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의 산 -하 을유세계문학전집 2
토마스 만 지음, 홍성광 옮김 / 을유문화사 / 200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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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밑줄긋기)

 

 

그 후로 이러한 감각과 정신의 기만은 도를 더해 갔다. 시간이란 그것을 체험하는 주관적 감각이 약해지거나 없어지더라도, 활동적이고 '변화를 낳는' 한에는 객관적인 현실성을 갖고 있다. 벽의 선반에 놓인 밀봉된 식료품 병조림이 시간의 바깥에 있는지는 ㅡ 그러므로 한스 카스토르프가 언젠가 이런 문제를 언급한 것은 단지 젊은이다운 넘치는 혈기 때문이었다 ㅡ 전문적인 사상가가 생각할 문제이다. 하지만 우리는 잠자는 7인의 성인에게도 시간이 흐른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열두 살 난 한 소녀가 어는 날 잠에 빠져 13년 동안이나 깨어나지 않았는데, 그사이에 그녀는 열두 살 난 소녀로 머무르지 않고 성숙한 여인으로 꽃피어 났다는 사례를 한 의사는 증언하고 있다. 그야 그럴 수밖에 없는 일 아니겠는가. 망자(亡者)는 죽어 버려 시간의 축복을 받은 자이다. 그는 시간을 얼마든지 갖고 있는데, 즉 개인적으로 보면 그는 시간을 전혀 갖고 있지 않다. 그렇다고 해서 죽은 사람의 손톱과 머리칼이 자라지 않는 것은 아니다. 그러다가 결국에는 …… 하지만 이런 망측한 허튼소리는 되풀이하지 않기로 하자. 요아힘이 언젠가 그와 관련된 말을 하자, 한스 카스토르프는 당시만 해도 평지인답게 이를 못마땅해했다. 한스 카스토르프의 손톱과 머리칼도 자랐는데, 유난히도 빨리 자랐다. 그는 자주 도르프 네거리의 이발소 의자에 앉아, 하얀 천을 두르고 귀밑까지 내려오는 머리를 깎았다. 사실 그는 늘 그곳에 앉아 있었다고 할 수 있었다. 말하자면 그는 의자에 앉아 시간의 작용으로 길어진 자신의 머리카락을 깎아 주는 상냥하고 숙달된 이발사와 잡담을 나눌 때나, 또는 자기 방의 발코니 문 옆에 서서 아름다운 비단 가방에서 꺼낸 작은 가위나 줄로 자신의 손톱을 다듬을 때, 호기심어린 흥겨움이 섞인 일종의 두려움과 아울러 예의 현기증에 사로잡혔다. 이는 황홀과 현혹이라는 뭐라고 규정하기 어려운 이중적인 의미를 지니는 현기증이었다. 그리하여 '아직'과 '다시'를 더는 구별하지 못하게 되고, 그것이 섞여 뒤범벅이 되면 시간이 없는 언제나와 영원이 되는 것이다.(386∼387쪽)

 

 - 토마스 만, 『마의 산_하권』, 《제7장》, <해변 산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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