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 엄마야 - 발달장애인 자녀를 둔 엄마들의 이야기 대한민국을 생각한다 27
인권기록활동네트워크 ‘소리’ / 오월의봄 / 201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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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의 유혹] 서로의 질문이 무성히 피어나길

<그래, 엄마야>(오월의 봄,2015) 발달장애인 자녀를 둔 엄마들의 이야기를 읽고

10년 쯤 전의 일이다. 친하게 지내는 부부였는데 결혼한 지 5년이 지나도 아기가 생기지 않았다. 부부는 인공수정을 했고 쌍둥이를 임신했다. 임산부가 나이가 있어서인지 병원은 태아의 염색체 이상 유무를 알아보는 양수 검사를 권했고 검사 결과 쌍둥이 중 한 명에게 문제가 있다고 했다. 출산을 하면 아이가 장애를 가질 확률은 40%, 인위적으로 유산을 할 경우에는 나머지 아이가 자연 유산할 확률은 50% 쯤.
부부는 인위적인 유산을 선택했고 결국 나머지 아이마저도 잃었다. 그러는 동안 부부는 내게 의견을 묻지 않았다. 그랬기에 나는 그들에게 아무런 이야기를 할 수 없었다. 그런데 그들이 의견을 물었다고 한들 내가 어떤 이야기를 할 수 있었을까? 만약 우리였다면 하고 잠시 와이프와 이야기를 나누기는 했다. 그러나 일어나지 않은 일에 대해, 그들의 입장이 되어보지 않은 상태에서 이야기는 무기력하게 주변을 겉돌 뿐이었다. 

적대적 세상에 내던져진 아이와 부모 

“‘그럼 그렇지. 다른 애들보다 반응이 약간 느리긴 해도, 너 잘 크고 있는 거지’” -37쪽

얼마 지나지 않아 우리에게 아기가 생겼다. 아기도 그랬겠지만 부모도 부모가 되는 순간 세상에 툭 내던져지는 느낌이다. 낳고 보니 육아와 돌봄에 대해 나는 알고 있는 게 별로 없었다. 정보도 제한적이었고 육아 지식이라는 것들도 갑론을박 중구난방이었다. 내 어머니는 몸이 불편하셨고 와이프 부모님은 시골에 사셨기에 도움의 손길을 구할 수 없었다. 그야말로 전쟁 같은 하루하루를 셋이서 치러내야 했다. 야심차게 친환경적이고 생태적이라는 천 기저귀를 구비해놓았지만 단 일주일 만에 포기하고 일회용 기저귀를 인터넷으로 주문했다. 와이프가 둘째를 가졌을 무렵에는 신종플루가 창궐했고 아이와 와이프도 걸렸다. 의사는 와이프에게 타미플루를 처방하면서 “아직까지는 임산부에게 부작용이 있다는 보고는 없다”는 말만 되풀이했다. 나의 무지, 우리의 무지는 생각보다 훨씬 크고 넓었다. 그러면서 깨닫은 것은 이 세상이 아이에게, 아이를 키우는 사람들에게 결코 우호적이지 않다는 사실이다. 골목의 자동차, 거리의 버스, 땅 밑의 지하철, 식당 앞 계단, 중국에서 날아온다는 황사, 심지어 이웃집 노부부의 말 한마디까지 말이다. 

그런데 만약 아이가 장애가 있다면? 장애를 가진 이들에게 세상은 우호는커녕 노골적인 적의를 드러낸다. 적대적인 세상에 내던져진 그들의 전쟁, 그 한 가운데 엄마가 있다. 

“아버님이 대놓고 저한테 ‘정신과를 갈 사람은 애가 아니라 너다’라고 그러시는 거예요. 그래서 제가 그럼 아버님이 원하는 병원에, 원하시는 날짜에 원하는 시간 잡아주면 제가 검사를 받을게요. 저는 아버님 며느리니까 아버님이 하라는 대로 할게요. 대신 제가 아버님한테 돈 대달라고 안 할 테니까 제 아이를 가지고 제가 하는 거는 신경 안 써주셨으면 좋겠어요. -71쪽

‘전쟁’이라는 단어를 쓰다가 멈칫한다. 하지만 그들의 곁에 서본 사람, 그들의 일상을 엿본 사람이라면 이 표현이 그저 비유에 그치지 않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상대를 전혀 배려하지 않고 호기심 어린 시선을 거두지 않는 사람들 속을 헤집고 들어갔다 헤집고 나오는 일, 동정 혹은 멸시의 시선과 말들 속에서 끊임없이 아이의 상태를 설명하고 이해를 구해야 하는 일의 반복. 비장애인 큰딸과 장애가 있는 쌍둥이를 둔 엄마는 큰딸에게 “누군가 쌍둥이를 안 좋은 눈으로 보고 있어서 힘들면 가족이 아닌 척해도” 된다, “그래도 엄마는 뭐라 하지” 않겠다고 이야기하는 이 일상이 ‘전쟁’이 아니라면 달리 뭐라 말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전쟁의 책이 아닌 질문의 책

그렇지만 이 책이 전쟁의 기록, 매일매일 벌어지는 처절한 사투를 담았다고 짐작해서는 곤란하다. 오히려 육아를 해본 사람이라면 다들 공감할 수 있는, 어디서나 흔히 만나게 되는 아이를 키우면서 겪게 되는 이야기들이다. 어떤 엄마는 ‘엄마가 행복해야 자녀도 행복하다’는 생각에 직장과 육아를 병행하면서도 자신이 너무 이기적인 것은 아닌지 고민한다. 어떤 엄마는 가족 내에서 아빠와 비장애 자녀의 위치가 어디쯤일지 살피는 중이다. 어떤 엄마는 조금씩 장애 아이와 거리두기를 시도하기도 하고 어떤 엄마는 아이로부터 그런 도전을 받기도 한다. 

그렇다고 이 이야기들을 ‘이 시대 모든 엄마의 이야기’로 요약해서는 안 된다. 발달장애인이 지역에서 같이 살아야 된다는 지극히 소박하고 상식적인 요구를 하며 ‘엄마’들은 지금 이 순간에도 서울시청에서 36일째 농성을 이어가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한 엄마들의 이야기들이 씨줄과 날줄로 엮이면서 자녀의 보호자이자 관찰자이며 적군이자 아군이며 마침내 동료와 동반자가 되는 열여섯 명 엄마들의 마음자리가 어떻게 바뀌는지, 그들의 삶이 어떻게 진동하는지에 대한 이야기이며 그 진동은 책을 읽는 나의 마음도 진동시킨다. 

“네. 대답을 해요. 그런데 몸으로 하니까, 기다려 주세요. ... 발달장애를 이해하는 것도 필요하지만 장애인이 이해 대상으로만 여겨지지 않았으면 해요.” -287쪽

큰애가 발달장애 아이와 어린이집을 같이 다니면서 두어 해 동안 가까운 이웃으로 살게 된 경험은 내게도, 아이에게도 장애에 대한, 인간에 대한 새로운 고민을 안겨주었다. 무엇보다 큰애는 차이와 다름에 대해, 사람 저마다가 가진 속도에 대해 미약하지만 머리와 몸으로 이해하는 듯 보였다. 그래서 그 가족과의 만남은 너무나 소중하고 진심으로 그들에게 고맙다. 아이의 변화와 나와 그들의 변화를 살피면서 조심스럽고 분에 넘치는 생각인지 모르겠지만 장애는 어쩌면 인간을 더 깊이 이해하기 위해 누군가 우리에게 건넨 숙제이면서 선물은 아닐까 생각해본다. 

아이를 키우다보면 굳이 아이가 내게 묻지 않더라도, 내가 아이에게 묻지 않더라도 무수한 질문과 맞닥트린다. 아이는 그 자체로 거대한 질문 덩어리다. 이 책도 그렇다. 아빠들은 다 어디 가고 왜 고군분투의 현장을 엄마만 지켜야 하는 것일까? 아이를 인격적으로 존중한다는 것은 무엇일까? 부모의 성장과 아이의 성장은 어떤 관계일까? 사회가 강요하고는 하는 아이 발달의 ‘정상성’을 어떻게 넘어설 수 있을까? 그리고 현실에서 장애를 이해하면서도 이해의 대상으로만 여기지 않을 방법은 무엇일까? 

“내가 이 손을 놓고서 멀리 떠난다 해도 우리 아이가 엄마의 손길을 이 사회 속에서 여전히 받아가며 살아갔으면 좋겠습니다. 이번 생에서의 내 삶이 그걸 위해 쓰여도 좋습니다. 우리 아이와 어미인 저는 이번 생을 그렇게 같이 살다 가려 합니다. 왜냐하면 모든 어미가 그렇듯, 이 아이로 인해서 나는 행복하기 때문입니다.” -26쪽

책에는 질문에 대한 답이 없다. 질문을 찾아나가는 여러 경로를 보여줄 뿐이다. 답을 찾은 이도 있고 아직도 갈피를 잡지 못하는 이도 있으며 이제 막 발을 땐 이도 있다. 중요한 것은 발달장애인 자녀를 둔 엄마들의 질문이 그들만의 질문이 아니듯 구하고자 하는 답도 그들만의 답은 아니라는 점, 그들이 찾은 답으로 인해 마침내 서로의 질문이 더욱 무성하게 피어날 테니 말이다. 

물론 그렇지 않아도 좋다. 괜찮다.



- 인권오름 2016.6.18 기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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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 이런 책(글 잘 쓰는 법 따위)은 거의 사지 않고 읽지도 않는다. 하지만 몇 차례 지인의 극찬을 접하면 사지 않고, 읽지 않을 도리가 없다. 

글을 잘 쓰는 법이 아니라 글을 쓴다는 것, 글쓰기 자체에 대한 깊은 사유가 담겨 있다. 주옥 같은 문장들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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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4년>의 저자 조지 오웰은 "인간이 물질세계는 탐사하면서 스스로에 대한 탐사는 하지 않으려 한다"며 "인간은 자기 삶에서 단순함의 너른 빈터를 충분히 남겨두어야만 인간일 수 있다"고 말했다. -10쪽


글쓰기는 기예의 영역이다. 12회차 수업으로 글쓰기를 정복할 수 없다. 불가능성을 안고 출발하는 일이다. -34쪽


나는 글 쓰는 사람이 많아졌으면 좋겠다. 누구나 작가가 될 수 있다고 선동하는 게 아니라 글 쓰는 사람이 따로 있지 않다는 심심한 진실을 말하고 싶다. ... 작가와 독자의 분리, 전문가와 비전문가의 분리, 선생과 학생의 분리, 지식인과 대중의 분리, 정신노동과 육체노동의 분리라는 치안적 질서는 각 개인의 능력과 재미를 제한한다. 한 사람이 직업의 특에 갇히지 않고 다양한 존재로 변신할 때, 자기 삶의 풍요를 누릴 수 있고 타인의 삶에 대한 상상력을 키울 수 있다. -42쪽


소설가 조세희는 1970년대 말 그대로 '가만히 있을 수가 없어' 책을 한 권 썼고 그 책이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이라고 했다. 

"나는 작가로서가 아니라 이 땅에 사는 한 사람의 시민으로서 그동안 우리가 지어온 죄에 대해 말하고 싶었다."

조세희의 산문집 <침묵의 뿌리>를 넘기다가 이 대목을 보는 순간 마음이 숙연해졌다. 

글 쓰는 일이 작가나 전문가에게 주어지는 소수의 권력이 아니라 자기 삶을 돌아보고 사람답게 살려는 사람이 선택하는 최소한의 권리이길 바란다. -44쪽


삶이란 '타자에게 빚진 삶'의 줄임말이고, 나의 경험이란 '나를 아는 모든 나와 나를 모르는 모든 나의 합작품'인 것이다. 누구도 삶의 사적 소유를 주장할 수 없다는 사실과 경험의 코뮨적 구성 원리를 인식한다면, '경험의 고갈'이라는 난감한 사태는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닐까. -54쪽


글을 쓰고 싶은 것과 글을 쓰는 것은 쥐며느리와 며느리의 차이다. -55쪽


스피노자는 "진리탐구를 위한 가장 좋은 방법을 발견하기 위한 별도의 방법이 필요하지 않으며, 두 번째 방법의 탐구를 위해 세 번째 방법이 필요한 것도 아니다. 이런 식으로는 아무런 인식에도 이르지 못한다"고 말했다. -57쪽


소설가 김연수는 글 쓰는 일이 "아랫도리 벗고 남들 앞에 서는 것"이라는 재미있는 표현을 썼는데, 용기가 충만해서 글을 쓸 수 있다는 게 아니라 글을 써내는 과정에서 문제에 직면하면서 용기가 솟아난다는 말일 것이다. -63쪽


자꾸 도망가고 싶고 피하고 싶은 고통스러운 과거 앞에서 글도 과제를 내려고 엉덩이 붙이고 앉아서 하얀 화면을 글로 메우다보면 '응시'의 힘이 생긴다. 그리고 똑바로 볼 수 있따는 건 더는 두렵지 않다는 뜻이다. 나를 따라오는 게 귀신인지 사람인지 승냥이인지 형체가 모호할 때 훨씬 두렵다. -64쪽


홍대 앞 유명한 북 카페에도 써 있는 카프카의 말.

"우리는 불행처럼 우리를 자극하는 책들, 다시 말해 우리에게 아주 깊이 상처를 남기는 책이 필요하다. 이런 책들은 우리가 자신보다 더 사랑했던 사람의 죽음처럼 느껴지고, 사람들로부터 격리되어 숲으로 추방되는 것처럼 느껴지고, 심지어 자살처럼 느껴질 것이다. 책은 우리 내면에 얼어 있는 바다를 내려치는 도끼 같은 것어야만 한다. 나는 이렇게 믿고 있다." -83쪽


김현은 남은 일생 내내 써먹지 못하는 문학은 해서 무엇하느냐는 어머니의 질문에 이렇게 대답했다. 

"확실히 문학은 이제 권력의 지름길이 아니며, 그런 의미에서 문학은 써먹는 것이 아니다. 역설적으로 문학은 그 써먹지 못한다는 것을 써먹고 있따. 문학을 함으로써 우리는 서유럽의 한 위대한 지성이 탄식했듯 배고픈 사람 하나 구하지 못하며, 물론 출세도, 큰돈을 벌지도 못한다. 그러나 그것은 바로 그러한 점 때문에 인간을 억압하지 않는다. 인간에게 유용한 것은 대체로 그것이 유용하다는 것 때문에 인간을 억압한다. ... 그러나 문학은 유용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인간을 억압하지 않는다." -95쪽


니체는 어느 누구도 책이나 다른 것들에서 자기가 이미 알고 있는 것보다 더 많이 얻을 수 없다며 "체험을 통해 진입로를 알고 있지 못한 것에 대해서는 그것을 들을 귀도 없는 법"이라고 말했다. -96쪽


"봉합된 우정보다는 드러난 적대가 낫다"는 까칠한 니체의 말을 빌려 우정의 비평을 권한다. -109쪽


"대부분의 경우 자기가 속한 사회 집단이 수용한 것만을 선택적으로 '보거나, 느끼거나, 생각하기 마련이다. 그리고 그 집단이 무의식적으로 배제하고 있는 것은 애초부터 우리의 시야에 들어올 일이 없고, 우리의 감수성과 부딪치거나 우리가 하는 사색의 주체가 될 일도 없다." 

일본의 철학자 우치다 다쓰루가 '구조주의'를 설명하면서 한 말이다. -115쪽


좋은 글은 질문한다. ... '질문하는 글'은 '생성하는 삶'으로 이어진다. -118쪽


더 다양한 종족과 관계하고 더 낯선 이방인과 접속한다고 해서 인간에 대한 이해가 '저절로' 깊어지는 건 아니다. 무엇을 경험하느냐가 아니라 경험한 것을 통해 무엇을 느끼느냐이다. -128쪽


내가 지금 하고 싶은 말을 요약하면 이것이다. '관습적 해석에 저항하는 글을 재미있게 쓰자.' -129쪽


'남'의 글에서 억눌러놓은 '나'를 보았을 때, 미처 몰랐던 자기의 욕망을 알아차렸을 때, 사람들은 그 글을 좋은 글이라고 느낀다. -137쪽


"나는 격류 옆에 있는 난간이다. 누구든 잡을 수만 있다면 나를 잡아도 좋다! 그러나 나 너희들을 위한 지팡이는 아니다"라는 니체의 무장에서 난간과 지팡이의 차이로 토론이 벌어지기도 했다. -142쪽


문장이 길든 짧든 나는 이런 글이 좋다. 사유가 촘촘해서 문장이 흐름을 타고 미처 생각지 못한 부분을 건드리며 인식의 틀을 흔들어놓는 글. 하나의 메시지나 하나의 문장, 하나의 단어라도 남으면 그건 좋은 글이다. -153쪽


별자리적 글쓰기는 벤야민의 글쓰기이기도 하다. 벤야민은 이렇게 말했다. 

"좋은 산문을 쓰는 작업에는 세 단계가 있다. 구성을 생각하는 음악적 단계, 조립하는 건축적 단계, 그리고 마지막으로 짜 맞추는 직물적 단계다." -169쪽


"나보다 더 잘 쓸 수도 없고 더 못 쓸 수도 없다"는 말은 잘 쓰고 싶은 욕심에 눈앞이 흐려져서 문장이 한 줄도 나아가지 못할 때 특효약이다. 얼마나 명확한가. 나의 역능만큼 써진다는 엄정한 진리. 영감 가득한 아름다운 문장으로만 채워진 글은 날로 기대하지 말라는 일침. 뭔가 전율을 가져오는 '신의 한 수' 같은 문장들로 이뤄진 글은 갈망의 산물이 아니라 습작의 결과다. -171쪽


"관계란 기억의 교환이다. 다른 사람에게 평범한 기억밖에는 만들어줄 수 없는 사람은 '그 사람'이 딜 수 없으며, 자신의 기억을 갖지 못하는 인간은 다른 사람의 기억 속으로 들어갈 수 없다."(황현산) -18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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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는 결국 해석이다. 그리고 해석은 기록을 전제로 이뤄진다."

기록에 대한 관심이 높다. 그러나 이 현상을 어떻게 보고 이해할 것인지에 대한 깊은 성찰이나 분석은 드물다. 어쨌든 '기록'에 대한 또 하나의 사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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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니어센터에서 자서전을 쓰는 할아버지는 "인간은 누구나 종국에는 작가를 꿈꾼다."라고 대답하셨다. -11쪽


기록하고 기록물을 살피는 행위는 자신을 만드는 과정이다. 기록하다 보면 결국 자신의 이야기를 하게 된다. 기록은 살아가는 목적이자 방법이며 생을 마무리하는 동시에 불멸을 꿈꾸는 가장 오래된 이야기다. -12쪽


오롯이 사적인 글쓰기는 불가능하다. ... 개인의 독자성은 사람들과 더불어 엮이며 사회로 흘러나왔다가 다시 자신만의 창의적인 생각과 행동을 잉태한다. 국가 주도로 작성된 기록물이 아닌 민간 아카이브의 중요성과 필요성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한편으로 개인의 기록물이 지닌 공공성에 주목하는 까닭은 기록이야말로 우리의 '공유 기억'을 만드는 토대이기 때문이다. -13쪽


인간은 결국 죽는다. 전 생애에 걸쳐 축적한 기억과 경험이 다른 세대에게 전승된다. 개별적인 인간은 소멸하되 기록하는 인류는 미래를 꿈꾼다. -17쪽


역사란 앞세대가 다음 세대에게 반드시 전달해야 할 기록이다. 인간은 다른 생명체와 달리 DNA 밖에 기록을 남긴다. 인간에게는 생존본능 외에 문화전승의 본성이 있다. -24쪽


상상이 현실 세계를 바꾸는 데 필요한 시간을 확보하는 동안 사실을 알려야 한다. 공유의 토대가 견고하고 깊고 방대할수록 상상은 현실이 된다. ... 현재를 사는 우리는 공유의 기억과 경험을 풍부하게 하는 '기록'부터 시작해야 한다. 만일 우리가 살아남은 자들의 슬픔을 사회적 기억으로 환원하지 못하면 재앙은 반복되고 불멸을 꿈꾼 인류는 사라질 것이다. 세월호 참사 이후의 한국 사회가 보여주었듯이. -37쪽


소수자로부터 출발한 평등과 인권에 관한 투쟁은 모두 기록의 부족으로 힘겨운 싸움을 해왔다. 기록에서 타인의 삶을 배우는 이들의 시공간을 넘어서는 협업이 필요하다. ... 역사는 결국 해석이다. 그리고 해석은 기록을 전제로 이루어진다. -45쪽


쿨란스키는 <시카고 트리뷴>의 카리브 해 특파원으로 일하면서 7년 동안 대구의 역할 변천사와 생태를 취재하고 자료를 고증하여 대구 인류학을 썼다. 대구가 '어느 바다'에 서식하느냐에 따라 어부들의 흥망성쇠가 갈렸다. 해류에 따라 움직이는 물고기가 인간사의 흐름을 좌지우지한 것이다. 왕이나 국가가 아닌 물고기가 우리네 삶을 보존해왔다. -46쪽


그대 이집트인들은 홍수가 일어난 때부터 다음 홍수가 일어날 때까지를 1년이라 정했다. 그렇게 했더니 안에 365일이 있었다. 이것을 다시 달로 나누고 달을 일로 일을 시로 나누었다. 자연의 변화를 시간으로 세분하고 규칙을 찾아야 나일 강의 범람에 대비해 제방을 쌓을 수 있었다. -13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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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를 하는 동안 어떠한 질문을 던져도 기록자와 구술자의 대화는 결국 자녀와 관련된 이야기로 수렴되었다. 내가 좋아하는 것, 나의 꿈, 내가 나의 삶에서 어떤 존재가 되고 싶은지를 묻는 질문 앞에서 그녀들은 생경한 무언가를 만난 듯 머뭇거렸다. -8쪽


내가 이 손을 놓고서 멀리 떠난다 해도 우리 아이가 엄마의 손길을 이 사회 속에서 여전히 받아가며 살아갔으면 좋겠습니다. 이번 생에서의 내 삶이 그걸 위해 쓰여도 좋습니다. 우리 아이와 어미인 저는 이번 생을 그렇게 같이 살다 가려 합니다. 왜냐하면 모든 어미가 그렇듯, 이 아이로 인해서 나는 행복하기 때문입니다. -26쪽


'그럼 그렇지. 다른 애들보다 반응이 약간 느리긴 해도, 너 잘 크고 있는 거지' -37쪽


피상적이고 형식적인 질문 몇 개 던지고, 애를 한두 번 본 것 가지고, 어떻게 저렇게 무지막지한 말을 하나, 자격도 없는 사람이라고 남편과 엄청 욕을 하고 결과지 받으러 가는 건 생각하지도 않았어요. -40쪽


부모의 장애는 돌아가시는 날까지 최선을 다하자는 마음이었다면, 아이의 장애는 온 미래가 산산이 부서지는 느낌이었다. -44쪽


아버님이 대놓고 저한테 '정신과를 갈 사람은 애가 아니라 너다'라고 그러시는 거예요. 그래서 제가 그럼 아버님이 원하는 병원에, 원하시는 날짜에 원하는 시간 잡아주시면 제가 검사를 받을게요. 저는 아버님 며느리니까 아버님이 하라는 대로 할게요. 대신 제가 아버님한테 돈 대달라고 안 할 테니까 제 아이를 가지고 제가 하는 거는 신경 안 써주셨으면 좋겠어요. -71쪽


그녀는 아직 둘은 부부라기보다는 부모일 뿐이라고 했다. 그녀는 아이를 키우는 데 이 사람만한 파트너는 없다며 신랑을 '동지'라고 표현했다. -79쪽


누군가 쌍둥이를 안 좋은 눈으로 보고 있어서 힘들면 가족이 아닌 척해도 돼. 그래도 엄마는 뭐라 하지 않아. 왜냐면 네가 그걸 감당할 준비가 안 되어 있는 걸 엄마는 아니까. -89쪽


미래 어머님, 미래는 잘 가르치면 일상생활은 할 수 있을 거예요. 그런데 예를 들어 올해 대통령으로 누굴 뽑을지에 대해서는 함께 이야기할 수 없을 겁니다. -108쪽


재활은 삶이라는 긴 여행을 가기 위한 도움닫기다. 미래가 자신의 삶을 원하는 방식으로 디자인하려고 할 때 무엇에 서툴고 어려움을 느끼는지, 미래가 무엇을 필요로 하는지 듣고 만들어 가는 일이다. ... 그런데 의외로 장애를 '아픈' 거라고 말하는 어머니들이 많았다. ... 재활은 치료라기보다는 장애라는 특성을 가진 이들에게 맞추어 제공되는 교육과정 같은 것이어야 하지 않을까. -124쪽


정말 학년 올라갈 때마다 선생님들하고 상담하면서 똑같은 얘기를 반복해요. ... 해마다 같은 이야기를 반복해야 한다는 게 정말 슬펐어요. -132쪽


주목에 비난이나 비하의 시선이 담기면 견디기 힘든 무게가 사람을 짓누를 수 있다. 주목에 내재한 양극단의 감정은 인간이 사회적 동물임을 가장 극명히 드러내주는 것이리라. 노골적인 폭력과 다른 이러한 시선의 폭력은 오랜 시간에 걸쳐 조금씩 사람의 마음을 갈아낸다. .. 그렇게 장애에 대한 사회적 차별과 혐오는 장애아의 어머니에게 내면화되어 자신을 겨누는 창이 된다. -190쪽


'돌발'이라는 말은 예측할 수 없는 행동을 의미한다. ... 발달장애인과 비장애인이 어떻게 다른지 이해하지 못하는 이들에게 발달장애인의 '다른' 행동은 맥락도 의미도 없이 튀어나오는 이상행동이 되기 때문이다. -194쪽


그냥 같이 갔으면 좋겠어요. 그냥 조금 커서 내가 무거운 거 들고 갈 때 걔가 그냥 들어주는 정도? 지금은 안 들어주고 다 나 주거든요. 지 가방도 벗어서 나 주니까. ... 그것만 했으면 좋겠어요. 지 거 나 안주고, 지 것만이라도 들고... -267쪽


헬로키티랑 저랑 동갑인데 그렇게 오래 사랑받는, 

독수리오형제처럼 지구를 지키고 정의를 지키는, 

꿈을 꿀 수 있는 그림을, 캐릭터를 만들고 싶어요. -281쪽


"네. 대답을 해요. 그런데 몸으로 하니까, 기다려주세요." ... 발달장애를 이해하는 것도 필요하지만 장애인이 이해 대상으로만 여겨지지 않았으면 해요. -287쪽


자꾸 흔들려야지 지금보다 한 걸음 더 나아가죠. -29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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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호 사건에 대한 사회과학은 아직까지 '사건'에 천착하지 못햇거나 깊이를 갖기에는 너무 이르다는 생각. 한 10년쯤 지나면 <오월의 사회과학>처럼 <세월호의 사회과학>이란 명저가 나올 수 있을까? 그러한 소박한 기대도 사치스럽게 생각되는 요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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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므로 이해는 사건 원인의 분석과 규명 이상을 요구한다. 그것은 아렌트가 지적하듯이 "그러한 일들이 전적으로 가능한 세계와 우리 자신을 화해시키는 것이다."  다시 말해 끔찍한 사건이 가능할 뿐 아니라 그것이 실제로 일어나기도 하는 세계와 그런 세계가 가한 폭력성에 상처 입은 자아 간의 불화와 갈등을 극복하는 것이다. 이 경우 이해와 그것의 선물인 화해는 인지적인 과정일 뿐 아니라 실천적인 과정이 된다. 세계와 자아의 불화는 단순히 인지적으로 극복할 수 있는 것이 아니며, 자아와 세계 양편에서의 변화를 동반해야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35쪽


... 사회적 고통에 대한 기술적 분석은 때로 희생자 고유의 언어를 특유한 일반적, 전문적 언어로 전환시켜 고통에 관한 표현과 경험을 바꿔 버린다. 고통, 죽음, 애도의 실존적 과정은 우리가 합리적이라 생각하는 이성이나 기술에 의해 변질되며, 이러한 변질을 통해 고통의 치유책에 대한 관심은 더욱 옅어진다. 의학은 고통의 실존적, 도덕적, 미적, 심지어 종교적 측면을 관료적으로 변화시키는 강력한 동인이다. -58쪽


'외상'이란 자연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에 의해 구성되는 것이며, 그 기저에는 '사건, 구조, 인식과 행위 간의 인과관계'가 자리한다. -64쪽


정체성의 수정 과정은 곧 집단의 과거를 탐색하고 재기억하는 과정이다. 기억이란 사회적이고 유동적일 뿐 아니라 현재의 자의식과 깊이 연관되어 있기 때문이다. 정체성은 현재와 미래를 직면하는 것뿐만 아니라 집단의 이전 삶을 재구성하는 과정을 통해 지속적으로 구성되고 확보된다. 부연해 두자면 재현을 통한 외상의 일상화 과정은 문화적 외상의 특수한 사회적 의미를 결코 상쇄시키지 않는다. 보다 폭넓은 공중이 다른 사람들의 고통에 참여하면 문화적 외상에 대한 사회적 이해와 공감의 영역이 확대될 것이며, 이는 새로운 형태의 사회적 결합으로의 효과적인 길을 제공할 것이다. -66쪽


장엄한 기념식전의 장소를 구축하는 것보다, 오히려 충실한 현전으로서의 긍정적 장소를 거부하면서 트라우마가 만들어지는 시간의 어긋남의 경험을 천착하는 자리에서, 범람하는 애도에 대한 타협 없는 저항이 모색될 수 있을 것이다. 유포되는 애도에 대한 타협 없는 저항인 것이다. 그런 점에서 "우리들에게 세월호의 죽음은 개인 차원의 자연사가 아니기에 애도는 정의의 문제로, 산 자들에 대한 정의가 아니라 죽은 자들에 대한 정의로 건나가야 한다"는 철학자 김진영의 전언에 나는 지지를 보낸다. 애도는 산 자들이 죽은 자들과 어떻게 관계를 맺을 것인지, 죽은 자들에게 어떻게 정의로운 관계를 만들어 줄 것인지를 발본적으로 묻는 것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103쪽


다시 말하면 '애도 공동체'라고 떠벌리는 산 자들의 '안심해 버린' 공동체에 포섭될 수 없는 이질적인 존재들인 그들과 만나고, 그들의 원한을 공유하는 것, 그리고 그러한 원한의 감정을 "그 사회의 객관적 존재 방식과의 관련하에서 리얼하게 파악"하고 전화시키는 것이야말로, 애도의 정치의 출발점인 것이다. -104쪽


죽음에 대한 의미 부여, 그리고 그 한 표현으로서의 애도의 정치는, 비극으로 점철된 지난 60여 년의 한국 현대사에서 강력한 힘을 행사해 왔다. 그 힘의 정당성은 아마 기나긴 문명화 과정을 거치며 인류 사회가 보편적으로 갖게 된 죽음에 대한 성스러움에서 연유하는 것이리라. 그 최소한의 성스러움마저 사라져 버린 사회, 유족의 최소한의 권리마저 통용되지 않는 사회에서 '애도'라는 프레임이 여전히 유효한지 자문해본다. 우리는 죽음의 역사학자 필립 아리에서의 시대 구분이 더 이상 통용되지 않는 낯선, 새로운 시대를 몸소 살아가고 있는지도 모른다. -108쪽


국가가 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은 단지 사람들을 죽도록 방치하는 것뿐이다. ... 이러한 신자유주의적 통치성의 본질을 상징적으로 우리 앞에 드러낸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 그것이 국가가 유일하게 할 수 있는 것이 되었다. -144쪽


'국가의 특수법인화' 과정에서 이루어진 생명, 안전 영역의 전면적인 민영화는 이미 내재적으로 시장경제적 효율성이라는 기준을 지향한다. -172쪽


신자유주의적 국가 개혁의 산물인 규제 완화와 공공부문 민영화, 안전, 위험 부분의 외주화, 고용 조건의 유연호와 같은 국가 장치의 재구조화의 맥락에서 시민의 생명, 안전과 관련한 권력의 작용 방식이 변화하는 양상 가운데 빚어진 사건으로 설명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야 비로소 우리는 진도 앞바다를 우리 모두가 처한 현실적 보편성 속에서 국가 장치의 구성적 결핍, 또는 그 근본적 무능력과 대면하는 장소로 재전유할 수 있기 때문이다. -173쪽


사건을 통해 나타난 진리에 충실한 주체가 출현하지 않는다면, 사건이 발생했다는 것만 갖고는 아무런 의미도 끌어낼 수 없다... 결국 사건은 그것을 통해 드러난 진리에 충실하고자 하는 주체의 행위 속에서만 진정한 의미에서 사건일 수 있는 것이다. -176쪽


'사건에 대한 권리... 이 개념은 피해자가 사건 해결의 전 과정에 주체로 참여해 사태에 입장을 표명하고, 해법을 제안하며, 그 이행을 감시하고 비판하는 공적인 지위를 의미한다. 4.16연대의 인권 선언 초안이나  유엔 인권 피해자 권리 장전이 밝힌 피해자의 '존엄'과 '인정'도 피해자를 국가가 제시한 처방전의 수동적인 수취인이 아니라 능동적인 행위 주체로 표상하는 것이 요구된다. -348쪽


한국은 구조의 표출이었던 외환 위기 사태에 제대로 대처하지 못해 비정규직과 취업난과 불평등이 만연하 국가 상태를 만들고 말았다. 인간을 위한 국가 개혁의 기회를 실기한 결과가 오늘의 고통스런 인간 현실인 것이다. 물질주의, 시장주의, 기업주의 제일 담론으로 초래된'단기적' 외환 위기로부터 아무런 구조도 개혁해 내지 못한 '장기적' 후과가 오늘날 한국 사회의 모습이다. 세월호 사태는 예외도 특수도 아니다. -365쪽


우리에게는 '국가를 위한 유공'과 '국가에 의한 희생'의 통합적 접근이 필요하다. 이 말이 두 가지가 같다는 의미는 아니다. 둘은 분명 다르다. 특히 개별 생명의 망실이라는 관점에서 볼 때 전자는 개인 결단의 측면이, 후자는 구각 책임의 측면이 더 두드러진다는 점에서 다른다. 

그러나 개인의 한시성과 유일성, 인간 공동체의 영속성과 전체성을 같이 고려할 때 둘을 통합해 이해하는 것은 위에게 '개별 생명에 대한 공동체의 책임'과 관련해 어떤 통합적 지혜를 줄지 모른다. -38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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