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밥값 창비시선 322
정호승 지음 / 창비 / 201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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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 정호승의 시작(詩作)과 문학적 성취는 화려하다. 그는 1972년, 1973 두해에 걸쳐  신춘문예에 시가 당선되었고 1982년, 단편소설로도 신춘문예에 이름을 알렸다. 각종 문학상을 여러 번 수상한 이력도 눈에 띈다. 유명 일간 신문사가 주최하는 신춘문예에 작품이 당선된다는 것은 대단히 어려운 일인데, 3번이나 그것도 시와 소설 양대 부문으로 신춘문예상을 움켜진 그의 문학적 재능은 정말 타고난 것이 아니면 설명할 길이 없을 것 같다. 

 

 70~80년대, 대학가를 중심으로 그의 시는 주로 젊은층에게 많은 인기를 얻은 모양이다.  나는 70, 80년대에 어린아이에 불과했으므로 그의 시를 단 한편도 접한 적이 없지만 정호승이라는 시인의 이름만은 내게도 꽤 친숙한 이름이었다. 지난 2010년에 펴낸 그의 열 번째 시집 <밥 값>을 읽으면서 그가 가진 시인으로서의 명성을 처음으로 확인했다. 앞으로 이 시인의 예전 시와 앞으로 나올 시는 꾸준히 찾아 읽을 생각이다.

 

 정호승의 시집 <밥 값>에서 평범한 사물인 벽보를 바라보면서 자기 성찰과 시인 자신이 진정으로 해야 할 일을 반추해보는 <어느 벽보 앞에서>라는 시가 가슴에 와 닿는다.

 

 어느 벽보판 앞 / 현상수배범 전단지 사진 속에
 내 얼굴이 있었다
 안경을 끼고 입꼬리가 축 처진 게
 영락없이 내 얼굴이었다
 내가 무슨 대죄를 지어 / 나도 모르게 수배되고 있는지 몰라
 벽보판 앞을 평생을 서성이다가
 마침내 알았다
 당신을 사랑하지 않은 죄 / 당신을 사랑하지 않고/ 늙어버린 죄

 

                                                        -<어느 벽보 앞에서>-

 

 이 시에서 시인은 벽에 붙은 흔한 현상수배범 전단지에서 자신의 얼굴을 발견한다. 그 전
단지에 현실적으로 자신의 얼굴이 있을 수 없지만 분명 전단지에서 안경을 끼고 입 꼬리가 처진 자신의 얼굴을 발견함으로써 이 시의 시적 긴장은 시작된다.

 

 이 긴장감은 자신이 왜 그 전단지에 있어야 하는지 반추해보는 성찰로 이어진다. 그러나 이 성찰은 쉽지 않다. 벽보판 앞에서 평생을 서성여야 할 정도로 많은 세월과 인내력이 필요한 고통의 성찰이다. 그리고 마침내 성찰의 결과는 시인 자신과 독자에게 통렬한 아픔을 선사한다.

 

“마침내 알았다“ 이후에 펼쳐지는 반성의 결과는 독자에게 감히 상상할 수 없는 반전을 제공한다. 그 반전 앞에 독자는 숙연해지지 않을 수 없다. 마치 독자 자신이 시적 화자와 같이 ”당신을 사랑하지 않은 죄, 당신을 사랑하지 않고 늙어버린 죄“를 지은 공범처럼 느껴진다. ”사랑하지 않고 늙어버려 시간을 허비한 죄”를 지은 시적화자의 통렬하고 뼈아픈 반성이 남의 일처럼 느껴지지 않게 하는 시인의 목소리를 발견할 수 있다면 이 시의 효용은 충분하다. 과연 누가 이 시의 마지막 구절을 쉽게 잊어버릴 수 있을까?


나는 지금 무슨 죄를 짓고 있는가? 지금 사랑하지 않는 자, 모두 유죄!


거울이라도 들여다 볼 일이다. 그리고 주변의 가장 소중한 사람들을 생각해본다.

 

 정호승의 시는 이렇게 우리가 평소에 무심히 지나치는 일상적 사물과 언어들의 일상성을 부정하거나 파괴, 혹은 깊이 성찰해서 사람들의 관습에 충격을 가한다. 일상성의 관습에 충격을 당한 사람들에게 시인은 눈에 보이는 것만이 전부가 아님을 서정적으로 증명한다.

 그가 증명하려는 것들은 <밥값>이라는 시에서 구체적으로 드러난다.

 

지금이라도 밥값을 하러 지옥에 가면
비로소 제가 인간이 될 수 있을 겁니다  
                                    

                                  <밥 값>부분

 

 시인이 말하는 밥값은 지옥에 가서라도 해야 하는 것이다. 그게 바로 시인이 보여주고 증명하려는 인간의 길일지도 모른다. 시인이 말하는 밥값이 어떤 것이지는 이 시집의 곳곳에서 발견할 수 있다. 그 밥값을 보여주는 시들은 한결같이 반짝반짝 빛이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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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쓰기의 최소원칙
도정일 외 지음 / 룩스문디(Lux Mundi) / 200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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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쓰기의 스킬을 알려주기보다는 우리시대에 있어 글쓰기란 과연 무엇이며  어떤 글을 어떻게 쓸 것인가에 대한 진지한 고민과 생각, 철학을 14명의 사회 각계전문가들에게서 들어보는 책이다.

 

 물론 글쓰기의 기술과 스킬을 알려주는 내용도 빠지지 않지만 이 책이 지향하는 것은 글쓰기에 대한 담론의 형성이다. 수천 년 간 글을 쓴다는 것은 한자와 한문에 능통한 지배층과 지식인의 전유물이었다. 조선시대에 들어 훈민정음이 발명되었지만 글쓰기 행위의 주체가 일반 민중과 대중이 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이제 높았던 종이와 먹의 위세는 사라져 문맹률은 거의 제로가 되었고 스마트 폰과 인터넷SNS로 소통하는 시대에 있어 글쓰기의 주체는 모든 사람들로 확대되었다. 또 글 쓰는 일반민중이 바로 우리 사회를 움직이는 주체가 된지 오래다. 그래서 옛날에는 글 그 자체가 귀하고 소중했지만 요즘엔 너무 많은 글이 넘쳐나는데다가 인문학적, 이성적 성찰과 인간에 대한 존중이 결여된  글이 너무 많아 도리어 좋은 글 한편 찾아내는 것이 희귀한 일이 되어 버렸다. 특히 인터넷매체나 웹상에 올라오는 수많은 글들의 대부분은 한글 맞춤법조차 준수하지 못한 비문으로 도배되어 있는 것이 현실이다.


 이 책이 소개하는 글쓰기의 최소원칙들은 오늘날 모든 대중들이 거의 강압적으로(우리는 어떤 식으로든 글을 쓰지 않고는 사회생활을 영위해 나갈 수 없다) 직면하고 있는 글쓰기의 현실적 필요 속에서 글쓰기의 방향과 방법을 몰라 고민하는 사람들에게 좋은 길잡이가 된다.

 

 평론가 도정일 씨는 책읽기와 글쓰기의 교육이 성숙한 시민사회의 뿌리가 된다고 하면서 우리도 하루빨리 제대로 된 글쓰기 교육을 시작해야 된다고 주장한다. 작가 김 훈은 소설, 에세이, 칼럼의 글쓰기 형태의 차이를 설명하는데 김훈 특유의 편견?을 읽는 재미도 만만치 않다.

 

 처세, 경영, 주식, 경제, 자기계발 서적이 난무하는 오늘날의 출판시장과 독서현실에서 고전읽기의 중요성을 재차 강조하는 영산대 배병삼 교수의 ‘고전, 현재형으로 끊임없이 다시 써야 할 오래된 미래’ 라는 글은 혼자 읽기엔 아깝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좋은 글이다. 고전읽기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이문재 교수의 ‘정확해야 아름다울 수 있다’ 라는 글은 글쓰기의 실제적 스킬과 좋은 글을 쓰기 위한 훈련을 소개하고 있다는 점에서 흥미롭고 실용적이다. 이 교수는 정확한 문장이 생명인 저널리즘적 글쓰기의 미덕을 칭찬한다. 그리고 개성적 글쓰기를 위한 기초체력 다지기는 바로 정확한 문장의 구사임을 주장하면서 정확하고 개성적인 글쓰기를 위한 기초체력을 다지는 자신만의 체험적 방법을 소개한다. 나도 멋과 기교를 부린 글보다는 한글 맞춤법을 준수한 정확한 문장으로 서술된 차분하고 간결하며 논리적인 글이 좋다. 문예 응모작을 심사하는 심사위원들은 작품을 심사할 때 한글 맞춤법을 지키지 않은 비문으로 된 작품을 먼저 골라낸다고 한다. 비문작품을 골라내고 나면 남는 작품이 얼마 되지 않는다고 하니 정확한 문장쓰기가 얼마나 중요한지 알 수 있다. 
 
 이문재 교수는 먼저 정확한 문장쓰기 훈련의 일환으로 좋은 작가들의 작품을 필사하라고 한다. 정확한 문장을 구사하는 몇 몇 좋은 작가들이 떠오른다. 먼저 문학 평론가 도정일 씨의 글은 잘 짜여진 톱니바퀴가 맞물려 돌아가는 듯한 긴장감과 질서 속에서 생각의 정리가 자연스럽게 이루어지는데 그는 정말 글 하나만큼은 미끈하게 잘 쓰는 것 같다.


 계간잡지 녹색평론의 김종철 씨의 글은 평이하면서도 호소력이 있는 문장이라 자주 찾아 읽는 편이다. 평론가 겸 작가인 고종석씨의 글은 매우 논리적이고 읽을수록 감칠맛 나는 문장을 구사한다. 작가 김훈의 글은 주어와 술어만으로 된 문장이 대부분이고 대나무를 칼로 벤 듯한 날카로움 속에 도도히 흐르는 삶의 서사를 적확하게 오려내고 추수하는 듯한 느낌이 드는데 김훈의 글을 처음 읽는 사람 대부분은 이런 그의 글을 숨 막힐 정도로 답답하게 여기지만 결국 그의 글이 풍기는 묘한 매력에 빠지지 않을 사람은 드물 것이다. 김 훈의 문장을 좋아하는 사람은 많지만 그의 글을 흉내 내기는 쉽지 않다. 김 훈의 에세이를 구성하는 문장하나 하나에는 이 십년이 넘게 저널리스트로 살아온 기자로서의 관록과 삶에 대한 날카로운 관찰, 그리고 인간적 성찰이 깊게 배어들어 우러나오고 있고 이런 점은 아무나 흉내 낼 수 없기 때문이다. 글쓰기 실력을 향상시키고 싶은 사람이라면 자신이 좋아하는 작가들의 문장들을 종이에 정성껏 필사해보면 큰 성과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이외에도 개성적 글쓰기를 위한 기초체력 다지기 방법으로 자신이 쓰는 글에서 나쁜 버릇을 찾아 낼 것, 항상 새로움을 찾아 볼 것, 사물과 일을 자세히 관찰할 것을 소개하고 있다. 특히 좋은 아이디어가 떠올랐을 때는 주저하지 말고 메모하는 습관을 들이라고 하면서 메모의 유용함도 강조한다. 요즘 나도 좋은 생각이나 문구가 떠오르면 열심히 메모하는 습관을 가지게 되었는데 내 기억력을 믿지 못하기 때문이다. 좋은 글은 머리가 아닌 메모지에서 나온다는 이문재 교수의 조언은 매우 의미심장하고 실용적이다. 메모지가 바로 상상력의 발전소이다.

 이문재 교수는 개성적인 글쓰기를 위한 기초체력다지기에 이어 세부지침도 친절하게 알려준다. 먼저 자신의 이야기부터 써볼 것, 같은 내용과 같은 표현을 반복하지 말 것, 접속사를 쓰지 말 것, 문장을 쓸 때 병치를 조심할 것 같은 아주 구체적인 지침을 제시한다.
 좋은 글을 쓰고 싶은 사람이라면 이문재 교수의 글쓰기 비법하나만 제대로 실행해도 충분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마지막으로 변호사 차병직씨의 ‘글쓰기 작업으로 구성되는 법의 세계’ 라는 글도 읽을 만하다. 법의 세계는 법을 언어로 만들고 다시 언어로 해석해서 그 결과를 다시 언어로 표현한다. 결국 법이라는 것도 언어와 글쓰기 행위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이야기다. 법의 세계에서는 읽고, 생각하고, 그 결과를 써내는 작업으로 법의 의미를 창출하고, 또 그것을 적용해 이상적 질서에 가깝게 이끌어가는 일이 계속되는데 법의 세계 그 자체가 이미 글쓰기 작업으로 구성되는 세계인 셈이다.

 

 특히 법원의 판결문은 승자보다 패자가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하고 패자들 설득할 수 있어야 하고 이것이 가능해져야 법 자체 또는 사법제도 전반에 대한 국민적 신뢰를 회복할 수 있다는 차병직씨의 의견에 충분히 공감하고 동의한다.
 법조계에 종사하시는 분들은 한자어 표현들로 도배된 이해하기 어려운 판결문이 아닌 패자와 사회를 설득시킬 수 있는 글쓰기를 시도했으면 좋겠다. 헌법재판소가 공개하는 판결문을 들여다보면 주어와 술어사이가 너무 길어 질리는 문장이 보이고 박근혜대통령도 앞뒤가 맞지 않아 구글번역기로 돌린듯한 알아들을 수 없는 문체를 구사한다. 대통령의 그런 문장은 따라하기도 어렵다.  아래 박근혜대통령이 구사하는 문장이다. 우리가 모르는 4차원의 세계를 향해 발언하시는 듯..

 

 글쓰기에 있어 최소원칙이 있다면 최대의 원칙은 무엇일까? 아마 글쓰기에서 최대 원칙은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글쓰기의 외연은 무궁하게 확장될 수 있기 때문이다. 정보화 사회에서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최소한의 원칙도 없는 글들의 홍수 속에서 허우적거리면서 정보를 소비하는데 집중한다. 정보를 창조, 생산하는 자가 되고 싶다면 적어도 글쓰기의 최소원칙은 최소한으로 갖추어야 할 미덕이 아닐까하는 생각을 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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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단
알레산드로 바리코 지음, 김현철 옮김 / 새물결 / 2006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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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세기 중반 유럽의 어느 평온한 마을에서 비단의 원료가 되는 누에알을  사다 파는 남자 에르베 종쿠르. 그리고 그의 아름답고 사랑스러운 아내  엘렌. 둘 사이에는 아이가 없었다.

 

 어느 날, 유럽에 누에 전염병이 돌아 에르베 종쿠르는 미지의 땅 일본으로 누에알을 구하러 떠난다. 에르베 종쿠르가 일본에서 구해 온 것은 누에알뿐만이 아니었다. 은거하고 있던 영주 하라 케이와의 만남이 그것이다. 아니 정확히 말해 하라 케이의 곁에 있던 미지의 여인과의 만남이었다.

 

  그녀는 지방세도가 하라 케이의 애첩이었던 것이다. 에르베 종쿠르와 이름 모를 그녀와의 첫 만남부터 예사롭지 않다. 그녀는 에르베 종쿠르를 처음 본 순간부터 범상치 않은 미묘한 몸짓을 펼쳐 보인다. 에르베 종쿠르가 누에알을 구하러 유럽대륙과 러시아 대륙을 가로 질러 두 번째로 일본에 도착했을 때, 그녀는 에르베 종쿠르에게 작은 쪽지하나를 전한다. 에르베 종쿠르는 그녀가 건네준 작은 쪽지를 누에알만큼 소중하게 간직해서 돌아온다.


 한편, 에르베 종쿠르의 아내는 엘렌은 젊고 아름다운 여인이다. 그녀는 남편인 에르베 종쿠르가 머나먼 미지의 땅 일본까지 가서 누에알을 구하러 떠날 때 마다 남편의 안위를 걱정한다. 남편은 가을에 떠나 늦봄이 되어서야 돌아왔다. 기나긴 기다림의 시간을 인내하는 아내 엘렌. 그러나 남편인 에르베 종쿠르의 손에는 미지의 여인이 건네준 일본어로 씌어진 쪽지가 들려있고...


 에르베 종쿠르는 아내 엘렌을 사랑했다. 이 소설에서 에르베 종쿠르의 외도는 결코 추하게 보이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가 일본여행에서 거부할 수 없는 지독한 사랑의 밀어를 얻어왔기 때문이다. 그가 얻어온 사랑의 밀어에 취하지 않을 사람이, 아니 취하지 않을 남자가 과연 몇이나 될까? 부끄러운 고백이지만 솔직히 말하겠다. 에르베 종쿠르가 얻어온 그 쪽지에 씌어진 그 한마디가 바로 남자들의 로망이었던 것이다.


“돌아오시지 않으면 죽어버릴 거예요”


하라케이의 여인이 쪽지에 남긴 이 한마디에 에르베 종쿠르는 또다시 일본행을 택하게 된다. 사랑하는 아내 엘렌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에르베 종쿠르는 그 쪽지의 밀어에 취해버린 것이다. 그 쪽지에 씌어진 것은 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하라케이의 미지의 여인의 진심은 무엇일까?

 

 마침 유럽에서는 파스퇴르가 누에 전염병을 해결할 연구를 거의 마무리하고 있는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에르베 종쿠르는 또 다시 그 여인을 보기 위해 내전으로 치닫은 혼란하고 위험한 일본으로 떠난다. 이제 에르베 종쿠르는 하라케이의 그 여인을 만날 수 없다. 하라케이가 에르베 종쿠르와 그 여인과의 관계를 알아차렸기 때문이다. 에르베 종쿠르는 목숨만을 겨우 부지한 채 천신만고 끝에 다시 유럽으로 돌아온다. 그리고 그가 가져온 누에알은 모두 죽어 있었다.

 

 그리고 어느 날, 일본의 그녀로부터 장문의 편지가 도착한다. 이 편지를 펼치는 순간부터 감히 꿈에도 상상치 못한 반전이 일어나는데...


 결국 이 소설은 우아한 에로티시즘으로 묘사된 지독히 슬픈 사랑이야기였던 셈이다. 생각지도 못한 반전은 에르베 종쿠르뿐만 아니라 이 세상 모든 남자들의 심장을 아프게 찌른다.

 

남자들의 로망은 그저 어리석고 헛되고 헛된 것임을!

 

그럼에도 불구하고....


“돌아오시지 않으면 죽어버릴 거예요” 라는 쪽지는......... 여전히, 무척이나.... 관능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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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가 되고 살이 되는 500권, 피도 살도 안되는 100권
다치바나 다카시 지음, 박성관 옮김 / 청어람미디어 / 200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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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다치바나 다카시의 <피가 되고 살이 되는 500권, 피도 살도 안되는 100권>

 

 책을 읽기 위해 직장을 그만두었다는 무모한 용기를 가진 이  남자에 대한 호기심이 생겼다. 이 책 <피가 되고 살이 되는 500권, 피도 살도 안 되는 100권>의 1부에서 저자는 자신이 책을 더 읽기 위해 그 유명한 일본 최대의 잡지사 문예춘추를  그만둘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설명하고 있다. 그는 한마디로   말해서 “책을 더 읽고 싶다” 는 것뿐 다른 이유는 없었다고  한다. 대학을 졸업하고 곧바로 직업을 가진 저자는 마음껏 책을 읽던 학생시절의 생활환경으로부터 ‘책을 읽고만 있을 수는 없는’생활환경으로 갑작스럽게 떼밀려 버렸을 때의 정신적 기아감을 견딜 수 없었다는 것이다.
 
  그는 안정된 수입과 정년을 보장하는 유망한 잡지사를 그만두고 닥치는 대로 읽고 쓰는 생활을 이어나간다. 생활비는 영어 실용문 번역을 통해 벌어들이고 가끔 잡지사에 가명으로 논픽션 기사나 글을 투고하여 문필가로서의 길을 걷게 된다. 저자는 이러한 인생편력을 자칭“수수께끼의 공백시대”라 칭하는데 대략 1966년부터 1974년에 걸친 9년간의 시간이다. 이 시기에 저자는 지적인 입 출력비를 최대한 높여 엄청난 지적 자산을 축적한다. 이 시기야말로 저자는 진정한 의미에서의 피가 되고 살이 되는 독서가 이루어진 시기라 고백한다. 산더미처럼 쌓인 책을 걸신들린 듯 읽어대고 친구와 토론하고 영화와 미술작품에 탐닉했으며 자유시간의 대부분을 여행하는데 썼다고 한다.

 

 

  50세가 넘어서 늘어나는 책을 감당하지 못해 서고 비슷한 빌딩을 지어, 그 측면에 고양이 그림을 그리고 고양이 빌딩이라 칭한다(위 사진 참조). 그런데 이 빌딩도 얼마가지 않아 수 만권(약 3만 5천권)의 책으로 가득 차게 되고 결국 고양이 빌딩 주변에 방을 빌려 책을 보관하게 된다.

 

  다치바나 다카시는 지금까지 거의 100권의 책을 쓴 모양인데 한 가지 흥미로운 것은 책 한권을 쓰기 위해 100권 정도의 책을 읽었다는 저자의 외침이다. 좋은 글을 쓰기 위해 입출력비가 100대 1정도는 되어야 한다는 저자의 주장에 깊이 동감한다. 요즘 스님, 신부, 목사, 교수, 연예인들이 자신의 유명세를 이용한 달콤한 힐링약 주입하는 수준이하의 책들이 많은데 노골적인 상업성으로 무장한 이러한 책들은 겉만 번지르르하고 그 내용은 책값이 아까울정도로 허술하고 부실하다. 한마디로 독자들을 우롱하는 책들이다. 다치바나 다카시가 추구하는 높은 입출력비야말로 독자를 위한 최소한의 예의가 아닐까?

 

 다치바나 다카시는 인간의 지적인 욕망이 바로 살아있음의 증거라고 하면서 만약 그 지적 욕망이 사라진다면 그 사람은 이미 지적으로 죽었다고 해도 좋다는 다소 과격한 표현을 한다. 또 그는 지적인 인간을 영원히 갈증을 해소할 수 없는 숙명에 처한 탄탈로스 같은 존재에 비유하면서 지적 욕구의 무한함 속에 생명의 진정한 본질이 있다고 여기고 있다. 인간의 ‘더 알고 싶은 욕구’는 바로 생명체의 생명활동을 떠받치는 ‘생의 원리’ 그 자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며 이러한 지적인 욕구는 바로 문명세계를 떠받치는 원리이고 이 욕구가 사라지면 인류문명이 멸망하게 된다는 다소 과장 섞인 주장까지 펼치고 있다. 읽고 싶은 책을 읽을 수 없어 회사를 사직한다는 식의 행동은 이러한 생명원리의 입장에서 보자면 당연한 행동이라고 하는 저자의 생각은 다소 낭만적이다.
 

 다치바나 다카시가 책에 파묻힌 그 시절은 일본경제의 황금기였다. 실제로 다치바나의 고백을 보면 그는 먹고 살 문제로 고통을 받은 적이 거의 없었던 것 같다. 지금의 장기불황에 허덕이는 일본이 아닌 것이다. 그는 경제적 호황에 기대어 너무 마음 편히 책을 읽었던 것은 아닐까?. 나는 물론 다치바나를 탓할 생각은 전혀 없다. 그리고 그가 많은 책을 볼 수 있었던 것은 자신의 노력덕분이기도 하다. 그는 돈과 시간이 남아돌아 책에 탐닉한 사람은 결코 아니다.

 

 그가 책에 집중할 수 있었던 가장 큰 이유는 책을 읽고 글만 써서도 살 수 있는 일본사회의 문화 덕택이라 생각한다. 내가 부러운 것은 자신이 좋아하는 일과 먹고 사는 일이 일치되는 것이 용납되고 허용되는 사회였던 것이다. 책을 많이 볼 수 있는 사람은 행복하다. 그러나 우리사회는 아직 일본처럼 성숙한 독서문화가 정착되지 못한 것 같다. 마음 놓고 좋아하는 책만 읽고 있다가는 생존경쟁에서 도태되는 것은 물론이고 정신병자 취급을 받는 덤도 얻게 된다.

 

 그런데 다치바나 다카시의 고양이 빌딩을 보고 있노라면 부러움을 넘어 기괴한 광기마저 느껴진다. 마치 일본 오타쿠 문화의 정점을 보는 듯하다. 지적 욕망이 생명원리와 마찬가지라는 점, 그것이 우리 문명을 떠받치는 힘이라는 사실에는 분명히 동의하지만 다치바나의 책을 읽고 나면 책을 더 많이 봐야겠다는 생각보다는 책을 많이 보는 것이 과연 나의 삶에 무슨 의미가 있을까 하는 회의감은 왜 생기는지 모르겠다.

 

  이 무시무시한 독서광을 만난 것도 좋은 경험이었다. 나는 다치바나 다카시처럼 많은 책을 읽을 물리적 시간도 확보할 수 없고  수 만권의 책을 사 모을 여력도 없지만 그가 딱히 부럽지는 않다. 픽션을 전혀 보지 않는다는 다치바나 다카시는 내게 너무 극단적이다. 나는 내 방식대로 읽어가겠다.

이 책에서 소개하는 피가되고 살이 되는 500권 목록에 좋은 책이 많다.
국내에 번역된 책을 찾아보는 것도 좋은 독서방향이 될 수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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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15-05-30 20:2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도 한때 다치바나처럼 사는 게 꿈이었습니다. ㅎㅎㅎ

파트라슈 2015-05-31 08:57   좋아요 1 | URL
자아실현과 밥벌이가 일치하는 직업은 누구나 꿈꾸는 것이지만 현실에서 그렇게 사는 건 너무 어렵죠. 그렇게 살려면 다치바나 다카시처럼 미친척하고 결단을 내지 않으면 안되니까요^^
 
리스본行 야간열차 문학과지성 시인선 341
황인숙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0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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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이 이미지와 정서를 어떻게 유기적으로 조화시키는가 하는 것은 시를 읽을 때마다 늘 흥미로운 부분이다. 이런 점에서 황인숙 시집 <리스본行 야간열차>에서 보여주는 도시적 이미지와 도시 정서간의 융합은 독자에게 도시적 상상력을 제공한다.


 

  시인은 도시적 이미지를 주로 도시 고양이들로 만들어낸다. <리스본行 야간열차>에서 고양이가 중요한 도시적 이미지로 등장하는 시는 모두 12편이다. 이정도면 도시 고양이 연작시라 할 만하다.


 이 도시의 고양이들은 시인과 객관적인 거리를 유지하는 제3자가 아니라 시인 자신의 눈을 대신한 관찰자로 기능하기도 하고, 삭막한 곳에서 겨우 생명을 유지하는 연민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그러나 황인숙이 그리는 도시고양이들은 도시에 인간 말고도 고양이들의 세계가 있음을 증명하는 존재이다.

 

 도둑 고양이, 길고양이, 골목고양이,
 노숙묘라고도 하지요.
 ‘커다란 고양이와 어린 고양이가
 말라비틀어진 닭 뼈다귀를 두고
 사투를 벌이는 곳에서 삽니다.
 어떤 사람은 침을 뱉고 발로 찹니다.
 시끄럽다, 더럽다, 무섭다 합니다.
 (생각해 보세요, 어느 편이 진짜 그런지)
 굶주린 고양이한테 약 섞은 밥을 줍니다.
 엄마고양이를 쫓아버리고, 갓 태어난 새끼고양이들을
 쥐 잡는 끈끈이로 둘둘 말아 내버리기도 합니다.
  

 

                  ~중략~

 

 잔인하고 무정한 이 거리에서
 구사일생으로 살아가는 고양이들.

 고양이들이 사라진 동네는
 사람의 영혼이 텅 빈 동네입니다.
 이만저만 조용한 게 아니겠지요.
 그러면, 좋을까요?
                                                                            -<고양이를 부탁해> 부분

 

 고양이들은 말라비틀어진 닭 뼈다귀를 놓고 사투를 벌여야 하고 약을 먹이고 쥐 잡는 끈끈이로 자신들을 없애려는 인간들과도 싸워야 한다. 시인은 고양이들이 사는 공간과 인간이 사는 공간의 겹침을 포착해내고 고양이들이 사라진 공간에 사는 사람이 무슨 의미가 있을지 자문해 본다.

 

 귀찮고 성가신 존재가 아니라 도시인들의 영혼 깊숙이 자리 잡은 고양이의 가치에 대해 생각해 보게 한다. 고양이가 없는 도시는 황폐하다. 시인은 사람이 아닌 고양이로부터 황폐한 도시생활에 대한 위안을 얻는다.

 

저 空中空簡의 활용자인 고양이들
고양이의 몸 안에서 뻗치는 기운이
고양이를 위로위로 올려 보내서
광활한 이 영토를 발견하게 했으리라


                  ~중략~


말하자면 기우뚱함에, 그리고 지붕과 지붕 사이의
허공에 너희는 환장을 하지


                  ~중략~


뒤안길도 사라진 이 도시에서
지붕 위의 뒤안길, 말하자면 위안길에
살풋 호흡을 얹어본다.
                                                                                -<지붕 위에서> 부분

 

 고양이들은 인간과 삶의 영역을 공유하기도 하지만 그들의 근원적 삶의 공간은 인간의 몸이 닿지 않는 “저 空中空簡”의 광대한 3차원이다. 이제 도시에는 작고 포근한 인간의 뒤안길은 사라지고 지붕위의 고양이가 다니는 뒤안길만 남았다. 고양이의 뒤안길은 시인에게 우리에게 위안길이 된다. 고양이에 대한 시인의 상상은 단순한 상상이 아니라 우리 도시인들의 위안이자 상상의 원천으로 새롭게 태어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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