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소소한 일상 - 다자이 오사무 산문집
다자이 오사무 지음, 김춘미 옮김 / 시공사 / 2007년 3월
평점 :
품절


몇 주 전, 영화 <혐오스런 마츠코의 일생>을 보러 갔을 때
꼴에 소설가라는 마츠코의 기둥서방 방에서 대문짝만한 다자이 오사무의 얼굴을 보았다.
금방이라도 쓰러질 듯 함부로 쌓인 책들과,
햇빛을 차단하는 싸구려 커튼 한 장이 전부인 그 골방, 벽에 붙은 흠모하는 소설가의 대형사진.
1948년, 다자이 오사무의 무덤 가에서 할복자살한 문학청년이 있다고 들었는데
그가 바로 그러고도 남을 위인이었다.

지난주에는  <소라>라는, 스튜어디스가 주인공인 만화를 읽는데
'쓰가루(津輕)'가 나왔다.
다자이 오사무가 태어나서 자란 고향이다.
60년 전 스스로 생을 마감한 이 작가의 살아생전 흔적을 혼자 좇는
초췌한 몰골의 청년들. <쓰가루> 한 권을 품에 안고......
(바닷가 그 스산한 언덕도 좋았지만 언젠가 나도 그 해저터널의 투명창 위에서
물결이 합류하고 부서지는 장면이 보고 싶다.)

소설가 아쿠다가와 류노스케의 문학강연회에 참석한 지 20일 뒤
그의 자살 소식을 듣고 소년 다자이 오사무는 엄청난 충격을 받는다.
오래 전 나는 김승옥과 이제하, 최인호의 글에서 공통된 어떤 수상한 냄새를 맡았는데
알고봤더니 다자이 오사무의 감수성이라는 향수였다.

우리나라의 많은 작가들이 황홀해 하며 언급했던 <사양(斜陽)>의 그 유명한 장면은
<크레이브의 부인>(처음 본 제목!) 같은  책이 모티브가 되었다고.
'그 시절의 귀부인은 궁전의 정원이나 복도 계단 밑의 어두운 곳에서
태연하게 소변을 봤다'(<나의 소소한 일상> 126쪽)고 하는데,
정원 덤불 속의 방뇨 장면으로 그렇게 멋지게 처리하다니!

<나의 소소한 일상>을 읽고 나서 나는 책꽂이를 뒤져  '쓰가루'와 '쓰가루 통신'을 묶은
<다자이 오사무의 귀향>(1993년 진화 刊)을 꺼내어 다시 읽었다.

다자이 오사무를 읽고 나면  하염없어지고 몸과 마음이 녹작지근해지지만,
이상하게도 뭔가 조그만 것이라도 행동하게 된다.
툭 튀어나와 내내 신경을 거슬리게 하던 못을 망치로 박아 넣는다든지,
엉망인 책꽂이를 뒤진다든지, 하다못해 슬리퍼를 끌고 동네 가게에 맥주라도 사러.......

-- 창작에서 가장 당연히 힘써야 하는 것은 정확을 기하는 일입니다.
그 외에는 아무것도 없습니다. 풍차가 악마로 보이거든 주저말고 악마로 묘사해야 합니다.
또 풍차가 역시 풍차 이외의 것으로 보이지 않을 때에는
그대로 풍차를 묘사하는 것이 좋습니다.
실은 풍차가 풍차로 보이지만, 악마처럼 묘사하지 않으면 예술적이 아니라고 생각하고,
뻔한 궁리를 이리저리 하여 낭만적임을 자처하는 멍청한 작가도 있습니다.
그런 자는 평생 가도 무엇 하나 포착하지 못합니다.(<나의 소소한 일상> 242~ 243쪽)

"예술적 도취라는 웃기는 짓은 집어치우라"는 다자이 오사무.
그러면서 그 자신은 독한 체취 혹은 감수성이라는 향수로, 수많은 청년들을 사로잡았다.
평생 가도 무엇 하나 포착할 기미가 없는 나이지만, 그를 만나는 일은 아직도 즐겁다.













댓글(20) 먼댓글(0) 좋아요(47)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비로그인 2007-05-10 11: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로드무비님 오래간만에 오셨네요 :)
그나저나 전 명성만 들었지 다자이 오사무를 읽진 않았거든요.
마츠코 영화 보면서도 한번 읽어볼까 생각하다가 잊고 있었네요.
이 책이라면 쉬엄쉬엄 시작할 수 있을까요? 감사합니다 ^^

Mephistopheles 2007-05-10 11: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행동은 통속적일진 몰라도 글로 표현하면 근사해진다는 말씀이신가요..?? ^^

로드무비 2007-05-10 11: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메피스토 님, 반갑습니다.
그런데 통속이 뭐고 근사가 뭔지......??
죄송하게도 질문의 뜻을 잘 모르겠어라.
행동은 멋진데 글로 표현하면 조잡해지는 경우는 더러 봤습니다만.=3=3

체셔고양2 님, 마츠코가 뭐가 혐오스럽다는 말이냐,라고 하셨죠?
그 페이퍼 참 멋졌어요.
저도 영화를 보며 그렇게 생각했거든요.
다자이 오사무의 글은 통쾌하고 좋아요.
읽고 싶다는 생각이 들 때, 그 때 읽으세요.^^

Mephistopheles 2007-05-10 12: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원 덤불 속의 방뇨 장면은 상상하면 젼혀 아름답거나 멋지지 않는데..
표현은 멋지다면서요.?? =3=3=3=3=3

로드무비 2007-05-10 12: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하하, 표현도 간명하고 좋았지만('태연한 얼굴'이나 '알궁둥이' 같은 표현)
그 장면을 상상하면 뭔가 그림이 떠오르는 것이 묘한 기분을.
나의 경우 어릴 때도 그 '귀족'이라는 표현은 거시기했는데,
지금 생각하면 왜 그 대목에 특히 우리 작가들이 열광했는지 궁금해요.^^


perky 2007-05-10 13: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작가 김승옥씨 작품에 풍기던 우수, 쓸쓸한 분위기가 참 좋았더랬는데 다자이오사무의 감수성이었군요. 둘다 제가 좋아하는 작가에요..

로드무비 2007-05-10 14: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차우차우 님, 그랬군요.
이제하 선생은 몇 년 전 어느 글에서 '다자이 오사무를 극복했다'고
쓰셨던 것 같은데.ㅎㅎ
소설가 김승옥의 신앙수필집도 곧 읽어보려고 합니다.^^


2007-05-10 14:28   URL
비밀 댓글입니다.

치니 2007-05-10 14: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리뷰도 읽기전에 이름만 보고 보관함에 넣게 하는 오사무의 저력.
^-^ 넣고 나서 찬찬히 읽은 리뷰의 저력도 역시 ... 오랜만이에요, 로드무비님.

로드무비 2007-05-10 15: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치니 님, 반가워유.
영화며 만화며 도처에 다자이 오사무더군요.
오늘은 또 '갓파'를 뒤집어쓰고 나온 만화 여주인공이
아쿠다가와 류노스케 책을 자꾸 들이미네요.^-^

김채원의 글 님, 전 김채원 씨보다 언니 김지원 씨의 글들이
더 좋아요. 아스라한 것이......
왜 아니겠습니까.
저도 예전에 그런 충동을 느꼈는데 충동으로 그냥 끝났어요.
이 게으름은 아마 영원히 우리를 질질.......
('우리'라고 물귀신작전을 씁니다. 헤헤~ 그 얼굴 참 멋져요.^^)


진달래 2007-05-10 16: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모르는 작가인데 글을 읽으니 무척 감상적이 아닐까... 그런 느낌이 드네요.
"태연하게"라는 표현이 유독 맘에 들어요. 음... 관심 가는 책입니다. ^^*

네꼬 2007-05-10 17: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음 흔들릴까봐, 이달엔 더이상 책을 사지 않겠노라고 공표하였는데.. 너무나 간단하게 흔들립니다. ㅠ_ㅠ

로드무비 2007-05-10 18: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네꼬 님, 이 책만 주문하세요.
괜시리 5마넌어치 장바구니에 채우지 마시고. 헤헤~

카페인 님, 그의 감상과 통찰이 마음에 듭니다.
그리고 '태연하게'가 관건이거든요.^^

sudan 2007-05-10 20: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질문이 있어요. ^^ 사양의 유명한 장면이 뭔데요? 분명 읽은 소설인데, 왜 저는 기억이 안 나는걸까요.

waits 2007-05-10 23: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와, 로드무비님 반가워요. 히히~
여전히 보고 읽고 '포착'하고 계시는군요. ^^

나비80 2007-05-11 12: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잘 읽었습니다. ^^

로드무비 2007-05-11 16: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소이부답 님, 읽어주셔서 고맙습니다.^^

나어릴때 님, 포착은요.
손가락 사이로 술술 흘려보내고 있습니다.^^

수단 님, 산책 중에 갑자기 요의를 느끼고 정원 덤불 속에 쪼그리고 앉잖아요.
그것이 하나도 불결하게 느껴지지 않고 너무나 자연스럽다며
진정한 귀족이란 저런 모습인가, 감탄하던 장면.
우리도 뭘 하든 태연하기로 해요. 하하.^^


kleinsusun 2007-05-13 09: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꼴에 소설가라는..."
로드무비님의 리뷰는 시작부터 화끈하다니까요! 호홋

다자이 오사무의 책을 읽고 나면 뭔가 작은 행동이라도 하게 된다.......
오.... 저도 읽으면 이런 반응을 할까요?ㅋㅋ 궁금해서 읽어봐야 겠어요.^^

로드무비 2007-05-14 13: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수선 님, 님은 저랑 달리 스케일이 큰 행동을 하실지도 모르죠.
'꼴에'라는 말 무지 좋아합니다.
'꼴에 주부라고'는 저를 놀려먹는 말.^^

로드무비 2007-06-11 17: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內外 님, 대수로운 걸 포착한 건 아니고요.
아무튼 기미 정도.
(반갑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