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밤에 잠을 설쳤다. 친구가 내 방에서 자게 되어 객(客)을 존중하는 마음에 그의 생활리듬에 나를 맞춰야 한 탓이다. 눈을 뜬 채로 긴긴밤을 지새웠다. 동주는 밤하늘을 보고선 별을 헤아렸다지만 내겐 어두컴컴한 천장만 검은빛으로 제 존재를 드러냈다. 수많은 명상 속에 새해를 맞아 나를 돌아보기로 했다. 꿈처럼 살아왔던 지난날이 ‘즐김’이 아닌 ‘견딤’에 가깝다는 걸 깨닫게 된 건 찰나(刹那)였다.

부러 나를 꾸미려한 적은 없었다. 주어진 상황에 최선을 다하려하고 현실을 잘못됨을 지적하려 애썼다. 그러다보니 마음이 시나브로 야위어가고 인간관계도 옅어져갔다. 따스히 보듬어야했고 내 미욱함을 고백했어야 했는데 말로 나를 감싸고 글로 나를 치장했더랬다. 점점 내가 원하는 건 무엇인지 모르게 되고 쟁여둔 미움과 분노만 남았다. 그렇게 얼룩진 마음이 천장에 그려졌다. 거울처럼 나를 샅샅이 비쳐냈다. 심장의 고동이 느껴졌고 피가 도는 걸 인지할 수 있었다. 스스로에게 고해성사를 한 기분이었다.

그릇된 일을 저질러 놓곤 나를 감싸기에 급급했던 시절이 떠올랐다. 나는 왜 세상을 흑백논리로 재단했을까. 타인에게 솔직하지 못했으면서 나를 알아주지 못하는 그들을 왜 원망했나. 나를 떠받드는 켜켜이 쌓인 논리에 매몰돼 왜 스스로를 학대했나. 이런저런 생각들 덕에 마음이 한결 푼푼해졌다. 나를 사랑하기로 했다. 기분이 좋아졌다.

어느 순간부터 인생이란 실에서 매듭을 찾기 어려웠다. 시간은 의미 없이 흘러가고 나는 그 덧없음 속에서 유장한 흐름만 좇았다. 유년 시절엔 한 학년이 끝나면 자연히 매듭이 지어졌지만 20살 이후론 달랐다. 누군가 매듭을 지어주지 않고 내가 매듭을 묶어야 하는 능동적 사고가 요구됐다. 서투른 재주로 매듭을 지으려다 보니 성긴 매듭이 많았고 어떤 매듭은 체 짓지도 못한 채 인생은 흘러갔다. 내 성긴 인생의 실타래를 바라보며 조금은 더 아름다운 사람이 되길 소망해 본다. 내가 자아낸 실을 애틋함보단 대견함으로 바라보기로 한다.

이제 내가 가진 미의식(美意識)에 걸맞은 사람이 되기 위해 마음을 쏟을 때다. 어제 본 ‘전우치’란 영화에선 쇼팽 작품번호 25번의 11번 ‘겨울바람’이 흘러 나왔다. 여인의 차디찬 냉기가 흐르기 직전의 선곡이었다. 쇼팽보다 잔약하고 여인네보다 시린 오늘이다. 그래도 마음이 따스하니 적이 만족스럽다. 내게 불면의 밤을 선사해준 자랑 같은 친구에게 고맙단 말을 전하고 싶다. 참고로 강동원은 내 초등학교 2년 선배다. 남양초등학교가 자랑스럽다. ㅎ 



댓글(0)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하나는 여섯 달 전에 읽었고 하나는 어제 읽었다. 둘의 결은 비슷하다. 그의 삶과 고민이 골자다. 말하는 방식이 다르다. ‘고민하는 힘’은 직접적이고 ‘청춘을 읽는다’는 간접적이다. 존재론적 고민과 시대에 대한 고민이 씨줄과 날줄처럼 얽힌다. 두 책은 나스메 소세키의 이야기와 막스 베버의 책을 통해 자기 삶을 반추하며 진행된다. 일본의 국민 작가라지만 국내엔 익숙지 않은 소세키이기에 그 닿음이 살갑진 않다. 그래도 지그시 받아들일 정도는 된다.

다만 그런 고민이 현재의 문제를 해결하는 데 도움 될 진 의문이다. ‘책 읽는 밤’에서 철학자 탁석산은 고민이 보이지 않는 책이라며 위 책을 폄하했다. 그의 고민거리라고 해봤자 재일 한국인이란 정체성과 자본주의, 일본의 미래에 대한 고민인데 유한계급(有閑階級)이란 신분과 도쿄대 교수라는 지위는 고민을 하나로 레저로 보이게 한다. 인문학이란 원래 어려워야 하고 인문학 자체의 힘은 그러한 힘듦을 뚫고 나오는데 있다. 이런 연성화된 책을 시쁜 눈으로 바라보는 이유다. 자기 계발서와도 비슷한 홍보문구 또한 책의 진정성을 의심케 한다.

편집도 독자에 대한 배려보단 아름다움에 치중한 듯하다. 표지 디자인은 좋지만 전체적 편집이 헐겁다. 책은 여백으로 가득하고 각주가 아닌 주석을 뒤 페이지에 몰아넣은 건 가독성을 떨어트린다. 자신의 과거를 반추하는 부분은 글을 생동감있게 하나 제 생각을 읊조린 부분에선 공감하기 힘들다. 제 작은 아버지가 서울의 매우 부자였단 사실을 기술하는 부분에서도 그의 관심은 서울의 척박한 환경에 쏠린다. 사라지는 것에 대한 향수, 문화적 심미안같은 것들은 불안이란 실존적 감정이 제거되고 난 뒤에야 스멀스멀 올라오는 여분의 것이다. 요즘은 불안은 하나의 좌표에 의지하여 이겨낼 만큼 단선적이지 않다. 고민의 결과물이 여윈 탓으로 이 책은 누군가의 불안을 다독일 진정성이 부족해 보인다. 제 청춘에 관한 과한 나르시시즘만 미만하다.

로쟈님이 책 후기에 서평을 써 주셨다. 고운 말로 이 책의 헐거운 부분을 메우려고 하나 텍스트 자체의 미진함을 극복하긴 힘들다. 오히려 로쟈님의 서평이 책 자체보다 좋다. 재일 한국인의 성장기는 ‘고’라는 영화를 통해 익히면 되고 실존에 관한 고민은 좀 더 진지한 책을 읽고 생각을 벼릴 일이다. 일상의 잗다란 근심도 해결하지 못하는 대중에게 다소 외로된 고민은 야위어 보인다. 아쉽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어릴 때 외가는 시골에 있었다. 방은 미닫이문으로 구분되었고 창호지가 바람막이를 했다. 가끔 외할머니가 창호지를 풀에 먹여 문에 바를 땐 신기해 보였다. 얇디얇은 종이가 추위를 막아주는 원리가 와 닿지 않아서였다. 창호지의 방한 기능은 겨울에 명징했다. 뜨거운 구들장 덕에 더울 때면 창호지에 구멍을 뚫어 온도를 조절하곤 했다. 사촌 형들도 항상 북적였기에 그런 바람은 차갑기 보단 시원했다.

부엌은 외따로 있었다. 겨울이면 나무로 된 마루가 얼음장처럼 시렸다. 큰 대야에 물을 받아 놓고 설거지를 하거나 밥을 하던 외숙모들이 지금도 선하다. 물을 끓여 머리를 감고 얼음을 깨어 손을 씻던 그런 수줍은 날이 있었다.

가장 재미있었던 건 불을 때던 아궁이었다. 솔잎을 넣으면 불은 삽시간에 옮겨 붙곤 했다. 불이 주는 따스함과 주홍빛 황홀함은 시간을 잊게 했다. 종종 큰 나무 조각과 불쏘시개 몇 개로 불을 지피곤 했다. 나무를 많이 넣으면 방이 너무 뜨겁다며 손자를 나무라던 외할머니 생각이 난다. 외할머니는 창고를 ‘고방’이라고 했고 종종 일본어가 섞갈린 우리말을 하곤 했다. 그런 외할머니의 온건한 보살핌이 좋았다.

네 살 무렵, 외할아버지 집 마당에서 놀고 있는데 엄마가 보이지 않았다. 외할머니는 밭을 메러가고 외할아버지는 붓글씨를 쓰고 계셨다. 엄마가 보고 싶었다. 19번 버스 종점에 가면 엄마를 볼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지금은 지척이지만 당시엔 꽤나 멀었던 그곳에 가서 엄마를 기다렸다. 쭈그리고 앉아 땅에 그림을 그리며 울지 않으려 이를 꽉 깨물고서 시린 손을 꽉 쥐었다. 버스는 오갔지만 엄마는 오지 않았고 오기보단 서러움에 싸여 시간을 보냈다. 헌데 외할머니가 내 뒤에 나타나더니 한창을 찾았다며 그제 서야 마음이 놓인 듯한 살가운 눈웃음을 지으셨다. 왜 이 먼데까지 나와 있냐며 어여 집에 가자고 하셨다. 나는 엄마 올 때 까진 외갓집에 가지 않을 거라며 앙탈을 부렸다. 외할머니는 사탕을 사주겠다며 손자의 어리광을 다독였다. 그리고선 나를 엎고 집으로 갔다. 집에 있으면 엄마가 올 거라 하시며 채근하는 손자의 등을 쓰다듬으셨다.

멀리 가면 나쁜 사람이 잡아간다는 외할미의 말이 무서웠는지 나는 집 앞에서 엄마를 기다렸다. 얼마 후 엄마가 한복을 입은 채 택시를 타고 내렸다. 난 엄마를 향해 울며 달려갔다. 말 그대로 길 잃은 아이가 서럽게 울듯 난 엄마를 탓하며 세상이 떠나가라 울었다. 내게 조금 엄하게 대해왔던 엄마였지만 그때만큼은 따스한 웃음을 보였다. 그리고선 아마 새근새근 잠이 들었을 테다. 엄마 품에 안겨, 하루 종일 서성이던 버스 정류소를 잊어버린 채.

불현듯 옛 기억이 떠오른 건 엄마의 전화 때문이었다. 26일이 외할머니 제사라며 내려올 수 있으면 시간을 내보라 하셨다. 굳이 무리할 필요는 없으니 편한 대로 하라는 말에 왠지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엄마의 관심이 조금은 부담스러웠던 내 미욱함 때문일 테다.

내가 대학을 갈 때 쯤 외갓집은 기와집에서 신식 양옥으로 리모델링을 했다. 그때는 그런 치장과 함께 옛 기억조차 바래 질 거란 생각은 못했다. 그저 추억의 공간이 하나 사라지는구나 하는 덤덤한 마음만 가득했다. 나와 영원히 함께 할 것 같던 사람과 공간들이 시나브로 옅어진 지금에서야 과거의 흔적을 떠올린다. 따뜻하던 아궁이도 사라지고, 닭이 뛰어놀던 그 널찍한 마당도 콘크리트로 덮였다. 북적거리던 친척들도 재산 다툼이나 각자의 외로된 사업에 골몰하느라 외따로 흩어졌다.

지아비와 어미의 부재를 절감하는 울 엄마의 공허한 마음이 겨울처럼 시릴 요즘이다. 나 또한 애틋한 그리움에 마음이 아려오는데 엄마는 갑절로 옛사람과 추억을 고파할 테다. 죽은 외할미의 넋을 달래고 엄마의 지친 어깨에 힘이 되고 싶다. 아무래도 이번 주엔 시간을 내서 진주를 가야겠다. 엄마를 보둠어야겠다. 그때 외할미의 등이 나를 보둠었듯이.


댓글(4)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무해한모리군 2009-12-22 09: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 외가집도 초가였는데, 할머니가 돌아가시고 폐가가 되었어요. 할머니가 병원에 입원하셨다 돌아가셨는데, 집을 비운 사이에 시골빈집 전문털이가 있는지.. 우리 생각엔 값이 될것 같지도 않은 소여물통이며, 한지발라진 집 문틀이며(참 신기한거 같아요 종이한장 발랐는데 안춥다는게..) 하여간 벽만 빼고 다 뜯어가버렸어요.. 추억도 남의 추억 뜯어다가 팔고, 돈주고 사서 지 아파트 장식하는데 쓰는 세상이예요 --

바밤바 2009-12-23 19:01   좋아요 0 | URL
많이 각박해졌네요~ 이제는 벽도 뜯어가는 사람 나올 듯 .. ㅠㅠ

비로그인 2009-12-22 09: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가끔 어릴적 놀던 마당과 봄볕에 앉아 있던 마루가 생각나곤 합니다. 오랜만에 들른 그곳은 제 기억속 크기보다 작아져 있어 놀랐는데 이젠 다시 볼 수 없어 아쉽네요.

후 아궁이. 불 너무 쬐면 밤에 오줌싼다고 하시던 기억도 납니다. ^^

바밤바 2009-12-23 19:02   좋아요 0 | URL
아궁이 참 좋았는데~ 그립고 그리워 그립네요~ ㅎ
 

 

 큰 것에 별로 욕심이 없다. 자잘한 것에 더 끌린다. 그 자잘함이란 소박함과도 닿아있다. 그러다 보니 일의 우선순위가 섞갈리기 일쑤다. 그런 내게 친구들은 독기를 품고 살라 한다. 좀 더 진중하고 가열 차게 산다면 남보다 편히 살 거란 말을 덧붙인다.

 그들의 말이 지극히 옳다고 생각한다. 잗다란 것을 좇다 큰일을 그르치곤 하기에 그렇다. 허나 그런 그르침이 나를 성장시키는데 도움이 될 거라 위로하며 살았다. 문제는 나이였다. 살아 온 시간이 점점 두터워지며 운신의 폭이 좁아지고 있다. 마음 가는 데로만 행동했더니 삶이 점점 야위어간다. 불현듯 이런 생각이 드는 건 얼마 전 알라딘에서 했던 서평 대회 때문이다.

 서평 대회 기간에 내겐 중요한 시험이 있었다. 그 시험을 잘 봐야 내 인생은 노력보다 빛날 수 있었다. 허나 나는 책을 읽고 흔적을 남기는데 열중했다. 3일 정도 공부하면 될 거라 여겼지만 경쟁자들은 한 달은 넘게 꾸준히 준비하고 있었다. 결국 나는 그 시험에서 떨어졌고 다시 서평을 쓰며 마음을 눅였다. 헌데 내가 쓴 서평 중 단 하나가 당첨됐다. 공들여 쓴 서평들이었는데 마음 가는 데로 쓴 한편만 된 거다. 화가 났다. 묘한 경쟁심과 스스로의 쾌락에 도취되어 일의 경중(輕重)을 파악하지 못한 미욱함이 원망스러웠다. 서평을 쓰는데 들인 노력의 반만 기울였어도 시험을 통과하긴 어렵지 않았을 테다. 작은 보상으로 큰 상실을 메우려 했던 마음에 금이 갔다.

 그래도 서평은 계속 쓸 예정이다. 이제 할 게 별로 없어졌기 때문이다. 오늘도 학교 도서관에서 친구 이름으로 황석영 씨 책 네 권을 빌렸다. 다만 알라딘이란 사이트가 곱게 보이지 않는다. 마케팅 전략에 넘어가 인생을 둘러가게 된 현실 때문이다. 물론 이 모든 게 내 탓이란 자기 객관화 정도는 가능하지만 마음을 삭히기 어렵다. 아.. 진짜.. 짜증난다!!


댓글(3)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무해한모리군 2009-12-17 18: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런!
도닥도닥 다시 볼 수는 없는 시험인거예요?

바밤바 2009-12-18 14:56   좋아요 0 | URL
내년에 볼 수 있는 시험인거예요 ㅠㅠ
누나~ 맥주 사줘요~ 엉엉

무해한모리군 2009-12-23 15:57   좋아요 0 | URL
좋아요 맥주를 사겠어요!
 

 

 지인들과 대학로에서 커피를 마셨다. 익숙한 음악이 흘러나왔다. 그들은 내게 곡 제목을 물었다. 뉴에이지 계통의 음악이었다. 예전엔 많이 들은 곡이다. 유키 구라모토 내지는 이루마 곡 같다고 했다. 찬찬히 들어보니 이루마 곡이었다. 이루마 1집에 있던 곡이었는데 제목은 기억나지 않았다.

 언제부턴가 사람들은 내게 이 곡이 무슨 곡이냐는 질문을 잘한다. 연주곡은 물론이고 팝이나 오래전 가요도 질문 대상이다. 예전엔 그런 걸 가르쳐주는 게 좋았다. 인정받는다는 느낌에서였을 테다. 그러다보니 곡 제목을 자연스레 외우게 되었다. 요즘은 그렇기 힘들다. 듣는 음악이 워낙 많으니 기억의 간섭 현상이 일어난다. 즐겨 듣는 곡이 아니고선 명확하게 구분 짓기 어렵다. 뉴에이지 계열 음악은 더더욱 그러하다. 하나의 주제 음이 꾸준히 반복되는 구조라 곡 제목을 쉬이 유추할 듯 하지만 전달하고자하는 감정의 폭이 엇비슷하여 헷갈리기 마련이다.   

 

 

  

 

 

 

 

  

 

 클래식 음악도 마찬가지다. 하이든과 모차르트는 그들의 유명한 교향곡을 제외하곤 구별하기 힘들다. 워낙 다작을 한데다 서로가 서로에게 영향을 미쳐서일 테다. 가끔 쇼팽과 베토벤의 소나타가 헷갈리기도 하고 말러의 곡을 듣고 수많은 작곡가가 연상되기도 한다. 정말 익숙한 선율이 아니고선 이건 누구의 무슨 곡이라 하기 힘들다.

  

 

 

 

 

 

 

 

 

 그래도 익숙한 곡은 연주자가 누군지 까지 알아맞히려 애쓰곤 했다. 참 부질없다. 예전 고전음악연구회라는 모임에서 베토벤 교향곡 5번에 대한 강의가 있었다. 어느 부분에 강조를 하여 연주를 하냐에 따라 음악이 달리 들린다는 내용이었다. 매우 주정적인 연주가 나왔는데 녹음 상태와 박력 있는 연주에서 푸르트뱅글러가 히틀러 생일에 연주한 도이치 그라모폰 앨범이 아닐까 했다. 그 앨범을 갖고 있었고 음질이 안 좋아 별로 듣진 않는 터였다. 다만 정석적 연주와 반대되는 개성적 지휘자의 음반이라고도 해서 푸 선생이 맞는 것 같았다. 나의 추측은 맞았고 누군가는 나를 클래식 고수라 칭했다. 내 모자람을 알기에 웃어 넘겼지만 그런 추어올림이 싫지만은 않았다. 지금 생각하면 낯부끄럽다.

 음악을 데이터베이스화해서 머리에 입력 시킨 건 중 2때부터인 것 같다. 그 땐 거리에서 나오는 음악의 제목과 가수를 알아채는 사람이 신기했었다. 친구는 외국 영화의 한 장면만 보고선 영화 제목과 배우이름을 알아맞히는 나를 신기해했었다. 그런 선망의 눈빛이 좋았다. 그래서인지 어느새 음악도 즐기는 장르에서 내 교양을 드러내는 수단이 되어 갔다. 언젠가부터 나는 지식 검색 사이트마냥 친구들이 음악이나 영화 관련 질문을 해오면 척척 대답하곤 했다. 헌데 영화를 좀 더 깊게 보고 음악을 좀 더 깊게 들으며 내 취향은 지인들과 멀어졌다. 아마 그런 존재증명이 덧없다고 느껴졌나 보다. 그 후 나는 그들이 검색어를 입력하면 조금만 헷갈려도 ‘모른다’라는 답변으로 일관했다.

 요즘은 책에 관심이 많아져 책 읽고 서평 쓰는데 하루를 오롯이 투자한다. 책과 대화하며 필자의 치우침을 비난하고 또 토론하며 마음을 즐거이 한다. 문제는 이럴수록 예전 친구들과의 대화가 점점 재미가 없어지고 홀로 외로된 사업에 골몰하게 된다는 거다. 괜히 어쭙잖은 먹물 행세나 하며 나를 벼려온 시간이 가엽게 느껴졌다. 

 음악은 그냥 듣고 그림은 그냥 보고 영화는 그냥 느끼고 책은 그냥 읽어야겠다. 나를 포장하려는 일련의 작업과 위의 취미가 맞물린다면 나는 영원한 3류가 될 듯하다. 다들 제 자신을 포장하기 바쁜 시대에 이런 무심(無心)함은 나를 사회적으론 3류로 만들지 모른다. 그래도 스스로가 자존감을 가지며 나를 사랑한다면 스스로 곧추 설 수 있지 않을까. 아직 모르지만 그러도록 노력해야겠다. 그게 아름다움이라고 본다. 스스로에게 베푸는 가장 근사한 아름다움 말이다. 취미가 ‘구별짓기’의 한 용도로 쓰인다면 그 취미는 갑자기 속물이 되어 버릴 테니.


댓글(2) 먼댓글(0) 좋아요(1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비로그인 2009-12-16 08: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멋지군요 +_+ !!!

바밤바 2009-12-16 19:21   좋아요 0 | URL
고맙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