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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떠났던 날은 5월 29일이었다.

일요일 아침, 그와 만나기로 약속을 한 터라 서둘러 머리를 감고 옷매무새를 가다듬고 있을 때였다. 함께 만나기로 했던 대표님의 전화, 그의 부음을 듣고 다시 옷을 갈아입었다.

장례식장으로 달려간 우리는 텅 빈 빈소에서 넋을 잃고 앉아계시던 아버님을 만났다.
자신의 품에서 숨진 아들 얘기를 들려주는 아버님 앞에서 흐르는 눈물을 훔치고 입술을 깨물었다.
평생 아팠던 자신으로 인해 가족들이 겪어야 했던 경제적 어려움을 힘들어했던 고인을 생각하며 그를 만나 함께 활동했던 이들과 장례위원회를 구성하였고, 그와 인연을 맺은 분들에게 십시일반 그의 장례를 함께 치르자고 부탁했다.
그저 한번 만났을 뿐인 짧은 인연을 소중하게 간직한 한 활동가는 장례비라도 보탤 수 있어 다행이라고 했지만, 자신이 속한 단체의 활동가들과 이사들 이름까지 줄줄이 올렸던 한 유명인사는 장례가 끝나고 난 후에도 장례위원 분담금을 납부하지 않았다. 독촉전화를 했을 때, 그는 그가 낸 조의금으로 퉁치자는 기가 막힌 소리를 했다. 끝까지 그는 장례위원 분담금을 내지 않았다. 


가끔씩 그가 떠났던 날이, 빈소의 풍경이, 출상하던 날 아침이 떠오른다.

빈소에서 눈물을 짓다가 야유회 온 모양 자갈치로 회먹으러 가던 어떤 단체 회원들-부산에 왔으니 자갈치에 가서 회는 꼭 먹어야 한다며, 빈소에서 술 취해 어설픈 부산 사투리를 흉내내며 깔깔거리던- 미국 대학원 진학을 위해 서울의 한 단체에서 인턴을 하고 있다던 사람도 있었다. 자신을 이용했던 사람들이라며 다시는 보고 싶지도, 함께 뭔가를 도모하고 싶지도 않다고 했던 사람들도 찾아와 조문하고 언론앞에서 그와의 막역한 친분 운운했었다. 

그의 빈소를 지키다 너무 속이 상해서 토성동 길바닥에 주저앉아 서럽게 울었다.


그가 떠나고 10년. 어제 10주기 추모제가 열렸다.

그리고 그를 기억하며 '김형률을 생각하는 사람들' 이라는 작은 모임을 만들었던 몇 몇 사람들은 수년간 조금씩 모았던 회비로 추모식수와 표지석을 세웠다. 그를 잊지 않고 먼 길 오신 분들에게 따뜻한 밥 한끼를, 그를 대신해 대접했다. 그저 이렇게라도 그를 위해, 그의 부모님을 위해 하고 싶었다.


가끔씩 그가 생각나는 날이면 들여다 볼 사진 한 장도 생겼다.

'삶은 계속되어야 한다'고 외치던 김형률, 그가 소망하던 특별법은 언제쯤이면 제정될 수 있을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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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이야 2015-05-24 12: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추모 식수 돼있는 곳이 어디인지요?

rosa 2015-05-24 12:11   좋아요 1 | URL
민주공원 장승터에 있어요. 중극장으로 올라가는 긴 계단 옆 오른쪽입니다.

물끄러미 2015-05-24 13: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잊고 있었던 것에 대해서 일깨워 주셔서 감사합니다

rosa 2015-05-24 16:08   좋아요 0 | URL
부끄럽게도 저 또한 별로 한 일 없이 시간을 보낸 듯 합니다. ㅡㅡ;;
 

4월 25일 네팔에서 첫번째 지진이 일어난 후, 지금까지 쉴 틈 없이 움직이고 있는 이금연 활동가로부터 다음과 같은 메시지를 받았다. 믿고 신뢰하는 것도 좋지만, 제대로 지원이 이루어지는지에 대해 파악하고 잘 진행되는지를 지켜보는 것도 우리의 역할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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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팔지진피해자 지원을 위한 모금에 참여하시는분들! 

후원하시는 개인이나 단체에 이런걸 꼭 확인하시는 것이 어떨런지요?

1. 지금 즉각 행동을 취하고 있는지?
2. 수시로 진행상황을 공유하고있는지?
3. 정부의 긴급구호위원회로부터 구호품 배포관련 정보를 정확히 받고 일하는지?
4. 배포지역에 어떤단체나 기관이 다녀갔는지?
5. 누구와 같이 일 하고 있는지?

적어도 이런것중 세가지 이상에 소통이 충족되지 않으면 완전 개인대 개인으로
돕는것이 좋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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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를 만나고 알게 되고 함께 활동했던 시간은 만 2년 2개월 정도였다. 

전포동 초라한 건물, 4층 화장실 옆 자투리 공간에 작은 책상 2개를 놓고 활동을 시작했던, 부팅하는데만 몇 분이 걸리던 낡은 컴퓨터가 사무실의 전재산인, 그러나 뚱뚱한 꿈을 품고 있었던 작은 NGO. 그 곳을 찾아온 거의 첫번째 손님이 김형률씨였다.


따스한 봄날이었다. 그러나 그는 목에는 손수건을 두르고 점퍼를 입고 무거운 가방을 매고 나타났다. 이제 걸음마를 시작하는 NGO에 그는 요구했었다. 한국원폭2세 환우 문제에 관심을 갖고 도와달라고. 그를 만나고 나는 히로시마를, 나가사키를 다른 시각으로 바라보게 되었다.

그를 만나고 나서야 피해자들 내부의 복잡다단한 사정과 내부의 차별과 억압에 대해서 분노하게 되었다.

그의 일에 도움이 되는 일이라면 무엇이든 하겠다고 했지만, 그는 쉽게 그의 일을 나와 나누려 들지 않았다. 수고스럽고 힘들어도 그는 늘 자신의 손으로 직접 복사물을 챙겼고, 반복됐던 입원으로 늘 병원비가 부담이었지만 문제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의 돈은 받지 않았다.


그는 정말 그의 목숨을 걸고 싸웠다.

단 2명의 회원뿐인 조직인 '한국원폭2세환우회'를 인정할 수 없다던, 당시 보건복지부 담당과장의 비아냥에 그 자신이 환자이면서 직접 다른 환자들을 찾아다녔다.

그리고 그가 급작스럽게 서거했을 무렵, 한국원폭2세환우회에는 60명이 넘는 환우들이 가입한 상태였다. 


그는 한 개인이 할 수 있는 최대치를 했고, 자신의 목숨과 바꿔 한국사회가 잊고 살았던 한국원폭피해자들, 그 2세, 3세의 문제를 정면으로 제기했다.

무참히 그를 보내고 남은 이들은 그의 유지를 이어가기 위해 이런저런 활동들을 해오고 있다.


다시 5월, 그를 보내고 10년이 흘렀다.

그가 목숨을 걸고 만들고자 했던 특별법은 아직도 제정되지 못했다.

그래도 그의 말을, 뜻을 그와 함께 활동했던 사람들과 나누고자 조촐한 추모 문화제와 10주기 추모제(추모 식수)를 준비하였다. 소박하지만 의미있는 자리로 만들어 나갈 수 있기를 바란다.


그의 10주기를 맞아 초창기 '한국원폭2세환우회를 지원하는 모임'을 만들고 활동해왔던 아오야기 준이치 코리아문고 대표가 집필한 '나는 반핵인권에 목숨을 걸었다'가 출판되었다. 그가 기억하는 김형률은 어떤 사람이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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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5-19 12:25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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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5-19 13:26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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