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을 접수하자! 라는 제목을 달았다가 다시 바꾸어 달았다. 그저 그렇게 했으면 하는 내 욕망이 과다하게 들어가 있기 때문이다. 물론 어떻게? 하고 묻는다면 방법은 잘 모르겠다.그래도 어떻게 해서든 점령이든, 점거든, 접수를 했으면 한다. 

430 노동절 전야제를 건국대에서 열려고 하면서 이래저래 말이 많았던 모양이다. 작년에는 홈에버 상암점이 있는 월드컵 경기장 공원에서 했었다. 오랜만에 그 자리에 있었던 나는 옆 동료에게 "원래 이거 학교에서 하지 않았나? 거기서 날밤 까고 하면서 주점에서 술도 마시고 했던 거 같은데."라고 했다. 나 같이 생각한 사람이 많았는지, 올해는 장소가 건국대였는데, 총학생회와 일부(?) 학생들이 개최를 지원했다가 학교 측에서 문제삼고, 다수(?)의 학생들도 반대하는 바람에 어찌어찌 건대를 들어가지 못하고 그 앞에서 하게 된 모양이다. 나는 잡지 마감이라 가보지도 못하고 그 뒤에 학생들이 시위대에게 맞았다는 둥 하는 글을 봤다.(아래 링크 글)  씁쓸하다. 그리고 좀 화가 많이 난다. 

과연 대학은 누구의 것인가. 한총련 출범식, 통일운동 행사, 노동자 파업 등등 학내 집회를 할 때마다 불거졌던 일이다.  운동권 총학생회가 이런 집회를 하면 비운동권은 학생 대다수의 의견은 물어보지 않고 했다고 비난을 해댔다. 사실 운동권이 판을 치던, 그리고 대다수의 학생들에게 존중받던 시절, 학교가 아무리 뭐라 그래도 총학생회가 오케이 하면 들어가서 할 수 있었다. 80년대 후반부터 90년대 중반까지, 정확히 말해 86년 건대사태 이후 96년 연대사태 전까지 한국사회에서 대학은 명실상부한 해방구이자 저항문화의 산실이었다.

그러던 대학은 이제 편의점이 들어서고, 스타벅스가 들어서고, 홈플러스 같은 마트도 들어선다고 한다. 학교 앞 사회과학서점은 그야말로 왕년의 이야기가 되어버렸다. 이것을 가지고 지금 대학생을 비난하거나 문제시 할 생각은 조금도 없다. 오히려 이에 대해 비난받아야 할 사람은 나처럼 90년대 대학을 다녔던 사람들이라고 생각한다. 어찌 되었든 어쩌면 그 때 대학의 주인은 분명히 학생들이고 총학생회는 학생들의 민주적 선거로 뽑혔으니 총학생회가 오케이 하면 주인이 오케이 한다고 받아들여졌던 것 같다. 근데 아무리 민주적 선거로 뽑혔다고 해도 위임받은 권력이 권력을 남용하면 안된다는 요구, 그래서 외부 행사와 집회를 총학생회가 학생들 의사도 묻지 않고 치루는 것에 문제제기가 생긴 것이라고 본다.

그런데 보다 근본적으로 나는 묻고 싶다. 대학의 주인은 대학생인가? 대학 운영에, 무엇보다 등록금 책정 같은 것, 교수 임용 같은데 일방적으로 학생들이 배제되는 것에 분노하고 문제제기 하면서 대학의 주인은 우리다, 학생들이다라는 말을 많이 했다. 학원 자주와 투쟁이란 말도 있었는데 대학을 독재권력, 자본권력에 종속되지 않게 한다는 의미도 있었지만 교수, 학교, 학생 3주체가 평등한 주인의 권리를 행사하는 학원 민주화의 내용도 들어있었다.  하지만 학교 밖을 나오니 생각이 달라졌다. 위치가 바뀌었으니 생각이 변한 거라고 욕을 해도 할 수 없다.

공장의 주인이 노동자라면 대학의 주인은 교직원, 청소하는 사람, 수위실, 시간강사, 조교, 행정실 직원 등등 대학의 노동자들이어야 하지 않을까. 대학이 학문의 공동체라면 무엇보다 교수가 주인일 것이다. 현실에서 대학의 주인은 등록금 내는 대학생인가, 아니면 대학을 운영하는 오너, 이사장인가.

나는 서울대학이 서울대 학생, 교수, 교직원의 것도 아니고 교육부의 것도 물론 아니며 국민의 것이라고 생각한다. 서울대는 등록금이 다른 사립대에 비해 무지무지 저렴하다. 왜 그런가? 국민의 세금이 지원되기 때문이다. 건물은? 교수 월급은? 사립대는 그럼 학생 등록금만으로 운영될까? 사립대의 국가지원금도 상당한 액수다. 돈만이 문제일까? 대학생이 받는 사회적 특권은 헤아릴 수 없이 많다. 대학생들, 억울하겠지만 나와보면 안다. 아니 지금 조금만 노력해서 같은 나이 또래 고등학교를 나온 이들의 생활과 비교를 해봐라. 예전보다 물론 줄어들었다고는 하지만 아직도 한국사회에서 대학생은 하나의 특권계급이다. 그러기에 나는 대학이 지역사회의 것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90년대 중반, 전남 광주에 있는 한 대학 축제에 간 일이 있었다. 나는 눈이 휘둥그레졌다. 축제를 하는 대학에 대학생들보다 지역주민들이 훨씬 많았다. 막걸리판이 벌어지고 유모차가 돌아다니고, 대학운동장에 가요제를 보는 관객10만명 중 대부분은 그저 광주에 사는 평범한 시민들이었다. 지금은 어떤지 모르겠지만 나는 그것이 5.18이 남긴 유산이자 기풍이라고 생각했고 무지 부러웠다.

오늘 어린이 날, 어떤 대학이 교정을 개방했는지 모르겠다. 내가 사는 집 근처에도 대학 캠퍼스가 있는데 우리 집이 바로 앞이니 도서관에서  책 좀 보자고 하면 어떻게 나올지 안 봐도 비디오다. 하다못해 집 앞 초등학교는 일요일 아침이면 조기축구회 회원들에게 운동장을 개방하는데 말이다.

대학은 본래 학문을 탐구하는 집단공동체로 시작되었다. (물론 취업준비학원이 된 지금 이 말이 무색하지만... 그럼 대학의 주인은 기업인가? 슬프다) 학문이 사상누각이 되지 않기 위해서는 그래서 무엇보다 현실과의 접촉면을 넓혀야 하고 그 사회와 소통해야 한다. 대학생을 위해서? 대학을 위해서? 물론 그들을 위해서도 사회가 대학을 접수할 필요가 있다. 하지만 무엇보다 사회를 위해서 대학을 접수했으면 좋겠다. 지역에 변변한 도서관 하나, 산책길 하나, 공원하나 없는 나라에서 대학을 그렇게 공적 공간으로 만들어갔으면 좋겠다. 그래서 최소한 대학은 주인이 없는 사회공동체의 공간이 되도록 해야 하지 않을까. 결론도 과격해지는 거 같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내가 일하는 잡지에 실은 글이다. 격월간으로 나오다 보니 약간 철지난 이야기를 하게 된다. 요즘 새로운 글쓰기 형식에 대해 고민을 하지만 진도가 잘 나가지 않는다. 이래저래 임기응변 식으로 땜방만 하게 되는 거 같다.   

이 글을 쓰는데 『블루 골드(Blue Gold)』도움을 많이 받았다. 다시 읽어보니 이 책에 대한 리뷰 같기도 하다.  

공기(산소)나 식량처럼 물은 필수재이기도 상품이기도 하다. 혹자는 공공재라고 하고 또 누구는 "물은 인권"이라고 이야기한다. 나는 그 무엇보다 물은 그 자체로 생명이란 생각이 들었다.

어쨌든 물 문제에 대한 공부는 많이 한 셈인데, 태백이 워낙 복잡한 문제들로 얽혀있다보니 다 소화를 하지 못했다.  

폐광지역으로 지역 살림살이 문제, 진폐증 환자 문제, 새롭게 들어선 강원랜드로 인해 도박과 노숙 등등의 문제, 그리고 생태 문제까지. 어쩌면 한국 근대사의 모든 문제가 담겨있다는 인상을 받았다. 불과 2박3일의 취재였지만 말이다.  

사북항쟁에 대한 다큐멘터리를 다시 한 번 보고, 다시 한 번 더 다녀오고, 르포를 다시 써봐야겠다는 숙제를 남겨둔다. 미뤄둔 숙제가 쌓이고 있다.  

 

-------------------------------------------- 

88일간의 물 부족 사태, 태백을 가다

2009년 1월 6일 태백시와 수자원공사 태백권관리단(태백수자원관리단)은 느닷없이 한 장의 호소문을 발표했다. 내용은 지난해 9월부터 계속된 가뭄으로 태백시의 상수원인 광동댐 저수율이 예년 30%밖에 되지 않아서 앞으로 눈이나 비가 오지 않을 경우 생활용수를 30일밖에 급수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곧이어 1월 12일에는 오전 10시부터 오후 4시까지 6시간동안 수돗물이 중단되었고, 15일부터는 오전 6시에 한 번, 저녁 6시에 한 번, 하루 두 차례 2~3시간만 수돗물이 공급되었으며, 이후 일부지역에서는 수돗물 공급이 아예 중단되는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4월 3일 제한급수가 해제될 때까지 재앙에 가까운 88일간의 물 부족 사태는 그렇게 시작되었다.

오래된 경고, 갑작스런 재난
2009년 4월 8일. 태백을 향하는 차 안에서는 전국 각지의 산불 소식을 전하는 라디오 뉴스가 흘러나왔다. 경북 건령산과 백운산, 충북 식장산, 전북 풍악산…. 바짝 메마른 산들은 아주 작은 불씨로도 타들어가기 시작했고, 한 번 붙은 불길은 쉽게 잡히지 않았다. 마치 작정이라도 한 듯 청명 한식 전후 열흘간 150건의 산불이 발생했으며 서울 남산 면적과 비슷한 310헥타르의 산림이 새까맣게 타들어갔다. 강원도에서만 지난해의 다섯 배가 넘는 30건의 산불이 발생했다. 한반도가 바짝 말라 타들어가는 듯했다.

한반도만이 아니라 지구가 메말라가고 있다. 지구 온난화는 의심할 나위 없는 상식이 되어버렸다. 마실 물이 점점 부족해지고 있다는 사실도 별로 놀라운 일이 아니다. 국제기구와 환경단체들은 벌써 몇 해 전부터 “지구상에 물 위기가 시작되었으며, 이는 지구 생존에 가장 큰 위협이 될지도 모른다.”고 경고해왔다. 얼마나 믿어야 할지 모르겠지만 한국정부도 2016년에는 한국의 물 부족이 심각해진다는 발표를 내놓았다고 한다.

그리고 2009년 태백을 중심으로 한 정선, 고한, 사북 등 강원도 일대에 몇 십 년 만에 한 번 있을까말까 한 겨울 가뭄이 덮쳤다. 강원도만이 아니다. 낙동강은 수량부족으로 수질이 심각하게 악화되었고, 전남 여수 섬지역 350여 가구는 3개월 동안 선박이나 소방차를 이용한 운반급수에 의존하였으며, 통영 욕지도와 사량도 주민 425가구도 일주에 두 번 오는 급수선에 의존하고 있다. 전북은 지난해 평균 강수량 60% 선인 900mm 이하를 기록하면서 2만여 명이 식수난에 시달렸으며, 경북 김천과 안동, 상주, 청송 등에 있는 5000여 가구 주민들도 제한급수 또는 단수로 인한 어려움을 겪었다.  

정상급수 5일째, 태백에서 만난 사람들
점심 무렵 도착한 태백은 플래카드의 도시였다. 곳곳에 이번 사태와 관련한 플래카드가 걸려있다. 내용은 주로 물 관리를 잘못한 수자원공사와 몇 개월 동안 주민의 어려움을 외면한 정부에 대한 성토와 대책마련을 촉구하는 것이었지만 간혹 전국 각지에서 생수병을 보내준 것에 대한 고마움의 표시도 있었다. 지난 3월 언론들이 태백 주민들의 어려움을 보도하기 시작하면서 태백으로 모인 생수가 340만 병을 넘어섰다고 한다.

우선 태백시 중심가에 있는 황지연못을 찾았다. 낙동강 발원지로 알려진 황지연못은 매우 아담하게 꾸며져 있는 공원으로 태백 주민들이 자주 찾는 쉼터이다. 태백시는 제한급수 시작 바로 다음날은 1월 13일부터 이곳에서 취수를 시작했다. 1989년 광동댐을 취수원으로 활용한 뒤 20년 만에 처음 있는 일이었다.

“하루에도 대여섯 번인가 물차가 와서 물을 끌어 담는데 신기하게도 못이 마르지는 않더라고요.” 초등학생 딸아이를 데리고 공원을 산책 나온 김진원(43세, 교사) 씨의 말이다.

“몇 달 간 정말 고생 많았죠. 목욕은 엄두도 못 내고 머리도 며칠 만에 한 번 감을까말까. 그래도 우리 집은 아파트 저층이어서 하루에 두 번 나오는 수돗물이 그런대로 잘 나왔는데 고층은 그마저도 잘 안 나왔어요. 수압이 약하니까. 또 저녁 6시에 물을 받아야 하니까, 맞벌이하는데 서둘러 퇴근하거나 물을 받아놓고 다시 일하러 가기도 했죠. 사실 먹는 물이야 사서 마시면 됐지만 씻는 게 제일 힘들었죠.” 어린 아이가 있는 집, 식구 중에 환자가 있거나 노부모를 모시는 집의 경우 불편은 더욱 심했다. 버티다 못해 아예 짐을 꾸려 물이 나오는 지역으로 피난을 가는 집들도 생겼다.  

“세탁기 돌리는 건 꿈도 못 꾸고 빨래는 일주일에 한 번 모아놨다가 했어요. 화장실도 식구들이 다 본 후에 한꺼번에 물을 붓고. 그래도 아파트에 사는 저희들은 사정이 나았죠. 아마 지금도 시 변두리나 고지대는 어려움이 많을 거예요.”

지난 3월 학교가 개학을 하면서 태백은 또 한 차례 비상이 걸렸다고 한다. 아이들 급식 제공에 차질을 빚게 된 것이었다. 학교 교실 뒤편은 생수 박스로 가득 채워졌고 급식소 인근에는 물탱크가 설치되었다.   

태백 황지동 한 연립에 혼자 살고 있는 김옥순(78세) 할머니는 연신 전국에서 생수를 보내주어 고맙다는 인사다. 광부였던 남편을 따라 경북에서 태백으로 온 지 30년 만에 이런 가뭄은 처음이었다.

“고생이야 이루 말루 다 못했지요. 쌀이 있어도 밥을 할 수가 있나. 설에도 아이들 오지 말라고, 물도 안 나오는데 무슨 명절이냐. 혼자서 그저 라면이나 끓여 먹었지요. 통장 집에 물 왔다 그러면 가서 가져오는데 생수병 큰 거(1.5리터) 6개 들고 집까지 오는 게….”

할머니는 지난해 진폐증이 심해져 돌아가신 할아버지 생각이 나셨는지 눈물을 보이시며 말을 잇지 못한다. “빨리 죽어야지….”하는 소리에 옆에 있던 김명자(74세) 할머니는 “연금 꼬박꼬박 받아먹고 건강하게 살아야지, 왜 죽느냐?”며 다독이신다.

김명자 할머니는 이제 몇 안 남은 광업소 중 한 곳이 있는 철암동에 산다. 그곳은 몇 십 년 전에 덮었던 동네우물을 다시 열어 방송을 탔던 마을이다.

“예전에도 고생 많았지. 광업소마다 목욕탕이 있어서 일하는 사람들 씻는 거는 어렵지 않았지만 그래도 집집마다 수도꼭지 달린 게 오래 안됐잖아. 여기 황지연못도 예전에는 다 빨래하던 빨래터였어. 빨래가 가장 고생이지. 탄광 많을 때는 어디 널어놓을 수가 있나. 밖에다 널면 다 까매지는데. 근데 나이 들고 다시 물 길러 다니려니까…. 그래도 우리 땜에 군인들이 고생 많았어요. 우리 집은 물차도 못 올라오니까 집까지 물통 날러주느라.”

물 부족 사태의 세 가지 원인   
언론들은 이번 사태의 원인을 대략 세 가지로 꼽는다. 극심한 가뭄과 태백수자원관리단의 물 관리 부실, 그리고 낡은 상수도관으로 인한 전국 최고의 누수율이다. 황지연못에서 만난 주민들 중 고령층으로 갈수록 평생 겪어보지 못한 가뭄이었다며 기후를 탓하는 목소리가 많았던 반면 젊은 사람일수록 ‘인재’에 무게를 두고 있었다. 또한 몇몇 주민들은 인근 정선에 있는 카지노 강원랜드와 여기저기 들어서고 있는 스키장, 리조트 등에서 물을 많이 쓰기 때문일 것이란 나름의 추측을 하기도 했다. 

“강원랜드나 스키장 때문이라는 건 사실과 달라요. 물론 마실 물도 없는데 인공눈을 만들고 하니까 보기는 안 좋죠. 하지만 관광객을 상대로 하니까 제한급수를 못하고 물을 자체적으로 동강 같은 곳에서 사왔거든요. 사실 어느 게 더 근본적인 원인인지 잘 모르겠어요. 우선 태백시 상수도 누수율이 고질적인 문제죠. 여기 누수율이 49%로 전국 평균 14.6%, 강원도 평균 22%를 훌쩍 뛰어넘고 있거든요.” <태백정선 인터넷뉴스>의 홍춘봉 기자의 이야기다. 태백시의 누수율이 이렇게 높은 이유는 대부분의 상수도 설치를 정부나 지자체가 아니라 1970년대부터 우후죽순 생기기 시작한 탄광업체들이 각자의 사택들 중심으로 했기 때문이다.

“태백시는 상수도관이 어디에, 어떻게 묻혀있는지 파악을 못하고 있어요. 사실 시가 생기기도 전에 일이잖아요. 또 누수 되는 걸 보수하려면 330억의 예산이 필요한데 태백시는 돈이 없다는 거죠.”

태백시수자원관리단의 부실관리에 책임을 묻는 측은 이번 물 부족 사태 해결을 위해 태백시공무원노조와 각계 사회단체로 구성된 태백시지역현안대책위원회가 중심에 있다. 이들은 태백수자원관리단이 가뭄을 대비해 충분한 양의 물을 광동댐에 저장해두어야 했음에도 너무 일찍, 너무 많이 방류를 해버린 데 원인이 있다고 지적하며 감사원에 감사 청구를 해놓은 상태다.  홍 기자는 “감사원 결과가 나와 봐야겠지만 첫째로 이번 가뭄이 예측 가능했는가 하면 그러기 어려웠을 거라고 보고. 안일하게 대처한 측면이 없지는 않겠지만 이게 근본적이고 중요한 원인이라고 보기 어려운 거 아닌가 싶죠. 어쨌든 양쪽 이야기가 엇갈리니까 감사 결과를 봐야겠지만…”이라며 신중한 입장을 취하고 있다.

몇 해 전부터 한국은 물 부족 국가인가 아닌가에 대한 논란이 있었다. 유엔환경기구(UNEP)에서 물 부족 여부를 알려주는 지표를 내놓고 있는데 한국의 연강수량은 세계평균 880mm보다 많은 1250mm이지만 높은 인구밀도로 1인당 강수량은 세계평균의 1/8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또한 강수의 대부분은 여름철에 집중되어 바다로 흘러들어간다. 매년 홍수와 가뭄이 되풀이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광동댐도 홍수에 대비해 방류한 뒤 태풍도 비켜가고 바로 가뭄이 닥쳐 어쩔 수 없었다는 것이 태백수자원관리단의 해명이다. 

이러한 한국 지형과 기후의 특성을 들며 개발론자들은 더 많은 물그릇, 댐을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번 사태를 맞아서도 정부는 발 빠르게 광동댐 인근에 소규모 댐 건설을 위한 예산을 확보했다. 하지만 환경단체들은 댐 건설이 아니라 효율적인 물 관리가 필요하다는 입장이다. 인구가 늘고 생활환경이 바뀌면서 물 사용량이 많아지고 있는데 무턱대고 공급량을 늘리는 것이 능사가 아니란 것이다. 분명한 사실은 물은 지구가 무한정 공급하는 자원이 아니라는 점과 물 부족으로 극심한 고통을 겪어왔고 또 겪게 될 사람들과 지역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태백 시내를 벗어나 철암동으로 갔다. 이곳 주민들에게 지난 80여 일은 그야말로 재앙이었다. “설거지물을 아끼려고 종이컵을 썼어요. 생수도 사다 마시니까 빠듯한 생활비가 이래저래 많이 나갔죠. 우리 집은 20년 넘게 안 쓰던 재래식 화장실 문을 다시 뜯어내고 쓰고 있어요. 저 앞 동네에는 간이 화장실을 가져다놨는데 아침이면 줄이 길게 늘어서죠.” 하루아침에 일상이 2, 30년 전으로 돌아갔다며 철암동에서 만난 이철용(54세) 씨는 만약 서울에서 몇 달 동안 물이 안 나왔더라도 정부가 이렇게 손 놓고 있었겠느냐며 목소리를 높인다.

‘한국 근대화와 물’이란 글에서 홍성태 교수는 “수도꼭지에서 물이 쏟아져 나오는 것은 근대화된 삶의 전제조건”이라고 했다. 바꿔 말하면 물이 안 나오는 상황은 전근대적 삶으로 돌아가는 것을 뜻하며 지난 80여 일간 태백에서는 제 역할을 하는 정부가 부재했다는 말도 된다. “만약 서울이었다면”이라는 그이의 분노는 너무나 당연하다.

철암동에서와 마찬가지로 저녁 무렵 들린 중앙시장 통에서도 황지연못에서 만난 주민들과는 달리 강원도 폐광지역을 홀대하는 데 대한 섭섭함과 분노를 어렵지 않게 확인할 수 있었다.
“정부는 자기들이 뭐 필요해야 여기에 뭘 해주지 그렇지 않으면 암 것도 안 해줘. 강원도가, 태백이 수 십 년 동안 석탄 캐서 전국에 연료 다 대줬잖아. 근데 폐광되니까 니들 살 길 알아서 찾으라고 입 싹 닦고. 카지노도 뭐 사실 여기 사람들 위해 해준 건가?”

“왜, 그래도 없으니 보단 낫지. 근데 그것도 여기 사람들이 죽겄다고 데모하고 그러니까 결국 해줬지, 뭐.”

태백으로 들어오는 도로의 상당수는 5.16 쿠데타 이후 삼청교육대의 전신 쯤 되는 ‘국토개발단 근로대’가 딱은 길이라고 한다. “전국에서 깡패들 잡아다가 여기 와서 도로를 닦게 했지. 그때야 포클레인이 있어, 뭐가 있어. 근데 도로 하나를 다 닦아야 풀어주니 도리가 있나.”

1980년대 석탄산업이 호황을 누리던 시기, 태백에서는 강아지도 만 원짜리를 물고 다닌다는 말이 돌 정도였지만 그 그늘에는 ‘사북항쟁’으로 대표되는 착취가 있었고 툭 하면 터지는 탄광사고에도 목숨을 내놓고 ‘막장’에 들어가야 했던 애환과 고달픔이 있었다. 

술이 얼큰하게 취한 어떤 이는 슬쩍 다가와 자못 의미심장하게 “사실 제한급수가 풀린 게 비가 와서가 아니라 태백 인심이 심상치 않아서”라며 “어떻게 비다운 비가 한 번도 안 왔는데 국무총리가 왔다가니까 냉큼 물이 나오느냐.”고 일러준다.
 
블루 골드vs물의 평등과 민주주의
시가 생긴 이래 국무총리가 태백을 찾은 건 처음이라 한다. 한승수 국무총리와 관련부처 장관들이 태백을 찾은 건 세계 물의 날을 맞아 태백의 실정이 전국적으로 알려지고 난지 엿새 뒤인 3월 28일이었다. 당시 정부가 태백을 특별재난지역으로 선포하거나 노후 된 상수도관을 전면 교해하겠다는 특단의 대책을 내놓을 것이라 기대했던 주민들은 국무총리가 구체적 대책 없이 원론적인 말만 하고 돌아간 것에 큰 불만을 표시했다. 민심이 부글부글 끓기 시작했고 4월 5일 전후해서는 서울에서 대규모 집회도 잡아놓았다. 그러던 차에 4월 3일 급작스럽게 제한급수가 해제된 것이다.

“앞으로 두고 봐야죠. 수자원공사는 6월까지는 공급할 수 있다고 하는데.” 다음날 ‘태백 생명의 숲’이란 단체 사무실에서 만난 홍진표 사무국장의 말이다. 폐광지역을 살리기 위한 대안으로 생태운동을 선택한 그가 이번 사태를 보는 시각은 홍춘봉 기자와는 차이가 있다. 무엇보다 “태백시가 태백 주민을 다 거지로 만들었다.”며 분노하고 있다.

“누수율은 수압이 떨어지면 더 높아지니까 최근에는 50%가 넘었을 겁니다. 절반이 버려진다는 거죠. 그러는 동안 과연 태백시는 뭘 했느냐는 말이죠. 민선 지자체 3기라고 하는데 예산 타령이나 하며 정부에 손 벌리고. 물이 부족해지니까 생수병 보내달라고 또 손이나 벌리고. 가장 기본적으로 해야 할 일도 제대로 못하고 태백시민들이 여기다 대고 고맙습니다, 저기다 대고 고맙습니다, 하게 만들었잖아요.” 게다가 태백시에서는 그 생수병들로 상징 조형물까지 만들겠다고 하니 그는 기가 막힐 노릇이다.  

“물론 가뭄이 극심했죠. 그런데 기후변화는 피할 수 없는 현실이니까 앞으로도 이런 일이 계속 될 거예요. 문제는 물을 너무 많이 쓴다는 거예요. 강원랜드 같은 시설도 직접적인 영향은 아니지만 물을 엄청나게 쓰는 곳이잖아요. 이런 게 막 생기는데 댐 하나 더 짓는다고 해결되겠어요? 그런 점에서 수도세를 현실화할 필요도 있어요. 돈이 없어서 물을 못 쓰는 사람은 없게 만들어야 하지만 전기세처럼 많이 쓰는 사람이 많이 내게 해야 하고, 근본적으로는 물을 이렇게 많이 쓰는 생활 자체를 바꿔야 해요. 1985년 광동댐을 지을 때 태백에 12만 명이 살았고 예상했던 인구가 20만이었어요. 지금은 5만인데 20만 명이 쓰는 만큼 물을 쓴다는 게 근본적인 문제죠.”

세계 물 소비량은 20년마다 두 배씩 증가했다. 빨리 근대화한 한국의 경우 물 소비량도 그만큼 빠른 속도로 늘었다. 아파트에 사는 한 가구는 매년 50만 리터의 물을 사용한다. 생활환경만 바뀐다고 될 문제가 아니다. 생활용수는 전체 물 소비량의 10%에 불과하고 20~25%는 공업용수로 쓰인다. 자동차 한 대를 생산하는데 들어가는 물은 40만 리터다. 제조업은 말할 것도 없고 친환경 산업이라고 알려진 IT산업도 막대한 오염수를 발생시키고 컴퓨터 한 대를 생산하는데도 대단히 많은 물을 필요로 한다. 나머지 65% 이상의 물을 쓰는 농업의 경우에도 기업농으로 갈수록 물 소비량은 늘어날 수밖에 없다.

이러한 현실에서 전 세계‘물 유통’은 연간 4천억 달러라는 금액으로 환산되고 있다. 지난해 잠시 주춤했던 수돗물 민영화 논의가 슬며시 고개를 드는 까닭이다. 벌써 14년 전인 1995년 열린 ‘국제 물 심포지엄’에서 세계물정책연구소 소장은 “20세기가 석유의 시대였다면 21세기는 물의 시대가 될 것”이라고 공언한 바 있다. 그후 다국적 기업들은 물이야말로 블루 골드(Blue Gold)라며 생수 판매를 비롯한 ‘물 시장’장악에 열을 올리고 있고, 한국정부 또한 시장에서 경쟁력을 갖추기 위해 하루라도 빨리 수돗물 민영화가 필요하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 틈바구니에서 물 양극화로 기근과 질병에 시달리는 국가가 있고, 양동이를 들고 28킬로미터를 걸어야 하는 어떤 대륙의 아이들이 있으며, 예상치 못하게 물 부족이라는 재앙을 만난 태백이 있다.

수련의 59일과 평등한 물
“석유가 없으면 석탄을, 쌀이 없으면 밀을, 그러나 물이 없으면 무엇을?” 태백 시내에 걸린 한 플래카드 글귀다.

과연 물은 무엇인가. 물의 주인은 누구인가. 누가 국가와 기업에게 물을 사고 팔 권리를 주었나. 물을 어떻게 나눠 쓸 것인가. 꼬리를 무는 물음을 뒤로 하고 태백을 떠나오는 길에 한강 발원지로 알려진 검룡소에 들렸다.

검룡소는 황지연못과는 달리 태백 시내에서 30여 분 떨어진 계곡에 있다. 인근 고개 이름이 삼수령인데서 알 수 있듯 태백에 빗방울이 떨어지면 세 갈래로 나뉘어 한강, 낙동강, 그리고 동해로 흘러든다고 한다. 검룡소 입구에 차를 세우고 호젓한 산책길을 15분정도 걷다보면 검룡소가 나온다. 태백 시내 메마른 하천과 달리 신비롭게도 샘물이 줄기차기 솟구치는 모양을 쳐다보고 있자니 왠지 별세계에 온 느낌이다. 

다행히도 4월 중순을 넘어서면서 전국적으로 몇 차례의 단비가 내렸다. 국무총리에게도 태백시장에게도 너무나 고마운 단비였겠지만 무엇보다 태백 주민들이 반겼을 터이다. 하지만 불길함을 떨칠 수는 없다.

‘수련의 59일’이란 이야기가 있다. 한 연못에 수련이 ‘2+2, 4+4,…’처럼 산술적으로 피는 것이 아니라 (오늘날 인류가 생태계를 파괴하듯)‘2×2, 4×4,…’처럼 기하급수적으로 피어나 60일째 되는 날 연못을 뒤덮는다고 가정하자. 수련으로 뒤덮혀 물이 썩기 하루 전인 59일째 연못의 풍경은 어떨까? 연못 절반만 수련이 덮인 채 그런대로 보기 좋은 풍경을 연출한다. 오늘은 며칠 째 날일까. 본래부터 평등한 물을 어떻게 평등하게 할 수 있을까. 주어진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댓글(1)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신동환 2010-06-29 11: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위의 기사 중 누수율으로 표기된 것은 정확하게 말하자면 유수율이라는 용어가 맞는 것 같습니다. 상수도 관련 자료 검색하다고 오게되었습니다. 좋은 글 잘보고 갑니다. 감사합니다.
 

며칠 전 한 인권단체에서 '르포와 인터뷰' 강연을 하게 되었다.  
벼락치기로 강의안을 만들었다.  
그러나 완성되지 않아 가져가지 않았다. 

지금 다시 보니 내 고민만 잔뜩 써놓았다.
결국 결론은 "가르친다는 것은 희망을 이야기하는 것"일 뿐임을...
그래도 완성을 목표 삼아, 업그레이드를 취중에 결심하며 여기에 올린다.  

 

---------------------------------------------
 

오늘 제가 이야기할 르포라는 것이 어쩌면 실용적인 글과 문학적인 글의 중간 형태일 수 있고 그러면서도 가장 정치적인 글쓰기의 한 형태가 아닐까 해요. 르포르타주는 기록과 보고라는 어원을 가지고 있고 기록문학으로 불리고도 하는데 주로 저널에서 쓰는 르포와 르포문학 이렇게 나눌 수도 있지요.

대표적인 르포문학으로는 존 리드의 <세계를 뒤흔든 10일>과 조지 오웰의 <카탈로니카 찬가>를 들 두 있고. 르포는 저널과 뗄 수 없는 관계라고 볼 수 있는데 르포의 탄생이랄까 전성기를 맞게 해준 것도 저널의 탄생이었고, 저널이 제 역할을 잘 할 때면 굳이 르포가 쓰여지지 않죠, 그런 이야기를 하는 사람도 있지요. 대표적인 게 <카탈로니카 찬가>이고 80년대 한국의 르포 문학도 그렇죠.

중국에서는 르포의 기원을 <시경>에 둔다는 이야기도 있어요. 춘추시대 각지에 떠돌던 민요를 채집한 시집인데 공자가 집대성 했다는 말도 있는데 어쨌든 중국은 르포의 전통이 깊다고 자부하고 있죠. 하지만 제가 보기에는 사회주의 국가의 속성상 많은 부분 공산당의 정책 홍보 수단으로 자리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물론 강의안에 나와 있듯 반체제 르포가 꾸준히 수준 높게 발표되고 있는 거 같구요. 일본 같은 경우는 르포가 팔리는 시장이 형성되어 있다는 것, 이러한 점이 일본 문화와 사회의 강한 점인 것 같아요.

한국의 경우는 80년대 꽃을 피웠다 졌지요. 거슬러 올라가면 김사량의 <노마만리>나 <보고문학의 제문제> 같은 것도 있지만 80년대 노동자 수기,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 같은 작품과 황석영, 조세희의 소설, <침묵의 뿌리>도 있고, 잠입르포가 있었고. 그러다 곧 사그라 들었죠. 언론이 제 역할을 해서일 수도 있고. <말>지나 <한겨레> 같은 데가 나왔으니까. 

그러다 최근에 르포가 전성시대가 도래한 것이 아닌가.  왜 르포의 전성시대인가. 르포와 저널의 관계가 불가분이란 말씀을 드렸는데 저널이 피상적인 이미지를 전달하기 때문에 더 위험하다는 말들이 있지요. 대표적인 것이 아랍 문제인데, 언제나 집단으로만 나오는 무슬림들과 팔레스타인 문제. 모든 사람들이 약간은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더 안 좋다는 거죠. 한국의 경우에도 이주노동자, 비정규직, 철거민 같은 경우가 그렇잖아요.

제가 얼떨결에 책 두 권에 이름을 올렸는데 그게 이랜드 노동자 인터뷰집 <우소꿈>하고 이번에 나온 <여기 사람이 있다>예요. 둘 다 1만 권정도 팔릴 거 같은데 출판시장에서는 대단한 일이죠. 왜 사람들이 이런 책들을 사볼까.

저널은 속성상 '요점만 간단히'이어야 하는데 사실 사람 사는 게, 또 갈등과 사건이라는 게 '요점만 간단히' 될 수 없는 것들이죠. 요점만 간단히 하면 핵심쟁점이나 주장은 전달될 수는 있지만 총체적 진실이랄까 하는 것이 드러날 수 없다는 것이 문제죠. 주거권을 보장하라는 구호나 왜 주거권이 보장되어야 하는지 기자회견에서 몇 문장으로 나오고 그걸 저널은 받아 적지만 그 사람이 그 자리에서 이런 이야기를 하게 만든 그 배경, 그 삶이 드러나지 않는다면 그건 큰 울림이 없지 않잖아요.

사람들은 팩트가 아니라 스토리에 감동을 받는다는 것도 그런 이유겠죠. 그런데 스토리라는 게 소설과 같은 허구, 잘 짜여진 구조에서 오는 감동도 있지만 '사실의 힘'이라는 것도 있거든요. 말짱 거짓말이라면 감동이 적죠. 그것이 거짓이어도 삶의 진실, 그 한 단면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이런 게 소설론에 있었던 거 같은데. 어쨌든 '사실의 힘'에 기대어 스토리를 이야기하는 것이 르포이기에 르포가 읽히는 게 아닐까.

서벌턴은 말 할 수 있는가 
 
앞에서 이주노동자, 성소수자, 철거민, 등등을 들었는데 이런 사람들을 서벌턴(하위주체)라고 이야기를 한다고 해요. 구하, 스피박 이런 인도 사람들이 구술사에 대한 연구를 하면서 내놓은 개념이죠. 구술이라는 것이 한국에서는 불과 10년 좀 넘은 학문이에요. 이들의 이야기를 기록하는 것이 르포의 한 역할이라고 생각해요. 물론 중요한 사건도 그렇지만 그건 워낙 영상기술이 뛰어나다보니. 그 과도기가 <칠레전투> 아니었을까 싶은데. 한 친구는 기륭싸움만 벌써 몇 년째 쫓아다니고 있죠. 

제가 다른 글에도 쓴 적이 있는데 <마다가스카>란 영화가 있다고 해요. 거기 대사가 없는 물고기가 나오죠. 말을 할 수 없는 존재, 말은 하니만 그것이 지배 언어가 아니기 때문에 소통이 안 되는 집단, 자기 언어가 없는 사람들, 이런 것이 물고기가 아닐까. 그럴 경우 그들의 이야기를 어떻게 기록하고 보고할 것인가의 문제가 남는 것이죠. 

4.3사건 같은 경우 8대2로 토벌대의 학살이 많았는데 이게 구술작업을 통해 드러났어요. 그런데 생존자들이 미워하는 사람들의 순서는 고발자, 이웃주민에 대한 증오가 가장 크고 그다음 산사람, 그리고 토벌대예요. 토벌대는 시대적 상황에서 어쩔 수 없었다, 산사람은 다 착하고 똑똑한 사람이었지만 그사람들 선동 때문에 너무 많이 죽고 고생했다, 제일 미운 건 고발한 이웃들. 이게 반공이데올로기 아래 50년을 산 영향이죠. 그 과정에서 기록이 공백상태라는 것, 앞으로 이들의 이 기억을 어떻게 후대에 전승할 것인가 하는 문제가 남죠. 구로동맹파업 같은 경우도 학출이나 명망가의 기록과 조합원의 기억이 차이가 나요. 우린 사실 그때 그런 거창한 노동해방, 그런 거 아니었다. 학출은 혁명을 하려고 했고 우리는 노동조건 개선, 그리고 동지에 대한 의리였다. 이런 것들이죠. 그 역사적 평가를 어떻게 할 것인가와 무관하게 진실은 무엇이었는가, 한 사건에서 그 사람들은 무엇을 느꼈고 무엇을 기억하고 지금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가 하는 게 중요하고 그게 르포의 한 역할이라는 거죠. 용산 관련 책이 나왔지만 1971년 광주 대단지 사건이란 게 있었어요. 사북은 그래도 조끔 기록이 되었지만 이건 거의 기록되지 못했죠. 박정희 정권은 부랑자들, 도시빈민을 싹 모아서 성남에 뿌려놓고 알아서 살아라, 한 10만명이 모이면 어쨌든 살아가게 마련이다 이랬거든요. 그러다 폭동이 일어난 거죠. 민청학련 사건 같은 지식인의 피해는 잘 기록되고 기억되지만 이런 빈민들의 폭동은 폭동으로 기록되고 평가받기도 힘들죠. 한국전쟁 당시 가장 많이 학살당한 사람들이 한센인, 문둥병 환자들이었고.

이들의 목소리를 어떻게 기록할 것인가. 만나서 이야기하다보면 언어 자체가 달라서 힘들어요. 결국은 그게 본질적으로 불가능하다는 사람도 있고 그런 의미에서 자기 역사쓰기 활동도 있는 거 같아요. 그것이 궁극적으로는 지향해야 할 목표인 것 같기도 하지만 모든 사람이 자기 역사를 쓸 수 있는 세상이 올까, 뭐 이건 역사의 종언이나 문학의 종언 같기도 하고, 또 앞에서 이야기했듯이 글쓰기란 것이 예술성을 요구하는 부분이 있으니까 어쨌든 르포는 그런 종언이 오기 전까지는 역할이 있지 않을까 해요.

르포는 결국 사람을 만나는 것-인터뷰


사람들은 기자를 왜 만날까요? 대부분은 기자를 만나기를 꺼려하죠. 기자회견을 하는 사람들, 집회에 나온 사람들은 적극적으로 자기주장을 할 게 있으니까 잘 만나고 이야기를 잘 해요. 특히 배운 사람들, 지위가 있는 사람들일수록 자기 생각(주장)을 조리 있게 이야기할 수 있죠. 그런데 그 사람들에게도 개인적인 것, 정말 궁금한 걸 물어보면 당황해요. 그런 이야기를 해본 경험이 별로 없었거나 자기들이 이야기하려고 하는 것은 그런 것이 아니기 때문이기도 하죠.

대추리 경험을 이야기하자면 처음에 들어가면 기자라고 하면 주민들이 막 붙잡고 이야기를 해요. 너무 억울하니까. 좀 지나서 들어가면 다들 이야기를 안 해요. 해봤자 싶으니까. 그런데 유력언론사도 아니고 기자도 아니면서 그들에게 가서 이야기를 시키려면 이게 뭔가 의미 있는 일이라는 것을 설득할 수 있어야 하죠. 대부분 설득에 실패해요. 그런데 꾸준히 계속 가면 제가 미안하고 안쓰러워서, 정들어서 이야기를 해주는 거죠.

그래서 무엇보다 신뢰가 중요하다는 거죠. 김진숙 씨 경우 조선소 용접공이다, 그러면 그때부터 신뢰가 팍 되고 술술 풀리게 되는 거죠. 박영희 시인 같은 경우 직업만 수 십가지를 했어요. 신문배달, 용접, 광부부터 안 해본 일이 없으니까 공사판 가든 어디 가든 쉽게 말을 붙일 수 있죠. 근데 그리기가 쉽지 않으니까. 진심과 정성을 가지고 다가가는 수밖에 없어요. 일찍 가고 늦게 오고, 일 끝나도 죽치고 있고.

그런데 그러면서 이야기를 듣다보면 묘하게 이야기의 과정 자체가 치유의 효과가 있어요. 한 세네시간 자기 이야기, 한번도 남에게 해본 적 없는, 자기 스스로도 잊어먹고 있었던 기억들을 들춰내서 이야기를 하다보면 속이 후련해지고 이게 어떻게 글로 써지든 됐다 뭐 이런 이야기를 하는 분들도 있죠. 대개 그런 경우 인터뷰 글도 좋다고들 그래요. 한편 정치적으로 다른 견해를 가진 분도 진정성이 통하면 이야기를 해주기도 해요. 다가서는데 시간이 더 오래 걸리기도 하지만.

어쨌든 인터뷰는 신뢰의 작업이기 때문에 어떤 기술적의로 목적의식을 갖고 다가갈 경우 자신도 경직되고 자신이 경직된 채 다가가면 상대방은 더 경직되고 그렇죠.

또 한 가지는 성차별적인 발언일 수 있는데 대개 남성들의 경우 자기주장을 앞세우죠. 서사와 느낌을 이야기하지를 않아요. 자기는 이렇게 생각한다, 이게 문제였고 자기는 이래서 옳다. 뭐 이런 이야기가 중요한 게 아니라 그때 당신은 무엇을 했고 왜 무슨 생각을 가지고 그랬는지, 그 일을 당했을 때는 어떤 느낌이었는지 그런 게 중요한데 그런 걸 이야기하는 데 남성이 더 서툰 것 같아요. 물론 여성도 그렇죠. 이런 이야기를 이끌어내기 위해서는 질문을 잘 할 필요가 있어요. 이야기를 쭉 듣다가 그럴 때는 이랬을 거 같은데 어떠셨어요? 그래야 하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경험이 많던가 아니면 상상력이 풍부해야 하죠. 타인의 고통을 이해하고 감지하는 상상력이 필요한 거 같아요. 그런 걸 키워주는 훈련 프로그램이 있으면 참 좋겠다는 생각도 하죠.

한 가지 기억이라는 것, 이야기, 기억이라는 게 재구성되고 편집되는 거죠. 대부분 자기에게 유리하게 기억이 편집되니까 인권피해자 상담에서 애로가 많을 거예요. 변호사들 같은 경우는 그래서 공격적인 인터뷰를 많이 하죠. 상대방이 공격할 내용을 미리 보완해야 하니까. 그런데 자칫 공격적으로 하다보면 상대방이 위축되고 그렇잖아요. 우리는 변호사가 아니니까.

그런 문제와 함께 자신의 언어가 없다보니까 자신의 기억과 느낌도 지배언어로 기억하게 되고 이야기하게 되는 경우가 많아요. 지배언어로 기억된다는 것은 지배자의 사고방식을 따른다는 말이기도 해요. 자신이 넝마주의였다는 것, 부랑자였다는 것을 범죄자와 동일시 하고 차별이나 침해를 받아도 당연한 것처럼 생각하고. 그게 언어가 가진 힘이랄까, 좀 무섭죠. 물론 왜곡된 기억 자체가 중요할 수도 있죠. 80년대 용비어천가를 썼던 조선일보가 중요한 기록물인 것처럼. 하지만 언어의 문제에 있어서는 그들의 언어를 어떻게 배운 사람인 내가 그대로 옮길 수 있을 것인가 하는 문제는 여전히 남죠.

이것은 인터뷰 전체로도 그래요. 한 인간을 길어야 세 네시간, 아니면 이삼일동안 만나서 그를 온전히 드러낼 수는 없는 노릇이죠. 그래서 결국 편집하고 선택과 집중이 있을 수밖에 없는데 카메라로 찍어서 보여줄 수 없으니까, 여기서도 왜곡이 필연적으로 발생하게 되죠. 중요한 것은 왜곡을 최대한 줄이는 일, 그리고 정직하게 쓰는 일이 아닐까 해요. 

평가를 내리지 않을 수 없지만 그 평가가 최대한 정직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인터뷰 당시에 싸우지 않고 돌아와서 평가하는 일은 없어야 해요. 주관적 평가도 위험하고. 펜은 칼보다 강하다고 하는데 그런 거 같지는 않아요. 펜은 칼 앞에서 대단히 약한 존재죠. 저는 오히려 펜은 칼보다 야비하다고 생각해요. 충분히 그럴 여지가 많죠. 그래서 펜대를 굴리는 사람은 대단히 조심해야 한다. 세치 혀가 사람을 죽이고 살릴 수 있듯이 말이죠. 

인권활동가와 르포문학

여기 있는 분들이 인권활동을 하는 분들이니까, 인권활동과 르포쓰기가 무슨 관련이 있을까 생각해봤어요. 물론 앞에서 이야기한 하위주체들이 대부분 인권침해를 많이 겪는 분들이고 국민에서 배제된 사람들, 시민권 없는 사람들이다보니 아주 밀접한 관련이 있겠죠.

또 한 가지는 글을 쓴다는 것이 자기 언어, 자기 문체, 자기 스타일로 이야기한다는 것이고 그렇다면 그건 남들과, 지배자, 주류와 다르게 보고 다르게 말하기라는 생각을 해봐요.

저는 운동사회 주류의 언어와도 다른 비주류의 목소리가 필요하다고 생각하고 그런 의미에서 활동가들의 글쓰기가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식상한 비판, 구태의연한 주장으로 비춰지거나, 교조적으로 빠지거나 관념적이지 않으려면 말이죠.

다르게 보고 다르게 말하기 위해서는 필연적으로 자기 머리로 생각해야지 다른 사람의 생각에 나도 그래, 이게 사실 가장 편하게 사는 방법이기도 한데, 그러면 자기 글을 쓸 수는 없거든요.

또 하나는 다큐 찍는 사람이 있는데 어렵게 올해 프랑스유학을 갈 수 있게 됐어요. 근데 취소를 한 거예요. 작년에. 왜 그런가 하면 올해 한국이 너무 중요한 다큐의 현장이 될 거 같다고. 저는 반신반의 했지만 벌써 곧 5월인데 두고 봐야죠. 그게 촛불 이후 술자리였으니까.

제 직장상사인 박OO씨가 지금 용산은 계급전쟁이다라는 표현을 썼는데 저도 동감하고 작년 촛불과 PD수첩, 미네르바, 전교조 등등 내전 상황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했었어요. 그렇다면 작년 촛불은 엠비정부에게 선제공격을 한 거죠. 근데 이게 한국전쟁 때처럼 자체 역략이나 과학적인 정세 판단 없이 38선을 넘어버린 것이어서 일단 낙동강까지 밀어붙였다가 최근은 압록강까지 밀리는 거 아닌가. 그러면 중공군이 있어야 다시 휴전선 근처로 갈 텐데. 우리의 중공군이 누가 있나 싶으면 없구나. 그래서 지는 싸움 아닌가. 저쪽은 조중동도 있고 북한 미사일, 일본 뭐 다 있는데.

그런데 이게 지는 싸움이든 이기는 싸움이든 물고기들은 그 와중에 대량 학살당하거나 수난을 당하겠죠. 그것을 기록하는 것, 물고기들의 수난이야말로 땅따먹기 같은 역사가 아니라 진정한 역사의 기록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런 점에서 활동가들의 기록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댓글(4)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2009-04-29 10:59   URL
비밀 댓글입니다.

나무처럼 2009-04-29 13:27   좋아요 0 | URL
어이쿠 고맙습니다. 제 게으름을 뉘우치게 하시는군요... 요즘 죄와벌을 다시 한번 읽어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과연 누가 누구를 용서하고 화해할 수 있는가.. 뭐 이런...

Arch 2009-04-30 02:07   좋아요 0 | URL
고마우시다면서, 어이쿠! 의태어는 뭐랍니까 ^^
서재의 서재 이미지 참 좋다. 어어. 오른쪽에 있는 더블 A, 반가워.

ㄴㅇㄴㅇㄴㅇ 2010-09-11 01: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근데 이게 한국전쟁 때처럼 자체 역략이나 과학적인 정세 판단 없이 38선을 넘어버린 것이어서 일단 낙동강까지 밀어붙였다가 최근은 압록강까지 밀리는 거 아닌가. 그러면 중공군이 있어야 다시 휴전선 근처로 갈 텐데. 우리의 중공군이 누가 있나 싶으면 없구나."

별 비유하려는 지는 알겠지만...거의 적의 먹잇감이 될 이런 비유를 고심해서 쓰다니?
정신 없나?
그렇게 당하고도 모르나?
 

"법무부 출입국관리법 개정안 규제영향 분석서에 따르면 언제 어디서건 외국인을 불러 세워 단속을 강화하면 590억, 국제결혼을 잘 통제하고 감시하면 640억, 잠재적 범죄자인 한국에 들어오는 모든 외국인의 지문정보를 모으면 2,031억, 더불어 잠재적 범죄자카드인 외국인등록증에 지문을 추가하면 410억. ‘억, 억, 억’ 이 수치 앞에서 어느 국민이 법 개정 반대 목소리를 높일 수 있을 것인가."

인권운동사랑방에서 나오는 <인권오름>이란 웹진에 실린 글이다. 
분명 한국경제의 한 축을 담당하고 있을 그들.  
싼 값에 어렵고 힘들고 더러운 일을 시키며 욕지기와 함께 부려먹던 이주노동자를
경제가 힘들어지자 일순위로 내몰고 있다.
위의 글은 결국 그들을 내몰며 법무부가, 이 나라 정부가 한다는 말이다.   
인간에 대한 예의는 고사하고
최소한의 염치도 없고 일말의 양심도 없다.   
그래서 나는 이 나라 국민인 것이 너무 자주 부끄럽고 죄스럽고 한편 짜증나고 그렇다.

  --------------------------

[이상재의 인권이야기] 억울한 두 남자 이야기

이주여성 폭력 단속의 진실


이상재 | 한국이주노동자인권센터 활동가
 

4월 8일이었다. 누군가의 생일로, 혹은 살랑거리는 봄바람을 핑계로 첫 데이트를 했던 아득한 봄밤으로 기억될 아주 평범한 하루였다. 그들에게도 그랬다. 오후 3시 30분 전까지. 아니다. 그들이 대전의 한 분식집에서 격한 만남을 가졌다는 사실이 동영상을 통해 전국에 알려지기 전까지 최소한 두 명의 남자에게는 실적 하나 더 올린 일상일 뿐이었다.

32,591건 중 하나일 뿐이었다

남자들이 신고를 받고 출동한 곳은 분식집이었다. 단속대상이 식당이고, 여성들이라 특별히 저항을 걱정할 필요는 없었다. 수갑하나면 족했다. 손님으로 가장해 들어가 눈에 보이면 잡아 나오면 그만일 터였다. 특별히 거쳐야할 절차는 없다. ‘불법체류자 단속’이라는 말 한마디면 끝이다. 그날도 그랬다. 손님이 한가한 시간을 택해 들어갔다. 잡아 나오는데, 한명이 유난을 떨었다. 살려달라고 큰소리를 냈다. 우리가 무슨 저승사자란 말인가? 짜증이 밀려왔다. 바닥에 패대기를 쳐도 소용이 없다. 옷이 벗겨져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독종이다. 봉고차에 태워 수갑을 채우고 악을 못 쓰게 목울대를 몇 대 때리니까 조용해 졌다. 남자들은 실적이 담긴 봉고차에 기대 평소처럼 커피를 마셨다. 일을 마치고 마시는 커피는 늘 꿀맛이다. 오늘 밥값은 했다. 화창한 봄날의 일상이었다.

다음날 남자들은 황당했다. ‘이런 야만이 어디 있느냐? 백주 대낮 대한민국에서 할 짓인가?’라며 언론이 호들갑을 떨었다. 무슨 일인가 싶었다. 동영상에는 남자들의 지난 오후의 일상이 담겨 있었다. 평범했다. 어제 오후는 아주 평범한 일상 업무였다. 동영상을 다시 봐도 특별할 게 없었다. 대규모 단속에 비하면 액션 장면 하나 없는 재미없는 동영상이었다. 몰래카메라였나. 억울했다. 재수 옴 붙은 거다. 2008년 단속 추방된 미등록이주노동자 수인 32,591분의 1로 일어날 일이 남자들에게 생긴 거였다. ‘왜 때리세요?’란 여성의 애절한 목소리가 보는 이들의 가슴을 아프게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식당 안에서 더 기를 꺾어 버렸어야 했었다. 여성이라고 봐준 걸 남자들은 후회했다. 동료들이 금방 잊혀 질 거라며 걱정하지 말라고 했다. 하지만 여론에 못 이겨 감찰이니 고소니 운운하는 조직에는 화가 났다. 2009년에는 15만 명으로 줄이자며 남자들의 등을 떠민 게 그들이었다. (2008년 목표는 불법체류 20만이었지만 이미 경기침체로 인한 자진출국과 강력한 단속추방으로 목표를 초과달성했다고 한다.)


위 사진:이주여성을 폭력단속한 출입국관리소에서 규탄하는 기자회견 모습(사진출처: 이주인권연대)

국익으로 환산되는 이주자들의 인권

동영상 사건이 있기 전까지 남자들은 국가주권 수호자라는 자부심이 있었다. 국경에서 총을 들고 있지는 않지만, 그 못지않게 국경을 해치는 주범을 잡는 일 또한 중요했다. 그것은 다름 아닌 국익을 위한 일이었다. 국익을 지키는 일에 그 정도 마찰은 감수해야 했다. 국가 경제를 위해 국민의 목숨도 불길에 가두는 게 우리 현실 아닌가. 그런데 그깟 불법체류자를 밀고 목울대 한번 쳤다고 그 난리를 피운단 말인가. 인터넷을 뒤지면 지난해 그리고 올해 남자들보다 더 뛰어난 액션 배우들을 얼마든지 찾을 수 있을 거였다. 정말이지 억울했다. 한해 남자들이 땀 흘려 일한 결과로 얻은 국익을 국민들이 제대로 안다면 언론들이 그렇게 호들갑을 떨지는 않을 거였다. 왜 홍보를 제대로 하지 않는지 모르겠다. 방송이나 신문도 이제는 국익을 거의 이해하고 있는데 말이다.

수천억 원이 넘었다. 남자들도 자신의 일이 그만큼 큰 국익을 만들고 있는지 몰랐다. 자신들의 행위가 어떻게 돈으로 환산되는지 납득하기 쉽지 않았지만, 남자들은 그 수치가 마음에 들었다. 국가주권이나 법치란 말보다는 돈이 더 확실하게 국민들 가슴에 파고들 거였다. 법무부 출입국관리법 개정안 규제영향 분석서에 따르면 언제 어디서건 외국인을 불러 세워 단속을 강화하면 590억, 국제결혼을 잘 통제하고 감시하면 640억, 잠재적 범죄자인 한국에 들어오는 모든 외국인의 지문정보를 모으면 2,031억, 더불어 잠재적 범죄자카드인 외국인등록증에 지문을 추가하면 410억. ‘억, 억, 억’ 이 수치 앞에서 어느 국민이 법 개정 반대 목소리를 높일 수 있을 것인가. 새삼스러울 것도 없었다. 법이 없어도 언제 어느 곳에서건 남자들은 단속을 해왔다. 그리고 지문은 대한민국 성인이면 누구나 감수하는 일이었다. 이건 외국인만 최저임금을 깎겠다는 것보다는 훨씬 더 세련되고 국익을 위하는 일이고, 법이라고 두 남자는 생각했다. 그래서 두 남자는 더 억울했다. ‘억, 억’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격월간으로 나오는 잡지를 만드는 일을 하는 내 명함에는 '편집기자'라는 직책이 적혀있다. 무관의 제왕이라는 기자, 펜은 칼보다 강하다는 신념을 갖고 성역 없이 정론보도에 임하는 기자, 절대권력에 맞서 휘어지지 않았던 기자는 분명 7, 80년대 명예로운 직종이었다.그 과정에서 동아일보 사태가 있었고 한겨레가 탄생했고 또 생각해보니 시사in이 생겨났다. 그럼에도 나는 요즘 이 '기자'라는 말을 명함에서 떼어낼까 심각하게 고민 중이다. 

사실 내가 하는 일은, 물론 르포도 쓰고 인터뷰도 하지만, 대개는 기획하고 원고청탁하고 원고독촉하고 교정보고 편집하고 교정보고 출력하고 교정보고 책나오면 발송하는 일이 80%를 차지하니 기자라 하기에는 좀 그렇다.  

최근 "기자는 도대체 어떤 사람인가? 그들은 누구인가?" 하는 물음을 갖게 되는 일이 자주 생긴다. 우선 강희락 경찰청장의 성접대 발언에 대해 침묵의 카르텔을 형성했던 출입기자들. 그들 자신이 지금도 경찰에게서 성접대를 받고 있기에 모두 함께 침묵하기로 했으리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다만 현직 경찰청장이 과거에 기자들에게 성접대를 했다는 문제보다, 그 왕년의 전력을 아무렇지도 않게, 자랑스레 떠벌렸다는 경찰청장의 뇌구조보다 더 심각한 것은 바로 이 말을 들은 기자들의 침묵이다. 아, 우리는 얼마나 많은 기자들의 침묵 속에서 은폐된 진실을 모르고 지내는 것일까. 분명 기자는 이런 면에서 무관의 제왕답다.  

다음 한 가지는 요즘 기자들 반, 주민 반이라는 봉화마을에서 온 소식. 주로 사진기자들이 대거 노무현 전 대통령의 일거수일투족을 촬영하기 위해 파견된 모양이다. 당사자도 얼마전에 글을 올렸다지만, 과연 노무현 전 대통령이 현 시국에서 뜰에 나와서 어떤 각도로, 어떤 표정으로, 무엇을 얼마나 지켜보고 있는지 누가 궁금해 할까. 이건 마치 연예가 중계도 아니고 말이다. 또 한편 자발적으로든 데스크의 지시에 의해서든 지금도 봉화마을 뒷 산에 올라 망원렌즈를 드려다보고 있는 기자의 심정은 어떨까.  

달리는 포장마차에서 한 잔 하며 쓰다보니 글이 끝도 없다. 기자는 무엇으로 사는지 정말 궁금하기도 하고, 밑에 달린 <미디어오늘>의 기고글에 달린 리플들을 보며 독자는 기자를 어떤 사람으로 여기는지, 뉴스는 무엇이고 언론의 역할은 무엇이라 생각하는지 또 궁금하기도 하지만, 내 명함에서 '기자'라는 말은 꼭 빼리라는 취중 결심을 밝히는 것으로 오늘은 마무리하며 2탄을 기약해야겠다.  

그런데 펜은 칼보다 강하다고? 칼보다 펜이 더 야비한 것은 아닐까? 


댓글(1)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묵향이 2009-06-16 02: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정말 기자들이 너무하네요.

올바른 언론을 전달하는게 기자의 역할인데,

강한자에게 묵인하고,만만하다 싶으면 하이에나 같이 덤벼들고...

나무처럼님 같은 생각을 하시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요?

좀 씁쓸한 현실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