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마의 숲 은행나무 시리즈 N°(노벨라) 8
안보윤 지음 / 은행나무 / 201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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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아르's Review

 

ㅡ 아저씨도 내가 어리광을 부리고 있다고 말하고 싶은 거예요?
ㅡ 너는 그냥, 서툰 거겠지. 어린애들의 특권이다. 멍청하고 성급한 건 어린애니까 가끔은 그런 식의 엉뚱하고 어리석은 결론을 내기도 하는 거다. 괜찮겠지. 그 정도는. 난 어설프 서툰 것드리 싫지 않다. 그런 건 반드시 어떤 식으로든 채워지거든. (중략
)
ㅡ 난 멍청하지 않아요
.
ㅡ 그래, 어리지. 그것뿐이다. 그러니 돌아가. 돌아가서 제대로 정어리를 먹는 거다. 머리부터 꼬리까지 남김없이 먹은 뒤에 비리거나 느끼하거나 토할 것 같단 생각이 들면
.
ㅡ 들면? 그땐 어떻게 해요
?
ㅡ 뱉어. 뱉고 입을 행궈. 삶이란 원래 그런 식으로 살아내는 거거든. 정어리를 먹고, 그게 맛이 없으면 뱉고, 그 다음엔 고등어나 고래를 먹는 거다. 그렇게 끝없이 이어지지. –본문

마지막 결론의 이야기를 보면서 나도 모르게 울컥하며 눈가에 눈물이 맺혀 있었다. 의식하지 않고 있었지만 나도 누군가에게 이런 이야기를 듣고 싶었었나 보다. 아직 괜찮다, 앞으로 나아가면 된다, 상처를 받았다는 것으로 스스로를 옥죄일 필요는 없다, 라는 무던한 듯 하지만 모든 것을 알고서는 전해주는 이야기들을 말이다. 아직 정어리의 맛도 모르면서 이 모든 것이 버겁다고 던져버리고 싶은 나에게 정어리를 먼저 먹어보고서 그게 아니면 다른 것을 찾아 나서면 된다고 말하는, 올빼미를 만나고 싶었던 것 같다.

이른바 알마의 숲이라 불리는 기묘한 숲 안에서 노루와 알마, 삼촌과 올빼미의 이야기는 현실의 모습을 닮은 듯 하면서도 다른 그들만의 세상을 보여주고 있다. 우리가 알고 있는 눈과는 다른 형태의 눈과 안대를 하고 다니는 동물들과 눈이 내리면 다른 세계에서 갑자기 떨어지는 사람들과 주인에게 버림 받은 것인지 모를 물건들이 쏟아져 내리는 이 숲은 상처 받은 이들만이 들어올 수 있는 곳이며 그렇기에 이 안에 있는 이들은 어딘가 상처를 받아 아픔을 안고 있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그 아픔만을 드러내며 누군가로부터 연민의 눈길을 바라는 것이 아닌 그들 스스로 그저 그 공간 안에 자신의 삶을 위해 살아가고 있다.

틀렸어, 노루. 나는 이 위태로운 삶 자체를 소중히 여기고 있어. 언제 죽어버릴지 모른다는 불안감이 오히려 생의 순간순간을 더욱 사랑스럽게 치장해주는 거야. 당장 죽을지도 모른다는 절박감이 생의 심지를 더욱 불타오르게 만드는 거라고. 내가 가진 모순은 견디는 삶에 대한 게 아니야. 그렇게 많은 걸 포기하고 선택한 삶인데도 마음껏 정열적으로 살아낼 수 없다는 게 억울한 거지. 감정과잉은 독이니까, 적당히 시큰둥하게 살수밖에 없다고 할까. -본문

요새 말로 하면 시크하며 잔망스럽기 그지 없는 알마는 소년을 노루라고 부른다. 소년이 자신의 생을 마감하려 했던 바람과는 달리 노루 엉덩이 아래 깔려있는 채로 발견된 이후로 소년을 노루라 부르는 알마는 늘 소년의 모든 것에 촌스럽긴을 외치며 핀잔을 주고 있지만 알마 역시 나름의 상처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그 상처를 여느 사람들처럼 드러낼 수도 없다. 그녀가 감정을 드리우는 순간, 그녀의 눈가에는 눈물로 가득해 질것이고 그렇게 되면 그녀의 심장은 그 감정을 감당하지 못하고 멈춰버릴 테니 말이다. 살기 위해서 늘 감정 따위 없이 냉혈한으로 살아야만 하는 알마를 보며 안쓰럽다, 라는 생각이 스치기도 하지만 그럼에도 알마는 자신의 삶을 사랑하고 있다.

ㅡ 무엇을 선택해야 후회하지 않아요?
ㅡ 후회하지 않는 선택 같은 게 있겠냐.(중략
)
ㅡ 네가 뭘 선택하든 후회는 반드시 따라붙어. 발 빠른 놈이거든. 차라리 그놈이랑 정면으로 맞닥뜨려. 실컷 후회하고 속 시원하게 털어버릴 수 있는 쪽을 택하는 거다. –본문

늘 레고만 소년에게 쥐어주고는 더 이상 아무런 말도 없던 남자와 청소년 심리 상담사로서 사회적 명성을 쌓아가고 있지만 정작 자신의 아들에 대해서는 모르고 있는 여자에게 노루가 다시 돌아갔을지는 모를 일이지만 삼촌과 올빼미의 이야기를 이해했다면 그는 틈을 통해서 다시 그가 있던 세계로 돌아갔을 것이다.

상처받은 이들이 쉬어갈 수 있는 이 알마의 숲이 존재하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어딘가에 존재하길 바라는 마음이 자꾸 일게 된다. 그리하여 나도 그 알마의 숲에 잠시 들어가 멈춰버린 세계에서 나를 다독이고 오고픈 마음이 든다. 모든 것이 정지되어 있는 그 곳에서 나의 마음만은 회복될 수 있을 이 미지의 장소를 한동안 꽤나 그리워할 것 같다. 그리고 올빼미의 마지막 이야기는 버겁기만 한 오늘을 견디게 해주는 이야기로 깊이 남아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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칸트의 집 / 최상희

독서 기간 : 2015.06.03~06.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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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신 꿈결 클래식 5
프란츠 카프카 지음, 박민수 옮김, 남동훈 그림 / 꿈결 / 201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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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신이라는 단어를 들으면 현재의 것보다 더 좋은 것으로 바꾸는 것이라고 생각했던 나에게 있어 그레고르의 변신은 충격 그 자체의 것일 수 밖에 없었다. 사람에서 곤충으로 변신이라니. 그의 갑작스런 변신에 무언가 전조 현상이라도 있었더라면 이 현실을 받아들이기 조금이나마 가벼웠겠지만 가벼운 감기를 앓는 것처럼 너무 쉽게 다가온 그의 갑작스런 변화는 이 현실을 받아들이기에는 무겁게만 다가왔다.

그레고르는 머뭇거리는 사람을 어떻게든 들어오게 하려고, 혹은 적어도 그 사람이 누구인지 알아보려고 거실을 통하는 문 옆에 바짝 다가섰다. 하지만 문이 더는 열리지 않았기에 그의 기다림도 허사로 끝났다. 아침에 문이 잠겨 있을 때는 모두 그렇게 들어오려고 성화더니, 이제는 자기가 한쪽 문을 열어 놓았고 다른 문도 낮 동안 분명 열어 두었을 텐데 들어오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리고 이제는 열쇠도 바깥에서 꽂혀 있었다. –본문

평소처럼 출근 준비를 위해 일어난 그레고르가 이제 더 이상 인간의 모습이 아니라는 것을 가족들이 알게 되었을 때, 초반에는 갑자기 변한 그의 모습에 대해 당혹감과 이 현실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지에 대한 고민이 담겨 있다면 시간이 흐를수록 이제 가족들에게 있어 그레고르는 인간 그레고르가 아닌 곤충 그레고르로만 남게 된다. 서로의 소통 따윈 없이 한 공간 안에 자리하고 있는 그들은 점차 서로의 모습을 외면하며 그들만의 세계에 자리하고 있고 경제적인 부담만을 더하는 그레고르는 결국 그들 사이에 필요치 않은, 사라져야만 하는 존재로 전락하게 된다.

자아, 이제 하느님께 감사드려야겠구나.” 잠자 씨가 말했다. 잠자 씨가 성호를 긋자 세 여자도 그가 하는 대로 따라했다. 그레테가 시체에서 눈을 떼지 못하며 말했다. “좀 보세요. 얼마나 말랐는지. 벌써 오래전부터 아무것도 먹지 않았어요. 음식은 들여 놓은 그대로 다시 나왔죠.” 실제로 그레고르의 몸통은 아주 납작하게 말라붙어 있었다. 사람들은 이제야 그 사실을 알게 되었다. –본문

<변신>이라는 작품이 장편인줄만 알았는데 이 안에는 다양한 단편 소설이 담겨 있다. 그다지 길이가 길지 않지만 읽고 나서는 계속 되뇌게 되는데 <법 안에서>의 한 남자는 법 안으로 들어가기 위해 문지기 곁에서 수 많은 시간을 보내게 되지만 결국 쓸쓸하게 죽음을 마주하게 된다. 아무것도 하지 않을 채 말이다. 왠지 모르게 나의 일상을 바라보는 듯한 느낌이기에 처연해지는데 <팽이>를 넘어 <포세이돈> 역시도 짧지만 그 안의 이야기를 계속 곱씹어보게 한다.

전체서평보기 : http://blog.yes24.com/document/8058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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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후 네시 / 아멜리 노통브저

독서 기간 : 2015.05.20~05.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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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스트 타이쿤 환상의 숲
프랜시스 스콧 피츠제럴드 지음, 임근희 옮김 / 이모션북스 / 201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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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읽은 소감을 서두에 먼저 밝히자면 왜 하필 일요일 밤부터 이 책을 읽기 시작했나, 라는 스스로에 대한 책망이 밀려 들었고 월요일 새벽 2시 반을 넘어가는 시계를 보면서 내일을 위해 100페이지 가량 남겨둔 채 책을 덮어야 했을때는 너무도 빨리 지나가는 시간이 아쉽기만 했다. 또한 이 안의 이야기는 <위대한 개츠비>와 몹시 닮아있으며 마치 일란성 쌍둥이를 마주하는 듯 하면서도 위대한 개츠비보다는 더 쉽게 다가오고 있었는데 이것이 위대한 개츠비를 통해 앓았던 몸살이 한 번 면역이 되어있어서인지는 모르겠다. 여하튼 이전보다는 더 쉽고 빠르게 전해지는 라스트 타이쿤은 피츠제럴드의 모든 것이 담겨 있는 마지막 유작이며 그의 유작이 마무리되지 못한 것은 여간 아쉬운 것이 아닐 수 없다.

2시 반과 6시 반, 2회에 걸쳐 스타는 여기에 않자 그날 촬영한 필름을 주의해 본다. 이따금 그 자리엔 대단한 긴장감이 감돌기도 한다ㅡ 스타는 '기정 사실'과 씨름을 하게 되는 것이다. 몇 개월에 걸친 투자, 계획, 집필과 퇴고, 배역, 구성, 조명, 리허설, 촬영의 결과물이다. 멋진 영감이 번뜩인 성과, 또한 자포자기와 무기력과 음모와 땀의 산물. 우여곡절을 다한 부대 배치도 이미 완료되었고 승패가 어느 쪽이 될 것인지 알 수 없는 단계에 이르렀으며 여기에 당도하는 것은 모두 전선으로부터의 전황 보고이다. -본문

이 소설 속의 주인공은 먼로 스타와 캐슬린이지만 이들에 대한 이야기는 그들 스스로가 아닌 세실리아를 통해 전해지는 것은 <위대한 개츠비>의 화자인 닉 캐러웨이가 모든 것을 이끌어가는 것과 동일하다. 하기야, 스타 역시도 개츠비와 같이 사랑하는 여인을 끝끝내 자신의 곁에 두지 못하고 떠나보내야했고, 그에게 허락된 시간마저도 길지 않았기에, 이 모든 이야기는 제 3자에 의해서만이 제대로 전해질 수 있었을 것이다. 다른 것이 있다면 닉은 조금 더 객관적인 입장에서 개츠비와 데이지를 바라보았을 것이며 스타를 마음에 품고 있던 세실리아는 스타와 캐슬린의 이야기를 자신의 사심을 담아 바라볼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실상 그들이 함께 있던 시간은 그리 길지 않는 것이었지만 그들이 함께 보낸 시간은 그들의 삶을 변화시키기엔 충분한 것이었고 미나를 넘어 캐슬린을 곁에 두려했던 스타의 꿈은 한여름밤의 꿈처럼 사그라들고 만다. 모든 것이 달달한 꿈인 듯 캐슬린은 '그 미국인'을 따라 날아가버렸고 데이지처럼 사라진 그녀의 빈자리를 바라보고 있는 스타는 점점 파국의 모습으로 빠져들게 되며 개츠비가 되어가는 것이다.

개츠비와 비슷하지만 또 개츠비와는 다른 스타의 결말은 더 이상 변화될 수 없다. 이미 세상을 떠난 피츠제럴드는 스타의 마지막에 무엇을 담길 바랐을지. 그가 놓아버린 이야기의 뒷 부분을 그려보며 그가 제 2의 개츠비를 넘어서길 조심스레 바라본다.

전체서평보기 : http://blog.yes24.com/document/80504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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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대한 개츠피 / F. 스콧 피츠제럴드저

독서 기간 : 2015.05.17~05.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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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신은 얘기나 좀 하자고 말했다 그리고 신은
한스 라트 지음, 박종대 옮김 / 열린책들 / 201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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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신의 모습이 우리가 막연하게 생각해온 것이라면 이 <그리고 신은 얘기나 좀하자고 말했다> 안에서 만날 수 있는 신의 모습은 표지에 자리하고 있는 광대 옷을 입을, 평범하다 못해 과연 이 사람이 신이란 말인가? 라는 의구심이 들 정도의 모습을 하고서는 눈 앞에 드리우게 된다. 과연 우리가 알고 있는 신에게 무슨 일이 생긴 것일까?

심리 치료사인 야콥 야코비는 그의 직업이 무색하리만큼 인생의 최대 난제 앞에 서 있다. 아내와의 이혼 후 안 그래도 썰렁하다 못해 암전과 같은 그의 사무실 임대료는 점점 밀리고만 있고 유일한 고객인 전 부인 엘렌의 상담 도중 현재 그녀와 함께하고 있는 아르민으로부터 급작스런 공격을 받는 바람에 야콥은 병원 신세를 지게 된다. 여기서 더 어떻게 최악의 상황이 만들어지겠어, 라는 생각에 빠져있을 그에게 어릿광대의 분장을 한 한 남자가 다가온다.

아벨 바우만이라는 이 남자는 야콥에게 자신이 이라고 소개를 하며 고민 상담을 요청하고 있다. 신의 고민 상담이라니. 만약 그 누군가가 고민 상담을 해오며 사실 저는 신입니다.’ 라고 이야기 한다면 그 말을 믿어줄 이가 누가 있을까. 우리가 생각하는 신은 모든 것을 자유자재로 할 수 있는 무한한 힘을 가진 이기에 그러한 신이 인간에게 손을 내민다는 것 자체가 말도 안 되는 것이라며 그렇게 주장하는 사람이 정상이 아니라고 생각할 것이다. 어찌되었건 더 이상 심리치료사가 아닌 인생의 다른 길을 모색하려 하던 찰나, 아벨의 끈질긴 구애에 야콥은 그의 상담을 시작하게 된다.

<그것도 아니오. 물론 몇 가지 발명한 게 있긴 하지만 천재적인 건 없소>
<
아하! 그런데도 어떻게 신의 비밀스러운 계획을 아는 거죠? 혹시 당신이 신이라도 되나요
?>
바우만은 눈에 띄게 움찔하더니 크게 웃음을 터뜨린다. <정말 대단해!> 그는 이렇게 외치고는 마치 발작처럼 몸을 흔들며 다시 웃기 시작한다. 너무 웃어서 뺨 위로 눈물까지 흘러내린다. <제대로 맞혔소, 야코비 박사. 내가 바로 신이오
>
나는 놀라 멈칫한다. 이걸 어떻게 받아들어야 할까? 이 인간의 망상일까, 아니면 내 유머에 대한 화답일까? -본문

그렇게 신의 존재를 서서히 입증하는 아벨을 보면서 다시금 그가 왜 야콥을 찾아오게 되었는지에 대해 묻지 않을 수가 없다. 사람들에게서 점점 잊혀가고 신 자체에 대한 믿음이 사라진 지금, 그 안에 있는 힘이 점점 사라지고 있기에 이대로 죽음을 맞이하는 것은 아닐까, 라는 고민에 빠진 것처럼 인간 역시 내가 없는 세상은 어떠한 모습일까, 라는 고민에 빠지기도 한다. 하지만 이 문제들의 근원은 세상에 내가 있기에 품을 수 있는 고민이 아닐까. 신과 인간이 품고 있는 그들의 고민을 따라 가다 보면 유쾌하면서도 그 안의 의미를 함께 생각해볼 수 있는 책이었다.

​전체서평보기 : http://blog.yes24.com/document/8046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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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국주식회사 / 사이먼 리치저

독서 기간 : 2015.05.07~05.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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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의 증명 은행나무 시리즈 N°(노벨라) 7
최진영 지음 / 은행나무 / 201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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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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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펼친 지 채 5분의 시간도 흐르지 않은 상태지만 이 책은 무언가가 잘 와 닿겠구나, 라는 생각이 드는 책이 있다. 한동안 슬럼프에 빠져 책을 쳐다보기도 싫던 나에게 있어서 이 <구의 증명>은 다시 책의 마력에 빠져들게 하는 것이었고 문장 하나하나마다 마음을 동하게 하는 무언가가 있었다. 이런 점이 좋아요, 라고 콕 집어 이야기 할 수는 없지만 이 안의 모든 것이 좋았기에 책을 다시 펼치게 하던 이 이야기를 꽤나 오랫동안 쥐고 있었다.

사람이란 뭘까.
 
구를 먹으며 생각했다. 나는 흉악범인가. 나는 사이코인가. 나는 변태성욕자인가. 마귀인가. 야만인인가. 식인종인가. 그 어떤 범주에도 나를 완전히 집어넣을 수 없었다. 그렇다면 나는 사람인가. 아이는 물건에도 인력을 부여하지만 어른은 인간도 물건 취급한다. 아이에서 어른으로 무럭무럭 자라면서 우리는 이 세계를 유지시키고 있다. 사람은 돈으로 사고팔 수 있다. 사람은 뭐든 죽일 수 있고 먹을 수 있다. 사람은 거짓말을 하고 사기를 친다. 누군가의 인생을 망치고 작살낼 수 있다. 그리고 구원할 수도 있다. –본문

 이 안의 이야기만을 바라보았다면, 그야말로 그로테스크한 것임에 틀림없다. 자신이 사랑했던 한 남자의 죽음을 바라보며 그를 먹고 있는 한 여자의 이야기. 이것은 현대의 우리에게 도무지 용납될 수 없는 행태이자 비인간적인 행위이기에 그 모습을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역겨움이 밀려들지만 구와 담의 이야기를 처음부터 마주한 이들이라면, 이것을 괴기한 한 장면으로 바라보지만은 않을 것이다. 자신에게 남겨진 마지막 한 조각마저 잃어버린 한 여자는 사랑하는 이의 죽음을 슬퍼할 사이도 없이 세상에 그의 죽음을 숨겨야만 한다. 그리고 그녀만이 그가 세상에 찬란히 빛난 던 한 사람임을 기억한 마지막 사람이기에 그녀는 그를 따라서 세상을 떠날 수 없다. 그러니까 적막 속에서 홀로 서 있어야 하는 것이다.

전쟁 중에 태어나서 전쟁만 겪다가 죽는 사람들이 있다. 열악한 환경에서 기아와 질병으로 죽어가는 아이들이 있다. 전염병이 유행하는 곳에서 속수무책으로 죽어가는 사람들이 있고, 조상들의 전쟁에 휘말려 평생 난민으로 살아가는 사람들도 있다. 전쟁이나 질병은 선택 문제가 아니다. 나는, 구의 생애 덕지덕지 달라붙어 구의 인간다움을 좀먹고 구의 삶을 말라비틀어지게 만드는 돈이 전쟁이나 전염병과 마찬가지라고 생각했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다를 게 없었다. 그건 구의 잘못이 아니었다. 부모가 물려준 세계였다. 물려받은 세계에서 구는 살아남는 방도를 찾아야 했다. 우리는 무엇을 어떻게 해야 했을까? –본문

 구나 담을 실제 현실의 세계에서 만났다면 나는 그들에게 무슨 말을 해줄 수 있었을까. ‘그럼에도 세상에는 희망이 있다잖아. 조금만 더 힘내보자, 라든가 언젠가는 이 모든 것들도 흘러 가게 될 거야, 라는 시답잖은 이야기만 늘어놓았을지 모른다. 아무런 도움을 줄 수 없으면서 이 모든 문제는 시간이 지나면 자연스레 해결될 것이라는 막연한 희망만을 던져준 채 그들에게 위로를 건넸다며 혼자서 만족하며 돌아섰을 것이다. 여전히 그들을 삶의 바닥이라는 구렁텅이에 남겨 놓은 채 말이다.

 세상에 홀로 남겨진 사람들은 서로를 단번에 알아보는 눈이 있는 듯 하다. 나와 비슷한 누군가의 존재를 바라보는 것만으로 알 수 있었던 구와 담은 그렇게 유년시절부터 주변 이들의 따사로운 눈살과 핍박 안에서도 서로를 향한 마음을 굳건히 지키며 지금까지도 함께하고 있다. 아니, 그들은 물리적으로 떨어져 있을 때마저도 각자를 마음 속에서 비워낸 적이 없었으니, 죽음의 그림자가 그들 사이에 드리웠다고 해도 달라지는 것은 없을 것이다.  

구의 죽음에 관심 없는 사람들은 어떤 애도도 표하지 않을 것이다. 단 일 초도 구의 삶을 상상하거나 구의 죽음을 슬퍼하지 않을 것이다. 어떤 이는 차라리 잘 되었다고 말할 것이다. 그렇게 사는 게 사는 거냐고, 답 없는 삶이라고 말할 것이다. 살면서 이미 그런 말을 수차례 들었다. 그런 구가 진짜 죽었다. 죽었는데도 그런 말을 듣게 할 수는 없다. 죽었는데, 잘 되었다니, 견딜 수 없다. 지금도 구를 찾고 있을 자들이 구의 죽음을 안다면, 분명 구의 몸을 팔려고 할 것이다. –본문

 지금의 고난을 벗어나기 위해서 아등바등 움직일수록 올가미는 더욱 그들을 죄어오고 있었다. 대체 이 시작을 어디서부터 바로 잡아야 했던 것일까. 구의 부모님의 세대에서 이미 틀어져버린 시간들은 그에게 전해지면서 감당할 수 없는 무게로 그를 짓누르고 있다. 남들과는 조금 달랐지만 그럼에도 이 세상에 존재하는지도 몰랐던 그들이 평범하게 이 대지 위에 뿌리내릴 수는 없었던 것일까. 그저 함께 하기만을 바랐던 그들에게 용납되는 공간과 시간이 없었다는 것이, 먹먹함으로 밀려들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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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우의 집 / 권여선저


 

 

독서 기간 : 2015.04.21~04.22

by 아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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