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러니스트의 사적인 진리 - 우연적 삶에 관한 문학과 철학의 대화
이유선 지음 / 라티오 / 200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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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혼자 사는 즐거움 가운데 첫 번째를 꼽으라면 ‘자유’가 단연 으뜸일 것이다. 주위 사람들도 혼자서 살아가는 나에게 “자유로워서 좋겠다.”고 부러워한다. 그러나 그들이 부러워하는 ‘자유’가 내가 누리고 있는 그 ‘자유’가 맞는지 의심스러울 때가 종종 있다.  

 “퇴근 후에도 마음껏 놀 수 있잖아. 집에 일찍 들어가서 밥해야 할 필요도 없고.”
 “너는 혼자서 차 몰고 여행도 갈 수 있잖아. 나는 애들 때문에 동네 밖에도 마음대로 못 나가.”
 “넌 혼자니까 네가 번 돈 네 마음대로 쓸 수 있잖아. 난 내 옷 사 본 지가 언젠지 기억도 안 나.”
 친구들이 부러워하는 내 자유는 이런 것들이다. 놀 수 있는 자유, 혼자서 여행하는 자유, 내 옷을 마음껏 살 수 있는 자유…….  

 근데 그게 자유라면 나는 전혀 자유롭지 않다. 친구들의 상상과는 달리, 나는 퇴근 후에는 늘 일찍 들어가서 장을 보고 요리를 한다.  

 채식주의자로 살다보니 바깥에서 음식을 먹는 일이 너무도 괴롭기에 내 손으로 먹을 것을 요리하는 데 드는 시간과 품이 많다.  

 또 아무리 시간이 남아도 차를 몰고 멀리 훌쩍 떠나는 일은 좀체 없다. 일 때문에 하는 운전도 괴로워서 죽을 지경인데 놀러가면서 차를 몰고 나가다니……. 시간이 나면 집 주위를 산책하면서 걷는 일이 가장 즐겁다.  

 그리고 내가 번 돈으로 비싼 옷을 사면서 자유롭다고 생각해 본 적도 없다. 20년 동안 가계부를 꼬박꼬박 쓰면서 살았다. 비싼 옷을 사고 나서 가계부 정리를 하면서 괴로워해본 기억만 있는데, 자유롭다니. 어림없는 소리다.  


 친구들이 부러워하는 자유로운 삶을 한번도 누려보지 못한 나는 그럼 자유롭지 않은 걸까? 그런데 그것도 아니다. 나는 그들이 부러워하는 조건은 하나도 갖추지 못했는데도 늘 자유롭다. 그럼 내가 느끼는 이 자유의 정체는 도대체 뭘까? 
  

 그러다가 최근 읽은 책에서 이 책에서 사유의 실마리가 얻었다. 

 저자는 리처드 로티의 철학을 해석하면서 자유주의 아이러니스트의 삶을 설명하고 있다. 최인훈의 광장과 밀실을 예로 들면서.  

 그의 친절한 해석을 따라 읽고서 나는 내게 와 닿은 자유의 의미를 이렇게 받아들였다.  

 ‘자유란 괴로움이 멈추고, 다른 인간들에 의해 굴욕당하지 않는 삶’. 그 책 어디에도 자유란 이러이러한 외적 조건의 결과라고 정의해 놓은 걸 찾아볼 수 없었다. 결국 자유로운 삶이란 어떠한 외적 조건이 갖추어지면 저절로 완성되는 것이 아니라, 개인이 굴욕과 괴로움을 없애나가는 현재진형형의 능동태란 말이겠지.
 그렇다면, 스스로가 굴욕을 느끼지 않게끔 인식을 확장시키는 것, 그게 자유의 정체다.
 그렇구나. 그래서 내가 자유로운 것이구나.  

 나는 끊임없이 나에게 굴욕감을 강요하는 사회인식으로부터 내 인식을 확장시키며 살아왔다. 결혼 못한 여자가 아니라 비혼주의자로 스스로를 인식하는 순간, 나는 내 사랑이 불륜이란 이름으로 굴욕당하지 않아도 되는 자유를 얻었다. 또 소박하고 절제된 삶을 추구하면서 내 가난이 무능함의 결과라고 굴욕당하지 않아도 되는 자유를 누릴 수 있었다. 또 모든 생명이 더불어 살아가는 지구를 꿈꾸는 환경운동을 하면서, 내 소박한 소망들이 헛된 욕망이라고 굴욕당하지 않아도 되는 삶도 쟁취했다.  

 결국, 내 삶은 자유로운 조건 때문이 아니라, 사회가 강요하는 굴욕을 벗어난 내 사유의 확장 덕에 자유롭다.  

 시집과의 관계로부터, 남편과의 관계로부터, 직장 사람들과의 관계로부터, 돈으로부터, 인습으로부터 느끼는 굴욕들은 우리를 늘 자유롭지 못하게끔 한다. 그래서 많은 이들이 혼자 사는 사람을 부러워하며, 돈 많은 사람을 부러워하며 자유를 꿈꾸는 것이겠지. 그러나 우리가 정녕 자유롭고 싶다면, 그런 이들을 부러워할 게 아니라, 주어져 있는 자유를 인식하는 노력을 하는 것이 옳지 않나.  

 조금만 인식을 전환하면 우리에게는 이미 넘치도록 많은 자유가 있다. 고기를 덜 먹고 소박한 밥상으로 만족할 자유, 차를 두고 걸어 다녀서 행복할 자유, 내 손으로 공들여 요리하는 시간을 즐거워할 자유, 비싼 옷 사는데 돈 쓰지 않아 흡족할 자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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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09-01-08 15: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원하는 것이 적으면 괴로움도 적지요..
소박한 삶은 작은 기쁨, 작은 즐거움을 증폭시킵니다. 하하


산딸나무 2009-01-09 00: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네, 요즘 더 적게 가져서 더 많이 행복해지고 있습니다.

릴케 현상 2009-01-24 19: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멋진 삶이네요^^ 저는 이 책을 사놓고 처음 욕망과 환상편만 읽었어요. 다시 읽어보고 싶은 마음이 불끈~

산딸나무 2009-01-25 22: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고맙습니다.
요즘 제 삶과 책의 내용이 준 사유의 거리들이 좀 맞아떨어졌던 것 같아요.
덕분에 무척 재미있게 읽었답니다.

tuksaly 2023-05-06 07: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글이 제게 참 많이 와닿네요. 덕분에 이 책을 더 읽고 싶어졌습니다. 구매하러 갑니다! 14년이 지났는데 여전히 자유롭게, 인식의 지평을 넓히며 살고 계시길 바라봅니다^^

산딸나무 2023-05-12 16: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고맙습니다~~ 덕분에 저도 오랜만에 예전 제 모습을 다시 볼 기회가 됐습니다~~ ^^
 
사랑과 연애의 달인, 호모 에로스 - 내 몸을 바꾸는 에로스혁명 인문학 인생역전 프로젝트 6
고미숙 지음 / 그린비 / 200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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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십대 중반, 일기장에 그런 말을 쓴 적이 있다. 

사랑은 주고 받는 것이 아니다, 사랑은 하는 것이다. 사랑하는 주체인 나와 사랑하는 주체인 너가 이루어내는 그 무엇인 사랑은 주고 받을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사랑받고 싶다는 말은 웃기는 말이다, 존재하지도 않는 것을 누가 줄 수 있으며 그걸 누가 받을 수 있다는 말인가.  

당시 나는 한 번도 사랑을 해 본적이 없는 초짜였음에도 이론으로는 대단한 내공을 쌓고 있었다. 그런 나를 두고 친구들이 놀려댔지만, 웬 걸, 나는 그 뒤 10여년을 줄기차게 누군가를 사랑하며 내 이론이 삶과 괴리되지 않았음을 증명했다. 아니, 증명했다기 보다는 나 스스로 깨달았다.  

뭐든지 공부하면 되는구나. 

이 책을 읽고 나니, 그 때 그 깨달음이 떠오른다. 사랑도 열심히 공부한 놈이 더 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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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호모 쿵푸스 실사판 : 다른 십대의 탄생] 공부는 셀프!
    from 그린비출판사 2011-04-06 17:20 
    ─ 공부의 달인 고미숙에게 다른 십대 김해완이 배운 것 공부의 달인 고미숙 선생님. 몸으로 하는 공부의 즐거움을 느낄 수 있는 적절한 계기(혹은 압력?)를 주시곤 한다.공부가 취미이자 특기이고(말이 되나 싶죠잉?), ‘달인’을 호로 쓰시는(공부의 달인, 사랑과 연애의 달인♡, 돈의 달인!) 고미숙 선생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공부해서 남 주자”고. 그리고 또 말씀하셨다.“근대적 지식은 가시적이고 합리적인 세계만을 앎의 영역으로 국한함으로써 가장 ...
 
 
비로그인 2008-12-31 14: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새해에는 복많이 받으시기를 바랍니다. 산딸나무님. 하하


산딸나무 2009-01-01 17: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네, 고맙습니다.
한사님도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치유하는 글쓰기 - 발설하라, 꿈틀대는 내면을, 가감 없이
박미라 지음 / 한겨레출판 / 200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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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불행이 누군가의 행복이 된다면 언젠간 나도 행복으로 삼을 만한 남의 불행을 만나게 될 것이다. 그렇게 서로의 불행을 징검다리 삶아 우리는 생의 매 고비를 죽지 않고 건너가게 되는 것이다." (본문 53쪽)

 말하고, 글 쓰는 행위가 나를 살리고, 타인을 살리는 행위라는 걸 알게 되는 순간이었다.

 그렇구나. 내가 이렇게 살아올 수 있었던 힘이 바로 타인의 불행이었구나. 그 불행을 기꺼이 표현해준 다른 이들 때문이었구나. 

 나의 고통이 더 이상 나만의 고통이 아님을 깨닫게 될 때 느끼는 그 안도감, 나의 생각이 더 이상 나만의 생각이 아님을 알게 될 때 느끼는 그 반가움. 아마 내가 글쓰기를 사랑해 온 까닭이 바로 거기에 있지 않았나 싶다.

 글쓰기를 저 높은 곳으로 모셔서 떠받들지 않고, 삶의 치유를 위한 맞춤한 도구로 만들어 내 손 안에 딱 쥐어주는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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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를 부탁해
신경숙 지음 / 창비 / 200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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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만을 사랑해야 하기에 사랑하는 행위를 사랑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

희생과 헌신 외에는 할 수 있는 게 없는 사람이 희생하고 헌신한 것을 예찬할 수 있을까?

그러나, 우리는 안다. 그것 외에 길이 없기에 그것을 선택한 사람들 때문에 우리가 태어났고, 성장했고, 이렇게 살아가고 있음을.

그 지독한 아이러니를 정면으로 마주하게 하는 소설이다.

많은 사람들이 이 소설을 읽고 감동과 눈물을 흘렸겠지만, 나는 세상 모든 자식에게 '엄마'라는 이름은 무한착취보증수표로 통하는 우리 사회의 오물통과 마주한 느낌이다. 그 오물통을 치울 생각을 않고 뚜껑만 덮어두고 쉬쉬하는 사람들이 흘리는 눈물은 좀 역겹다.  그리고 세상 모든 남편에게 '아내'라는 이름이 같은 의미를 가지는 것에는 절대로 동의할 수 없다.

세상의 모든 남편들이 아내를 등처먹지 않고, 세상의 모든 딸들이 더 이상 엄마를 갉아먹지 않고, 세상의 모든 아들들이 더 이상 어머니를 착취하지 않는 세상. 그런 세상이 유토피아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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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08-11-11 12: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나는 엄마는 아니지만,
세월이 흐르며 나의 에너지가 내 아이들에게 옮겨가는 거 같답니다.
그려러니 한답니다. 산딸나무님.


산딸나무 2008-11-12 16: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에너지가 옮겨간다...
부모된 사람만이 할 수 있는 말이네요.
 
리틀 포레스트 1 세미콜론 코믹스
이가라시 다이스케 지음, 김희정 옮김 / 세미콜론 / 200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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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요리 하는 것을 좋아한다.

 농촌 생활을 동경하고 있다.

 재미있는 만화책이라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난다.

 게다가 요즘 이가라시 다이스케에 푹 빠져 있다.

 그, 런, 데 세상에...

 이가라시 다이스케가 농촌에서 살면서 직접 요리한 음식들을 소재로 작품을 냈다니...

 처음 광고문구를 보고는 가슴이 떨려서 죽는 줄 알았다. 책을 신청해두고 기다리는 동안 얼마나 매력적인 작품일지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흥분된다.

 "먹는 것이야말로 인생이다."하는 말에 100% 공감.

 그럼, 먹는 것이야말로 인생이고, 예술이지. 

 이제 보니, 그녀의 먹거리가 그녀의 예술이었구나. 

 그 먹거리가 가져다준 삶에서, 그 삶이 이어준 사유에서 그 사유가 낳은 예술이 나를 그토록 감동시킨 바로 그 작품들이었다. 그토록 풍부한 상상이, 그토록 독특한 철학이 그 어떤 이론보다 설득력있게 나를 전율시킨 까닭은 바로 그 상상과 철학이 머리로 낳은 것이 아니라, 자연에서 가져온 것이기 때문이었다. 

 정말 인간이 삶을 '산다'고 할 때, 그 깊이에 어울리는 삶이란 이런 삶이 아닐까?

 나도 정말 이렇게 '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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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진 2008-10-26 22: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글을 읽으며 책의 내용이 정말 궁금해지네요.
나는 아직 요리도 잘 하지 않고 엄마에게 의존하지만
자연에서 가져온 먹거리가 주는 삶의 철학이 어떤 것인지 알고 싶어요.
언니가 정말 살고 싶은 삶이 무엇인지... 이 책을 꼭 읽어야 겠어요.^^

산딸나무 2008-10-28 11: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대가 이 책을 통해서 내 삶을 예측해주신다면,
"그 사람의 꿈은 그 사람을 말해준다."고 할 수 있겠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