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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리게 가는 마음
윤성희 지음 / 창비 / 2025년 2월
평점 :
움직인다고 볼 수 없는 움직임으로 살고 있다. 속내는 멈춤 그 자체다.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다. 그럴 수 없기에 천천히 느린 속도로 산다. 빠르게 가라고 재촉하는 이가 없는데 왜 마음은 불편한 것일까. 이런 마음은 괜찮다고 나쁜 게 아니라고 말하는 소설을 읽었다. 윤성희의 단편집 『느리게 가는 마음』를 읽으면서 마음속 더위를 날려주는 바람을 만난 것처럼 기분이 좋아졌다. 익히 알았던 윤성희의 소설이 주는 기쁨을 만끽했다. 삶의 슬픔과 불운에 대해 수군대고 혀를 차는 게 아니라 그럴 수 있다며 달래는 유머.
우리의 삶 전체를 행운으로 채울 수 있다면 좋겠지만 어디에도 그런 삶의 주인공은 없다. 누구나 누군가를 잃고 상실과 동행하며 죽음을 두려워한다. 다만 견디는 것이다. 켜켜이 쌓여있던 슬픔을 지켜보고 알아주는 소중한 이와 함께. 『느리게 가는 마음』 속 8편의 단편에 등장하는 인물 곁을 지키는 이들처럼. 혼자가 아니기에 소설의 주요 키워드인 생일을 축하하는 이들이 있기에 살아간다. 살아갈 힘을 얻는다. 그런 인물의 구성이 윤성희 소설의 장점이다. 처음부터 특별하고 끈끈한 관계가 아닌 시간이 지나 단골이 되고 우연한 만남의 연속으로 친밀해진 사이라고 할까.
사실 냉소적으로 말하자면 8편의 이야기는 슬프고 우울하다. 가장 가까운 이의 부재를 견디며 살아간다. 죽은 엄마와 대화를 나누는 아빠에게 엄마가 남긴 마지막 김치라는 걸 모르고 매일 먹는 김치볶음밥을 그만 먹고 싶다고 말하는 아들,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난 딸의 생일에 가장 좋은 그릇을 꺼내 생일상을 차리고 콜라를 따라주는 엄마, 혼술 유튜버의 영상에서 죽은 엄마의 목소리를 듣고 그 식당을 찾아가는 아들.
때문에 『느리게 가는 마음』에서 기억을 떠올리고 축하를 건넬 수 있는 생일이라는 장치는 유용하다. 잘 모르는 사이여도 반갑게 축하를 해주고 거짓으로 생일이라고 말해도 식당에서는 미역국을 내준다. 외할머니의 생일이라 가족이 모두 모일 수 있고 지난 시간을 이야기한다.

이쯤에서 표제작 「느리게 가는 마음」 이야기를 해보자면 ‘나’는 암 투병 중인 엄마 대신 나를 살피고 챙기는 이모와 함께 느리게 가는 우체통을 찾아간다. 이모가 헤어진 남자친구에게 보낸 엽서를 찾기 위해서다. 헤어진 남자친구가 결혼해서 엽서를 받으면 안 될 상황이다. 이모의 엽서를 찾다가 다른 이의 엽서를 읽게 되는데 자신에게 보낸 내용이 많았다. 1년이 지나 자신에게 도착할 마음. 스스로를 격려하고 위로하는 내용이었다.
나는 이모한테 엽서에 적힌 사연들을 몰래 읽어봤다고 고백했다.
“뭐 근사한 내용 있었어?”
“거의 비슷비슷하던데. 별거 없더라.”
“그치. 별거 아니지. 그런데 또 별거지.” (「느리게 가는 마음」, 98쪽)
별거 아닌데, 별거인 것. 남편이 죽고 음식 하기가 귀찮았는데 자신들이 맛있는 거 먹으려고 식당을 시작했다는 할머니들의 말도 비슷하게 다가온다. 시골길에서 느리게 가는 만물트럭에서 생일 케이크를 발견하는 우연. 남녀노소 나이와 상관없이 축하할 수 있는 날, 생일. 아픔과 걱정은 잠시 내려놓고 우선은 축하로 시작할 수 있는 생일이 있다는 게 참 좋다.
친구 윤석에게 생일이 아닌데 생일 축하 전화를 받는 장면으로 시작하는 「해피 버스데이」의 ‘나’도 그랬을 것이다. 구내식당의 미역국과 잡채를 먹으며 생일이라고 거짓말을 한다. 덕분에 직장 상가의 단골집에서 저녁을 먹게 되는데 그곳에서 가스폭발 사고를 당한다. 크게 다치지 않는 나는 항상 동생에 비해 운이 나쁘다고 여겼던 자신의 삶이 얼마나 운이 좋은지 깨닫게 된다. 더 이상 생일 축하 인사를 받을 수 없는 동생을 떠올리며 동생의 흔적을 찾는다. 그러니 엉뚱하게 생일이 아닌 날에 생일 축하를 하고 그런 축하 인사를 받고 싶다. 생일이 아니어도 생일처럼 보내는 하루, 그런 하루가 있어 다른 힘겨운 하루가 살만해질지도 모르니까.
“생일 축하해.” 나는 윤석에게 말했다. “무슨 소리야. 내 생일은 아직 멀었어.” 윤석이 웃으면서 대답했다. 그래서 나는 오늘 하루 생일처럼 지내라고 말했다. 점심에 미역국도 사 먹고 저녁에는 케이크에 촛불도 밝히라고. (「해피 버스데이」, 192~193쪽)
생일에 아빠가 미역국을 끓여주지 않아 가출하는 소설 속 십 대 청소년이 아니라서 그런가. 나이가 들면서 생일을 챙기는 일에 의미를 두지 않는다. 미역국을 챙겨 먹지도 않고 케이크를 사지도 않는다. 돌이켜보면 어려서는 가족이나 친구가 생일을 챙겨주기를 바랐다. 생일을 챙기는 일, 나의 존재를 기억하는 일이다. 문득 언젠가 나의 부재에도 나의 생일을 챙기는 이가 있을까 궁금해진다.
매일을 생일처럼 살 수는 없겠지만 생일을 기다리는 마음으로 살아가도 좋겠다. 생일이라는 이유로 실수나 잘못을 용서받고. 누군가 세상을 떠나는 날, 누군가는 태어나는 것처럼 죽음과 상실의 자리에 기쁨과 축하로 채워질 것이다. 다시 또 삶은 그런 것이라는 걸 깨닫는다. 오늘 생일을 맞는 누군가에게 축하의 인사를 전한다. 생일 축하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