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일명 서정시 창비시선 426
나희덕 지음 / 창비 / 2018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파일명 서정시』

















**



요근래에는 시보다는 소설을 더 많이 읽었다. 읽기 어렵다는 편견도 있었고, 세상 살기 팍팍하니 단순하건 복잡하건 이야기 속에 몰두하고 싶었고, 숨어들고 싶었기 때문이다. 반가운 이름으로 인해 다시금 시를 읽어 보았다. 사실 잘 읽어낸 것인지 알 수 없지만, 얼마 전 시인의 강연을 들었을 때, 곧 시집이 나온다는 소식을 전해주시기에 기쁜 마음으로 기다리고 있던 터였다. 그리고 한 편 한 편 읽어갈수록 피 흘리는 시적 자아를 보며 마음 아팠지만, 역시 나희덕 시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몇 년 전, 어떤 글을 통해 서정이 사라진 시대라는 평을 본 적 있다. 사회가 변해갈수록 문단 내 분위기도 글 쓰는 작법도, 추구하는 세계도 자연히 변화하기 때문에, 긴 산문시가 유행했던 시기가 지나면 다시 짧은 시가 등장하게 되는 것처럼. 시 속 주체도 점점 해체되고 분열되기 시작했으며, 전복되면서 다양한 목소리가 이입됐고, 때론 알 수 없는 허공에 머무르기도 했다. 


시적 화자라는 표현이 무의미해질 정도로 그 존재가 유령처럼 희미하게 느껴졌던 시도 보았던 것 같다. 파편적으로 흩어진 시들을 읽는 게 어렵게만 느껴졌고, 다가서기 어려워 뒷걸음질 치게 되었다. 시인의 말했던 것처럼 이는 어쩔 수 없는 발화였고, 생존방식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세상이 혼란했고, 드라마보다 더 드라마같은, 믿기지 않은 사건 사고가 연일 터지는 현실 속에서 말더음이처럼 더듬거리면서도, 발 딛고 서 있기 위해 조심스레 걸을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나희덕 시인의 신직시집 『파일명 서정시』는 그런 측면에서 기존에 표현했던 방식과 조금 다른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여전히 섬세하지만, 좀더 거칠고 뿔뿔이 흩어져 파편화됐으며, 날 것의 그대로의 에너지가 느껴진다. 다만 차이점이라고 한다면, 시인의 내공과 깊은 내면의 세계로부터 자연히 표현되었기에, 막연한 거부감이 들지 않게 잘 스며들 수 있도록 해주었다는 점이다. 



비극의 상처, 인간다운 것이란


표제작인 <파일명 서정시>는 냉전기 구동독 정보국이 시인 라이너 쿤째를 감시하며 작성한 자료집을 소재로 차용한 것이다. 시대를 퇴보했던 지난 정부의 만행으로 인해 문화예술계를 비롯한 각계각층에는 블랙리스트라는 것이 존재했는데, 시인 역시 그 리스트에 올라가 있었다. 이에 질문을 던져본다. 서정을 노래하는 게 어떻게 불온한 게 될 수 있나, 그것도 지금 이 발전하는 시대 속에서 말이다. 라이너 쿤째가 노역에도 시 쓰는 일을 멈추지 않았던 것처럼 시인 역시 시 쓰는 일을 멈출 수 없었을 것이다. 맞물리듯 구성된 이 시는 다른 시대 속에서 비슷한 모습으로 마주보고 서 있는 라이너 쿤째와 시인을 보는 듯한 느낌을 준다. 자료집에 기록되어 있을 법한 라이너 쿤째에 관한 것들과 시인이 일상 생활에서 경험하고 느끼는 것들에 대해 나열된 요소들이 그러하다. 







파일명 <서정시>에서 풀려난  

서정시들은 이제 햇빛을 받으며 고요히 반짝인다 


그의 생애를 견뎌온 문장들 사이로 

한 사람이 걸어나온다, 맨발로, 그림자조차 걸치지 않고 

18쪽, <파일명 서정시> 중에서


이와 더불어 역사 속 비극과 현실 속 재난과도 같은 비극, 일어나지 말았어야 할 일들에 대해 말하고 있다. 아우슈비츠의 생존자였던 프리모 레비는 살아남았지만, 결국 가라앉을 수밖에 없었고, 어디에서든 유령처럼 존재할 수밖에 없었던 위안부 소녀들과 일어나지 말았어야 할 인재(人災) 세월호로 인해 어이없이 갇혀버린 아이들까지. 감히 가늠할 수도 없는 비극의 상처로 인해 다친 영혼들에 그저 함께 아파할 수밖에 없는 절망적인 현실이 더없이 고통스럽게 느껴진다. 


또한 인간다운 게 무엇인지를 묻게 된다. 사실 지구상 가장 잔혹한 존재가 바로 인간이 아닌가 싶다. 마리나 아브라모비츠가 72개의 사물을 두고 스스로 대상화 하여 관객에게 정해진 안에 사물들을 통해 무엇이든 할 수 있도록 한 퍼포먼스 <Rhythm 0>. 그리고 그 시간동안 무슨 일이 일어나든 대상이 된 예술가는 온전히 그 고통의 시간을 감내해야만 했다. 퍼포먼스가 끝나자 사람들은 도망가기 바빴고, 이를 통해 인간이 가지는 다양한 습성, 폭력성을 비롯한 비참함을 동시에 보여주었다. 역사 속에서도 있었고, 현실에서도 발생하는 여러 사건들을 보면 인간이 인간에게 하는 잔혹 행위에 대해 할말을 잃게 된다. 그러니 물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과연 인간다운 게 무엇인가. 


색의 모호한 경계 속에서 '검은색 위에 더 짙은 검은색이 내려앉을 때/검은색이 비로소 한줄기 빛이'(69쪽) 되는 것처럼, 인간의 근본적인 감정은 어떤 것인지, 착취하고 때때로 절망하게 하고, 돌이킬 수 없는 상처를 남기는 모순적인 존재인 인간의 인간다움에 대한 본질적 질문을 던지게 된다.



부표 하나가

대답할 수 없는 질문처럼 흔들리고 있습니다


가라 앉은 자와 구조된 자 사이에서


일어나지 말았어야 할 일과

일어날 수밖에 없었던 일 사이에서 

41-42쪽, <가라앉은 자와 구조된 자> 중에서 


들린 발꿈치로

한번도 온전히 제 땅을 밟고 서보지 못한 발꿈치로

44쪽, <들린 발꿈치로> 중에서


그래도 문은 열어두어야 한다

입은 열어두어야 한다

아이들이 들어올 수 있도록 돌아올 수 있도록


바다 저 깊은 곳의 소리가 들릴 때까지

말의 문턱을 넘을 때까지

50-51쪽, <문턱 저편의 말> 중에서


마음을 소등한 자에게만 보이는 

희미한 빛은

끝내 비밀을 누설하지 않는다

68쪽, <마크 로스코> 중에서



가려진 이름들, 여성


얼마 전 기사에서 노벨물리학상 역사상 여성연구자 수상이 55년만이자, 세 번째라는 소식을 보았다. 시대가 변화하고 여성의 언어에 대한 목소리가 들리는 건 자연스러운 현상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만큼 인식이 바뀌어가고 있기 때문이다. 단순한 이분법으로 성별에 따른 경계로 나누는 게 아니라 그동안 가려져 있었던 존재들에 대해 조명하기 시작했을 뿐이라는 생각이 든다. 모성으로 대체됐던 여성의 언어는 여러 형태의 모습으로 표현되고 있고, 그러한 변화가 반갑지만 아직 가야 할 길은 요원하다. 상대적으로 대상으로만 존재했던 여성이 주체성을 가지고 소리를 낼 수 있는 건 얼마 되지 않았다. 잘 알지 못하기에 잘 말할 수는 없지만. 인식하지 못하고 있는 측면에서 뜨악했던 부분들에 대해 알게 되고, 인지하게 되는 순간 반성하게 된다. 그러니 당연하게 받아들여졌던 것들이 사실은 당연하지 않았다는 것을 인지해야 한다. 


여성의 언어를 이야기할 때, 시인의 소재로 차용한 <슬픈 모유>라는 영화는 시를 통해 알게 된 것인데, 충격적이면서도 슬픔과 분노가 함께 일었다. 영화는 페루의 수도 리마 근교 작은 마을에 살고 있는 파우스타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내전의 참혹한 시기에 테러범들에게 강간을 당한 임신부들이 아이를 낳으면 모유를 통해 어머니의 공포가 아이에게 전염되어 영혼없이 태어나게 된다는 게 바로 '슬픈 모유'병인데, 파우스타는 자신이 이 병을 앓고 있다고 믿고 있는 인물이다. 혼자서는 길을 잘 걷지도 못하고, 벽에 바짝 걸어야 하며, 강간을 예방하기 위해 자신의 질 속에 감자를 넣고 다닌다. 엄마가 돌아가시자 고향에 묻어드리고 싶은 마음에 새로운 변화를 시도하는 파우스타의 모습 또한 그리고 있다고 한다. 


여전히 여성에 대한 폭력적인 시선과 행위들이 도사리고 있다. 때론 이용당하여 오염된 여론으로 또다시 상처받게 되기도 하며, 한 걸음 더 나아간 듯 하다 두 세 걸음 다시 밀려나기도 한다. 역지사지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보통 일반적으로 가지고 있는 공포가 무수히 많고, 그 안에서 살아가고 있다면 한 번쯤은 헤아려볼 수 있는 일이 아닐까. 결국은 모두가 잘 살아가기 위한 길을 찾는 방식과 같은 것이다.



마담 뀌리가 처음으로 추출해낸

0.1그램의 라듐처럼


희고 빛나는 것들

그러나 검게 산회되기 쉬운 것들

25쪽, <라듐처럼> 중에서


우리는 저마다 기울어지는 난파선이니

깜박이는 불빛으로 다른 난파선을 비추는 눈동자이니

가라앉은 손을 잡는 또 하나의 손이니


어서 들어오세요

우리의 피로 빚어진 붉은 텐트 속으로

33쪽, <붉은 텐트> 중에서


엄마라는 타인의 고통 속에서 

나는 태어났어요

감자 덩굴에 매달린 작은 감자알처럼


노래로 치욕을 견뎌낸 여인

그녀가 낳은 핏덩이는

세상에 던져진 채 간산히 살아남았지요

81쪽, <슬픈 모유> 중에서


이제 누구의 아내도 아닌

늙은 소녀


그녀의 주름 속에서 튀어오른 물고기들은 이내

익숙한 고통의 서식지로 돌아갔다


주름은 골짜기처럼 깊어

펼쳐들면 한 생애가 쏟아져나올 것 같았다

84쪽, <주름들> 중에서



죽음, 그리고 노래하는 것


고통으로 가득한 현실을 살아가면서도 죽음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어느 날 갑자기 주어진 생처럼 죽음도 언제 어떻게 올 것인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한개의 씨앗에서/삶과 죽음은 두개의 떡잎처럼 돋아'(80쪽)났기에 살아가는 것은 곧 죽어가는 것과 같다. 죽음을 향해 살아가는 것이다. 자연히 찾아오는 죽음, 갑작스러운 죽음 모두 살아있었기에 이뤄진 것들이다. 하지만 난 늘 남겨진 자들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무고하고 어이없는 희생부터 스스로 선택한 죽음마저 그 후에 홀로 남겨진 사람들에게 대해 생각할 수밖에 없는 건 이기적이게도 내가 그러하기 때문이다. 그저 흘러가는 대로 삶의 의미도 알 수 없고, 무기력한 마음만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에게는 죽음이란 그렇게 멀리 동떨어진 것처럼 느껴지지 않는다. 


하지만 죽음을 떠올리면서도 내일 당장 뭐 먹지라는 질문을 던지는 게 흥미로운 지점이기도 하다. 욕망과 욕구는 생존 여부를 앞서는 것이 될 수 있는가, 하면 정확한 답을 내리기 어려운 점이 있다. 반면 죽음을 떠올림으로써 살아갈 의지를 다지기도 한다. 확실한 한 가지는 삶과 죽음은 결코 떼어놓을 수 없는, 한 몸과도 같다는 것이다.


시인은 죽음을 다양한 모습으로 소환했다. 죽음은 쓸쓸하고 무력한 것이지만 그 끝엔 언제나 노래가 남아있다. 노래를 부른다는 것은 시인만의 새로운 서정을 표현하는 방식이 아닐까 싶다. 노래가 가지는 힘이란 무엇인가, 죽음을 묵묵히 받아들일 수 있게 하거나, 한 줄기 희망을 염원하기도 한다. 또한 생명을 살리는 것이기도 한다. 시인이 호명한 탄센은 고대 인도 가수이자, 설화 속 인물인데 목소리의 힘만으로 자연을 움직였다고 한다. 그는 간신들의 중상모략으로 인해 불의 노래를 부르게 되고, 뜨거워진 강물 속에서 자신의 죽음을 예견했지만, 그의 딸이 부른 비의 노래를 통해 점차 불길이 잦아들어 살아날 수 있게 되었다고 한다. 잿더미 속 남겨진 노랫소리에 '삶'에 대한 희망이 있는 것이다. 어쨌든 살아있기에 부질없을지라도 희망을 기대하게 된다. 그런 감사한 마음으로 살아가는 수밖에 없다. 



커브를 돌 때마다

휘청, 죽음 쪽으로 쏟아지려는 것들이 있다

53쪽, <이 도시의 트럭들> 중에서



그는 사라진 것이 아니다

숨은 것이다

잦아들던 숨소리와 함께


숨은 숨이다

74쪽, <숨은 숨> 중에서



그러다가도 죽음, 이라는 말 근처에서

마음은 발걸음을 멈추곤 했다

피지 않은 꽃에 대해 말한다는 것은

한번도 가보지 않은 곳에 대해 말한다는 것은

침묵에 기대지 않고는 어려운 일이기에

입술도 가만히 그 말의 그림자가 지나가기를 기다렸다 

94쪽, <마지막 산책> 중에서



건기의 심장과 우기의 심장

아침의 심장과 저녁의 심장


두근거리는 것들은 다 노래가 되지요

12쪽, <심장을 켜는 사람> 중에서


나이-톰보-톰보, 그곳은 사막에 있지

알타이족은 영혼이 사막을 건너간다고 믿었지

사막에 옛 노래가 울려퍼지면

그제야 죽음이 임한 걸 알게 된다지

112쪽, <나이-톰보-톰보>중에서


마른 나뭇가지를 들고

마른 나뭇가지를 들고

노래의 힘으로 죽음의 사막을 거넜던

알타이 샤먼들처럼

114-115쪽, <마른 나뭇가지를 들고> 중에서



**






내 몸에서 떨어져나간 얼음조각 상처는 서른세개 동사들 사이에서 부서지고 상처투성이가 되어 피흘리게 하면서도 다시 태어나기를 종용한다. 해석하기 나름이지만, 나는 이걸 '변화'로 읽어보았다. '서정'의 다른 얼굴로 표현되고 있는 이번 시집은 때론 낯설고 투박하게 느껴질 수도 있다. 한 면을 가둑 채운 ‘둠’이라는 글자는 마치 하나의 감정처럼, 어둠 속 알 수 없는 긴장감을 시각적으로 보여주고 있듯이, 이건 자연스러운 변화인 것이다. 의도하지 않았으나, 내면에 쌓인 상처들에 고통스러웠지만, 곧 딱지가 입고 새 살이 돋아나며 익힌 변화들. 

스스로 치유하고자 하는 마음이 불러일으킨 발화이다. 세상 곳곳에 죽음이 도사리고 있고, ‘삶과 죽음은 한 개의 씨앗에서 돋아’나기에, ‘한 열매가 대지로 돌아간 그날에’언젠가 모두가 죽음을 맞게 된다. 더 이상 서로에게 고통과 상처를 주는 반복된 실수는 점차 사라져야 할 것이다. 결국 부딪히게 되면서도 포용할 수 있는 용기가 있어야 한다. 익숙하지 않다하여 배척되어선 안 될 일이다. 받아들일 수 있는 용기가 절실하다. 그렇게 된다면 이내 삭막해보이는 세계 속에서도 따뜻한 온기가 감돌 게 될 것이다. 나희덕 시인의 시집 『파일명 서정시』처럼.








(이 리뷰는 창비에서 도서를 제공 받아 작성된 것입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