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기해라 나는 멎지도 않고 숨을 쉰다
내가 곤히 잠잘 때에도
배를 들썩이며
숨은, 쉬지 않고 숨을 쉰다
숨구멍이 많은 잎사귀들과 늙은 지구덩어리와  
움직이는 은하수의 모든 별들과 함께 


숨은, 쉬지 않고 숨을 쉰다 대낮이면 
황소와 태양과
날아오르는 날개들과 물방울들과 장수하늘소와 함께
뭉게구름과 낮달과 함께
나는 숨을 쉰다 인간의 숨소리가
작아지는 날들 속에
자라나는 쇠의 소리
관청의 스피커 소리가 점점 커지는 날들 속에


답답해라 나는 숨을 쉰다
튼튼한 기관지도 없다 폐활량도 크지 않고
가슴을 열어
갈아 끼울 싱싱한 허파도 없다
산소를 실컷 마시지 못해
허공에서 입이 커다랗게 벌어지는 물고기처럼
징역에 지친 늙은 죄수처럼
때때로 헐떡이고
연거푸 음침한 기침을 하면서
숨은, 쉬지 않고 숨을 쉰다


그리고 움직이는 은하수의 모든 별들과 함께
죽어서도 나는 숨쉴 것이다 


- '나는 숨을 쉰다' 전문, 최승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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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무총리실의 사찰을 받았던 김종익 씨가 국가인권위를 찾아가지 않고 MBC <PD수첩>을 찾아간 까닭은 무엇인가? 


바로 어제 MB정부 아래 현병철 인권위원장 취임 이후 1년 동안의 국가인권위원회 활동을 평가하는 토론회가 열렸다. (관련기사 프레시안, "현병철 인권위 1년, 산으로 가고 있다") 그 자리에 참석한 인권활동가들은 국가인권위가 정작 두려워 해야 할 것, 그리고 인권활동가가 두려운 것은 이명박 정부가 벌인 국가인권위의 대대적인 조직축소도, 무자격(부적격이 아니라 무자격이다. 스스로 인권에 대해 잘 모르겠다고 밝힌 위원장과 앞으로 들어가서 공부하겠다는 인권위원들)에 정치권 눈치만 보는 소신없는 행보도 아닌, 국가인권위 무용론이라고 지적했다.  


국가인권위가 나한테 해준게 뭔데? 그 딴 거 있으나 없으나 똑 같지 않나? 이런 질문은 사실 없는 이야기도 아니다. 인권이라고만 하면 곧장 좌파니 빨갱이니 하며 거품을 무는 꼴보수 양반들만이 아니다. 그 대표적인 예가 바로 김종익 씨의 사례라 할 수 있다.  


비아냥일 수도 있지만 냉정하게 이 사회에서 국가인권위의 역할을 <PD수첩>이 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자문을 국가인권위가 진지하게 해야 할 시점이다. 하지만 거대권력과 맞짱뜨고 있는 <PD수첩>을 국가인권위가 도와주고 지켜주기는커녕 모르쇠로 일관하며 묵인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그 와중에 바로 오늘 그 무자격 논란의 주인공 현병철 위원장의 기자 간담회가 있었다고 한다. (관련기사 프레시안, 현병철 "생활밀착형 인권에 집중"…민감 사안 외면 계속?


현 위원장은 생황밀착형 인권에 전념하겠다고, 자유권보다 사회권에 집중하겠다고 포부를 밝히셨다. 좋은 말이다. 생활밀착형이 여의도에서도 유행이더니 국가인권위까지도 왔다. 그런데 생활에 밀착해서 뭘 어쩌겠다는 건가. 한나라당도 민주당도 진보정당도 다 생활정치를 말하지만 인민의 생활을 구체적으로 어떻게 하겠다는 것인지에 대한 철학이 부재하다면 그건 그저 정치적 수사에 불과하다.  


지금 시대, 바로 오늘 현실에서 인권이란 과연 무엇이며 어떤 인권이 중요한지에 대한 말 없이 그저 생활밀착형 운운하는 것은 국가권력을 감시하고 견제하며 인권을 옹호한다는 국가인권위의 존재이유를 망각하고 있거나 애초에 그런 게 국가인권위의 임무와 역할이라는 것을 몰랐다는 말밖에 안 된다.


흔히 인권을 자유권과 사회권으로 나눈다. 정치, 사상의 자유, 집회 결사의 자유, 표현의 자유 같은 게 자유권으로 불리고 교육, 주거, 의료, 노동, 복지 같은 게 사회권으로 불린다. 편의상 그렇게 나눈다고 한다. 하지만 인권논의에서 자유권과 사회권을 나눌 수 없다는 것, 둘 다 밀접히 관련되어 있다는 것은 이미 상식에 속한다.  


한 달에 6, 70만원을 벌어 사는 사람이 시청 앞에서 촛불을 들 수 있나, 몸이 아파도 병원에 갈 수 없는 사람, 당장 먹고 살 것이 없고 집이 없는 사람이 어떻게 표현의 자유를 구가할 수 있나. 사회권이 보장되지 않는 상황에서 자유권은 그저 가진 자의 사치품이 되기 쉽다. 마찬가지로 자유권을 억압하면 사회권을 보장해달라는 요구는 억압되고 차단된다. 노숙인은 서울역에서 쫓겨나고 도시빈민들은 집회 시위는커녕 철거용역과 개발업체의 먹잇감이 되고는 만다.  


당장에 장애인의 노동권, 최소한의 사회생활을 보장하라는 광화문 광장에서의 1인 시위도 막아나서는데 이건 도대체 사회권의 문제인가, 자유권의 문제인가?  우리에게는 <PD수첩>도 필요하지만 제대로 된 국가인권위원회도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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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7-15 18:4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7-15 21:36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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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에 대해서는 참 할 말이 많다. 누구는 그런다. "돈 우습게 보지 마라, 돈 100만원 때문에 사람도 죽이는 세상이다." 맞는 말이다. 이 세상을 살며 어떻게 돈을 우습게 볼 수 있나. 오히려 살 수록 참 무서운 게 돈이다. 그리고 다들 잘 아는 것 같지만 한편 다들 잘 모르는 게 돈인 것 같다. <녹색평론>은 지난호에 이어 이번호에서도 돈과 은행에 대해 다루고 있다.  

   
  우리가 보통 돈이라고 생각하는 금속화폐나 지폐는 실제로 조폐창이라고 하는 연방정부기관에 의해 생산된다. 그러나 대부분의 돈은 조폐창에서 만들어지지 않는다. 그것은 은행이라고 하는 사기업에 의해 매일 막대한 규모로 만들어지고 있다.

우리들 대부분은 예금자가 맡긴 돈을 은행이 대출해준다고 믿는다. 하지만 사실이 아니다. 실은, 은행은 자신이 번 돈이나 예금을 빌려주는 게 아니라, 돈을 빌리는 사람의 상환 서약을 근거로 한 대출을 통해서 돈을 만들어낸다. 대출서류에 표시된 차금인(借金人)의 서명은 대출 원금에 이자를 덧붙인 금액을 나중에 은행에 갚거나, 아니면 집이나 자동차 혹은 담보물로 잡힌 자산을 내놓겠다는 서약이다. 이것은 돈을 빌리는 사람으로서 하지 않을 수 없는 매우 부담스러운 약속이다. 그런데 이 서명이 은행에 요구하는 것은 무엇인가? 은행은 차금인의 계좌에 금액을 써놓는 행위만으로 마술처럼 그 액수의 돈을 생산한다. 터무니없는 일처럼 들리는가? 하지만 이건 사실이다. (중략) 

은행은 자신이 갖고 있지도 않은 돈을 빌려준다는 사실이 기묘하게 생각된다면, 이것은 어떠한가. 최근 몇십년 동안 은행들의 집요한 로비활동의 결과로 각국의 중앙은행에 예치금을 두어야 한다는 규칙은 몇몇 나라에서 거의 사라져버렸고, 실제 준비율은 9:1보다 훨씬더 높아졌다. 계좌 유형에 따라 20:1 혹은 30:1이 흔한 경우가 되었다. 그리고 최근에는, 대출수수료를 이용함으로써 은행들은 이제 준비율이라는 제약을 완전히 우회하는 길을 발견하였다.   
- '돈은 어떻게 만들어지는가'<녹색평론> 113호 2010.7.8 
 


내 경우에는 얼마 전에 은행에 적금했던 돈을 담보로 대출을 받은 일이 있다. 연 이자 7%. 속이 쓰리다. 그래도 제1금융권에서 돈을 빌릴 수 있다는 것만으로 감지덕지해야 하나? 은행 영업시간이 지난 뒤에 돈을 인출했다는 이유만으로 수수료를 내는 것도 참 아깝다. 어떤 은행은 1억원 이상인 계좌를 갖고 있으면 인출은 물론 이체 등 모든 수수료가 면제라고 하니 배알이 꼴리기도 한다.  
 

   
 

한때, 돈을 빌려주고 이자를 받는 행위를 이자놀이(usury)라고 하였고, 그것은 엄한 처벌 ― 심지어 사형 ― 을 받았다. 모든 주요 종교는 이자놀이를 금지하였다. 이자놀이를 반대하는 대부분의 논리는 도덕적인 것이었다. 돈의 유일한 정당한 목적은 실제의 재화와 서비스의 교환을 원활하게 한다는 것이었다. 단순히 소유하고 있는 돈으로 돈을 증식한다는 것은 어떤 형태이든 기생적인 행위 혹은 도둑질로 간주되었다. 

(하지만 지금 시대에 와서는) 우리가 민주주의와 자유라고 믿어온 것은, 실제로는, 교묘한 그리고 보이지 않는 형태의 경제적 독재체제이다. 우리의 사회 전체가 통화공급 때문에 은행에 전적으로 의존해있는 한, 은행가들은 누가 돈을 가지거나, 가지지 말아야 할 것을 정하는 결정권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  - 위의 글에서

 
   

이 쯤에서 '서브프라임 사태'가 떠오른다. 요즘은 '더블 딥'이란 말도 많이 나온다. 한국은 부동산 거품이 없어지면서 일본과 같은, 혹은 그 이상의 장기침체를 경고하는 목소리도 높다.

아래는  얼마전 <르몽드디플로마크> 한국어 판에서 봤던 글이다.   

   
  1996년 봄, 첫 임기를 간신히 마친 빌 클린턴 대통령은 재선 유세를 준비하고 있었다. 돈이 필요했다. 그는 좋은 아이디어를 하나 생각해냈다. 미국 대통령과 백악관에서 커피를 한잔할 기회를 주겠다는 것이었다. 그렇게 해서 민주당의 잠재적 후원자들은 무리지어 백악관을 방문해 기업 활동 규제를 담당하는 미 행정부 관리를 만날 수 있었다. 당시 클린턴의 대변인이던 래니 데이비스는 이 만남에 대해 “기업 활동 규제를 담당하는 직원이 해당 산업의 문제점을 파악할 수 있는 좋은 기회”라고 그럴싸하게 해명했다.(2) 그 뒤 전세계 경제가 수조 달러에 이르는 비용을 치르고, 국가 부채가 급격하게 증가하고, 노동자 수천만 명이 일자리를 잃게 된 것은 이 ‘커피 타임’과 무관하지 않다.  

1996년 5월 13일, 미국의 주요 은행 대표들이 백악관에 초대돼 1시간30분간 미 행정부 주요 관리들을 면담했다. 이 자리에는 클린턴 대통령을 비롯해 로버트 루빈 재무부 장관, 통화정책 담당 존 호크, 은행규제 담당 유진 루드위그가 참석했다. 민주당 자금 담당 마빈 로즌이 그 자리에 있었다는 사실은 우연이라고 하기엔 참으로 의미심장하다. 유진 루드위그의 대변인에 따르면, “그 자리에서 은행가들은 향후 입법 사안에 대해 토론했다. 그중에는 은행과 기타 금융기관을 분리하는 장벽을 제거할 수 있는 방안이 포함됐다”. - '은행가에 의한, 은행가를 위한, 은행가의 정부' <르몽드 디플로마크> 6월호 

 
   

  
청와대는 7월 8일 청와대 기획관리비서관이 은행장들과 대기업 총수들을 만난 게 무슨 잘못이냐고 반문했다는 기사를 찾아볼 수 있다. (뷰스앤뉴스) 참여정부의 경제정책을 삼성경제연구소가 만들었다는 사실에서처럼 한국은 이 부문에서 미국보다 훨씬 선진(?)적이다.  

위의 기사는 모든 사람은 투표권 한 장을 가질 수 있지만 정치자금은 부자들만이 낼 수 있기 때문에 금융자본에 눈치보는 정치권, 금융자본에 종속되는 정치를 거스리기는 힘들다고 진단하고 있다. 문제는 서브프라임 사태에서 보듯 그 폐해를 고스란히 서민들이 보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어떻게 하자는 것인가? 
 

   
  이제, 우리는 돈이란 단지 하나의 아이디어라는 것을 알았고, 우리가 만들어내는 무엇이든 돈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알았다. 여기에 매우 단순한 대안적 화폐개념이 있다. 이 모델은 과거에 영국과 미국에서 실제로 잘 기능하고 있었지만, 금세공사―은행가들과 부분준비제도 때문에 파괴된 시스템에 토대를 둔 것이다.

항구적이고, 이자 없는 돈에 기초한 경제를 실현하기 위해서 돈은 정부에 의해 만들어지고 사용되어야 한다. 바람직스럽기는, 그 돈은 도로, 철도, 교량, 항만, 공설시장 등 경제를 원활하게 돌아가게 하는 내구성을 가진 하부구조에 사용되어야 한다. 그 돈은 부채로서 만들어지지는 않을 것이다. 그것은 돈의 사용처 ― 그게 무엇이든 ― 그 자체가 가진 가치로서 창조될 것이다.
- '돈은 어떻게 만들어지는가'<녹색평론> 113호 2010.7.8  
 
   


<녹색평론>은 대안화폐, 사회신용론을 제시하는 것 같다. 거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요즘 많이 회자되고 있는 '기본소득 운동'을 제안하는 사람들도 많다. 무엇이 되었든, 우리 삶과 생활에 기초한 새로운 대안 모색이 시급하다.   

   
 

화폐는 새로운 형태의 노예제이다. 화폐가 오래된 노예제와 다른 점은 그것이 비인격적이라는 사실, 즉 주인과 노예 사이에 아무런 인간적 관계가 없다는 사실에 있을 뿐이다. ― 톨스토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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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대교 추락사고 사상자 명단... 이름 옆에 숫자는 나이를 말한다. 64, 68도 있지만 18, 12. 4라는 숫자도 보인다.

누구는 앞선 사고차량이 삼각대만 세웠더라라면 하고 누구는 버스 운전기사가 전방 주의 의무만 잘 지켰더라도 란다.

난 인천대교만 떠올리면 소름이 돋는다. 그곳에서 몇 해 전인가 몇 십중 추돌사고가 난 적이 있다. 그 사고 전후 태안을 내려갈 일이 있어 서해안고속도로를 탔다. 오전 9시쯤이었는데 정말 몇 미터 앞도 안 보이는 짙은 안개에 시속 30킬로미터로 비상등에 상향등까지 켜고 운전을 했다.

내가 아무리 천천히 주의해서 가고 있다지만 어떤 차가 뒤에서 시속 백킬로로 달려오다 나를 받을 지도 모른다는 공포감에 인천대교를 건너는 동안 손에서 진땀이 흘렀다.

이번 사고에서 관련 차량 운전수를 모두 형사처벌한다고 한다. 물론 그들도 잘못을 저질렀다. 하지만 과연 그들만의 잘못인가. 나는 왠지 이 사건이 인간의 오만이 부른 재앙이란 생각이 든다.

도대체 바다 한 가운데 그런 다리를 짓자는 생각은 누가 생각해낸 걸까. 4대강도 마찬가지다. 4대강이 개발되면 거리로 구경다니는 사람도 있을 것이고 그것을 통해 먹고사는 사람도 생길 것이다.  아무리 무섭고 그래도 인천대교를 이용하듯이 말이다. 그런데 정말 그래도 되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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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액 무료로 상영되는 '인권영화제'에서 3천원짜리 팜플렛을 사라고 하니 (한 손에 5천원짜리 테이크 아웃 커피를 든 사람들이) "너무 비싸요!" 하더란 이야기를 들은 적 있다. 
 
어제 우연히 <사회평론>이란 잡지를 봤다.  이제는 안 나오는 걸로 알고 있는데 (혹시 지금도 나오고 있는지 모르겠다) 김용철 변호사의 <삼성을 생각한다>를 낸 출판사와 같은 곳일 거다. 나중에 아마도 <길>이란 좌파 잡지와 합쳐서 <사회평론 길>이 되었고 <말>지와 쌍벽을 이루던 진보적인 잡지였던 걸로 기억한다.

어제 본 것은 1991년 잡지였는데 눈길을 끈 것은 지금 청와대에 들어가있는 박형준, 청와대를 호시탐탐 노리고 있는 손학규 같은 이들이 필자로 참여하고 있었는데, 격세지감이랄까, 기분이 쫌 그랬다. 그리고 놀라운 사실은 20년 전 <사회평론> 가격이 4천원이었다! 

내가 만드는 잡지는 6천원이다. <녹색평론>은 얼마 전에 가격을 인상했는데 8천원한다. 녹평이랑 비교해보면 20년동안 딱 두배 오른 셈이다. 그 동안 종이값은 얼마나 올랐으며 인건비는 또 어떤가.

영화나 음반과 비교해볼 때, 아니 담뱃값이나 술값이랑 비교해볼 때 (엄밀한 비교가 아니라 그냥 심정적인 비교^^) 이 나라 책값은 참 착하다. 사실 지난해부터 시작해서 종이값이 감당하기 곤란할만큼 뛰고 있는데... 책을 내는 일이 갈수록 쉽지 않는데... 참... 너무 착하다. 착하게 살면 안 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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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해한모리군 2010-07-05 17: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네 저도 너무 싸다고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