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31] Exploring New Worlds

당시 인도로 향하는 것은 트렌드였다(음식이 빨리 부패하는 것을 막기 위해 후추 등의 향신료가 중요했기 때문). 크리스토퍼 콜럼버스는 남들이 남쪽으로 내려가는 생각을 바꾸어 서쪽으로 향하는 것으로 하고 지도까지 제작한다. 콜럼버스는 포르투갈 왕, 프랑스와 영국 왕을 만나 투자 유치를 요청하지만 설득에 실패하고 마지막 스페인에서 페르디난드와 이사벨라에게서 허락을 받아 배를 살 돈을 마련한다. 그러나 오랜 선상 생활로 음식이 부족해지자 선원들은 괴혈병으로 상당수가 사망한다. 집에 돌아가자는 선원들의 아우성에 3일 동안 육지가 보이지 않으면 집에 돌아가기로 하는데 다행히 2틀째 육지에 당도했다. 그곳은 금도, 후추도 없이 목화와 감자 같은 식물만 보이는 땅이었다. 그들이 도착한 땅은 인도가 아닌 플로리다였다. 5년 뒤 포르투갈 항해사인 바스코 다 가마가 아프리카를 지나 인도에 도착하는 주인공이 되었다. 아메리고 베스푸치는 콜럼버스를 질투해 스스로 항해를 떠났다(돈이 많은 귀족). 그는 콜럼버스처럼 아메리카 대륙에 닿았는데 이곳이 신대륙임을 확신했다. 유명 지리학자가 새로 발견한 땅의 이름을 그의 이름을 따 'America'가 되었다. 페르디난드 마젤란은 콜럼버스의 항로를 그대로 따랐으나 폭풍우를 만나 한달 이상을 표류하다 갑자기 고요해진 너른 바다를 마주하며 편안해짐을 느낀다. 그곳이 태평양이었다. 마젤란과 선원들은 3달 이상의 항해 후 마리아나 제도에 닿았다가 물과 식량을 얻기 위해 필리핀까지 이른다. 그러나 마젤란은 현지 부족민에게 붙잡혀 사망하고 만다. 이후 남은 선원들이 배를 타고 인도에 닿으면서 마젤란은 인도까지 간 최초의 타이틀을 가진 사람이 되었다.


[CH32] The American Kingdoms

중앙 아메리카에 최초의 거대 제국은 마야였다. 오늘날 멕시코의 유카탄 반도에 해당하는 곳이다. 마야의 왕은 권력이 무척 컸다고 한다. 부족 간 전쟁이 잦았는데 전투가 있기 전에 왕은 온몸을 뚫어 피를 내는 것으로 신에 대한 신념을 표시했다. 마야의 도시는 몇 백년간 잘 유지되었으나 거주민들이 늘어나며 음식이 부족해졌고 잦은 지진과 허리케인의 발생, 왕의 가혹한 정치 등 때문에 시민들의 이탈률이 급증하면서 도시가 정글화된다. 

아즈텍은 넓은 호숫가에 자리를 잡아서 땅을 건조하게 오랫동안 만드는 일에 공을 들였다. 그렇게 테노치틀란이란 도시가 건설되었다고 점점 더 많은 사람이 이곳에 유입되며 도시의 규모가 커졌다. 운하가 건설되며 오가기가 편해졌고 호숫가라 도마뱀, 도롱뇽, 개구리, 생선알들을 요리해 먹기도 했다. 그들은 카카오를 초콜릿으로 만들어 최초로 브랜드화시킨 장본인들이다. 

남아메리카에는 잉카 제국이 있었다. 오늘날 페루 지역이 이에 해당한다. 쿠스코는 제국의 수도였다. 잉카인들은 자신들의 역사를 남기지 않았는데 역설적으로 콜럼버스가 방문했던 해에 왕이였던 Huayna Capac은 기록에 남아 있다. 당시 잉카 제국은 상품 무역으로 활발한 교류를 했다. 하지만 Huayna Capac이 죽자 쪼개진 왕권은 합쳐지지 못한채 제국의 힘은 약화되었다. 


[CH33] Spain, Portugal, and the New World

신대륙을 둘러싸고 스페인과 포르투갈은 대서양에 앞다투어 배를 보내게 된다. 그들은 그곳에 새 도시를 건설하고자 콩키스타도르(conquistadores)를 보내 원주민들과 전투를 벌이게 했다. 스페인과 포르투갈은 협상을 벌여 중앙 아메리카와 남아메리카를 분할하는데 합의했다(자기들 맘대로 좌표 찍듯이 찍으면 자기 땅이 되는 참!). 이들은 효율적인 도시 건설을 위해 노예를 데려오는 것을 생각하여 처음에는 서아프리카에 있던 이슬람 상인으로부터 노예를 사서 보내다가 나중에는 직접 노예를 끌고 갔다(일부 모집도 있었겠지만 문제는 일방적으로 끌고 간 경우도 허다했다). 열악한 선상에서 그들은 햇빛도 보지 못하고 제대로 먹지도 못한 채 신대륙에 도착하기도 전에 많은 노예들이 목숨을 잃었고 도착한 노예들 앞에는 가혹한 노동이 기다리고 있었다. 

아즈텍 제국에 코르테스를 비롯한 스페인 사람들이 도착했을 때 아즈텍 사람들은 그들을 방문자라고 여기고 환영했다(아즈텍인들은 말을 처음 보고 놀랐다고). 스페인 사람들은 8개월동안 호화로운 대접을 받다가 그마저도 지루해진 이들은 아즈텍인들과 싸움을 벌여 학살하는 만행을 저지른다. 아즈텍 인들은 분노에 차서 왕인 Montezuma에게 항의했고 그 과정에서 왕은 살해당한다. 아즈텍인은 스페인 사람들을 감금하고 얼마 후 시간이 지난 뒤 스페인인들이 주변이 조용해진 것을 확인하고 도망을 감행한다. 갑작스런 아즈텍인의 공격에 배에 마구 실은 금덩어리 때문에 무거워진 배는 가라앉고 코르테스와 몇 명의 스페인만 살아 남아 돌아간다. 하지만 코르테스는 포기하지 않고 새 사람들과 새 말을 준비한 후 테노치틀란으로 진군한다. 12개의 군함을 이용하여 드디어는 수도를 포위한다. 3개월 간의 전투 끝에 1519년 코르테스는 테노치틀란을 접수하고 중앙 아메리카에서 스페인 식민지의 역사가 시작된다.


[CH34] Martin Luther’s New Ideas

마틴 루터는 가톨릭 교회의 교리에 따라 교회가 원하는 것을 충실히 지키는 수도승이었다. 그는 수도승 생활을 한 지 5년이 지나 비템부르크 신학 대학에서 교수 역할을 하러 가게 되었는데 <the book of Romans>를 기반으로 학생들과 함께 연구를 하다가 기존에 자신이 가졌던 신에 대한 생각이 변화되는 경험을 한다. 그는 가톨릭 교회에서 신에게 죄를 용서하면 면죄부를 주는 행위가 잘못되었음을 비판한다. 그는 복음만이 답이다라고 이야기하며 1517년 10월 31일 95개의 면죄부 비판 목록을 내놓는다. 이는 가톨릭 교회가 옳지 않을 수 있다는 생각을 사람들에게 퍼지게 한다. 

1485년 헨리 튜더가 삼촌인 리차드를 죽이고 헨리 7세로 왕이 된 이후 그는 평화로운 왕위 계승을 위해 2살인 아더와 3살인 스페인 왕의 딸(캐서린)과 가상 결혼을 시켰다(진짜 결혼식은 각자가 16살, 17살이 되었을 때). 그러나 아서가 결혼한 지 6개월 만에 고열이 나 사망하여 남동생인 해리가 17살에 헨리 8세로 왕위를 잇는다. 헨리 8세는 왕위를 위해 캐서린과 결혼을 감행한다. 하지만 캐서린은 딸만 있었고 헨리 8세는 그녀와 이혼하기를 원했다. 이 때 헨리 8세에게 들어온 것이 마틴 루터의 교회 개혁이었다. 마침 귀족들도 헨리 편을 들면서 그는 캐서린을 보내 버리고 앤 불린과 결혼하고 영국 신교회를 만든다. 그런데 앤 불린도 딸(엘리자베스)만 낳아서 그녀를 참수시키고 Jane Seymour과 결혼하여 아들(에드워드)를 낳는다. 여기서 멈추지 않고 독일 공주인 Anne of Cleves 사진을 보고 그녀를 데려오게 한다. 그러나 사진과 실제 모습이 다르다는 이유로 고함을 친다. 여기에 어린 여성인 Catherine Howard와 결혼했지만 그녀 역시 참수시켰고 마지막으로 간호사인 Catherine Parr와 결혼한다. 나이든 헨리 8세를 돌보기에 적합한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아무리 왕이라지만 이렇게 마구 갈아치워도 되는 것인가, 죽은 이들은 무슨 죄인가. 


[CH35] The Renaissance

고대 그리스와 로마를 재탄생시키는 시기, 르네상스가 도래한다. 대항해 시대가 시작되면서 사람들은 새로운 이론과 학설을 곳곳에서 받아들이게 되었고 신이 세계를 창조했다는 물음에도 회의론이 일면서 인간 중심의 사고, 과학적 검증 방법이 흐름을 타게 되었다.

르네상스는 인쇄술이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작업이었다. 구텐 베르크는 금판을 만들어 글자들을 맞추어 넣고 잉크에 찍어내는 기술을 만들어낸다. 그는 더 나아가 포도의 압착 기술에서 착안하여 tin, lead, antimony를 조합하여 글자들을 만들고 유성 잉크를 제작하여 1년에 450개의 성경을 만들어내는데 성공한다. 그는 영어로 된 역사와 시를 인쇄했고 체스 게임 메뉴얼을 최초로 인쇄하였다.


[CH36] Reformation and Counter Reformation

마틴 루터의 가톨릭 비판 이후 사람들은 성경에서 직접 성경에서 가르침을 얻을 수 있다 생각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가톨릭 측은 이에 공포를 느꼈는데 진리는 보편성을 띄어야 하며(기준은 하나) 잘못된 번역으로 인해 잘못 전달되는 가르침들이 있다 생각하여 경계한 것이다. 가톨릭은 루터파를 이단으로 선언하였다. 하지만 아우크스부르크 신앙고백(Augsburg Confession)이라는 문서가 나오자 일부 개혁파들은 기독교인의 신앙에 대한 교리로 생각하며 이를 받아들인다. 이들을 프로테스탄트라고 한다. 프로테스탄트는 모든 사람들이 성경을 읽고 스스로 이해해야 한다고 여겼다. 몇 백년이 지나는 동안 가톨릭과 프로테스탄트는 신을 이해하고 숭배하는 방식을 놓고 계속 논쟁했다.

교황은 주교들을 이탈리아의 트렌트에 소집하여 1545년부터 18년 간 가톨릭 교회에 대한 대책 회의를 갖는다. 그들은 결과물인 트렌트 공의회 선언문을 발표하고 가톨릭 공식 독트린으로 삼았다. 이제부터는 주교가 되려면 신학교에 들어가 가톨릭 독트린에 따라 학습하고 훈련해야 했다. 여기에 맞서 루터파도 선언을 내놓으니 the Counter Reformation(반개혁)이다. 가톨릭과 프로테스탄트는 이후에도 싸움이 그치지를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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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리에는 자신이 구상한 공동체의 건축학적 규준을 파사주에서 보았다. 파사주를 반동적인 방식으로 변형한 것, 이것이 푸리에 관점의특징이다. 즉 파사주들은 원래 상업의 목적에 기여하는 것인데, 푸리에는 이것을 거주지로 변형한다. 그의 공동체는 파사주들로 이루어진도시이다. 푸리에는 제정의 엄격한 형식세계에서 비더마이어의 다채로운 목가를 만들어내는 것이다. - P188

파노라마에서 자연을 모방하여 그릴 것을 제자들에게 가르친다. 파노라마는 자연을 묘사하면서 그 변화의 모습들을 실제와 구별하기 어려울 정도로 유사하게 만들어내려고 함으로써 스스로 사진을 넘어 무성영화와 유성영화를 예시(示)하게 된다. - P190

회화는 우선 색의 요소들을 강조함으로써 사진에대응하기 시작한다. 인상파가 입체파에 자리를 내주면서 회화는 사진이 당분간 따라올 수 없는 영역을 개발하였다. 사진은 사진대로 고객이 전혀 이용할 수 없었거나 단지 그림으로만 이용할 수 있었던 형상, 풍경, 사건을 무제한으로 시장에 쏟아냄으로써 19세기 중엽부터 상품경제의 영역을 엄청나게 확대해나갔다. 판매를 확대하기 위해 사진은 촬영기술을 유행에 맞게 변형함으로써 대상 영역을 새롭게 개척하기 시작했고, 이것이 이후 사진의 역사를 결정짓게 된다. - P193

만국박람회는 상품들의 우주를 구축한다. 그랑빌의 상상들은 상품적 성격을 우주로 확산시킨다. 그의 상상들은 우주를 현대화한다.

유행은 상품이라는 물신이 경배받고자 하는 의식(儀式)을 규정해준다.
그랑빌은 유행이 일용품에 대해 갖는 요구를 거의 우주에까지 확대한다. 그는 유행을 극단에 이르기까지 추구함으로써 유행의 본성을 드러내게 된다. - P197

사적 개인에게 처음으로 거주 공간이 작업장과 대립된 위치에 서게 된다. 거주 공간은 실내(Interior)에서 형성된다. 사무실은 그 실내의 보충물이 된다. 사무실에서 현실의 일들을 처리하는 사적 개인은실내에서 자신의 환상들을 즐길 수 있기를 요구한다. - P199

신상품들을 파는 상점들에 발맞추어 신문들이 등장한다. 언론은 정신적 가치들의 시장을 조직하기 시작하고 이 시장은우선 호황을 누린다. 비타협주의자들은 예술을 시장에 내다 파는 데저항한다. 그들은 ‘예술을 위한 예술‘(‘art pour l‘art)의 기치 아래 모여든다. 이 구호에서 종합예술작품(das Gesamtkunstwerk)이라는 구상이생겨난다. 종합예술작품은 기술의 발전에 맞서 예술을 밀폐시키고자한다. 종합예술작품을 기념하는 예식은 상품을 미화하는 기분 전환과짝을 이룬다. 둘 다 인간의 사회적 현존을 사상(象)해버린다. 보들레르는 바그너의 매력에 사로잡혔다. - P206

푸리에는 공동체를 위해서 미덕을 믿는 대신 열정을 추진력으로삼는 사회의 효율적인 기능을 믿으려 한다. 열정을 동력장치로 삼아서, 즉 기계론적 열정과 비교(秘敎)적 열정의 정교한 조합을 통해 그는 시계의 메커니즘과 비슷한 집단심리학을 상상한다. 푸리에적 조화는 이러한 조합의 유희가 낳은 필수적인 산물이다. - P227

그랑빌의 판타지는 이러한 유행의 정신에 상응하는데 아폴리네르는 후에 유행의 이미지를 이렇게 묘사했다. "이제는 자연의 여러 영역에서나온 모든 물질이 여성 의복을 제작하는 데 도입될 수 있다. 나는 코르크 마개로 만들어진 매혹적인 드레스를 보았다. [……… 자기, 사암, 도기(陶器)가 갑자기 의상예술에 나타났다. (………) 사람들은 베니스의 유리로 구두를 만들고 바카라의 크리스털로 모자를 만들고 있다." - P233

거리산보자는 군중 속에서 은신처를 발견한다. 거리산보자에게 군중은 베일이 되는데 그에게 친숙한 도시가 그 베일을 통해 판타스마고리아로 변한다. 이 판타스마고리아 속에서 도시는 때로는 풍경이, 때로는 방이 된다. 나중에 백화점의 장식은 도시가 풍경 혹은 방으로 나타나는 이러한 환상에서 영감을 얻게 되고 그렇게 해서 백화점은 거리산보자마저 상품 판매고를 높이는 데 기여하게 만든다. 아무튼 백화점은 거리 산보가 이루어지는 마지막 구역이다. - P238

보들레르에게서 알레고리적 형식의 핵심은 상품이 가격 때문에 갖게 되는 특수한 의미와 밀접한 관련성을 지닌다. 17세기의 알레고리에서는 이른바 사물들에 의미가 부여됨으로써 사물들 그 자체의 가치는 하락하는데, 이러한 알레고리의 특징은 상품화된 사물에 가격이매겨짐으로써 일어나는 특이한 가치 하락에 상응한다. 상품으로 가격화될 수 있다는 이유로 인해 사물이 겪는 이러한 가치 하락은 보들레르에게서는 새로움의 측정 불가능한 가치에 의해 상쇄된다. 새로움은더는 어떠한 해석도, 또 어떠한 비교도 허용하지 않는 그러한 절대적인 것을 표상한다. 새로움은 예술의 궁극적인 참호가 되었다. - P241

오스망은 스스로 자신을 ‘파괴의 예술가라고 불렀다. 그는 그가 기획했던 일에 대해 소명의식을 갖고 있었으며 회상록"에서 그점을 강조한다. 중앙 시장들은 오스망이 건설한 가장 성공적인 사례로 꼽히는데, 여기에 흥미로운 징후가 있다. 사람들은 파리 시의 발원지가 된 시테 섬>에 대해 오스망이 지나간 곳에는 오로지 교회 하나, - P243

병원 하나, 공공건물 하나, 서민 아파트 한 동만이 남는다고 이야기하곤 했다. 위고와 메리메는 오스망에 의한 파리의 변형이 파리 시민들에게 얼마만큼 나폴레옹 폭정의 기념물로 보였는지를 암시한다. 파리시민들은 도시에서 더는 안락함을 느끼지 못하게 되었다. 그들은 대도시의 비인간적 성격을 의식하게 된 것이다. 막심 뒤 캉의 기념비적작품 파리가 탄생한 것은 이러한 의식에서였다. - P2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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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수하 2024-02-20 09:5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우와 읽어내셨군요...!!
 

가을에 蕭王이 銅馬를 鄭縣에서 공격할 때에 吳漢이 突하였다. 銅馬가騎를 거느리고 淸陽으로 와서 모이니, 군사와 말이 매우양식이 다하여 밤에 도망하자, 蕭王이 관도에서 추격해서 모두 격파하여 항복시키고 큰 우두머리를 봉하여 列侯로 삼았다. 諸將들도 믿지 못하고 항복한 자들도 스스로 안심하지 못하였는데, 蕭王이 그 뜻을 알고는 칙령을 내려 항복한 자들로 하여금 각각 자기 진영으로 돌아가 무장하게 한 다음 직접 경무장한 기마를 타고서 部隊와陣營을 순행하니, 항복한 자들이 번갈아 서로말하기를 "이 眞心을 미루어 사람의 뱃속에 넣어 두니, 어찌 목숨을 바치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하고는 이로 말미암아 모두 복종하였다. 이에 항복한 사람을 여러 장수들에게 나누어 주어 배속시키니, 무리가 마침내 수십만이었다. 그러므로 關西지방에서는 劉秀를 이름하여 銅馬帝라 하였다. - ≪後漢書吳漢傳≫에 나옴 - P2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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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주의는 순전히 제의로만 이루어진, 교리도 없는 종교이다.
자본주의는 칼뱅주의에서뿐만 아니라 나머지 정통 기독교 교파들에서도 입증되어야 할 테지만 서구에서 기독교에 기생하여, 종국에는 기독교의 역사가 그것의 기생충인 자본주의의 역사가 되는 형태로 발전해왔다. - P124

걱정들(Die Sorgen)은 자본주의 시대에 고유한 정신병이다. 빈곤,
떠돌이걸인-탁발승적 행각에서 정신적(물질적이 아닌) 탈출구 없음. 그처럼 탈출할 길이 없는 상태는 죄를 지우는 상태이다. ‘걱정들‘
은 이 탈출구 없음의 죄의식을 나타내는 지표다. ‘걱정들‘은 개인적이고 물질적인 차원에서가 아니라 공동체 차원에서 탈출구를 찾지 못한다는 불안에서 생겨난다. - P125

"초현실주의는 그 본질적인 진실의 측면에서 대화를 재건한다는 사명을 갖고 나왔다. 파트너들은 예의범절의 강박에서 해방되었다. 말하는 자는 어떤 명제도 연역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대답은 원칙상 말한 사람의자기애를 신경 쓰지 않는다. 왜냐하면 말과 이미지들은 듣는 자의 정신에게는 디딤판으로 여겨지기 때문이다." - P137

키치는 우리가 꿈속에서나 대화에서 사멸한 사물세계의 힘을 빨아들이기 위해 두르는 평범한 것의 마지막 마스크이다.
우리가 예술이라 불렀던 것은 신체에서 2미터 떨어진 곳에서 비로소 시작한다. 그런데 키치 속에서 사물세계는 사람의 몸에 닥쳐온다.
사물세계는 더듬는 그의 손에 몸을 맡기고 마침내 그 손아귀 내부에서 자신의 형상들을 만들어낸다. 새로운 인간은 옛 형식들의 모든 정수를 자신 속에 지니고 있으며, 19세기 후반부에서 유래한 환경과의 갈등 속에서 ㅡ꿈들에서든 몇몇 예술가들의 문장과 이미지에서든ㅡ만들어지는 것은 "가구가 비치된 인간으로 부를 수 있을 어떤존재다. - P139

종교적 각성을 참되고 창조적으로 극복하는 것은 결코 환각제를 통해서가 아니다. 그 극복은 범속한 각성(profane Erleuchtung), 유물론적이고 인간학적인 영감 속에서 이루어진다. - P147

혁명을 위한 도취의 힘을 얻기, 이것이 초현실주의의 모든 책과시도가 추구하는 목표이다. 초현실주의는 그것을 자신의 가장 고유한 - P162

과제라고 불러도 좋다. 이 과제를 성취하려면 우리가 이미 알고 있듯이 모든 혁명적 행위 속의 어떤 도취적 요소가 살아 있는 것만으로는부족하다. 그 과제는 무정부주의적 과제와 동일하다. 그러나 강세를오로지 무정부주의적 과제에만 둔다는 것은 혁명을 방법과 기율 면에서 준비하는 일을 순전히 연습과 전야제 사이에서 휘청거리는 실천을위해 소홀히 하는 것을 뜻한다. 여기에 도취의 본질에 대한 너무 단순하고 비변증법적인 견해까지 추가된다.
오히려 우리는, 일상을 꿰뚫어 볼 수 없는 것으로, 그리고 꿰뚫어 볼 수 없는 것을 일상적인 것으로 인식하는 변증법적 시각의 힘으로, 그 비밀을 일상 속에서 재발견하는 정도로만 그것을 꿰뚫을 수있다. - P163

혁명의전제조건은 어디에 있는가? 신념의 변화에 있는가 아니면 외적 환경의 변화에 있는가? 이것은 정치와 도덕의 관계를 규정짓고 어떠한 얼버무림도 용납하지 않는 핵심적 물음이다. 초현실주의는 그 물음에대한 공산주의적 답변에 더욱더 가까이 다가왔다. 그리고 그것은 전 - P164

방위적인 염세주의를 뜻한다. 절대적으로 그렇다. 문학의 운명을 불신하고 자유의 운명을 불신하고, 유럽의 인류의 운명을 불신하며, 무엇보다 계급 간의, 민족 간의, 개인 간의 모든 소통을 불신, 불신, 불신하기이다. - P165

기술이 엄청나게 발전하면서 사람들 위에 전혀 새로운 빈곤이 덮쳤다. 그리고 점성술과 요가의 지혜, 크리스천 사이언스와 손금 보는 점술, 채식주의와 그노시스, 스콜라 철학과 심령주의를 가지고 사람들 사이로 파고든, 아니 오히려 사람들 위로 덮친, 답답하게널린 갖가지 이념들이 이러한 빈곤의 이면이다. 왜냐하면 여기서 일어나는 일은 진정한 부활이 아니라 갈바니(Galvani) 전기 작용이기 때문이다.
여기 분명하게 드러나는 사실은, 우리가 겪고 있는 경험의 빈곤은 거대한 빈곤의 일부에 불과하다는 점, 그 거대한 빈곤은 다시 중세 걸인의 얼굴과 같은 날카롭고 정확한 윤곽을 띤 얼굴을 갖게 되었다는 점이다. - P173

자연과 기술, 원시성과 안락함은 여기서 완전히 하나가 된다. 또한 끝없는 일상의 분규에 지쳐버렸고 삶의 목적이 수단들에 대한 무한한 원근법적시각에서의 가장 먼 소실점으로만 떠오르는 사람들의 눈앞에는 어느방향에서나 가장 단순하면서 동시에 가장 안락한 방식으로 자기 자신을 충족시키는 삶이 구원의 빛처럼 나타난다. 그런 삶 속에서 자동차는 밀짚모자보다 더 무겁지도 않고, 나무에 열린 열매는 어떤 기구의풍선처럼 빠르게 둥그렇게 익는다. 그리고 이제 우리는 일단 거리를두고, 물러서려 한다. - P1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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更始가 使者를 보내어 유계를 세워 소왕으로 삼고 군대를 모두 해산하게 하자, 경감이 나아가 아뢰기를 "백성들이 王莽에게 시달려 다시 劉氏를 그리워하였는데, 이제 更始가 천자가 됨에 諸將들이 제멋대로 명령을 내리고 貴戚들이 방종하고 횡포를 부려 노략질을 자행하니, 백성들이 가슴을 치고 다시 王莽의 조정을 생각합니다. 저는 이 때문에 更始가 반드시 패할 줄을 압니다. 公은 功名이 이미 드러났으니. - ≪後漢書 更始傳≫에는 의로써 정벌한다면 격문만 돌리고도 천하를 평정할 수 있습니다. 천하는 지극히 소중하니, 公은 스스로 취하고 他姓으로 하여금 얻게 하지 마소서." 하였다. 이상은 ≪後漢書 耿傳≫의 내용임

王莽이 마침내 河北이 아직 평정되지 않은 것을 구실삼아 부름에 나아가지 않으니, 비로소 更始와 갈라지게 되었다. 이상은 ≪後漢書 光武帝紀≫에나옴- - P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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