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저녁 '바그다드 카페' 사진을 내 방 사진으로 바꿔 걸었다. 7월 중순이었나? 알라딘 서재 시작한 지 얼마 안되어 어느 님의 방에서 저 그림을 발견하고 뛸듯이 기뻤다.  워낙 좋아하는 영화이기도 하지만 야스민의 일러스트가 마음에 쏙 들었던 것이다.

여행중에 남편과 싸우고 트렁크 하나 들고 사막 한가운데서 차에서 내려버린 야스민. 어쩌자고 그녀는 턱 아래까지 꼭꼭 단추를 채웠고 정장 차림이다. 비대한 몸뚱이와 넙적하고 큰 얼굴에서 비 오듯이 쏟아지는 땀. 아아, 정말 '비지땀같은 인생을 생각하는가'가 아닐 수 없다.(전영경의 시에서 인용)

이 사막 중간의 낡고 우중충한 모텔의 여주인 브렌다.  그녀는 게으름뱅이에다가 거짓말을 밥먹듯이 하는 남편을 방금 쫓아냈다. 걸레를 아무렇게나 쥐어짜 놓은 듯 심통스럽고 침울한 그녀의 얼굴. 이 두 여인이 만났다. 그리고 더이상 좋을 수 없는 음악 '콜링 유'가 흐른다. 영화가 끝나고 나서도 7박 8일쯤. 내내.

나는 내가 그 뚱뚱한 여인 야스민 같기도 하고 심통난 브렌다 같기도 하다. 그리고 어쩌면 그 모텔에 장기투숙하고 있는 무명의 괴짜 노인 화가 같다고 느낀다. 브렌다가 외출한 틈을 타 그 엉망진창이고 사방이  찐득찐득한 모텔을 깨끗이 정돈하고 청소하는 야스민 같은 친구가 한 명 내게도 있었으면 하고 간절히 바랐다. 그리고 외출했다가 돌아와 파리가 낙상할 정도로 깨끗해진 자신의 모텔을 보고 야스민에게 고래고래 소리 지르는 브렌다가 좋았다. 아무렴, 사람은 그 정도의 자존심은 가지고 살아야 하는 법이다.

이 영화를 만든 이는 퍼시 애들론. <연어알>과 <영거 앤 영거>의 감독이다. 이 두 영화도 기가 막힌데......

그러니까 가설라무네 13,4년 전, <바그다드 카페>를 본 직후 사무실의 이 선생님과 함께 진주로 1박 2일의 출장을 가게 되었다. 차안에서 자연스레 영화 이야기가 나왔다. 이 선생님은 50대 중반의 우아한 여성으로 평소 점퍼 차림에 청바지 등 불량한 복장으로 출근하는 나를 별로 탐탁하게 여기지 않는 눈치였다. 아무려나, 나는 또 나대로 너무 세심한 데만 신경쓰고 잔소리가 많고 자신이 하이클래스임을 은근히 자랑하는 그녀가 싫었다. 그런데 어떻게 진주 남강변 수주 변영로의 '논개'  시비 제막식에 동행하게 된 것이다.

회사에서 차를 한 대 기사님과 함께 보내주었다. 요즘 재밌게 본 영화가 뭐냐고 물어서 <바그다드 카페> 라고 했더니 이 선생님은 <슈가 베이비> 이야기를 해주셨다. 역시 퍼시 애들론의 작품으로 무시무시하게 뚱뚱한 노처녀가 전철 역무원인가 운전사를 짝사랑한다는 스토리였다. 예쁘게 보이려고 화장을 하고 예쁜 옷을 입어보는데 거울 속의 그녀는 예뻐지긴커녕 더욱 악화일로를 걷는다는 얘기. 그 뚱뚱한 노처녀가 바로 <바그다드 카페>의 야스민(마리안느 제게브레히트)이었다니 나는 아주 환장을 하며 들었다.

차 안에서 영화 얘기로 죽이 맞은 우리는 진주에 도착하여 행사가 끝나자마자 가는 길에 눈여겨봐둔  시내의 영화관으로 갔다. (나는 흥이 오르면 주위 사람 혼을 빼놓는 데 뭐가 있다.) 그리하여 탄광촌 주변을 그린 박광수 감독의 <그들도 우리처럼>을 낯선 도시의 재개봉관에서 관람했다. 그리고 내친김에 술집으로 직행했다. 이 선생님같은 고상한 초로의 여성이 등장하자 손님도 없던 터 그 술집 주인은 싱글벙글하며 서비스가 만점이었다. 우리는 그날 밤 무슨 얘기를 그렇게도 열렬히 나누었던 것일까? 이 선생님은 재개봉관에서 영화를 보는 거나 이렇게 생긴 주점은 처음이라고 했다.

다음날 아침, 우리는 조금 머쓱한 얼굴로 만나 밥을 먹고 서울로 올라오는 차를 탔다. 이상도 하지? 죽이 맞아 열광했던 지난밤의 일이 꿈만 같이 여겨졌다. 인생에는 알수없는 그런 순간이 가끔 있는 법이다.

 

* 좋은 이미지 사진을 소개해주신 투풀님, 고맙습니다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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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rblue 2004-10-22 11: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바그다드 까페, 어쩐 일인지 볼 기회가 없었네요. 이 참에 비됴를 빌려볼까...

깍두기 2004-10-22 11: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님의 얘기를 듣다 보면 저는 인생의 중요한 뭔가를 놓치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요. 영화의 세계....그러나 이제 아무리 재밌는 비디오도 보다가 자버릴 만큼 늙어버렸으니....(그게 늙었다는 척도라고 하더군요. 밤에 비디오 빌려놓고 10분만에 잠드는 것...)
그래도 전 언젠가는 님이 언급하신 영화들을 보고 말겠습니다. 이 영화가 이렇게 재밌게 느껴지는 것은 영화가 좋기 때문인가, 아니면 님의 말빨 때문인가 확인하기 위해서....^^

로드무비 2004-10-22 12: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새벽별님, 제 방 이미지(그런 게 있다면)와 잘 어울리죠?^^
블루님, 이 영환 꼭 가지고 있어야 해요.
저는 곰돌이 푸랑 한 테이프에 누가 복사해서 줬어요.^^;;;
깍두기님, 아주 좋은 영화는 그때그때 극장 가서 보세요.
하기야 사람마다 취미가 다 다르니까요.
그래도 욕심난다 하시니까...^^;;

하얀마녀 2004-10-22 14: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 하루, 마치 단편 소설같습니다. ^^

어룸 2004-10-22 16: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천만에요!! 잘써주셔서 제가 감사합니다~! 앞으로도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사와요~^ㅂ^
글구 요건 선물~^^

(수동멈춤밖에 안되니까 말씀하시면 삭제해드릴께요, 스물네시간 항시대기^^)

전 퍼시애들론 꺼는 이거랑 '영거앤영거'밖에 못봤어요, '영거...'도 참 좋아했는데...(분명히 녹화떠서 얻다 뒀는데 실종..ㅠ.ㅠ)
암튼 결론은 '슈가베이비' 넘 보고 싶어요~ >ㅂ<


미누리 2004-10-22 18: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바그다드 카페하면 노래 소리가 들립니다. 아이 엠 콜링 유~(콜링을 폴링으로 잘못 듣던 적이 있었지요^^;;)
그렇지 않아도 바뀐 이미지가 참 좋다는 생각이 새삼들어 이미지 멋져요라고 이야기하러 왔는 데 영화이야기까지 보고 가네요.
모래바람하고 애절한 노래소리가 황량하였습니다. 그 영화.

2004-10-22 20:19   URL
비밀 댓글입니다.

플레져 2004-10-23 02: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야밤에 울려퍼지는 콜링 유... 참 좋으네요.
야스민의 마술이 너무 좋았어요. 야스민을 그린 화가도...
로드무비님 서재에 잘 어울려요...

kleinsusun 2004-10-23 19: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바그다드 카페> 정말 재미있게 봤어요.
대문 이미지 멋지네요.
<파니 핑크>(원제: Keiner liebt mich) 보셨나요?
<바그다드 카페>를 좋아하신다면 분명 좋아하실 꺼예요.강추합니다!

로드무비 2004-10-24 11: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음악 올려주신 투풀님, 정말 고맙습니다.^^
그리고 수선님, 저도 파니핑크 좋아하는 영화랍니다.
'아무도 나를 사랑해주지 않아...'
테이프가 너덜너덜해지도록 들었죠.^^

숨은아이 2004-10-25 22: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영거 앤 영거"는 스타일이 많이 달라 좀 당황했더랬는데... ^^ 새로운 정보 고맙습니다. "슈가 베이비"! 잊지 않기 위해 퍼갑니다.

로드무비 2004-10-26 10: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 숨은 아이님.
며칠 지나서도 리플을 달아주시는군요.
가만 생각해 보니 남편이 얼마 전 독일에 도서전시회 출장 갔을 때
사오라고 부탁하면 좋았을걸 하는 후회가......
언젠가 슈가 베이비 볼 날이 있겠죠?^^

숨은아이 2004-10-26 12: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가 요즘 매일 페이퍼를 못 봐서 계속 뒷북 댓글을 달고 있답니다. ^^

2004-10-27 11:44   URL
비밀 댓글입니다.

로드무비 2004-10-27 21: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라일락와인님, 설마 그렇다고 해서 앞으로의 제 모든 글에
의무적인 댓글을 다는 만행을 저지르시진 않으시겠죠?
진주 이야기 써놨는데 그리고 다른 것도 아니고 바그다드 카페 얘긴데
님이 안 와주셔서 시무룩했단 말이에요.
맞아요, 진주의 극장과 술집은 허름해서 더 인상적이었어요.
평소 경원하던 사이인 직장의 동료(나이가 많은)와의 원나이트스탠드였다고 할까요?
아무튼 님은 저보다 훨씬 성숙한 분이시군요. 진작 알고 있었지만...

인터라겐 2005-04-12 10: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로드무비님 서재에 오면 정말 시간이 빨리 갑니다..찬찬히 하나 하나 읽다보면 마치 제가 저걸 꼭 해야하지 싶은 생각이 든다니깐요...저 이글이 너무 마음에 들어 가져갈께요..이번주에는 저 영화 꼭 빌려다 봐야겠어요...전 아직 못봤거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