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악의 저편.도덕의 계보 책세상 니체전집 14
프리드리히 니체 지음, 김정현 옮김 / 책세상 / 200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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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때부터 내 모든 작품은 일종의 낚싯바늘이다 : 나야말로 낚시법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지 않겠는가? …… 아무것도 잡히지 않는다면, 그건 내 잘못이 아니다. 고기들이 없는 것이다.

 - 니체, 『이 사람을 보라』중에서

 

 * * *

 

니체만큼 사람의 정신을 온통 뒤흔들어 놓는 철학자는 없다. 그가 자신의 책을 읽는 독자들의 머리를 호되게 내리치는 걸 누군가가 느꼈다면, 그 사람으로서는 머리가 제법 아프겠지만 철학자로서는 자신의 의도가 제대로 맞아떨어졌다고 한바탕 너털웃음을 지을 지도 모르겠다. 니체의 책이 여전히 한겨울에 꽁꽁 얼어붙은 얼음처럼 차갑고 매끄럽게만 느껴지고, 심지어 그 얼음이 너무 두껍게 얼어붙어 있어 그 얼음 아래에서 즐겁게 노니는 온갖 물고기들은 언감생심 구경조차 할 생각이 떠오르지 않는다면, 그것 또한 그 사람의 한계이지 니체의 잘못은 아닐 것이다. 얼음에 다가가는 사람이 두툼한 방한복과 장갑과 도끼와 심지어 낚시도구까지 미처 준비하지 못했다고 하더라도 그를 나무랄 사람은 없다. 어쩌면 그 사람은 '얼음을 깰' 생각을 아예 품지 않고 그저 얼음을 구경하러 다가가는 일도 충분히 있을 법한 일이니까 말이다. 어쩄든 니체는 머리를 제대로 얻어맞을 준비가 된 사람들에겐 '망치를 든 철학자'이고, 그저 썰매라도 한바탕 신나게 타고 싶은 천진난만한 아이들에겐 아무리 단단한 돌멩이를 들고 덤벼들더라도 좀처럼 깨트리기 어려운 두껍고 매끄러운 얼음일 수밖에 없겠다 싶다. 그러나 단단히 각오를 하고 니체에게 다가갈 사람들은 도끼는 물론 물고기를 낚는 방법까지도 미리 얼마쯤 배워둘 필요가 있겠다 싶다. 물론 얼음 아래에 '고기들이 없다면' 문제는 전혀 달라지겠지만 말이다.

 

니체는 왜 이토록 어려운 책을 써서 사람들이 스스로 제 머리에 망치질을 하는 느낌이 들도록 했을까. 그는 왜 자신의 책이 무려 '2000년경'에야 읽힐 수 있다고 말했을까. 그 문제는 그가 거의 전적으로 '너무나 멀리' 내다본 때문이다. 이 말은 결코 그의 시선이 단지 한 방향으로만 향해 있다고 미리 단정해서 말하는 게 아니다. 실상 그의 시선이 미치지 않는 방향은 거의 없다고 말해도 좋다. 덧보태자면 방향 뿐만 아니라 거리까지도 그렇다고 말해야 옳다. 그의 시선은 까마득한 과거와 머나먼 미래뿐만 아니라 끝모를 심연과 지옥 너머까지도 내다보는 듯하다. 책의 제목조차 '선악의 저편'이니 그의 시야를 제약하는 모든 벽들은 이미 그 책을 쓰기 전부터 '극복될 수밖에 없는' 처지였을지도 모른다. 그런 무시무시한 시야를 갖춘 영혼이 거침없는 속도로 써내려간 힘찬 문장들을 대하면 마치 여러 차례 거듭 세심하게 귀를 기울여야 겨우 들릴까 말까 한 몹시도 낯설고 난해한 음악처럼 느껴질 수밖에 없다. 어쨌든 '정선된 귀'를 갖기란 여간 힘든 일이 아니니 말이다.

 

'미래 철학의 서곡'이라는 부제가 붙은 이 책은 사실 '오랜 구상'을 거쳐 나온 작품이다. 니체는『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를 출간한 이후 '다음 단계에 올라서는 자신의 새로운 철학'을 기술하려는 열망을 마침내 실행에 옮길 작정이었다. 그 작업을 수행하기 위해 그는 한동안『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을 근본적으로 다시 바꾸어 쓰려는 마음도 지니고 있었다. 그러다가 그 계획을 포기하고 완전히 새로운 작품을 쓰게 되는데 그게 바로 이 책이다. 그렇다고 해서 이 책에 담긴 내용들이 모두 한꺼번에, 말하자면 니체가 '네 번째로 질스마리아에 체류하던 시기'에 전부 쓰여진 것은 아니다. 이 책의 제4장인 <잠언과 간주곡>은 이미『차라투스트라』가 씌어지기도 전에 미리 쓰여졌다. 어떤 내용들은 소위 '가치전도 시기의 노트'에 쓰여진 단상들이 여럿 포함되어 있기도 하다. 대체적으로 보면 이 책은 '가치전도와 새로운 철학의 구상 시기'에 쓴 노트와 단상들을 바탕으로 쓰여졌으며, 이 작품에 뒤이어 곧바로 쓰여진『도덕의 계보』와 함께 '니체의 후기 사상'의 핵심을 이루는 책이라고 평가받는다.

 

이 책은 본질적으로 '현대성에 대한 비판'을 다룬 책이다. 문제는 그가 다루는 '현대성'의 범위가 너무나 광범위하다는 점이다. '현대 학문', '현대 예술', '현대 정치', '현대 철학' 모두가 그의 비판 대상이다. 왜 '현대'가 이토록 문제인가. 그가 보기에 '현대'는 근본적으로 '인간의 평범화, 왜소화'에 방향을 잡은 것으로 비춰졌다. 엘리트 중심의 귀족 정치에 반하는 '민주주의'는 그래서 비판을 받는다. 니체는 '문명', '인간화', '진보'라고 부르는 유럽의 민주화 운동의 배경에는 '인간의 퇴화'라는 생리학적 과정이 동시에 진행되고 있음을 밝힌다. 인간의 평준화와 평범화는 결국 무리동물적인 인간의 형성을 도울 뿐이며, 고귀하면서도 보다 높은 인간 유형을 만들지 못한다는 것이다.

 

약자와 불우한 자, 병든 자와 고통받는 자에 대한 동정으로 가득 찬 '그리스도교의 도덕' 또한 그가 보기엔 '노예 도덕'에 불과할 뿐이다. 그가 보기엔 강자, 지배하는 자, 가치를 창조하는 자의 도덕, 말하자면 '주인 도덕'이 훨씬 더 고귀하고 추구되어야 할 올바른 방향이다. 그래서 니체는 현대성을 극복할 수 있는 가능성을 바로 '자유정신의 인간'을 육성하는 데서 찾았다. 그는 '미래 철학자'는 '자유 정신'을 지녀야 하며, '진정한 철학자'는 스스로 자신의 가치를 창조하는 입법자이자 자기 명령을 할 줄 아는 사람이라고 말한다. 인간의 진정한 과제는 바로 자신의 가치를 창조하는 것이며, 이는 선과 악의 저편에서 "가장 대담하고 생명력 넘치며 세계를 긍정하는 인간의 이상"에 눈을 뜨는 데서 출발한다고 말한다. 노예도덕을 강요하는 기독교로 물든 '왜소한 현대적 인간'에서 벗어나 주인도덕을 되찾는 '귀족적 인간', 스스로 가치를 창조할 줄 아는 위버멘쉬적 인간이 되라는 것이다.

 

여기서 그가 찾아낸 하나의 철학적 방법론이 '모든 가치의 전도'이다. 그리스도교 신앙과 도덕이 추구해 온 '선악의 명명법' 자체가 '노예 도덕'을 바탕으로 삼았기 때문에 '인류의 도덕'을 완전히 거꾸로 뒤집어 놓았다는 것이며 이를 비로소 바로 잡을 때가 되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의 '도덕에 대한 통찰'이 너무나 심오하면서도 거침이 없기 때문에 이 책은 아주 위험한 책으로 돌변한다. 니체 또한 그런 사실을 충분히 인식하고 있었다. 니체는 스위스 작가 비트만이 쓴 이 책의 서평 내용을 주위 사람들에게 편지로 소개하기도 했는데, 그 내용을 간단히 요약하면 다음과같다. 

 

"고트하르트 기차선로를 건설하는 데 필요한 다이너마이트를 비축하고자 하는 저 차량은 죽음의 위험을 알리는 검은 경고의 깃발을 휘날리고 있었다. 이러한 의미에서 우리는 철학자 니체의 책을 위험한 책이라고 부른다"

 

이는 니체 스스로도 이 저서가 기독교 신앙과 도덕에 깊이 물든 서양의 전통적 사유나 형이상학을 거침없이 강타하는 '다이너마이트의 위력을 가진 위험한 책'으로 충분히 짐작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대변한다. 여기서 비롯된 재미있는 일화가 하나 있다. 니체 사후 100주년을 기념하여 2000년 10월에 독일의 어느 박물관에서 있었던 유물 전시회의 제목 또한 "고트하르트 터널은 언제 완성되는가?" 였던 것이다. 니체가 기독교와 서양 전통 형이상학을 상대로 벌인 가혹하리만큼 혹독한 투쟁과 '미래 철학'을 위해 새로운 사유의 길을 내는 지난한 건설 작업이 마치 다이너마이트를 사용하며 몹시도 위험하게 진행되었던 백여 년 전의 '고트하르트 터널 공사'와 유사했다는 점과, 이러한 니체의 엄청난 작업이 아마도 2000년경에야 비로소 사람들도부터 제대로 평가받을 수 있겠다는 니체 스스로의 평가를 모두 염두에 두고 저런 멋진 제목이 탄생되었던 것이다. 이런 사실 하나만으로도 우리는 이 작품이 현대 사상 전반에 끼친 엄청나게 놀라운 영향과 그 위상을 충분히 가늠해볼 수 있다.

 

니체는 자신의 친구에게 보내는 어느 편지에서 『선악의 저편』이 "내 『차라투스트라』에 대한 일종의 주석서"라고 말한 적이 있는데, 그가 한 말은 자신이『차라투스트라』에서 거의 문학적으로 다룬 철학적 주제들이 독자들에게 제대로 충분히 이해되지 못한 현실을 반영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가『차라투스트라』에서 노래했던 주제들, 가령 디오니소스, 생명, 건강, 자유, 지혜, 고귀한 덕, 위버멘쉬, 영원회귀사상 등은 사실 이 책에 와서 한층 드넓고 깊이 있는 철학적 사유들, 가령 역사, 종교, 인류학, 심리학, 생리학, 문학, 음악 등 거의 전방위에 이르는 광범위한 학문과 예술 영역에 걸친 니체 특유의 심연처럼 깊디깊은 사색이 더해짐으로써, 단지 '『차라투스트라』의 주석'이라고 불리기엔 너무 아까울 정도로 '가장 니체적인 색깔'을 띤 작품이 되었고, 그가 이 책에서 가혹하게 비판했던 '현대성'에서 벗어난 '새로운 철학'은 결국 '미래 철학의 서곡'으로 격상되어 오늘날 니체의 철학을 이해하는 결정적 작품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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