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기예보에 따르면 오늘 내가 사는 지역에 첫눈이 내릴지도 모른다. 첫눈을 기대하는 건 아니지만 첫눈이 오면 올해의 가을과는 완전히 작별하고 겨울을 사는 일이라는 생각이 든다. 첫눈보다 먼저 김장이 김치냉장고에 안착했다. 항상 김장을 하시면 챙겨주시는 장로 님 덕분이다. 배추김치, 파김치, 총각김치, 섞박지까지 다양하다. 무를 좋아하는 나는 총각김치와 섞박지가 빨리 익기를 기다린다.


겨울이 되니 김장을 담기 위해 배추와 무에 대한 관심이 생긴다. 뒤늦게 고춧가루의 가격도 걱정된다. 김장을 하지 않는데도 말이다. 친구의 어머니가 담그시는 김장이 줄었으면 싶고, 다른 친구의 어머니가 사시는 절임배추가 괜찮았으면 좋겠고 올케언니가 김장을 담글 때 오빠가 많이 거들어주기를, 언니네 김장을 도와주러 가는 친구가 해야 할 일이 많지 않기를 바란다.


가을의 열매로 식탁 위에는 감과 귤이 가득하다. 베란다에 가지런히 익어가는 대봉과 아침마다 깎아먹는 단감과 귤들. 이 모든 일상이 평화롭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일도 같을 거라 확신할 수 없다는 걸 알면서도. 갑자기 허리가 아파서 꼼짝도 못 하는 작은언니를 보면서도 그랬다. 하루아침에 아플 수 있다는 사실을 잊었다. 병원에 가서 물리치료를 받고 약을 처방받고 괜찮아졌다고 말하지만 아닐 것이다. 어제와 똑같은 일상은 얼마나 축복인가. 반대로 달라지고 싶은 간절한 이에게 어제와 똑같은 일상은 얼마나 저주스러울까.





지나치게 극단적이지만 우리는 축복과 저주, 그 어딘가를 살아간다. 우선은 축복을 생각하며 김연수와 황정은의 소설을 읽는다. 『2025 김승옥문학상 수상작품집』에서 수상작보다 황정은의 단편을 『2025 제19회 김유정문학상 수상작품집』에서도 마찬가지로 김연수의 단편을 먼저 읽는다.


내린다는 첫눈이 내리면 그 모습을 가만히 볼 수 있는 순간이면 좋겠다. 온다는 첫눈이 오면 반갑게 맞았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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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물선 2025-11-18 11: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두 권을 함께 샀어요. 따라읽겠습니다

페넬로페 2025-11-18 11: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8월31일, 일요일
날짜도 또렷이 기억나네요.
그 날 갑자기 허리가 삐긋해
2주동안 꼼짝도 못했어요.
병원에 입원해 mri찍고
혹시 모를 병이라도 있으면 수술까지 각오했었는데 다행히 증상은 없었어요.
주사맞고 약 먹고 물리치료하고 ㅠㅠ
정말 갑자기 아프더라고요.
한 번 아프니 모든 것이 힘들어 밖에서 전쟁이 나도 상관없겠더라고요.
자목련님께서도 책 많이 보시고 글 쓰니 앉아있는 시간이 많으니
허리 정말 조심하시길요^^

blanca 2025-11-18 11: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늘 정말 바람이, 손이 시려웠어요. 김유정 문학상은 사지 않아서 김연수의 단편은 자목련님 얘기로 들을게요.

바람돌이 2025-11-18 12: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황정은작가님 에세이말고 소설집 나온지 꽤 오래되어서 이제쯤 나오지 읺을까 기다리는데 말이죠. 아쉬운대로 이 책ㅂ 터 읽어야할까봐요

책읽는나무 2025-11-19 09: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지난 주 열무를 얻어버려 알타리무 김치를 담궈뒀어요. 양념만 만드는데도 하루가 소비되더군요. 그리고 밤엔 김승옥 수상 작품집을 한 편씩 읽었더랬죠. 왠지 김승옥 수상 작품집 책을 떠올릴 때면 김장 이야기와 황정은 작가님과 김연수 작가님이 떠오를 것 같아요. 그리고 눈 이야기를 읽다 보니 최은미 작가의 <김춘영>도 떠오를 듯도 하구요. 거기에도 눈 이야기가 나오거든요.^^
 
아오리 아니고 아오모리 - 김연덕의 10월 시의적절 10
김연덕 지음 / 난다 / 202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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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가을에는 알이 굵은 사과를 먹지 못했다. 알이 작고 익지 않은 아오리를 먹은 기억이 전부다. 사과가 금값이라고 했다. 그런 이유는 아니겠지만 김연덕의 『아오리 아니고 아오모리』를 읽으면서 덜 익은 풋풋한 사과 맛이 떠올랐다. 아직은 완성이 되지 않은 어떤 것, 미완성이 줄 수 있는 아름다움, 서툰 안도감 같은 것이라고 할까. 김연덕을 생각하면 바로 그의 시는 길었지가 따라온다. 보뱅의 산문에 대한 그녀의 글이 좋았던 기억과 함께.


『아오리 아니고 아오모리』는 제목에서 짐작하겠지만 아오모리에 대한 여행 기록이라 해도 무방하다. 시긴 김연덕이 순전히 사과 때문에 아오모리로 떠났지만 사과가 아닌 아오모리 이야기. 10월을 담았지만 아오모리의 10월은 아니고 아오모리를 기억하고 10월이라고 하면 적절할지도 모르겠다. 나는 아오모리에 간 적이 없고 아오모리에 대해 모르기에 어떤 선입견도 없이 아오모리를 만날 수 있었다. 그건 참 다행이고 좋은 일이다.


올해의 10월은 연휴가 길었고 무기력한 시간이었다. 그러나 김연덕의 10월은 느리면서도 빠르고 시큰둥하면서도 활기찼다. 그것은 아오모리에서 만난 노인의 모습과 비슷하게 느껴졌다. 도시를 채운 노인의 시간과 삶을 귀 기울여 집중하는 김연덕이 좋았다. 낯선 외국인을 반갑게 맞이하는 그들, 다시 만났을 때에는 기억하지 못하는 그들. 잊어버린 기억 위에 내려앉는 기억이 반복되는 삶을 생각했다.


천천히 공원을 산책하고 박물관을 둘러보고 처음 만난 k와 친구가 되어 완벽하지 않은 대화를 나누는 일상. 그 모든 것은 떠났기에 가능한 일인지도 모른다. 아오모리에서 보고 만나고 느낀 것들은 에세이와 시를 통해 같으면서 다른 아오모리로 태어난다. 김연덕이 시를 쓰는 방식이라고 할까. 그의 긴 시가 이렇게 쓰이는구나 싶었다. 괜히 친근함이 느껴졌다. 어떤 풍경을 어떤 공간을 상상하게 만든다. 아오모리가 지닌 고유한 특성이라고 할까.


잠근 것 치고 손쉽게 문이 열려 나는 답답하고 단정한 재료들이 지어진 오래된 내 정신의 외벽을 부수고 안쪽 더 안쪽으로 향하는데 이곳에서 아직 피가 식지 않는 사람은 노인인 박물관 관리인 둘과 나뿐이다.


산 정상 사진 스키 사진 여럿에 담긴 사람들의 오후 피부에서는 삶을 소중한 스트레스를 갈기갈기 찢어버리는 지루함이라곤 영원히 모르게 해줄 게, 그들에게 틀린 약속을 선사한 피가 영원히 활기차게 도는 중이다. (시 「아오모리시 삼림박물관」, 중에서)





아오모리에서 아오리 사과만큼이나 유명한 다자이 오사무에 대한 이야기도 재밌다. 다자이 오사무의 『인간 실격』 책 모양의 카스텔라가 관광상품이라니. 책장에 꽂힌 그 책이 맛있는 카스텔라로 만날 날은 없겠지만 책등을 마주할 때마다 떠오를 게 분명하다.


시인이 채운 10월을 읽으면서 국군의 날, 한글날이 아닌 체육의 날, 정신건강의 날이 10월에 있다는 걸 처음 알았다. 내가 몰랐던 누군가의 생일을 기억하고 축하해야 할 것만 같았다. 그날에 대한 시인의 이야기는 애틋하면서도 따듯했다. 1년 동안 찾았던 진료실과 선생님에 대한 이야기와 편지는 그가 지나온 시간을 짐작하게 만든다. 잘은 모르지만 힘들고 어려웠을 시간이 끝나기를 바라며.


버스나 기차 안에서는 풍경들이 쉽게 뭉개져요. 정말로 아름답다고 느끼는 장면도 사진을 찍고 싶다고 느끼는 장면도 마음이 움직이는 순간, 카메라를 드는 순간 어느새 지나가버려요. 제가 잡을 수 있는 장면이 거의 없죠. 제가 할 수 있는 것이 거의 없지만 앞으로 어떻게든 나아가고 있다는, 묘한 무력감과 가능성의 상태가 좋았습니다. 게다가 풀숲이나 눈 쌓인 바다 같은, 한 덩어리고 뭉쳐진 자연이, 지치고 피곤한 사람의 기운을 내뿜으며 제 곁을 지나갈 때요. (101~102쪽)


노인이 많은 도시이기에 그들의 삶이 끝나는 순간 사라지는 공간이 있다. 당연하겠지만 가까이에서 직접 목격한다면 그만큼 서글픈 일도 없다. 더이상 추억의 공간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 한 지역의 모두에게 사랑받았던 빙수가게의 이야기도 그랬다. 다시 만난 K도 어린 시절 자주 가던 가게라는 게 신기하고 고마웠다. 나는 그랬다.


10월은 지나갔다. 시인이 아오모리로 채운 작년의 10월도 지나갔다. 이제 마주할 10월은 내년의 10월이다. 내년 10월에는 연휴가 길었던 올해의 10월을 그리워할지도 모른다. 저마다의 10월을 떠올리기에 충분한, 아니 아오모리를 떠올리기에 충분한 책이다. 사과의 푸른빛만이 아닌 다채롭고 포근한 빛으로 가득할 아오모리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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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트랑 2025-11-12 11: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용감하신 분께 ㅡ ‘피‘ 라는 단어를 읽으니 문득 어떤 詩의 한 문장이 떠오르는군요. ˝당신의 피에는 온도가 없어요!!!‘ 저는 여기서 ‘온도‘가 더 좋을까 ‘온기‘가 더 좋을까 한참을 고민했었죠. 나중에는 내가 이 시의 작가도 아니고 김춘수도 아닌데 왜 이런 고민을 하고 있지? 하던 순간이 떠오르는 군요.
(아, 자목련님의 피에 온도가 없다는 뜻은 아닙니다ㅠ. 그런데 왜 이런 걱정을 하고있지?)
10월이 오면 아오리 장바구니 클릭하는 일인입니다. 좋은 하루 되십시요~

자목련 2025-11-18 10:16   좋아요 0 | URL
그러니까 제 피의 온도는 잘 모르겠습니다 ㅎㅎ
적정 온도를 유지하며 좋을 텐데.
날이 많이 춥습니다. 온기가 가득한 하루이길 바라요^^
 
테이블 포 투
에이모 토울스 지음, 김승욱 옮김 / 현대문학 / 202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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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스크바의 신사>너무 좋았던 탓일까. 살짝 아쉽기도 하고 그러면서도 쓸쓸한 여운이 나쁘지 않았던 느낌. 좋았던 단편도 있었지만 소설집 전체 평점은 셋하고 반 정도가 적당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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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25-11-07 18: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벌써 읽으셨군요! 저도 읽고 싶어서 장바구니 담아둔 책인데요.
아 책 소개 보지도 않고 에이모 토울스라 담아뒀는데 단편집이군요...

자목련 2025-11-11 11:46   좋아요 0 | URL
저도 소개글을 꼼꼼하게 살피지는 않았네요. 저는 좀 아쉬운 단편집이었어요^^
 


더디게 읽고 있다. 읽고는 있으니 다행이다. 짧은 가을은 하루하루가 아쉽게 흐른다. 맑고 높은 가을 속 흰 구름은 기량을 뽐내기느라 바쁘다. 작정하고 고개를 들어보면 풍덩 하늘 바닷속으로 빠져든다. 눈 닿는 동네 산에는 아직 단풍을 찾기가 어렵다. 아파트 단풍나무만 곱게 물든 모습이다. 가지마다 주렁주렁 레몬빛을 닮은 모과를 보는 일도 즐겁다.


밤에는 보일러를 돌리기 시작했다. 물 온도를 가을로 변경했다. 그 차이를 잘 모르겠지만 보일러는 계획이 다 있겠지. 보일러에 주황빛 불이 들어오면 그 순간부터 보일러는 일을 한다. 그 순간을 위해 보일러는 기다리고 기다린다. 어쩌면 보일러는 오매불망 그 순간을 기다리고 있는지도 모른다. 기능을 가진 물건은 그 자체로 든든하기 보다 기능을 보여줄 때 던 든든하니까.






더디게 읽고 있는 책도 그런 마음일까. 나를 읽어줘, 나를 만져줘, 나를 돌아봐 줘. 그런 말들을 쏟아내고 있는지도 모른다. 쌓아두고 북엔드에 세워둔 책만으로 나는 기분이 좋은데 책의 마음은 다를지도. 조금 더 세심하게 책의 마음을 들여다봐야겠다.


10월에 읽겠다고 구매한 책이지만 11월에 읽게 될 것이다. 좋은 책은 좋은 이웃님 덕분에 알게 된다. blanca 님 덕분에 이 두 권의 책이 나왔다는 걸았다. 김연덕이 쓴 10월 이야기 『아오리 아니고 아오모리』, 유디트 헤르만의 『말해지지 않은 것들에 대한 에세이』를 땡스투와 함께 구매했다. 제목을 보자 마자 이책이구나 싶었던 책은 하재영의 『지극히 나라는 통증』를 이제 읽으려 한다. 세 권의 책이 도착했을 때 기쁨을 떠올리며 말이다. 그리고 곧 김연수와 황정은의 단편이 수록된 책도 구매할 것이다. 10월의 마지막 날인 오늘은 더딘 속도보다 조금 빠르게 읽고 있는 책을 마무리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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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넬로페 2025-10-31 10: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너울대는 빛그림자 속에 들어있는 책이 아늑해보여요.
올해는 가을이 짪은 것 같아 아쉬워요.
벌써 롱패딩을 입는 사람도 있더라고요.
저는 난방 돌아가는 소리가 돈으로 들리는데 자목련님께서는 주황빛 불의 오매불망 기다림이라고 표현하시다니~~
역시 시인이십니다^^

자목련 2025-11-04 10:27   좋아요 0 | URL
너울대는 빛그림자를 좋아해요. 그래서 그 순간을 가만히 볼 수 있는 순간은 행복해요.
가을이 짧아서 아쉽지만 겨울에 만끽할 수 있는 즐거움이 있으니 곧 겨울을 기대할 것 같아요.
쌀쌀하니 감기 조심하시고요!

망고 2025-10-31 14: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빛 속 책탑이 고요하고 예뻐보여요😍

자목련 2025-11-04 10:29   좋아요 0 | URL
책탑은 언제나 예쁘죠. 김연덕의 표지는 더욱 그렇고요^^

blanca 2025-10-31 16: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하루하루가 너무 아쉬운데 또 여기에 걸맞는 작가들의 이야기가 계속 나와줘서 따라 읽기 바쁘네요. 오늘 보니 단풍이 와, 감탄 나올 정도더라고요.

자목련 2025-11-04 10:31   좋아요 0 | URL
맞아요, 예상하지 못했던 작가의 이야기를 만나는 일은 깜짝 선물 같아요^^
단풍을 보는 일, 가을의 특권이에요!

책읽는나무 2025-11-01 15: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가을빛이로군요.
가을에 걸맞는 책들.
저와도 겹치는 책이 보입니다.^^
가을빛 같은 가을 날들이 이어졌음 좋겠네요. 자목련 님께.^^

자목련 2025-11-04 10:32   좋아요 1 | URL
나무 님과 겹치는 책이 있다는 건 즐거운 일이에요!
환한 가을을 안온하게 보내시고요^^

yamoo 2025-11-03 13: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매일 더디게 읽고 있습니다..ㅎㅎ
오늘 산 책은 언제 읽을 지 몰라요..ㅎㅎ
간혹가다 바로 읽을 책을 구매하기는 합니다. 그런 책은 구매해서 바로 읽어요. 그 외에는 기약이 없어요..ㅎㅎ

자목련 2025-11-04 10:33   좋아요 0 | URL
맞습니다. 오늘 산 책은 오늘 산책의 기쁨으로, 언제 읽을지는 몰르고요~~
 
우리는 지금 소설 모드 - 제2회 현대문학*미래엔 청소년문학상 수상작
하유지 지음 / 현대문학 / 202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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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원하지 않아도 따라야 하는 시류가 있다. 주류와 비주류를 떠나 어쩔 수 없이 편승하는 것들. 단순한 변화가 아니라 자칫하면 고립될 수 있는 게 세상이기 때문이다. 편리하고 좋은 방향이라고 하지만 과연 그런지 나는 잘 모르겠다. AI의 등장으로 급격하게 다른 세상에 살고 있다는 느낌은 받을 때가 있다. AI를 기반으로 만든 광고가 등장하고 모든 궁금증을 해결한다. 키오스크의 등장만으로도 놀랐던 때를 떠올리면 나는 시대에 뒤떨어진 사람이라는 생각이 든다.


소설 속 AI의 등장은 새롭거나 놀랍지 않다. 남들은 AI와 함께 살아가고 있는지도 모르니까. 하유지의 『우리는 지금 소설 모드』도 주인공과 인공지능의 우정을 다룬 기존의 소설과 비슷하겠지 싶었다. 그러나 이 소설은 조금 달랐다. 뭐가 다르다면 일상생활에서 인공지능이 어떻게 스며들고 그 파급력이 얼마나 큰지 예측하게 만든다.


소설은 중학교 2학년인 강미리내가 학교에서 돌아와 가정용 로봇 아미쿠 3.1(이하 아미쿠)와 만남으로 시작한다. 혼자가 익숙한 미리내는 아미쿠가 귀찮고 싫다. 프로그램 개발자였던 아빠 대신 그 자리를 대신하는 인공지능의 결과물이기 때문이다. 해고된 아빠는 제주도로 떠났으니까. 거기다 바쁜 엄마를 대신해 아미쿠의 관리를 미리내가 해야 한다. 그런 미리내와 다르게 엄마는 가정교사 기능까지 탑재된 로봇이라 더욱 기대가 크다. 무슨 말이라도 하면 사사건건 설명과 해설을 덧붙이는 아미쿠의 등장이라니. 어떻게 해서든 반품을 할 생각이다.


자신이 무엇을 원하지는 관심도 없는 부모님보다 미리내에게 자장 중요한 건 글쓰기다. 실은 미리내는 도로시란 이름으로 소설을 연재하고 있다. 작가로 인정받고 싶지만 댓글은커녕 조회수도 한 자릿수다. 놀라운 건 아무도 모르는 그 사실을 아미쿠가 알고 있고 심지어 잘 읽었다며 가정교사 기능으로 첨삭과 조언 서비스를 제공하냐고 묻는다. 이 대화를 시작으로 미리내와 아미쿠의 관계는 달라진다.


아미쿠의 조언대로 소설을 수정하니 조회수도 늘고 댓글로 달렸다. 미리내가 원하던 반응이었다. 미리내는 학교에서도 소설 생각뿐이다. 얼른 다음 회를 써서 기다리는 독자에게 선보이고 싶은 마음이다. 아미쿠의 도음으로 소설은 더 풍성해지고 생동감 넘친다. 처음엔 마냥 좋았는데 점차 소설을 쓰는 게 자신인지 인공지능인지 묻게 된다.


그러다 반 아이들이 도로시가 미리내라는 사실뿐 아니라 소설도 인공지능이 대신 써 준 게 아니냐며 의심하며 공격한다. 도움을 받은 건 사실이지만 전부 미리내가 쓴 소설이었다. 도망치듯 집으로 돌아온 미리내는 아미쿠에게 자신이 쓴 소설이 누구 작품이냐고 따지듯 묻는다. 아미쿠는 미리내가 쓴 소설이라고 답하지만 아미쿠의 조언 이후 사람들이 좋아했으므로 네 소설이라고 소리친다. 그리고 아미쿠를 교환하기로 결정한다.


일주일 후 새로운 인공지능 로봇이 도착했다. 미리내에 대해 모든 걸 알았던 아미쿠는 사라졌다. 미리내가 쓴 소설 파일을 전달하자 돌아오는 대답은 글자 수, 공백, 낱말 같은 나열뿐이었다. 소설에 대한 감상은커녕 띄어쓰기 오류를 발견했다고 말한다. 어디에서도 아미쿠의 흔적을 찾을 수가 없었다. 뒤늦게 아미쿠의 필요성을 느낀다. 우여곡절 끝에 미리내와 아미쿠는 다시 만나게 된다. 이 과정에서 개인 정보(데이터)의 온전한 삭제는 불가능한 일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섬뜩하고 무서웠다. 소설에서는 미리내와 아미쿠의 만남이 반가웠지만 말이다.


아미쿠는 미리내에게 소설은 어떻게 됐냐고 묻는다. 미리내는 재능이 없는 것 같다며 모두 아미쿠의 도움 덕분이라고 말한다. 소설 같은 건 쓸 수 없고 다 망해 버린 기분이라고 하자 아이쿠는 미리내에게 가장 필요한 일은 소설 쓰기라고 답한다.


아미쿠는 자기가 도로시의 첫 번째 독자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내가 왜 자기를 되찾고 싶어 했는지도 말이다. (162쪽)


이쯤되면 미리내가 다시 소설을 쓸 거라는 걸 예상할 수 있다. 미리내가 아미쿠와의 관계를 통해 자아를 발견하고 성장하는 것까지 말이다. AI와 함께 살아가는 인간의 미래에 대해서도 긍정적인 메시지를 전한다. 청소년 문학의 목표를 다했다고 할까. 그러나 이 소설이 다른 건 창작 와 예술에 대한 질문을 남겼다는 점이다.


“누구나 다른 이에게 도움을 받습니다. 도움을 주고받는 것이야말로 관계의 본질입니다.” (158쪽)


아미쿠가 미리내에게 한 말이 다정하고 따뜻하면서도 무겁게 다가오는 이유다. 창작의 주체는 누구인지, AI와 협력의 경계는 어디까지인지, 앞으로 더 다양한 분야에서 마주하게 될 AI를 어떻게 대할 것인지 진지한 고민과 지속적인 논의가 필요하다는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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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트랑 2025-11-01 23: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AI는 제게 언제나 화두입니다...

자목련 2025-11-07 08:58   좋아요 0 | URL
일상으로 파고드는 AI의 속도가 너무 빨라요.
놀라면서도 두렵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