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책을 펼친 지 채 5분의 시간도 흐르지 않은 상태지만 이 책은 무언가가 잘 와 닿겠구나, 라는 생각이 드는 책이 있다. 한동안 슬럼프에 빠져 책을 쳐다보기도 싫던 나에게 있어서 이 <구의 증명>은 다시 책의 마력에 빠져들게 하는 것이었고 문장 하나하나마다 마음을 동하게 하는 무언가가 있었다. 이런 점이 좋아요, 라고 콕 집어 이야기 할 수는 없지만 이 안의 모든 것이 좋았기에 책을 다시 펼치게 하던 이 이야기를 꽤나 오랫동안 쥐고 있었다. 사람이란 뭘까. 구를 먹으며 생각했다. 나는 흉악범인가. 나는 사이코인가. 나는 변태성욕자인가. 마귀인가. 야만인인가. 식인종인가. 그 어떤 범주에도 나를 완전히 집어넣을 수 없었다. 그렇다면 나는 사람인가. 아이는 물건에도 인력을 부여하지만 어른은 인간도 물건 취급한다. 아이에서 어른으로 무럭무럭 자라면서 우리는 이 세계를 유지시키고 있다. 사람은 돈으로 사고팔 수 있다. 사람은 뭐든 죽일 수 있고 먹을 수 있다. 사람은 거짓말을 하고 사기를 친다. 누군가의 인생을 망치고 작살낼 수 있다. 그리고 구원할 수도 있다. –본문 이 안의 이야기만을 바라보았다면, 그야말로 그로테스크한 것임에 틀림없다. 자신이 사랑했던 한 남자의 죽음을 바라보며 그를 먹고 있는 한 여자의 이야기. 이것은 현대의 우리에게 도무지 용납될 수 없는 행태이자 비인간적인 행위이기에 그 모습을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역겨움이 밀려들지만 구와 담의 이야기를 처음부터 마주한 이들이라면, 이것을 괴기한 한 장면으로 바라보지만은 않을 것이다. 자신에게 남겨진 마지막 한 조각마저 잃어버린 한 여자는 사랑하는 이의 죽음을 슬퍼할 사이도 없이 세상에 그의 죽음을 숨겨야만 한다. 그리고 그녀만이 그가 세상에 찬란히 빛난 던 한 사람임을 기억한 마지막 사람이기에 그녀는 그를 따라서 세상을 떠날 수 없다. 그러니까 적막 속에서 홀로 서 있어야 하는 것이다. 전쟁 중에 태어나서 전쟁만 겪다가 죽는 사람들이 있다. 열악한 환경에서 기아와 질병으로 죽어가는 아이들이 있다. 전염병이 유행하는 곳에서 속수무책으로 죽어가는 사람들이 있고, 조상들의 전쟁에 휘말려 평생 난민으로 살아가는 사람들도 있다. 전쟁이나 질병은 선택 문제가 아니다. 나는, 구의 생애 덕지덕지 달라붙어 구의 인간다움을 좀먹고 구의 삶을 말라비틀어지게 만드는 돈이 전쟁이나 전염병과 마찬가지라고 생각했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다를 게 없었다. 그건 구의 잘못이 아니었다. 부모가 물려준 세계였다. 물려받은 세계에서 구는 살아남는 방도를 찾아야 했다. 우리는 무엇을 어떻게 해야 했을까? –본문 구나 담을 실제 현실의 세계에서 만났다면 나는 그들에게 무슨 말을 해줄 수 있었을까. ‘그럼에도 세상에는 희망이 있다잖아. 조금만 더 힘내보자, 라든가 언젠가는 이 모든 것들도 흘러 가게 될 거야, 라는 시답잖은 이야기만 늘어놓았을지 모른다. 아무런 도움을 줄 수 없으면서 이 모든 문제는 시간이 지나면 자연스레 해결될 것이라는 막연한 희망만을 던져준 채 그들에게 위로를 건넸다며 혼자서 만족하며 돌아섰을 것이다. 여전히 그들을 삶의 바닥이라는 구렁텅이에 남겨 놓은 채 말이다. 세상에 홀로 남겨진 사람들은 서로를 단번에 알아보는 눈이 있는 듯 하다. 나와 비슷한 누군가의 존재를 바라보는 것만으로 알 수 있었던 구와 담은 그렇게 유년시절부터 주변 이들의 따사로운 눈살과 핍박 안에서도 서로를 향한 마음을 굳건히 지키며 지금까지도 함께하고 있다. 아니, 그들은 물리적으로 떨어져 있을 때마저도 각자를 마음 속에서 비워낸 적이 없었으니, 죽음의 그림자가 그들 사이에 드리웠다고 해도 달라지는 것은 없을 것이다. 구의 죽음에 관심 없는 사람들은 어떤 애도도 표하지 않을 것이다. 단 일 초도 구의 삶을 상상하거나 구의 죽음을 슬퍼하지 않을 것이다. 어떤 이는 차라리 잘 되었다고 말할 것이다. 그렇게 사는 게 사는 거냐고, 답 없는 삶이라고 말할 것이다. 살면서 이미 그런 말을 수차례 들었다. 그런 구가 진짜 죽었다. 죽었는데도 그런 말을 듣게 할 수는 없다. 죽었는데, 잘 되었다니, 견딜 수 없다. 지금도 구를 찾고 있을 자들이 구의 죽음을 안다면, 분명 구의 몸을 팔려고 할 것이다. –본문 지금의 고난을 벗어나기 위해서 아등바등 움직일수록 올가미는 더욱 그들을 죄어오고 있었다. 대체 이 시작을 어디서부터 바로 잡아야 했던 것일까. 구의 부모님의 세대에서 이미 틀어져버린 시간들은 그에게 전해지면서 감당할 수 없는 무게로 그를 짓누르고 있다. 남들과는 조금 달랐지만 그럼에도 이 세상에 존재하는지도 몰랐던 그들이 평범하게 이 대지 위에 뿌리내릴 수는 없었던 것일까. 그저 함께 하기만을 바랐던 그들에게 용납되는 공간과 시간이 없었다는 것이, 먹먹함으로 밀려들 뿐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