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 김승옥문학상 수상작품집
최은미 외 지음 / 문학동네 / 202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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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작은 여름의 더위였을 것이다. 그러니까 읽는 일도 재미없고 그것에 대해 쓰는 일이 즐겁지 않았던 시작 말이다. 더위에 나약한 나는 여름이 힘들었고 읽기에 필요한 집중은 떨어졌다. 그 시간은 길게 이어졌고 현재까지 이르렀다. 책을 읽다 발견하는 문장에 밑줄은커녕 옮겨 적는 일이 의미가 없었다. 가을 비슷한 계절이 오고 긴 연휴가 끝나고 11월이 되도록 그랬다. 책을 좋아하는데, 좋아하는 소설을 일고 뭐라고 써볼까 싶은 마음이 일어선 건 다행이다. 그래서 『2025 김승옥문학상 수상작품집』은 그런 의미에서 고마운 책이다.

대상 수상작인 최은미의 「김춘영」은 가장 나중에 읽었다. 다른 해였다면 책을 받고 가장 먼저 읽었을 텐데 올해는 황정은의 「문제없는, 하루」를 읽고 거꾸로 읽어나갔다. 여성 작가 7명의 단편을 읽는 일은 작가의 최근 생각과 마음을 읽는 일처럼 느껴졌다. 그들의 관심과 그들의 시선이 닿는 곳을 상상하는 시간이기도 했다. 12·3 비상계엄을 다룬 단편이 있을 거라고 예상했고 맞았다. 소설은 그런 것이니까. 일상을 보여주고 심연 깊은 곳의 무언가를 끄집어 내는 역할을 하는 것이니까.

황정은의 「문제없는, 하루」와 최진영의 「돌아오는 밤」은 그런 맥락으로 읽었다. 두 소설의 주인공은 각자의 자리에서 하루하루 반복된 일상을 살아간다. 하루아침에 세상이 변한다고 한순간 바뀌는 일상은 거의 없으니까. 「문제없는, 하루」의 영인은 새로 구한 직장에 다니며 여동생 인범의 일상을 살핀다. 자신과는 다른 세상에 살고 있는 것 같은 인범이 향하는 시선은 고통과 상처뿐이라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생각이 다르니 그럴 수 있다고 믿으면서도 인범과의 대화가 부담스럽다. 영인은 인범이 자신의 세상으로 들어오기를 바란다. 그러다 둘은 해 뜨는 걸 보러 가고 인범은 오래전 자신이 겪은 일을 들려준다. 의도하지 않았던 행동이 불러온 결과, 악의가 있다고 생각할 수 없는 무심결에 한 행동을 돌아보지 않는 멍청함에 대해. 영인과 인범이 터널에서 마주한 사고도 다르지 않았다. 세계를 지배하고 흔드는 악, 전쟁과 죽음의 시작은 어디에서 비롯된 것일까. 곳곳에서 벌어지는 학살과 폭력은 나와는 무관한 것일까. 우리가 괜찮다고 여기는 ‘문제없는’, 하루는 진정 가능한 일일까.

황정은의 「문제없는, 하루」가 질문과 의심을 던졌다면 최진영의 「돌아오는 밤」은 현실적으로 보여준다. 주인공 은빛은 사장의 부탁으로 사장 지인의 장례식에 참여하기 위해 영국에 갔다가 돌아오는 이야기다. 장례식장에서 전하게 될 애도의 말을 준비하면서 정작 친구 향기의 죽음으로 인한 애통한 마음은 나룰 사람이 없어 슬프다. 한국에 도착하자마자 향기의 동생으로부터 향기가 자신에게 남긴 것을 받는다. 그리고 집으로 가면 되는데 그 밤이 12·3 이었다. 지하철은 끊기고 캐리어와 방전된 핸드폰을 손에 쥔 은빛 앞에 나타난 무리들. 은빛의 모든 것을 빼앗을 수 있는 존재다. 은빛에게 일어난 사고가 모두에게 일어날 수 있다는 사실은 얼마나 공포스러운가. 12·3 밤의 공포가 일상에서 사라지기까지 필요한 시간은 얼마일까. 없던 일이 될 수 없지만 일상은 회복되어야 하고 다시 시작해야 한다. 소설 속 향기가 은빛에게 남긴 편지처럼.

의미를 찾지 말고 일단 시작해. 다시 시작해. 다시 시작해. 다시 시작해. 그리고 다시 시작해. (「돌아오는 밤」, 266쪽)





다시 시작하는 일은 결심만으로 쉬운 일처럼 여겨진다. 그러나 막상 일상 속에서 무언가 다시 시작하는 일은 꽤나 어렵다. 김혜진의 「빈티지 엽서」의 주인공도 마찬가지다. 남편과 자전거 대리점을 운영하는 그녀에게 다시 시작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일까. 헬스장에서 만난 남자와 나누는 사소한 대화를 불륜으로 의심하는 주변 사람들에게 떳떳하게 설명하지 못하는 그 마음은 너무도 쓸쓸하다. 헬스장에서 만난 남자가 내민 빈티지 엽서의 내용을 해석하는 일이 빈축을 받을만한 것일까. 영어와 스페인어를 공부했던 과거와 자전거 대리점에서 고춧가루를 팔자는 남편에게 강력하게 반대하지 못하는 현재를 오가는 그녀가 내가 아는 누군가일지도 모른다는 슬픈 생각을 떨쳐낼 수 없다.

익숙한 일상을 지키는 건 그것을 포기하는 것보다 언제나 더 어려운 일이었다고. ( 「빈티지 엽서」, 180쪽)

그런 생각은 강화길의 「거푸집의 형태」와 김인숙의 「스페이스 섹스올로지」를 읽으면서도 그랬다. 「거푸집의 형태」 속 막내 이모와 똑닮은 조카의 긴밀한 관계가 한순간 무너지는 일, 「스페이스 섹스올로지」에선 전부였던 딸이 엄마가 외출하지 못하도록 신발을 버리고 머리를 깎기까지 모녀는 서로에게 얼마나 깊은 상처를 줬을까.

이처럼 가까운 가족 간에도 상처를 주는데 개인과 사회, 개인과 국가 사이에는 어떨까. 구술자 ‘김춘영’과 면담자인 ‘박정윤’의 이야기로 시작하는 최은미의 「김춘영」은 역사적 사건을 암시한다. 마지막 면담을 위한 만남이라는 설정은 유일한 생존자이거나 고증을 위해 필요한 인물은 아닐까 짐작하게 된다. 알 수 없는 긴장감은 예상치 못한 폭설로 김춘영의 집에 고립되면서 여행객 부부와 대민지원을 나온 군인을 만나면서 커진다. 자신의 위치에서 역사적 사건을 바라보는 시선, 자신의 경험으로 타인을 짐작하고 판단하는 태도에 대해 생각하고 고민하게 만든다. 좋은 소설이다.

그에 반해 배수아의 「눈먼 탐정」은 한 마디로 정의할 수 없다. 아니, 읽는 내내 힘들었다는 게 정확하다. 배수아의 소설이 언제나 그러하듯이. 예의 몽환적인 분위기와 무엇을 말하는지 가늠하기 어려웠다. 죽음 혹은 눈을 감고서야 볼 수 있는 어떤 이미지를 상상하면서도 그것은 배수아만이 그려낼 수 있는 이미지일 거라 생각했다. 그럼에도 『2025 김승옥문학상 수상작품집』에서 나를 붙잡은 건 배수아의 문장이었다. 무기력하고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깜깜한 느낌으로 가득한 나의 일상을 향해 든든한 팔을 내주었다. 아프고 쓸쓸하며 슬픈 일상이 아름다운 소설로 만들어지는 놀라움에 대해서도 알려준다.


갑작스러운 혹은 갑작스러워 보이는 불행은, 다른 종류의 불행도 예외는 아니겠지만, 사실상 매일매일 우리 곁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상이라는 것이다. 우리는 흰 두부처럼 잘린 그것을 임의로 한 조각씩 나누어 가질 뿐이다. 그것을 삶이라고 부른다. (「눈먼 탐정」, 19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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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읽는나무 2025-11-27 08: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모든 소설들이 되살아나는 듯한 리뷰에요.
읽었는데 또 읽고 싶어지는 소설들.
같은 시기에 같이 읽을 수 있어서 좋네요.^^
 
겨울 정원 - 2025 제19회 김유정문학상 수상작품집
이주란 외 지음 / 은행나무 / 202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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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연수의 단편을 읽으려고 구매한 책인데 내가 이주란의 소설을 왜 좋아했는지 확인하는 순간이었다. 그의 소설이 비슷한 결을 지녀서 그만 읽어야지 싶었는데 <가을 정원>을 읽어서 다행이다. 임선우, 최예솔의 단편은 처음이었는데 신선하고 색다른 느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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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 김승옥문학상 수상작품집
최은미 외 지음 / 문학동네 / 202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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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소설을 읽는 일은 언제나 즐겁다. 한 번도 생각하지 않았던 것들에 대해 생각하고 그것들에 대한 작가의 감각을 마주한다. 대상 수상작인 최은미의 <김춘영>, 황정은의 <문제없는, 하루>로 기우는 마음은 어쩔 수 없지만 다양한 작가의 단편과 리뷰까지 읽을 수 있는 특별한 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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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기예보에 따르면 오늘 내가 사는 지역에 첫눈이 내릴지도 모른다. 첫눈을 기대하는 건 아니지만 첫눈이 오면 올해의 가을과는 완전히 작별하고 겨울을 사는 일이라는 생각이 든다. 첫눈보다 먼저 김장이 김치냉장고에 안착했다. 항상 김장을 하시면 챙겨주시는 장로 님 덕분이다. 배추김치, 파김치, 총각김치, 섞박지까지 다양하다. 무를 좋아하는 나는 총각김치와 섞박지가 빨리 익기를 기다린다.


겨울이 되니 김장을 담기 위해 배추와 무에 대한 관심이 생긴다. 뒤늦게 고춧가루의 가격도 걱정된다. 김장을 하지 않는데도 말이다. 친구의 어머니가 담그시는 김장이 줄었으면 싶고, 다른 친구의 어머니가 사시는 절임배추가 괜찮았으면 좋겠고 올케언니가 김장을 담글 때 오빠가 많이 거들어주기를, 언니네 김장을 도와주러 가는 친구가 해야 할 일이 많지 않기를 바란다.


가을의 열매로 식탁 위에는 감과 귤이 가득하다. 베란다에 가지런히 익어가는 대봉과 아침마다 깎아먹는 단감과 귤들. 이 모든 일상이 평화롭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일도 같을 거라 확신할 수 없다는 걸 알면서도. 갑자기 허리가 아파서 꼼짝도 못 하는 작은언니를 보면서도 그랬다. 하루아침에 아플 수 있다는 사실을 잊었다. 병원에 가서 물리치료를 받고 약을 처방받고 괜찮아졌다고 말하지만 아닐 것이다. 어제와 똑같은 일상은 얼마나 축복인가. 반대로 달라지고 싶은 간절한 이에게 어제와 똑같은 일상은 얼마나 저주스러울까.





지나치게 극단적이지만 우리는 축복과 저주, 그 어딘가를 살아간다. 우선은 축복을 생각하며 김연수와 황정은의 소설을 읽는다. 『2025 김승옥문학상 수상작품집』에서 수상작보다 황정은의 단편을 『2025 제19회 김유정문학상 수상작품집』에서도 마찬가지로 김연수의 단편을 먼저 읽는다.


내린다는 첫눈이 내리면 그 모습을 가만히 볼 수 있는 순간이면 좋겠다. 온다는 첫눈이 오면 반갑게 맞았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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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물선 2025-11-18 11: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두 권을 함께 샀어요. 따라읽겠습니다

자목련 2025-11-21 09:52   좋아요 0 | URL
나란히 놓인 두 권을 상상합니다. 함께 읽는 일, 좋아요!

페넬로페 2025-11-18 11: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8월31일, 일요일
날짜도 또렷이 기억나네요.
그 날 갑자기 허리가 삐긋해
2주동안 꼼짝도 못했어요.
병원에 입원해 mri찍고
혹시 모를 병이라도 있으면 수술까지 각오했었는데 다행히 증상은 없었어요.
주사맞고 약 먹고 물리치료하고 ㅠㅠ
정말 갑자기 아프더라고요.
한 번 아프니 모든 것이 힘들어 밖에서 전쟁이 나도 상관없겠더라고요.
자목련님께서도 책 많이 보시고 글 쓰니 앉아있는 시간이 많으니
허리 정말 조심하시길요^^

자목련 2025-11-21 09:56   좋아요 1 | URL
2주 동안 입원도 하셨군요. 아픈 경험은 정말 무서워요.
근데 시간이 지나면 잊어버리고 몸을 혹사하지요.
몸을 달래고 돌보며 살아야 하는 시간라서는 조금 서글프기도 하고요 ㅎㅎ
따뜻한 하루 보내세요, 감기 조심하시고요!

blanca 2025-11-18 11: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늘 정말 바람이, 손이 시려웠어요. 김유정 문학상은 사지 않아서 김연수의 단편은 자목련님 얘기로 들을게요.

자목련 2025-11-21 09:59   좋아요 0 | URL
겨울이 가을을 밀어내고 있는 것 같아요.
김유정 문학상, 즐겁게 읽어보겠습니다!

바람돌이 2025-11-18 12: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황정은작가님 에세이말고 소설집 나온지 꽤 오래되어서 이제쯤 나오지 읺을까 기다리는데 말이죠. 아쉬운대로 이 책ㅂ 터 읽어야할까봐요

자목련 2025-11-21 10:00   좋아요 0 | URL
저도 소설집 기다리고 있는데 소식이 없네요. <작은 일기>에서 언급한 단편이 이 단편이 아닐까 짐작해봅니다^^

책읽는나무 2025-11-19 09: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지난 주 열무를 얻어버려 알타리무 김치를 담궈뒀어요. 양념만 만드는데도 하루가 소비되더군요. 그리고 밤엔 김승옥 수상 작품집을 한 편씩 읽었더랬죠. 왠지 김승옥 수상 작품집 책을 떠올릴 때면 김장 이야기와 황정은 작가님과 김연수 작가님이 떠오를 것 같아요. 그리고 눈 이야기를 읽다 보니 최은미 작가의 <김춘영>도 떠오를 듯도 하구요. 거기에도 눈 이야기가 나오거든요.^^

자목련 2025-11-21 10:02   좋아요 1 | URL
나무 님이 담근 알타리무 김치는 얼마나 맛있을까요!
단편을 읽는 가을밤, 낭만적입니다. <김춘영>은 아직인데, 어떤 눈을 만날까 궁금하네요^^
첫눈이 내렸다는데 저는 못 봐서 소설에서 마주해야겠습니다^^

꼬마요정 2025-11-20 13: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지지난 주에 감을 따고 왔네요. 이제 나이가 많은 감나무는 많이 버거운지 작은 감들만 열려 있더라구요. 귤도 주문해서 벌써 10키로를 먹어치웠습니다. 추운 날씨는 싫지만 겨울에 먹을 수 있는 과일은 좋군요. 김유정 문학상은 저도 받았답니다. 이번에 책이 예뻐요^^

자목련 2025-11-21 10:07   좋아요 1 | URL
어릴 적 기억을 떠올리면 감 따는 일은 어려웠던 것 같아요.
귤은 정말 빨리 사라져요. 겨울에만 먹을 수 있는 과일, 더 맛나고 특별하네요^^
김유정 문학상, 즐겁게 읽으세요!

yamoo 2025-11-21 10: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식탁 위에 감과 귤이 가득하다니...참으로 풍요롭네요..
책상 위 책과 커피 한잔 그리고 귤...늦가을의 고즈넉한 청취가 묻어나는 사진입니다. 차분하고 좋네요^^
저는 한국소설 대신 트레버 소설을 올려놓고 싶은 계절입니다..ㅎㅎ

자목련 2025-11-26 08:44   좋아요 0 | URL
풍성한 시골 인심 덕분입니다. 지금은 식탁이 깨끗하고요 ㅎㅎ
 
아오리 아니고 아오모리 - 김연덕의 10월 시의적절 10
김연덕 지음 / 난다 / 202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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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가을에는 알이 굵은 사과를 먹지 못했다. 알이 작고 익지 않은 아오리를 먹은 기억이 전부다. 사과가 금값이라고 했다. 그런 이유는 아니겠지만 김연덕의 『아오리 아니고 아오모리』를 읽으면서 덜 익은 풋풋한 사과 맛이 떠올랐다. 아직은 완성이 되지 않은 어떤 것, 미완성이 줄 수 있는 아름다움, 서툰 안도감 같은 것이라고 할까. 김연덕을 생각하면 바로 그의 시는 길었지가 따라온다. 보뱅의 산문에 대한 그녀의 글이 좋았던 기억과 함께.


『아오리 아니고 아오모리』는 제목에서 짐작하겠지만 아오모리에 대한 여행 기록이라 해도 무방하다. 시긴 김연덕이 순전히 사과 때문에 아오모리로 떠났지만 사과가 아닌 아오모리 이야기. 10월을 담았지만 아오모리의 10월은 아니고 아오모리를 기억하고 10월이라고 하면 적절할지도 모르겠다. 나는 아오모리에 간 적이 없고 아오모리에 대해 모르기에 어떤 선입견도 없이 아오모리를 만날 수 있었다. 그건 참 다행이고 좋은 일이다.


올해의 10월은 연휴가 길었고 무기력한 시간이었다. 그러나 김연덕의 10월은 느리면서도 빠르고 시큰둥하면서도 활기찼다. 그것은 아오모리에서 만난 노인의 모습과 비슷하게 느껴졌다. 도시를 채운 노인의 시간과 삶을 귀 기울여 집중하는 김연덕이 좋았다. 낯선 외국인을 반갑게 맞이하는 그들, 다시 만났을 때에는 기억하지 못하는 그들. 잊어버린 기억 위에 내려앉는 기억이 반복되는 삶을 생각했다.


천천히 공원을 산책하고 박물관을 둘러보고 처음 만난 k와 친구가 되어 완벽하지 않은 대화를 나누는 일상. 그 모든 것은 떠났기에 가능한 일인지도 모른다. 아오모리에서 보고 만나고 느낀 것들은 에세이와 시를 통해 같으면서 다른 아오모리로 태어난다. 김연덕이 시를 쓰는 방식이라고 할까. 그의 긴 시가 이렇게 쓰이는구나 싶었다. 괜히 친근함이 느껴졌다. 어떤 풍경을 어떤 공간을 상상하게 만든다. 아오모리가 지닌 고유한 특성이라고 할까.


잠근 것 치고 손쉽게 문이 열려 나는 답답하고 단정한 재료들이 지어진 오래된 내 정신의 외벽을 부수고 안쪽 더 안쪽으로 향하는데 이곳에서 아직 피가 식지 않는 사람은 노인인 박물관 관리인 둘과 나뿐이다.


산 정상 사진 스키 사진 여럿에 담긴 사람들의 오후 피부에서는 삶을 소중한 스트레스를 갈기갈기 찢어버리는 지루함이라곤 영원히 모르게 해줄 게, 그들에게 틀린 약속을 선사한 피가 영원히 활기차게 도는 중이다. (시 「아오모리시 삼림박물관」, 중에서)





아오모리에서 아오리 사과만큼이나 유명한 다자이 오사무에 대한 이야기도 재밌다. 다자이 오사무의 『인간 실격』 책 모양의 카스텔라가 관광상품이라니. 책장에 꽂힌 그 책이 맛있는 카스텔라로 만날 날은 없겠지만 책등을 마주할 때마다 떠오를 게 분명하다.


시인이 채운 10월을 읽으면서 국군의 날, 한글날이 아닌 체육의 날, 정신건강의 날이 10월에 있다는 걸 처음 알았다. 내가 몰랐던 누군가의 생일을 기억하고 축하해야 할 것만 같았다. 그날에 대한 시인의 이야기는 애틋하면서도 따듯했다. 1년 동안 찾았던 진료실과 선생님에 대한 이야기와 편지는 그가 지나온 시간을 짐작하게 만든다. 잘은 모르지만 힘들고 어려웠을 시간이 끝나기를 바라며.


버스나 기차 안에서는 풍경들이 쉽게 뭉개져요. 정말로 아름답다고 느끼는 장면도 사진을 찍고 싶다고 느끼는 장면도 마음이 움직이는 순간, 카메라를 드는 순간 어느새 지나가버려요. 제가 잡을 수 있는 장면이 거의 없죠. 제가 할 수 있는 것이 거의 없지만 앞으로 어떻게든 나아가고 있다는, 묘한 무력감과 가능성의 상태가 좋았습니다. 게다가 풀숲이나 눈 쌓인 바다 같은, 한 덩어리고 뭉쳐진 자연이, 지치고 피곤한 사람의 기운을 내뿜으며 제 곁을 지나갈 때요. (101~102쪽)


노인이 많은 도시이기에 그들의 삶이 끝나는 순간 사라지는 공간이 있다. 당연하겠지만 가까이에서 직접 목격한다면 그만큼 서글픈 일도 없다. 더이상 추억의 공간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 한 지역의 모두에게 사랑받았던 빙수가게의 이야기도 그랬다. 다시 만난 K도 어린 시절 자주 가던 가게라는 게 신기하고 고마웠다. 나는 그랬다.


10월은 지나갔다. 시인이 아오모리로 채운 작년의 10월도 지나갔다. 이제 마주할 10월은 내년의 10월이다. 내년 10월에는 연휴가 길었던 올해의 10월을 그리워할지도 모른다. 저마다의 10월을 떠올리기에 충분한, 아니 아오모리를 떠올리기에 충분한 책이다. 사과의 푸른빛만이 아닌 다채롭고 포근한 빛으로 가득할 아오모리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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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트랑 2025-11-12 11: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용감하신 분께 ㅡ ‘피‘ 라는 단어를 읽으니 문득 어떤 詩의 한 문장이 떠오르는군요. ˝당신의 피에는 온도가 없어요!!!‘ 저는 여기서 ‘온도‘가 더 좋을까 ‘온기‘가 더 좋을까 한참을 고민했었죠. 나중에는 내가 이 시의 작가도 아니고 김춘수도 아닌데 왜 이런 고민을 하고 있지? 하던 순간이 떠오르는 군요.
(아, 자목련님의 피에 온도가 없다는 뜻은 아닙니다ㅠ. 그런데 왜 이런 걱정을 하고있지?)
10월이 오면 아오리 장바구니 클릭하는 일인입니다. 좋은 하루 되십시요~

자목련 2025-11-18 10:16   좋아요 0 | URL
그러니까 제 피의 온도는 잘 모르겠습니다 ㅎㅎ
적정 온도를 유지하며 좋을 텐데.
날이 많이 춥습니다. 온기가 가득한 하루이길 바라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