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만적인 앨리스씨
황정은 지음 / 문학동네 / 201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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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삶은 그저 바라보는 것조차 힘겨울 때가 있다. 누군가의 이야기는 그저 들어주는 것조차 고달플 때가 있다. 어떤 사람들의 존재는 그 자체로 고개를 돌리게 할 수 있다.

그래서 종종 들어주고 바라보았다는 것만으로도 윤리적일 수 있다.

웃기시네.
그렇게 생각하는 어른들은 꺼져라.

나무 밑에 붙들려 나무 밖으로 한 걸음도 나올 수 없는 앨리시어의 뼈 아픈 일갈이다.

 
 
 
모든 빛깔들의 밤
김인숙 지음 / 문학동네 / 201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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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때 슬픔은 전염된다고 믿었다. 한때의 믿음이었다.
한때 슬픔이 힘이 되었던 시절이 있었다. 그 시절은 지나갔다. 그래서 우리는 이 비극을 슬퍼하지도 못하고, 이 비극을 다른 어떤 힘으로 전환하지도 못하고 그저 지나가길 기다리고만 있다. 그러나 어떤 슬픔은 좀처럼 지나가지 않고 채 치워야지 못한 골방에 고여 누군가를 벼랑 앞에 서게 한다. 왜 늘 약한 이들만이 죄책감을 갖게 될까??
2014년은 어떤 이들에게는 슬픔조차 허용되지 않았던 시절로 기억해야 할 것이다.

 
 
hanicare 2015-01-02 13:05   댓글달기 | URL
슬퍼하는 것 조차 죄스러운 한 해였죠.
과거형으로 끝날 일도 아니고
일부 인간들만 문제가 아니고
과반 이상의 문제가 깊이 내재된 상태로 뭐 하나 해결되는 것 없이 한 해가 갔네요.

이상해요.갈수록 새해라는 것이 이물스럽게 다가오니....
소시민적인 안녕을 비는 것도 작년부터는 입이 떨어지지 않더군요.

그래도 모처럼 인기척 내주셔서 반갑게 읽고 갑니다.
어찌 지내셨는지요.

선인장 2015-01-03 17:02   URL
읽는 것도 제대로 못 하지만 쓰는 것은 더 못하는 나날을 보내고 있는지라... 북플이라는 게 간단한 메모는 가능할 것 같아서, 기록한 것인데. 이렇게 완성도 안 된 글을 모니터 화면으로 보는 것은 참 부끄러운 일이네요... 그래도 오랫만에 님의 안부가 반가워, 부끄러운 마음이 은근슬쩍 사라집니다.

1월 1일, 안부를 묻는 전화에 대고 이렇게 응대했습니다.
어제는 어제고, 오늘은 오늘이라고. 그러니 굳이 의미 부여하지 말고 살자고.
그런 나이를, 그런 시절을 보내고 있습니다. 저는....
 
가라앉은 자와 구조된 자 - 아우슈비츠 생존 작가 프리모 레비가 인생 최후에 남긴 유서
프리모 레비 지음, 이소영 옮김 / 돌베개 / 201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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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벌써 잊어가고 있지만, 지금 세상은 아우슈비츠와 그리 멀지 않다.
기억하지 않으면 아무 것도 할 수 없다.


 
 
 

 

 

 

소금창고

 

 

이문재

염전이 있던 곳
나는 마흔 살
늦가을 평상에 앉아
바다로 가는 길의 끝에다
지그시 힘을 준다 시린 바람이
옛날 노래가 적힌 악보를 넘기고 있다
바다로 가는 길 따라가던 갈대 마른 꽃들
역광을 받아 한 번 더 피어 있다
눈부시다
소금창고가 있던 곳
오후 세시의 햇빛이 갯벌 위에
수은처럼 굴러다닌다
북북서진하는 기러기 떼를 세어보는데
젖은 눈에서 눈물 떨어진다
염전이 있던 곳
나는 마흔 살
옛날은 가는 게 아니고
이렇게 자꾸 오는 것이었다

 

 

 

 

 

최승자 시인은 "이렇게 살 수도 없고 이렇게 죽을 수도 없을 때 서른 살은 온다." 고 말했다. 아직 서른이 되기 전 우리들은 청승맞지만 낭창한 목소리로 이 시를 외우고 다녔을 것이다. 어쩌면 서른이란, 서른이 되기 전에만 그 무게를 잔뜩 느끼는 그런 나이. 소금자루를 등에 진 당나귀처럼 나는 스물 여덟에, 혹은 스물 아홉에 개울물에 빠져, 그 나이의 무게에서 벗어나 삼십대를 가뿐하게 살아갈 수 있었던 듯 싶다. 살 수도 없노라, 죽을 수도 없노라, 이십 대의 마지막에 온갖 청승을 다 떤 덕분에.

 

 

 

그러나 마흔은, 지레 겁 먹는 것도 부족해 보일까 두려워서, 애써 덤덤하게 맞이해야 하는 또 다른 한 시절. 앞으로 나아가지도, 다가오는 옛것들을 뿌리치지도 못해, 그저 붙들린 시절. 내 어깨에 짊어진 것들이 솜덩이인 줄 모르고 개울물에서 다시 넘어졌다가, 다시는 일어서지 못할지도 모르는 시절. 내 속에서 나온 말들에 혼자서 상처 받아서 어쩔 줄을 몰라 하면서도, 누구에게 그 상처를 보여주지도 못하는, 이제는 어른이 되어야 한다는 다짐도 부끄러운 나이. 하루 종일 눈가가 마르지 않아, 누구와도 눈을 마주치지 못하는 이상 고온의 봄날.

 

 

 

 



 
 
hanicare 2013-06-12 18:01   댓글달기 | URL
옛날은 가버린 게 아니고 지층처럼 속에 깔려있다가
지진이나 화산분출 때처럼 한번씩 울컥 치솟든지
속에 고여 있다가 잊으려하면 슬며시 올라오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나저나 흐린 날에 옛날 품고다녔던 시인의 이름과 또 올리신 시를 읽노라니 마음이 하염없이 쓸쓸합니다.
이성복의 오래된 시들도 문득 맴돌구요.

별고 없으신지요.

선인장 2013-06-13 12:26   URL
아무 일이 일어나지 않아서 오히려 무슨 일이든 생겨야 할 것 같은 그런 시절을 보내고 있습니다.
이 곳은... 올 때마다 달라지는 옛동네를 보는 기분인데, 님의 댓글을 보니, 아직은 사라지지 않은 익숙한 풍경 하나 남아 있구나, 와락 반가웠습니다.

저는 늘 그렇게, 별고 없이 지내고 있습니다. 님은 어떤 여름을 보내고 있는지...

[그장소] 2015-01-01 19:46   댓글달기 | URL
2015년 1월 1 일 입니다.
어쩌다 들러 두분의 지지난 여름을 살포시
엿보고 갑니다. 모든 시간이 혼재하는 곳.
그런 곳이기도 합니다..얼마나 먼 과거의 이야기 부터...당신들의 지난한 이야기까지, 이 곳을 떠 돌 고 있을것 인가요....또 한 해. 맞이 이렇다 할것없이
무난 하네..그리 여미시고요..시간들 나시면 소소한 얘기나 들려주러 와 주십시오. 그저 웃지요 ^-^
 

새해 첫 날 지난 한 해 거의 쓰지 않았던 노트북의 전원을 넣었다. 작년 일 월, 책을 읽고 적어놓았던 메모들에서 나는 한치도 달라져있지 않았다. 그러니까 작년 1월의 어느 날처럼, 일 년이 지나고 또 어느 날, 같은 결심을 주절대고 있었던 것이다. 민망했고, 안쓰러웠지만, 아직은 지치지 않았으니, 그렇게 주저 앉고도 다시 일어났다고, 스스로를 위로한다. 그러고 보니, 또 괜찮은 것도 같다. 혹시, 괜찮을 것도 같다.

 

 

 

  일 월의 첫 날, 지난 가을이 끝날 때부터 읽기 시작했던 이혜경의 소설을 마저 읽었다. 갑자기 몰려든 여러 가지 일들 때문에 두어 달이 넘는 시간 동안 이 책을 가방에 넣고 다니면서, 늘 어깨가 아팠다. 대학을 졸업하고 비정규직 일자리에 만족해 하던 그 시절, 나는 이 작가의 소설 때문에 백 몇 십만원의 생계비를 포기하고, 빚을 내어 다시 학교에 갔다.

그리고 너무나 오랫만에 출간된 소설을 새해의 첫 날 천천히 읽어냈다. 내게 있는 그 어떤 무엇도 나를 풍요롭게 할 수 없어 궁핍한 삶을 살아가야 하는 사람에게, 사랑은 그 궁핍을 보여주는 작은 무늬일 뿐 어떤 희망도 될 수 없다는. 내 사랑이 서글픈 내 생에 대한 위안이 되기는커녕, 너를 향한 연민도 제대로 표현할 수 없는 빈약한 감정이라는. 그래서 우리는 몸을 포개도 여전히 춥고, 한 침대에 누워도 여전히 다른 공간으로 흘러갈 수밖에 없다는.  더 이상 아프지도 않은 깨달음. 확인하고 싶지 않았던 사실. 몰래 숨기고 싶었던 끄덕임과 동의.

 

그러나 다행하게도 나는 이혜경의 소설을 읽고 난 후 이 책을 읽었다. 지난 여름 사 두었다가 오랫동안 책장 한 구석에 밀려 있던 책. 이 책 소개에는 "사랑에 관한" "가장 아름다운"과 같은 수사들이 붙여 있었다.

 

 그리고 작가 김연수는 "별 다섯 개짜리 도입부"라는 제목을 붙여 이 책에 담긴 한 단편의 도입부를 소개했었다.

 

아내는 귀가 들리지 않는다. 한번은 눈이 내릴 때 소리가 들리냐고 묻기에 나는 그렇다고 거짓말을 했다. 오늘은 우리가 결혼한 지 12년째 되는 날. 그리고 나는 그녀를 두고 떠나기로 한다.

                                - 사이먼 밴 부이, ‘눈이 내리고, 사라지네’

 

아마도 이 문장에 홀려 나는 지난 여름 이 책을 사 두었던 것 같다. 그리고 이 책에는 저 문장만큼이나 여운을 주는, 오래도록 그 상황과 그 마음과 그 사람들에 대해 생각하게 하는 문장들이 퍽이나 많다. 짧은 소설들을 오래오래 마음에 품고, 관계에 대한 나의 냉정함을, 타인에 대한 나의 무관심을, 사랑에 대한 나의 무정함을, 이겨내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

 

이혜경의 소설과 사이먼 밴 부이의 소설은 아무런 연관성도 없지만, 이 두 소설을 연달아 읽게 되어서 참 다행이다. 이 나이에 나는 또 그저 소설을 읽고 몇 년 전에도 한 번은 깨달았을 평범한 진실들을 다시 한번 각인하게 된다.

 

 

다음엔 한강과 이스마엘 카다레.

 

 

 

 

 

 

 

 

 

 

 

 

 

 

 

언제나 새해에는 그렇듯이 지난 겨울 밀려 있었던 책들을 겨울방학 과제를 해내듯 읽어가면서, 나는 몇 가지를 새로운 사실처럼 깨닫고, 몇 가지를 처음 하는 다짐처럼 되뇌일 것이다. 그리고 또 얼마의 시간이 지난 뒤에 이 모든 일들이 지난 시절 내내 해왔던, 지치지도 않는 습관임을 깨달으며 다시 민망해 할 터이다. 다만 부디 이 시간이 조금쯤은 길어지기를. 잊혀지지 않을 만큼만 오래 가기를. 그리고 그 어느 날의 깨달음과 지금의 깨달음이 아직 조금쯤은 다를 수 있기를. 일월이 가기 전에 내가 바랄 수 있는 일들이란 고작 이런 것일 수밖에.

 

 

 

 



 
 
다락방 2013-01-16 13:38   댓글달기 | URL
[너 없는 그자리]를 지금 이 글 읽고서야, 아 이 책 읽어본다고 생각하고 여태 사지도 않았네 싶어 부랴부랴 서둘러 장바구니에 담습니다. '이스마엘 카다레'의 책을 읽고 난 후의 선인장님 글이 궁금해요. 전 사두었는데 아직 읽지 못하고 있거든요. 자꾸만 다른 책들에게 우선권을 빼앗겨요.

오랜만의 글, 좋으네요, 선인장님.

선인장 2013-01-16 16:18   URL
이스마엘 카다레는 출근 길 전철에서 시작했습니다. 발칸 반도의 역사에 대해 너무 무지한지라, 책장 넘어가는 속도가 더딥니다. 그래도 그의 소설을 읽는 시간은 늘 근사한 경험입니다. 2000년 한국에서 보았던 그의 모습도, 친히 받은 사인도, 근사했더랬습니다. 영원히 살 줄 알았던 좁은 내 방에 딱풀로 카다레의 사인을 붙여버렸던 만행만 기억나지 않는다면, 그의 소설을 읽는 시간은 언제나 좋은 시간입니다.

저는 늘 너무 게으른 서재인입니다.
올해는 더 종종 뵙겠습니다.

hanicare 2013-01-16 18:02   댓글달기 | URL
오랫만에 원년(?)멤버의 글을 대하니 '살아있으셨군요.'라는 말이 절로 흘러나오네요.피난가서 옛마을 사람을 만난 듯한.

이 우여곡절을 견디며 아직 우리는 살고 있군요.사막에서요.

선인장 2013-01-16 21:50   URL
지난 해에는 정말 많은 일들이 있었죠? 연말에는 누구나 그렇했겠지만 정신적 허탈감을 극복하느라 좀 애를 먹었지만, 여전히 살아서 또 새해를 맞았어요. ㅋㅋ 알라딘 어느 구석에서 다들 그렇게 살고 있겠지요? 이렇게 드문드문이라고 글을 올리니, 님의 안부도 들을 수 있네요... 반가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