붕대 감기
윤이형 지음 / 작가정신 / 202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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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만나도 아무런 불편함이 없이 서로의 일상을 꺼내 보여줄 수 있는 상대를 우리는 친구라고 한다. 그런 친구와 갑자기 서먹해진다면 상처를 받았다고 여긴다. 친구의 사정도 모르면서 친구라는 관계에 그 모든 걸 넣어두려고 하는 것이다. 그건 나만의 일방적인 감정이라는 걸 알면서도 친구니까 그래도 된다고 정당화한다. 나에게 좋은 친구는 어떤 친구일까. 무조건 지지를 건네는 그런 사람일까. 그럼 나는 어떤 친구일까. 상대에게 좋은 친구인 건 맞는 걸까. 윤이형의 『붕대 감기』는 내게 자꾸만 묻는다. 당신은 어떤 친구입니까, 당신은 어떤 사람입니까,라고 말이다. 나를 가장 잘 아는 건 자신일 것 같지만 실상 나에 대해 아는 건 친구일 때가 있다. 내가 무얼 좋아했는지 어떤 삶을 꿈꾸는지 나의 말을 들어주고 지켜봐 줬으므로.

 

모든 관계에는 처음이 있다. 처음부터 서로에게 좋은 감정을 갖는 경우도 있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도 많다. 누군가 먼저 다가가고 누군가 먼저 기다리는 일이 필요하다. 관계의 깊이가 누적된 시간의 그것과 같을 수 없다는 걸 안다. 둘 사이를 오가는 시간과 말들, 어떤 사건들이 어떻게 견디고 받아들이냐에 따라 다르다. 소설에서 진경과 세연이 그랬던 것처럼 말이다. 고등학교 시절 친하게 지냈던 진경과 세연은 오랜만에 다시 연락이 닿았다. 다시 만난 설렘과 기대로 서로에 대해 더 많은 걸 알고 싶고 공유하고 의논하고 싶은 마음이 있다. 하지만 둘의 표현 방식은 다르다. 7살 딸을 둔 워킹맘 진경과 프리랜서인 세연의 삶이 다르듯 말이다. 자주 만날 수 없었지만 온라인으로 이어져 있다고 믿었지만 자신의 글에 어떤 코멘트도 하지 않는 세연에게 진경은 서운함을 느낀다.

 

어쩌면 둘은 서로 다른 세상에 살고 있다고 생각했는지도 모른다. 진경의 하루는 정신없이 흘러갔고 그런 삶의 고단함을 세연과 나누면서 공감하고 싶었다. 여성의 우정에 대해 취재를 하고 글을 쓰는 세연에게 진경이 속한 결혼과 육아의 세상은 경험할 수 없기에 뭐라 말할 수 없는 곳은 아니었을까? 그러나 서로의 마음 깊은 곳에 존재하는 생각의 본질은 다르지 않았다. 서로에게 다가가고 싶고 응원하고 싶은 마음은 같았다.

 

모두가 애써서 살고 있잖아. 너와 똑같은 속도로, 같은 방향으로 변하지 못한다고 해서 그 사람들의 삶이 전부다 잘못된 거야? 너는 그 사람들처럼, 나처럼 될까 봐 두려운 거지. 왜 걱정하는 거니, 너는 자유롭고, 우리처럼 되지 않을 텐데. 너는 너의 삶을 잘 살 거고 나는 나의 삶을 응원할 거고 우린 그저 다른 선택을 했을 뿐인데. (154쪽)

 

마음의 형태가 다르다고 해서 그 본질까지 다르다고 생각할 필요는 없다. 진경과 세연 둘 만을 놓고 보면 진경은 개인과 일상에 집중하는 것처럼 보이고 세연은 그들이 속한 사회와 세상으로 나가려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다. 인생에 있어 다른 선택을 했고 살아가는 방식도 다르니까. 그렇다고 둘 사이가 완전히 다르다고 할 수 있을까. 그들이 접하는 세상, 그들이 맺은 복잡하고 유기적인 관계에서 따로 떼어낼 수 있을까. 세연이 글을 쓰기 위해 만난 10대와 20대의 여성에서도 마찬가지다. 세상을 정의하고 이해하는 방식은 같지 않다. 그러나 그들이 모두 같은 시대를 살고 세상에 속해 있다는 건 인정해야 할 사실이다.

 

소설에 등장하는 다양한 연령대의 여성의 삶의 방식을 통해서도 느낄 수 있다. 당당하면서도 거침없는 10대, 20대가 느낄 수 없는 감정들을 조금은 소극적이고 수동적인 40대, 50대는 공감할 수 있고, 나와 다른 삶을 살아가는 이들과의 우정을 통해 그들의 삶을 이해하려 노력하는 것이다. 소설 속 인물 모두가 저마다의 고민으로 힘들어가고 지향하는 삶의 가치가 다르다 할지라도 그들은 서로에게 긴밀하게 연결되기를 원한다.

 

고교시절 교련 시간에 붕대 감기를 잘 몰라서 진경의 머리에 한 번 더 감아버린 세연처럼 우리는 실수한다. 피부 문제로 인해 화장을 고집했던 세연을 문제아로 여기고 따돌린 무리 속에 나도 있을 것이다. 이제는 그런 실수를 번복하지 말아야 한다. 나와 똑같은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으니 나와 다른 모두를 인정하고 그들과 함께 살아가는 일이 중요하다. 때로 서로에게 상처를 주는 마음 때문에 아프고 다른 곳을 바라보는 마음을 감당할 수 없어 힘들다. 그래도 놓치고 싶지 않고 잃어버리고 싶지 않은 마음이기에 우리는 그 마음을 사랑하는 건 아닐까.

 

‘마음을 끝까지 열어 보이는 일은 사실 그다지 아름답지도 않고 무참하고 누추한 결과를 가져올 때가 더 많지만, 실망 뒤에 더 단단해지는 신뢰를 지켜본 일도, 끝까지 헤아리려 애쓰는 마음을 받아 본 일도 있는 나는 다름을 알면서도 이어지는 관계의 꿈을 버릴 수는 없는 것 같다.’는 작가의 말은 우리 모두에게 해당된다. 더 알고 싶은 마음, 더 닿고 싶은 마음의 주인들과 오래오래 사랑하며 관계를 이어가고 싶은 바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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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주 넘어진다. 주위를 살피지 않고 덤벙거려서 그렇기도 하고 건강하지 않아서 그렇기도 하다. 그러나 넘어졌다고 해서 모든 게 나쁜 건 아니다. 넘어졌던 기억이 있기에 조심해서 걷고 넘어졌을 때 기분을 알기에 누군가 넘어졌을 때 더욱 신중하게 살필 수 있다. 경험으로 비추어 상대를 생각하고 배려하는 일은 어쩌면 쉬운 일인지도 모른다. 나이를 먹으면서 하나의 상황에 대해 다양한 경우의 수를 생각하는 지혜는 자연히 따라오는 거라 믿었지만 아니었다. 깊은 사유와 성찰 그리고 감사가 필요한 일이었다. 글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싶다. 읽고 쓰는 일은 어려운 일이 아닌 것 같지만 내가 원하는 바를 정확하게 전달하는 일은 보통 어려운 게 아니다. 정갈하면서도 담백한 글로 일상을 기록하는 힘, 그건 충분하다고 할 수 없을 만큼의 노력을 요구한다. 그러니 쉽고 편안하게 읽힌다고 해서 쉽고 편안하게 쓴 글은 없을 것이다.

 

쓰기는 파편투성이 뒷방을 하나하나 구석구석 치워가는 일이다. 눌려서 올라오지 않는 건반에 남아 있는 손가락 끝의 정한을 더듬는 일이다. 쓰기는 내 안의 내 밖의 잡초 무성한 꽃무덤을 도굴하는 일이다. (78쪽)

배혜경의 『화花영影시時경景』에서는 그런 글의 민낯을 볼 수 있다. 하나의 풍경, 하나의 기억을 꺼내 단정하게 정리하는 과정을 가까이서 지켜보는 것 같다고 할까. 누구나 쉽게 접할 수 있는 일상의 면면이 특별하고 신비롭게 다가온다. 거기다 글과 어울리는 사진까지 마주할 수 있어서 어느 순간에는 그 사진에 가만히 집중하는 나를 발견한다. 저자와 그의 일상 언저리의 풍경은 마음은 평온하게 한다. 어떤 사진은 속상하고 복잡한 마음을 깨끗하게 비우라고 말하는 듯하다. 꽃과 나무 바람, 그리고 작은 고양이들이 그랬다. 언제 어떤 장소에서 어떤 생각을 담은 사진일까. 내가 그 순간에 그 풍경(사물)을 보았더라면 나는 무슨 생각을 곁들이고 싶었을까.

 

단순함이 가장 좋은 거라고 여기면서도 단순하게 만들지 못하는 일들이 있다. 어떤 과정을 통과해야만 단순해질 수 있다는 걸 깨닫게 하려는 듯. 그리하여 모든 일의 마지막에 다다라서야 진정한 단순함의 기쁨을 느낄 수 있다고 알려주는 것처럼 말이다. 한 사람에 대해 알면 알수록 견뎌온 시간이 길면 길수록 오히려 그에 대해 더욱 모르는 것 같은 기분이 드는 요즘이다. 그래서 이런 문장을 유독 더 집중하게 된다.

 

나만 그럴까. 모두 고양인인걸. 누구나 고양이와 사는 것처럼 외롭지만 자주 가슴 벅차고 누군가 고양이인 것처럼 겁나지 않은 척 용감하게 살아내고 있는걸. (99쪽)

우리 안에는 모두 자신만의 고양이를 키우고 있구나 싶었다. 때로 감정을 숨기고 거짓 울음소리를 내기도 하고 슬그머니 옆을 지키는 고양이. 친한다는 이유로 쉽게 무례를 범하면서도 상대가 그렇게 다가오면 불쾌감을 감출 수 없는 사람으로 변하는 게 아닐까 두렵다. 나를 표현하는 것들에 대해 신중하고 조심성을 키워야 한다는 생각을 한다. 그것이 말이든 글이든 표정과 행동이든 말이다.

가깝다는 이유로 삼가지 않고 자신 있는 일이라 하여 가볍게 덤벼들진 않았는지 돌아본다. 사람을 대할 때뿐만 아니라 생을 대하는 순간마다 몸을 낮추어 조심스레 대하는 자세를 잊지 않아야겠다. (164쪽)

문학과 예술 방면에서 다양한 활동을 하는 저자에게는 특별한 이력이 있다. 그것은 시각장애인을 위한 녹음도서 제작을 위한 낭독봉사이다. 나눔과 봉사는 진정한 실천이 있어야 가능한 일이다. 이 책에는 낭독 녹음에 관련된 글도 만날 수 있다. 다른 이를 위해 책을 읽어주는 일은 어려운 일이다. 책의 내용에 대한 정확한 전달과 함께 그 안에 담긴 감정들도 들려줘야 하기 때문이다. 신중하게 책을 고르고 낭독을 위해 연습했을 수많은 시간의 수고를 상상하면 그저 놀랍고 감탄할 뿐이다. 13편의 책에 대한 이야기는 그래서 더욱 남다르게 다가온다. 익숙한 제목의 소설과 함께 나를 붙든 건 이홍섭 시인의 『터미널』에 대한 부분이었다. 시집 한 권을 녹음하는 일은 3시간 정도 한 호흡으로 작업해야 한다고 한다.

 

삶이 어느 방향으로든 연속성을 지닐 때, 지난다고 생각될 때 애초 우주의 영원한 미아로 낙하한 인간은 마음이 놓인다. 친밀감의 비밀은 연결성 있다. 떨어져 있지만 항상 이어져 있다는 느낌은 외로움을 천형으로 안고 사는 인간에게 무한한 위로가 된다. (218쪽)

어딘가 잠시 머물렀다 떠날 수 있는 공간, 터미널을 생각하니 시장이 떠올랐다. 생의 움직임을 포착할 수 있는 최적의 장소, 떠나고 돌아오기 위해 분주한 터미널처럼 사람들의 생기가 가득한 그곳. 울적할 때마다 시장 골목을 서성이던 시절도 겹쳐진다. 한 장의 사진과 한 줄의 문장이 나를 먼 곳으로 데리고 간다. 책이 이끄는 방향의 끝에는 언제나 삶이 있다. 아무 곳이나 펼쳐 읽어도 괜찮다. 어느 곳에서는 나와 닮은 삶이 있고 어느 곳에서는 내가 알 수 없는 삶이 있다. 하루하루 지나온 풍경과 앞으로 살아가야 할 풍경을 기대하는 우리의 삶.

‘꽃그림자 드리운 시간풍경’이란 뜻의 제목처럼 어디든 생이 존재하는 곳에는 저마다의 꽃이 필 것이다. 우리의 삶이 꽃을 피워내기까지의 적당한 시간이 필요했을 터. 누군가는 그 시간을 견디고 누군가는 막연히 기다리고 누군가는 지켜볼 것이다. 우리 삶의 꽃그림자가 사라질 때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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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1-14 13:00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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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1-15 10:47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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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1-15 11:05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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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저마다의 속도로 슬픔을 통과한다 - 어떻게 애도할 것인가
브룩 노엘.패멀라 D. 블레어 지음, 배승민.이지현 옮김 / 글항아리 / 201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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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도를 겪는 당신만의 길을 스스로 이해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101쪽)

 

‘우리는 저마다의 속도로 슬픔을 통과한다’란 제목 하나만으로 충분했다. 내가 이 책을 기대했던 이유, 내가 이 책을 선택한 이유 말이다. 저마다의 속도가 필요하다는 걸 인식하고 경험했기 때문이다. 소중한 이가 슬픔에 빠졌을 때 우리는 할 수 있는 무언가를 찾는다. 말을 걸기도 하고, 음식을 챙겨주기도 하고, 가만히 곁을 지키기도 한다. 연인과 헤어졌을 때, 급하게 돈이 필요할 때, 몸이 아파 병원에 있을 때, 분명 그들은 도움이 된다. 하지만 사랑하는 이와 영원한 작별을 한 상태에서는 다르다. 나는 당신이 될 수 없고 당신도 내가 될 수 없기에 말이다. 애도의 시간은 정해져 있는 게 아니고, 애도의 상태는 같을 수 없다. 우리는 그것에 대해 한 번도 학습한 적이 없다. 우리에게 죽음은 아주 멀리 있는 막연한 것이었고 노년 후에나 찾아오는 것이었다. 그러나 죽음은 어디서든 마주할 수 있는 삶의 일부였고 어떤 이에게만 닥칠 수 있는 일이 아니라 언제든 내게도 일어날 수 있는 일이었다.

 

그런 상황을 받아들일 수 없는 이들에게 이 책은 아주 친절하고 아주 상세하다. 여러 형태의 죽음에 대해 자세하게 설명한다. 저자가 애도의 시간을 경험했고 모임을 갖고 상담을 하는 이들이기에 가능하다. 친구처럼 지냈던 전 남편의 죽음을 경험한 패멀라 D. 블레어와 사고로 오빠를 잃은 브룩 노엘은 현실적이며 실천 가능한 조언을 한다. 가장 가까운 이(배우자, 부모, 형제, 자식)을 떠나보냈을 때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애도의 삶이 어떤 것인지 알려준다. 사실, 사랑하는 이의 죽음을 경험하고 삶을 살아가는 과정은 결코 쉽지 않다. 직장으로의 복귀도 힘들고 소소한 일상도 유지할 수 없을 정도로 무기력한 시간을 보내기도 한다. 우리는 ‘저마다의 삶의 속도’를 기억해야만 한다. 그러니 이런 문장을 반복해서 읽는 건 좋은 방법이다.

누군가 “이제 네 삶을 살아야 할 시간이야”라는 말을 한다면 당신은 “내 시간과 신의 시간이지 당신의 시간이 아니야”라고 답할 권한이 있습니다.

 

두려움이 언제나 나쁜 것은 아닙니다. 두려움을 거부하지 않고 완전히 받아들여 겪으면, 변혁을 시작하는 내부의 변화가 일어납니다. (86쪽)

애도의 방법은 하나가 아니라는 사실도 중요하다. 아주 오랜 시간 고인을 추억하는 일, 때때로 혼자만의 시간을 갖는 일, 고인의 물건을 주변 이들에게 나눠주는 일, 대상을 알 수 없는 분노를 표출하는 일도 모두 애도라는 걸 우리는 인지할 필요가 있다. 이 책의 훌륭한 점은 우리가 놓치는 것들을 일깨워주기 때문이다. 어떻게 애도를 표할지, 어떻게 애도에 접근할지 세세하게 알려준다. 특히, 가족을 잃고 기념일이나 명절을 보내야 할 때 느끼는 감정이나 대처법, 아이들의 애도 돕기가 그러하다. 우리는 종종 자신의 슬픔에 빠져 주변 가족의 상태를 진단하지 못한다. 자신의 마음을 표현할 수 없는 아기, 유아기, 성장기에 따라 그 방법이 다르다는 걸 알지 못한다. 무조건 하늘나라에 갔다거나, 잠자는 거라고 죽음에 설명하는 게 아니라 아이의 연령에 따라 이해할 수 있도록 예를 들어 알려준다. 이 책이 진심을 다해 애도를 돕고 위로한다고 확신할 수 있었던 건 다양한 죽음의 형태와 고인과의 관계에 따른 슬픔에 대해서도 언급했기 때문이다. 대형 참사, 자살, 전쟁에 참여했던 이들의 죽음 등 낯설면서도 가까운 죽음을 애도하는 과정에 대해서.

길고 느린 과정이에요. 때때로 두 걸음 앞으로 나가갈 때마다 세 걸음 뒤로 물러나요. 하지만 다른 때에는 후퇴 없이 앞으로 두 걸음 더 나아갈 수 있어요. 당신은 그저 계속해서 한 발을 다른 발 앞에 두고 나아가야 해요. 그리고 이것이 정확히 제가 하고 있는 것이에요. 한 걸음씩 그리고 하루에 한 번씩. (303쪽)

 

우리는 저마다 고통과 상실의 시간과 마주한다. 그것을 피할 수 있는 생은 없다. 애도는 삶의 일부가 되며 그것의 끝은 없다. 아니, 어떤 이에게는 그 끝이 존재할 수도 있다. 저마다 다르니까. 우리는 그저 애도하며 살아갈 뿐이다. 어떤 날은 어제와 같은 모습으로 어떤 날은 다른 모습으로 말이다. 이 책을 만났다고 해서 애도를 쉽게 통과할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을 하면 안 된다. 그저 조금 더 이해하고 다가갈 수 있으며 어떻게 애도할 수 있는지 배웠을 뿐이다. 분명 아주 큰 도움이 된다. 아직은 경험하지 못하고 상상할 수 없는 이들에게 더욱 그러하다.

 

나는 책을 읽으면서 북받쳐오는 감정 때문에 조금 울컥했다. 내 가족 구성원의 죽음이 생각났고 그들의 이름을 불러보고 얼굴을 떠올렸다. 가장 그리운 엄마의 얼굴은 잘 생각나지 않았다. 우리는 이렇게 살아간다. 나만의 속도로 슬픔을 통과하며 살아가고 있다. 우리에게 중요한 건 바로 이것이다. 삶을 살아가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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긴 호흡 - 시를 사랑하고 시를 짓기 위하여
메리 올리버 지음, 민승남 옮김 / 마음산책 / 201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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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책은 그 자체만으로도 충만한 기분이 든다. 언제부턴가 내게 메리 올리버의 글이 그러하다. 가만히 그의 문장을 따라 걷노라면 고요한 평온을 만지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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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대의 온도 자음과모음 청소년문학 70
이상권 외 지음 / 자음과모음 / 2018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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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하고 싶고 할 수 있는 것들은 당장 하는 게 가장 좋다. 나중으로 미루면 결국 후회를 하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우리는 지금 할 수 있음에도 나중으로 미루며 그때 해도 괜찮다고 말한다. 어쩌면 그렇게 미루는 것들 중에는 진짜 하고 싶은 일들이 아닐 것들이 있을 수도 있다. 현재의 수험생들이 나중의 리스트를 가장 많이 만들지 않을까 싶다. 자음과모음 청소년문학 시리즈 70권 기념소설집 『십대의 온도』를 읽으면서 나는 지금 무엇을 하고 싶은지, 무엇을 해야 하는지 잠깐 생각해보았다. 아니, 놓쳤던 것들을 떠올렸다. 도전하지 않았던 일들, 하지 못한 고백, 최선을 다하지 못했던 일들이 스쳐 지나간다.

 

가장 좋은 날, 가장 좋은 때는 언제일까. 청소년들이 가장 많이 듣는 말은 대학 입학이나 취업 후가 될 것이다. 마치 그때가 되면 모든 게 다 완벽한 것처럼 말이다. 『십대의 온도』속 아이들에게도 다르지 않았다. 아무도 지금이 가장 좋은 때라고 말하지 않았다. 이상권의 「어느 날 갑자기」에서 은진은 갑자기 지방에 있는 지수를 만나러 간다. 나중으로 미루지 않고 보고 싶은 지금 달려간 것이다. 같이 밥을 먹고 이야기를 나누고 고민을 꺼내 놓고 마음을 나눈다. 자율적인 학교로 알려졌지만 틀에 짜인 대안학교에 적응하지 못하는 지수와 지나친 엄마의 통제로 힘든 은진에게 그 하루는 일탈이 아닌 충전이었다. 아주 잠깐의 시간, 지금 쉼을 쉬어도 괜찮다고 말해주는 것 같다. 어머니의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 삼수생으로 입시학원에 다니는 공지희의 「영화처럼 세이셀」속 주인공에게 필요한 것 역시 쉼이었다. 영화를 좋아하던 아버지와 함께 영화를 보내 즐거워하던 때를 그리워하며 영화 속 주인공처럼 세계지도를 펼쳐 낙점된 작은 섬 ‘세이셀’로 떠난다. 아름다운 바다와 바람에 취하기도 전에 가방을 잃어버렸지만 한국인 청년을 만나 도움을 받는다.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르지만 불안보다는 알 수 없는 설렘과 기대를 갖는 건 주인공 혼자만이 아니라 독자인 나도 마찬가지다.

“일단 한 번 무너져 보는 게 중요해. 그래야 그다음 무너지는 건 아무것도 아니라는 걸 알지. 일어나는 법도 배우게 되고.” (171쪽,「영화처럼 세이셀」)

우리는 십대란 시간이 인생에서 아주 짧은 시기이라는 걸 쉽게 잊는다. 그만큼 그 시기가 중요하지 않다는 게 아니다. 하지만 우리는 그 시기가 인생의 모든 걸 결정짓는 것처럼 여기는 것이라 착각한다. 학교라는 공간이 성적, 입시, 대학이 전부가 아닌 인생의 소중한 다른 것들(배려와 존중, 다양한 경험, 친구와의 우정, 자유롭게 놀기)을 배울 수 있는 최적의 공간이라는 것도 함께 말이다. 그런 면에서 해고당한 회사에 복직하기만을 기다리는 아빠, 집을 나간 엄마와 울지 않겠다고 약속하며 엄마를 기다리는 열한 살 수연의 하루하루를 담은 유영민의 「약속」과 술에 취해 폭력을 행사하는 아버지와 까만 피부색 때문에 놀림을 당하는 지안과 백색 소년 호수의 풋풋한 감정을 그린 진저의 「소녀 블랙(Black Girl)」은 신선하면서도 의미가 남다른 소설이라 할 수 있다. 돌봄을 받지 못해 너무 일찍 철이 들어버린 수연은 왕따를 당하지만 그것을 알지 못하는 선생님. 다르다는 이유 때문에 폭언과 폭력의 대상이 되는 학교의 현실. 소설 속 이야기가 아닌 현실에서 충분히 벌어지고 있는 상황이라 가슴이 아팠다.

누가 가르쳐 주지 않았지만 나는 안다. 어른이 된다는 것은 혼자 있는 시간을 견딜 줄 아는 것이라는 사실을, 그런 점에서 본다면 나는 이미 어른이지 않을까? (88쪽, 「약속」)

김선영의「바람의 독서법」과 신설의 「마더 파괴 사건」은 기발하면서도 엉뚱한 상상력을 선물하는 동시에 우리 현실을 꼬집는다. 영재였던 형에게 올인하는 엄마 덕분에 공부가 아닌 도서관에서 책을 읽는 게 가장 좋은 강우(「바람의 독서법」)는 어느 날 이상한 경험을 한다. 바람이 불 때 중요 문구가 도드라져 보여 시험 성적이 오른다. 그러자 강우를 바라보는 주변의 시선이 달라진다. 학교에서조차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존중하는 게 아니라니. 씁쓸하고 안타깝다. 가까운 미래의 학교를 배경으로 ‘세상 알기 연구회’를 통해 ‘마더’라 불리는 거대 컴퓨터를 파괴하는 에피소드를 다룬 「마더 파괴 사건」에서 ‘마더’라는 말 대신 채울 수 있는 것들에 대해 생각하게 만든다. 잘 알려지지 않는 실체, 언론을 움직이는 권력. 섬뜩하면서도 흥미로운 소설이었다.

6편의 소설에 등장하는 아이들은 모두 불안의 날들을 살고 있다. 저마다 다른 색깔과 크기의 불안과 함께 살아간다. 그 시기를 통과하면 불안이 사라질까. 아니다. 어른들에게는 어른의 불안이 존재한다. 다만 그것과 어떻게 지내야 하는지 조금 알뿐이다. 지금 하고 싶은 걸 하면 잘못되는 게 아닐까 하는 마음은 조금 거두라고 말하고 싶다. 잠시, 화끈거리는 열감에 얼음을 올려도 괜찮다고. 가장 좋은 날, 가장 반짝이는 때가 지금이라고 말해주고 싶다. 그리하여 점점 더 빛을 발할 거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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