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이 울다
거수이핑 지음, 김남희 옮김 / 잔(도서출판) / 2018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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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야의 파열음과 벙어리의 외침이 이어졌다. 외침 속에서 말을 잃게 된 그때를 애써 떠올렸다. 심장까지 닿아 있는 그녀의 비애를 아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그녀의 외침이 검은 밤하늘을 찢어 놓았다. 길을 잃은 달이 흔들리다 구름 속으로 떨어졌다. 타이항산 대협곡을 타고 울리는 처연한 외침에 산속의 초목이 몸을 떨었다. 급기야 대야에 구멍이 뚫리고 더는 소리가 나지 않았다. 뒤이어 사위가 고요해졌다. (69)

벙어리는 몸을 돌려 천천히 산을 내려왔다. 집으로 돌아와 문을 걸어 잠그고 나서야 안정을 되찾았다. 마음이 가라앉는다는 게 무엇인지 알 수 있었다. 바로 행복이었다. 마음 저 깊은 곳에서 샘솟는 행복감이 가슴을 채웠다. (69)

갑자기 스스로 가증스럽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 그 일은 그녀의 욕망 때문에 일어난 것이기도 했다. 욕망이 없었다면 리만탕을 돕지 않았을 것이다. 바로 그 욕망이 잘 살아가던 일상을 뒤흔들어 어디로 가는지조차 알 수 없게 만들어 놓았다. (160)

"이 학교는 이름이 뭐라니?"
"리만탕소학교요."
롼친은 얼떨떨한 기분으로 한참을 서 있었다.
"그래, 이 넓은 하늘 아래 없어져 버린 사람. 이제 두번 다시 구두이핑을 떠나는 일은 없겠구먼." (185)

그녀가 울부짖는 사이, 엄마는 채찍을 당겨 간신히 늪을 빠져나왔다. 이때부터 그녀의 생명 속에 무언가가 쐐기처럼 박힌 것 같았다. 그게 무엇인지 그녀는 알지 못했다. 그런데 이제야 알 것 같았다. 바로 채찍이었다. 그녀에게 채찍 소리는 계시였다. 과연 왕인란의 생명에 봄이 올까? (210)

"오래 기다렸어. 지금부터 하는 것도 널 위해서야."
왕인란은 칼을 쥔 손에 힘을 주었다. 톄하이의 몸에서 빈자리가 느껴진 순간, 그 자리로 칼을 찔러 넣었다. 푸욱 소리와 함께 그의 몸에서 망설임과 실망이 배어 나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의 몸이 부르르 떨렸다. 몸의 떨림과 함께 왕인란의 마음도 전율했다. 왕인란은 그의 그림자를 피해 걸음을 옮겼다. 유채꽃밭이 보였다. 조그마한 꽃봉오리가 맺히더나 여기저기 꽃을 피우고 이내 만개한 꽃이 밭을 가득 채웠다. (283)

어느새 한겨울 시커먼 하늘 아래 겨우 남아 있던 초록빛이 점차 생기를 띠었다. 그윽하고 우아한, 조금은 약 냄새와도 비슷한 은은한 향기가 그녀의 주변을 채웠다. 그녀가 바라던 진정한 봄이 왔다. 봄의 아름다움은 도저히 어찌할 수가 없었다. 채찍을 휘두르며 춤추는 남자의 모습이 보였다. 그녀를 부르고 있었다. 넌 나에게 묶여 있는 거야. 이리 와, 이리로. (283)

야오량은 차에서 뛰어내렸다. 이곳에 서 있는 자신이 자신 같지 않았다. 그는 팔을 제멋대로 휘둘렀다. 마구 날뛰는 짐승 같았다. 얼굴이 온통 벌개졌다. 살갗이 찢기는 아픔을 어떻게 표현할 길이 없었다. 도대체 쑤홍은 뭘 하고 살았던 걸까? 씨앗 하나가 마음속에 묻혀 있는 것 같았다. 그것을 잊어버리고 싶지만, 싹을 틔우게 하고 싶지 않지만, 파내기엔 너무 깊이 묻혀 버렸다. 어둠 따위! 어두워지기 전에는 집에 돌아가지 않기로 결심했다. 쑤홍에게 어둠을 보내 줄 생각이었다. (313)

쑤홍은 얼굴을 빠끔히 내밀고 코를 고는 야오량을 바라보았다. 이 집에서 이만큼 노력을 쏟아 붓고 고생했으면 됐지. 비누 한 쪽 없이 가난한 집에 시집와서 바퀴 넷 달린 용달차를 몰 정도가 되었는데, 그게 어디 쉬운 일이냐고. 서러움이 밀려왔다. ... 쑤홍은 야오량의 얼굴을 쓰다듬어 보고 싶었다. 하지만 곧 손을 움츠렸다. 그녀는 복잡한 여자였다. 한 때는 이런 복잡함에서 벗어나 조금은 단순해지고 싶었다. 하지만 현실은 경쟁이라도 하듯 힘겹기만 했다. 단순이고 뭐고 가난만 남아 있을 뿐이었다. (322)

그는 걷기 시작했다. 이렇게 계속 걷다가 쑤홍의 마음속까지 걸어 들어갈 수 있기를 바랐다. 쑤홍에게 희망을 주고 싶었다. 쑤홍이 평생 즐거운 환상 속에서 살 수 있기를 바랐다. 그러면 쑤홍은 잘 살아갈 것이다. (3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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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이 울다
거수이핑 지음, 김남희 옮김 / 잔(도서출판) / 2018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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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의 변두리에 간신히 걸치고 선 거대하고 호젓한 자연, 엄격한 향촌의 서열, 그리고 여자라는 몸에 붙잡힌 무명씨들의, 욕망 또는 행복에 눈 뜨는 순간과 그 순간을 조롱하는 잔인하고 긴 생을, 최대한 무심하게 그려내어 독자의 탄식을 유도함. 작품마다 반전력이 굉장하여 나중엔 공포물스럽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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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은 언제 예술이 되는가 작가수업 1
김형수 지음 / 도서출판 아시아 / 201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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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 작품은 집필이 시작될 때 이미 수준이 어느 정도까지는 결정되어 있기 마련이에요. 가령, 글을 쓰는 사람이 스스로 고무되어 있지 않으면 필시 자기 역량보다 키가 작은 작품이 나옵니다. 작가의 내면이 문학적 실감으로 충분히 고양된 상태에서 첫 문장을 끄집어 내면 평소에 유지하던 수준보다 높은 단계의 작품이 나올 거예요. (22)

작가는 어떤 존재일까요? 마밀린 먼로의 앵무새가 아니라 내무반의 십자매입니다. 그래서 위기 앞에서 건재할 수 있는 사람, 아파하지 않는 사람, 가스가 새어 나오는데 의연히 살아남는 강인한 사람, 이런 게 미덕이 아니라 악덕이 됩니다. ... 이 경우에 십자매는 적어도 세상과 목숨을 걸어놓고 그 속에서 어떤 역할을 하는 존재의 상징물로 서 있는 것이죠. 상처를 이타...적으로 써야 되는 사람! 글 쓰는 사람을 공인이라 함은 바로 이런 뜻입니다. (38)

바로 이 같은 태도로 부단히 취재하고 답사하고 사색하는 것은 창작의 필수 조건입니다. 그걸 언제까지 해야 되는가 하면, 글을 쓰는 내내 작가가 스스로, 무엇보다도 ‘낡은 나‘가 ‘새로운 나‘로 부단히 교체되는 것을 경험할 때까지 해야 하는 겁니다. 창작의 과정을 통해 작가 스스로 경이로움을 체험하고 다시 태어나는 느낌을 얻지 못하면 좋은 작품을 낳기가 굉장히 어렵죠. (40)

작품을 쓰려는 사람은 자기를 부단히 어둠 속으로 끌고 가야 합니다. ... 언제나 무대 위에 서 있는 왕자병이자 공주병인 사람은 좋은 작품 쓰기의 필수조건인 ‘세상 바라보기‘가 어려운 사람에 속하죠. 어떤 일상의 영광 속에 놓여있지 말고 그 영광이 도달할 수 없는 자리에 놓여있어야 합니다. (41)

분명한 사실 중 하나는 독자가 눈물 한 방울을 떨어뜨린 자리는 반드시 작가가 피눈물을 흘렸던 지점이라는 겁니다. (69)

어릴 적엔 떨어지는 감꽃을 셌지 / 전쟁 통엔 병사들의 머리를 세고 / 지금은 엄지에 침 발라 돈을 세지 / 그런데 먼 훗날엔 무엇을 셀까 몰라. (71)

"그해 서울 인구는 팔백 명이었다." 하고 말하는 것과 "그때 서울에서는 일천만 칠백구십구 명과 그녀가 살고 있었다."고 쓰는 것은 다르겠지요? 문장 하나가 추상적인 정보를 전달하는 것과 전체를 개괄하면서 집중을 만들어내는 것은 달라요. 작품 전체에서 개괄과 집중의 끈을 놓치지 않아야 주봉도 놓치지 않고 유기적 총체성도 잃지 않습니다. (138)

최근 작품들에게 치명적으로 결여된 것 중 하나가 이겁니다. 대지를 모른다는 것은 하나의 생명체로서 큰 불행입니다. (140)

세 번째로 할 이야기는 장르의 본질을 살리는 일입니다. 장르는 그냥 종류의 차이로만 존재하는 게 아니라 그것이 놓인 현실적 기반의 차이를 안고 있어요. 어떤 것은 서사적인 현실 때문에 발생하고, 또 어떤 것은 서정적인 방식이 아니면 접근 불가능합니다. 이래서 소설과 시는 요리 방식의 차이가 아니라 감동의 계보 자체가 전혀 다른 것에 속합니다. 그래서 소설이라면 소설적 본질, 시라면 시적 본질을 놓치지 않아야 해요. (148)

만약 아무도 그것을 보지 않았고, 또 보았다고 하여도 무의식적으로 그렇게 한 것이라면, 재현은 불가능할 것이다. 또 많은 사람들의 전 생활이 무의식 속에 지나간다고 하면 그 생활은 존재하지 않은 것과 같다. ... 이렇게 무...로 돌려지면서 생활은 사라져가는 것이다. 자동화 작용은 사물과 의복과 아내와 전쟁의 공포를 수긍해 가는 것이다. (1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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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이 울다
래리 양 감독, 량예팅 외 출연 / 미디어포유 / 201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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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적 완성도는 좋으나 ‘정의란 무엇인가‘에 대한 혼란을 가득 남김. 이 커플 중 누가 희생되어도 진부하니, 차라리 정의가 세워질 것이란 암시로 끝났으면 더 참신했을 것. 산에서 대야 두들기는 장면을 더 살렸으면 영화 전체에 좋았을 것. 동네사람들, 행동은 아큐, 발음은 그래도 또렷한 표준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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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이 나의 도끼다 - 소설가들이 소설가를 인터뷰하다!
악스트 편집부 외 지음 / 은행나무 / 2017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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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이 그러하듯 문학의 길도 다 각자의 루트, 속도, 운명에 따라 홀로 걷게 된다는 당연한 사실을 재확인. 작가가 써도 결국은 그가 쓰는 것이 아니라 작가의 몸 빌어서 시대가 쓰는 것이고, 화자가 태어나야 작품이 가능해지며, 글의 형식은 그것을 장악한 작가에게는 철창이 아니라 날개가 된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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