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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오리 아니고 아오모리 - 김연덕의 10월 ㅣ 시의적절 10
김연덕 지음 / 난다 / 2025년 10월
평점 :
올가을에는 알이 굵은 사과를 먹지 못했다. 알이 작고 익지 않은 아오리를 먹은 기억이 전부다. 사과가 금값이라고 했다. 그런 이유는 아니겠지만 김연덕의 『아오리 아니고 아오모리』를 읽으면서 덜 익은 풋풋한 사과 맛이 떠올랐다. 아직은 완성이 되지 않은 어떤 것, 미완성이 줄 수 있는 아름다움, 서툰 안도감 같은 것이라고 할까. 김연덕을 생각하면 바로 그의 시는 길었지가 따라온다. 보뱅의 산문에 대한 그녀의 글이 좋았던 기억과 함께.
『아오리 아니고 아오모리』는 제목에서 짐작하겠지만 아오모리에 대한 여행 기록이라 해도 무방하다. 시긴 김연덕이 순전히 사과 때문에 아오모리로 떠났지만 사과가 아닌 아오모리 이야기. 10월을 담았지만 아오모리의 10월은 아니고 아오모리를 기억하고 10월이라고 하면 적절할지도 모르겠다. 나는 아오모리에 간 적이 없고 아오모리에 대해 모르기에 어떤 선입견도 없이 아오모리를 만날 수 있었다. 그건 참 다행이고 좋은 일이다.
올해의 10월은 연휴가 길었고 무기력한 시간이었다. 그러나 김연덕의 10월은 느리면서도 빠르고 시큰둥하면서도 활기찼다. 그것은 아오모리에서 만난 노인의 모습과 비슷하게 느껴졌다. 도시를 채운 노인의 시간과 삶을 귀 기울여 집중하는 김연덕이 좋았다. 낯선 외국인을 반갑게 맞이하는 그들, 다시 만났을 때에는 기억하지 못하는 그들. 잊어버린 기억 위에 내려앉는 기억이 반복되는 삶을 생각했다.
천천히 공원을 산책하고 박물관을 둘러보고 처음 만난 k와 친구가 되어 완벽하지 않은 대화를 나누는 일상. 그 모든 것은 떠났기에 가능한 일인지도 모른다. 아오모리에서 보고 만나고 느낀 것들은 에세이와 시를 통해 같으면서 다른 아오모리로 태어난다. 김연덕이 시를 쓰는 방식이라고 할까. 그의 긴 시가 이렇게 쓰이는구나 싶었다. 괜히 친근함이 느껴졌다. 어떤 풍경을 어떤 공간을 상상하게 만든다. 아오모리가 지닌 고유한 특성이라고 할까.
잠근 것 치고 손쉽게 문이 열려 나는 답답하고 단정한 재료들이 지어진 오래된 내 정신의 외벽을 부수고 안쪽 더 안쪽으로 향하는데 이곳에서 아직 피가 식지 않는 사람은 노인인 박물관 관리인 둘과 나뿐이다.
산 정상 사진 스키 사진 여럿에 담긴 사람들의 오후 피부에서는 삶을 소중한 스트레스를 갈기갈기 찢어버리는 지루함이라곤 영원히 모르게 해줄 게, 그들에게 틀린 약속을 선사한 피가 영원히 활기차게 도는 중이다. (시 「아오모리시 삼림박물관」, 중에서)

아오모리에서 아오리 사과만큼이나 유명한 다자이 오사무에 대한 이야기도 재밌다. 다자이 오사무의 『인간 실격』 책 모양의 카스텔라가 관광상품이라니. 책장에 꽂힌 그 책이 맛있는 카스텔라로 만날 날은 없겠지만 책등을 마주할 때마다 떠오를 게 분명하다.
시인이 채운 10월을 읽으면서 국군의 날, 한글날이 아닌 체육의 날, 정신건강의 날이 10월에 있다는 걸 처음 알았다. 내가 몰랐던 누군가의 생일을 기억하고 축하해야 할 것만 같았다. 그날에 대한 시인의 이야기는 애틋하면서도 따듯했다. 1년 동안 찾았던 진료실과 선생님에 대한 이야기와 편지는 그가 지나온 시간을 짐작하게 만든다. 잘은 모르지만 힘들고 어려웠을 시간이 끝나기를 바라며.
버스나 기차 안에서는 풍경들이 쉽게 뭉개져요. 정말로 아름답다고 느끼는 장면도 사진을 찍고 싶다고 느끼는 장면도 마음이 움직이는 순간, 카메라를 드는 순간 어느새 지나가버려요. 제가 잡을 수 있는 장면이 거의 없죠. 제가 할 수 있는 것이 거의 없지만 앞으로 어떻게든 나아가고 있다는, 묘한 무력감과 가능성의 상태가 좋았습니다. 게다가 풀숲이나 눈 쌓인 바다 같은, 한 덩어리고 뭉쳐진 자연이, 지치고 피곤한 사람의 기운을 내뿜으며 제 곁을 지나갈 때요. (101~102쪽)
노인이 많은 도시이기에 그들의 삶이 끝나는 순간 사라지는 공간이 있다. 당연하겠지만 가까이에서 직접 목격한다면 그만큼 서글픈 일도 없다. 더이상 추억의 공간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 한 지역의 모두에게 사랑받았던 빙수가게의 이야기도 그랬다. 다시 만난 K도 어린 시절 자주 가던 가게라는 게 신기하고 고마웠다. 나는 그랬다.
10월은 지나갔다. 시인이 아오모리로 채운 작년의 10월도 지나갔다. 이제 마주할 10월은 내년의 10월이다. 내년 10월에는 연휴가 길었던 올해의 10월을 그리워할지도 모른다. 저마다의 10월을 떠올리기에 충분한, 아니 아오모리를 떠올리기에 충분한 책이다. 사과의 푸른빛만이 아닌 다채롭고 포근한 빛으로 가득할 아오모리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