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7년 우리나라를 떠들썩하게 뒤흔들었던 IMF 경제 위기 속에서도 그저 늘 교복을 입고 학교에 다니던 나는 당시 누구랄 것도 없이 집안에 모아두었던 금을 모으는 모습을 보면서 그저 신기하다, 는 생각만을 했었다. 그 때는 어렸다는 핑계로 뉴스 속에 보이는 세상은 어른들의 것이라며 무관심했다면, 어른이 된 지금은 내가 아니여도 세상은 돌아간다는 핑계로 또 멀찍감치 떨어져 세상에 뒷짐지고 바라보고 있는 나에게 이 <디 마이너스>라는 소설은 동일 선상에서 지내왔던 10여년의 역사 속에서 당신을 무엇을 보고, 무엇을 생각했으며, 그리하여 어떠한 행동을 했는지에 대한 날카로운 질문을 던지고 있다. 물론 나는 아무런 대답도 없이 그저 그들이 들려주는 이야기만을 바라보고 있었으며 마치 그 시대를 지나지 않아도 아무 문제 없다는 듯 오늘을 살고 있지만 과연 나의 삶이 옳은 것인가, 에 대한 뒤늦을 반성과 함께 책을 읽어내려가게 된다.
이야기는 진우의 청첩장을 받아든 박태의의 모습으로 시작된다. 이제는 서른 두평의 집에서 아내와 다섯살이 된 딸과 평범한 삶을 지내고 있는 그에게 들린 진우의 청첩장은 파란했던 그의 20대는 물론 1990년와 2000년대의 시간으로 다시금 회기하게 하는 타임머신 같은 존재가 되어 태의 앞에 그 처절했던 시간을 다시금 떠오르게 하는 것이다.
서울대에 입학한 태의는 잔디밭에서 선배들과 함께 신입생 환영회라는 자리에 함께하고 있다. 돌아가면서 자기 소개를 하는 신입생에게 선배들은 노래를 권하고 있고 이를 거부하는 태의에게는 엉덩이로 이름쓰기라는 유치한 벌칙이 가해지게 되는데 건성으로 이름을 휘갈기며 있던 그에게 '마르크스'에 대해 묻는 현승 선배와 인문대학의 빛나는 별로 거론되는 미쥬는 그의 평범한 20대의 시간을 파란하게 만드는 거대한 축이 되어 그의 삶에 또 다른 포문을 열게 한다.
하지만 나는 그런 미쥬를 숭배했다.
줄자처럼 정확하고 유연한 그녀의 언어. 세계의 빈틈을 예리하게 포착해내는 그녀의 농담. 목젖을 흔들며 기분 좋은 공기의 떨림을 만들어내는 그녀의 웃음. 나는 그녀를 베끼고 싶었다. 그녀의 모든 것을 내것으로 만들고 싶었다. 그리고 결국 나는 그녀를 소유함으로써 그녀가 했던 말의 뜻을 깨우쳤다.
무엇가를 좋아하는 것만이 무언가를 좋아한다는 뜻이다.
인간은 가진 것을 내버리고 갖지 못한 것을 좇기도 한다. -본문
그의 가슴 속에 박혀버린 미쥬를 따라 철학 연구 학회에 들어간 태의는 자연스레 '전국학생연대회의'라는 학생 운동에 함께하게 된다. 이곳을 통해서 공과대학의 거목이 될 것이라 주목받는 진우도, 미쥬의 남자친구인 대석과도 마주하게 되는데 그들에게 드리울 앞으로의 이야기가 무엇인지도 모른채 그들은 서로의 논리를 가지고 심각한 토론을 벌이기도 하고 그들 스스로에게 무엇이 옳고 그른지에 대한 끊없는 고민을 하는 시간들을 보내게 된다.
서울대에 떠돌고 있는 이른바 미친 남자가 태의의 눈에 띈 것은 그저 우연은 아니었을 것이다. 남영동 대공분실에 들어갔다 나왔다는 그는 살기 위해서 제 정신을 놓아버리고 자신을 지켜줄 수 있을 것이라 믿게된 정신적 분소인 이 서울대에 계속해서 살아가고 있는 그의 모습은 진실을 바라보려 했던 누군가에게 전해지는 냉혹한 사회가 전해주는 경고였는지 모를 일이다. 물론 태의는 당시만 해도 이것에 대해 큰 관심을 보이지 않고 있지만 말이다.
평범한 학생으로 살아가던 그들의 삶을 한 순간에 변모시킨 일이 발생한 것은 바로 대우 자동차의 부도가 발생하게 된 시점이다. 경영진의 방만한 경영이 이 모든 사태의 이유임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노동자를 일방적으로 해고하는 것은 물론 임금을 삭감하는 것으로 문제를 해결하려 하고 있다. 그러니까 사태를 만든 것을 머리에 앉아 있는 그들이지만 책임을 지워야 하는 이는 꼬리에 자리하고 있는 노동자들이었던 것이다. 이 사건에 대해 울분을 토하던 대석은 태의에게 이 일을 바로 잡을 것을 종용하게 되고 김우중 회장의 자택을 습격하는 일에 가담하게 되지만, 그의 트레이드 마크와 같던 빨간 패딩이 꼬리를 밟히게 되면서 그들의 무리를 또 다른 국면에 접어들게 된다.
진우와 나는 대공분싱릐 지하 복도까지 나란히 걸었다. 양옆에 형사 한 사람씩이 붙어 있었다. 빛은 희미하게 미쳤다. 열댓 걸음 간격으로 설치된 낡은 백열등의 덮개 안에는 하루살이의 시체들이 액체처럼 진득하게 고여 있었다. (중략)
"누가 먼저 풀려나든, 부모님 찾아뵙고 별일 없으니까 걱정할 필요 없다고 말해주기로 하자."
옆에 붙어 있던 형사가 뒤통수를 찰싹 때리더니 진우를 질질 끌고 어둠 속으로 들어갔다. -본문
대학가에 불어닥친 학생 운동 긴급 소집령으로 인해 대석을 시작으로 해서 태의와 진우까지 대공분실로 끌려 들어가게 된다. 그곳을 벗어나기 위해서 다음 누군가를 지목해야 하는 상황 속에서 진우는 끝까지 그 뒤를 이을 누군가를 지목하지 않고 버티고 있으며 그에 대한 처벌 마저도 월드컵 기간이라는 이유로 한참 후에 처리되는 것을 보노라면 과연 우리가 살고 있는 곳은 어디인가, 에 대한 생각이 머리 속을 떠나지 않게 된다.
“곧 우리나라에서 월드컵이 개최되는데 너 같은 놈들이 또 후배들 끌고 거리고 뛰쳐나와 활개치게 놔둘 수는 없지. 축제 기간 동안만 머리 식히고 나와라. 너만 처넣는 건 아니니까 너무 섭섭하게 생각하지 말고”
진우가 기소된 실질적인 이유였다. 도로교통법 위반도, 집회 및 시위에 관한 법률 위반도, 국가 보완법 위반도, 화염병 사용 등의 처벌에관한 법률 위반도 아니었다. 독재에 대항했기 때문도, 혁명을 계획했기 때문도 아니었다. 월드컵이 한국에서 개최되었기 때문이었다. 그 누구도 세계인의 축제에 찬물을 끼얹어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본문
그렇게 세상의 뜨거운 맛을 보았던 이들은 다시금 뿔뿔이 흩어져 그들의 자리를 찾아가게 된다. 태의는 군대를 갔고 미쥬는 헬싱키로 떠나고 진우와는 한참 만에 다시 마주하게 되지만 그 안에서 또 다른 사건들을 만나게 되면서 그 찬란했던 그들의 시간은 이제 과거라는 이름으로 역사 속에 고스란히 묻히게 된다.
책의 마지막에 쓰여있는 '잃어버린 10년'이라는 연보를 보노라면 참으로 수 많은 사건들이 지나왔구나, 라는 생각이 절로 들게 된다. 휘청거렸던 대한민국을 뜨겁게 바라보았던 당시의 20대의 청년들은 이제는 어느 새 사회에 물들어 평범한 30대의 삶을 보내고 있다. 낙제인 F는 면했지만 최악의 점수인 D-를 말하는 이야기를 보며 나는 치열하게라도 그들처럼 살아본 적이 있었던 가에 대해 고민해보게 된다. 도서관에서 학점을 위해 고군분투하는 것이 대학생의 삶의 전부라 믿었던 나는 과연 사회 속에 있기는 했던 것인지. 소설이지만 너무도 생생한 이야기는 나를 향해 채찍을 건네주는 느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