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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년의 밤
정유정 지음 / 은행나무 / 2011년 3월
평점 :
정유정이란 작가에 대해서 알고 있던 것은 아니었다. TV에서 엄청나게 광고를 때렸던 '내 인생의 스프링 캠프'는 읽어본 적이 없었고, 서점 서가의 목 좋은 자리에 항상 꽂혀있던 '내 심장을 쏴라'도 읽어본 적이 없었다. 표지는 알고 있었지만 그다지 관심은 끌지 않는 작가였다. 갑작스럽게 나타난 '세계문학상'이라는 것에 흥미가 동하지 않기도 했다. 이번에 고를 책을 선택하면서도 7년의 밤은 논외에 있었다. 내 선택에 가장 큰 영향을 주었던 것은 표지였다. 외국 서적의 표지를 보는 듯한 촌스러운 표지는, 이 책을 그저 그런 가십류 소설중 하나로 여기게 했다. 내 마음이 약간이나마 움직인 것은, 바로 이 광고 영상 때문이었다.
광고를 보는 순간, 서스펜스에 대한 갈증이 일었다. 오래 전부터 접하지 못했다는 사실을 엉겁결에 깨닫고나니 갑작스런 갈증이 치고 올라왔다. 스릴러와 추리물 장르는 이미 일본에게 자리를 내준 탓에 국내 본격 문학으로서는 눈에 띄지 않았던 것이다. 어쩌면 서스펜스에 대한 갈증이라기 보다는 '이야기다운 이야기'에 대한 갈증이었는지도 모르겠다. '7년의 밤'을 읽을 목록으로 선택하면서의 나는 굉장히 반가운 마음이었다.
작품을 접하면서 가장 놀랐던 것은 작가의 준비성이었다. 소설에선 잠수부와 야구, 그리고 댐 관리가 가장 중요한 소재로 등장한다. 작가는 그 직업군에 대해서 대단한 지식을 가지고 있었으며, 관련 용어들을 자유자재로 구사했다. 소설의 초반부서부터 작가에 대한 맹목적의 신뢰가 생겨났다. 이렇게 열심히 준비한 작가의 글이라면 뒷 이야기에 보통의 것이 숨어 있진 않겠구나. 하는 기대심리마저 피어났다. 정유정 작가의 글은 오래 묵은지 같았다. 장독에 꼭꼭 숨겨둔채 기다리다가, 보란듯이 내놓은 그녀의 작품은 깊고 진했다. 싸한 맛이 코를 뚫었다.
작품의 배경이 되는 세령호는 가상의 공간이다. 가상의 마을이지만 이 소설을 다 읽고 난 다음엔 마치 그곳이 실재했던 것 처럼 느껴지곤 한다. 댐으로 물막이를 해서 생겨난 커다란 호수. 그 아래 잠들어있는 과거의 마을. 그 마을 이주민들과 외부인들 사이에 나눠진 커다란 단절과, 그들 사이에 황제처럼 서 있는 세령목장의 주인이자 치과의사인 영제. 이 매력적인 마을의 지도가 책머리에 실려 있다는 사실은 책을 2/3쯤 읽은 뒤에 알게 되었지만, 굳이 지도가 없더라도 마을전체를 머릿속에 그리고 몰입하는 데에는 지장이 없었다.
이 마을의 외부인으로 승환이 들어오고 그 뒤를 따라 현수와 그의 가족이 들어온다. 이들은 경비업체에서 파견된 수문 경비원들이었다. 때마침 마을에선 사건이 일어난다. 영제의 딸이 실종된 것이다. 영제는 자신의 딸과 아내를 물건처럼 부리고 싶어한다. 자신이 생각하는 대로 움직이는 인형처럼 만들길 원한다. 하지만 그들은 인형이 아니었기에 영제는 자신의 뜻대로 그것을 이루지 못했고 폭력이라는 수단을 통해 그들을 '교정'하려고 한다. 그 부분별한 폭력에 희생된 모녀는 결국 가출과 실종이라는 결과로 나타나게 된다. 머지 않아 영제의 딸 세령은 호수에서 익사체로 떠오르게 된다. 그리고 부검 후에, 그녀가 차에 치인 뒤에 강한 힘으로 목이 꺾이고 호수에 버려졌다는 사실이 밝혀진다. 이야기는 얽히고 섥힌다.
사실 소설은 가장 중요한 모든 것은 밝히고 시작한다. 소설의 사실상 주인공인 서원의 아버지가 살인자로 잡히면서 시작되기 때문이다. 영제의 딸 세령을 죽이고, 자신의 아내를 살해한 뒤 댐 문을 열어 한 마을을 수장시킨 살인마. 그렇기에 소설은 더이상 살인범을 찾는 게임이 아니다. 사실이 전부는 아니라고(p.25) 말하는 승환의 대사처럼, 소설은 사실 속에 숨어있는 진실을 찾는데 힘을 쏟는다. 사실은 문맥상의 의미를 배재하기 때문이다. 이미 7년 동안 여러 매채를 통해 밝혀지고, 재생산된 한 끔찍한 사건 뒤에 숨어 있는 진실을 찾는 것. 그것이 소설이 우리에게 말하는 방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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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내 아버지의 사형 집행인이었다. p.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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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은 이 강렬한 문장으로 시작된다. 서원은 상상 속에서 수 없이 자신의 아버지를 목매단다. 살인자의 아들이라는 명찰을 달고 한 곳에 안주하지 못한 채 온 세상을 떠돌아다닌 그로서는, 아버지의 저주가 자신에게 들러붙어 있는 느낌일 것이었다. 가는 학교마다 아이들이 그를 따돌리고, 취직을 해도 곧 해고된다. 집을 얻으면 집에서 쫓겨난다. 그렇기에 서원은 가장 사실에 강하게 매여 있는 인물일 것이다. 아버지가 살인범이라는 사실 때문에 세상에서 버려져 생의 근처를 떠돌고 있으니 말이다. 그런 서원이 진실을 알게 된다면. 그 가정을 시작으로 세령호에 숨겨져 있던 비밀이 봇물이 터지듯 밀고 들어온다.
소설의 주인공들은 다들 자신의 아버지에 대한 기억을 가지고 있다. 현수는 항상 술을 마시며, 자신을 폭행하던 '최상사'로서 아버지를 기억한다. 그리고 어떻게든 아버지의 그림자로부터 벗어나려 노력한다. 하지만 그는 결국 아버지에게서 벗어나지 못한 채, 사형장에서 생을 마감한다. 승환은 강에서 시체를 건저올리는 역할을 했던 아버지로부터 벗어나려 한다. 그는 철도 업체에 취직하지만 한 여성이 그의 열차에 뛰어들어 자살한다. 그 시체의 사라진 신체부위를 찾으며, 결국 아버지의 그림자로부터 벗어나지 못했다는 생각을 한다. 도망치듯 세령호라는 외지로 흘러나오지만, 그곳에서 그는 물질을 하던 중 누군가에게 버림받은 세령의 시체를 보게 된다. 서원도 마찬가지이다. 아버지의 이름을 가슴에 붙인 채로 그는 어떻게든 도망치려한다. 마지막에 쏟아지는 기자들의 쏟아지는 플레쉬 세례에 당당히 서는 그의 모습은 그런 아버지의 그림자에 대항하는 꿋꿋한 자세였을 것이다.
살인사건과 그 범인, 그리고 살해자 아버지의 치열한 복수를 다룬 작품이지만 그렇게만 볼 수는 없었다. 이미 살인자를 밝혀졌기에 치밀한 반전 따위는 있을 수 없었고, 스릴이 강조되기엔 그들이 안고 있는 과거의 무게, 죄의 무게에 많은 분량이 할애됐다. 단순히 아들에 대한 아버지의 사랑으로 읽기에는 아들을 위해 한 마을을 수장시키는 아버지의 비뚤어진 부정이 너무 도드라졌다. 그보다는 어딘가 어긋난 인간들의 초상이 확대경을 쓴 듯 자세히 읽혔던 것 같다. 자신의 세계를 건설하려는 야망을 가진 영제. 최상사로부터 도망치며 자신의 아들에게 모든 것을 쏟아붇는 현수. 쪽방에서 살아가며 '내 집'에 대한 부푼 꿈을 안고 거기에 집착하는 은주 등. 이 소설에 나타나는 인물들이 한 군데씩 괴이한 것은 우리가 가지고 있는 인간 본성의 약점 하나 씩을 드러내어 그것으로 케릭터를 형상화했기 때문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