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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은 숲으로 가지 못한다
도정일 / 민음사 / 199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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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명한 생물학자 최재천 박사와 도정일 교수의 『대담-인문학과 자연과학이  만나다』라는 책을 매우 재미있게 읽은 적이 있다. 그 책에서 인문학자 도정 일 교수는 동서양의 모든 신화와 해박한 인문학적 지식을 동원하여 기술문명과 인간의 삶에 대한 성찰과 비전을 매우 설득력 있게 제시했다. 내가 놀란 건  생물학  전공자인 최재천 박사에게도 생물학을 한 수 가르칠 정도로 해박한  도정일씨의 생물과 과학에 대한 지식과 깊은 안목이었다. 자신의 본래 전공영역도  아닌 생물학, 과학에 대한 지식이 저정도이면 도대체 그의 전공인 인문학, 문학에 대한 수준은 과연 어느 정도일까라는 호기심이 발동하여 그의 다른 책을 찾아보게 되었다.

 

 그런데 도정일 교수는 책을 출판 안하기로 유명한 분이다. 그의 책 중에서 순수하게 그의 글로만 이루어진 책은 이 <시인은 숲으로 가지 못 한다>와 <시장전체주의와 문명의 야만> 이라는 단 두 권의 단행본 밖에 없었다. 도정일 교수는 글을 잘 쓰기로 유명하다. 그의 글을 읽다보면 빈틈없이 정확하게 짜여진 톱니바퀴가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맞물려 돌아가는 듯 미끈하고 무리 없는 논리와 유려한 문체에 매료되지 않을 독자는 드물 것이다. 그래서 그의 글은 독특한 문장력과 뛰어난 설득력이 조합된 명문중의 명문이다. 아쉬운 것은 주옥 같이 훌륭한 글들을 묶은 이 책이 출판사에서도 이미 오래전에 절판되어 돈이 있어도 구하기 어려운 희귀서가 되어버렸다는 점이다. 얼마 전 우연히 인터넷 헌책방인 북코아에서 이 책을 운 좋게 구입했다.
 
 ‘문화, 문학, 시대에 대한 에세이’를 담고 있는 이 책은 크게 문학비평이론과 문화에세이로 나뉘어져 있다. ‘3부 혼돈시대의 소설’ 이라는 문학비평이론에서 관심이 가는 부분은 ‘시뮬레이션 미학, 또는 조립문학의 문제와 전망’이라는 글이었다. 도정일 교수는 이 글에서 이인화씨의 소설<내가 누구인지 말할 수 있는 자는 누구인가>라는 텍스트를 매개로 하여 조립소설, 혹은 짜깁기 소설이란 무엇이며 그러한 소설이 문학과 소설의 이름으로 용인 받을 수 있는지, 또 그런 조립소설을 지탱하는 이론적 토대는 무엇인지에 대한 논의를 담담하고 논리적으로 펼쳐 보인다. 이인화 씨의 소설<내가 누구인지 말할 수 있는 자는 누구인가>라는 소설을 나는 오래전에 매우 재미있게 읽었고, 그 파격적인 소설의 형식에 대해 전율하면서도 이런 구성도 소설이 될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이 든 기억이 있다. 이인화씨는 자신의 소설은 혼성기법을 차용한 구성이라고 주장하였다지만 도정일 교수는 이러한 혼성기법을 정당화하는 간텍스성(intertextuality)의 미학은 이인화의 소설적 구성을 용인해주는 이론적 토대가 될 수 없음을 지적한다.

 

 도리어 흔히 짜깁기 소설, 혹은 조립소설을 정당화하는 가장 강력한 이론적 근거는 장 보드리야르의 시뮬레이션 이론이라고 도정일은 주장한다. 시뮬레이션 이론은 이 세상에 진품과 모조품을 구분할 수 없다는 전제에서 출발한다. 모든 소설, 모든 텍스트, 그리고 우리의 삶에 이르기까지 무엇이 진본이고 무엇이 모조인지 구분할 수 없는 디지털시대에서 이인화의 소설은 단순한 짜깁기, 조립소설이 아니라 철저한 시뮬레이션 미학을 지향하고 있기 때문에 그의 소설이 표절이라는 도덕적인 비난을 받을 수 없고, 다만 우리는 그러한 시뮬레이션 미학을 추구하는 문학작품을 받아들일 것이냐 말 것이냐의 선택의 기로에 서 있을 뿐이다라고 도정일 교수는 결론을 내린다. 이인화의 소설에 대한 도정일 교수의 긍정적 인식은 타당한 듯 하고 나도 그러한 인식에 대체로 공감하는 편이다.

 

  4부는 문화 에세이 글 묶음인데  4부에 실린 5편의 글들이 이 책의 백미라 할 수 있다. 특히 <압구정의 유토피아/디스토피아>라는 글은 근대적 생산, 소비 양식의 절정에서 생긴 우리시대의 유토피아 압구정이라는 공간이 우리가 자본주의의 실천 30년 끝에 이룩한 ‘계급문화의 천국’이자 우리 사회의 정치경제적 모순이 남김없이 그 추악한 몰골을 드러내고 있는 모순의 디스토피아 임을 역설하고 있는데 그 옛날의 오렌지족들과 서울 강남의 문화에 대한 신랄한 비판은 재밌고 흥미롭다 못해 통쾌한 쾌감? 마져 느끼게 하는 명문?이다. 이 글은 1990년 초반의 서울 압구정과 강남 일대를 다루고 있지만 2011년 현재의 서울 강남을 이해하는데 있어서도 유효한 도구적 틀을 제공하고 있다. 도정일 교수의 인식과 사유는 결코 일회성에 그치는 단순한 감상문이 아니라 보편적이고 근본적인 화두를 우리에게 던져주고 있는 셈이다. 

 

 <문화의 몰락과 비평의 위기>라는 글에서 도정일 교수는 산업과 생산양식, 현대적 소비문화와 인간의 사회적 존재방식에서 필연적으로 발생하는 사회적, 현실적 모순을 해소하기 위한 희생양이 되었던 마광수 교수에게 애정 어린? 충고를 해주는 동시에 더불어 면죄부도 부여해 준다. 마광수 교수의 외설문학이 위선을 고발한다는 미명하에 우리사회에 던진 소통의 방식은 어린아이들 수준의 유치함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도정일 교수는 마 교수의 문학을 외설로 치부하지는 않았다는 점에서 나는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나는 요즘 마 교수의 책은 읽지 않지만 마교수의 문학적 소통방식에 대해서는 여전히 호의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더불어 도정일 교수가 말하는 외설과 외설이 아닌 것의 차이점(도정일은 외설이란, 성기와 성행위 장면 묘사의 파편적 연속 즉, 섹스 이외의 것은 존재하지 않는 것이며 이러한 외설산업 생산물의 특징으로 진부성, 천박성, 반복성을 들었다. 이러한 시각에서 음란물, 포르노물 만이 외설산업이 아니라는 점은 명백해진다. 외설이란 성행위를 묘사하는 것만이 아니라, 인간의 삶과 총체성을 파편화하여 증오의 문화를 확대하는 일체의 모든 것이 해당된다는 것이 도정일의 생각이다)은 매우 적절하고 타당하다고 생각한다.

 

 이 책의 맨 마지막 글<시인은 숲으로 가지 못 한다>는 문학교육에 있어서 문학적 감수성의 모태인 자연 자체가 이미 산업화로 인해 불구의 형태가 되어버린 지금, 우리는 아이들에게 과연 어떻게 감성의 모태로서 본래의 자연을 다시 회복하고 가르칠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한 문학교육의 새로운 비전을 제시한다. 도정일은 현대문명의 자연에 대한 야만성을 감수성어린 분노의 언어로 폭로한다. 근대적 생산 방식은 ‘자연의 품위에 대한 적극적 멸시’를 그 특징적 운용원리고 갖고 있다는 도정일의 표현이 다소 과격하게 느껴진다면 다음의 표현들은 어떤가?

 

 “이 원리(근대적 생산방식)는 어떤 의미에서도 가이아 여신(Gaea,땅)의 품위를 존중하지 않는다. 근대산업의 눈에 비친 그녀는 멍청이이며 산업과 호출의 명령 앞에 24시간 대기하는 도구적 노예이고, 쥐어짜기에 따라 석탄에서부터 다이아몬드 또는 곰 발바닥에 이르기까지 무엇이든 내놓아야 하는 식민지적 벙어리 자원창고... 산업폐기물 처리장을 제공하기 위해 자기 내장까지도 내놓아야 하는... 소리 없이 대기하는 벙어리 처녀, 아니 창녀로서만 존재하는..”

 

 이러한 거침없는 표현과 폭로만이 이글의 전부는 아니다. 도정일은 이러한 생태계의 전면적 위기라는 모순 앞에서 문학이 생각해 볼 수 있는 극복의 모색 지점은 바로<문명의 재편>을 통한 자연 회복이라고 주장한다. 문명의 재편이 완료되어 불구의 자연이 회복되면 시인은 숲으로 가게 될 것이다. 과연 시인은 언제쯤 숲으로 돌아 갈 수 있을까?


 이 책의 전반부를 차지하고 있는 문학 분야의 글들은 평소 관심이 있었던 독자가 아니라면 소화하기 힘들지도 모르지만 후반부의 이 시대의 문화, 시대에 대한 밀도 있는 글들은 독자들에게 많은 생각거리를 제공한다. 도정일의 미끈한 문장을 즐기고 싶은 독자들은 필독서..

 

                                                                                            2011년 작성

도정일 교수는 작년(2014년)2월에 두 권의 산문집 <쓰잘데없이 고귀한 것들의 목록>과 <별들 사이에 길을 놓다>을 동시에 출간했다.
책 안내기로 유명한 분이라서 동시에 두 권의 책을 출간소식이 반가웠고 예약주문하여 구입했다. 출판사 문학동네에서 도정일 문학선을 기획한 것 같은데 앞으로 도정일교수의 단독저서를 꾸준히 볼 수 있을 것 같다. 또 오래전에 절판된<시인은 숲으로 가지 못한다>의 출간 20주년 개정판도 곧 선보일 예정이라고 한다. 도정일교수의 글을 기다리는 사람들한테 반가운 소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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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의 노래
김훈 지음 / 문학동네 / 201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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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번에 읽은 <현의 노래>를 끝으로 김 훈이 쓴 책은 모두 완독하게 되었다. <현의 노래>는 김 훈의 첫 역사소설 <칼의 노래>와는 느낌이 많이 다른데 <칼의 노래>가 거칠고 날카롭다면 <현의 노래>는 부드럽고 유약한 느낌이 나는 소설이다. 나는 김 훈의 역사소설 3부작 중에서 <남한산성>을 제일 좋아한다. <칼의 노래>는 여름의 치열함이 느껴지고 <남한산성>에서는 겨울의 혹독한 추위 속에 사람들의 민중의 따뜻한 체온이 느껴지며, <현의 노래>는 봄과 여름사이에 약동하는 생명이 떠오른다.

 

 <현의 노래>에는 멸망해 가는 가야의 예인 우륵과 그의 부인 비화, 우륵의 제자 니문, 가야를 배신한 대장장이 야로, 가야왕의 죽음에 순장되기를 거부하고 도망친 궁중시녀 아라, 가야를 멸망시킨 신라의 군주 이사부 등이 등장하는데 소설적 구성은 복잡하지 않고 비교적 단순하다. 등장인물 외에 소설을 이끌어 가는 것은 가야의 쇠와 금이다.

 

 쇠를 다루는 대장장이 야로와 금을 다루는 예인 우륵은 공통적으로 망해가는 가야를 배반하지만 그 둘의 마지막 운명은 엇갈린다. 둘 다 쇠와 금은 가야의 것도 신라의 것도 아니라는 철학을 가지고 있지만 쇠는 언제든지 병장기로 변할 운명을 타고난 것이어서 쇠를 다루는 야로는 살아남지 못한다. 금은 소리를 만들어내는데 이 소리는 가야를 멸망시키지도 않고 신라를 공격하지도 않는다. 소리는 국경도 주인도 없는 이 땅위의 생명의 흐름과도 같아서 신라 장군 이사부와 진흥왕은 우륵의 가야금 소리와 더불어 자족한 모양이다.
 
 이 작품은 제목처럼 현의 소리에 대한 묘사가 압권이다. 도무지 알듯하면서도 모를 듯한 소리에 대한 작가의 수많은 말들은 너무나 정제되어 있어서 눈과 가슴에 잡아두기 어렵다. 작품은 김 훈의 다른 작품들처럼 주어와 술어 사이에 한 두 개의 간단한 수식어만 달린 짧은 문장들로 짜여진다. 그러나 이 <현의 노래>의 문장들은 작가의 다른 작품들보다 더 아름답고 현란하고 생생하다.

 

 감정의 묘사는 극도로 절제하는 대신에 감각에 대한 묘사는 극단적이라 할 만큼 정교하고 치밀하다. 감정을 포기하고 감각묘사에 치중함으로서 작가는 소설 속에 등장하는 인물들에게 진한 살 냄새 나는 생명을 부여하고 있다. 가야왕의 시녀 아라가 오줌 누는 장면을 묘사한 글이 그러하고 우륵의 아내 비화의 생김새를 시각적 인상을 버리고 오로지 냄새로만 묘사해 내는 대목이 그러하다. 김 훈에게 있어 오줌을 누는 행위는 단순한 생리적 배설현상 이상의 의미를 가지는 것 같다. 그 행위는 생명의 원리라는 면에서 숭고하게 느껴진다.

 

 작품속의 주인공들은 저절로 만나고 배고프면 밥을 먹고 피곤하면 잠을 자고 자석처럼 끌려 서로 몸을 섞고 바람처럼 헤어지고 두려움 없이 죽어간다. 이러한 삶의 과정과 운명에 대해 사람들은 비난도 원망도 하지 않으며 기쁨도 슬픔도 느끼지 않고 분노도 절망도 하지 않는다. 김 훈은 아마도 고대인들의 삶이 현대인들의 삶과 별반 다르지 않다고 보고 있는 것 같다. 현대인들이 가공할 무한경쟁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고 그것을 삶의 익숙한 상식으로 여기듯이 고대인들은 흥망성쇠하는 왕들의 운명에 제 고을과 제 몸을 두려움 없이 의탁한다.

 

 그러나 그들이 오로지 거대한 운명에만 몸을 맡긴 것은 아니리라. 작품 중 궁중시녀 아라와 우륵의 제자 니문의 인연은 안타깝다. 작가는 그 미완의 인연에 비로소 감각이 아닌 감정을 엮어 놓았다. 궁중시녀 아라와 니문의 인연이 자아내는 슬픈 감정의 카타르시스는 이 소설의 백미다. 김 훈의 다음 작품이 기다려진다. 들리는 소문에 의하면 그의 다음 작품의 배경은 19세기 초 조선이라고 한다. 역사소설이 또 나오겠다.

 

                                                                                            2010년 가을 작성

김훈 작가는 2011년에 장편<흑산>을 마지막으로 장편작품을 더 이상 내지 않고 있다. 위의 본문에 언급된 19세기 초 조선을 배경으로 한 작품이 바로 <흑산>이다. 그동안 계간잡지 <문학동네>에 몇 편의 단편소설을 발표했고 그의 단편을 찾아 읽는 것으로 김훈의 새 작품에 대한 갈망은 약간 해소 할 수 있었지만 내가 기다리는 건 김훈 작가의 다음 장편소설. 빨리 나왔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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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명이다 (반양장) - 노무현 자서전
노무현 지음, 유시민 정리, 사람사는세상 노무현재단 엮음 / 돌베개 / 201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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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2015년 5월 23일)은 노무현 전 대통령 서거 6주기가 되는 날이다.

몇 년 전(아래 글 본문에 서거 2년후에 읽은 책이라고 쓴 부분이 있는 걸 보니 2011년인 모양이다) 노무현 자서전<운명이다>를 읽고 작성한 글 한편이 있어 업로드한다. 이 글에 담긴 노무현 전 대통령에 대한 생각은 벌써 4년 전이라 지금의 내 시각과는 좀 다르지만 전혀 고치지 않는다. 생각의 족적을 그대로 두고 다시 되짚어 본다.

 

 

노무현 자서전 <운명이다>를 읽고..

 

 2002년 대선 때, 나는 멋도 모르고 노사모를 응원하고 시험 직전의 강의실을 돌며 학과 후배들에게 명계남과 문성근이 주도한 희망돼지 저금통 후원을 부 탁 하는 전단지를 돌리곤 했다. 그때 내가 무슨 명확한 정치의식과 경향을 갖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그저 본능적으로 노무현, 그를 지지하고 응원해야 민주주의가 계속 발전하고 사회진보가 이루어 질 것 같은 직감이 들었기 때문이리라.

 

 퇴임 후, 자신의 고향에 내려와 주민들과 자전거 타는 그의 모습을 보 는 것은 그의 정치적 공과와 관계없이 적지 않은 즐거움이었다.

 

 

 노무현 자서전 <운명이다>를 읽으면서 노무현과 관련된 내 기억의 대부분은 극히 피상적이고 부정확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의 대통령 재임 시절, 나는 거듭되는 실업으로 방황하고 있었다. 내 관심은 좋은 직업을 찾는 것에만 몰려 있었고 실업자 신세를 벗어나는 것을 인생최대의 목적으로 삼고 있었으니 그의 대통령 임기동안 일어났던 사건들과 정치, 경제적 문제들은 내 기억의 피질에 스며들지 않았던 것이다. 나는 정치인이자 대통령으로서의 노무현도, 한 인간으로서의 노무현도 제대로 이해할 수 없었던 일상에 지친 평범한 소시민이었을 뿐이다.

 

이 책<운명이다>로 인해 비로소 나는 정치인이자 한 인간으로서의 노무현을 제대로 바라보게 되었다. 그리고 그의 대통령 임기시절에 앓았던 그에 대한 나의 기억상실증도 뒤늦게 치유할 수 있었다. 그의 서거 이후, 2년이 다 되어가는 시점이지만, 뒤늦게 그의 자서전을 다시 읽게 된 것도 그저 운명 같기만 하다. 이 책을 보면서 그의 서거 때 느꼈던 명확한 이유를 알 수 없는 그 막연한 슬픔의 정체를 구체적으로 밝힐 수 있었다. 그리고 이제 서야 인간 노무현을 조금이나마 알게 되었다. 그에 대한 무성한 소문과 세간의 이야기들은 이 책으로 인해 이제 안개가 걷히듯 모두 사라졌다.

 

 노무현 자서전<운명이다>는 사실 노무현 전 대통령이 직접 육필로 쓴 자서전은 아니다. 나도 이 점이 아쉬웠다. 이 책은 문재인 이사장의 노무현 재단이 자서전과 관련된 각종 자료를 수집하고 유시민 전 장관이 리라이트(rewrite)작업을 해서 나온 사후 자서전이다. 그러나 이 책은 노무현 자신이 바라본 1인칭 시점으로 서술되어 있고, 자료수집이나 리라이트 작업을 맡은 문재인, 유시민 두 사람이 노무현 전 대통령의 생존 시절 때 가장 가까웠던 정치적 동반자였음을 상기한다면 이 자서전은 분명 정본 자서전이라 할 만하다.

 

 책은 여타 자서전처럼 노무현의 생애 전반을 다루고 있다. 그의 정치적 도전과정은 그대로 한국현대정치사의 대서사시다. 인권변호사로 활동하면서 소외받고 억압받던 약자와 노동자들의 인권과 권리를 위해 동분서주하던 때부터 정치에 입문하여 청문회 스타가 되기까지, 그리고 김영삼 전대통령의 3당 야합에 실망하여 지역주의와 야권분열 구도를 극복하기 위해 독자적 정치행보를 걷다가 김대중 전대통령의 평민당 입당, 그리고 대선후보자가 되어 정몽준과의 극적인 후보 단일화를 거쳐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던 대통령 당선까지의 과정이 흥미롭게 펼쳐진다. 유시민의 담백하고 빼어난 글 솜씨도 생전의 노무현을 재현하는데 한 몫하고 있다. 그의 대통령 재임시절의 공과도 치우침 없이 공정하게 서술된다.

 

 이 책이 보여주는 인간 노무현은 매력적인 사람이다. 그는 경남 김해 봉하마을 초라한 흙집에서 태어나 판사, 변호사, 국회의원, 장관, 그리고 한나라의 대통령이 되었다. 이런 이력만 보면 분명 누구나 성공한 인생이라 생각할지도 모르지만 지금은 그 어느 누구든 그를 실패한 대통령으로만 여길 뿐이다. 이 자서전은 분명 영광과 성공에 대한 회고가 아니라 시행착오와 좌절과 실패의 회고록이다.

 

 그러나 내가 보기에 그의 치열했던 삶은 결코 패배자의 인생이 아니었다. 그의 죽음은 표면적으로 자살이라는 외피를 입고 있지만 그 외피를 벗기고 나면 비로소 정치적 타살의 흔적을 역력히 발견할 수 있다. 그 흔적들을 이 책<운명이다>에서 분명히 나는 보았다. 그가 생전에 싸웠던 것은 특혜와 특권, 반칙, 기회주의, 지역주의, 노동탄압과 인권탄압, 정경유착 등이었다. 그리고 우리 사회를 쥐고 흔드는 거대 보수 언론과의 싸움이었다. 이 언론과의 싸움은 외롭고 힘든 싸움이었다. 그는 원칙과 신뢰, 투명과 공정, 분권과 자율, 대화와 타협을 무기로 수구보수 언론과 승산이 없는 싸움을 벌이다 패했다. 그래서 그를 바보 노무현이라 하지 않던가.. 그 싸움의 결과는 참담했다. 언론과 검찰을 개혁하려던 그는 퇴임 후 언론과 검찰에게 상상할 수 없는 잔인한 보복을 당했다.

 

 그는 왜 이런 삶을 살아 올 수밖에 없었던 것일까? 변호사 생활을 하면서 그는 승률도 좋았고 수임률도 높았다. 3당 합당의 주체였던 김영삼 전 대통령을 따라 권력의 중심으로 갔더라면 그의 앞날은 출세와 성공, 부와 명예의 탄탄대로였을 것이고 오늘날 그의 실패는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정치적 야합과 기회주의, 지역분열을 낳았던 김영삼을 떠나 지역분열주의와 기회주의에 대항했다. 그는 화려한 학력도 없고 재산도 없었고 힘있는 빽도 없었다. 그가 가진 것이라곤 고통 받는 이웃에 대한 연민, 반칙을 자행하는 자에 대한 분노, 정의의 대한 열정 밖에 없었다. 이것이 바로 인간 노무현의 정신이다. 그가 만들려고 했던 세상은 바로 ‘사람 사는 세상’이었다. 특권과 반칙이 통용되지 않는 상식과 원칙, 민주적 질서로 굴러가는 세상 말이다.

 

 그는 왜 스스로 죽음을 택했을까? 물론 그의 주변에서 정당치 못한 자금이 흘렀고 그 돈을 그의 주변인물들이 떳떳하지 않게 사용한 정황은 분명히 있다. 특권과 반칙, 부정과 타협하지 않았던 그는 자신의 주변인들이 저지른 잘못까지 자신의 책임으로 돌렸다. 누가 그랬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자신이 대통령이었기 때문이라는 사실이 중요하다고 그는 생각했다. 그래서 자신의 죽음으로 자신의 원칙과 소신을 지키려 했고 잔인한 언론과 검찰의 보복의 순환 고리를 끊으려 했다. 그는 자기 자신의 결백을 끝까지 증명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는 그런 구차한 길을 택하지 않았다. 그런 길을 택한다면, 자신을 버리지 않을 사람이 너무 많을 것이고 그 사람들이 받을 고통을 그는 받아들일 수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그는 먼저 자기 자신을 버렸다. 그것이 자신의 운명이라 생각했다.

 

재임 중 수천 억 원 대의 비자금을 불법으로 조성하여 챙기고 권력을 위해 무고한 수많은 시민을 학살한 이들도 일말의 양심과 도덕조차 버리고 버젓이 산송장처럼 추하게 삶을 이어가고 있다.

이들의 삶에 비해 그의 죽음은 과연 지탄의 대상이 될 수 있을 것인가?

 

 만약, 그가 스스로 선택한 것이 옳지 않다면, 우리는 어떤 삶을 사는 것이 옳을까?

 

그의 선택을 지탄하는 사람들은 양심과 도덕을 버린 자들의 삶을 겉으로는 비난하면서도 실제로는 자기 자신도 그들처럼 살 기회가 오면 아무런 죄책감 없이 그런 추한 삶의 길을 걸으려 할 것이다. 지독한 이중적, 위선적 태도로 물든 우리 삶의 현실이다. 이 현실은 서글픈 자화상이다. 노무현은 많은 사람들이 그리고 있는 이 서글픈 자화상을 그리지 않았다.

 

 어떤 사람들은 그를 경제를 파탄 낸 장본인으로, 지위와 권력을 이용하여 돈을 받아 챙긴 파렴치한 범죄자로 여길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그 모든 실패를 변명하지 않고 말없이 인정했다.

 

 

이 책은 실패와 좌절의 회고록이다. 그러나 그의 정신은 아직 실패하지 않았다. 노무현 정신은 여전히 살아있다. 사람 사는 세상의 꿈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그의 정신과 꿈은 계속되어야 한다. 더 이상 봉하 들판에서 자전거 타는 그의 모습을 볼 수는 없지만 그의 정신을 계승하여 사람 사는 세상을 만들고 싶어 하는 사람들은 수없이 많다. 비록 그는 실패했지만 그의 정신을 소중히 간직하는 사람들은 언젠가 분명 승리할 날이 올 것이다.

 

 

노무현을 아끼고 사랑했던 사람이라면 이 책의 마지막 장을 읽을 때 손수건을 준비해야 할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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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빛 물고기
고형렬 지음 / 바다출판사 / 200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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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나라에 연어가 있을까?

나는 연어를 한번도 내 육안으로 직 접 본 적이 없다. 텔레비젼 방송의 동물의 왕국이나 자연다큐멘터리 프 로그램에 나온 연어의 모습이 내가 아는 전부이다. 알래스카나 동시베 리아의 캄차카 반도 같은 머나먼 이 국, 설산과 침엽수림의 광활한 숲, 시리다 못해 피부를 에는 듯한 맑고 깊은 이국의 강물을 힘차게 거슬러 오르는 연어들, 그리고 그들을 사냥하는 북국의 거대한 갈색 곰들.. 북국의 곰들이 알을 낳기 위해 소상하는 연어들을 잡아먹는 광경은 정말 인상적이었다. 서유럽이나 일본에서는 연어요리가 최고급 요리에 속한다는 것쯤은 잘 알고 있다. 비록 내가 한번도 맛 본적은 없지만 말이다. 이런 것들이 연어에 대해 내가 겨우 떠 올릴 수 있는 영상들이다. 내게 있어 연어는 그저 머나먼 이국, 북국에 서식하는 신기한 물고기, 혹은 야생곰과 인간에게 있어 최고의 음식 가운데 하나라는 정도다.

 

 그런데 우리나라에도 연어가 있었다. 아니, 지금도 연어가 있다고 한다. 외국의 동물다큐멘터리에서 볼 수 있었던 연어를 우리나라에서도 볼 수 있다.

강원도 양양의 남대천이나 경북 울진의 왕피천에는 지금도 연어가 10월경이 되면 알을 낳기 위해 소상한다. 놀라운 일이다. 더 놀라운 것은 그리 멀지 않은 과거(1950년이후 급속한 산업화 이전)의 낙동강에도 연어가 소상했다고 한다. 상상하기 어렵다. 강원도 양양의 남대천에서는 지금도 해마다 연어축제가 열린다고 한다. 이 책은 바로 양양의 남대천에서 태어나고 생을 마감하는 연어들에 대한 서사수필이다.

 

 고형렬의 산문 ‘은빛 물고기’는 우리나라 연어의 생태에 대해 쓴 최초의 글이다. 비록 에세이의 형식을 빌리고 있지만 이건 에세이가 아니라 한국에 찾아오는 연어에 대한 한편의 장엄한 대서사시라 할 만하다. 고형렬의 글은 산문 이상이 아닌 거대한 서사의 감동을 안겨준다. 일생동안 3천2백 킬로미터를 회유한다는 연어.. 그리고 그 연어들은 십여 년 간 끈질기게 그들을 추적해온 한 시인.. 고형렬은 불교적 세계관을 바탕으로 연어의 일생을 풀어내고 해설한다. 고형렬의 문장은 짧은 호흡으로 숨을 쉰다. 그 호흡은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의식도 하지 못한 채 허투루 쉬는 숨이 아니라 단전호흡을 하는 숙련된 기공사의 숨처럼 날숨과 들숨 하나하나마다 정성과 진실이 충만하다. 그의 문장에는 군더더기 없다. 그 이유는 1999년에 출간되었던 초판을 원고지 700매 정도로 줄여 재출간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여타의 에세이처럼 그의 문장을 가볍게 타고 넘어가기 어렵다. 그의 문장 하나하나는 와인처럼 천천히 음미하는 것이 좋다. 책에는 비록 연어 그림, 삽화, 사진 한 장 없지만 글의 묘사만으로도 연어의 생태와 연어의 세계를 상상하는데 지장이 없다.

 

 고형렬의 글은 1990년 가을, 강원도 삼척에서 시작된다. 삼척의 오십천은 작가 어머니의 고향이다. 삼척 신기리에서 젊었을 때 연어를 잡던 팔순의 고인봉 옹을 저자가 찾아간다. 고옹은 1944년을 기억해 낸다.

 

“ 연어요? 그해 무지 들어왔소. 엄청났소. 허, 그 이상한 놈들. 왜 알을 낳고 죽고 마는 건지. 알을 낳은 연어들은 며칠 못 가서 몸이 상합니다. 나무뿌리나 돌바위에 걸려서 눈을 뜬 채로 죽지요. 자기들이 무슨 일로 이렇게 죽어가는지를 어찌 알겠소. 날짐승들이 지 새끼 낳아 비바람 속에서 같이 살아내는 것 보면 거 눈물겹소.”

 

 그렇다. 모든 살아있는 것들이 그렇겠지만 삶이라는 것, 혹은 생명이라는 것은 경이롭다 못해 그저 눈물겹다. 연어같은 미물, 날짐승뿐만 아니라 인간도 마찬가지다.

 

 고옹이 연어를 잡던 하천에는 이제 더 이상 연어가 오지 않는다. 그 하천의 중류에는 거대한 보가, 그리고 하류에는 연어를 잡는 채포장이 설치되었기 때문이다. 아마 고옹은 죽을 때까지 연어를 보기는 어려울 것이다. 내가 살고 있는 곳에서 가까운 낙동강에도 과거에 연어가 소상했다고 한다. 지금의 낙동강은 환경오염으로 연어의 치어가 살 수 없는 불임의 강이 되어 버렸다. 정부가 건설하고 있는 낙동강의 거대한 보가 완성되면 낙동강은 아무리 물이 맑아져도 영원히 연어가 돌아오지 못하는 실향이 될 것이다. 그러나 낙동강 임해의 공업지대와 낙동강의 거대한 보를 없애는 것은 더더욱 불가능한 일이다.

고형렬은 이런 상황을 두고 비극이라 하였다. 연어를 볼 수 없는 것도 비극이고 공업지역을 없앨 수 없는 것도 비극이다. 아마 그 비극은 소수의 사람들만 느낄 것이고 시간이 지나면 대다수의 사람들은 그런 비극이 존재했는지 조차 알 수 없을 것이다. 연어의 생명과 인간의 생명은 근본적으로 다르지 않다. 돌아갈 수 없는 모천의 하구에서 헤매는 연어와 일생을 해매는 인간들은 놀랍도록 닮아 있다.

 

 과거엔 남해안의 낙동강, 섬진강 같은 큰 하천에 연어들이 나타났지만 지금은 연어의 소상이 거의 중부 동해 이북으로 북상했다고 한다. 1983년 이후 경남의 해안 하천은 연어 소상이 완전히 끊어졌다. 그리고 경북 울진의 왕피천은 강의 하구가 토사에 막혀버렸다. 연어회귀의 남방 한계선은 점점 북상해 가고 있는 것이다. 이대로라면 언젠가 남한에서 연어를 볼 수 있는 날도 없어질지 모른다.

 

 연어는 10월경에 모천으로 소상하여 알을 낳는다. 강원도 양양의 남대천에서 연어의 알이 수정되어 난황흡수를 마치는 기간은 10월부터 1월까지 4개월이 걸린다고 한다. 난황흡수란 것은 물고기의 치어들이 불룩한 배를 달고 다니다가 온전한 치어로 성장하는 것을 말한다. 난황에는 어미로부터 받은 온갖 영양분이 들어있다. 연어의 치어는 난황을 먹고 자란다.

연어 수정란들의 사란율(알이 죽는 비율)은 약 1.4퍼센터 정도인데 묘하게도 어미 연어들의 모천 회귀율과 비슷하다. 연어알 100개중에 1~2개만 죽고, 또 연어 100마리 중에 1~2마리만 고향을 찾아 올수 있는 것이다. 자연의 상수는 불가사의하기만 하다.

 

 1820년 조선조 서유구가 어류에 관해 저술한 책 난호어묵지는 연어를 年魚, 혹은 季魚라는 이름으로 소개하고 있다. 매년 모천으로 소상하는 연어의 습성을 보고 붙여진 이름일 것이다. 이런 우리나라의 연어와는 달리 외국의 연어명칭이나 문화는 차원이 다르다.

 

 연어를 영어로 salmon이라 하는데 인터넷 영어사전에서 이 단어를 검색해 보면 연어에 대한 영어 이름이 한 두개가 아님을 알게 된다. 간단히 소개하자면 다음과 같다.

모천에서 알에서 깨어난 연어의 치어를 영어로 alevin(앨러번)이라 한다. 그리고 모천에서 한해를 넘긴 2년생 연어는 smolt(스몰트)라고 부른다. 연어는 스몰트로 불릴 때 봄에 바다로 나간다. 바다로 나간 연어가 다시 알을 낳으러 고향으로 돌아올 때 쯤이면 연어의 이름은 grilse(그릴스)가 된다. 그릴스가 모천으로 돌아오면 이때부터의 연어는 비로소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salmon(샐먼)으로 불린다. 그런데 여기서 끝이 아니다. 산란후의 연어는 또 kelt(켈트)라고 한다. 북유럽의 켈트족은 연어와 관련이 있는 건 아닐까..

이렇게 영미문화권에서 연어의 이름은 연어의 생애별로 다양하다. 연어 문화는 영미권에서 훨씬 더풍부하고 다채롭다. 이런 다채로운 연어의 이름이 영미문화권에 존재하는 이유를 찾는 것은 어렵지 않을 것이다. 영미인들에게 있어 연어는 아득한 과거부터 생활의 일부였으리라..

 

 가을에 모천에서 탄생하여 겨울을 보낸 연어 새끼들은 봄이 되면 바다로 나간다. 그리고 해류를 타고 지구의 북쪽으로 올라간다. 연어들의 목적지는 북태평양이다. 연어가 한번도 가본 적이 없는 북태평으로 가는 움직임과 이유는 불가해한 비밀이다. 많은 학자들이 연구했고 지금도 연구하고 있지만 연어가 바다로 나가고 다시 모천으로 돌아오는 이유를 완전히 밝혀내지 못했다.

고형렬은 이렇게 말한다

 

“ 모든 것을 다 아는 것처럼 공부하고 행동하고 그렇게 믿고 살아가는 우리들이 그 답을 알지 못할 뿐이지 그 답이 없는 것은 결코 아닐 것이다. 인류의 역사가 어떤 비밀 속에 갇혀 있다 할지라도 우리는 연어들이 회유하는 비밀을 알 수가 없다. 우리는 그 비밀 밖의 문지방에 서 있는 천진무구한 아이들일 뿐이다.”

 

 연어는 냉수어종이다. 그들은 동해의 수온을 따라 회귀를 시작한다. 동해안은 여름이 다가올수록 수온이 상승한다. 한여름엔 수온이 26도까지 올라가는데 이런 수온에서는 연어가 살 수 없다. 차가운 해류는 북쪽으로 이동한다. 연어는 차가운 수온과 해류에 몸을 맡긴다.

 

 “강원도 남대천 앞바다에서 떠나온 그들이 북태평으로 향하고 쿠릴열도를 벗어나 알류산 열도에 진입할 때면 이미 그들중 9할은 죽고 백에 대여섯 마리만 살아남는다. 이 살아남은 일부의 연어들이 대를 잇는 특별한 존재들이다. 그들 중에 살아서 고향에 돌아오는 연어는 100마리에 1.4마리꼴, 그러니까 200마리에 3마리 정도만 살아남아 돌아갈 뿐이다. 성냥개비만한 연어 치어들이 살아남아서 베링해까지 도달한다는 것이 믿어지지 않는다. 그들이 이동하는 곳마다 먹이는 풍부하지만 그야말로 천신만고의 여정이 아닐 수 없다.”

 

 연어의 생존률은 기적같은 일이다. 연어의 삶 자체가 기적같은 일이고 그 기적같은 연어에게는 또 한가지 불가해한 일이 있다. 연어가 북태평양의 베링해에서 2년정도를 보내고 나면 자신의 고향인 모천으로 돌아온다. 너무나아득하고 멀고 험한, 그리고 그 연어들의 피조차 얼려버릴 듯한 혹한의 북해에서 무려 3천2백킬로미터를 다시 아래로 여행하여 강원도 양양의 남대천으로 정확히 찾아오는 일이 바로 그것이다.

 

 그리고 이 것보다 더 불가해한 일은 모천으로 회귀한 연어는 그 순간부터 절대로 먹이를 입에 대지 않는 것이다. 마치 자신들의 죽음을 이미 알고 있는 듯이 말이다. 연어는 산란을 위해 모천에 돌아온 날부터 오직 물만 삼켜서 아가미 쪽으로 내보낸다. 암수가 똑같이 굶는다. 마치 먹는 일을 잊어버린 것처럼..

 

연어가 소상하여 먹이를 먹지 않는 시점부터 연어들은 짝짓기를 하고 부부가 되고 산란을 한다. 짝을 찾지 못한 수컷들도 죽음을 피할 수 없기는 매한가지다. 암컷들은 하천 바닥의 모래와 자갈을 파내고 자신들의 아랫배가 다 찢어져 너덜거리게 될 정도로 혼신의 힘을 다하여 산란을 한다. 물고기를 잡아서 알을 짜내본 사람들은 알겠지만 물고기가 알을 낳을 때 그들의 아랫배 피부는 작고 가는 구멍이 되고 그 피부가 파열되어 알들이 나오게 된다. 그리고 수컷들은 암컷이 낳아놓은 알 위에 정액을 뿌린다. 부모가 된 연어들에게 남은 일은 죽음밖에 없다.

 

 연어는 한번 알을 낳으면 다시 알을 갖지 못하고 모천에서 죽는다. 이것을 연어의 일생일란一生一卵이라고 한다. 산란을 마친 연어에게 남은 건 죽음이다. 연어는 아비와 어미가 되면 물 속 세상에서의 인연은 끊어진다. 부모가 된다는 것은 곧 죽음을 의미한다. 그러나 연어들에게서 죽음의 두려움은 전혀 보이지 않는다. 연어가 산란하기 전부터 먹이를 전혀 먹지 않는 이유는 자신들의 후손을 남기는데 있어 부모의 생명에너지를 온전히 후손들에게 전해주기 위해서일 것이다. 고형렬은 연어 아비와 어미의 마지막 모습을 담담하게 그려낸다. 그러나 그도 인간이고 인간이란 부처처럼 탈속의 경지를 넘어서지 못하는 이상 희노애락과 감정의 굴레에서 자유로울 수 없을 것이다. 그래서 그의 연어에 대한 마지막 묘사는 비록 담담해 보이고 무심한 카메라의 렌즈같이 투명하고 중립적으로 읽혀지지만 그 이면에는 연어 부부의 애틋한 인연에 대한 아쉬움과 슬픔이 배어있다. 그러나 고형렬은 연어의 생과 사를 불교적 세계관으로 다음과 같이 풀어낸다.

 

“ 연어 부부는 죽을 때 동시에 출생한 것처럼 같은 시간에 생명이 끊어진다. 켈트들은 물살에 밀리기 시작한다. 살은 허옇게 되면서 연어의 목에 붙은 생명의 끈은 극명한 한계에 다다른다. 속살의 다홍색도 다 빠지고 푸석푸석해졌다. 온몸을 감싸고 있던 아름답던 은빛 비늘은 뽑혀나가고 한쪽 눈은 빠져서 덜렁거린다. 이 몸들이 대양을 질주해온 연어들이었던가.

남편은 서서히 숨이 끊어진다. 아내도 곁에서 같이 운명하려고 밭은 숨을 고른다. 상대방에 대한 아무런 유언도 당부도 부탁도 남기지 않고 물과 함께 흘러간다. 저만치 각기 다른 물길에 몸을 싣고 물살을 따른다. 아내는 남편을, 남편은 아내를 잡아줄 수가 없다. 이승에서 맺은 그들의 인연은 여기에서 끝나고 있다.

부부는 잠시 동안의 부부였다. 저들이 언제 펄펄 뛰던 연어였던가. 수정을 마치고 그들은 허무하게 사라져간다.

연어들의 팔만사천 감정은 다 소용없는 일이 되었다.“

 

부모가 된다는 것은 희생을 전제로 한다.

 

연어 부부의 육신은 물결에 쓸려 사라져 간다. 그러나 부부가 세상을 떠난 뒤, 그 해 겨울을 나면 다시 아이들은 태어난다. 연어 어미들이 죽어간 그 남대천에 그 아이들이 모래알처럼 숨어 있다. 그 아이들은 또다시 그들의 어미처럼 저마다의 생의 법을 지켜갈 것이다. 생명이란 자신인 알이 자신인 어미를 먹는 일이고 또 스스로 자신의 목숨을 버리는 일이다. 그러지 않고서는 다른 생의 인연으로 건너갈 수가 없을 것이다.

 

고형렬의 서사는 연어 채포장에서 끝이 난다. 이제 더 이상 연어들이 마음놓고 생과 사를 이어갈 터전과 환경이 없는 것이다. 사람들은 모천의 하구에서 연어를 잡아 알을 수집하여 인공부화시켜 이듬해 봄에 바다로 내보낸다.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연어를 영영 볼 수 없다는 것을 알기 때문일 것이다. 연어가 저절로 소상하지 않는 텅 빈 하천들.. 고형렬은 그 아쉬움을 이렇게 말한다.

“ 얼마 전까지만 해도 먼 과거로부터 이어져온 격식 있는 생사법이 있어서 그들은 연어다운 일생을 마감할 수 있었다. 그러나 사람들에게 아름다운 산행의 장례가 사라진 것처럼 연어들도 인공을 수정되고 몸은 피로 처분될 뿐이다. 먼 훗날 콧속에 붙은 흑운모나 화강암, 편마암으 향기를 찾아 여인의 속살 같은 남대천을 찾아 돌아갈 수 있을까? 그리고 나는 그때 그들의 친척인 그 귀여운 무명들을 기억할 수 있을까.”

 

 이제 고형렬의 글을 읽고 난 지금, 연어의 존재란 내게 더 이상 특별하지 않다. 내가 바라는 것은 연어들에게 있어“먼 과거로부터 이어져온 격식 있는 생사법”이 사라지지 않는 것이다.

 

 

 

 

 

                                                                                                   2011년 2월 19일 작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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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도원
아사다 지로 지음, 양윤옥 옮김 / 문학동네 / 199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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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며칠 전 대구에 첫눈이 내렸다. 예전에 여긴 눈이 귀했지만 요 몇 년 사이 기후변화 탓인지 겨울철 눈이 잦다. 경험상 첫 눈은 늘 모두가 잠든 한밤에 내렸는데 이번 첫 눈도 역시 그랬다. 일어나자마자 밤새도록 내리 쌓인 하얀 설경을 바라보는 건 일상에서 드문 낭만이다. 물론 그 낭만은 오래가지 않고 금새 출근걱정으로 이어진다. 멀리서 바라보는 눈은 센티멘탈하게 해주는 매개가 되지만 내 몸에 닥치는 눈은 여지없는 현실이 된다. 질척이는 눈뭉치는 지저분하고 걷기에 불편하다. 눈길에서 제힘을 쓰지 못하는 자동차들의 거대한 패닉상태를 보라. 눈은 얼마나 이중적인가.

 

추위에 약한 체질탓인지 군복무 시절 경험한 경기 북부의 그 혹독한 추위와 지긋지긋한 폭설 때문에 나는 중부지방보다 훨씬 따뜻하고 눈이 거의 없는 이곳 대구에 거주하는 것을 다행으로 여긴다.

 

  이제 눈이 귀찮은 존재가 된 건 그만큼 나도 어지간히 나이를 먹었다는 증거인가. 올해 첫눈이 온 날 아침은 마침 야간 출근조였다. 오후가 되면 눈은 녹을 것이고 아침에는 출근 걱정이 없어 오랜만에 눈을 즐길 낭만과 여유가 생긴다.

 

 

 겨울 첫 눈이 오면 늘 책장에서 꺼내보는 책이 있다. 바로 일본작가 아사다 지로의 단편소설집 철도원

 

 눈에 얽힌 추억은 많이 있지만 눈이 오면 생각나는 책은 이 철도원이 유일한 것 같다.눈이 사람에게 주는 효능 가운데 하나는 바로 정화다. 아사다 지로의 단편소설<철도원>은 하얗게 내린 눈처럼 마음이 정화되는 카타르시스와 목젖을 울컥하게 하는 감동이 있는 슬픈 이야기다.겨울철이면 늘 막연하게 누군가가 그리워진다. 막연한 그리움의 대상은 또렷한 모습이 없으면서도 늘 가슴을 먹먹하게 만드는데 그런 날이면 아사다 지로의 눈처럼 시린 슬프고 따뜻한 이야기를 천천히 읽는다. 읽고 나면 답답했던 가슴이 풀리면서 따끈하게 데운 캔커피 처럼 마음이 훈훈해진다. 

 

 

 소설의 배경은 끊임없이 눈이 내리는 일본 북부 홋카이도 지방의 시골 간이 역인 호로마이 역. 호로마이 역은 한때 메이지시대 이래 최고의 탄광촌으로 기세를 떨치던 곳이었지만 이제는 역장 오토마츠의 퇴직과 함께 폐쇄될 운명의 쓸쓸한 노선. 1970년대 석탄산업의 활황기 때 수많은 사람들로 붐볐을 강원도 태백이나 정선의 기차역들을 떠 올리면 족할 듯하다. 호로마이 역의 역장인 오토마츠는 이곳에서 45년을 근속하고 정년퇴직이 얼마 남지 않았다. 오래된 만화영화 은하철도 999에 등장했던 투명인간 차장이 입은 바로 그 투 버튼 검정색 철도원 코트. 소설 속에 묘사된 오토마츠가 입은 철도원 제복도 바로 그런 코트이다.

 

 오토마츠는 자신의 직업에 투철한 사내다. 그는 하나밖에 없었던 늦둥이 딸이 동사해 돌아온 날도 열차 안내 깃발을 흔들며 딸의 주검을 실은 기차를 맞고 여객 일지에 "이상 없음"이라 적는 철도원이다. 그리고 그의 아내가 멀리서 숨을 거두는 순간에도 역에서 마지막 기차를 배웅하는 업무를 완수하고 나서야 숨진 아내가 있는 영안실을 찾아간다. 오토마츠 대신 아내의 임종을 지킨 건 동료 철도원의 아내였고 그녀는 아내의 임종소식을 듣고도 곧장 달려오지 않은 오토마츠를 매정하고 박정한 인간이라고 비난한다. 눈이 얼어붙은 외투 차림으로 아내가 있는 영안실에 왔으면서도 끝내 울지 않았던 오토마츠에게 동료 철도원의 아내는 어째서 울지도 않느냐고 따지고 들자 그는 이렇게 중얼거린다.

“나도 철도원인데, 사사로운 집안 일로 눈물을 보이겠습니까?”

 

 

 보통 사람들의 정서로는 이해할 수 없는 일이다. 작가는 너무 작위적인 설정으로 슬픔을 자아내려 하는 것일까. 자신의 가족이 죽어가는 순간에도 역장의 책임을 다하려는 오토마츠는 과연 어떤 사람인가. 그는 가족보다 역장이란 임무가 더 소중했던 일 중독자였던 것일까. 아니면 그저 지독히 고집 세고 우직하기만 해서 융퉁성이 전혀 없는 인간이었을까.

 

 또다시 눈 내리는 추운 12월의 마지막 밤. 오토마츠와 그의 오랜 친구 센지는 새해를 맞기 위해 눈덮힌 호로마이역을 지킨다. 센지는 일찍 잠자리에 들고 오토마츠는 늦은 밤이 되도록 잠을 이루지 못한다. 정월 초하루는 오토마츠의 딸 유키코의 기일이기 때문이다.

 

 늦은 밤, 호로마이 역에 처음 보는 여자아이가 나타난다. 낮에 역에 놀러왔다가 인형을 놓고 간 어린소녀의 언니가 동생의 인형을 찾으러 온 것이다. 낮에 놀러왔던 소녀는 내년이면 학교에 입학한다면서 작은 책가방까지 맨 귀여운 아이였다. 오토마츠는 역 주변 마을 주지스님의 딸들인 줄 알고 아이들을 따뜻하게 대해준다. 그날 밤, 마지막에 나타난 언니는 오토마츠의 딸이 살아있었더라면 꼭 같을 또래의 고등학생 소녀다. 그녀는 오토마츠에게 따뜻한 새해 밥상까지 차려준다. 소녀가 끓여준 된장국은 생전의 아내가 끓여내던 바로 그 된장국 맛이다. 오토마츠는 자신의 딸 유키코를 회상하며 즐거운 밤을 보낸다. 쓸쓸하고 적막한 호로마이역을 찾아온 그 소녀들은 누구일까.

 

 오토마츠가 결혼 17년 만에 얻은 어린 외동딸은 호로마이역에 딸린 문풍지 바람이 끊일 새 없는 사무실 겸 살림방에서 추위를 못 이기고 먼저 세상을 떠났다. 오토마츠는 늘 자신의 직업이 아이를 죽인거라는 죄책감으로 한평생을 보낸다. 그러나 이제야 찾아온 딸은 그런 오토마츠를 원망하기는커녕 오히려 자신이 자식노릇 한 번 못하고 죽어버렸다면서 오토마츠를 위로한다. 아버지는 철도원이니까.. 그게 아버지 직업이라면서 말이다.

 

 

  오토마츠가 새해 새벽에 죽은 자신의 딸과 재회하는 장면은 눈시울이 찡해지지 않고는 견딜수 없는 장면. 독자의 눈물과 슬픔, 그리고 가슴을 뜨겁게 하는 감동을 자연스럽게 이끌어내는 작가의 솜씨에 감탄하게 된다.

 

 꿈에도 그리던 딸을 만난 날, 오토마츠는 그날의 여객일지에도 여전히‘이상 없음’이라고 적어넣는다. 그리고 새해아침, 오토마츠는 눈덮인 플랫폼에서 호루라기를 입에 물고 손깃발을 꼭 쥔 채 주검으로 발견된다.

 

 오토마츠와 딸이 만나는 장면에 이르러서야 나는 오토마츠를 이해할 수 있었다. 시커먼 제복차림에 시린 눈 냄새 풍기며 역무원의 일에 몰두했던 오토마츠의 모습에서 내 아버지를 떠 올릴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아버지는 하루도 거르지 않고 새벽에 일어나서 들판으로 달려가셨다. 우리 아버지와 어머니는 가정을 돌보지 않는 듯이 새벽부터 들판으로, 직장으로, 생업의 터전으로 향했다. 그리고 밤이 늦어 아이들이 잠든 뒤에 고단한 몸을 이끌고 집으로 돌아오셨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자신의 가정을 지킬 수 없었을 것이다. 가난과 궁핍을 물려주고 싶지 않았던 본능이 우리 아버지들을 그렇게 가정과 멀어지게 하지 않았을까. 그리고 그런 본능에 충실했던 것이 그들이 저지른 유일한 실수라면 실수이리라.

 

 그러나 나는 아버지의 그런 실수를 원망할 수 없다. 이 작품의 오토마츠를 미워할 수 없는 것처럼 말이다. 산업화시대 우리 아버지와 어머니는 대부분 그렇게 살았다. 시골 간이역에 오토마츠를 대신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덩치 큰 기차가 들어오면 레일도 바꿔줘야 하고 역에 들어오는 열차를 수신호로 안내하면서 안전하게 정차할 수 있게 해야 한다. 버스처럼 혼자 와서 혼자 출발 할 수 있는 그런 시스템이 아닌 것이다. 소설에 보이는 오토마츠의 고집이나 일에 대한 무서운 집착은 비현실적이어서 그런 사람이 정말 있기나 한 것일까 하는 의문이 들 정도다. 그러나 한평생 실수를 저지르지 않고 사는 사람은 없다. 어려운 시대를 살면서 어쩔 수 없이 그런 실수를 한 우리 아버지들의 모습을 더하고 더한 평균적 인물이 바로 오토마츠 역장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오토마츠는 가정을 돌보지 않았던 일 중독자가 아니라 그런 시대를 그렇게 견딜 수밖에 없었던 또 하나의 희생자라고 해야 할 것이다. 딸이 죽고 아내가 죽던 날도 여전히 여객일지에 이상 없음’이라고 적어야 했던 것처럼 우리의 삶이란 것도 그렇게 돌아간다.

 

 한쪽에서는 사랑하는 가족과 애인과 친구를 상실하고 슬픔과 비탄에 잠긴 사람들이 힘들어해도 우리가 사는 세상은 끝없이 이어지는 기차 레일처럼 꿋꿋이 이어진다. 슬픔에 잠겼던 사람들, 잠시 희망을 잃었던 사람들이 다시 돌아올 수 있는 삶의 터전은 바로 오토마츠가 여객일지에 적어 넣은‘이상 없음’의 바로 그곳일 것이다. 사람들은 기찻길 위에서 만나고 헤어지면서 희로애락의 매듭을 이어간다. 오토마츠는 기차레일이 아닌 레일 밑의 거대한 침목 같은 존재가 되고 싶었을 것이다. 레일 밑에 깔린 단단하고 묵직한 침목이 있어야 기찻길은 안정적으로 유지된다. 열차와 열차를 타는 모든 사람들의 삶의 하중과 희로애락을 떠받치면서도 움직이지 않는 고요하고 든든한 기차레일 밑의 침목은 삶의 토대며 근본이다. 오토마츠의 삶이 감동을 주는 이유는 세파에 흔들리지 않는 침목 같은 삶의 중심에 대한 믿음을 져 버리지 않았던 철도원이었기 때문이리라. 눈이 많이 내린 겨울 아침에 어울리는 아름다운 이야기다.


 아사다 지로의 단편소설집 철도원에는 단편<철도원>외에도 주옥같은 7편의 단편이 실려있다. 옮긴이의 말을 들어보면 아사다 지로는 일본에서 '가장 탁월한 이야기꾼'으로 손꼽히는 작가라고 하는데 <철도원>이나 <러브레터>같은 단편을 읽어보면 그런 수식이 어떻게 붙었는지 실감할 수 있다. <러브레터>는 한국에서 최민식과 장백지 주연의 <파이란>이라는 영화로도 만들어졌고 <철도원>은 1999년에 일본에서 영화로 제작되었는데 주연을 맡았던 일본 국민배우 다카쿠라 켄의 연기도 정말 좋았고 딸 연기를 했던 히로스에 료코의 청순한 모습도 좋다. 역장역을 맡았던 다카쿠라 켄은 올해 11월에 암으로 세상을 떠났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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