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밑줄긋기)

"더 이상은 재미가 없군"


「흰 코끼리 같은 언덕들」이라는 5페이지짜리 단편은 젊은 연인이 스페인의 한 작은 마을에서 기차를 기다리며 나누는 대화로 이루어져 있다. 남자는 마드리드에 도착하는 대로 여자가 낙태 수술을 하기 바라고 연인 사이의 다툼이 계속된다.


소설에서는 그녀가 패배하는 순간을 포착한다. 결국 그들의 관계는 종말이 보일 것이다. 이것이 내용의 전부다. 대사로 미루어 보건대, 여자는 활기 넘치고 품위 있어 보이지만 남자의 경우 명석하긴 해도 이기적이며 속이 텅 비어 매력이라고는 없는 것 같다.

 


"당신을 위해서라면 뭐든 하겠소"라는 남자의 말에 "제발, 제발, 제발, 제발, 제발, 제발, 제발 닥쳐요"라고 대답하는 그녀 편에 독자들은 설 것이다. '제발'을 일곱 번이나 반복하는 일은 지나치지만 「흰 코끼리 같은 언덕들」에서는 그러한 반복이 타당하고 설득력 있다.


이야기는 제목의 직유법에 이미 정교하게 예시돼 있다. 에브로 강의 계곡을 가로지르는 길고 흰 언덕은 여자에게 '흰 코끼리'처럼 보이지만 남자는 그렇게 느끼지 않는다. 장원莊園 유지 비용이 너무 많이 들어 파산한 신하들에게 샴국의 왕이 선물로 주었다고 알려진 흰 코끼리는 원하지 않는 아이, 무기력한 남자에게는 정신적으로 엄청난 대가를 치러야 하는 성적 관계를 나타내는 은유다.


헤밍웨이의 개인적 신비로움 ㅡ 전사, 사냥꾼, 투우사, 권투 선수로서 그의 모습 ㅡ 은 "내가 당신을 사랑하는 걸 알잖아"라고 말하는 남자의 말이나 「흰 코끼리 같은 언덕들」이라는 작품과 잘 어울리지 않아 보인다. 오히려 작가의 대리인이라 할 수 있는 닉 아담스(헤밍웨이의 연작 단편들에 나오는 주인공)가 「무언가의 끝The End of Something」이라는 작품에서 한 여성과 관계를 끝내며 "더 이상은 재미가 없군"이라고 한 대사에서 더 헤밍웨이적인 모습을 발견할 수 있다. 이 문장을 좋아할 여성은 없겠지만 그것은 적어도 미숙한 한 남자의 자기 고발이다.(57쪽)


 - 헤럴드 블룸, 『교양인의 책 읽기』, <1. 단편소설_어니스트 밀러 헤밍웨이> 중에서


(내 생각)


"내가 당신을 사랑하는 걸 잘 알잖아"라는 대사와 "더 이상은 재미가 없군"이라는 두 대사가 내게는 정말 이상하게 들린다. 마치 '알라딘'을 떠나버린 많은 '옛 사람'들이 여길 떠날 무렵에 했던 '마음 속으로나마' 읊조리던 말처럼 들리기 때문이다. 이게 나만의 생각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그러고 보니 문득 생 종 페르스의 말도 떠오른다. 몇 년 전에 어떤 알라디너의 글에 그의 말이 인용된 문장의 일부를 댓글로 단 적이 있었는데, 그 분도 요즘 와서 보니 알라딘을 '거의' 떠나신 것 같다.  아마 그 분도 틀림없이 오랫동안 로맹가리가 느꼈던 '지평을 바꾸는 일'을 마음 속으로 고민했으리라.

 

 * * *

 

그에게는 지평을 바꾸는 일이 시급했다. 다른 곳에서 숨쉬는 것이.
생 종 페르스는 말한다. ˝떠나자! 떠나자! 이것이 살아 있는 자들의 말이다!˝

- 도미니크 보나, 『로맹가리』

 


 

 * * *


"날 위해 뭘 좀 해 줄 수 있겠어?"


미국 어느 대학 문학 교수인 제프리 메이어스가 1985년에 쓴 헤밍웨이 전기를 펼쳐 들고서, 「흰 코끼리 같은 언덕들」과 관계된 부분을 읽어 본다. 내가 가장 먼저 알게 되는 것은, 이 단편이 '아마도 하들리(헤밍웨이의 첫 번째 부인)의 두 번째 임신에 대한 헤밍웨이의 반응을 묘사하는 것 같다.'라는 것이다. 그러고는 다음과 같은 설명이 이어지는데, 나 자신의 고찰을 괄호 속에 넣으며 이를 따라가 보도록 하자.


"원치 않은 아기처럼, 무용한 것을 표상하는 비현실적인 동물인 흰 코끼리에 언덕을 비유한 것은 이 이야기의 의미에 매우 중요하다.(코끼리를 원치 않은 아기에 비유한 것은 다소 억지스럽다. 이 비유는 헤밍웨이 것이 아니라 그 교수 것으로, 이 단편에 대한 감상적 해석을 준비하기 위한 것 같다.) 이 비유는 논란거리가 되며, 경치에 감동한 상상력이 풍부한 여인과, 그녀의 견해에 찬동하길 거부하는 고지식한 사내 사이의 대립을 초래한다. (중략) 여자의 감정에 완전히 무감각한(이것도 전혀 근거 없는 얘기다.) 사내. 그는 둘 사이가 예전과 똑같아질 수 있도록 여자를 낙태시키려 애쓴다. (……) 낙태를 자연에 전적으로 위배되는 일로 여기는 여인은 아기를 죽이고(아기가 아직 태어나지 않은 이상 그녀는 아기를 죽일 수 없다.) 자신 또한 다칠까 봐 몹시 두려워 한다. 사내가 하는 말은 모두 허위이며(아니다. 사내가 하는 말은 모두 흔한 위로의 말들, 그런 상황에서 할 수밖에 없는 말들일 뿐이다.) 여자가 하는 말은 모두 아이러니컬하다.(우리는 아가씨의 말을 얼마든지 다르게 설명할 수 있다.) 그는 그녀가 그의 사랑을 되찾을 수 있도록(그녀가 그 사내를 사랑했다거나 그의 사랑을 잃어버렸다는 증거는 어디에도 없다.) 이 수술에 동의하도록 그녀를 강요하지만(사내는 '난 네가 원하지도 않으면서 그걸 하는 걸 원하지 않아.' 라고 두 번이나 말하며, 그의 말이 진정이 아니라는 증거는 어디에도 없다.) 그가 그녀에게 그런 일을 요구한다는 사실 자체가 앞으로는 두 번 다시 그녀가 그를 사랑할 수 없게 되리란 점을 내포한다.(이 역에서의 장면 뒤에 일어날 일을 예상하게 하는 요소는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다.) 그녀는 마치 도스토옙스키가 묘사한 지하실의 사내나 카프카의 요제프 K처럼, 남편의 태도를 반영하기만 하는 인격 분열 지경에 이른 뒤에야 그 자기 파괴 형태(태아의 파괴와 여성의 파괴는 같은 게 아니다.)를 받아들인다. '그럼 그걸 하겠어. 왜냐하면, 어째도 내겐 마찬가지니까.'(타자의 태도를 반영하는 것은 분열이 아니다. 그렇지 않으면 부모에게 복종하는 모든 아이들이 분열 증세를 보이며 요제프 K처럼 될 것이다. 그리고 이 단편 속 아내는 어디에서도 남편으로 지칭되지 않았다. 게다가 헤밍웨이의 글에서는 여성 등장인물이 언제나 girl, 즉 아가씨인 까닭에 그는 남편일 수가 없다. 이 미국 교수가 일부러 아가씨를 woman(부인)이라고 칭하는 거라면, 이는 의도적인 경멸이다. 그는 두 등장인물을 헤밍웨이와 그의 아내로 이해시키려는 것이다.) 그런 뒤 그녀는 그에게서 멀어져 (……) 자연에서, 말하자면 보리밭과 나무들, 시내, 그리고 저 멀리 보이는 언덕들에서 위안을 찾는다. 도움을 구하기 위해 눈을 들어 언덕 쪽을 쳐다볼 때 그녀의 그 평화로운 관조는(우리는 자연의 관조가 그 아가씨에게 일깨우는 감정에 대해 전혀 알지 못한다. 하지만 씁쓸한 심정이었다가 뒤이어 내뱉는 그녀의 말들, 어떤 경우에도 그 말은 평화로울 수 없다.) 구약 「시편」121을 상기시킨다.(헤밍웨이의 문체가 간결해질수록 이 해설자의 문체는 과장된다.) 하지만 이 정신 상태는 토론을 계속할 것을 고집하는 사내에 의해 파괴되며(주의 깊게 이 단편을 읽어 보자. 잠시 멀어졌다가 먼저 말을 꺼내 토론을 계속하는 쪽은 미국인이 아니라 아가씨다. 사내는 토론을 하려 들지 않는다. 다만 아가씨를 달래고자 할 뿐이다.) 그녀를 신경증 발작으로 이끌고 간다. 그래서 그녀가 버럭 짜증을 내며 외친다. '날 위해 뭘 좀 해 줄 수 있겠어? (……) 그럼, 그 입 좀 다물어. 부탁이야!' 이는 리어왕의 '다시는, 다시는, 다시는, 다시는'을 떠올리게 한다.(여기서 셰익스피어를 상기하는 일은 도스토옙스키나 카프카를 상기한 경우와 마찬가지로 전혀 무의미하다.)"(210∼213쪽)


 - 밀란 쿤데라, 『배신당한 유언들』, <5부 잃어버린 현재를 찾아서> 중에서


(나의 생각)


먼저 인용한 헤럴드 블룸의 설명을 들어보면 '코끼리'에 대한 밀란 쿤데라의 비평("코끼리를 원치 않은 아기에 비유한 것은 다소 억지스럽다")이 도리어 억지스럽다. 그러나 다른 비평들은 대체로 밀란 쿤데라의 주장에 쉽게 동의할 수 있다. 밀란 쿤데라는 위의 인용문 바로 다음에 이어지는 글에서 '미국 문학 교수'의 비평을 다섯 가지로 '거듭' 요약한다. 그 중 하나만 소개하면 이렇다.


"단편의 기본 내용(한 남자와 한 여자가 낙태를 하러 떠난다는)을 바탕으로 교수는 자기 자신의 단편을 창작한다. 자기중심적인 한 사내가 자신의 아내에게 낙태를 강요하는 중이며, 아내는 남편을 경멸하기 때문에 이제 다시는 그를 사랑할 수 없을 거라는 내용의 소설 말이다."


여기까지 옮기고 나서도「흰 코끼리 같은 언덕들」때문에 갑자기 떠올리게 된 '이별을 둘러싼 여러 복잡한 감정들'은 여전히 약간의 뒷맛을 남긴다. 흰 코끼리 같은 언덕은 왜 여자에게만 '흰 코끼리'처럼 보이고 남자에겐 그렇게 느껴지지 않았을까? 「무언가의 끝The End of Something」이라는 작품 속 대사에 담긴 '미숙한 한 남자의 자기 고발' 속에 해답이 있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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