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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관에서 우연히 집어든 히가시노 게이고의 소설<나미야 잡화점의 기적>을 시작으로 일본 장르소설을 읽으면서 이번 여름은 제법 시원하게 보냈다. 어렵고 복잡한 책들은 잠시 한켠에 제쳐놓고 소설읽는 재미에 푹빠진 여름이었다. 원래 소설은 잘 읽지 않는 편이었고 장르소설이라 불리는 추리나 스릴러, 공포, 판타지 분야에는 더더욱 흥미가 없었다. 그런데 히가시노 게이고의 <나미야 잡화점의 기적>부터 다카노 아키아즈의<제노사이드>,<13계단>같은 몇 몇 작품을 읽고 나서는 이렇게 재미있고 유익한 소설들이 많았다는 사실에 많이 놀랐다. 특히 다카노 아키아즈의 <제노사이드>는 방대한 전문자료를 토대로 한 지식오락물의 절정 그 자체였다.

 

 사실 일본소설은 무라카미 하루키의 작품외에는 거의 아는 것도 없었고 예전에 미야베 미유키의 <모방범>을 읽다가 질려버린 경험을 한 이후로 일본 추리소설이나 장르소설에 흥미가 사라졌다. 미야베 미유키의 <모방범>은 밑도 끝도 없이 이어지는 곁가지 이야기들에 정신을 차리지 못할 정도였다. 그 소설에 등장하는 수많은 인물들의 자질구레한 일상사를 꾸역꾸역 읽고 있으니 시간낭비도 이런 낭비가 없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양파껍질처럼 끝없는 곁다리 이야기가 이어지는 홍명희의 <임꺽정>처럼 <모방범>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이야기는 소설전체와 어떤 유기적 관계를 맺지도 못하는 모래알 같았다. <모방범>을 읽는 내내 먼저 읽었던 페이지를 수시로 펼쳐서 앞에서 나온 인물들의 이름을 확인해야 하는 번거로움은 몰입도와 소설적 재미를 크게 떨어뜨렸다. 소설읽기가 아닌 사전찾기나 색인찾아보기 작업이 되어버린 <모방범>읽기는 2권째 읽다가 포기해 버렸고 이 경험으로 한동안 일본추리소설은 재미없고 지루해라는 선입견이 생기고 말았다.

 

 일본 장르소설에 대한 흥미가 사라진 다음에도 인터넷 서점을 검색하다보면 자주 튀어나오는 히가시노 게이고나 <나미야 잡화점의 기적>에 대한 호평이 눈에 밟혔다. 그런 호평들 중에는 한국에서 무라카미 하루키를 넘어서는 작가라는 수식을 단 기사들이 그의 작품에 대한 관심을 크게 자극했다. 도서관에 가면 제일먼저 검색하는 책이 <나미야 잡화점의 기적>이었는데 검색할 때마다 대출중인데다가 예약이 몇 명 씩 붙어 있었다. 얼마전 직장 부근에 작은 도서관이 생겨 방문했다가 <나미야 잡화점의 기적>을 입수한 뒤로 일본추리소설의 매력에 푹 빠진 여름이 시작되었다. 올여름 초입부터 9월까지 장르소설 몇 편에 대해 간략한 감상평을 적어 본다.

감상평을 써 놓고 나니 책 광고 같기도 함. 이 감상편은 지극히 개인적인 소견임.

 

1. <나미야 잡화점의 기적>  히가시노 게이고(양윤옥 옮김)

 살아오면서 읽은 최고의 소설 다섯 가지를 꼽으라면 이<나미야 잡화점의 기적>을 넣고 싶다. 읽으면서 눈시울이 뜨거워 붉어지는 카타르시스를 경험하게 한 소설은 아사다 지로의 단편 <철도원>이후

 처음이다.

 오락성과 작품성을 모두 겸비한 최고의 소설이다. 현실과 과거를 잊는 종이편지라는 설정이 독창적인 것은 아니지만(영화 시월애도 이런 설정이었음)요즘 종이편지는 공과금 청구서와 다를 바 없는 시대이고 사람들은 더 이상 종이편지에 사연과 이야기를 적지 않는다.  중고등학교 시절 가슴 두근거리며 쓴 펜팔편지처럼 히가시노 게이고는 나미야 잡화점에서 과거와 현재를 오고가는 편지에 희망과 사랑을 담는 따뜻한 이야기를 엮어 놓았다. 일본 부동산 버블이 붕괴하던 과거와 현대, 그리고 환광원이라는 고아원 출신의 다양한 캐릭터들이 잘 짜여진 톱니바퀴처럼 굴러가는 기가막힌 소설.. 무엇보다 좋았던 건 요즘 한국소설에서 잘 찾아볼 수 없었던 서사의 힘을 다시 느낄 수 있어 좋았다. 재미와 감동  두마리 토끼를 다 잡을 수 있는 최고의 작품. 누구한테나 추천하고 싶다.

 

 

2. <용의자 X의 헌신>  히가시노 게이고

 이 소설도 너무 재미있게 읽었다. 추리소설을 가장한 사랑이야기. 사랑의 형태와 변주의 극단이 어느정도까지 갈 수 있는지 실감할 수 있다. 수학이라는 이데아에 탐닉하다가 모든 희망을 잃고 죽을 날만 기다리던 천재수학자이자 수학교사 이시가미.. 어느 날 그의 이웃집에 이사 온 모녀.. 이시가미의 순수에 대한 의지는 아름답고 맹목적이었다. 그러나 순백은 늘 때가 타고 변색되기 쉽고 맑은 물은 오염되기 쉬운 법.. 소설에서는 사랑하는 이에 대한 이시가미의 헌신은 끝내 좌절되고 만다.. 몇 년 전 한국에서도 이 소설을 원작으로 한국판 용의자x가 제작되었다. 방은진 감독, 류승범, 이요원, 조진웅 주연이었는데 흥행에는 실패한 모양이다. 내가 보기엔 원작의 묘미와 의도를 잘 살린 수작이었는데.. 류승범, 이요원, 조진웅의 연기가 좋았고 방은진 감독의 연출도 좋았다. 이시가미 역을 맡은 류승범의 연기는 원작소설보다 더 잘 된 것 같다. 한국판 용의자x는 원작과 결말이 확연히 다르다. 한국판 용의자x의 헌신은 어떤 결말일지 궁금한 분은 영화를 보시길..

 

 

 

3. <방황하는 칼날>히가시노 게이고

  이 작품도 최근에 한국에서 정재영주연으로 영화화됐다. 한국판 방황하는 칼날은 아직보지 못했다. 딸을 가진 부모님들은 이 소설을 끝까지 읽는게 좀 부담스러울 것 같다. 철없는 고등학생들에게 딸을

 잃은 아버지의 복수이야기..사적 복수를 허용하지 않는 국가체제에서 살고 있는 우리가 범죄의 피해자가 되었을 때 어떻게 해야 할 것인지 생각해 볼 기회를 주는 소설이다. 이 소설도 역시 빠르게 잘

읽힌다.

 

 

 

 

 

 

 

 

4. <다잉 아이>히가시노 게이고

 으스스한 납량물..

 제목 그대로 죽어가는 사람의 눈을 주제로 한 소설이다. 소설 분위기는 예전에 톰 크루즈의 <바닐라 스카이>라는 영화와 비슷한데 교통사고로 기억을 잃어버린 술집 바텐더가 진실을 찾아가는 내용이다. 한번 읽기 시작하면 결말이 궁금해 결국 끝까지 다 읽어야 하는 소설이지만 크게 권하고 싶은 작품은 아니다.

 

 

 

 

 

 

 


 5. <새벽거리에서>히가시노 게이고

 불륜을 소재로 한 작품인데 결말의 반전이 충격적이다. 작가는 불륜에 대한 호오를 말하거나 윤리적 판단을 내리지는 않는다. 마지막 몇 십장까지 통속적인 불륜소설처럼 보이지만 예상하지못한 반전은 독   자들을 멍하게 만든다. 결말은 희극도 비극도 아니고 불륜은 희미한 안개속으로 사라져 버린다. 와타나베 준이치의<실락원>처럼 불륜남녀의 비극적 선택도 없지만 불륜이라는 행위그 자체는 실감나게 묘사된다.

 재미있게 읽은 소설이다. 영화로 제작되도 좋을 스토리다.  

 

 

 

 

 

 

 

6. <13계단>다카노 가즈아키

 

 

 일본 추리문학 작가협회의 문학상인 에도가와 란포상 수상작 답게 재미 보장. 책의 전체적 분위기는 암울하고 어둡지만 사형제도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해보게 하는 좋은 소설이다. 다카노 가즈아키의 데뷔작인데 초창기 작품이라 그런지 아니면 번역이 좀  매끄럽지 않은 탓인지 문장이 약간 거칠다. 어찌됐든 한 번 읽기 시작하면 다 읽을 때까지 다른 책은 보지 못하는 소설.

 

 

 

 

 

 

 

 7.<제노사이드> 다카노 가즈아키

 한마디로 '역대급'이다. 이 소설도 내가 지금까지 읽은 최고의 소설중에 다섯 손가락 안에  드는 작품이다. 작가의 역량이 돋보인다. 분자생물학, 유전학, 약학, 진화생물학, 군사학 등 방대한 전문자료를 바탕으로 한 치밀한 스토리 구성과  강렬하고 개성있는 등 장인물들이 매력적이다. 읽다보면 잘 만든 헐리우드 SF영화 한 편을 보고 난 느낌이 든다. 작가가 미국에서 시나리오 공부를 했다는데 좋은 시나

리오를 소설로 각색한 듯 하다. 이 작품은 문장하나하나가 군더더기  없고 문학성까지 겸비했다. 삶과 인생에 대한 철학적 성찰이 담긴 문장들을 수없이 만나는 것도 좋다.  생명체의 진화란 무엇인지, 지구상에서 인간이라는 존재는 어떻게 될 것인지 등에 대한 성찰이 돋보인다. 읽다보면 머리카락이 쭈뼛서는 짜릿한스릴을 수없이 느낄 것이다. 상투적인 표현이지만 정말 책장이 줄어드는 게 너무 아쉬운 소설이다. 이런 글을 써내는 사람들의 재능이 부럽다.

 

 

 

8. <KN의 비극>다카노 가즈아키

 스즈키 코지의 소설<링>시리즈가 생각나는 으스스한 공포물.

 이 작품도 상당히 잘 된 작품이다.

 빙의현상과 임신중절이라는 소재로 한 제대로 된 공포물이다.

 밤에 혼자 읽지 말 것..

 

 

 

 

 

 

 

 

 

 

9. <그레이브 디거> 다카노 가즈아키

 다카노 가즈아키의의 작품으로는 가장 실망스럽다.

 어쨋든 끝까지 다 읽긴 했지만 추천할만한 작품은 아니다.

 

 

 

 

 

 

 

 

 

 

 

 

 

 10. <스노우맨> 요 네스뵈

 북유럽 추리소설.

 노르웨이의 국민작가라는 요 네스뵈의 장편소설이다.  어릴 때부터 이야기를 만들며 놀았다는 작가의 말이 허튼 소리는 아닌 모양이다. 스토리 구성이 기막히게 짜임새있고 개연성이 있다. 몰입의 필요충분조건을 모두 갖춘 멋진 소설이다. 살인현장에 어김없이 만들어지는 눈사람..그 눈사람은 누가 만들었을까..

추리, 범죄 소설을 읽다보면 살인자들의 살인동기에 대해 생각해 보는데 대부분 어이없는 사이코패스, 소시오 패스들의 소행이지만 이 작품에 등장하는 살인자의 범행동기는 예사롭지 않다.

 무심코 던진 돌멩이에 개구리가 맞아 죽듯 우리의 모든 행위 하나하나는 어떤 인과의 그물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어떤 인과는 끔찍한 악몽을 낳을 수 있는데 인연이 만든 악몽의 극한이 바로 이 스노우맨이  아닐까..  추천 1순위 작품이다.  

 

 

 

11. <차일드44>톰 롭 스미스

 소설의 프롤로그부터 충격적이다.

 이 작품역시 살인자의 살인동기를 곰곰히 생각해보게 만든다.  소설은 처음부터 끝까지 새하얀 러시아 설원을 배경으로 진행된다. 프롤로그에 모든 결말이 있었는데 마지막 장을 넘기고 나서야 프롤로그를   다시 음미하게 만드는 작가의 재주에 감탄하게 된다. 읽는 내내 살인자의 손에 죽어가는 불쌍한 아이들이 안타깝기도하고 대체 어떤 놈이 아무 죄 없는 아이들을 죽이고 다닐까 하는분노로 다급하게 책장을 넘기게 하는 작품이다. 리들리 스콧 감독이 영화화 한다고 한다. 살인자는 죽어 마땅하지만 그 살인자가 처음부터 살인자는 아니였을 것이다. 살인자가 어떻게 태어나는지 되짚어보는 과정은 가슴아픈 비극이다.  

 이 작품역시 강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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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년의 밤
정유정 지음 / 은행나무 / 201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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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연히 접한 정유정의 장편소설<7년의 밤>을 읽고 있다.

대단한 소설이다.

 

 미적지근하고 달달한 여성작가들의 잠꼬대 같은 문장이

아닌 시원시원하고 굵직한 문장으로 세령마을이라는

가상의 공간에서 벌어지는 매력적 이야기를 숨가쁘게

몰아가는 역량이 대단하다.

 

줄어드는  페이지가 아깝다는 생각이 들게하는 소설을

오랜만에 접하고 나니 삶에 활력소가 생긴다.

소설 읽는 재미..

그래, 바로 이 맛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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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언가 찾아올 적엔 창비시선 224
하종오 지음 / 창비 / 200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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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종오의 시는 시 읽기의 재미를 준다. 시를 읽으면서 시인이 창조해 낸 이미지에 탄복하는 경우는 많지만 시인이 그려내는 이야기와 서사에 몰입되는 경우는 많지 않다. 


  하종오의 시가 빚어낸 사라져 가는 농촌 고향의 이야기와 그 사라져가는 시골 태생으로 도시에 적응하지 못하는 도시인들의 이야기는 남의 일이 아니라 바로 우리 자신의 일상과 호흡을 같이 한다. 


  그래서 그의 시들은 농촌과 도시, 그 어디에도 적응하지 못하는 영원한 떠돌이 같은 우리 삶을 차근차근 성실하게, 세밀하게 성찰한 뒤 매끄러운 서사 운문으로 빚어내어 놓는다. 그의 시들에 나오는 시어들은 책상물림의 관념적인 메마른 시어와는 거리가 멀다.
 또 그의 시는 시골에 계신 늙으신 부모님들의 얼굴에 깊게 패인 주름의 깊이만큼 우리마음 깊숙이 골을 내면서 출세와 성공, 돈에 익숙한 도시인들의 마음에 작지만 쓰라린 상처를 낸다.

 

  사람은 반드시 도시가 아니면 시골에서 태어난다. 근대화 이후 도시로 온 대부분의 사람들은 시골정서를 보물단지처럼 가지고 살아가며 언젠가는 다시 고향으로 돌아가리라는 막연한 희망으로 근근이 도시생활을 이어간다. 시인 하종오도 아마 오랫동안 고향을 떠나 도시 생활을 한 모양이다. 


   그는 상사에게 불려가 매출 낮은 이유를 추궁 당하고 종일 사표를 끼고 있으면서도 벗어나기 어려운 도시적 삶에 기민하게 적응할 수밖에 없다. 도시생활은 까칠하지만 생각 없이 맹목적으로 적응하면 극도로 편할 수 있다.
<편안한 擬態>라는 시는 이러한 도시적 삶의 절정을 이룬다.
 
 고층빌딩의 매일매일은 의태로 시작한다.
 비엠더블유 타고 온 오너는 운동 삼아 계단을 오르지만
 소나타를 타고 온 간부는 눈치 삼아 계단을 오르고
 지하철을 타고 온 사원은 시늉 삼아 계단을 오른다.
 사무실이 같고 책걸상이 같고 유니폼이 같아서
 상사가 알아서 기면 부하도 알아서 기고
 부하가 빙그레 웃으면 상사도 빙그레 웃는다
 여자직원은 남자직원만큼 수치스러워하고
 남자직원은 여자직원만큼 감격스러워한다.
 중심을 가졌거나 안 가졌거나
 내 것을 적게 주고 남의 것을 많이 받아내려는 즐거움도
 똑같아서 불평하거나 감사하는 말투도 서로 똑같다.
 고층빌딩은 유리창이 모조리 사람들과 똑같아서
 안에서는 밖이 보여도 밖에서는 안이 안 보인다.
                                -<편안한 擬態>


 시인은 비록 도시적 삶을 무서워 하지만 남을 따라하면 편안해 질 수 있다는 성찰도 가볍게 여기지 않는다. 그러나 이 편안한 성찰의 이면에는 도시의 불편한 진실이 도사리고 있다. 중심이 있어도 중심이 없어도 본능적인 이기심은 똑같아서 우열을 가리기가 힘들다.
고층빌딩의 유리창처럼, 자신을 드러내기 싫어하고 타인을 훔쳐보려는 관음증 같은 심리도 일상적이다. 이 모든 것이 도시인들의 편안한 태도이고 이런 습속에 길들여져도 누구하나 불편한지 모른다.

 

~중략~
환율과 주가와 부동산 중 뭐가 폭등하는지 폭락하는지
누가 더 가난해지고 누가 더 부자가 되는지
우리가 죽을 때까지 모르는 것이 많다는 것은
그만큼만 잘 남겨두고 잘 죽는다는 건가
                                -<모르는 것>부분


  편안한 의태를 서로 따라하면서 죽을 때까지 아무것도 모르고 죽어가는 삶이 도시적 삶의 미덕일지도 모른다. 이런 미덕이 찬양되는 도시를 떠나 시인은 시골 고향에 이른다. 그러나 귀농한 시인 앞에 예전의 그 풍족했던 농촌정서는 찾아 볼 길이 없다.

 

 민둥산을 사들인 도시인들
 측량하여 경계마다 말뚝을 박는다
 두세 마지기씩 나누어가진 뒤
 산등성까지 포크레인으로 밀어 붙인다
 걸어 다닐 밭둑 만들지 않고
 양식 거둘 두둑과 고랑 일구지 않고
 먼저 널찍하게 찻길부터 닦는다
 ~중략~
 승용차 타고 올라가서 눈 내리깔고 본다
 두 마지기 부재지주 세 마지기 부재지주
 도시인들 킬킬대다가 돌아간다
 민둥산에 비 와서 흙탕물이 말뚝을 쓸어버리면
 잡풀들이 지주가 되고 벌레들이 지주가 되어
 ~후략~
                              -<지주>부분
 
귀향한 시인의 눈앞에서는 부재지주들의 땅 잔치가 벌어지고, 
 
~중략~
 들판을 얻어 살아간 이는 아버지였지만
 들판을 버려 살아가는 이는 자식이었다
 ~중략~
 날마다 저녁이 오면 들녘에 안개 내래는 소리를 들으며
 농업 박물관 문을 잠그고 집에 돌아가
 먼 나라서 가져온 쌀밥과
 먼 나라서 가져온 소고기를 구워먹었다
                                  -<농업박물관>부분

 

 한평생 들판을 일구었던 아버지는 늙어 사라져 가고 자식은 그 아버지가 일구었던 들판을 버려야 산다. 도시를 떠도느라 농사짓는 법을 배우지 못했기 때문이다. 농사는 농업박물관에서나 볼 수 있는 유물로 변하고 아들은 수입쌀과 수입고기로 배를 채워야 한다.

 

 ~중략~
 끝까지 물려주지 않아야 똥오줌이나 받아준다고
 논밭에 일찍 나갔다가 늦게 들어오곤 하더니
 끝까지 왔는데도 안 물려주고 똥오줌이나 먼저 받으라는가,
 잠시 아버지를 뵈러 온 자식은 투덜거리는 것이었다
 자식은 떠날 것이다
 아버지가 해마다 심어먹었던 잡곡과 채소
 아버지가 날마다 길어먹었던 뒤란 찬 우물물마저
 몸에서 다 비워내고 나면 아버지를 묻어버리고
 자식은 논밭을 팔아먹을 것이다
 그래도 거름 만들려고 정랑 파내듯 아버지는
 온몸에 남은 기운이란 기운 모두 끌어서
 논두렁 다지던 발걸음과 새 쫓던 팔매질도
 씨앗 꾸러 온 이웃에게 해대던 손사래마저 모아
 자식에게 조용히 내주고 맥놓는 것이었다
                               -<슬픈 유산>부분

 

  슬픈 자화상과 같은 이런 시들을 마음 편히 읽을 수 없다면 우리는 도시와 시골 그 어디에서도 쉬지 못하고 영원히 새로운 삶의 터전을 찾아 해매야 하는 이방인이 틀림없다.

 

  이제 우리는 어디로 가야할까? 
 

 농촌엔 농사짓지 않는 부재지주들이 땅값 오르기를 기다리며 킬킬거리고 농사지을 줄 모르는 도시인도 아닌 농부도 아닌 어중간한 시인들이 남은 슬픈 유산을 갖고 어찌해야 할 줄 모른다. 이렇게 하종오의 시들은 수월한 이미지와 시적 재미를 가지고 독자들을 시 읽기의 즐거움에 이르게 하지만 그의 시들을 읽다가 지키지 못하는 땅과 늙어가는 부모님 생각에 다다르면 이렇게 앉아 있기만 해서야 될 것인가 하는 반성에 어찌할 바를 모르겠다. 하종오의 시에 귀를 기울이면 더 이상 여기 앉아 있어서는 안 될 것 같은 예감이 든다.

 

                                                                                                          2010년 8월 14일

                                                                                                                  patrach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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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래스카, 바람 같은 이야기
호시노 미치오 지음, 이규원 옮김 / 청어람미디어 / 200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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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일본의 유명한 사진작가

  호시노 미치오.
  그는 1978년, 20대 초반에 알래 

  스카로 이주해 1996년 캄차카반

  도에서 불곰의 습격을 받아 목숨

  을잃기까지 20여 년간 알래스카

  에머물며 알래스카의 자연을 담 

  아낸 세계적인 야생 사진가이다.

 

  호시노 미치오라는 이름을 처음 

  알게 된 건 내가 자주 찾는 사이트 지리산 닷컴   (www.jirisan.com)의 주인장이 이 책을 읽고 쓴 글을 본 후였다. 지리산 닷컴 이라는 사이트의 주인장도 역시 사진작가이다. 지리산 닷컴이라는 홈페이지를 모르는 사람이라면 먼저 이곳부터 방문해보시길... 아름다운 지리산의 풍경과 그곳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순박한 이야기가 펼쳐진다. 
 

알래스카, 바람 같은 이야기를 보고나서 사진에 대한 나의 인식이 완전히 바뀌었다. 사진이 엄연한 예술의 한 장르로 인정되는 시대임에도 불구하고 나는 사진에 대해 잘 몰랐다. 이 책을 읽고 나서 사진은 그저 멍하니 보는 것이 아니라 읽는 것이라는 사실을 처음 알았다.
 
  책의 표지를 넘기면 압도적인 알래스카의 풍경과 야생동물 사진이 펼   쳐지고 40 여 년간 알래스카의 툰드라에서 에스키모가 되어 살아온 백   인 밥 율의 이야기가 펼쳐진다. 밥 율은 원주민 에스키모 여인인 캐리와 결혼해서 평생을 알래스카의 혹한에서 사냥과 채집으로 자급자족하며 살아왔다. 밥과 호시노는 오랜 친구이다.

 

 책의 중간 중간에 알래스카의 풍광과 야생동물을 담은 사진이 펼쳐지는 가운데 알래스카에 불어 닥친 거대한 화폐경제의 물결에 휩쓸려가는 에스키모와 내륙 원주민들의 이야기들이 잔잔하게 이어진다. 알래스카의 위대한 자연에 이끌린 호시노의 문장은 단순하고 경쾌하면서도 담백하다.

 

 그는 자연만을 담는 사진가는 아니었다. 그 아름답고 위대한 대지에서 소용돌이치는 다양한 인간들의 문제를 회피하지 않았다. 바로 자본주의 경제화의 물결이 알래스카에도 불어 닥친 것이다. 화폐경제가 추구하는 개발과 파괴의 바람이 알래스카에 불고 있었고 호시노는 자신의 사진작업이 아직 파괴되지 않은 순수한 알래스카의 마지막 모습을 담는 행위임을 알고 있었던 것일까? 그는 필사적으로 알래스카를 사진에 담았다. 불과 43세의 나이에 러시아의 캄차카 반도에서 사진 작업 중 불곰의 습격으로 사망했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 도대체 왜 그는 그런 죽음을 맞아야 했던 것일까 하는 의문이 가시지 않았다. 생전 호시노의 말이 그 의문에 대한 답이리라. “자연은 인간의 삶 바깥에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람의 삶마저 포괄하는 것임을.. 자연은 아름답고 잔혹한 것이다. 그리고 자연은 강하고 연약하다.”
 
  책을 펼치니 알래스카의 아름다운 풍경사진이 나를 압도했다. 이 아름답고 감동적인 책과 사진을 도대체 어떻게 설명해야 될지 모르겠다. 사진이 많아서 그런지 책은 단숨에 읽혀지는데 근래 이렇게 앉은  자리에서 마지막 장을 덮은 경험은 처음이다. 책을 덮고 나서도 가보지 못한 알래스카의 풍경이 아른거리는데 불현듯, 이 답답한 곳에 앉아 책과 씨름하고 있는 순간이 숨이 막혀온다. 갑자기 여행이 미치도 록 하고 싶어지게 만드는 책.

 

 

무더운 여름, 시원한 청량감을 느끼고 싶다면 이 책이 제격이다. 때로는 수 백페이지의 글보다 단 한 장의 사진이 더 많은 것을 보여주고 더 큰 감동을 주기도 한다. 바로 호시노 미치오의 사진들이 그러하다.


 그가 찍은 사진은 피사체를 억지로 고정시켜 찍어 낸 흔적이 없다. 사진이 아니라 그 피사체 앞에 내가 그냥 서 있는 느낌마저 든다. 그래서 그의 사진은 보는 것이 아니라 느껴질 수밖에 없다. 그의 글도 마찬가지.. 글 중간 중간에서 자연과 삶, 생명에 대한 놀라운 철학적 성찰과 사유를 엿볼 수 있다. 그 철학적 사유의 폭은 깊고 넓고 날카롭다. 마치 생명의 정수만을 쥐어짜낸 에센스 같기도 하고 삶에 통달한 선승들의 오도송 같기도 하다.

 

 많은 사람들이 호시노 미치오의 이 아름다운 사진을 보고 바람 같은 이야기를 들었으면 좋겠다. 그 누구든 호시노 미치오의 사진과 글에 매료되지 않을 사람이 없을 것이다. 이 책만큼 말과 글로 그 느낌을 표현하기 어려운 책은 처음이다. 더 이상의 언어는 필요 없을 것 같다. 먼저 이 책을 읽고 보라. 빌려볼 책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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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난하지만 행복하게 - 자연과 공동체 삶을 실천한 윤구병의 소박하지만 빛나는 지혜
윤구병 지음 / 휴머니스트 / 2008년 12월
평점 :
품절


 가난과 행복은 양립할 수 있을까? 사람들은 보통 행복해지기 위한 전제 조건으로 유일무이하게 돈과 부를 꼽을 것이다. 행복의 전제조건으로 돈과 물질적 부를 대체할 다른 조건을 말하기는 불가능하다. 그런데 전직 국립대 철학 교수였던 윤구병은 행복의 전제조건으로 가난을 당당히 말한다. 과연 우리는 윤구병의 말대로 행복하게 살기 위해 거리낌 없이 가난을 선택할 수 있을까? 그리고 왜 우리는 행복해지기 위해 부유함이 아닌 가난을 선택해야 하는 것일까?

 

  가난과 행복의 융합을 시도하는 윤구병은 국공립공대인 충북대 철학과 교수를 15년간 지내다가 지난 1995년 교수직을 그만두고 전북 부안으로 낙향하여 농사를 지으면서 대안교육을 하는‘변산교육공동체’를 설립했다. 안정된 수입과 정년이 보장되는 국공립대 교수직을 그만둔다는 것은 대단히 어렵고 힘든 결정이다. 그 결정의 배경을 윤구병은 이 책의 앞날개에서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다 좋다 쳐도 가난은 지긋지긋하다고요? 강요된 가난은 그렇겠지요.

  그러나 스스로 선택하는 가난한 삶은 그렇지 않습니다.”

 

  대학 교수직을 사퇴하고 윤구병은 부안에서 논 삼천여 평과 밭 만여 평에 직접 농사를 지으며 스스로 선택한 가난한 삶이 정말 행복한 삶임을 실천하고 증명한다. 그러나 윤구병은 일머리도 트이지 않고 서툴고 굼뜨기 짝이 없는 풋내기 농사꾼 주제에 몇 년간 제 앞가림을 하지 못했음을 솔직하게 고백했다.

 

 귀농을 했지만 근 5년간 제대로 된 소출(그는 주로 주곡인 쌀과 보리, 밀등을 생산한다)을 만들어 내지 못했던 것은 비료와 농약의 사용이 아닌 철저한 유기농법을 선택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윤구병은 그동안의 살림살이는 빚으로 꾸려온 셈이라고 겸허하고 부끄럽게 반성하지만 그 반성의 배경엔 주곡농업만으로 자급하기 어려운 한국의 농업현실, 즉 국가의 잘못된 농업정책이 있음을 암시한다. 현재 우리나라 전체 주곡 자급률이 25퍼센트 밖에 안 되는데도 독립국가 행세를 할 수 있다고 믿고, 비교생산비 우위설을 내세워 값비싼 공산품을 내다 팔아 값싼 농산물을 사서 먹는 게 더 경제적이라는 믿음을 가진 사람들이 정권을 잡고 나라 살림을 맡고 있는 한, 농민들이 아무리 바둥거려보았자 주곡 농사로 이 상품경제 사회의 거센 물결을 헤쳐 살아남기가 불가능하다고 윤구병은 따끔한 비판의 일침을 가한다. 그러면서도 윤구병이 절대로 돈이 안 되는 주곡농업중심의 유기농에 집착하는 이유는 간단하다. 바로 유기농과 주곡이 우리의 생존과 직결되기 때문이다.

 

 

 윤구병의 글을 읽다 보면 우리농업, 우리 쌀, 우리 보리, 우리 밀을 지키는 것은 자본과 시장의 논리로는 절대 이해 할 수 없음을 알게 된다. 그는 5년간의 농사꾼 체험으로 현재 우리 농업과 농촌의 현실과 문제점, 대안을 정확하고 확실하게 제시한다. 농민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흉년이 아니라 풍년이라고 역설하는 모습을 보면 그는 정말 제대로 된 농사꾼이 된 모양이다.

 

  주곡이 아닌 환금작물에 깊이 의존하는 한국농업의 특성상, 과잉 생산은 농산물 가격의 폭락을 의미하고 높은 시설비, 인건비를 필요로 하는 환금작물 농업은 치명적인 타격을 입게 되기 때문이다.

 이어서 그는‘농촌 환경의 다원적 가치’에 주목한다. 생존은 기본이고 사람들의 인성과 덕목, 사회의식을 길러낼 가장 이상적인 형태의 생활형태로서 농촌의 소규모 공동체들의 활성화를 윤구병은 지향한다.(일부 진보적 성향을 가진 사람들이 농촌의 소규모 공동체 조직의 필요성을 주장하는데 개인적으로 '공동체' 라는 말에 약간의 거부감을 느낀다. 개인주의가 제대로 정착되지 않은 상태에서의 공동체 조직은 위험할 수 있다)

 

  그리고 좀 더 가난하게 사는 길, 좀 더 힘들게 사는 길, 좀 더 불편하게 사는 길은 자연의 순리에 따르는 길임을 그는 몸소 실천해 보이고 있다. 그것이 공생의 길이기 때문이다. 자신이 조금만 더 가난하게 살면 그만큼 이웃이 가난을 덜고, 자신이 좀 더 힘들게 일하면 그만큼 이웃의 이마에 흐르는 구슬땀이 걷힌다고 한다. 그가 말하는 가난은 이제 더 이상 당장 끼니가 걱정되는 그런 절대적 가난이 아님을 알 수 있다. 가난, 혹은 불편함이 결코 행복의 반대편에 있지 않음을 여실히 실천하고 증명해 보임으로써 우리는 그의 말 한마디, 한마디를 가볍게 듣고 넘기기 어렵다. 적어도 그는 아무런 행동과 실천도 없이 입으로만 녹색과 환경을 운운하는 환경근본주의자들과는 질적으로 다르기 때문이다. 그를 환경근본주의자들과 차별화시켜주는 것은 바로 그의 실천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한 가지 아쉬운 점은 윤구병이 생태와 환경근본주의에서 완전히 자유롭지 못하다는 것이다. 그의 농법은 우리 조상들이 수천 년 간 해온 전통적 경작방식을 따른다. 물론 이러한 농법은 결코 자연을 거스르지 않고 환경을 해치지도 않는다. 그러나 맹목적인 유기농법의 고수는 자본과 시장의 논리에 지배되기 쉽고 돈벌이의 수단으로 변질되기 쉽다. 아니, 벌써 유기농은 자본, 시장에 충실한 하나의 고가 농산품으로 전락해 버리지 않았는가? 대형 마트나 할인점 유기농 코너에 진열된 유기농 농산물이나 식품들은 소득이 충분치 못한 서민들이나 저소득 계층에겐 그저 그림의 떡일 뿐일 수 밖에 없는 이유는 현재의 유기농이 생산성을 기대할 수 없기 때문이다. 또 윤구병은 과학기술에 대한 이 근원적 적대감을 드러내기도 하는데 수긍하기 어려운 부분이다. 인간이 과학과 이별하기는 거의 불가능할 것이다. 과학의 지배력은 중세 유럽의 교회의 지배력과 비교조차 어렵다.


유기농을 돈벌이로 여기는 자본의 논리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면 유기농 또한 화학, 비료농업 만큼 지속가능성을 기대하기 어렵다고 생각한다. 농민들이나 기업농이 고소득을 기대하여 유기농에 매달린다면 우리는 우리 농업의 미래를 기약할 수 없게 될지 모른다. 현재 우리나라의 농업이 망해가고 있는 이유는 농사가 돈벌이기 안 되기 때문인 것이다. 그래서 휴대폰 팔아 쌀 사먹자는 주장만 설득력을 얻고 있다. 농업이 돈의 문제를 떠나 생존과 문화의 문제가 될 수밖에 없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시골에 전원주택 짓고 텃밭 가꾸며 사는 것만이 진정한 생태적 삶에 가까운 것일까? 아니라고 본다. 모든 사람이 그런 삶을 살수도 없고 또 그런 삶이 우리사회의 주류적 흐름이 될 수도 없다. 직접 유기농 농사를 짓지 않아도, 시골로 귀농하지 않아도 얼마든지 지속가능한 생태적 삶을 살 수 있다. 바로 자기 자신과 우리문화를 바꾸는 것으로서 그러한 삶이 가능함을 윤구병은 몸으로 직접 보여준다. 그리고 우리 삶의 문화를 근본적으로 바꾸는 방법은 윤구병이 스스로 선택한 가난한 삶의 언저리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2011년 7월 9일 patrach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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