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n Children and Death (Paperback, Reprint) - How Children and Their Parents Can and Do Cope With Death
Kubler-Ross, Elisabeth / Scribner / 199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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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이와 죽음>

  • 이 책은 On Children and Death를 번역한 것일 터인데 저본에 대한 설명을 책에서 찾을 수 없고, 책 자체가 알라딘에 등록도 안 되어 있음. 이에 임시로 On Children and Death에 책갈피를 남김.  





인간이란, 우리가 `우주`라고 부르는 전체의 일부분이며, 시간적 공간적으로 한정된 삶을 사는 존재이다. 인간은 그 자신의 생각과 느낌을 다른 사람과 분리된 것으로써 경험하는데, 그것은 일종의 시각적 망상...이다. 이 망상은 일종의 감옥...이며, 그것은 우리로 하여금 독단적인 결정을 내리게 하거나, 가까운 친지 몇 사람만을 사랑하도록 만든다. 우리는 살아있는 모든 생물과 아름다운 자연 전체를 포용하기까지 사랑의 폭을 확대함으로써 이 감옥으로부터 우리 스스로를 해방시키도록 노력하지 않으면 안된다. (ii)

죽음을 두려워하고 맞서 싸우기보다 알려고 노력하는 사람들은 인생의 으승이 될 수 있다. 죽음에 대해 어른들보다 훨씬 많이 아는 어린이들이 많다. 어른들은 이러한 어린이들의 말을 듣고 어깨를 으쓱해버리거나, 아이들은 죽음을 이해하지 못한다고 생각하거나, 또는 그들의 생각을 거부해버릴른지 모른다. 그러나 십년후 그들 자신이 "최후의 적"과 마주할 때 이러한 가르침을 기억하게 될지도 모른다. 그러면 작은 어린이들이야말로 훌륭한 선생님들이고 자신들은 풋내기 학생들임을 깨닫게 될 것이다. (ix)

얼마나 더 지나야 의료진들은 진정제 자체가 암이나 마찬가지로 사람을 해치는 큰 요인이라는 것을 깨닫게 될 것인가? 이해심을 갖고 상대방의 이야기를 귀담아 들어줌으로써 안정제를 대신할 수 있고, 건전한 가정을 가진 사람이 환자의 고통이나 분노를 표현하도록 돕고, 치유의 과정이 진행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 줌으로써 그러한 비극을 예방할 수 있다는 것을 배우는 데 얼마를 더 기다려야 하는가? (37)

이런 집단들은 서로의 고통뿐 아니라 희망도 같이 나눈다. 자기 아이가 임박한 죽음에 대해 내적자각을 하고 있었던 징후를 발견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들은 이와 비슷한 `예감`을 가졌던 다른 사람들과 특수한 면을 함께 나눔으로써 위안을 얻으며, 인간의 영적인 본성을 더 잘 이해할 수 있게 된다. 어린이의 즉흥적인 그림, 창작적인 미술작품, 시, 처음에는 `별 것 아닌` 것 같은 아이들의 말 등 그들의 숨겨진 메시지의 뜻을 어른들은 그들이 죽은 다음에야 깨닫게 된다. 어떤 아버지는 아이가 변사 당한 후에 아버지날 카드를 발견하기도 하고, 부엌 테이블에서 "엄마, 사랑해요"라는 쪽지를 발견하기도 한다. 어떤 아이들은 무의식적인 그림의 주제나 색깔의 선택에서 임박한 죽음의 내적 자각을 나타내기도 한다. (48)

"깊은 계곡에 폭풍우가 치지 못하게 하였다면, 그 아름다운 계곡은 볼 수 없었으리." (66)

"제게는 엄마가 대니가 나으리라는 희망을 갖게하고는 곧 그것을 산산히 부수어버린 것처럼 보였습니다. 왜 대니가 괜찮다고 말했는지를 저는 결코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엄마에게 거기에 대해 한번 물어보였는데, 엄마에게는 대니가 괜찮은 것이었다고 말했습니다. 더이상 아프지도 않고 고통도 안받으니 잘 된 것이라고요. 그러나 10살이었던 나에게는, 죽는다는 것은 결코 잘된 일이 아니었습니다. (101)

"저는 생각했어요, 내가 계속 병원에 있었더라면 어땠을까? 이 손녀를 결코 볼수도 없었을 것이고, 안아주지도, 목소리를 듣지도 못했을 것입니다. 나의 몸은 전혀 움직이지 못했지만, 머리를 약간 돌려서 건강과 행복의 덩어리인 아기가 내 팔에 누워있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갑자기 아기는 자기의 작은 팔롸 손을 들고 손가락을 쳐다보았어요. 아기는 기쁜 얼굴로 신기하다는듯이 작은 손가락들을 모두 움직여보았어요. 나는 속으로, `얼마나 큰 축복인가! 나는 이 모든 것들을 55년동안 가졌었다. 이제 그것을 손녀에게 물려줄 수 있다!"
모든 사람들이 갖지 못한 것 때문에 운명을 저주하는 대신에 가진 것들을 축복하려는 작은 노력을 한다면 이 세상은 얼마나 달라질 것인가? (122)

그들은 재판제도가 너무 관대하고, 느리며, 부당하고, 편견에 차있고, 희생자의 가족에게 너무나 동정심이 없는 데에 화가 난다. 그들은 "서부활극"에서 나오는 얘기를 기억한다. 거기에서는 마을 사람들이 자신들의 손으로 판결을 내리고, 범인에게 체벌을 주던 이야기들을 기억해내며 그들처럼 어떻게 이 살인자를 벌줄 수 없을까하고 상상한다. 그러나 그들은 의식적, 무의식적으로 생이 불공평하다고 느꼈기 때문에 마침내 살인자가 되었을 범인들도 이와 비슷한 반응을 한다는 것을 생각지 못한다. 이 단계에서 그들은 모든 사람들이 테레사 수녀가 될 수 있는 능력도 가지고 있는 반면, 히틀러가 될 잠재력도 갖고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한다. (136)

거의 마지막이 오던 어느날 린지는 칠판을 마구 칠하고는 암이 거기 있다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나는 그것을 못하게 하려고 했습니다. 그것은 부정적인 영향을 준다고 느꼈기 때문이었습니다. 하지만 몇일 수에 병원의 검사를 통하여 린지의 말이 옳았다는 것이 밝혀졌습니다. 나는 어이가 없어 말도 할 수 없었습니다. 나는 적어도 의식적으로는 린지가 죽을지도 모른다는 것을 결코 믿지 않았습니다. 린지는 1년 전에 아주 쉽게 죽을 수도 있었지만, 내가 아직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음을 그애는 알고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를 살리기 위해 내 모든 힘을 다하고 있는 동안, 그는 나로 하여금 성장하고 이해하도록 서서히 돕고 있었습니다. 내가 그에게 `OK`라고 말할 수밖에 없는 날이 올 때까지, 그냥 `떠나 버리지` 않았습니다. 런지가 죽고 다시 태어난 그날, 나도 나의 죽음과 다시 태어남을 경험하였습니다. (153)

이제 아는 사람이 사랑하는 사람을 잃었다는 소식을 들을 때마다 나는 더 이상 전화로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지 알려주세요.`라는 공허한 제의는 하지 않는다. 이제는 그 사람의 필요에 꼭 맞는 한 가지 특별한 일을 생각하려고 한다. 그집의 가자용 차를 닦는다든지, 개를 개보관소에 데려다 준다든지, 장례식동안 집을 봐준다든지 하는 것들이다. 그리고 만일 그 사람이 `내가 그것이 필요하다는 것을 어떻게 알았어요`라고 물으면 `어떤 사람이 언젠가 내 신을 닦아 주었기 때문이지요`라고 대답한다. (190)

요즘에는 `전혀 사랑하지 못했던 것보다는 사랑했다가 잃는 것이 더 낫다`는 생각이 든다. 나는 이 말이 여자와 남자 사이의 사랑을 두고 하는 말이라고 생각해 왔는데 어린 아들의 죽음에 대한 말로 더 맞는다는 생각이 든다. 무척 괴롭기는 하지만 6살 반의 크리스챤이 우리에게 준 것은 그만한 가치가 있다.
나는 아직도 어린애 없이 사는 사람들은 평생동안 무슨 재미로 사는지 궁금하다. 어떤 이들은 개나 애완동물을 한 두 마리 키우면서 이런 것에 몰두하기도 하지만, 이러한 것들은 오랫동안 사람을 만족시키거나 붙잡지 못하지 않는가.
또한 외롭거나 혼자 살거나 어린애가 없는 사람들은 어떤지도 알고 싶다. 이러한 일을 당한 사람은 우리만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기 때문에 그 사람들도 이런 비극을 겪었던 것인지 어쩐지 궁금하다. (212)

나의 오랜 에스키모 친구처럼, 본인이 미리 장례식을 준비한 것이라면 더욱 특별한 의미가 있을 것이다. 그 친구는 자신의 임종이 가까왔음을 알고서, 자기가 제일 좋아하는 음식을 준비하고 멀리 떨어져 사는 옛 친구들을 모두 불렀다. 그리고 제일 좋아하는 옷을 입고 친구들을 위해 작은 선물까지 준비해 놓고서 자기 육체를 떠났다. 그럴 때 장례식은 진정한 축하의 장이 될 수 있는 것이다. 장례식 참여자들은 죽은자가 자신의 마지막 여행에 대한 준비를 하였고 자기가 마련한 잔치에 친지들이 참석할 것을 예상하고 준비하였음을 안다. (242)

전에도 말했듯이 갑작스러운 죽음에 직면했을 때에 그 육체를 눈으로 확인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손상된 부위는 헝겊 등으로 가리는 것이 좋으며, 도움을 줄 수 있는 가까운 친구와 함께 가야 한다. 이것을 피하는 것은 일시적으로 고통을 덮어놓을 뿐이며, 뒤늦게 불필요하고 견디기 어려운 슬픔을 겪게 만든다.
소위 문명사회에서는 죽은 사람을 장례식 때까지 집에 둔다는 것은 여러 면으로 힘든 일이다. 그러나 사랑하는 사람이 죽음에 직면하였을 때 그렇게 하는 것이 보다 더 치료적인 방법이다. 죽은 아이를 시체 공시소에 바로 집어넣었다가 냉동실에서 꺼내어 죽은 아이의 시체를 보게하거나 확인하게 하는 등 차겁고 비인간적인 환경은 유족에게 위로나 도움을 주지못한다. (243)

나는 유럽에서 용감하게 암과 싸우고 있는, 죽음 직전의 젊은이를 만났다. 그는 죽기전 자신의 장례식에의 초대장을 평소의 독립적인 자기성품에 맞게 준비했다. (자기사진 뒷면에 다음과 같이 썼다.)

나는 긴 여행을 떠납니다.
와서 작별인사를 해주십시요.
(그 뒤에는 날짜와 장례식 장소가 있었다.) (246)

하루의 일과가 다음날 아침이면 다시 시작될 것이다. 무덤은 막다른 길이 아니라 뚫려진 길이다. 그 길은 석양에 닫혔다가 동 틀 때에 열린다. 죽음을 올바로 이해하자. 죽음을 슬퍼하지 말자. 앞서 말했듯이 죽음은 멸망과 올가미가 아니므로 열려진 무덤의 어두움 속에서 모든 것을 잃는다고 생각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거기에서는 모든 것이 재발견된다. 무덤은 회복의 장소이다. 거기에서 영혼은 그 충만함을 회복하며 육체와 욕망으로부터, 그리고 모든 부담과 죽음으로부터 자유로와진다. 죽음은 가장 큰 해방이다. 최선을 다 해 산 사람은 더욱 높은 곳으로 오르고, 지상에서 도덕적인 삶을 산 사람은 더욱 아름다워지고, 아름다웠던 사람은 숭고해진다. (2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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