먼 북으로 가는 좁은 길
리처드 플래너건 지음, 김승욱 옮김 / 문학동네 / 201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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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이 흐른 뒤 울음은 그저 감정을 확인하는 방법이 되었고, 감정은 인생의 유일한 나침반이 되었다. 감정은 유행이 되고, 사람들은 배우로 등장하는 연극이 되었다. 그때쯤 사람들은 이미 무대 밖의 자기 모습을 알지 못했다. (14)

자기 존재의 가장 깊숙한 곳에서 도리고 에번스는 자신의 평생이 바로 이 순간을 향한 여정이었음을 알아보았다. 그는 그 한순간 태양을 향해 날아올랐고, 이제부터는 영원히 그 순간으로부터 멀어지는 여행을 할 터였다. 다시는 그 무엇도 그 순간만큼 생생하게 다가오지 않을 것이다. 인생이 다시는 그토록 의미를 품지 못할 것이다. (24)

어떤 면에서는 믿을 수 없을 만큼 지루했지만, 또다른 면에서는 매혹적이었다. 그렇게 확신에 찬 사람들을 만난 적이 없기 때문이었다. 유대인들과 가톨릭신자들은 그들보다 격이 떨어지고, 아일랜드인들은 추하고, 중국인과 토착민들은 아예 인간이 아니었다. 그들에게 이런 주장은 단순한 생각이 아니라 확신이었다. 그는 이상한 데서 놀라움을 느꼈다. 돌로 지어진 그들의 집. 그들이 사용하는 식기의 무게. 다른 사람들의 삶에 대한 무지. 자연의 아름다움을 알아보지 못하는 눈. 그는 가족들을 사랑했지만, 자랑스러워하지는 않았다. 식구들이 가장 잘한 일은 살아남은 것이었다. 그것이 어떤 업적인지 그가 제대로 알아보기까지는 평생이 걸렸다. 하지만 대학에 다니던 그 시절에는 생전 처음으로 만난 사람들이 가진 명예, 재산, 명상과 비교해보았을 때, 업적이 아니라 실패 같았다.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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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설 - 상 열린책들 세계문학 50
다니자키 준이치로 지음, 송태욱 옮김 / 열린책들 / 200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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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을수록 네 자매 각각이 한 시대에 공존하는 분화된 세대이자 한 인간 타입의 전형이 되어감. 자매 모두 평범하지만 어떤 비범한 면들이 다 있고. 당시 ‘시국‘과 생활, 그리고 간사이-간동의 문화 경쟁을 이 여성들의 잔잔한 일상의 내용과 리듬으로 구축하니 놀라움. 물난리 장면은 완전히 몰입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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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설 - 상 열린책들 세계문학 50
다니자키 준이치로 지음, 송태욱 옮김 / 열린책들 / 200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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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식으로 몇 년이 지나는 동안 유키코의 신상에는 특별한 변화가 없었지만 다에코에게는 생각지도 못한 발전이 있었다. 결국 그것이 유키코의 운명과도 어떤 관련성을 갖게 되었다. (21)

그리고 유키코의 얼굴에 나타나는 반응을 살펴봤으나 유키코는 별다른 기색도 없이 조용히 다 듣고나서, <순서가 아니라는 이유만으로 연기할 이유는 없다. 신경 쓰지 말고 두 사람을 맺어 주는 게 나을 것 같다. 내가 나중에 한다고 해서 타격을 받지도 않을 것이고 희망을 버리지도 않는다. 나는 나대로 행복한 날이 올 거라는 예감이 있다>고 말했다. (26)

과연 어린아이들은 곧잘 훌륭한 말을 한다. 그러고 보니 얼마 전부터 이 방에 있으면 이상하게 머리가 눌리는 것처럼 답답한 기분이 들었다. 바로 눈앞에 그 원인이 있는 듯했으나 그것이 뭔지 알아내지 못했는데 에쓰코가 정통으로 알아맞힌 것 같았다. 과연 그 말을 듣고 보니 도코노마의 양귀비꽃 탓도 분명히 있는 듯했다. 밭 같은 데 피어있는 양귀비꽃은 아름답지만, 도코노마에 이렇게 하나만 달랑 꽃병에 꼿혀 있으면 어쩐지 으스스했다. <빨려 들어갈 것 같다>는 말이 딱 맞는 것 같았다. (130)

사치코는 유키코가 어렸을 때부터 참을성이 있어서 아무리 힘든 일이 있어도 입 밖에 내지 않고 그저 훌쩍거리며 울기만 했던 일을 떠올렸다. 지금도 책상에 엎드려 몰래 울고 있는 동생의 모습이 눈에 선했다. (164)

<유키코는 아무 말도 하지 않으면서 뭐든지 자기 생각대로 다하는 애야.>
하고 사치코가 말했다.
<......두고 봐. 머지않아 남편이 생겨도 아마 자기 뜻대로 하고 살테니.> (205)

그녀는 인형 제작이 예술이고 양재가 품위 없는 직업이라는 오쿠바타케의 의견은 일소에 부쳤다. 그녀는 예술가니 하는 헛된 이름은 바라지도 않으며 양재가 품위 없다면 그래도 상관없다고 생각했고, 애당초 오쿠바타케가 그런 말을 하는 것은 시국에 대한 인식이 부족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지금은 뻔한 속임수 같은 인형 같은 걸 만들며 기뻐할 기대가 아니고, 여성이라고 해도 실생활과 관련이 있는 일을 하지 않으면 수치스러운 시대라는 얘기였다. (217)

사치코는 자신의 생활이 내적으로든 외적으로든 두 자매와 얼마나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는지를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다행스럽게 그녀의 가정은 부부 사이도 원만했고, 에쓰코는 다소 손이 가기는 하지만 외동딸이어서 원래라면 세 식구가 별다른 풍파 없이 평화롭게 지낼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까지 끊임없이 이런저런 별화를 몰고온 것은 두 자매였다. 그렇다고 두 자매가 성가시다는 건 아니다. 오히려 두 사람 덕분에 항상 가정이 풍부해지는 것 같고 분위기 또한 화사해지는 것을 사치코는 기쁘게 생각하고 있었다. 왜냐하면 돌아가신 아버지의 쾌활하고 야단스러운 성격을 누구보다 많이 이어받은 그녀는 적적한 집안을 몹시 싫어해서 항상 떠들썩하고 발랄하게 살고 싶었기 때문이다. (357)

사치코는 종종 남편이나 딸보다 유키코나 다에코에게 마음을 쓰는 시간이 많은 게 아닐까 하는 생각에 스스로도 깜짝 놀랄 때가 있었다. 솔직히 말해서 그녀에게 이 두 자매는 에쓰코 못지 않게 귀여운 딸이자 둘도 없는 친구였다. 이번에 혼자 있어 보니 비로소 자신이 친구다운 친구를 갖지 못했다는 것, 형식적인 교제 이외에는 부인들과도 별로 사귀지 않았다는 것을 깨닫고 이상하다고 느끼긴 했지만, 생각해 보면 그것은 두 자매가 있어서 꼭 그럴 필요가 없었기 때문일 터였다. 그런데 이제는 로제마리를 잃어버린 에쓰코와 마찬가지로 그녀도 별안간 적막감을 느끼기 시작했다. (357)

<그렇다면 그렇다고 일찌감치 털어놓으면 좋을 텐데, 사람을 잘도 속여 왔다고 생각하면, 이번에는 화가 나서...... 정말 화가 나서.......>
울 때면 사치코는 개구쟁이 같은 얼굴이 되었다. 새빨갛게 상기되어 분한 눈물을 머금고 있는 아내의 얼굴에서 데이노스케는, 항상 이런 표정으로 자매들끼리 싸움을 했을 먼 옛날 어릴 때의 모습을 정다운 듯 그려 보았다. (3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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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을 위한 홀로그램
데이브 에거스 지음, 정영목 옮김 / 문학동네 / 2018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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줄거리가 아니라 무드와 뉘앙스가 중요하며 그것들을 꾸준히 정확하게 표현해내는 작품. 카프카의 <성>과 비슷한 느낌. 읽기 시작하면 바로 느낌 옴: ‘이 사람은 이 사막에 갇혀 답 없이 맴돌겠구나.‘ 21세기 미국 시대소설이자 지구촌경제소설. 그리고 남자의 늙음이라는 구질한 주제의 세련된 변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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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을 위한 홀로그램
데이브 에거스 지음, 정영목 옮김 / 문학동네 / 2018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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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여자가 앨런의 집을 꾸몄다. 그런 일을 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집에 들어와 집주인이 도저히 할 수 없을 만큼 매력적으로 집을 꾸며놓는다. 주인의 인간적인 지저분함 때문에 생겨난 어둠을 밝게 만드는 것이다.
그러면 집이 팔릴 때까지 주인은 자기집의 다른 형태, 더 나은 형태에서 살게 된다. 노란색이 더 많아졌다. 꽃도 있고 재생 목재로 만든 탁자도 있다. 집주인의 물건들은 창고에 보관되어 있다. (24)

상관없다. 웨이터가 모든 것을 발코니 탁자에 차려놓게 한 다음, 손을 멋지게 휘둘러 계산서에 서명을 했다. 십층에 앉아, 바람을 향해 눈을 가늘게 뜨고서, 순간적으로, 이게 나다, 하는 느낌이 들었다. 나는 이럴 자격이 있다는 느낌. 주인의 분위기, 소속된 사람의 분위기를 보여줄 필요가 있었다. 다른 사람의 해시 브라운을 먹을 수 있는 사람이라면, 호텔에서 다른 누군가가 주문한 아침식사를 먼저 보내줄 만큼 잘 보이고 싶어하는 사람이라면, 어쩌면 왕을 알현할 수 있는 사람일지도 몰랐다. (27)

넌 삼차원 얘기를 하지. 앨런. 이건 실제 물건이야. 그들은 거기서 진짜 물건을 만들고 있어. 우리는 웹사이트와 홀로그램을 만들고 있고. 이 나라 사람들은 매일 중국에서 만든 의자에 앉아, 중국에서 만든 컴퓨터로 일을 하고, 중국에서 만든 다리를 건너면서 웹사이트와 홀로그램만 만들고 있어. 이게 너한테는 지속 가능한 일로 보이냐, 앨런? (108)

하지만 지금 그는 이 사람들에게 가르칠 것이 없었다. 그들은 사막의 텐트에서 홀로그램을 설치할 수 있었고, 그는 세 시간 늦게 도착했으며 뭘 어디에 꽂아야 하는지도 몰랐다. 그들은 제조나 그가 평생 완벽해지려고 노력했던 대면 영업에 전혀 관심이 없었다. 그들 중 누구도 그런 것에는 간접적으로라도 관여한 적이 없었다. 누구도 그처럼 진짜 물건을 진짜 사람들에게 파는 일에서 출발하지 않았다. 앨런은 그들의 얼굴을 보았다. 케일리와 그녀의 들창코. 브래드와 그의 야만인 같은 이마. 레이철과 그녀의 입술이 보이지 않는 아주 작은 입. (159)

이봐요 거기! 안 돼! 안 돼! 그들이 못마땅한 표정으로 말했다. 마치 위로, 위로, 위로, 하고 그를 재촉해 지하세계로부터 불러내려는 것처럼, 크게 삽질하는 모양으로 손짓을 하고 있었다. 그들의 얼굴이 말하고 있었다. 당신은 거기에, 지하 15미터에 있으면 안 돼, 그렇게 걸어다니면 안 돼. 어슬렁거리고, 화를 내고, 당신 자신의 과거뿐 아니라 나라 전체의 과거에 벌어진 돌이킬 수 없는 사건들을 이야기해서는 안 돼. (167)

어쩌면 이게 효과가 있을지도 모르겠군. 그는 생각했다. 이 여자가 하려고 한 짓을 미치광이의 영역에 집어넣어서, 제정신을 가진 사람이라면 맏지 않을 일로 만드는 거야.
그의 말에, 그녀의 눈에서 어떤 빛이 꺼지는 것 같았다.
그러나 꺼지는 것만큼이나 빨리, 그녀는 회복했고, 짐짓 웃음을 지어 보였다. (219)

그녀는 다시 그에게 등을 기대며 웃음을 터뜨렸다. 앞으로 세상이 그들보다 강한 사람들을 창조하는 시대가 올 수도 있었다. 이 모든 문제를 해결하는 때가. 하지만 그때까지는 하네와 앨런 같은 여자와 남나들, 불오나전할 뿐 아니라 완전함으로 가는 길마저 막힌 여자와 남자들이 있을 것이다. (229)

"나도 웃어도 되는 거죠, 그렇죠?" 자라가 물었다.
"그럼요."
"좋아요. 왜냐하면 생각해보니 거의 모든 게," 그녀는 말하면서 손으로 방을 훑었는데, 그 안에 집, 바깥의 바다, 왕국 전체, 세상과 하늘 전체가 들어갔다. "아주, 아주 슬프거든요." (389)

어쨌든 쫓겨나는 것은 아니었고, 게다가 그는 아직, 이렇게 빈손으로 집에 돌아갈 수는 없었다. 그러니까 계속 있게 될 것이다. 그래야 했다. 그렇지 않으면 왕이 다시 왔을 때 누가 여기 있겠는가? (3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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