앤더슨의 테이프 - P
로렌스 샌더스 지음 / 고려원(고려원미디어) / 1992년 1월
평점 :
절판


Mr. Bestseller라는 별명이 붙을 정도로 엄청난 인기를 끌었다는 로렌스 샌더스의 데뷔작으로, MWA 최우수 신인작입니다.(이 때 경합하여 안타깝게 떨어진 작품으로는 앞서 언급한, 시드니 셀던의 <벌거벗은 얼굴>이 있습니다.) 1920년 생이시니 데뷔가 상당히 늦으신 편이죠? 거의 50이 되어서 데뷔작을 내셨으니까요. 그 이전에는 과학 잡지에서 경력을 쌓았다고 합니다. 연륜 덕분인지는 모르겠지만, 데뷔작의 완성도도 상당히 높습니다. 이 작품 이후 '대죄'-<제 1의 대죄>가 조만간 황금가지에서 출간될 예정입니다.-, '계명', '맥널리' 시리즈를 위시한 대중적인 (추리)소설로 엄청난 인기를 끌어 판매부수 1억부를 돌파하셨습니다. 제가 좋아하는 작가 중에 하나이구요.

이 소설의 가장 큰 재미는 무엇보다도 소설의 형식에 있습니다. 놀랍게도 처음부터 끝까지 2차 문헌으로만 구성되어 있다. 도청 테이프-그래서 제목이 <앤더슨의 테이프>입니다.-, 도청자료, 서류, 일기장, 증언 등을 통해, 존 "듀크" 앤더슨이라는 뛰어난 범죄자의 더 뛰어났던 완전범죄 계획을 따라가고 있습니다. 2차 문헌만으로도 웬만한 추리소설보다 긴장감과 서스펜스를 유지하고 있습니다. 읽으면서 2차 문헌을 소개하는 짧지만 건조한 설명와 그 안에서 벌어지는 뜨거운 대화가 상호 교차하면서, 묘한 긴장감이 느껴지더군요. 물론, 2차 문헌으로 소설을 구성했다는 것 자체가 문제의 소지가 있습니다만, 그래도 그 신선함을 맛보기에는 충분합니다.

또한, 대화를 통해서이긴 하지만, 천재적인 범죄자인 존 "듀크" 앤더슨의 악마적 매력도 성공적으로 드러나고 있고, 로렌스 샌더스의 주된 주제 중에 하나인 현대사회의 병폐 및 부르조아들의 위선, 그리고 성에 대한 노골적인 묘사도 효과적으로 구현되어 있습니다. 물론 데뷔작이다 보니 재기가 지나치다는 느낌을 주기도 하지만, 거의 모든 면에서 완벽합니다. 주인공과 주변인물들의 성격묘사, 범죄의 구성과 결말까지 한 치도 빠지는 바가 없는 수작입니다. 책과 번역상태도 깔끔하구요.

다만 아쉬운 점은, 듀크 앤더슨의 일기가 등장하는 장면입니다. 존 "듀크" 앤더슨은 그야말로 치밀하고 본능적인 범죄자이기 때문에, 그가 일기를 통해 자신의 '철학'을 남겼을 거라고는 생각되지 않습니다. 작가의 생각을 넣기 위해 만든 교육지책인 것 같은데 현실감이 좀 떨어지더군요. 그리고 이렇게 치밀하게 조사를 했으면 범죄를 미리 예방하지라는 엉뚱한 생각도 들었는데, 이것은 대부분의 추리소설이 가지는 모순일 수도 있으니 생략하겠습니다.

요즘 구하기가 쉽지 않은 책이긴 한데, 감히 필독을 권합니다. 재미있습니다. 후반부에 등장하는 딜러니의 활약이 펼쳐지는 대죄 시리즈로 이제 달려가야겠군요. 정말 어렵게 제 2의 대죄를 구해서 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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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ldhand 2006-03-17 14: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파일 7'에서의 인상깊었던 악당 "듀크"와 더불어 "듀크 앤더슨"의 매력이 돋보였던 작품. 애절한 러브 스토리도 기억에 남고.. 이와 비슷한 형식의 소설인 고려원 미스터리 목록중 하나인 "죽음의 편지"도 생각나네. 오직 등장인물들의 편지로만 이루어진 소설..

상복의랑데뷰 2006-03-19 11: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가 하필 그것만 없어서 --;;;
 
나의 결혼 원정기 (2disc) - 할인행사
황병국 감독, 정재영 외 출연 / 에이치비엔터테인먼트 / 2007년 5월
평점 :
품절


정재영이 나온다는 이유 때문에 본 영화. 보고 나니, 건질 것은 정재영, 유준상, 수애의 연기 뿐이라는 약간은 허무한 생각도 든다. <피도 눈물도 없이>를 보고, 느와르 영화에 적역일 것 같다고 생각했던 정재영은 나의 기대를 200% 배반했다. 순박한 농촌노총각'의 이미지를 영화에 그대로 구현해놓고 있었다. 실제 농촌총각들이 정재영이 연기한 모습과 비슷하지는 않겠지만, 상업영화를 보면서 관객들이 기대하는 '농촌총각의 순박함'이라는 이미지를 적당히 과장과 현실을 조화시켜 보여준 정재영의 연기는 차기작에 대한 기대를 크게 했다. 그리고 멜로라인이 정재영-수애였기 때문에 비교적 왕따스러운 역이었던 유준상 역시 크게 튀지 않는 선에서의 코믹 연기로 자신의 존재감을 각인시켰다. 그리고 수애는 비슷한 또래의 배우들에 비해 발성이 비교적 정확하게 들렸고, 자신을 예쁘게 보이려고 억지로 노력하지 않아서 좋았다. 그리고 김성겸과 김지영의 감초연기도 정말 좋았고. 

그런데, 영화의 장점은 거기까지인 것 같다. 이 영화는 욕심이 지나쳤다. 많은 이야기들이 흘러나오지만, 영화 속에서 친절하게 설명해 주지 않고 있으며, 결말부분에서는 허겁지겁 마무리되는 느낌이 강하다. 그리고 영화의 가장 큰 재미와 감동이 되어야 할 정재영-수애의 멜로라인도 생각만큼 눈에 띄지 않으며, 유준상의 멜로라인은 재미있었는데, 허술한 구성으로 오히려 손해본 케이스다. 다큐멘타리에 기반을 두고 에피소드를 삽입해서 그런지 내용들이 전체적으로 튀고 편집이 거칠다는 느낌이 강했다. 그리고 이 영화의 유머는 정말 순박해서 헛웃음이 나온다. 설사 순박한 농촌총각들을 보여준다 하더라도 유머는 조금 더 고급스러울 필요가 있다.

이 영화를 보면서, 한국남자들이 결혼하기는 점점 힘들어지겠다는 생각을 했다. 지금이야 농촌총각이라고 생각할 뿐이지만, 나에게 벌어질 일일 수도 있다. 우리 아파트에도 '베트남 처녀들을 만나보세요.' 현수막이 걸려있는 것을 보면 가끔 두려운 생각이 든다. 나 자신도 가끔 누가 나같이 능력없고 별볼일 없는 사람이랑 결혼할까라고 한심한 기분이 드는데, 조심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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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쿄 타워
미나모토 타카시 감독, 마츠모토 준 외 출연 / KD미디어(케이디미디어) / 2006년 1월
평점 :
품절


불륜에는 자기합리화의 측면이 강하다. <도쿄 타워>를 보면서 느낀 점이었다. 자기의 삶을 포기하지 않으면서도, 섹스라는 쾌락 혹은 사랑이라는 감정을 누리고 싶다는 태도. 그러기 위해서 사람들은 흔히 자기합리화를 한다. 속이고 있는 배우자를 배려하는 것 같지만, 사실은 결국 자신이 상처받지 않기 위한 합리적인 자구책이다. 우리나라에서는 법적으로 비난받아 마땅한 행위이고-개인적으로 국가가 개인사에 간섭하는 것을 싫어하기 때문에 간통죄는 폐지되어야 마땅하다고 생각하다.-최소한 윤리적으로는 비난받아 마땅한 행위이지만, 그 사람들에게는 분명 소중한 행위일 것이다. 그러나 소중하고 진실된 감정이라는 이면에는 이기적이고 일그러진 모습들이 숨어있다. 혹은 배우자의 희생 혹은 배신감 같은 감정적으로 일그러진 모습. 애써 그것을 마주치기를 피하는 것이기도 하고. 한가지 더. 사회적, 경제적으로 일정수준의 생활이 보장되어야만 불륜도 가능한 것 같다. 여기까지 쓰고 생각해보니, 내가 본 불륜 영화/드라마 중에서 거의 기억나지도 않는 <우묵배미의 사랑>을 제외하고는 불륜이라는 행위는 중상류 층의 이상의 삶에서 벌어졌던 것 같다.

하지만, <도쿄 타워>는 이런 교훈을 거칠게 가르쳐 주는 반면교사의 영화였다. 내가 비뚤어진 사람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울컥하게 만드는 지점이 많았다. 영화를 보면서, 꽃미남 컴플렉스가 이렇게 심했나,  부르조아들의 풍요로운, 그렇지만 일그러진 삶에 대한 반감이 이렇게 심했나라는 질문을 영화 내내 던질 정도로 이 영화가 주는 정서적인 거부감은 컸다. 불륜영화의 핵심은 주인공들의 태도가 얼마나 공감이 가느냐라고 생각하는데, 이 영화는 정말 꽝이다. 여자주인공은 거식증에 걸린 듯한 몸에 보톡스 과잉에 찌든 얼굴로 어찌할 바를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일관하고, 남자주인공은 연기력이 부족한 꽃미남의 전형적인 태도에 어설픈 교급취향을 남발한다. 게다가 에쿠니 가오리의 원작에서 가져온 듯한 반짝반짝 빛나는 듯한 대사들이 결합하니 그야말로 우스움과 짜증 그 자체다. 맛없는 요리에 양념만 진하게 해논 격이라고 해야하나.  

게다가 영화는 별 내용도 없는 데 지루하기만 하니...더구나, 불륜에 필요하는 숨막히는 긴장감 따위는 찾아 볼 수가 없어서 더욱 지루하다. 여기 나오는 커플들은 세상의 시선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아니 둘이 있을 때는 세상의 시선을 두려워 하고, 여럿이 있을 때는 무관심하는 이상한 태도로 일관한다. 저렇게 불륜하면, 누구든지 다 알겠다 싶을 태도로 일관한다. 그래놓고서는 알려질가봐 전전긍긍한다. 당췌 이해가 가지 않는다.

유일하게 건진 것이 있다면, <바이브레이터>의 여주인공이라고 소개된 배우의 연기력이었다. 그나마 이 영화를 살렸다. 상대역 역시 연기력이 부족한 꽃미남이라서, 계속 덜컹거렸지만, 이 커플은 설정상으로도 중반 이후부터는 여자가 남자를 압도하고 있었기 때문에, 좋았다. 플라멩고 장면에서는 배우의 힘이 느껴지기도 했고...최소한 이쪽 커플은 위선적이긴 해도, 가식적이지는 않다. 이쪽 커플도 자기합리화의 측면이 강하지만, 이를 정직하게 보여주고 있어서, 그나마 마음에 들었다.

더 이상 써봐야 짜증스럽게 보일 것 같아서, 이 쯤에서 그만 끄적거리련다. 절대 권하고 싶지 않은 영화다. 차라리 <냉정과 열정사이>가 몇백배 낫다. 정말 궁금한 것. 왜 이 영화는 <도쿄 타워>에서 시작해서 엉뚱한 곳에서 끝날까? 아니 <도쿄 타워>가 제목인 이유는 무엇인가?

추신) 여주인공이 내가 그토록 좋아했던 <실락원>의 여주인공이라는 사실에 다시 한 번 절망했다. 세월의 무게를 거스르려다가 오히려 잘못된 케이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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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b 2006-05-22 11: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철학적이고 사회적인 관점에서 심각히 보신 것 같군요... 소설이나 사회과학서적과 달리 영화의 8할 정도는 '스타일' 아닐까요? 스타일면에서 꽤 스타일리쉬한 괜찮은 영화입니다. 키미코 역의 테라지마 시노부 연기엔 절대 동감입니다.

상복의랑데뷰 2006-05-22 12: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심각하게 본건 아닌데, 제 리뷰가 좀 심각했나봅니다. 거부감이 좀 심했어요 ^^
 
에로스 (dts 2disc)
왕가위 외 감독, 공리 외 출연 / 스타맥스 / 2006년 2월
평점 :
품절


편의 옴니버스인데, 나머지 두 편은 소더버그 편은 거의 못봤기 때문에 좋다 나쁘다 말할 것이 없다. 하지만, 왕가위의 단편만으로 충분히 제 값을 한다. <화양연화> 이후로 포마드 기름을 머리에 바른 2:8 가르마의 정장차림의 신사가 왕가위의 페르소나가 되는 경향이 있는데, 이번의 페르소나는 재단사이다. 그는 견습시절 고급 창녀 후아의 집에 심부름을 갔다가 후아의 노골적인 손길에 아찔한 감흥을 느끼고, 이후 그녀의 몰락을 바라보며, 그녀에 대한 애틋한 사랑을 간직한다. 그러나 후아는 몰락하고, 병든 그녀 곁을 맴도는 재단사. 그리고 재단사 앞에 나타난 그녀의 손...

이 영화는 수줍은 듯이 공리를 쳐다본다. 특히 욕망의 대상인 공리를 보여줌에 있어서 카메라는 노골적으로 그녀의 성적매력을 훔쳐보기에 바쁘다. 화면에서 카메라는 공리의 얼굴을 보여주지 않고 육체만 보여주거나, 거울을 통해 보여준다. 또는 시선의 중심에 그녀가 놓여있지 못하고 변죽만 울린다. 그러나 그 순간에도 화면을 지배하는 것은 공리의 에로스적인 이미지이다. 그 매혹의 순간을 카메라는 계속해서 따라간다. 이는 재단사-카메라-관객이 그녀의 매력에 압도당한 나머지 그녀를 똑바로 쳐다보지 못하거나, 흥분을 자아내는 부위-공리의 하얀 손과 육감적인 다리를-에 집착하는 듯한 느낌을 준다. 끝가지 몰락하여 여관 꼭대기층에 살며 부두에 호객행위를 해야만 하는 절박하고도 순간에도 그녀를 훔쳐보는 나의 눈 속에는 비를 맞은 그녀의 다리, 그리고 병들어 누워있던 순간에도 하얗게 빛나던 그 기다란 팔이 더 들어오는 것은 왜일까?

어떻게 보면 패티시물을 보는 것과 같았다. 재단사는 과연 그녀를 사랑했을까? 그녀의 손, 그리고 손이 주는 아찔한 촉감을 사랑했던 것이 아니었을까? 그리고 그도 손으로 그녀를 사랑했던 것이 아니었을까? 그랬기에 손으로 그녀를 위한 옷을 만들었던 것일거고. 그리고 줄자가 없다는 핑계로 자신의 손을 그녀에게 대었던 것 같다. 어쩌면 후아도 그것을 알았기에 마지막으로 '손을 내민'게 아닐까. 

이들의 행위는 <화양연화>보다 더 에로틱하지만, 더 애절하다. 후반부에 재단사에게 후아가 손을 내밀며 읊는 대사, 그리고 재단사가 입에 키스를 하려고 할 때 손으로 막는 후아의 동작하나하나가 가슴 아팠다. 왕가위의 탐미적인 감각은 점점 절정을 향해 달려가는 것 같다. 노출이 없이도 에로틱한 화면을 연이어 보여주는 그의 연출력에 경의를 표하고 싶다. <원초적 본능>이후로 이렇게 에로틱한 느낌은 처음이었다. 내가 하얀 손과 팔을 좋아했다면 그야말로 금상첨화였을텐데, 아쉽게도 나는 손과 팔에는 관심이 없어서...^^

그리고, 공리의 매력과 연기력에 다시 한 번 빠져들 수 없었다. 초반의 압도적인 매력에서 후반부의 동정심을 자아내는 병자의 모습으로 바뀌는 과정은 에로스 그 자체였다. 아무리 왕가위가 탐미적인 영상을 찍어댄다고 하더라도 에로스를 물신화한 공리의 매력과 연기력이 없었다면 이 영화의 매력은 반감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빼빼마른 다른 중국여배우들과는 달리 위풍당당한 모습을 보여줘서 좋았고...입소문처럼 번지는 <게이샤의 추억>에서의 공리의 연기에 호기심이 생기게 되었다. 장첸도 언젠가는 양조위를 대체할 수 있을 것 같다는 가능성을 보여주었고. 양조위는 너무 비슷한 이미지로 연기가 중첩된다는 느낌이 강하다.

나머지 두 편은 평이 별로 좋지 않아서, 이 두 편을 위해 다시 볼 일은 없을 것 같지만, 공리의 매력과 왕가위의 영상만으로도 다시 한 번 보고 싶어지는 그런 옴니버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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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몬 Lemon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0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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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부터 꾸준하게 소개된, 그리고 내가 꾸준하게 읽고 있는 작가가 바로 히가시노 게이고이다. 아는 분이 관여한다는 이유로 읽게된 <게임의 이름은 유괴>부터 <호숫가 살인 사건>, 아직까지 최고라고 생각하는 <백야행>까지. 감히 작년에 발견한 최대의 수확 중에 하나라고 말할 수 있는 작가이고, 신작이 나오면 늘 기대하게 되는 작가이기도 하다. <용의자 X의 헌신>으로 나오키 상을 수상하였고, <백야행>이 인기리에 방영되고 있기 때문에 더 좋은 작품들이 번역되어 나올 것으로 기대되는 작가이기도 하다.

약간 낯간지럽게 찬사를 늘어놓는 이유는 짐작하겠지만, 이 작품을 읽으면서 처음으로 아쉬움을 느꼈기 때문이다. 이 작품은 구성도 좋고, 게이고 특유의 세태를 포착하는 차분하지만 예리한 묘사, 흥미진진한 스토리 모두 괜찮았다. 그러나, 거기까지다. 내가 기대하던 '그 이상'이 없는 범작이 되고 말았다.

내가 게이고를 좋아하는 이유는 우선 한 번 읽고 마는 전형적인 소설을 쓰는 듯 하면서도 '그 이상'의 즐거움을 주었기 때문이다. 게이고는 독자와의 게임을 즐긴다. 제목부터 많은 정보를 누출하고 있으며, 자못 도전적이기까지 하다. <게임의 이름은 유괴>에서 책을 읽지 않고도 우리는 이 이야기가 유괴에 관한 내용이라는 것을 안다. <호숫가 살인 사건>의 주된 내용은 호숫가에서 일어난 살인 사건이다. 그러나 작가의 도전적인 태도는 작가의 자신감에서 비롯된 것이다. 여지껏 읽은 그의 소설은 일단 잡게 되면 손을 놓게 되지 못하고 끝까지 읽게 되는 저력이 있다. 그 저력은 게이고 특유의 묘사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 이상의 무언가'가 있다. 그것이 내용이던, 형식이던 트릭이던 그 자체는 중요하지 않다. 초반부에 게이고의 소설을 읽으면서 '이 정도에서 매듭을 짓겠지'라고 한다면, 얄밉게도 게이고는 나의 바람을 알고 있었다는 듯이 한 발자욱을 더 디딘다. <게임의 이름은 유괴>에서 중반 이후에 벌어지는 사건들, <호숫가 살인 사건>에서의 결말부의 비틀림, <백야행>에서의 외부묘사를 끝까지 밀어붙이는 힘 등을 예로 들 수 있겠다. 그러나 <레몬>에서는 그런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 메디컬 스릴러에 편견이 있는 나로써는, 게이고가 의학적인 지식을 과다하게 나열하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이 있었는데, 오히려 그런 면에서는 담백했다. 그러나 트릭의 전형성이 과도한 편이긴 했지만, 예측했던 결말에서 조금도 빗나가지 않을 줄은 몰랐다. 읽으면서 비슷한 주제를 다룬 영화 한 편을 떠올렸었고, 결말도 비슷할 거라 예측했는데, 정확해서 오히려 아쉬웠다. 물론 10여년 전에 쓰여진 소설이고, 내용의 무게상 그 이상을 다루기 어렵다는 점은 인정하지만, 아쉬운 마음을 감출 수가 없다.

하지만 정말 아쉬운 부분은 따로 있다. 게이고는 상당히 가볍게 주제를 다루는 척 하지만, 그 주제가 결고 가벼운 울림으로 끝나지 않는다. <호숫가 살인 사건>에서 드러난 일본가정의 비틀린 교육열을 예로 들어보자. 직접적인 언급은 초반부에 등장하는 학부모의 대화에서밖에 등장하지 않지만, 과도한 교육열이 주는 무거운 분위기는 호숫가에서 일어나는 일련의 사건들에 대해 정서적인 설득력을 부여하고 있다. <레몬>에도 그런 부분이 있다. 이 부분의 묘사가 조금 더 깊었다던가 감정적인 호소력을 발휘했더라면, 후반부의 모범생같은 결말이 조금은 용서가 되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게이고는 특유의 가벼운 화법으로 그냥 지나쳐 버렸다. 못내 아쉬운 부분이다. 

위에서 언급한 내용이 특히 아쉬운 것은 소재가 주는 윤리적인 차원의 문제를 뛰어넘어 어찌보면 인간에 대한 근원적인 의문, 혹은 젊음에 대한 인간의 욕망을 집어낼 수 있음직한 부분이었는데, 그러지 못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호숫가 살인 사건>에서의 초반부의 대화나 <백야행>에서의 료지의 독백을 이끌어냈던 게이고의 필력이라면 더 넓게 파문을 일으킬 수 있었을텐데 하는 마음이 자꾸 든다.

지금까지 아쉬움을 진하게 언급했지만, 게이고나 혹은 이 작품이 태작이라거나 문제가 있다는 것은 아니다. 또한 게이고가 견지하고 있는 엔터테인먼트 문학관에 대해서 별 거부감이 없는 나로써는 그다지 반감을 가질만한 흠은 없다. 읽는 내내 즐겁게 읽었다. 게이고의 장점인 세태묘사는 군데군데 살아있으며-주인공이 도시락을 놓고 공원에 앉아있는 부분의 묘사가 가장 눈에 띄었다.-다른 작품과는 달리 형식적인 특이성도 눈에 띤다. 너무도 뻔한 이야기를 가지고 일정 수준 이상의 긴장감을 유도해내는 구성도 인정해주고 싶고. 다만 이 작품을 다른 작가가 썼다면 사심없이 좋아했을 텐데, 더 좋은 맛을 본 사람으로써 아쉬움을 토하게 되는 것이다. 다른 작품에서는 그렇지 않기를 바란다.

추신) 번역은 좋았다는 상투적인 이야기는 하면 우습고 안하면 어색하지만, 번역 문제로 말이 많은 것이 사실이라 굳이 덧붙인다. 솔직이 나는 권일영 선생님의 번역을 선호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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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만두 2006-02-26 16: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게 이 작가의 작품을 읽으면서 생기는 문제더군요,

상복의랑데뷰 2006-02-26 17: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음, 아무래도 이 작품이 좀 두드러지는 측면이 있는 것 같습니다.

하이드 2006-09-15 13: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히가시노 게이고...는 왜이렇게 정이 안가는걸까요.. 라고 말하지만. 매번 책 읽을때는 완전 몰입해서 재미있게 읽으니, 히가시노 게이고.가 나같은 독자 보면 억울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 '레몬' 어제 다 읽고, 슬 리뷰 쓸까 들어와 구경하고 있어용.

상복의랑데뷰 2006-09-19 12: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엥, 왜 하이드님의 덧글이 계속 안보였을까용. 알라딘 서재도 이상하네요. 늦게 답변드려 죄송합니다. 일본 작가 중에서는 손꼽히는 페이지 터너인 것 같은데, 하이드님이 좋아하실 만한 어떤 임펙트가 부족해 보이는 작가인 것 같습니다. 고만고만하게 잘하는 작가라고 할까요. '레몬'은 어떠셨는지 하이드님의 멋진 리뷰가 기대되네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