왔다. 코난은 지옥의 화산재처럼 뜨거운 증오에 힘입어 강철 같은 근육의 힘과 정확성으로 비처럼 화살을 쏟아 부었다.

 불길같이 치솟는 분노 와중에 한 대의 화살도 빗나가지 않았다. 공중은 온통 깃털라고 날아가는 죽음으로 가득 찼다. 달려오는 무리는 놀랄 정도의 피해를 입었다. 반수도 안 되는 하이에나들이 피라미드 아래에 도달할 수 있었다. 나머지들은 넓은 계단에 쓰러졌다. 그 타오르는 눈들을 바라보면서 코난은 이것들이 짐승이 아님을 깨달았다. 이 하이에나들에서 눈에 뜨이는 불경스러운 차이는 부자연스러운 크기뿐만이 아니었다. 이들은 시체가 흩어진 늪에서 피어오르는 검은 증기처럼 분명한 기(氣)를 내뿜고 있었던 것이다. 어느 사악한 연금술이 이 존재들을 만들어 냈는지는 가늠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코난은 자신이 스켈로스의 무저갱보다 더 어두운 마술을 마주하고 있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코난은 벌떡 일어나서 힘껏 활을 구부려 목을 향해 뛰어오르는 거대한 회색 형체에게 마지막 화살을 정통으로 날렸다. 화살은 앞으로 날아가 오로지 한 줄의 선을 그으며 달빛줄기처럼 번쩍였다. 야수 인간은 공중에서 경련을 일으키며 화살이 관통된 채 머리부터 털썩 떨어졌다.

 그리고 악몽 속에서나 볼 수 있는 눈을 이글거리고  침이 뚝뚝 듣는 송곳니를 드러내며 나머지 하이에나들이 덮쳐 왔다. 힘껏 휘둘러진 코난의 검의 첫 번째 하이에나가 동강이 났지만, 나머지들이 필사적으로 압박해 오자 힘들었다. 칼자루로 좁은 두개골 하나를 박살내니 뼈가 우지끈 부러지는 것과 뇌와 피가 손에 튀는 것이 느껴졌다. 다음에는 칼을 그만 떨어뜨려서 너무도 가까이 궁지에 몰리자 코난은 소리 없이 코난을 발톱으로 긁으며 이빨로 물어뜯던 하이에나 두 마리의 목을 그러쥐었다. 역겹고 독한 내에 거의 마비되는 것 같았고, 땀이 흘러내려 앞을 가렸다. 갑옷만이 코난의 몸이 한 순간에 갈기갈기 찢어지는 것을 막아주고 있었다. 다음 순간 코난은 오른손에 힘을 줘 털북숭이 목을 찢어버렸다. 왼손에 쥐고 있던 다른 놈의 목은 그만 놓쳐서 앞다리 하나를 잡아 부러뜨렸다. 이 음산한 전투 중 들린 유일한 소리였던 짧은 외침이 너무나도 사람 목소리 같은 소리를 내며 짐승의 입에서 터져 나왔다. 그 짐승의 입에서 터져 나온 비명이 역겨워서 코난은 저도 모르게 쥐고 있던 손을 풀었다.

 찢긴 목에서 피를 철철 흘리는 놈이 마지막으로 힘을 그러쥐어 달려들며, 코난의 목에 이빨을 꽂았다가 나가 떨어져 죽었다. 코난은 이 하이에나에게 물어 뜯겨 혹독한 아픔을 느꼈다.

 다른 녀석이 세 발로 딛고 달려들며 늑대처럼 코난의 배를 그었지만, 코난의 갑옷에 줄만 긋고 끝났다. 죽어가는 짐승을 옆으로 던지고 코난은 다리 하나가 부러진 녀석을 움켜쥐었다. 힘을 잔뜩 주니 피가 묻은 하이에나의 주둥이에서 신음이 터져 나왔다. 코난은 똑바로 서서 몸부림치는 하이에나를 번쩍 들어올려 팔 안에서 찢어버렸다. 다음 순간 균형을 잃고 휘청거릴 때 하이에나가 코난의 코에 악취나는 숨을 내뱉으며 코난의 목을 물었다. 그러자 코난은 하이에나를 대리석 계단으로 내동댕이쳐서 뼈가 부러져 죽게 만들었다.

 코난이 다리를 넓게 벌리고 서서 숨을 가쁘게 몰아쉴 때 정글과 달은 코난의 모습에 고요히 지켜보고 있었다. 그리고 그 박쥐같은 괴물이 날개짓 소리가 들려 왔다. 코난은 몸을 굽혀 칼을 더듬어 쥐고는 휘청거리며 일어나 발에 힘을 주고 섰다. 그리고 눈에서 피를 훔쳐내며 공중에서 적을 찾아 큰 검을 양손으로 쥐고 머리 위로 휘둘렀다.                                   

 하늘에서 공격하는 대신 피라미드가 갑자기 요란하게 코난의 발밑에서 흔들거렸다. 우지끈하는 소리가 들리더니 큰 기둥이 지팡이처럼 머리 위에서 흔들리는 것이 보였다. 놀라서 펄쩍 뛰며 코난은 멀리 바깥쪽으로 피했다. 발로 중간쯤의 계단을  디디었지만 발아래가 흔들렸다. 또 한 번 필사적으로 뛰어서 안전하게 계단 아래로 내려섰다. 하지만, 코난이 땅에 발을 딛자마자 산이 부서지는 것처럼 피라미드가 무너지며 기둥이 박살나며 아래로 우레같이 굴러 떨어졌다. 앞이 안 보이는 대격동의 순간에 대리석 조각이 비처럼 하늘을 채웠다. 다음 순간 부서진 돌 조각이 달 아래 하얗게 놓여 있었다.

 코난은 몸을 반쯤 덮은 파편들을 떨쳐냈다. 무언가 잽싸게 날아와 치면서 투구를 벗겼고 잠시 코난은 멍하게 무방비였다. 다리가 커다란 기둥 파편에 깔려 있었다. 부러진 건지 알 수가 없었다. 코난의 머리는 땀으로 뒤범벅이었고, 목과 손의 상처에서는 피가 흘러 나왔다. 코난은 한 팔을 홱 올려 자신을 꼼짝 못하게 하는 돌덩이를 잡고 끙끙거렸다.

 그 때 무언가 별들을 가로질러 휙 날아 내려와 근처 잔디밭에 내려앉았다. 몸을 비틀어 보니 그 날개 달린 괴물이었다.

 가공할 만한 속도로 괴물은 코난에게 달려들고 있었다. 그 순간 코난은 거대한 인간 같은 형체가 구부러지고 퇴화된 다리로 돌진하는 혼란스러운 인상을 받았다. 앞으로 뻗은 거대한 털북숭이 팔에는 검은 발톱이 난 기형의 발이 달려 있었고, 흉측한 머리에는 한 쌍의 붉은 눈만이 그 넓은 얼굴에서 간신히 알아볼 수 있었다. 인간보다 우월한 초인의 특징과 인간보다 하등한 유인원의 특징이 범벅이 된 이 괴물은 인간도, 짐승도, 악마도 아니었다.

 하지만 코난은 계속 생각할 시간이 없었다. 떨어진 검을 향해 몸을 뻗었지만 불과 몇 인치 차이로 손이 닿지 않았다. 필사적으로 코난은 다리를 꼼짝 못하게 하고 있는 돌덩이를 잡았다. 밀어 내려고 힘을 쓰자 관자놀이의 혈관이 부풀어 올랐다. 돌덩이는 천천히 움직였지만, 다리가 다 빠져 나오기 전에 괴물이 자신을 덮치리라는 것과 저 검은 발톱이 달린 손은 죽음을 의미한다는 것을 코난은 알고 있었다.

 날개 달린 괴물의 정면 돌진은 변함이 없었다. 괴물은 땅에 쓰러진 코난에 검은 그림자를 드리우며 팔을 벌리고 내려다보고 섰다. 순간 하얀 빛이 괴물과 괴물의 희생자 사이에서 번뜩였다.

 미친 듯한 그 짧은 순간 그녀가 거기에 있었다. 암표범처럼 격렬한 사랑으로 떨리는 단단한 하얀 몸이었다. 아찔해진 코난의 눈에 덮쳐드는 괴물과 자신 사이에 그녀의 나긋나긋한 몸이 달빛 아래 상아처럼 빛나고 있었다. 그녀의 눈이 이글거렸고, 숱 많은 검은 머리채가 빛났다. 그녀의 가슴이 들썩이더니 빨간 입술이 벌어졌다. 날카로운 외침과 쇠가 부딪혀 울리는 소리가 들리며 그녀가 날개 달린 괴물의 가슴을 찔러 들어갔다.

 “벨리트!” 코난이 소리쳤다. 그녀는 재빨리 고개를 돌려 코난을 바라보았다. 그 검은 눈에 순전한 불과 뜨거운 용암 같은 근원적인 감정으로 사랑이 불타오르는 것이 보였다. 다음 순간 그녀는 사라졌다. 날개 달린 괴물이 공포에 질려 팔을 들어 공격을 막으려는 양 뒤로 휘청거리는 것만 보였다. 코난은 벨리트가 실제로는 티그레스 호의 갑판에 누워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의 귀에 그녀의 열정적인 말이  맴돌았다. “내가 죽는다면 당신이 목숨을 걸고 싸울 때 죽음에서 돌아와 당신을 도울 거야.”

 무시무시하게 소리를 지르며 코난은 몸을 일으키며 돌을 옆으로 치웠다. 날개 달린 괴물이 다시 덮쳐 왔고, 코난은 공격을 맞으러 앞으로 나아갔다. 뜨거운 광기로 혈관에 불이 붙은 듯 했다. 코난이 발뒤꿈치를 축으로 삼아 몸을 휘돌리며 그 힘을 몰아 큰 검을 휘두르자 근육들이 코난의 팔에서 불끈 솟아올랐다. 칼은 엉덩이 바로 위에서 돌진해 들어오는 괴물의 몸을 긋고 들어갔다. 칼날이 그 털북숭이 몸을 깨끗하게 베고 지나가면서 괴물의 엉거주춤한 다리가 한 쪽으로 떨어졌고, 상체는 다른 쪽으로 떨어졌다.     

  코난은 달빛으로 빛나는 침묵 속에 서 있었다. 피가 듣는 검을 축 늘어진 한 손에 쥐고 적의 시체를 굽어보았다. 그 붉은 눈이 살아서 코난을 노려보았지만, 곧 흐려지더니 굳었다. 커다란 손은 발작을 하며 꼬이다가 뻣뻣해졌다. 그리고 세상에서 가장 오래된 종족이 이로써 멸종했다.

 코난은 고개를 돌려 이 괴물의 노예이자 처형자였던 야수들을 기계적으로 찾았다. 눈에 띄는 짐승들이 없었다. 달빛이 출렁이는 풀밭에 흩어져 있는 시체는 짐승의 것이 아니라 인간의 것이었다. 매의 얼굴을 한 검은 피부의 사람들이 벌거벗은 채 화살에 맞거나 칼에 베어 쓰러져 있었다. 그리고 코난이 지켜보는 가운데 이 시체들은 오그라들어 먼지로 변했다.

 왜 날개 달린 주인은 코난이 하이에나들과 사투를 벌일 때 노예들을 도와주러 오지 않았을까? 저 짐승들이 돌아서 자기를 찢어발길 수 있는 거리에 서는 게 두려웠던 걸까? 그 흉측한 머리 속에 계략과 주의는 있었는지 몰라도, 그 것도 결국에는 소용이 없었던 모양이었다.

 코난은 몸을 돌려 썩어가는 선창을 걸어 내려와 갤리선에 올랐다. 검을 몇 번 휘둘러 줄을 끊어 배를 띄우고는 버팀줄 앞머리로 갔다. 티그레스 호는 어두운 강물 위에서 천천히 흔들리더니 강 중앙으로 느리게 미끄러져 나와 커다란 조류를 탔다. 코난은 버팀줄에 기대어, 여황제의 몸값에 맞먹는 보화로 만든 장작더미 위 망토에 싸여 누운 여인을 하염없이 우울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5장. 화장(火葬)


이제 방랑은 영원히 끝났다.

 노 젓는 소리도, 바람이 켜는 하프 소리도 이제 그만.

더 이상 진홍 깃발로 검은 해안을 떨게 하지 못하리.

 넘실거리는 세계의 푸른 허리여. 내게 주었던 여인을

다시 돌려주노라.

                 - 벨리트의 노래


 다시 한 번 새벽이 바다를 물들였다. 한층 붉어진 빛이 강어귀에서 빛났다. 심메리아인 코난은 하얀 해변에 검에 기대어 서서 티그레스 호가 마지막 항해를 하러 흔들리며 멀어지는 것을 지켜보고 있었다. 유리 같은 파도를 물끄러미 바라보는 코난의 눈에 빛은 찾아볼 수가 없었다. 굽이치는 푸른 파도너머로 모든 영광과 경이는 사라져 버렸던 것이다. 푸른 파도가 신비한 보랏빛 안개로 깊어지는 것을 바라보며 격렬한 증오에 코난의 몸이 떨렸다.

 벨리트의 바다의 여인이었다. 바다에 광채를 부여하고 바다를 매혹적으로 만들었다. 그녀가 없이 바다는 남극부터 북극까지 황량하고 무의미하고 쓸쓸한 폐허일 뿐이었다. 그녀가 바다의 여인이니 이제 바다의 영원한 신비로 코난은 그녀를 되돌려 보냈다. 그 이상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그에게 바다의 푸른빛 광채는 뒤에서 부스럭거리며 속살대는 무성한 숲보다 더 혐오스러웠다. 숲 너머에는 광대하고 신비로운 황야가 펼쳐져 있으니 이제 그리고 뛰어들어야 했다.

 티그레스 호의 버팀줄을 잡은 이는 아무도 없었고, 푸른 물살을 헤쳐 노를 젓는 이도 아무도 없었다. 하지만 맑고 싱그러운 바람이 실크 돛을 잔뜩 부풀렸다. 티그레스 호는 마치 야생 백조가 하늘을 날아 보금자리로 돌아가듯이 매끄럽게 물살을 헤치고 나갔다. 배는 바다로 더 멀리 나아갔다. 갑판에서 타오르는 불길이 더 높이 더 높이 타올라 돛대를 핥고 빛나는 장작 위 진홍빛에 싸인 몸을 감쌌다.

 그렇게 검은 해안의 여왕은 사라졌다. 피로 물든 검에 기대에 코난은 그 붉은 섬광이 푸른 안개로 사라지고 새벽이 대양 너머 장밋빛과 금빛을 튕길 때까지 가만히 서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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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 해안의 여왕


1장. 코난, 해적이 되다


봄에 깨어나는 녹색 봉오리들아,

가을이 잎들을 칙칙한 불로 물들이는 것을 믿으라.

내 뜨거운 욕망을 한 남자에게 불태우기 위해

내 심장을 순결하게 지켰음을 믿으라.

                                - 벨리트의 노래


 말발굽 소리가 선창으로 이어진 경사진 거리를 따라 우레 소리같이 들려 왔다. 소리를 지르며 혼비백산 흩어진 사람들은 검은 종마를 탄 갑옷 입은 사람 한 명이 바람에 넓은 진홍색 망토 자락을 휘날리며 지나가는 것만 언뜻 보았을 뿐이었다. 멀리 거리 위쪽에서는 추격자들의 고함 소리와 말발굽 소리가 들려왔다. 하지만 말 탄 이는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쫓기는 남자는 선창으로 한달음에 말을 몰아 내려가더니, 잔교(棧橋) 바로 앞에서 고삐를 잡아 당겼다. 종마가 뒷발로 일어서며 멈추었다. 뱃사람들은 뱃머리가 높고 통이 넓은 갤리 선의 버팀줄들과 줄무늬 돛에 매달려 주어진 일을 하다가 이 자를 놀라 바라보았다. 검은 수염의 건장한 선장은 이물에 서서 배의 갈고리 장대를 가지고 선창 말뚝에서 배를 풀었다. 말 탄 이가 안장에서 훌쩍 뛰어내리더니 펄쩍 뛰어 중갑판에 반듯하게 내려앉자, 선장이 화가 나서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누가 당신더러 배에 타라고 했어?”

 “출항해!” 침입자가 팔을 힘껏 휘둘러 넓은 검에 묻은 피를 털어내며 소리 질렀다.   “이보셔. 이 배는 쿠쉬로 가는 배야!” 선장이 타이르듯 말했다.

 “그러면 나도 쿠쉬로 가지. 출발하라니까 그러네!” 상대가 재빨리 길 위쪽을 곁눈질 했다. 말 탄 무리가 부리나케 말을 몰아 내려오고 있었고, 그 한참 뒤로 어깨에 석궁을 맨 궁사들이 힘들게 쫓아오고 있었다.

 “승선료를 낼 수 있어?” 선장이 다그쳤다.

 “내 검으로 내겠다!” 갑옷을 입은 남자가 태양빛 아래 시퍼렇게 번뜩이는 큰 검을 휘두르며 고함을 질렀다. “크롬 신의 이름으로 말하는 데, 출발하지 않으면, 이 배를 선원들 피로 피갑 칠을 해주지!”

 선장은 사람을 보는 눈이 있었다. 분노로 굳어진 상대방의 흉터 진 구리 빛 얼굴을 스윽 훑어보더니 재빨리 소리쳐 명령을 내리며. 선창을 세게 밀어 배를 출발 시켰다. 갤리선은 물위로 둥실 떠 나아갔고, 노들이 리듬에 맞춰 삐걱거리며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바람 한 줄기가 반짝이는 돛을 가득하게 부풀리자 가벼운 배는 바람과 같은 방향으로 나아갔다. 마치 백조처럼 미끈하게 항로를 잡더니 속도를 내며 물살을 갈랐다.

 선창에서는 말을 타고 온 병사들이 검을 흔들며 소리 지르며 배를 돌리라고 협박과 명령을 해대다가, 궁사들에게 배가 사정거리를 벗어나기 전에 서두르라고 외쳐댔다.

 “버럭버럭 악 좀 써 보라지.” 칼잡이가 웃음기 없는 얼굴로 말했다. “조타수 양반, 원래 항로대로 가고 있는 거요?”

 선장은 이물들 사이에 있는 작은 갑판에서 내려와 노를 젓는 이들 사이를 헤치고 나와 중갑판에 올라섰다. 낯선 이는 돛대에 등을 대고 서 있었지만, 눈은 경계하느라 가늘게 뜨고 검을 쥐고 있었다. 선장은 이 자가 허리에 차고 있는 장검을 신경 쓰지 않으려 애쓰면서 그를 찬찬히 훑어보았다. 크고 건장한 체격에 검은 쇠미늘 갑옷을 입고 있었다. 갑옷의 정강이받이는 번쩍였고, 황소 뿔이 달린 푸른빛이 감도는 무쇠 투구는 광이 나도록 닦여 있었으며, 미늘 갑옷을 입은 어깨에는 진홍색 망토가 달려 바람에 휘날리고 있었다. 황금 혁대쇠가 달린 넓은 상어가죽 혁대에는 지니고 다니는 칼을 넣은 칼집을 차고 있었다. 뿔 달린 투구 아래에서 네모 바듯하게 잘린 검은 머리카락에 이글거리는 푸른 눈이 두드러졌다.

 “함께 여행할 거라면,” 선장이 운을 뗐다. “사이좋게 지내는 게 좋겠네. 내 이름은 티토야. 아르고스 항의 인가를 받은 선장이지. 구슬, 실크, 설탕, 청동 검자루가 달린 검들을 흑인 왕들에게 팔고, 상아, 말린 대추야자, 구리 원석, 노예와 진주를 사러 쿠쉬로 향하고 있어.”

 그러자 검사는 고개를 돌려 빠르게 멀어지는 부두를 힐긋 바라보았다. 부두에서는 사람들이 여전히 헛되이 손짓들을 해대며 법석이고 있었다. 빠른 갤리선을 따라 잡을 수 있을 만큼 잽싼 배를 찾지 못한 게 분명했다.

 “난 코난이네. 심메리아인이고.” 그 자가 대답했다. “일자리를 찾아 아르고스로 왔네만, 전쟁이 일어날 기미가 보이지 않으니 할 일은 별로 없었지.”

 “왜 근위병들이 당신은 쫓는 거지?” 티토가 물었다. “우리가 알 바는 아니지만, 내 생각에는 아마도 -”

 “뭐, 숨길 것은 없어.”심메리아인이 대답했다. “크롬 신의 이름을 걸고 말하지만, 내 비록 당신네들 문명인들 사이에서 꽤나 많은 시간을 보냈지만, 당신에 방식들은 여전히 이해하기 어렵더군.

  그러니까 어젯밤 술집에서 왕실 근위대의 한 장교가 한 젊은 군인의 연인에게 손찌검을 했어. 당연히 그 젊은 군인이 칼을 뽑았지. 그런데, 근위병을 죽이면 안 된다는 망할 법이 있더군. 그래서 군인과 그 애인은 도망을 쳤고. 문제는 내가 그네들과 함께 있는 것을 누군가 봤다고 소문이 나서 오늘 법정에 끌려갔게 됐어. 그 젊은 군인이 어디로 갔냐고 판관이 내게 묻더군. 그래서 내, 대답했지. 난 친구를 배신할 수는 없다고. 그렇게 말하니 법정이 분노로 일렁이더군. 판관이 국가와 사회와 그 밖에 다른 것들에 대해 내가 잘 모르겠는 소리를 한참을 주워섬기고는 내 친구가 어디로 도망갔는지 말하라고 명령했어. 이쯤 되니 나도 슬슬 화가 나더군. 이미 내 입장을 설명했는데 말이야.

 하지만 화를 참고 침착하게 있었더니 판관이 내가 법정을 모독했다고 소리를 질러대면서 지하 감옥에 쳐 박혀서 친구를 배신할 때까지 썩어보라고 했어. 보아하니 다들 미쳤더구먼. 그래서 칼을 뽑아 그 판관 놈 두개골을 갈라 줬지. 그리고 칼을 휘둘러 법정을 빠져 나와서는 고위 장관 나리의 말이 근처에 묶여 있기에 냅다 타고 부두로 달려 온 거지. 여기 오면 외국 항구로 가는 배를 찾을 수 있을 것 같아서.“       

 “흠,” 티토가 대뜸 말했다. “그 놈의 법정이 부유한 상인들하고 소송이 붙기만 하면 나는 빚진 게 아무것도 없는데도 생돈을 뜯어간 게 한 두 번이어야 말이지. 이 항구에 다시 정박하게 되면 심문을 받게 되겠군. 하지만 협박을 당해 어쩔 수 없었다고 증명 할 수 있어. 검은 치우는 게 어떤가. 우리는 모두 평화로운 뱃사람들이고, 자네랑 싸울 이유가 없어. 그리고 자네 같은 전사가 배에 있는 것도 괜찮지. 선미 갑판으로 올라가서 맥주나 한 잔씩 걸치자고.”

 “좋지.” 코난이 검을 검집에 집어넣고 흔쾌히 대답했다.

 아르구스 호는 작고 단단한 배였다. 해안을 끼고 돌아다니며 절대 탁 트인 대양 멀리 나서는 모험을 하지 않았다. 징가라와 아르고스, 남쪽 해안들의 부두들 사이를 돌아다니는 전형적인 무역선이었다. 고물은 높고, 이물 역시 높은 곡선 모양 이었다. 배의 중간 부분은 불룩 튀어나왔다가 이물과 고물로는 아름답게 경사가 진 모습을 하고 있었다. 선미루 갑판에서 이어진 긴 버팀줄이 배를 움직이고 있었고, 작은 돛의 도움을 받는 넓은 줄무늬 비단 돛이 배의 주 추진력이었다. 노들은 작은 만과 내포에서 방향을 바꾸어 돌아 나오거나 바람이 없을 때 사용되고 있었다. 노는 옆면에 각각 열 개, 작은 중갑판의 선수와 후미에 각각 다섯 개 씩 있었다. 화물 중 가장 중요한 물건들이 이 갑판과 선수 갑판 아래에 단단히 묶여서 실려 있었다. 선원들은 갑판 위나 노꾼들이 앉는 벤치 사이에서 잤고, 악천 후 시엔 차양을 쳐서 머리를 피했다. 스무 명이 노를 저었고, 세 명이 버팀줄을 담당했으며, 선장이 까지해서 선원을 완벽히 갖추고 있었다.

 아르구스 호는 계속 남쪽으로 나아갔다. 날씨는 계속 화창했다. 태양은 매일 맹렬한 열기를 쏘아대는 가운데, 차양이 세워졌다. 빛나는 돛과 이물과 이물을 따라 있는 번쩍이는 금박 장식과 잘 어울리는 줄무늬 비단 차양이었다. 

 솀의 해안이 눈에 들어왔다. 멀리 도시의 하얀 탑들을 흰 왕관처럼 쓰고 있는 구릉진 목장 지대가 길게 펼쳐져 있었다. 검푸른 수염과 매부리 코의 기병들이 해안을 따라 말안장에 앉아 갤리 선을 의심쩍게 바라보고 있었다. 아르구스 호는 해안에 배를 대지 않았다. 솀인들과의 거래에는 이문이 거의 남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티토는 스틱스 강이 대양으로 어마어마한 물을 쏟아내고 거대한 케미의 검은 성들이 푸른 물을 굽어보는 넓은 만에도 배를 대지 않았다. 배들은 이 항구에 허가를 받지 않고는 배를 댈 수가 없었다. 이곳은 암흑의 마법사들이 피로 얼룩진 제단에서 영원히 피어오르는 희생물의 검은 연기 속에서 끔찍한 주문들을 외우는 곳이었다. 벌거벗은 여인들이 희생의 제단에서 비명을 지르고, 하이퍼보리아 인들에게는 대 악마요, 스티지아 인들에게는 숭배하는 신인 옛 뱀, 세트 신이 숭배자들 가운데 빛나는 똬리를 틀고 있다고들 하는 곳이었다.

 티토 선장은 유리가 깔린 것 같이 물결이 잔잔한 그 환상적인 만에 절대 배를 정박 시키지 않았다. 이물이 뱀모양인 곤돌라가 성들이 들어선 곶에서 쏜살같이 달려와 머리에 빨간 꽃을 꽂은 벌거벗은 검는 여인들이 선원들을 부르며 노골적인 몸짓을 한다 해도 꿈쩍하지 않았다.    

 이제는 내륙에 솟은 빛나는 탑들이 더 이상 보이지 않았다. 스티지아의 남쪽 국경을 지나 쿠쉬 해안을 따라 항해 중이었다. 바다와 바다의 이치는 북쪽 고지대의 산악지역에서 태어나 자란 코난에게는 끝없는 신비였다. 하지만 코난과 같은 종족을 본 적이 거의 없는 다부진 뱃사람들에게는 코난 역시 마찬가지로 관심의 대상이었다.

 이들은 작고 다부진 체격의 전형적인 아르고스의 뱃사람들이었다. 코난은 이들을 굽어볼 정도로 키가 컸고, 이들 둘을 합쳐도 코난의 힘에 당할 수 없었다. 이들도 강하고 튼튼했지만, 코난의 힘은 늑대의 지구력과 생기였고, 근육은 강철같이 단단했고, 배포는 세계에서 손꼽히는 거친 황무지의 삶의 역경으로 갈고 닦은 터였다. 코난은 잘 웃고 화도 불같이 잘 냈으며, 대담무쌍한 참호병였으며, 독한 술은 코난에게 있어 열정이자 약점이었다. 여러 면에서 어린 아이처럼 순진했으며, 문명의 복잡함을 잘 몰랐다. 타고난 지능은 뛰어났으며, 자신의 권리를 탐했고, 배고픈 호랑이처럼 위험했다. 나이는 젊었지만, 많은 전쟁과 방랑으로 단련되어 있었고, 많은 나라를 떠돌았던 흔적은 걸치고 있는 옷에 여실히 드러났다. 뿔 달린 투구는 노드하임의 금발머리 애시르 인들이 쓰는 것 이었고, 쇠사슬 갑옷과 정강이받이는 코스 장인들의 빼어난 솜씨로 만든 것이었으며, 팔과 다리에 걸친 멋진 사슬 갑옷은 니메디아의 것에, 허리에 찬 검은 아퀼로니아의 날 넓은 검이고, 멋진 진홍빛 망토는 오피르 이외에서는 짜지 못하는 옷감이었다.

 아르구스 호는 남쪽으로 나아갔고, 티토 선장은 흑인들 마을의 높은 벽들을 찾기 시작했다. 하지만 해안에는 연기가 피어오르는 폐허와 벌거벗은 흑인들의 시체들뿐이었다. 티토가 욕설을 내뱉었다.

 “지난 번 여기서 교역을 했었는데. 해적들 짓거리야.”

 “우리가 해적들과 마주치면 어떻게 할 건데?” 코난이 칼집에서 큰 검을 뽑으며 말했다.

 “이 배는 전투함이 아냐. 우리는 싸우지 않고 도망치지. 하지만, 위기에 처하면 전에도 약탈자들을 물리친 적이 있으니 싸워야지. 벨리트의 티그레스 호만 아니면 말이지.”

 “벨리트가 누군데?”

 “악명 높은 여자 해적이지. 표식을 잘못 읽지 않았다면 저 만의 마을을 파괴한 건 그 여자가 거느린 해적떼야. 살다 보면 그 여자가 활대 끝에 매달리는 꼴을 보는 날도 있겠지. 벨리트는 검은 해안의 여왕이라 불리는 여자야. 솀 족 여인인데 흑인 해적무리를 이끌지. 그 해적 무리는 짐배들을 약탈하고 많은 선량한 무역상들을 저승으로 보냈어.”

 선미루 갑판 아래에서 티토는 누빈 가죽조끼, 쇠투구와 활과 화살 등속을 꺼내 왔다.

 “잡히면 저항해도 거의 소용이 없을 테지만,” 티토가 투덜거리며 말을 이었다. “하지만 싸워보지도 않고 죽는 건 속이 편치 않아서 말이지.”

 

 파수꾼이 경고의 외침을 지른 것은 막 동이 텄을 때였다. 기다란 배 한 척이 우현으로 보이는 섬의 긴 곶을 돌아서 미끄러지듯 물살을 헤치고 오고 있었다. 길쭉한 뱀 모양의 갤리선으로 이물부터 고물까지 높은 갑판이 이어져 있었다. 측면마다 40개의 노가 물살을 빠르게 헤치며 배를 움직이고 있었고, 낮은 난간에는 벌거벗은 흑인들이 노래를 하고 창으로 타원형 방패를 두들기며 우글거렸다. 돛대에는 진홍색 긴 깃발이 휘날리고 있었다.                     

 “벨리트야!” 티토가 하얗게 질리며 외쳤다. “서둘러라! 기수를 돌려! 강어귀로 들어간다. 저들이 우리를 잡기 전에 해변으로 배를 올리면 살아서 도망칠 기회가 생겨.”

 그래서 아루구스 호는 급선회를 해서 야자수가 늘어선 해안을 따라 철썩거리는 파도를 향해 전속력을 냈다. 티토는 정신없이 왔다 갔다 하며 가쁜 숨을 몰아쉬는 노꾼들에게 더 힘을 내라고 재촉해 댔다. 선장의 검은 수염은 일어서 있었고, 눈은 이글거리고 있었다.

 “나한테 활을 주게.” 코난이 요청했다. “남자가 쓸 무기라고 생각하지 않지만, 하이르카니아 인들과 함께 지낼 때 활쏘기를 배웠으니까. 저 쪽 갑판에 사람을 못 맞춘 다해도 저쪽이 애는 좀 먹게 만들어야지.”

 코난은 선미루 갑판에 서서 잽싸게 물살을 헤치며 달려오는 뱀 모양의 배를 지켜보았다. 뱃사람이 아니었어도 코난의 눈에도 아르구스 호가 이 경주를 절대 이길 수 없으리라는 것은 뻔히 보였다. 해적의 갑판에서는 이미 화살들이 날아와 이쪽 배의 고물에 채 스무 걸음도 남겨놓지 않고 휙휙 소리를 내며 바다로 떨어지고 있었다.    

 “맞서는 게 상책이야!” 코난이 고함을 질렀다. “안 그러면 우리 모두 칼 한번 휘두르지 못하고 등에 화살을 맞아 죽게 돼.”

 “힘을 내라, 얘들아!” 티토가 억센 주먹을 격하게 휘두르며 소리쳤다. 노꾼들은 투덜거리며 노를 힘껏 끌어올렸다. 근육들이 솟아오르며 뭉쳤고, 땀이 송골송골 피부에 맺히기 시작했다. 사람들이 물살을 가르고 거칠게 배를 몰자 작고 튼튼한 갤리선의 목재가 삐걱거리며 신음 소리를 냈다. 바람이 이미 잦아들어서 돛은 맥없이 늘어져 있었다. 약탈자들은 점점 더 가까이 다가오고  있었고, 파도까지는 1마일은 족히 남았을 때 키잡이 중 하나가 목에 긴 화살이 꽂히며 버팀줄 너머로 쓰러졌다. 티토가 얼른 뛰어가 그 자리를 메웠다. 코난은 들썩이는 선미루갑판에 단단히 발을 딛고 서서 활을 들어 올렸다. 코난은 적들은 이제 똑똑히 볼 수 있었다. 노잡이들은 배 측면을 따라 세워놓은 짧은 방패로 보호받고 있었지만, 좁은 갑판에서 펄쩍거리는 전사들은 온전히 다 드러나 보였다. 이들은 몸에 칠을 하고 깃털을 꽂고 있었으며, 거의 벌거벗다시피 하고 창과 점무늬 방패를 흔들고 있었다.

 이물의 높은 단 위에 한 늘씬한 사람이 서 있었다. 그 하얀 피부가 주변의 번들거리는 흑단 피부들 가운데 눈이 부시도록 두드러지며 빛났다. 코난은 활줄을 귀까지 잡아 당겼다. 그리고는 알 수 없는 변덕이나 거리낌 때문인지 손을 멈추었다가  여자 옆의 키 큰 깃털 장식을 한 창을 든 이에게 화살을 날려 관통시켰다.

 해적들의 갤리선은 티토의 갤리선을 차츰 따라잡고 있었다. 아르구스 호 주변에는 화살이 비 오듯 쏟아졌고, 선원들이 비명을 질러댔다. 키잡이들은 모두 활살을 맞아 쓰러졌고, 티토 혼자서 거대한 버팀줄들을 다루고 있었다. 지독한 욕설을 퍼붓는 티토의 다리에는 근육들이 뭉쳐 불끈거렸다. 순간 헉, 하는 소리와 함께 티토가 주저앉았다. 긴 화살이 티토의 튼튼한 심장을 꿰뚫었던 것이다. 아루구스 호는 앞으로 더 나아가지 못하고 파도가 일렁이는 대로 흔들렸다. 사람들이 혼란 속에 소리를 지르자 코난이 예의 명령을 내리기 시작했다.

 “기운 내!” 코난이 화살을 윙, 소리가 나게 쏘아 보내며 고함을 쳤다. “무기를 잡아라. 우리 목이 따이기 전에 이 개자식들에게 쓴 맛을 보여주자고. 이제는 노를 더 저어봤자 소용없어. 노를 저어 도망가도 곧 저들이 배에 오를 것이다!”

 자포자기해서 선원들은 노를 포기하고 무기들을 잡았다. 용감하기는 했지만 소용없는 짓이었다. 해적들이 덮치기 전에 화살을 한 바탕 날린 시간뿐이었다. 버팀줄을 조종하는 이가 한명도 없기에 아르구스 호의 뱃전은 흔들거리고 있었는데, 해적선의 뾰족한 강철 이물이 가운데 부분을 들이 받아 왔다. 갈고리가 달린 닻들이 배의 측면을 긁으며 날아들었다. 높은 뱃전에서 검은 해적들은 화살들을 날려 선원들의 누빈 조끼들을 뚫었고, 창을 들어 학살을 마무리 하려 했다. 해적선의 갑판에는 코난이 열심히 활을 날려서 여섯 구의 시체가 나동그라져 있었다.

 아르구스 호 선상에서의 싸움은 짧은 유혈전이었다. 다부진 선원들은 키 큰 야만인들의 상대가 되지 못하고 쓰러져 갔다. 전투는 다른 곳에서 극적으로 변했다. 코난이 있는 선미루 갑판은 높아서 해적선 갑판과 높이가 같았다. 강철 이물이 아르구스 호를 들이받자, 그 충격에 코난은 몸을 움츠려 넘어지지 않도록 발에 힘을 주었다가 들고 있던 활을 버렸다. 키 큰 해적 하나가 난간너머로 튀어나오다가 허공에서 코난의 칼을 받았다. 칼은 해적의 상반신을 깨끗이 갈라 그 몸은 두 동강이 나면서 떨어져 나갔다. 그리고는 코난은 분노로 달려들어 뱃전에 엉망이 된 시신들을 수북이 쌓여 있는 난간을 넘어 티그레스 호의 갑판에 섰다.

 일순 코난은 찔러오는 창과 내려치는 몽둥이세례 중앙에 서 있었다. 그러나 코난은 검을 눈이 멀도록 휘두르며 움직였다. 창들이 갑옷을 찌르며 구부러지거나 허공을 갈랐고, 코난의 검은 죽음의 노래를 불러댔다. 자신의 종족 특유의 전투의 광기에 취하고 이글거리는 눈앞에 붉은 안개로 밀려드는 맹목적인 분노에 휩싸여 코난은 두개골을 가르고, 가슴을 짓이기고, 사지를 잘라내고, 내장을 쏟게 만들며 갑판을 피와 뇌수로 범벅이 된 도살장으로 만들었다.

 돛대에 등을 대고 갑옷을 입어 끄떡없이 적들이 분노와 공포로 헐떡이며 뒤로 물러설 때까지 발치에 으스러진 시신들의 더미를 쌓았다. 그리고 적들이 던지려고 창들을 들자 코난은 적들에게 덤벼들어 그 중에서 죽으려고 몸을 긴장시키고 있었다. 그때 날카로운 목소리에 창을 든 팔들이 얼어붙었다. 이들은 동상들처럼 가만히 서 있었다. 흑인 거한들은 창을 던지려고 팔을 치켜들고, 갑옷을 입은 검사는 피가 뚝뚝 듣는 검을 든 상태로.

                

 벨리트가 흑인들의 창을 쳐 내리며 앞으로 뛰어 나왔다. 그리고는 코난을 향해 돌아섰다. 가슴을 들썩이며 눈을 빛내고 있었다. 코난의 심장은 놀라서 멈추는 듯 했다. 날씬한 벨리트는 마치 여신과 같은 형상이었다. 나긋나긋하면서도 요염했다. 걸치고 있는 옷이라고는 허리에 두른 넓은 실크 허리띠뿐이었다. 하얀 상아빛 팔 다리와 봉긋하게 솟은 가슴을 보자, 노기어린 전투의 헐떡임 속에서도 맹렬한 열정의 고동이 코난의 맥을 훑고 지나갔다. 스티지아의 밤처럼 새까만 그녀의 머리는 나긋나긋한 등까지 물결치며 흘러내리고 있었고, 검은 눈동자는 코난을 응시하며 타오르고 있었다.

 여인은 사막의 바람처럼 길들여 지지 않고 자유로웠고, 암표범처럼 유연하고 위험했다. 자기 편 전사들의 피가 뚝뚝 듣는 코난이 든 큰 검은 아랑곳 않고 여인이 코난에게 가까이 다가왔다. 여인의 부드러운 허벅지가 칼을 스칠 만큼 가까이 이 키 큰 전사 가까이 접근해 왔다. 여인은 코난의 위협적인 눈을 빤히 들여다보며 그 붉은 입술을 열었다.

 “당신은 누구지?” 여인이 물었다. “이쉬타르 여신의 이름으로 말하는 데, 난 징가라의 해안에서부터 남쪽 끝의 타오르는 불까지 돌아다녀 봤지만, 당신 같은 이는 본 적이 없어. 어디서 왔지?”

 “아르고스에서 왔다.” 코난이 함정에 빠질까 경계하며 짤막하게 대답했다. 허리에 차고 있는 보석 박힌 단도로 그녀의 가느다란 손이 움직이기라도 하면 맨손으로, 여인을 때려 눕혀 의식을 잃고 갑판에 쓰러지게 만들어 놓을 준비가 되어 있었다. 그러나 마음속으로는 아무것도 두렵지 않았다. 문명인이건 야만인이건 여인들을 그 강철 근육이 불끈거리는 팔로 수도 없이 품어 본 지라 이 여인의 눈에서 타오르는 빛을 알아채지 못할 리가 없었다.

 “당신은 물러빠진 하이보리아인은 절대 아냐!” 여인이 외쳤다. “회색 늑대처럼 강하고 단단한 걸. 그 눈은 도시의 불빛으로 흐려져 본 적 없는 눈이고, 그 근육들은 대리속 벽들에 둘러싸여 풀어진 적이 없는 근육이야.”

 “난 심메리아인 코난인다.” 코난이 대답했다.

 이국인들에게 북쪽은 반쯤은 신화 속에나 존재하는 알 수 없는 지역이었다. 검과 횃불을 든 푸른 눈의 맹렬한 거한들이 얼음처럼 빠르게 내려오는 곳이었다. 북구인들은 솀이 있는 곳까지 남쪽으로 내려온 적이 없었기에 이 솀인의 딸은 애시르인, 바니르인, 심메리아인을 구별하지 못했다. 태고적 여성의 흔들림 없는 본능으로 여인은 자신의 연인을 찾았다는 것을 알았다. 먼 이국의 매력을 띠고 있다는 점을 제외하고는 그가 어느 종족 출신이지는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난 벨리트.” 여인이 누가 묻기라도 한 양 외쳤다. “난 여왕이야!”

 “날 봐, 코난.” 여인이 팔을 활짝 펴며 말했다. “나는 벨리트고, 검은 해안의 여왕이지. 당신은 북쪽의 호랑이처럼 당신을 키운 눈 덮인 산만큼이나 차갑군. 당신의 강렬한 사랑으로 날 이끌어서 안아 줘. 나와 함께 이 땅 끝까지 바다의 끝까지 가보자고! 나는 불과 쇠와 살육으로 여왕이야. 그러니까 당신이 내 왕이 되어 줘.

 코난은 눈을 들어 피에 물든 무리들이 행여  분노나 질투의 표정을 짓나 살펴보았다. 그런 표정은 찾을 수 없었다. 검은 얼굴들에서 분노는 사라지고 없었다. 이 자들에게 벨리트는 단순한 여인 이상임을 깨달았다. 벨리트는 그들에게 의문의 여지없는 여신이었던 것이다. 코난은 아르구스 호를 힐긋 바라보았다. 아르구스 호는 진홍빛 바닷물에 기우뚱거리며 네 갈고리 닻들이 꽂혀 갑판은 내려앉고 바닷물이 갑판으로 넘어 들어오는 채 저 멀리 매달려 있었다. 이번에는 푸른 숲이 우거진 해안과 아찔한 녹색의 대양과 눈앞에 서 있는 생명이 넘치는 여인을 바라보았다. 코난 내부의 야만의 영혼이 들썩였다. 이 하얀 피부의 젊고 빛나는 암삵쾡이  같은 여인과 빛나는 푸른 바다에서 모험을 즐긴다니...사랑하고 웃고 떠돌고 약탈하며.

 “당신과 함께 하지.” 코난이 투덜거리듯 말하며 검에서 핏방울을 털어버렸다.

 “이봐, 은야가!” 벨리트의 목소리는 튕겨져 나가는 화살 같았다. “가서 약초를 가지고 와서 주인님의 상처를 싸매드려. 나머지는 약탈물을 싣고 줄을 끊어버려.”

 코난이 선미루 갑판 난간에 등을 기대고 앉자 늙은 주술사가 와서 손과 팔 다리에 베인 상처들을 치료해 주었다. 불운한 아르구스 호의 화물들은 재빨리 티그레스 호로 옮겨져 갑판 아래 작은 선실들에 보관되었다. 선원들과 해적들의 시체들은 몰려든 상어떼에게 던져 주었고, 부상당한 흑인들은 치료를 기다리며 상갑판에 눕혀졌다. 네 갈고리 닻을 아르구스 호에서 떼어내자, 배는 피로 물든 바다 속으로 조용히 가라앉았고, 티그레스 호는 노를 리듬에 맞춰 삐걱거리며 저으며 남쪽으로 기수를 돌렸다.

 유리같이 깊고 잔잔한 푸른 바다로 나오자 벨리트가 선미루 갑판으로 왔다. 장신구와 샌들과 실크 허리띠를 벗어서 코난의 발치에 던지는 그녀의 눈은 암흑 속 표범의 눈처럼 빛나고 있었다. 발끝으로 서서 팔을 쭉 치켜 든 채 그 하얀 나신을 떨며 애타는 무리에게 소리를 쳤다.

 “푸른 바다의 늑대들아, 내 춤을 보아라. 아스칼론 왕의 자손, 벨리트가 추는 사랑의 춤이다!”

 그리고 그녀는 춤을 추었다. 사막의 회오리바람이 부는 것처럼, 꺼질 줄 모르는 불꽃이 튀는 것처럼, 창조의 힘과 죽음의 힘이 어우러진 것처럼 춤을 추었다. 그녀의 하얀 발이 피로 물든 갑판 위를 맴돌자 죽어가는 남자들이 그녀를 쳐다보느라 죽음도 잊었다. 푸른 벨벳 같은 어스름을 헤치고 하얀 별들이 빛나기 시작하자 춤을 추는 그녀의 몸은 상아빛 불꽃이 되었다. 그녀가 거칠게 소리치며 코난의 발치에 몸을 던지자, 코난은 헐떡이는 그녀를 검은 갑옷을 입은 가슴으로 억세게 끌어당겨 안으며 솟구치는 맹목적인 욕정에 모든 일을 잊었다. 


2장. 검은 연꽃


돌무더기가 쌓인 그 죽음의 요새에서

그녀의 눈은 부정한 광채에 끌렸나니,

또 다른 연인이 검으로 찌르듯

알 수 없는 광기가 내 목을 채었다.

                      - 벨리트의 노래


 티그레스 호가 바다를 이리저리 돌아다니자, 흑인들의 마을은 벌벌 떨었다. 밤이면 북소리가 울려 악마 같은 여인에게 연인이, 분노하면 상처 입은 사자처럼 포효하는 짝이 생겼노라 알렸다. 살육당한 스티지아 배들의 생존자들은 벨리트의 이름을 부르며 욕설을 내뱉었고, 타오르는 듯한 푸른 눈을 가진 백인 전사가 있었노라 말했다. 그리하여 스티지아의 군주들은 이 남자를 이후로도 오래도록 기억했고, 훗날 이 쓰디 쓴 기억은 핏빛 열매를 맺게 되었다.

 그러나 떠도는 바람처럼 표표히 티그레스 호는 남쪽 해안들을 따라 항해했고, 그러다 한 음산한 넓은 강어귀에 정박을 했다. 강둑에는 신비로운 정글이 빽빽이 우거져 있었다. 

 “이 강은 자르크헤바 강이야. 죽음이라는 뜻이지.” 벨리트가 말했다. “이 물은 독성이 있어. 저 강물이 얼마나 시커멓고 흐린지 한번 봐. 독 있는 파충류들만 이 강에서 살아. 흑인들은 이 강을 피해 다녀. 한 번은 스티지아 배 한 척이 우리 해적선에서 도망쳐서 강을 따라 올라갔다가 사라졌어. 우리 배는 바로 여기에 닻을 내리고 기다렸지. 며칠 후 그 갤리 선이 검은 물을 따라 흘러내려왔어. 갑판은 피투성이에 사람은 하나도 안보이더라고. 딱 한 사람만 타고 있었는데, 미쳐서 알 수 없는 말을 중얼거리며 죽었어. 화물은 손도 안댄 채 그대로 였는데, 선원들은 침묵과 신비 속으로 사라져 버렸지.

 코난. 나는 이 강 어디인가에 도시가 있다고 믿어. 용기를 내서 강을 반쯤 따라 올라갔던 선원들이 거대한 탑들과 벽들을 얼핏 보았다는 이야기들을 들었어. 우린 두려울 게 없잖아, 코난. 가서 그 도시를 털자!”

 코난은 동의했다. 벨리트의 계획에는 대체로 동의하는 편이었다. 그녀가 약탈을 지휘하는 머리 역할을 하면, 그의 팔이 그녀의 생각대로 움직였다. 항해하며 싸우기만 한다면, 어디를 항해하는지, 누구와 싸우는지는 코난에게 중요치 않았다. 삶이 만족스러웠다.

 전투와 약탈로 선원들 숫자는 줄어들어 있었다. 팔십 명의 창병들이 남아서 긴 갤리선을 간신히 움직일 수 있었다. 그러나 벨리트는 해적들을 충원하는 섬 왕국이 있는 남쪽으로 시간을 내 가려고 하지를 않았다. 그녀는 최근 모험에 한껏 도취되어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티그레스 호는 강어귀로 들어갔다. 노꾼들이 힘껏 노를 잡아당기자 배는 커다른 조류를 가르고 돌진했다.

 이름모를 모퉁이를 감아 돌자 바다가 더 이상 보이지 않았다. 이상한 피충류들이 똬리를 틀고 있는 모래톱들을 피해 배가 느린 흐름을 애써 거슬러 올라갈 때 석양이 뉘엿거리고 있었다. 악어 한 마리도 눈에 띄지 않았다. 네발짐승이나 새 한 마리조차도 물을 마시러 물가로 오는 모습을 볼 수가 없었다. 달이 떠오르기 전 펼쳐진 어둠을 헤치고 칠흑 같은 암흑의 장막이 드리워진 강둑 사이로 이들은 계속 앞으로 나아갔다. 강둑에서는 알 수 없는 부스럭대는 소리, 살금거리는 발걸음 소리가 들렸고, 어두운 눈이 번뜩거리는 것이 보였다. 인간의 것이 아닌 목소리, 유인원의 울부짖음이 끔찍한 조롱이라도 하는 듯 들려오자 벨리트는 악한 이들의 영혼이 과거 저지른 죄에 대한 벌로 인간처럼 생긴 동물의 육신에 갇혀 있는 거라 말했다. 하지만 코난은 그 말을 믿을 수가 없었다. 이전에 하이르카니아의 한 도시에서 금빛 창살 우리에 갇힌 동물을 보았기 때문이었다. 깊은 슬픔을 지닌 그 동물을 사람들은 유인원이라 불렀고, 지금 저 어두운 정글에서 메아리치는 찢어지는 듯한 웃음소리 속에 맴도는 덕과 같은 악의는 그 유인원에게서는 한 치도 찾아볼 수 없었다. 

 이윽고 달이 떠올랐다. 검은 테가 둘러진 핏빛 원으로 떠올랐다. 정글이 온통 법석을 떨며 달을 맞으러 깨어났다. 울부짖는 소리, 으르렁거리는 소리, 찢어지는 외침에 흑인 전사들이 벌벌 떨었다. 코난이 보아하니 이 소리들은 모두 정글의 속 저 멀리에서 들려오고 있었다. 인간이 아닌 짐승들은 자르크헤바의 검은 물을 모두 피하는 듯 싶었다.

 나무들이 이루는 빽빽한 어둠과 넘실거리는 잎들 위로 달이 떠올라 강물 위에 은빛으로 부서졌다. 배가 지나간 자리에는 보석이 부서지며 길이 만들어져 넓게 퍼져 가는 것처럼 인광성 거품이 물결을 일으키며 번쩍였다. 노들은 빛나는 물속에 잠겼다가 차가운 은빛 막으로 덮여 물 위로 솟구치기를 반복하고 있었다. 전사가 머리에 쓴 투구에 꽂힌 깃털은 바람에 까딱거렸고, 검자루에 박힌 보석과 갑옷이 차갑게 반짝거렸다.

 벨리트가 갑판 위에 깔린 표범 가죽위에 누워 그 유연한 몸으로 기지개를 켜자 그 숱 많은 검은 머리채에 차가운 달빛이 부서져 얼음 불꽃이라도 지피는 것 같았다. 팔꿈치를 괴고 손바닥에 턱을 묻은 채 벨리트는 옆에서 쉬고 있는 코난의 얼굴을 가만히 올려다보았다. 코난의 검은 머리칼이 희미한 미풍에 날리고 있었다. 벨리트의 눈은 달빛 속에서 타오르는 검은 보석 같았다.

 “신비와 공포가 주변에 도사리고 있어. 코난, 우리는 지금 죽음과 공포의 땅으로 들어가고 있는 거야. 두려워?”

 코난은 갑옷을 걸친 어깨를 으쓱해 보이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나도 안 무서워.” 벨리트가 생각에 잠긴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두려워 해본 적 없어. 죽음의 적나라한 송곳니를 너무도 자주 봤거든. 코난. 신을 두려워 해?”

 “신들의 그림자를 밟고 싶지는 않아.” 코난이 보수적인 대답을 했다. “어떤 신들은 강해서 해를 끼치고, 어떤 신들은 강해서 도와주지. 최소한 그렇다고 신을 모시는 자들이 말해잖아. 하이보리아인들이 섬기는 미트라 여신은 강한 신이야. 하이보리아 인들이 전 세계에 걸쳐 도시를 세운 것을 보면. 하지만 하이보리아인들조차도 세트 신은 두려워하지. 그리고 도둑의 신인 벨 신도 좋은 신이야. 내가 잠모라에서 도둑 행세를 했을 때 벨 신을 알게 됐어.”

 “당신이 믿는 신은 누군데? 당신이 믿는 신 이름을 부르는 걸 들은 적이 없어.”

 “내가 믿는 신들의 왕은 크롬이야. 크롬 신은 위대한 산에 살아. 의지해도 소용없어. 인간이 죽든 살든 크롬은 신경 쓰지 않거든. 크롬을 부르느니 입을 다무는 게 낫지. 크롬은 행운을 보내는 게 아니라 죽음을 보내거든. 크롬은 음울하고 냉정하지만, 인간이 태어날 때 싸우고 사람의 영혼을 도륙할 힘을 불어 넣어 주지. 인간이 그 밖에 신에게서 바랄 게 더 뭐가 있겠어?”

 “하지만 죽음의 강 너머에 있는 이승은 어쩌고?” 그녀가 끈질기게 물었다.

 “우리 종족의 종교에는 여기나 여기 이후에 가게 되는 곳에도 희망은 없어.” 코난이 대답했다. “이 세상에서 인간은 헛되이 투쟁하고 고통 받으며, 전투의 빛나는 광기 속에서나 기쁨을 구하지. 죽어가면서 인간의 영혼은 구름과 차가운 바람이 어우러진 뿌연 회색 지대로 들어가 영원의 세계를 기쁨 없이 맴도는 거야.”

 벨리트가 몸을 부르르 떨었다. “삶은 아무리 지독해도 그런 운명보다는 나아. 코난, 당신은 뭘 믿는 거지?”

 코난은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나는 많은 신들을 보아 왔는데, 신을 부정하는 자도 신을 지나치게 믿는 자 만큼이나 장님이더군. 난 죽음 너머의 세계는 구하지 않아. 니메디아의 회의론자들이 말하는 데로 죽음 너머는 암흑일지도 모르고, 크롬 신의 얼음과 구름일지도 모르고, 노드하임인들이 믿는 발할라 신의 눈 덮인 평원과 웅장한 전당일지도 모르지. 죽음 너머가 어떨지는 난 알지도 못하고, 알고 싶지도 않아. 살아있는 동안 삶에 취해 살고 싶어. 붉은 고기에서 뚝뚝 듣는 육즙과 혀를 톡 쏘는 포도주와, 하얀 팔들의 포옹과, 시퍼런 칼날이 불꽃을 일으키며 진홍빛 피보라를 일으키는 순간 전투의 광기어린 환희를 느끼며 살면, 그걸로 족해. 선생이나 사제나 철학자들이나 현실과 환상에 대한 문제들을 고민하라고 해. 내가 아는 것은 이거야. 삶이 환상이라면, 나도 환상에 지나지 않는 다는 거지. 그리고 그렇다면 환상은 내게 실재인 거야. 나는 살아가고, 삶으로 불타오르고, 사랑하고, 살육하고, 그리고 만족할 따름이야.”

 “하지만 신들은 정말로 있어.” 벨리트가 자신의 생각을 밀어붙이며 말했다. “그리고 신들 중의 신은 솀인들의 신인 이쉬타르 여신, 아쉬토레쓰 신, 데르케토 신, 그리고 아도니스 신이야. 벨 신도 솀인들의 신이야. 아주 오래전 고대 슈미르에서 태어나, 곱슬거리는 수염과 장난기어린 지혜로운 눈으로 웃으며 나아와 고대 왕들의 보석들을 훔쳤으니까.

 죽음 너머에도 삶이 있다는 것을 난 알아. 그리고, 심메리아인 코난, 내가 아는 것은 또 뭐냐면,” 벨리트는 나긋나긋하게 몸을 일으켜 무릎으로 선 채 표범처럼 유연하게 코난을 감싸 안으며 말을 이었다. “내 사랑은 어떤 죽음보다도 강하다는 거야! 난 당신 팔에 안겨 격렬한 사랑을 맛보았어. 당신은 나를 안고 정복했지. 멍들 정도로 격렬한 키스를 해서 당신 입술로 내 영혼을 앗아갔어. 내 심장과 당신의 심장은 하나야. 내 영혼은 당신 영혼의 일부고. 내가 죽는다면 당신이 목숨을 걸고 싸울 때 죽음에서 돌아와 당신을 도울 거야. 내 혼이 천상의 수정 바다 위에서 보랏빛 돛을 나부끼며 떠다닌다 해도, 아니면 지옥의 뜨거운 불꽅 속에서 몸부림친다 해도 난 돌아올 거야. 난 당신 것이고, 어떤 신도 어떤 영원도 우리를 갈라놓지는 못해!”

 

 이물에 있는 파수꾼이 날카롭게 비명을 질렀다. 벨리트를 옆으로 밀어놓고 코난은 튀어 오르듯 일어났다. 그의 검이 달빛 속에서 길게 은빛으로 빛났다. 눈앞에 벌어지는 일에 코난의 머리칼이 온통 곤두섰다. 그 흑인 전사는 갑판 위에 대롱대롱 매달려 있었다. 뱃전 난간 위로 몸을 드리운 굵고 부드러운 검은 나무줄기 같은 것에 매달려 있었던 것이다. 다음 순간 코난은 거대한 뱀이 번쩍이는 몸을 이물 측면에 대고 올라와 그 운 없는 전사를 낚아 채 턱에 물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물이 뚝뚝 듣는 뱀의 비늘은 뱀이 갑판 위로 높이 몸체를 곧추 세우면서 달빛에 번쩍거렸다. 잡힌 사람은 구렁이 입에 놓인 쥐처럼 비명을 지르며 꿈틀거렸다. 코난은 급히 이물로 달려가 큰 검을 휘둘러서는 남자의 몸통보다도 굵은 뱀의 거대한 몸체를 거의 잘라버렸다. 죽어가는 괴물이 몸부림을 치면서 난간이 피로 물들었다. 뱀은 먹이를 그대로 입에 물고 똬리를 튼 채 강 속으로 가라앉아 버렸다. 물보라를 일으켜 핏빛 거품이 일어나다가 뱀과 사람이 함께 사라져 버렸다.

 이후로 코난이 직접 파수를 섰지만, 검고 깊은 강에서는 어떤 공포스러운 존재도 기어 올라오지 않았다. 새벽이 정글 위로 하얗게 밝아 올 때, 나무들 사이로 검은 탑들이 뾰족하게 솟은 것이 보였다. 코난이 벨리트를 부르자, 코난의 진홍빛 망토를 감고 갑판에서 자던 벨리트는 벌떡 일어나 눈을 빛내며 그의 옆으로 왔다. 입술을 열어 창과 방패를 들라고 전사들에게 명령을 내리려고 하다가, 그 아름다운 눈이 휘둥그레 해졌다.

 이들이 정글이 빽빽한 튀어나온 곶을 지나 안으로 굽어진 해안으로 향해 나아갈 때 눈에 들어온 것은 유령 도시였다. 한 때 거리요, 넓은 광장이요, 넓은 법정이었던 곳에는 잡초와 제멋대로 자란 강가의 풀들이 무너진 선창의 돌들과 흩어진 포석들 사이에 자라고 있었다. 강 쪽으로 트인 부분만 제외하고는 사방에서 정글이 도시로 뻗어 들어와 쓰러진 기둥들을 뒤덮었고, 무너져가는 언덕들은 유독성 식물이 우거져 있었다. 여기저기에 기울어져 가는 탑들이 아침 하늘을 배경으로 술 취한 듯 흔들리고 있었고, 썩어가는 벽들 위로 무너진 기둥들이 삐죽빼죽 튀어나와 있었다. 중앙의 빈 터에는 기둥 하나가 받치는 대리석 피라미드 하나가 솟아 있었고, 그 첨탑 꼭대기에는 무엇인가 앉아있거나 웅크리고 있었다. 코난은 처음에는 동상인 줄 알았지만, 예리한 눈으로 한참을 살펴보고서야 살아있는 생명체라는 것을 알다.

 “커다란 새인뎁쇼.” 전사 중 한 명이 이물에 서서 말했다.

 “괴물 박쥐야.” 다른 전사가 우겼다.

 “유인원이다.” 벨리트가 끼어들었다.

 바로 그때 그 생물이 넓은 날개를 펼치더니 날개를 치며 정글 속으로 사라져 버렸다.

 “날개 달린 유인원이군요.” 은야가가 불안해하며 말을 이었다. “여길 오느니 칼을 물고 죽는 게 낫습니다요. 여긴 유령이 나와요.”

 벨리트가 은야가의 미신을 비웃으며 갤리선을 해안으로 몰아 무너져가는 선창에 배를 정박시키라고 명령했다. 벨리트가 가장 먼저 뭍으로 뛰어 내렸고, 그 뒤를 바짝 쫓아 코난이 내렸다. 검은 피부의 해적들이 우르르 이들 뒤를 따랐다. 아침 바람에 깃털을 나부끼며 창을 들고는 주위 정글을 의심스럽다는 듯 살펴댔다.

 잠자는 뱀의 침묵만큼이나 불길한 고요함이 감돌았다. 벨리트가 폐허들 가운데 멋있게 자세를 잡고 섰다. 그녀의 나긋나긋한 몸에 넘쳐흐르는 생명이 주변의 황막함과 부패와 기묘하게 대조를 이루었다. 태양은 하늘 높이 솟아 이글거리며 음산하게 빛났다. 멍한 황금빛으로 탑들에 내리쬐는 햇살은 휘청거리는 벽들 아래에 꾸물거리는 그림자들을 만들어냈다. 벨리트는 기반이 썩어가면서 휘청 기운 가늘고 둥근 탑 하나를 가리켰다. 여기저기 갈라지고 풀들이 자란 넓은 석판 길이 군데군데 쓰러진 기둥들을 거느리고 그 탑까지 이어져 있었다. 탑 앞에는 거대한 제단이 서 있었다. 벨리트는 이 고대의 석판길을 빠르게 걸어 그 제단 앞에 섰다.

 “옛 신들의 사원이야. 봐. 제단 양 옆에 핏물이 빠지는 고랑이 있잖아. 만 년을 내린 비에도 그 때 생긴 핏 자국이 안 지워졌어. 벽들은 이미 다 허물어졌는데, 이 돌제단은 시간과 자연의 기본 구성에 어긋나는 군.”

 “그런데 이 옛 신들이 누구야?” 코난이 물었다.

 벨리트는 가느다란 손을 체념하듯이 펴 보이며 말했다. “이 도시는 전설 속에도 언급이 안 돼 있어. 하지만 제단 양쪽 끝에 손잡이를 봐! 사제들은 보물들을 종종 제단 아래에 숨기곤 하거든. 거기 네 명이 어디 들어 올릴 수 있나 한번 당겨 봐.”

 벨리트는 이들을 들어설 자리를 내주느라 뒤로 물러나서는 머리 위에 술 취한 듯 기우뚱 드리워진 탑을 올려다보았다. 가장 힘센 흑인 세 명이 돌 속에 새겨진 손잡이를 잡았다. 아상하게도 인간의 손에 맞지 않았다. 그때 벨리트가 뒤로 펄쩍 물러서며 날카로운 비명을 질렀다. 사람들이 그 자리에 얼어붙었고, 제단을 움직이는 것을 도우려던 코난이 놀라 욕설을 내뱉으며 재빨리 몸을 돌렸다.

 “풀숲에 녹색 뱀이 있어.” 뒤로 몰러나며 블레트가 말을 계속했다. “와서 죽여 줘. 나머지는 있는 힘껏 제단의 돌을 옮겨 봐.”

 

 

 코난은 재빨리 벨리트 곁으로 가자 다른 이가 코난의 자리를 맡았다. 코난이 초조하게 뱀을 찾아 풀밭을 훑는 동안 흑인 거한들은 발에 힘을 주고 투덜거리며 검은 피부 아래 근육들을 불끈거리며 힘을 주었다. 제단은 땅에서 떨어지지 않다가 갑자기 한 쪽으로 돌았다. 그리고 동시에 귀에 거슬리는 소리가 우르릉 나더니 탑이 무너져 내려서 떨어지는 돌조각에 네 명의 거한을 깔아뭉갰다.

 공포의 외침이 이들의 동료들로부터 솟아올랐다. 벨리트의 가느다란 손가락이 코난의 팔근육을 파고들었다. “뱀은 애당초 없어.” 벨리트가 속삭였다. “당신을 불러내려는 계책이었어. 걱정이 됐거든. 고대인들은 자기들 보물을 원래 단단히 지켜. 이제 저 돌들을 치우자고.”

  엄청나게 힘을 써서 이들은 으깨진 네 명의 시체를 들어냈다. 그리고 이들의 피로 범벅이 되어서 이들은 시체 아래에서 하나의 돌을 파내서 만든 지하 공간을 발견했다. 제단은 돌로 된 막대와 구멍이 신기하게 경첩을 이루며 한 쪽에 붙어 있어서 뚜껑 역할을 하고 있었다. 처음 봤을 때에 지하 공간은 번쩍거리는 수백만 개의 보석들이 아침 햇살을 받아 타오르는 액체로 테를 두른 듯 보였다. 꿈에서도 차마 보지 못했던 엄청난 보화가 놀라서 입을 벌린 해적들 앞에 놓여 있었다. 다이아몬드, 루비, 혈석, 사파이어, 터키석, 월석, 오팔, 에메랄드, 자수정, 그 밖에 알 수 없는 보석들이 사악한 여인들의 눈들처럼 빛나고 있었다. 그 지하 공간에 입구까지 채워진 빛나는 보석들은 아침 햇살에 일렁이는 불꽃처럼 광채를 발했다.

 소리를 지르며 벨리트가 지하 공간 가장자리 피 묻은 돌들 틈에 털썩 주저앉아서는, 보석들 속으로 어깨가 묻힐 만큼 그 하얀 팔을 밀어 넣었다. 팔을 거두어들이자 또 한 번 외침이 그녀의 입술에서 터져 나왔다. 벨리트는 그 손에 두꺼운 황금실에 얼어붙은 핏방울이 덩어리가 꿰어진 것 같은 긴 선홍색 보석 목걸이를 움켜쥐고 있었다. 보석들의 광채 속에서 황금빛 햇살은 핏빛 아지랑이로 변했다.

 벨리트의 눈은 황홀경에 빠진 여인의 눈 같았다. 솀인은 부와 물질적인 영광에 눈부시게 취하는 사람들이고, 이 보화는 사실 슈샨의 배부른 황제의 영혼도 뒤흔들어 놓을만했다.

 “보석들을 챙겨라!” 벨리트가 감정에 겨워 새된 소리로 외쳤다.

 “보세요!” 한 흑인이 근육질의 검은 팔로 티그레스 호 쪽을 가리켰다. 벨리트는 맞수인 다른 해적인 보화를 뺏으려 달려들기라도 하는 것처럼 선홍색 입술로 으르렁거리며 돌아섰다. 그러나 티그레스 호의 뱃전에서 시커먼 형체가 날아오르더니 정글 위로 솟구치는 것이 보였다.

 “저 유인원 악마가 우리 배를 뒤졌나봅니다.” 흑인들이 불안해하며 중얼거렸다.

 “그게 뭐 어쨌다고?” 벨리트가 허둥지둥 손으로 보석들을 긁어모으며 욕설을 퍼부었다. “창하고 망토로 들것을 만들어서 이 보석들을 나르도록 해. 그런데 당신은 어디 가는 거야?”

 “갤리선을 살펴보려고.” 코난이 무뚝뚝하게 대답했다. “저 박쥐 놈이 배 바닥에 구멍을 내놓았는지도 모르잖아.”

 코난은 재빨리 갈라진 선창을 달려 내려가 배 위로 뛰어 올랐다. 갑판 아래를 빠르게 점검하고는 코난은 한바탕 욕을 퍼부으며 그 박쥐 괴물이 사라진 방향을 어둔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코난은 지하 공간의 보화를 옮기는 것을 지휘하고 있는 벨리트에게 돌아갔다. 벨리트의 목에는 목걸이를 칭칭 감겨 있었고, 벌거벗은 하얀 가슴에는 핏방울 같은 보석이 어둡게 빛나고 있었다. 덩치 큰 흑인이 보화로 가득 찬 지하공간에 가랑이까지 파묻히게 서서는 위에 선 이들에게 보석들을 퍼서 건네주고 있었다. 얼음 같은 무지개 빛 줄들이 그 검은 손에 늘어져 있었고, 붉은 불꽃 방울들이 손에서 뚝뚝 떨어졌으며, 별빛과 무지개빛이 수북이 쌓여 있었다. 마치 검은 거인이 양손 가득 별을 들고 지옥의 눈부신 무저갱에 다리를 벌리고 서 있는 것 같았다.

 “그 날개 달린 악마가 물통에 부수었어.” 코난이 말했다. “우리가 이 보석들에 정신이 팔리지 않았으면, 그 부수는 소리를 들었을 거야. 배를 지키라고 한 명을 배에 두고 오지 않은 게 잘못이야. 이 강물은 마실 수 없잖아. 내가 스무 명을 데리고 가서 이 정글에 마실 물이 있는지 찾아볼게.”

 벨리트는 코난은 흐릿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그 눈에는 기묘한 열정의 공허한 불꽃이 타오르고 있었고, 손가락은 가슴께에 늘어진 보석을 더듬고 있었다.

 “알았어.” 벨리트가 코난의 말을 건성으로 들어 넘기며 무심히 대답했다. “난 보화들을 배에 실어 둘께.”

 

 무성한 정글을 헤치고 들어서니 황금색 햇빛이 회색으로 바뀌었다. 휘어진 녹색 가지에는 파충류들이 구렁이처럼 늘어져 있었다. 전사들은 검은 유령들이 흰 유령 뒤를 따르듯이 원시의 여명을 헤치고 기다시피 하며 일렬로 늘어서서 정글로 들어섰다.

 수풀 아래는 코난이 기대했던 것보다 빽빽하지 않았다. 땅은 푹신 거렸지만, 진창은 아니었다. 강에서 멀어질수록 땅은 점점 높아졌다. 점점 더 깊이 이들은 넘실대는 녹색 잎들을 헤치고 들어갔다. 하지만 흐르는 시내이건 고여 있는 웅덩이이건  물이 있는 기미는 보이지 않았다. 코난이 갑자기 멈춰 섰고, 전사들은 현무암 동상들처럼 얼어붙었다. 긴장 속에 침묵이 이어지더니 코난이 화가 난다는 듯 머리를 흔들어 댔다.

 “계속 가자.” 코난이 투덜거리며 추장 다음 서열인 은고라에게 말했다. “내가 안보일 때까지 앞으로 쭉 가서 멈춰 서서 나를 기다려. 누군가 우리를 따라오고 있어. 무슨 소리가 들려.”

 흑인들은 불안하게 발뒤꿈치들을 끌었지만, 시키는 대로 했다. 이들이 앞으로 계속 나가가자 코난은 재빨리 큰 나무 뒤에 숨어서 자신들이 지나온 길을 노려보았다. 잎이 무성한 녹음 속에서는 어떤 것이든 튀어나올 것 같았다. 하지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앞으로 나아가는 창 든 용사들의 소리가 멀리서 희미해져 갔다. 코난은 공기 중에 낯설고 이국적인 향이 떠도는 것을 문득 느꼈다. 무엇인가 부드럽게 코난의 관자놀이를 스쳤다. 코난은 재빨리 돌아섰다. 이상한 녹색 잎들이 우거진 가지에서 커다란 검은색 꽃들이 까딱거리고 있었다. 이 꽃들 중 하나가 코난에게 닿았던 것이다. 꽃들은 나긋나긋한 가지를 코난 쪽으로 뻗어 올리며 코난에게 인사라도 하는 듯 했다. 바람 한 점 없는데도 꽃들이 흩어지며 부스럭거렸다.

 즙은 독약요, 향기는 꿈에 홀린 잠을 가져다주는 검은 연꽃을 알아보고는 코난은 움츠려 들었다. 하지만 이미 알 수 없는 무기력감이 자신을 은근슬쩍 감싸는 것을 느꼈다. 뱀 같은 줄기를 베어버리려고 검을 들려고 했지만, 팔은 양 옆에 늘어져 꼼짝도 하지 않았다. 입을 열어 전사들에게 소리를 치려고 했지만, 희미하게 달각거리는 서리만 나왔다. 다음 순간 소르끼치도록 갑자기 정글이 그의 눈앞이 흔들거리더니 어두워졌다. 코난은 멀지 않은 곳에서 끔찍한 외침이 터져 나오는 비명 소리를 듣지 못했다. 무릎이 꺾이면서 사지를 늘어트리고 땅으로 풀썩 쓰러졌다. 쓰러진 코난 위로 거대한 검은 연꽃들이 바람도 없는데도 까딱거리고 있었다.


3장. 정글 속의 공포


그 검은 연꽃은 가져다 준 것은 정녕 꿈이었던가?

 그렇다면 내 둔한 생명을 취한 꿈이여, 저주받으라.

그리고 진홍으로 물든 칼날에서 뜨거운 피가 시커멓게 듣는 것을

 보지 못한 더딘 시간이여, 저주받으라.

                               - 벨리트의 노래


 처음에는 완전히 텅 빈 어둠뿐이었다. 우주로 이어진 공간에 차가운 바람들이 스치고 지나갈 뿐이었다. 그리고 어둠이 물질적인 형태라도 취하는 양, 희미하고, 흉측하고, 미미한 형체들이 광대하게 뻗은 무(無)속에 흐릿한 파노라마처럼 펼쳐졌다. 바람이 불며 아우성치는 소용돌이 속에 어둠의 피라미드들이 생겨났다. 형체가 자라 모양과 차원을 갖추었다. 그리고 갑자기, 구름이 흩어지는 것처럼 어둠이 양쪽으로 몰려나가더니 진녹색 돌로 지은 도시가 끝도 없이 펼쳐진 평원을 감아 흐르는 거대한 강의 강둑에 솟아올랐다. 낯선 존재들이 이 도시를 지나다녔다.

 인간의 모양으로 빚어지기는 했으나, 이들은 분명히 인간이 아니었다. 이들은 날개가 달려있었고, 거대한 풍채를 지니고 있었다. 인간의 계보에서 정점을 이루는 진화의 줄기에서 뻗어나간 가지가 아니라, 그 줄기와는 별도로 이질적인 계보에서 원숙한 진화를 이룬 종족이었다. 날개 이외에도 신체적인 용모에서도 인간이 진화의 계보 꼭대기에서 유인원들을 닮은 것처럼 이들은 인간과 닮았었다. 영적, 미적, 그리고 지적 발전에서 이들은 인간이 고릴라보다 우월한 것처럼 인간보다 우월했었다. 그러나 이들이 이 거대한 도시를 세웠을 때, 인간의 아스라한 조상은 원시 바다의 진흙을 벗고 올라오지도 못한 상태였다.

 이 존재들은 피와 살로 된 모든 존재들이 그렇듯이 불멸이 아니었다. 이들은 비록 개개인의 수명은 엄청나게 길었지만, 살고, 사랑하고, 죽었다. 그리고 헤아릴 수 없는 영겁의 시간이 지나고, 변화가 시작되었다. 보이는 광경이 그림 위에 드리워진 막이 바람에 펄럭이는 것처럼 빛을 내며 떨렸다. 파도가 해변으로 밀려오는 것처럼 세월이 도시와 대륙 위로 흘러지나갔고, 매번 파도가 일 때마다 변화가 생겨났다. 행성의 어느 부분에서인가 자기중심이 바뀌고 있었다. 거대한 빙산과 빙판들이 새로운 극점을 중심으로 모여들었다. 

 거대한 강의 연안이 바뀌었다. 평원은 파충류들의 역한 냄새가 나는 늪으로 바뀌었다. 비옥한 평원이 펼쳐졌던 곳에는 숲들이 솟아올라 축축한 정글로 자라갔다. 이렇게 변화하는 세월은 도시의 거주민들에게도 자취를 남겼다. 이들은 새로운 땅으로 이주하지 않았다. 인간은 이해할 수 없는 이유에 속박 당해 이들은 고대의 도시에 남아 최후를 맞았다. 한때 풍요롭고 강성했던 땅이 햇볕이 안 드는 정글의 검은 수렁 속으로 깊이 더 깊이 빠져 들어가면서 아우성치는 정글의 생명체들이 도시민들을 잠식해 갔다. 끔찍한 대변동이 지구를 강타했고, 화산들이 폭발하며 검은 지평선을 붉은 기둥으로 물들이는 섬뜩한 밤들이 찾아왔다.

 지진이 도시의 외벽과 가장 높은 탑들을 무너뜨리고 강이 범람해 넘치면서 땅 속 깊은 무저갱이 뱉어낸 흉측한 물질들이 여러 날 강물에 섞여 흐른 후, 주민들이 수천만 년을 변치 않고 마셔왔던 물에 무시무시한 화학적 변화가 일어났다.

 물을 마신 많은 이들이 죽었고, 살아남은 이들은 물을 마시고 서서히 눈에 띄지 않게 점점 어두운 존재로 변화했다. 변화하는 조건에 적응하는 과정에서 이들은 자신들의 기원보다 더 하등의 존재로 이미 전락한 터였지만, 치명적인 물은 이들은 훨씬 더 끔찍하게 변모시켜 야수에 가까운 존재가 되어버렸다. 날개 달린 신들이었던 존재들이 날개 달린 악마로 변했고, 조상들의 남긴 광대한 지식은 왜곡되고 뒤틀리고 타락해서 악의 길로 인도했다. 이들은 인간이 차마 꿈꿀 수 있었던 것보다 더 높이 비상했다가 인간이 지닌 최악의 광기가 빚어내는 악몽이 도달할 수 있는 것보다도 더 깊이 추락했다. 식인 풍습으로 빨리 죽어갔으며, 한밤중 정글의 어둠 속에서는 끔찍한 혈투들이 벌어졌다. 그러다 마침내 오로지 한 명만 남아, 자연에 어긋나는 혐오스러운 타락의 축소판으로 이끼가 자라는 도시의 폐허를 어슬렁거리게 되었다.    

 그리고는 인간이 처음 등장했다. 검은 피부에 매처럼 날카로운 얼굴의 사람들이 구리와 가죽 무구를 걸치고 활을 들고 있었다. 선사시대 스티지아의 전사들 오십 명이었다. 이들은 굶주림과 오랜 행군으로 초췌하고 수척했다. 정글을 헤매느라  더러워지고 긁혀 있는 데에다 격렬한 전투를 말해주는 피 묻은 붕대들을 감고 있는 몰골들이었다. 낯선 종족에 밀려 남쪽으로 내려온 이들이었다. 전쟁과 패배와 도주의 사연을 마음속에 담고 정글 속에 들어왔다가 푸른 대양 속에서 길을 잃고 말았던 것이다.

 이들은 만신창이가 된 몸을 폐허 가운데 눕혔다. 백년 에 한 번씩 핀다는 붉은 꽃이 만개해서 만월 속에 흐느적거리고 있었다. 잠이 이들을 덮쳤다. 이들이 잠자는 동안 붉은 눈의 사악한 형체가 어둠 속에서 기어 나와 돌아다니며 잠자는 이들 하나하나에 기묘하고 끔찍한 의식을 베풀었다. 그늘진 하늘에 달이 정글을 붉고 검게 물들이며 걸려 있었다. 잠든 이들 위에서 선홍색 꽃들이 핏물처럼 깜박였다. 그리고 달이 지자, 마법사의 눈은 밤의 칠흑 속에 박힌 붉은 보석처럼 빛났다.

 새벽이 그 하얀 너울을 강에 드리우자 사람은 한 명도 보이지 않았다. 단지 떨리는 주둥이를 창백한 하늘을 향해 쳐들고 지옥에 떨어진 영혼들 마냥 울부짖는 점박이 하이에나 쉰 마리 가운데에 날개달린 털북숭이 괴물 한 마리가 쭈그리고 앉아있었을 뿐이었다. 

 그리고 이어지는 장면들은 너무도 빨리 스쳐지나가 한 장면이 미처 지나가기 전에 다른 장면과 맞물리며 돌아갔다. 혼돈스러운 움직임이 검은 정글, 녹색 돌의 폐허, 시커먼 강물을 배경으로 빛과 그림자 속에 꿈틀거리고 녹아 내렸다. 흑인들이 이물에 흉측한 미소를 띤 해골을 달고 기다란 배를 타고 강을 올라오거나 창을 들고 나무를 헤치며 살금살금 몸을 굽히고 다가왔다. 이들은 붉은 눈과 침이 뚝뚝 흐르는 송곳니를 피해 비명을 지르며 어둠을 헤치고 달아났다. 죽어가는 이들의 울부짖음에 그림자가 떨렸다. 숨죽인 발걸음 소리가 어둠을 헤치고 자박거렸고, 흡혈귀 같은 눈은 붉게 타올랐다. 달 아래 소름끼치는 향연이 벌어졌으며, 붉게 휘영청 달이 뜬 하늘을 거대한 박쥐같은 생물이 끊임없이 날아올라 살처럼 긋고 있었다.

 그리고 갑자기 이 얼비치는 인상적인 장면들과는 대조적으로 선명하게 도드라지는 영상이 떠올랐다. 하얗게 지펴 오르는 새벽에 기다란 갤리선 한 척이 정글의 곶을 돌아 올라왔다. 빛나는 검은 피부의 흑인들이 줄지어 있었고, 이물에는 시퍼런 검을 참 하얀 피부의 거한이 서 있었다.

 자신이 꿈을 꾸고 있다는 것을 깨달은 것은 바로 이 즈음에서였다. 이 순간이 되기 전에는 개별적인 존재로서의 의식이 없었다. 하지만 티그레스 호 선상을 왔다 갔다 하는 자신의 모습을 보면서 코난은 잠에서 깨지는 못했어도 자신의 존재와 꿈을 인식하게 되었다.

   그렇게 꿈꾸며 의아해 하는 새 장면은 다시 급작스레 정글의 한 빈터로 바뀌었다. 은고라와 열아홉 명의 흑인 전사들이 누군가를 기다리는 것처럼 서 있었다. 그들이 기다리는 것은 바로 자신이라는 것을 깨닫는 순간 하늘에서 공포가 이들을 휩쓸듯 덮쳤고, 꿈쩍 않던 전사들이 두려워 비명들을 질러댔다. 공포로 정신이 나간 것처럼 이들은 무기를 던지고는 날개를 퍼덕이고 침을 뚝뚝 흘리는 공중의 괴물에 바짝 쫓겨 정글을 비집고 미친 듯 달려갔다.


혼돈과 혼란이 이 장면 뒤에 이어졌다. 그동안 코난은 깨어나려고 미약하나마 몸부림을 쳤다. 자신이 까딱거리는 검은 꽃들 아래 누워있고, 덤불숲에서 한 흉측한 형체가 자신을 향해 살금살금 다가오는 것이 희미하게나마 보였다. 필사적인 노력으로 코난은 자신을 꿈에 묶어두던 보이지 않는 끈을 끊고는 벌떡 일어나 앉았다.

 주변을 둘러보는 이글거리는 코난의 눈 속에는 당황한 기색이 서려 있었다. 가까이에서 검은 연꽃이 흔들거렸다. 코난은 황급히 꽃들에서 멀어졌다.

 근처의 푹신거리는 땅에는 동물 한 마리가 덤불 뒤에 숨어 있다가 튀어나올 준비를 하다가 물러난 자취로 발자국이 남아 있었다. 믿을 수 없이 커다란 하이에나의 발자국처럼 보였다.

 코난은 소리를 질러 은고라를 찾았다. 태고의 침묵만 정글에 감돌았다. 그 침묵 속에서 코난의 외침은 조롱소리처럼 공허하게 흩어졌다. 태양은 보이지 않았지만 황무지에서 단련된 본능으로 하루가 저물어가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자신이 몇 시간 동안 의식을 잃고 쓰러져 있었다는 생각에 공포가 치밀어 올랐다. 코난은 급히 축축한 진흙에 또렷이 남아있는 전사들의 발자국을 따라갔다. 이들이 한 줄로 달려간 자국이었다. 그렇게 따라가다가 빈터에 들어섰다. 코난은 우뚝 멈추어 섰다. 이 공터가 연꽃 향에 취해 꾼 꿈속에서 본 빈터라는 것을 깨닫는 순간 뒷목에 소름이 돋았다. 허둥지둥 도망하느라 떨어뜨린 듯 방패와 창들이 여기저기 흩어져 있었다.

 발자국은 공터를 벗어나 정글의 요새 속으로 더 깊숙이 이어져 있었다. 전사들이 정신없이 도망쳤음을 알 수 있었다. 그러다 놀랄 정도로 갑작스럽게 정글을 벗어나 가파르게 경사 진 집채만한 바위 위로 나서게 되었다. 경사가 갑작스레 꺾어져 족히 사십 피트는 떨어지는 높이였다. 그리고 무엇인가 그 절벽 끄트머리에 웅크리고 있었다.

 처음에 코난은 그것이 거대한 검은 고릴라인 줄 알았다. 하지만 다시 보니 거대한 흑인이 유인원처럼 웅크리고 앉아 긴 팔을 늘어뜨리고 벌어진 입에서 침을 줄줄 흘리고 있었다. 그 생물이 흐느끼는 듯한 소리를 지르며 늘어졌던 팔을 쳐들어 코난을 향해 돌아설 때야 비로소 코난은 은고라를 알아보았다. 이 흑인이 공격해 들어오자 코난이 소리를 질렀으나 알아듣지 못했다. 눈은 뒤집혀 있었고 인간 같지 않은 표정을 띤 얼굴에는 하얀 이빨이 드러나 번뜩였다.

 광기가 멀쩡한 사람에 스며들었다는 공포에 소름이 돋는 것을 느끼며 코난은 칼을 뽑아 흑인의 몸을 갈랐다. 그리고 은고라가 쓰러지며 갈고리 손톱을 뻗자 코난은 이를 피해 절벽 끝으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잠시 삐쭉빼쭉 솟은 절벽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은고라의 전사들이 사지가 으깨지고 뼈가 부러져 늘어지고 꺾인 자세로 쓰러져 있었다. 아무도 움직이지 않았다. 검은 파리 떼가 구름처럼 몰려와 피가 튀신 돌 위에서 시끄럽게 웅웅거리고 있었다. 개미들은 이미 시체들을 갉아대기 시작한 후였다. 나무에는 시체를 먹는 새들이 앉아있었고, 자칼 한 마리가 고개를 들어 절벽 위의 사람을 보더니 슬금슬금 물러갔다.                    

 코난은 꼼짝없이 서 있었다. 그러다 몸을 휙 돌려 왔던 길을 되짚어 달려갔다. 큰 풀에 온 몸을 스쳤지만 가는 길에 뱀처럼 꾸물거리는 파충류들을 몰기라도 하듯 정신없이 달렸다. 죽음이 맴도는 거대한 정글과 황량한 폐허 사이를 코난은 진홍빛 망토를 날리고 시퍼런 쇠를 번쩍이며 비집고 달렸다. 어둠속에서 강가의 희미한 어스름으로 뛰쳐나왔을 때 자신이 가쁘게 숨을 몰아쉬는 소리 외에는 엄청난 고독 속에서 어떤 소리도 들려오지 않았다.

 갤리선이 무너져가는 선창에 맴도는 것이 보였다. 폐허는 침침한 회색 불빛 속에서 술 취한 듯 휘청거렸다.

 그리고 어느 무심한 손이 누가 선홍색 물감을 찍어 뿌리기라도 한냥 선명한 핏빛이 바닥에 깔린 돌 여기저기 흩어져 있었다.  

 다시 코난은 죽음과 파괴를 바라보았다. 자신의 앞에는 전사들이 쓰러져있었다. 일어나 맞는 이가 하나도 없었다. 정글 가장자리부터 강둑까지, 썩어가는 기둥들 사이, 무너진 부두를 따라, 찢기고 으깨지고 반쯤 뜯어 먹히고 씹힌 사람들의 시체가 늘어서 있었다.

 시체와 시체 조각들이 널브러진 곳 사방에 하이에나의 발자국 같은 거대한 발자국들이 온통 찍혀 있었다.

 코난은 조용히 부두 위로 올라섰다. 희미한 어스름 속 갤리선 갑판 위에 무언가 상아빛 하얀 물체가 매달려 빛나고 있었다. 말을 잃고 코난은 검은 해안의 여왕이 자기 배의 활대에 매달려 있는 것을 바라보았다. 활대부터 그녀의 하얀 목까지 진홍빛 핏방울 같은 목걸이가 회색 빛 속에 피처럼 번뜩거리며 드리워져 있었다.


4장. 하늘에서 덮쳐오다


침이 뚝뚝 듣는 턱들을 벌리고,

그림자들이 시커멓게 그를 둘러쌌다.

빗방울보다 굵은 핏방울이 뚝뚝 들었다.

그러나 내 사랑은 죽음의 검은 주술보다 강하니,

지옥의 무쇠 벽도 내가 그이 옆에 가는 것을 막지 못하리라.

                                        - 벨리트의 노래


정글은 그 검은 팔 안에 엉망인 된 폐허를 껴안은 거상(巨象)같았다. 달은 떠오르지 않고 있었다. 죽음의 냄새가 밴 숨 막히는 하늘에 별들만 진한 호박색으로 무수히 빛났다. 무너진 탑들 사이 피라미드 위에 심메리아인 코난은 주먹으로 턱을 받치고 무쇠 동상처럼 앉아 있었다. 멀리 검은 그림자 속에서 살금살금 발걸음 소리가 자박거리고 붉은 눈들이 빛났다. 죽은 자들은 쓰러진 그대로 누워 있었다. 그러나 티그레스 호 갑판에는 부서진 의자와 창자루로 쌓은 장작더미와 표범 가죽위에는 코난의 진홍색 망토에 싸인 검은 해안의 여왕이 마지막 잠에 취해 있었다. 약탈한 보화 - 실크, 금빛 천, 은 목걸이, 보석 상자, 금화, 은괴, 보석 박힌 단도와 금이 신전 제단처럼 높이 사방에 쌓여 있는 가운데 그녀는 여왕처럼 누워 있었다.

 그러나 코난이 욕설을 퍼부으며 이 저주받은 도시의 약탈물들을 어디에 던져버렸는지는 자르크헤바의 어두운 강물만이 말할 수 있었다. 이제 코난은 보이지 않는 적을 기다리며 피라미드 꼭대기에 묵묵히 앉아있었다. 그의 영혼을 감싸는 분노가 두려움은 몽땅 몰아내 버렸다. 어떤 형체가 어둠으로부터 솟아오를지 몰랐고, 개의치도 않았다.

 더 이상 검은 연꽃이 보여준 영상을 의심하지 않았다. 은고라와 전사들이 빈터에서 기다리다가 날개달린 괴물이 하늘에서 솟구쳐 내려와 더치면서 공포에 질려 맹목적으로 도망가다가 절벽 아래로 떨어진 것을, 은고라만이 절벽에서 떨어지는 운명을 면했지만, 광기의 공격은 피하지 못한 것을, 그 와중에 혹은 이 일 직후나 직전에 강둑에 있던 자들도 죽어갔다는 것을 코난은 알고 있었다. 강변에서 일어난 살육은 전투라기보다는 학살이었다는 것이 확실했다. 흑인들은 이미 미신적인 공포에 사로잡혀 무장해제 되어서는 인간이 아닌 적들이 공격을 했을 때 방어하느라 제대로 무기 한번 휘둘러보지 못하고 죽어간 것 같았다.

  강을 다스리는 사악한 존재가 슬픔과 공포로 코난을 괴롭히기 위해 계속 살려두는 게 아니라면 왜 자신만 이렇게 오래 살려두는 건지 코난은 알 수가 없었다. 모든 정황이 인간 혹은 초인의 지능이 개입되었음을 나타내고 있었다. 병력이 나뉘도록 하기 위해 물통을 깨뜨리고, 흑인들을 절벽 너머로 몰아넣었으며, 마지막이자 가장 눈에 띄는 짓은 진홍빛 목걸이로 교수용 올가미를 만들어 벨리트의 하얀 목을 매단 그 사악한 조소였다.                             

 코난을 가장 값진 희생물로 아껴놓고 정신적인 고통의 마지막 한 방울까지 짜내면서 이 알 수 없는 적은 다른 희생자들에 뒤이어 코난을 마지막으로 죽여서 이 연극을 마무리하고 싶어 하는 것 같았다. 이런 생각에 코난의 굳은 입술에는 미소는 떠오르지 않았지만, 대신 코난은 무쇠 같은 웃음을 터뜨리며 눈을 빛냈다.

 달이 떠오르며 달빛이 코난의 뿔 달린 투구에 불길로 부서지는 듯했다. 어떤 소리도 울려 퍼지지 않고 조용했다. 그리고 갑자기 밤이 긴장하고 정글이 숨을 죽이는 듯 했다. 코난은 본능적으로 칼집에서 칼을 뽑았다. 그가 서 있는 피라미는 네 개의 면이 있었는데, 한 면이 넓은 계단이 새겨져서 정글 쪽으로 뻗어 있었다. 코난의 손에는 솀인들의 활이 들려 있었다. 벨리트가 자신의 해적들에게 사용법을 가르친 활이었다. 화살이 한 무더기 코난의 발치에 쌓여 있었다. 화살의 깃털 달린 쪽들이 한 무릎을 꿇고 앉은 코난을 향하고 있었다.

 나무 아래 어둠 속에서 무언가 움직였다. 떠오르는 달을 배경으로 시커멓게 윤곽이 드러나는 머리와 어깨가 보이고, 짐승들의 형상이 드러났다. 그리고 이제 그림자 속에서 검은 형체들 - 스무 마리의 거대한 하이에나들이 조용히 빠르게 몸을 낮추고 달려 올라왔다. 달빛에 이들의 송곳니가 번뜩였고, 눈은 그 어떤 진짜 야수보다도 더 이글거렸다.

 스무 마리. 그렇다면 해적들의 창이 이 무리의 수를 줄여놓은 것이 틀림없었다. 이런 생각을 하며 코난은 활의 오늬를 귀까지 당겼다. 화살이 윙,하고 튕겨 나가자 이글거리는 눈을 가진 그림자 하나가 펄쩍 뛰어 올랐다가 쓰러지며 몸부림을 쳤다. 나머지 하이에나들을 이에 머뭇거리지 않고 계속 올라왔다. 코난은 지옥의 화산재처럼 뜨거운 증오에 힘입어 강철 같은 근육의 힘과 정확성으로 비처럼 화살을 쏟아 부었다.

 불길같이 치솟는 분노 와중에 한 대의 화살도 빗나가지 않았다. 공중은 온통 깃털라고 날아가는 죽음으로 가득 찼다. 달려오는 무리는 놀랄 정도의 피해를 입었다. 반수도 안 되는 하이에나들이 피라미드 아래에 도달할 수 있었다. 나머지들은 넓은 계단에 쓰러졌다. 그 타오르는 눈들을 바라보면서 코난은 이것들이 짐승이 아님을 깨달았다. 이 하이에나들에서 눈에 뜨이는 불경스러운 차이는 부자연스러운 크기뿐만이 아니었다. 이들은 시체가 흩어진 늪에서 피어오르는 검은 증기처럼 분명한 기(氣)를 내뿜고 있었던 것이다. 어느 사악한 연금술이 이 존재들을 만들어 냈는지는 가늠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코난은 자신이 스켈로스의 무저갱보다 더 어두운 마술을 마주하고 있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코난은 벌떡 일어나서 힘껏 활을 구부려 목을 향해 뛰어오르는 거대한 회색 형체에게 마지막 화살을 정통으로 날렸다. 화살은 앞으로 날아가 오로지 한 줄의 선을 그으며 달빛줄기처럼 번쩍였다. 야수 인간은 공중에서 경련을 일으키며 화살이 관통된 채 머리부터 털썩 떨어졌다.

 그리고 악몽 속에서나 볼 수 있는 눈을 이글거리고  침이 뚝뚝 듣는 송곳니를 드러내며 나머지 하이에나들이 덮쳐 왔다. 힘껏 휘둘러진 코난의 검의 첫 번째 하이에나가 동강이 났지만, 나머지들이 필사적으로 압박해 오자 힘들었다. 칼자루로 좁은 두개골 하나를 박살내니 뼈가 우지끈 부러지는 것과 뇌와 피가 손에 튀는 것이 느껴졌다. 다음에는 칼을 그만 떨어뜨려서 너무도 가까이 궁지에 몰리자 코난은 소리 없이 코난을 발톱으로 긁으며 이빨로 물어뜯던 하이에나 두 마리의 목을 그러쥐었다. 역겹고 독한 내에 거의 마비되는 것 같았고, 땀이 흘러내려 앞을 가렸다. 갑옷만이 코난의 몸이 한 순간에 갈기갈기 찢어지는 것을 막아주고 있었다. 다음 순간 코난은 오른손에 힘을 줘 털북숭이 목을 찢어버렸다. 왼손에 쥐고 있던 다른 놈의 목은 그만 놓쳐서 앞다리 하나를 잡아 부러뜨렸다. 이 음산한 전투 중 들린 유일한 소리였던 짧은 외침이 너무나도 사람 목소리 같은 소리를 내며 짐승의 입에서 터져 나왔다. 그 짐승의 입에서 터져 나온 비명이 역겨워서 코난은 저도 모르게 쥐고 있던 손을 풀었다.

 찢긴 목에서 피를 철철 흘리는 놈이 마지막으로 힘을 그러쥐어 달려들며, 코난의 목에 이빨을 꽂았다가 나가 떨어져 죽었다. 코난은 이 하이에나에게 물어 뜯겨 혹독한 아픔을 느꼈다.

 다른 녀석이 세 발로 딛고 달려들며 늑대처럼 코난의 배를 그었지만, 코난의 갑옷에 줄만 긋고 끝났다. 죽어가는 짐승을 옆으로 던지고 코난은 다리 하나가 부러진 녀석을 움켜쥐었다. 힘을 잔뜩 주니 피가 묻은 하이에나의 주둥이에서 신음이 터져 나왔다. 코난은 똑바로 서서 몸부림치는 하이에나를 번쩍 들어올려 팔 안에서 찢어버렸다. 다음 순간 균형을 잃고 휘청거릴 때 하이에나가 코난의 코에 악취나는 숨을 내뱉으며 코난의 목을 물었다. 그러자 코난은 하이에나를 대리석 계단으로 내동댕이쳐서 뼈가 부러져 죽게 만들었다.

 코난이 다리를 넓게 벌리고 서서 숨을 가쁘게 몰아쉴 때 정글과 달은 코난의 모습에 고요히 지켜보고 있었다. 그리고 그 박쥐같은 괴물이 날개짓 소리가 들려 왔다. 코난은 몸을 굽혀 칼을 더듬어 쥐고는 휘청거리며 일어나 발에 힘을 주고 섰다. 그리고 눈에서 피를 훔쳐내며 공중에서 적을 찾아 큰 검을 양손으로 쥐고 머리 위로 휘둘렀다.                                   

 하늘에서 공격하는 대신 피라미드가 갑자기 요란하게 코난의 발밑에서 흔들거렸다. 우지끈하는 소리가 들리더니 큰 기둥이 지팡이처럼 머리 위에서 흔들리는 것이 보였다. 놀라서 펄쩍 뛰며 코난은 멀리 바깥쪽으로 피했다. 발로 중간쯤의 계단을  디디었지만 발아래가 흔들렸다. 또 한 번 필사적으로 뛰어서 안전하게 계단 아래로 내려섰다. 하지만, 코난이 땅에 발을 딛자마자 산이 부서지는 것처럼 피라미드가 무너지며 기둥이 박살나며 아래로 우레같이 굴러 떨어졌다. 앞이 안 보이는 대격동의 순간에 대리석 조각이 비처럼 하늘을 채웠다. 다음 순간 부서진 돌 조각이 달 아래 하얗게 놓여 있었다.

 코난은 몸을 반쯤 덮은 파편들을 떨쳐냈다. 무언가 잽싸게 날아와 치면서 투구를 벗겼고 잠시 코난은 멍하게 무방비였다. 다리가 커다란 기둥 파편에 깔려 있었다. 부러진 건지 알 수가 없었다. 코난의 머리는 땀으로 뒤범벅이었고, 목과 손의 상처에서는 피가 흘러 나왔다. 코난은 한 팔을 홱 올려 자신을 꼼짝 못하게 하는 돌덩이를 잡고 끙끙거렸다.

 그 때 무언가 별들을 가로질러 휙 날아 내려와 근처 잔디밭에 내려앉았다. 몸을 비틀어 보니 그 날개 달린 괴물이었다.

 가공할 만한 속도로 괴물은 코난에게 달려들고 있었다. 그 순간 코난은 거대한 인간 같은 형체가 구부러지고 퇴화된 다리로 돌진하는 혼란스러운 인상을 받았다. 앞으로 뻗은 거대한 털북숭이 팔에는 검은 발톱이 난 기형의 발이 달려 있었고, 흉측한 머리에는 한 쌍의 붉은 눈만이 그 넓은 얼굴에서 간신히 알아볼 수 있었다. 인간보다 우월한 초인의 특징과 인간보다 하등한 유인원의 특징이 범벅이 된 이 괴물은 인간도, 짐승도, 악마도 아니었다.

 하지만 코난은 계속 생각할 시간이 없었다. 떨어진 검을 향해 몸을 뻗었지만 불과 몇 인치 차이로 손이 닿지 않았다. 필사적으로 코난은 다리를 꼼짝 못하게 하고 있는 돌덩이를 잡았다. 밀어 내려고 힘을 쓰자 관자놀이의 혈관이 부풀어 올랐다. 돌덩이는 천천히 움직였지만, 다리가 다 빠져 나오기 전에 괴물이 자신을 덮치리라는 것과 저 검은 발톱이 달린 손은 죽음을 의미한다는 것을 코난은 알고 있었다.

 날개 달린 괴물의 정면 돌진은 변함이 없었다. 괴물은 땅에 쓰러진 코난에 검은 그림자를 드리우며 팔을 벌리고 내려다보고 섰다. 순간 하얀 빛이 괴물과 괴물의 희생자 사이에서 번뜩였다.

 미친 듯한 그 짧은 순간 그녀가 거기에 있었다. 암표범처럼 격렬한 사랑으로 떨리는 단단한 하얀 몸이었다. 아찔해진 코난의 눈에 덮쳐드는 괴물과 자신 사이에 그녀의 나긋나긋한 몸이 달빛 아래 상아처럼 빛나고 있었다. 그녀의 눈이 이글거렸고, 숱 많은 검은 머리채가 빛났다. 그녀의 가슴이 들썩이더니 빨간 입술이 벌어졌다. 날카로운 외침과 쇠가 부딪혀 울리는 소리가 들리며 그녀가 날개 달린 괴물의 가슴을 찔러 들어갔다.

 “벨리트!” 코난이 소리쳤다. 그녀는 재빨리 고개를 돌려 코난을 바라보았다. 그 검은 눈에 순전한 불과 뜨거운 용암 같은 근원적인 감정으로 사랑이 불타오르는 것이 보였다. 다음 순간 그녀는 사라졌다. 날개 달린 괴물이 공포에 질려 팔을 들어 공격을 막으려는 양 뒤로 휘청거리는 것만 보였다. 코난은 벨리트가 실제로는 티그레스 호의 갑판에 누워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의 귀에 그녀의 열정적인 말이  맴돌았다. “내가 죽는다면 당신이 목숨을 걸고 싸울 때 죽음에서 돌아와 당신을 도울 거야.”

 무시무시하게 소리를 지르며 코난은 몸을 일으키며 돌을 옆으로 치웠다. 날개 달린 괴물이 다시 덮쳐 왔고, 코난은 공격을 맞으러 앞으로 나아갔다. 뜨거운 광기로 혈관에 불이 붙은 듯 했다. 코난이 발뒤꿈치를 축으로 삼아 몸을 휘돌리며 그 힘을 몰아 큰 검을 휘두르자 근육들이 코난의 팔에서 불끈 솟아올랐다. 칼은 엉덩이 바로 위에서 돌진해 들어오는 괴물의 몸을 긋고 들어갔다. 칼날이 그 털북숭이 몸을 깨끗하게 베고 지나가면서 괴물의 엉거주춤한 다리가 한 쪽으로 떨어졌고, 상체는 다른 쪽으로 떨어졌다.     

  코난은 달빛으로 빛나는 침묵 속에 서 있었다. 피가 듣는 검을 축 늘어진 한 손에 쥐고 적의 시체를 굽어보았다. 그 붉은 눈이 살아서 코난을 노려보았지만, 곧 흐려지더니 굳었다. 커다란 손은 발작을 하며 꼬이다가 뻣뻣해졌다. 그리고 세상에서 가장 오래된 종족이 이로써 멸종했다.

 코난은 고개를 돌려 이 괴물의 노예이자 처형자였던 야수들을 기계적으로 찾았다. 눈에 띄는 짐승들이 없었다. 달빛이 출렁이는 풀밭에 흩어져 있는 시체는 짐승의 것이 아니라 인간의 것이었다. 매의 얼굴을 한 검은 피부의 사람들이 벌거벗은 채 화살에 맞거나 칼에 베어 쓰러져 있었다. 그리고 코난이 지켜보는 가운데 이 시체들은 오그라들어 먼지로 변했다.

 왜 날개 달린 주인은 코난이 하이에나들과 사투를 벌일 때 노예들을 도와주러 오지 않았을까? 저 짐승들이 돌아서 자기를 찢어발길 수 있는 거리에 서는 게 두려웠던 걸까? 그 흉측한 머리 속에 계략과 주의는 있었는지 몰라도, 그 것도 결국에는 소용이 없었던 모양이었다.

 코난은 몸을 돌려 썩어가는 선창을 걸어 내려와 갤리선에 올랐다. 검을 몇 번 휘둘러 줄을 끊어 배를 띄우고는 버팀줄 앞머리로 갔다. 티그레스 호는 어두운 강물 위에서 천천히 흔들리더니 강 중앙으로 느리게 미끄러져 나와 커다란 조류를 탔다. 코난은 버팀줄에 기대어, 여황제의 몸값에 맞먹는 보화로 만든 장작더미 위 망토에 싸여 누운 여인을 하염없이 우울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5장. 화장(火葬)


이제 방랑은 영원히 끝났다.

 노 젓는 소리도, 바람이 켜는 하프 소리도 이제 그만.

더 이상 진홍 깃발로 검은 해안을 떨게 하지 못하리.

 넘실거리는 세계의 푸른 허리여. 내게 주었던 여인을

다시 돌려주노라.

                 - 벨리트의 노래


 다시 한 번 새벽이 바다를 물들였다. 한층 붉어진 빛이 강어귀에서 빛났다. 심메리아인 코난은 하얀 해변에 검에 기대어 서서 티그레스 호가 마지막 항해를 하러 흔들리며 멀어지는 것을 지켜보고 있었다. 유리 같은 파도를 물끄러미 바라보는 코난의 눈에 빛은 찾아볼 수가 없었다. 굽이치는 푸른 파도너머로 모든 영광과 경이는 사라져 버렸던 것이다. 푸른 파도가 신비한 보랏빛 안개로 깊어지는 것을 바라보며 격렬한 증오에 코난의 몸이 떨렸다.

 벨리트의 바다의 여인이었다. 바다에 광채를 부여하고 바다를 매혹적으로 만들었다. 그녀가 없이 바다는 남극부터 북극까지 황량하고 무의미하고 쓸쓸한 폐허일 뿐이었다. 그녀가 바다의 여인이니 이제 바다의 영원한 신비로 코난은 그녀를 되돌려 보냈다. 그 이상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그에게 바다의 푸른빛 광채는 뒤에서 부스럭거리며 속살대는 무성한 숲보다 더 혐오스러웠다. 숲 너머에는 광대하고 신비로운 황야가 펼쳐져 있으니 이제 그리고 뛰어들어야 했다.

 티그레스 호의 버팀줄을 잡은 이는 아무도 없었고, 푸른 물살을 헤쳐 노를 젓는 이도 아무도 없었다. 하지만 맑고 싱그러운 바람이 실크 돛을 잔뜩 부풀렸다. 티그레스 호는 마치 야생 백조가 하늘을 날아 보금자리로 돌아가듯이 매끄럽게 물살을 헤치고 나갔다. 배는 바다로 더 멀리 나아갔다. 갑판에서 타오르는 불길이 더 높이 더 높이 타올라 돛대를 핥고 빛나는 장작 위 진홍빛에 싸인 몸을 감쌌다.

 그렇게 검은 해안의 여왕은 사라졌다. 피로 물든 검에 기대에 코난은 그 붉은 섬광이 푸른 안개로 사라지고 새벽이 대양 너머 장밋빛과 금빛을 튕길 때까지 가만히 서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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