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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원국의 글쓰기 - 남과 다른 글은 어떻게 쓰는가
강원국 지음 / 메디치미디어 / 2018년 6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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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는 달변이었다. 중학교도 제대로 못 마친 시골뜨기가 아무리 악바리처럼 일을 했대도, 그 혀가 능란하지 않았다면 짧은 한 때의 영화나마 누려보지 못했을 것이다. 아버지는 결혼도 그 혀에 꿀을 발라 해치웠다. 그러나 내가 태어나 말을 알아듣기 시작했을 때, 아버지의 말 속에 예전에는 있었다던 그 단맛은 이미 온데도 간데도 없었다. 엄마의 넋두리 속에 화석처럼 남아있는 단서를 통해 그 말들의 거대했을 몸집을 짐작할 수 있을 뿐이었다. 결혼이라는 송곳에 찔려 허망하게 쪼그라든 말의 외피. 지켜지지 않은 약속의 흔적이 낳는 통증. 나는 애증이 난무하는 부모의 삶을 지켜보며 두 가지를 배웠다. 말을 잘 하는 사람이 되어야 얻는다. 그리고 말을 잘 하는 사람을 조심해야 잃지 않는다.
뜻밖에도 아버지의 약점은 글이었다. 말을 겁내지 않는 아버지가 쓰는 일을 두려워했다. 아버지의 펜은 항상 느렸고, 자주 절뚝거렸고, 가까운 곳에도 한 걸음에 도달하는 일이 없었다. 아버지의 책상에서는 가로로 세 개의 줄을 그어 써놓은 단어를 덮는 세 줄기 소리가 자주 들렸다. 간택 받지 못한 활자들의 시체가 동그랗게 말려 쓰레기통에 버려지는 꼴을 지켜보며 나는 역시 두 가지를 배웠다. 결국은 글을 잘 써야 한다. 그리고 말을 잘 하는 사람이 한글을 안다고 해서 곧바로 글을 잘 쓰는 사람이 되는 것은 아니다.
꽤 어릴 적부터 나는 글을 잘 쓰고 싶은 아이였다.
2
나는 아버지를 닮아 말을 곧잘 하는 아이였다. 게다가 누굴 닮았는지 책을 좋아했으므로 자연히 글을 곧잘 쓰는 아이기도 했다. 시작과 동시에 이미 말과 글은 나의 힘이었다. 일상 바깥으로부터 무언가를 따서 가져올 만큼 말 잘하고 글 잘 쓰는 아이가 되진 못했으나, 일상의 안쪽 영토에서 결코 손해를 보지 않을 만큼은 혀와 손을 놀릴 줄 알았다. 그 정도면 조그만 욕심을 채우고도 남음이 있었으므로, 말과 글을 손에 쥐고 세상 밖으로 나갈 마음이 생기지 않았다. 나는 말의 날을 갈지도, 글의 녹을 닦아내지도 않았고 자라는 대로 그저 내버려 두었다. 그러다 벼락처럼 이런 글을 만났다.
마음도 한 자리 못 앉아 있는 마음일 때, 친구의 서러운 사랑 이야기를 가을 햇볕으로나마 동무 삼아 따라가면, 어느새 등성이에 이르러 눈물 나고나. 제삿날 큰집에 모이는 불빛도 불빛이지만, 해질녘 울음이 타는 가을 강을 보것네. 저것 봐, 저것 봐. 네보담도 내보담도, 그 기쁜 첫사랑 산골 물소리가 사라지고 그 다음 사랑 끝에 생긴 울음까지 녹아나고, 이제는 미칠 일 하나로 바다에 다 와가는 소리 죽은 가을 강을 처음 보것네.
_ 박재삼, <울음이 타는 가을 강> 전문, 행갈이 제거.
그리고 이틀 밤낮을 말 그대로 앓았다. 앓고 나서 알았다. 세상에는 사람을 앓게 하는 글이 있다는 사실을. 알고 나서 욕심이 났다. 저 글을 가지고 싶다. 내 이름 박은 글을 누군가의 마음에 집어넣어 그를 아프고 앓고 열이 나게 만들고 싶다. 어떤 벼락은 인간의 내면을 뒤집고, 어떤 소년은 그 벼락에 맞아 사춘기를 시작했다. 그때 나는 매일 다섯 시간 수학 공부를 했고, 세 시간 과학 공부를 했고, 그리고 다른 과목들을 공부하느라 수학보다 적고 과학보다는 많은 정도의 시간만 잘 수 있었기 때문에, 박재삼이 되는 일을 어른의 일로 미루어 두었다. 독서도 사랑도 할 만한 여유가 없는 껍데기뿐인 사춘기가 바삐 지나갔고, 나는 문제집이나 시험지 속 아름다운 시를 만나면 잠깐 일렁였다가 다시 샤프를 고쳐 잡으며 그 시간을 보냈다.
3
어른이 되었다. 하지만 당연하게도 나는 박재삼이 아니었고, 박재삼의 글은 박재삼이 쓰니까 박재삼의 글인 것도 또한 당연했고, 박재삼이 아닌 내가 박재삼이 될 수 없는 것 역시 당연한 일임을 깨닫는 데 꽤 적지 않은 시간이 걸렸으나 결국은 받아들일 수 있었고, 내 마음에 남은 것이라곤 박재삼이 던진 벼락에 불탄 자국뿐이었다. 그러나 불 놓은 밭에서 이듬해 풀이 돋듯, 내 글은 그 흉터에서 시작되어 그 흉터의 모양대로 자라났다. 인간은 누구나 한번은 자기가 평생 쫓아가 안길 아름다움의 모양을 결정하는 순간을 맞닥뜨린다. 자의든 타의든, 벼락처럼 결정된 아름다움은 그보다 더 거대한 벼락을 만나도 쉽사리 색을 바꾸진 않는다. 취향이라 부르기도 하고, 감각이라고 부르기도 하는 그것을, 나는 ‘첫 문신’이라고 부를 때가 있다. 살며 두 번째, 세 번째 문신이 다시 새겨지겠지만, 그 아이들은 모두 첫 문신에 복종하며 태어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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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글은 어떤 글일까를 항상 생각한다. 흔히 말하는 진선미를 고려해보면, 진실한 글, 선한 글, 아름다운 글이 좋은 글일 것 같다. 글의 진실함을 판단하는 잣대는 글, 글쓴이, 읽는 이의 바깥에 있다. 글의 선함을 판단하는 잣대는 글쓴이와 읽는 이의 마음에 있고 바깥세상에도 있다. 그러나 글의 아름다움을 재는 저울은 오로지 한 군데, 읽는 이의 안에만 있다. 내게 아름다운 글이 내게 아름다운 글이고, 네게 아름다운 글이 네게 아름다운 글이다. 두 사람이 말하는 아름다움은 어떤 글에서는 겹치기도 하고, 또 어떤 글에서는 서로 등을 돌리기도 한다. 아름다움의 영역에서만큼은 내게 아름다운 글이 네게 아름다운 글보다 훨씬 좋은 글이다. 내게만 아름답고 세상 모든 사람들에게 아름답지 않은 글은, 내게는 아름답지 않지만 세상 모든 사람들에게 아름다운 글보다 덜 좋은 글이 아니다.
어떤 글이 좋은 글인지를 판단할 때, 진, 선, 미를 각각 어느 정도의 비중으로 고려할지는, 글의 장르에 따라 정해지는 바가 어느 정도는 있겠으나, 결국은 개인의 선택에 달린 문제다. 박재삼에서 태어난 독자와 리영희에서 태어난 독자가 글을 보는 눈은 다를 수밖에 없다. 그리하여 좋은 글을 쓰는 법에 대해 알려주는 책은 가끔씩 다른 곳에서 태어난 이들에게 피할 수 없는 불쾌감을 불러일으키기도 한다. 자기가 평생 추구하며 살아온 삶을 좋은 삶이라 주장하며 당신들도 나처럼 살라고 충고하는 책에 맞서 내 삶을 옹호하기 위해 반대하듯이, 나는 내 글을 지키기 위해 대단히 많은 글쓰기 책을 반대하며 살고 있다. 그게 다 박재삼 때문도 아니고, 박재삼에서 나온 사람들이 다 이러지도 않겠으나, 어쩐지 나만큼은 평생 내 글의 목을 죄는 ‘좋은 글’ 지침서들에 맞서 싸우며 살아야 하는 운명 같다.
5
글을 읽는 사람은 글쓴이가 얼마나 잘 쓰는지, 얼마나 많은 것을 알고 있는지 관심 없다. 그들이 관심 갖는 것은 글에서 말하고자 하는 얘기가 뭔지, 그 얘기가 내게 어떤 도움이 되는지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내가 글에서 하고자 하는 말이 무엇인지, 그것이 독자에게 어떤 효용이 있는지에 집중하는 게 맞다. (23쪽)
아니다. 나는 내가 읽을 글이 잘 쓴 글이기를 바라고, 내가 읽은 글이 많은 것을 알고 있는 이의 손끝에서 나온 글이길 바란다. 내가 읽은 글이 말하고자 하는 얘기가 얼마나 도움이 되는지 하는 것만큼이나, 글의 아름다움에 감정이 들썩들썩하기도 하고, 글에 묻어나는 글쓴이의 지성에 자극받아 더 열심히 책을 읽기도 한다. 요컨대, 저자는 ‘글을 읽는 사람’이라는 집단을 굉장히 편협하게 보고 있다. 그 역시 한명의 ‘글쓴이’라는 관점에서 생각해보면, 저자가 이 책을 저술할 때, 이 책을 읽을 독자들을 얼마나 얕보고 있는지를 발견할 수 있는 대목이다. 독자들이 오로지 자신이 하고자하는 말, 그리고 그 효용만을 따지며 읽을 거라고 예측하는 저자는 얼마나 궁핍하고 무책임한 글을 쓸까. 애초에 독자들이 글쓴이가 얼마나 잘 쓰는지에 관심이 없다면, ‘글 잘 쓰는 법’을 강론하는 이 책은 대체 뭐지?
무엇보다 아는 체하고 싶은 욕심을 자제할 필요가 있다. 싸이의 노래 <강남스타일>은 단순 반복의 미니멀리즘으로 성공한 경우다. 글쓰기도 미니멀리즘을 지향할 수 있다. 단문으로 쓴다. 복문, 포유문, 중문을 지양한다. 수사적인 기교를 부리지 않는다. 수사법 사용을 절제한다. 최대한 짧게 쓴다. 군더더기 없이 할 말만 쓴다. 독자에게 잘 보이겠다는 생각을 자제한다. 그것도 소유욕이며 미니멀리즘에 역행하는 일이다. (26쪽)
문화평론가들이 욕을 먹는 이유는, <강남스타일>이 그렇게 성공할 것임을 누구도 예측하지 못했으면서, <강남스타일>이 어떻게 성공한 것인지에 대해서는 누구도 입을 다물지 않고 한 마디씩을 거든다는 데 있지 않을까. 하물며 문화에 대단한 식견을 가진 전문가도 아니면서, 미니멀리즘으로 성공했다고 단언하는 글이 우습다. 우습다고 단정적으로 내가 말할 수 있도록 도와준 것은 저자 자신이다. 이런 말씀을 해드리고 싶습니다. 선생님, 무엇보다 아는 체하고 싶은 욕심을 자제할 필요가 있습니다.
설령 정말 그렇다 하더라도, 세상에는 <강남스타일>보다 더 성공한 노래가 얼마든지 있고, 그 노래들이 죄 미니멀리즘을 지향한 것도 아닌데, 어째서 우리는 글쓰기에 미니멀리즘을 지향해야 할까? 미니멀리즘에 역행하면 큰일이라도 나는 것일까? 단문으로 쓰라는 이야기는 어떤 글쓰기 책을 펼쳐도 피하고 지나가기 어려운 말인 것을 보니 진리인가 싶다가도, 그런 말을 하는 이들보다 이름난 대가들이 길고 긴 문장을 아무렇지도 않게 써대는 걸 보면 또 아닌가 싶기도 하다.
세상에는 정말 더없이 아름다운 단문으로 이루어진 글들이 많이 있다. 더 이상 적확할 수 없으리만큼 제 자리를 맞게 찾은 단어들로 이루어진 짧은 문장은 눈부시게 아름답다. 그런 문장들을 눈앞에 놓고 있으면 정말 수사나 기교는 벗어던져야할 넝마 같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그런 글을 만났을 때 느끼는 ‘짧은 글은 정말 아름답다’는 감정은 참일 수 있다. 그러나 어느 명제가 참이라고 해서 곧바로 그 명제의 역이 참이 되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짧은 글은 정말 아름답구나!’ 하고 경험할 수는 있지만, 그 경험을 곧바로 ‘정말 아름다운 글은 짧은 글이다’로 변환할 수는 없다. 아름다운 짧은 문장이 정말 아름답듯이, 아름다운 긴 문장 역시 정말 아름답다. 아름다움은 문장의 길이에서 오는 것이 아니다. 그저 아름다운 문장이 아름답다.
긴 문장을 추구하는 이들은 짧은 문장의 아름다움을 부인하는 일이 적다. 그러나 짧은 문장을 다루는 이들은 긴 문장에 눈살을 찌푸린다. 편견이다. 그리고 짧은 문장을 쓰면 누구나 아름다운 문장에 도달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한다면, 오만이다. 정말 아름다운 짧은 문장을 만드는 일은, 정말 아름다운 긴 문장을 만드는 것보다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글쓰기 책에서 짧은 글을 강조하는 이유를 안다. 긴 문장은 다루기 어렵고, 쉽게 읽히도록 다루기는 더더욱 어렵다. 실수는 빈발할 것이고, 욕심을 부려놓은 흔적은 글 잘 쓰는 이들의 눈에 어설프게 칠해놓은 화장처럼 흉하게 보이기도 할 것이다. 짧은 글은 안전하다. 꼭 필요한 문장요소들의 자리만 비워두고 몇 가지 선택지에서 잘 고르면 읽기도 좋고 보기도 좋은 문장이 태어난다. 초심자들에게 가르칠 만하다. 그러나 그와 동시에 긴 문장을 도외시하고 사문난적 취급하는 성향까지 심어준다면, 그건 초심자들이 나아갈 수 있는 또 하나의 방향을, 결코 열등하지 않은 방향을 삭제하는 만행이 된다. 긴 문장을 쓰는 힘과 긴 문장을 읽는 힘은 서로 무관하지 않다.
군 시절, 내무반 고참 서넛은 취침 소등 후에 당직사관의 눈을 피해 라면을 끓여 먹었다. 물론 그들은 먹기만 했다. 나는 국물 맛이라도 볼지 모른다는 기대감으로 라면 끓이기를 자청했다. 전열 기구 사용이 금지돼 있던 터라 들키면 '외박 금지' 정도는 불사해야 했지만 라면을 끓여 갖다 바쳤다. 설거지를 명분으로 주변을 서성거리는데 고참이 불렀다.
"강 일경, 이리 와봐."
드디어 올 게 왔구나, 나도 한 젓가락 할 수 있겠구나 싶어 한걸음에 달려갔다. 그런데 다짜고짜 머리를 박으란다.
"대가리 박고 앞으로 전진! 넌 살인미수야."
깜깜한 내무반에서 끓이느라 스프 봉지 쪼가리가 라면에 들어간 것이다.
일명 원산폭격이라는 얼차려를 받고 있는데도 웃음이 났다. 머리를 박으라고 하는 고참이나 라면을 탐하다가 머리를 박고 있는 나나 웃기기는 마찬가지였다. 그 사건은 재밌는 추억이 되어 글을 쓰는 이 순간에도 웃음을 자아낸다.
재미는 글의 첫 번째 요건이다. (100-101쪽)
내겐 정말, 너무 재미가 없어서 웃어야 되는 포인트를 짐작하기 어려운 글이다. 술자리에서 윗사람이 이런 이야기를 꺼냈다고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오싹하다. 애를 써 본다면 ‘글을 쓰는 이 순간에도 웃음을 자아낸다.’ 부분에서 어이없음을 모아서 조금쯤 웃을 수 있을 것 같기는 하다. ‘재미는 글의 첫 번째 요건이다’라는 문장은 반전이 있어서 조금 더 높은 점수를 줄 수도 있겠다.
결국 좋은 글을 쓰는 것은 식견에 달려 있는 일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아무리 웃긴 글을 쓰고 싶어도, 아직까지 최불암 시리즈에 빵빵 터지는 수준의 감을 가지고서는 21세기 이 살벌한 개그판에서 1초도 생존할 수가 없다.
전체적으로 저자는 자신의 미적 감각도 개그 감각도, 일절 의심하지 않는다는 생각이 든다. 내게 좋은 글이 좋은 글이고, 내게 웃긴 글이 웃긴 글이라고 생각하며 이 책을 지은 것 같다. 글쓰기와 관련하여 저자가 지닌 눈부신 경력이 그를 이렇게 만들었을까? 그가 아름답다고 생각하는 글, 그가 재미있다고 생각하는 글이 점령한 세상을 생각해보면, 난 왜 앞이 캄캄할까.
6
진과 선에 비해, 미는 낮고 하찮고 사적인 것으로 받아들여진다. 어떻게 되먹은 일인지는 몰라도, 사적인 것이 사적인 것으로 남도록 지켜주기보다, 사적인 것이므로 함부로 고치고 교정해도 괜찮다는 풍조가 있다. 그렇게 살지 말라고 충고하는 일이 무례를 동반함을 잘 아는 이들도, 그게 뭐가 예쁘냐는 말은 아무렇지 않게 한다. 아 물론 네 개인의 취향이니까 존중은 하지만, 이라는 마음에도 없는 예쁜 말을 덧붙여 도덕성을 확보해가면서.
좋은 삶을 말하는 책처럼, 좋은 글을 알려주는 책 역시 월권이 되기가 쉽다. 이런 글이 좋은 글입니다, 라는 말을 할 수 있으려면 다양한 제반사항을 미리 한정해야 한다. 장르를 밝혀야 하고, 상황을 상정해야 하고, 예상 독자도 지정해야 한다. 그 모든 제한을 통해 좁고 세밀해진 범위 안에서만 ‘좋은 글’을 조심스럽게 주장해볼 수 있다. 만능열쇠처럼 모든 경우에 들어맞는 좋은 글은 없다. 아름다운 글은 더 그렇다.
글은 개별적이고, 각자 다른 지문을 지닌 것처럼 우리는 각자 다른 글을 쓴다. 자기의 길을 걷는 물줄기가 사방으로 뻗을 것이고, 그래야 온 세상을 고루 적실 수 있다. 내 글에 좋은 글의 왕관을 씌우는 것이 타인의 글을 불모지로 만들 수 있음을 알면 좋겠다. 사막은 사막 밖의 세상도 한소끔 더 건조하게 만든다. 자신의 글을 지키는 사람들이 오늘도 조용히 세상의 사막에 물을 뿌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