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겨레신문을 보다 내 경우는 어땠나 적어봤다. 다 적지도 않았는데 너무 많았다.ㅡㅡ

태어나던 날: 손자보기를 고대하며 부산으로 오셨던 할머니는 셋째도 딸인 걸 안 순간 즉시 시골로 내려가셨다. 나를 낳은 엄마는 그 힘든 몸으로 손수 미역국을 끓여드셨다. 아버지는 또 어디서 만취해서 나는 아들 하나 없다며 울었을 거다.

6살:대낮. 동네 골목길에서 낯선 아저씨와 마주쳤다. 아저씨가 갑자기 바지를 벗으려고 해서 영문은 몰랐지만 느낌상 나쁜 일일 것 같아 미친 듯이 도망쳤다.

13살 : 국민학교 6학년 교실 안. 선생님이 없는 교실. 남학생들이 전날 본 비디오를 흉내낸다며 자기들끼리 성행위를 연상시키는 행위를 했다. 성이 불결하고 불쾌할 뿐 아니라 무섭다는 생각을 하게 했다.

14살: 학교 가는 길. 양복 정장을 차려 입은 젊은 남자가 내 젖꼭지를 꼬집고 지나갔다. 친구와 함께 걸어가고 있었는데 너무 놀랐고 너무 아파서 비명을 질렀다. 어이가 없어서 돌아봤는데... 그 남자는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도망치거나 서두르지 않고 태연히 천천히 걸어가고 있었다.

16살: 학교 보충수업+타율학습을 마치고 집으로 가던 길. 버스에서 내려 100미터 정도만 가면 집. 매일 다니던 길인데 그날 따라 지나다니는 사람이 한 명도 보이지 않았다. 뉴스에서는 연일 봉고납치나 강간 뉴스가 계속되었던 기억. 왕복 2차선 도로에 반대편 차선 옆엔 주차장까지 길따라 이어져 있었다. 슈퍼 앞에서 5분을 기다려도 사람 한 명 나타나지 않았고 결국 혼자서 3~40미터를 걷고 있을 때 주차장 쪽에서 사람들 여럿이 수군거리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그때부터 미친 듯이 집을 향해 뛰었다. 뛰는 도중에 주차장에서 대여섯명의 남자아이들이 뛰어 나오며 "저 씨발년 잡아라!"고 소리치던 걸 지금도 기억한다. 집 근처 골목 앞에서 나이든 아주머니와 마주쳤고 나는 대문을 두드리며 울고 있었다. 그날 이후 한동안 엄마가 하교시간에 맞춰 슈퍼앞에 나와계셨다.

17살 : 학교 가는 길. 대형 트레일러 옆에서 앞서 걸어가던 아이들이 화들짝 놀라며 뛰거나 반대편 쪽으로 건너가고 있었다. 트레일러 근처에 가서야 알았다. 한 남자가 자위하고 있었다. 비명을 지르며 나도 뛰어갔다. 한달에 몇번씩 마주칠 때마다 놀랐다. 나중에는 앞선 아이들이 뛰거나 도로를 건너면 알아서 도로를 가로질러 갔다.

18살:학교 학생 한 명이 사라졌다. 매일 밤 아버지가 자동차로 딸을 데려가셨다는데... 무슨 일인지 문제의 그날 비슷한 차량이 서 있었고 딸은 친구들에게 내일 보자며 달려가 차를 탔고, 사라졌다. 인신매매 당했다는 소문이 돌았다. 그래도 학교는 계속 늦은 밤까지 타율학습을 강요했다.

19살 : 국어를 가르치던 나이 많은 남자선생은 고전을 들먹이며 음담패설을 계속했다. 아이들이 그만하라고 소리질러도 끝까지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19살-1: 고3 담임이 말했다. 너희들이 대학가려는 이유는 대학나온 남자를 만나기 위한 거 아니냐고. 그거말고 여자인 너거가 대학가는 이유가 뭐냐고.

20살: 재수학원에서 나도 모르는 연애설이 터졌다. 나와 눈높이가 같은(키 160센티미터가 안되는), 같은 반 남학생의 자작극이었다. 하지만 서로 호감을 가졌던 나와 썸남은 그날로 어색해져 버렸다. 나중에 들리는 소문은.. ' 걔가 여지를 줬겠지. 여자가 헤프게 아무한테나.. '. 인연이 되지 않아 다행이라 생각했다.

22살: 동아리방에서. 예비역 세 명이 지들끼리 시덥잖은 얘기를 주고받다가 책 가지러 온 나를 성희롱 했다. 성적 모욕감으로 얼굴이 시뻘개졌고 "사과하라"고 얘기했으나 계속 킬킬거리기만 했다. "절대 그냥 넘어가지 않겠다"고 하자 "니가 뭐 우짤낀데?" 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성희롱 발언을 한 것에 대해 사과를 요구했다. 동아리 사람들에게 피해사실을 알렸다. 형식적인 사과를 받는데 6개월이 걸렸다. 동아리를 그만두지도 않았다. 사람들은 나와 그 선배 눈치를 살폈다. 그러는 동안 내가 들은 말들은 다음과 같다.
대충하고 넘어가라, 별 것도 아닌데 시끄럽게 하지 마라, 니 때문에 동아리 분위기 나빠졌다......
급기야 학교 축제때 동아리 회장은 모든 회원들 앞에서 피해자인 내게 '이제 제발 그만두면 안되겠냐?'고 했다. 아직 사과도 받지 못했다고 했지만 그만하면 됐단다.
가해자는 줄곧 '내가 뭘 그리 잘못했냐'며 억울해했다. 귀찮아서 사과한다고 했다. 그 형식적인 사과를 받고 나서 동아리를 탈퇴했다.

24살 : 졸업을 앞두고.. 몇 장 안되는 입사추천서를 예비역 남자선배들에게만 나눠주고 있었다. 여학생이 70%나 되는 과에서. 이유를 묻자 '학번순'이란다. 성적순이 아니라 학번순.
공정하지 않다고 계속 이의를 제기하자 교수와 조교는 너희끼리 알아서 결정하라며 회피했고 예비역들은 자신들의 인생이 달렸다며 결혼하면 그만 둘 너희가 양보하라고 했다.

26살 : 도서관 가는 길. 이어폰을 끼고 음악을 들으며 걷고 있었다. 주차된 차 사이에서 4~50대로 보이는 한 남자가 나를 쳐다보며 계속 뭐라고 말을 하고 있었다. 뭔 말인가 싶어 이어폰을 뺐더니 나를 향해 온갖 저질 음담을 하면서 자위하고 있었다. 곧장 112에 전화걸며 '거기 딱 서 있어라'고 했다. 112에 전화하자마자 남자는 허둥지둥 바지를 추스리며 도망치기 시작했다. 나는 전화기를 붙잡고 남자를 쫓아가며 '거기 서라'고 외쳤다. 집에 얘기하자 '얘가 겁도 없이. 앞으로는 그냥 피해 다녀라" 는 말을 들었다.

27살 : 대학원에서 외부강사를 초청한 콜로키움이 있었다. 강사 양옆에 여자 대학원생을 앉하며 교수가 말했다 "겅의비는 많이 못줘도 예쁜 대학원생은 옆에 앉혀준다". 10분 전엔 모두 같은 회의장의 참석자였는데 졸지에 접대부꼴이 되어버렸다. 남자 동기들은 우리 처지를 외면했다.

27살-1 : 채팅하며 친하게 지낸 남자가 있었다. 딱 한 번 만나 커피 한 잔 마셨는데 결혼하자고 했다. 호감이 있던 상대였지만 사귀는 사이도 아닌데 결혼이라니. 거절하자 남자는 자기 맘이 정리될 때까지 계속 전화를 걸겠다고 했고 전화를 안 받으면 괴롭히겠다고 했다. 남자는 새벽 2~3시경 계속 전화를 했고 나는 매번 그 전화를 받아야했다. 무슨 해코지를 할지 몰라서 그렇게 하는 것이 최선인줄 알았다.

29살때: 인터넷 모임에서 알게 된 사람들과 만난 자리. 술자리가 이어졌고 말 통하는 좋은 사람들을 만났다 생각하며 친근하게 대했다. 취한 30대 초반인 기혼남자가 나를 붙들고 늘어졌다. 그 사이 다른 사람들은 흩어졌고 택시라도 태워야겠다 싶어 부축했더니 나랑 자고 싶단다. 사람 멱살을 그날 처음 잡았다. 건물 1층으로 끌고 들어가 온갖 욕을 퍼부어주고 멍한 상태로 집으로 돌아왔다. 당연히 사과할 거라 생각했으나 묵묵부답. 사과를 요구하자 기억이 나지 않는단다. 요목조목 정리하여 메일을 보냈고 동호회에서 사라지라고 했다. 그는 사라지고 나는 남았다.

31살: 지원활동을 시작한 곳에서. 그날 처음 얘기를 나눈 남자가 결혼하자고 했다. 사랑하는 사람이랑 해야지 무슨 처음 보는 사이에 결혼? 했더니 결혼해서 사랑하잔다. 그러더니 쓰윽 내 몸을 만진다. 당장 그 단체 활동가에게 얘기했다. 단둘이 있던 자리에서 벌어진 일이라 목격자가 없었다. 남자는 농담했을 뿐이며 장난친 거지 성희롱은 아니라고 우겼다. 그 남자는 나중에 온 다른 여자에게도 똑같은 짓을 저질렀다.

32살:버스 정류장 앞. 차한 대가 멈춰선다. 창문을 내리며 길을 묻는다. 2~30대 젊은 남자다. 다가가 도와주려고 했을 때 나는 봤다. 남자는 상체에만 옷을 걸쳤다. 내가 놀라서 소리를 지르자 남자는 쌩~ 도망갔다. 112에 신고했더니 경찰이 출동해서보니 아무도 없단다. 다음에도 그런 일 생기면 신고하란다.

....

34살:사무실 배수구가 막혀 수리기사를 불렀다. 일을 하면서 자꾸 나이를 묻길래 먹을만큼 먹었다고 했더니 '그럼 알 거 다 알겠네' 한다. 그러면서 퇴근하고 밖에서 술 한 잔 하잔다.
.......
38살: 밤 10시가 되기 전 택시안. 기사가 계속 말을 건다. 가는 동안 즐겁게 가잔다. 무슨 말인가 싶다가 안전운전 부탁한다 했더니 아가씨가 어려서 말귀를 못알아 먹는가배 한다. 마침 신호등이 바뀌어 택시는 멈춰섰고 나는 도로 한복판에서 택시문을 열고 내리며 관심없다고 고함을 질렀다. 휴대폰 배터리가 없어 택시번호도 찍지 못해서 신고도 못했다. 그날 이후 가장 안전하다고 소문난 택시업체만 골라탄다.
......
한동안 집 밖 화장실을 잘 가지 않았다. 화장실 몰카도, 남녀공용화장실도 경계의 대상이다.
남녀공용 화장실에 들어갔을 때 남자가 들어오면 그 남자가 나갈 때까지 문을 잠그고 꼼짝도 하지 않는다. 간혹 아무 소리 없이 한참을 나가지 않는 남자도 있다. 그럴 때는 휴대폰으로 동행에게 화징실로 와달라고 얘기한 적도 있다.

대체로 아무 일도 없는 듯이 지내지만 가끔씩은 두렵고 무섭다. 한국사회에서 여성은 밤길 뿐만 아니라 대낮 화장실도, 버스정류장도, 택시도, 학교도, 사회생활도 하나 만만한 게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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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16-05-25 13: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남자들은 더이상 여자들에게 `니가 처신을 잘 하고 다녀야지`, `니가 옷을 얌전하게 입고 다녀야지`, `니가 밤늦게 돌아다니지 말아야지` 등의 말들을 해서는 안된다고 생각합니다. 처음부터 그걸 여자들에게 말해야하는 게 아니었어요. 잘못돼도 한참 잘못됐죠.

오늘도 우리는 살아남았네요, rosa 님.

rosa 2016-05-25 14:47   좋아요 0 | URL
오늘도 우리는 살아남았지만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아요. 여성이든, 노인이든, 어린이든, 장애자든, 이성애자든, 동성애자든 누구여도 안전한 사회가 되어야 하지 않을까요?

이상하게도 한국사회는 피해자를 비난하거나 피해자에게 원인을 찾으려는지 모르겠어요.
앞으로도 가방녀, 화장실녀, 몰카녀 같이 여성 피해자를 비하하는 표현들이 사라질 거라 생각하지도 않아요.
그래도 오늘 살아남은 우리가 계속 얘기하고 문제를 문제라 얘기해야겠지요. 아... 답답합니다.^^;

2016-05-25 14:3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6-05-25 15:53   URL
비밀 댓글입니다.
 

오랜만에 내가 투표한 후보가 당선됐다.
대통령선거부터 구의원 선거까지 무수한 선거를 치르는 동안 내가 투표한 후보의 당선은 겨우 세번뿐이었다. 그래서 이번 결과를 보며 엄마와 기쁨을 나누었다.

부산에 파란색 더불어민주당 후보 다섯 명이 당선된 것이 기쁘다. 매번 새빨간 색으로 도배되던 지역이 얼룩덜룩해지니 참 보기 좋다.

사실 이번 더민주의 약진은 이미 19대 총선에서 예견된 바 있다. 대부분의 야권 후보들이 40%가 넘는 득표를 하고 낙선했기에.. 그러나 이와 같은 결과는 예상하지 못했다.

선심성 정책 말고 진짜 이 나라의 현재와 미래를 보듬는 입법활동을 해나가길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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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끼나와에 갔을 때, 한 건물이 통째로 수공예품만 파는 매장을 방문했었다.

원단 구경만 하느라 몇 시간을 보낸 곳. 

거기서 만난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원단 커트지.

커트지 1장에는 서로 다른 앨리스 그림 6장이 있는데

이 가방에는 영어 원서가 바탕에 깔린 특이한 그림을 골랐다. 

옆과 윗부분은 린넨 원단과 매치하고 바닥은 인조가죽.

뒷면은 검붉은 색 린넨 프린트. 


처음 만들어본 가방 디자인이라 몇 번을 뜯고 새로 했는지..

구상했던 것보다 훨씬 심플하게 겨우 완성.


열심히 만들긴 했지만... 마음에 드실지 모르겠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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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3-21 18:0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6-03-21 18:12   URL
비밀 댓글입니다.
 

12년 11개월, 한 단체에서 몸담고 일했다.

아무도 하지 않았던 분야를 새로 고민하고 만들었고, 나름의 성과도 있었다.

그리고 마지막 순간을 힘겹게 정리하고 있다.


한순간도 마음을 담아 최선을 다하지 않았던 적이 없었다고 생각한다.

몸과 마음을 다했다. 그래서 큰 후회가 없다.


출장 다녀온 후 탈이 나서 서류정리도 사무실 정리도 책상정리도 다하지 못했다.

쉬엄쉬엄 남들 없는 날, 남들 없는 시간에 와서 정리한다.

아직은 얼굴을 마주하는 것이 불편하다.

쿨한 이별은 없는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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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3-13 21:25   URL
비밀 댓글입니다.
 

<가난한 사람을 위한 은행가>라는 칭송을 받던 유누스 박사에 대한 불편한 얘기를 처음 전해들었던 것은 그 나라 출신 이주노동자 S를 통해서였다. S에 의하면, 최초 유누스 박사의 선행은 아름답다 할 수 있을지라도 이후의 그의 행보는 전혀 그렇지 않았다고 했다. 그가 노벨 평화상을 수상한 후 세금을 한 푼도 내지 않으려고 그가 알고 있는 전세계의 유력 정치인들에게 도움을 요청했다는 얘기도 들려주었다. 그게 정말 사실인지는 모르겠다. 세금을 냈는지, 내지 않았는지.. 하여튼 가난한 사람들에게 소액대출을 하면서 유명해진 그 은행은 방글라데시에서 거대한 사업체가 된 것은 분명해 보였다. 


2009년, 나는 S와 함께 방글라데시를 방문했다.

그리고 수도 다카에 있는 그라민은행 본점을 찾아갔다. (가난한 사람들의 거리를 지나 마침내 도달했던 건물은 얼마나 삐까뻔쩍하던지.. 1층 로비에 꾸며진 유누스 박사의 노벨평화상 소개는 또 얼마나 거창하던지..)

그곳에서 담당자들과 얘기를 나누면서 찜찜한 기분이 들었던 것을 기억한다. 대개의 NGO들은 단체를 방문하는 해외 NGO활동가에게 돈을 요구하지 않는다. 최소한 나의 경험은 그러했다. 우리 단체를 방문했던 활동가들에게 돈을 요구했던 적이 없고, 마찬가지로 외국의 단체를 방문했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각자의 활동에 대한 존중, 존경의 의미로 기꺼이 시간을 내어 안내하고 도움을 준다. 그들을 위해 방문할 곳들을 섭외하고 직접 안내하고 심지어 통역을 해주더라도 그 활동에 대한 보상을 요구하거나 받아본 적이 없다. 간혹 단체의 활동에 감동한 이들이 후원금을 주거나 단체 기념품을 선물로 준 적이 있고, 나 또한 해당 단체의 활동에 보탬이 되기를 바라며 약간의 후원금과 선물을 전달한 기억만 있다.

그래서 그라민뱅크의 담당자가 A활동, B활동, C활동을 참가할 때 각각 00~000$를 내야 한다고 할 때 당황했었다. 나 때문에 일부러 조직하는 활동이 아니라 그들의 평소 활동이 이루어지는 현장을 방문하는 것인데 교통비 등의 실비가 아니라 고정적으로 정해져 있는 참가비가 있다는 것이 의아했다. 마치 놀이동산을 방문할 때 입장료를 내는 것처럼 느껴졌다.

돈을 내더라도 가보고 싶다 했지만 단체의 일정상 불가능해졌다. 그들끼리 설왕설래할 때, 나는 잠시 사무실 밖에서 기다려야 했는데 그때 그녀들의 말소리가 들렸다. 외국에서 온 두 명의 여성들이 "또 저들이 거짓말을 하는군" 하는 것이다. 그 여성들은 당시 그라민뱅크에서 인턴쉽 활동을 하고 있었다. 무슨 영문인지를 물었지만 자세히 대답해 주지 않았다. 


우연히 이 책이 나온 걸 봤다. 시간 날 때, 천천히 읽어봐야 겠다. 조만간 한가해질 것 같으니 책 읽을 시간도 덩달아 생길 듯하다. 모쪼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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