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담 없는 가벼운 추리 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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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리의 고치 ㅣ 작가 아리스 시리즈
아리스가와 아리스 지음, 최고은 옮김 / 북홀릭(bookholic) / 2012년 1월

아리스가와 아리스는 앨러리 퀸을 연상시키는 추리소설을 쓰는 작가로 유명하다. 앨러리 퀸 소설의 특징이라면 뭐니뭐니해도 '독자에의 도전'을 들 수 있을 것이다. 덕분에 앨러리 퀸 소설들을 페어플레이 추리소설이라 부르기도 했으니 말이다.

내가 아리스가와 아리스의 소설을 접한 것은 그의 처녀작인 '월광게임'을 통해서였다. 그 소설의 말미엔 앨러리 퀸의 스타일을 빌려 '독자에의 도전'이라는 페이지가 실려 있었다. 작가는 그 페이지를 통해 사건을 해결하기 위한 모든 실마리가 제공되었으니 독자 스스로 추리를 해보라고 제안했다. 작가가 간사한 술수를 부려 꼭꼭 숨겨놓은 단서에 뒤통수를 맞아본 적이 있는 독자라면 작가의 저러한 제안이 얼마나 매력적인 것인지 알 수 있을 것이다.

날것 그대로의 추리 소설을 좋아하는 독자라면 앨러리 퀸의 스타일을 맘에 들어할 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러한 추리소설에도 단점이 있다. 그것은 역시 소설의 말미까지 해결의 짜릿함, 흥분을 유보해야 한다는 것이다. 오랜 독서의 시간동안 복잡하게 꼬여가는 실타래를 그저 묵묵히 굴려야 하니, 능동적인 독서가가 아니라면 지루해지기 쉽다. 그런 점에서 '달리의 고치'는 앨러리 퀸의 스타일과는 다른 방향성을 가진 소설이다.

이 소설엔 '독자에의 도전' 장이 없다. 다시 말해서 뚜렷한 해결편이 존재하지 않는다. 물론 추리소설의 백미는 탐정의 사건해결에 있으므로, 소설의 종장에서 최종적으로 사건이 해결되는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이 소설은 소설의 대단원을 위해 서사의 재미를 양보하지 않았다. 끊임없이 늘어나는 궁금증과 쏟아지는 단서들, 얽히고 섥히는 인물들간의 진술이 말미에 치밀하게 짜맞춰지며 커다란 그림을 만들어내는 쇼는, 이 소설엔 없다. 다만 끊임없이 늘어가는 질문들과 적재적소에 궁금증을 해결시켜주는 완급이 소설을 읽는 내내 즐거움을 느끼게 한다.

소설은 추리작가이자 화자인 아리스가와 아리스와 임상범죄학자인 히무라 히데오를 중심으로 진행된다. 두 인물은 사건 추리에 직접적으로 참여하며, 서로간의 대화를 통해 그간의 추리 경과를 모두 독자에게 공개한다. 고로, 독자는 히무라 히데오가 스스로 사건의 전말을 밝히기 전에 그간의 사정을 조금씩 알아갈 수 있게 된다. 이것은 소설을 읽는 내내 흥미를 추동하는 역할을 한다. 독자는 적당한 의문을 가지고 적당한 고민을 하며 화자가 이끄는 대로 시선을 옮겨가기만 하면 된다. 때문에 본격 추리소설로서의 매력은 덜하지만 훌륭한 오락물로서의 역할은 충실히 해내고 있다.

작가 나름의 주제의식을 담아내려는 시도도 좋았다. 살해된 주얼리 브랜드의 사장 도조 슈이치는 평소 살바도르 달리를 신봉했다. 그는 고치처럼 생긴 캡슐 안에 들어가 명상을 하는 것을 취미로 삼고 있었는데, 작가는 도조 슈이치라는 특이한 캐릭터성이 가진 고치라는 속성을 일반화시킨다. 누구나 자신의 고치가 있으며, 그들은 나름의 고치를 통해 현실의 무게를 덜어낸다는 것이다. 소설 속의 케릭터들은 모두 다 그런 고치들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그 고치들은 사건을 복잡하게 만드는 요소가 된다. 이러한 문제의식은 흥미만을 쫓을 수 있는 대중 추리 소설에 무게감을 더하며 소설의 질적 수준을 높이는 요소가 된다. 다만 그 문제의식에 대해 작가가 가진 사유의 폭이나 그 사유를 소설 속에 진정성 있게 녹여낸 부분에 대해서는 생각해볼 여지가 있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