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름을 아는 것은 아는 것입니까 모르는 것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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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하기는 삶과 공동생활에서의 의심스러운 전제와 주장들에 대해 우리의 머리를 깨운다. 그 목표도 더는 예전처럼 진리가 아니다. 진리를 사랑하는 사람은 진리를 가질 수 있다는 환상에 빠지지 않는다. 그 목표란 우리의 생각과 삶의 틀을 넓히는 것이다. 철학하기란 우리 인간의 유한한 시간을 좀 더 생동감 있게 체험하려는 희망 속에서 우리의 사고 기관을 날카롭게 벼리는 것이다. 그게 단지 우리가 아무것도 모른다는 사실을 알기 위한 것일지라도.
_ 리하르트 다비트 프레히트, 『세상을 알라』 , 20-21쪽
많이 알수록 점점 더 내가 잘 모른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는 말을 우리는 종종 듣고 또 한다. 그 말을 하는 syo의 모습은 때로 트로피를 높이 든 운동선수처럼 보인다. 잘 모르는데, 잘 모르는 걸 알았는데 어떻게 계속 말을 하지?
‘제가 잘 아는 것은 아니지만’이라는 말을 쓰는 일도 많다. 써보니 저건 의미는 없고 의도만 있는 말인 것 같다. 겸손해 보이고 싶은 의도. 일단 뱉고 나중에 틀렸다는 게 밝혀질 때 면피하고 싶은 의도. 자체 모순의 말 같기도 하다. ‘아니지만’이라는 역접의 말끝은 이제부터 내 주장을 끌어 붙이겠다는 뜻이니까. 어쩌면 모순 없이 가능한 말은 오직 ‘제가 잘 아는 것은 아니라서’뿐인 것은 아닐까? 이제부터 당신의 의견을 경청하겠다는 말끝.
살며 많은 딜레마를 만나왔지만 그 중 무엇 하나도 돌파하지 못했다. 세상에 절대적으로 옳은 것은 없다는 말이 절대적으로 옳을 수 있는지 없는지 가려내지 못했고, 모든 것은 옳고 그름이 아니라 주장하는 이가 얼마나 강한지에 달렸다는 주장이 얼마나 강한지 파악하지 못했으며, 모든 사람을 만족시킬 수는 없다는 말에 모든 사람이 만족해야 하는지 아직 잘 모르겠다. 하지 말아야 할 말을 하는 것보다 해야 할 말을 하지 않는 쪽이 더 나쁜 결과를 빚어내는 국면이 있다는 건 아는데, 간혹 그 국면에 들어설 때면 이 국면이 바로 그 국면인지를 잘 알아채지 못한다.
이런 나를 위해 철학이 무엇인가를 해 줬으면 좋겠는데 철학이 무엇을 해줄 수 있는지를 모른다. 그걸 알려면 철학을 알아야 하는데 철학이 무엇을 해줄 수 있는지를 모르니 철학을 못하겠다. 그걸 알려면 철학을 해야 하는데..... 대충 그런 이유로 우리는 철학에 손을 대지 못하는 것 같다. 물론 어렵기도 하지만, 아무리 어려워도 철학이 우리에게 무언가를 해 준다는 확신만 있으면 우리도 기어이 철학을 할 것인데 말이다.
단지 아무것도 모른다는 사실을 아는 것만으로는 달라지는 게 아무것도 없었다. 오히려 ‘아무것도 모른다는 사실’조차 아는 사람이 된 스스로를 뿌듯해했고, 오늘의 나는 어제의 나+1일 따름이었다. 아, 인간이란 뭘까, 철학이란 뭘까, 철학하는 인간은 뭘까.
계몽이 자기파괴를 일삼는다는 것은 계몽이 내세우는 '발전'이 진보로서가 아니라 '퇴행'으로 귀착되었음을 뜻한다. 계몽의 이상이 삶의 해방을 가져다 준 것이 아니라, 또 다른 이데올로기로 변질되어 버린 것이다. 계몽의 정신은 계몽의 이데올로기로 퇴보하였다. 이 이데올로기는 속박을 초래한다. 그것은 생산적이기보다는 파괴적이다. 이데올로기적 이성은 또 다른 속박의 이름이다. 그리하여 계몽된 문명은 자기파괴적 이성 아래 야만 상태와 크게 다르지 않다.
_ 문광훈, 『스스로 생각하기의 전통』
사유의 폭과 깊이는 한 인간의 경험치를 넘어서지 못한다.
_ 이진우, 『니체』
사실 모든 사람은 역사의 파편 속에서 작은 맥락을 일구고 살아갈 뿐입니다. 거시적인 방향성을 설계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당면한 현실 가운데 맥락을 일구지 못하면 모두가 공허한 말장난에 불과할 뿐입니다.
_ 심용환, 『단박에 한국사 근대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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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년 우리가 살던 작은 아파트 단지에서는 5일에 한 번씩 장이 열렸다. 여러 상인들이 천막을 치고 자리를 깐 뒤 채소나 과일이나 접시나 안데르센 동화전집 같은 걸 팔았는데 그 중에 청바지를 파는 천막도 있었다. 엄마는 장날이면 그 천막에서 싸고 예쁜 청바지를 고르곤 했다. 부츠컷 청바지가 유행하던 때였다. 청바지 가게 아저씨는 눈썹이 진했고 말이 많지는 않았지만 친절했다. 엄마와 아저씨가 계산을 하는 동안 나는 주로 코딱지를 파며 서 있었다. 계산을 마친 엄마는 아저씨에게 상냥하게 인사한 뒤 천막을 빠져나왔고 아저씨도 반가워하는 얼굴로 인사를 받아주었지만 어느 날부턴가 어딘지 모르게 괴로워 보였다. 얼마 후에도 엄마와 나는 장에 들러 이것저것 구경하고 있었는데, 청바지 파는 천막을 지날 때쯤 굳은 표정으로 서 있던 아저씨가 다가와 엄마에게 말했다. "제발 이 앞으로 지나다니지 좀 마요...... 미치겠으니까." 그때 봤던 청바지 아저씨의 이글거리는 눈동자를 나는 먼 훗날까지 잊지 못했다. 엄마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머리를 긁적인 뒤 나를 데리고 집에 가서 저녁을 차렸다. 청바지를 팔던 아저씨는 얼마 후부터 장에 나타나지 않았다. 바야흐로 스키니진의 유행이 도래하고 있었다.
_ 이슬아, 『나는 울 때마다 엄마 얼굴이 된다』, 17-20쪽
이건 완벽하지 않나? 이만큼으로 할 수 있는 최고지 않나?
‘안데르센 동화전집’과 ‘주로 코딱지를 파며 서 있었다’라는 도구의 효율적인 역할과 적확한 자리. 그 이후부터는 이야기가 달음질치므로 저런 장치를 추가하면 사족에 불과하거나 몰입에 방해가 되었을 것이다.
부츠컷과 스키니진. syo라면 ‘부츠컷 청바지가 유행하던 때였다’를 맨 앞줄에 넣었겠다. 그랬다면 조금 더 시선을 잡아끄는 첫 문장을 가진 글이 되고, 글의 첫머리와 꼬리가 대응하여 맺히는 글이 될 수 있었겠지만, 동시에 전체 구조가 좀 작위적이고 기교적이라는 느낌을 주었을 것 같다. 그랬다면 그 작위와 기교가 청바지 아저씨와 엄마의 이미지에 조금은 물들 것이며, 전체 이야기가 주는 감흥은 그만큼 줄었을 것 같다. 천천히 생각해보면 이슬아의 선택이(선택인지 감각인지는 모르겠지만) 옳은 것 같다. 멋져.
이런 좋은 글은 항상 양면적인 기분이 들게 한다. 잘 쓴 글이 주는 기쁨은 예쁜 조각 같지만, 그 조각의 밑면에는 항상 ‘ㅋㅋㅋㅋ넌 이거 안 되지 메롱’이라고 쓰여 있다. 특히 이슬아 작가의 경우처럼, 그 예쁜 조각을 만든 이가 syo보다 10살 가까이 어리면 그 놀림은 더욱 크게 쓰여 있다! 게다가 여기에는 옮길 수가 없었지만 저 글에는 syo가 결코 손댈 수 없는 영역인 그림까지 부착되어 있다! 이러면 도리 없이 또 사랑해야지. 아, 세상엔 사랑할 사람이 너무 많아. 자꾸자꾸 생겨나는 사랑, 이 헤픈 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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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적 차원에서 우리는 서구 의약품의 전파를 억제하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질병 치료도, 굶주린 사람들에게 식량을 공급하는 것도 거부할 수 없다. 그러나 우리는 사회적 개선과 함께 출생률 조절이 이루어져야 함을 명심해야 한다. 삶의 질을 개선하는 만큼 가족 인구의 제한이 뒤따라야 한다. 사망률과 출생률을 함께 조절하지 않으면 우리의 운명은 어두워질 것이다. 어쩌면 이미 너무 늦었는지도 모른다. 가톨릭교도가 가장 많은 국가, 그리고 현대 의학이 등장하는 국가에서 23년 후면 인구가 두 배로 늘어날 것이기 때문이다.
모든 국가가 지난 20년간 출생률을 반으로 줄인 일본처럼 효율적인 방침을 택한다면, 문제를 합리적인 방식으로 해결할 수 있다. 그러나 비극적이게도 수소폭탄이 최종 해결책이 될 가능성이 더 높아 보인다.
_ 앤서니 스토, 『공격성, 인간의 재능』, 240쪽
인간의 일은 참 알 수 없는 것 같다. 앤서니 스토가 이 책을 냈던 1960년대 말엽에 일본의 출생아 수는 최고점을 찍었던 2차대전 종전 직후(약 270만명)에 비해 절반 가까이 떨어졌다. 그러나 이내 상승하여 75년경에는 210만 명의 새로운 고점을 찍었다. 그리고 그 시기 사망자 수는 역대 최저에 가까웠다. 그 장면을 보면서 앤서니 스토는 어떤 생각이 들었을까? 일본인의 ‘합리성’이 금방 무너졌다고 여겼을까? 그러나 이내 일본은 다시 ‘합리적’인 기조로 돌아섰고, 현재는 사망자 수가 출생아 수를 훌쩍 넘기고 있다. 앤서니 스토가 아직 살아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이 광경을 보면 무슨 말을 할까?
출생율을 낮추는 일이건 높이는 일이건, ‘효율적 방침’과 ‘합리적 방식’으로 해결할 수 있을 거라고 믿는 이들의 오만한 성정은 맬서스 이후로도 그 명맥을 튼튼하게 이어오고 있지만, 인류는 자신들이 원하는 시점에 딱 변곡점을 만들어 낼 수 있을 정도로 ‘효율적’이고 ‘합리적’이었던 적이 단 한 번도 없다. 지나치게 과밀해지고 나서야 기기괴괴한 정책들을 동원하여 출산율을 억지로 떨어뜨렸다. 출산율에 구멍이 나고 그 구멍으로 국가의 미래가 줄줄 새어나오는 것을 보고서도 시종일관 멍청한 방식으로 대응하더니, 이제야 일부 선진국에서나마 약발이 좀 서는 신약을 찾아내 임상실험에 들어간 것 같은 모양새다.
오늘날 공격성은 ‘인간’의 재능일 수도 있겠지만, ‘인류’의 재능인 것 같지는 않다. 더는 아닌 것 같다.
우리가 중요하다고 여기는 것들은 언제든지 폐허가 될 수 있다. 우리가 겸손해지고 서로를 돌보는 법을 배우지 못한다면, 삶은 언젠가 뿌리 뽑혀 버릴지도 모른다.
_ 최태섭, 『억울한 사람들의 나라』
4
요즘 나의 대화에는 많은 사람들이 등장한다
나와 딸과 남편으로 무더기다
문이 열려서 문을 열고
열어야만 닫히는 것이 문이기 때문에
누군가 그리울 수 있어 좋은 나의 집
남편의 목을 조른 손으로 바구미를 골라냈다
같은 손으로 쌀을 씻고 흰살생선을 구웠다
새벽에 나 혼자 맛이 좋았다
손이 벌인 일이나 나의 전체가 낳은
딸이 연속극을 보다가 중얼거렸다
사랑은 사랑이 바닥나기 전에 끝장나게 하시라......
사랑이 아직 사랑일 때 바닥나게 하시라......
죽은 생선을 움켜쥐어본 적도 없이 끝날
딸의 볼륨 없는 사랑
따뜻했다
숟가락 위에 올린 흰살생선의 살점
양손으로 움켜쥐었을 때 딱 들어맞는 인간의 목
밝은 시그널 뮤직으로 시작했다가
슬픈 사운드 트랙으로 끝나는 16회 차였는데
사람이 사람 구실하며 사는 바람에 극은 탄력을 잃고
폐장 이후의 회전목마처럼
어둠의 선분을 팽팽히 잡아당기며
나와 딸과 남편이 한집에 잠들었다
개미가 더 큰 죽은 개미를 물고 지나가는 장면이
꿈속에서 반복되었다
_ 유계영, 「버닝 후프」 전문
‘의미’라고도 ‘의도’라고도 부를 수 있는 무엇, 혹은 그 둘 사이의 어느 지점에 무엇인가가 있고, 시가, 넓게는 문학이, 더 넓게는 모든 예술이 그 무엇인가를 담지하고 있다는 생각이 일반적이다. 그 일반적 생각에 기반하여 예술의 독자들은 생각하고 추리한다. 그리고 저마다 결론을 내린다. 그 결론은 시인의, 작가의, 예술가의 결론과 0으로부터 100까지 펼쳐진 닮음의 스펙트럼을 만든다.
독자와 작가의 결론 닮음이 0과 100 중 어느 쪽에 가까운가 하는 것보다 훨씬 더 흥미롭게 지켜봐야 할 부분은, 작가가 독자를 0과 100 중 어느 방향으로 끌고 가려는 시도를 하고 있는가이다. 현대에 가까워질수록 독자의 견해가 어느 한 방향으로 수렴하는 사태를 일부러 막으려는 작품이 많이 등장한다. 독자의 머릿속에 확정적이고 단정한 이미지가 아니라 생동하고 흩어지는 이미지를 던져 넣으려 하는 작품이 있다. 독자는 전체를 보고 어떤 느낌을 받지만 그것이 과연 어떤 느낌인지 ‘정확히’ 결론짓는 일을 한없이 보류해야 하는 입장에 처한다. 마치 원자핵 주변의 전체적 전자분포를 확률적으로 어림하여 구름 같은 모형을 그릴 수는 있지만 전자가 어디에 있는지를 ‘정확하게’ 꿰뚫기는 난망한 것처럼, 어떤 이야기를 중심으로 구름처럼 번져 있음을 느끼지만 정확히 어떤 의미의 몸통을 꿰뚫고 있는지는 단정하기 어려운 시, 단정하기 어렵게 ‘만드는’ 시가 있다. 마치 한 편의 시에서 짝수 번째 행을 지워버리고 홀수 번째 행만 뽑아놓은 것처럼 행과 행 사이에 간격이 큰 시가 있고, 같은 방식으로 이미지와 이미지의 간격을 벌려 놓은 시가 있다. 그 간격 속에서 독자는 헤맨다. 시와 친하지 않은 독자일수록 더 격렬히 헤맨다. 달리 생각하면 그것은 축복일 수 있다. 시는 알고 읽을 때와 알려고 읽을 때 각각 다른 무언가를 알려주는 희한한 장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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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움과 건강이 하나라면 아름다운 몸매가 건강한 몸매와 무관할 리 없습니다. 적자생존survival of the fittest의 법칙에 따르면 우리가 아름답다고 느끼는 몸매는 원시시대의 생존과 번식에 적합fit했던 몸매입니다. 남성은 강인해야 했고, 여성은 건강해야 했습니다. 그렇게 환경에 적응했던 남성과 여성이 생존과 번식에 성공했고, 그들은 그 적합함fitness에 대한 선호까지 후세에 물려주었습니다. 그래서 여성은 '든든한' 남성을 좋아하고 남성은 '섹시한' 여성을 좋아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몸매는 오늘날 우리가 '피트니스fitness'를 통해 추구하는 몸매와 다르지 않습니다. 적합함이라는 뜻의 'fitness'가 체형 개선을 위한 운동을 뜻하기도 하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닙니다.
_ 이기원, 『운동 미니멀리즘』, 50쪽
이런 글은 취지는 알겠지만 입장이 애매모호하다.
적자생존의 법칙에 따르면 오늘날의 생존과 번식에 가장 적합한 몸매는 재벌총수의 몸매나, 하다못해 건물주의 몸매 정도가 되겠다. 거기까지 가지 않더라도, 오늘날 대한민국에서 결혼 상대자로 가장 선호되는 이들의 직업으로 미루어 짐작해보면, 이제 적자생존의 법칙에 가장 들어맞는 몸매는 공무원, 공기업 직원, 교사, 금융직, 의사, 약사 등등의 사회적 지위를 가진 이들의 몸매일텐데, 그 몸매는 어떤 몸매일까?
아 물론 몸까지 좋으면 승률이 더 높긴 하겠지. 하지만 ‘핏한’ 몸매가 오랜 옛날 환경에 적응하여 번식에 성공했던 이들의 몸매와 일치한다는 말을 100퍼센트 인정해도, 그 몸매는 오늘날의 결혼 적자생존의 법칙에서는 부수적, 장식적, 옵션 기능에 가깝다. ‘적합함fitness’에 따라야 한다면, 우리는 원시시대의 피트니스와 자본주의 시대의 피트니스 가운데 어디에 맞춰 핏해져야 할까? 그러니까 syo는 지금 돈이 없어서 결혼을 못하고 있지 근육이 없어서 결혼을 못하고 있는 게 아니라고.....
-- 읽은 --
앤서니 스토, 『공격성, 인간의 재능』
유계영, 『이제는 순수를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트린 주안 투안, 『마우나케아의 어떤 밤』
정용준, 『유령』
옌스 죈트겐, 비탈리 콘스탄티노프, 『교양인을 위한 화학사 강의』
-- 읽는 --
이기원, 『운동 미니멀리즘』
이슬아, 『나는 울 때마다 엄마 얼굴이 된다』
듀나, 『민트의 세계』
리하르트 다비트 프레히트, 『세상을 알라』
김기형 외, 『좋아하는 것을 함부로 말하고 싶을 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