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위기에 대해 쓴 책 가운데 고전의 반열에 오른 책

















과도기간을 묘사하기 위해 쓰인 용어들 164


풍요감에 들뜬 시기가 끝나고, 고전파 저술가들이 급반전과 신용경색(즉, 붕괴와 패닉)이라고 불렀던 사태가 시작되기까지의 과도 기간을 묘사하기 위해 쓰인 다른 용어들은 불안, 걱정, 긴장, 절박, 압박, 불확실, 불길한 상황, 취약성이다. 보다 다채로운 표현으로는 "끔찍한 시장의 추락" 같은 것도 있고, "천둥이 칠 듯한 날씨" "폭풍 전야의 숨막힐 듯한 답답함이 다시 느껴진다"는 표현 같이 날씨에 비유한 것들도 자주 사용됐다.


부러지려는 활과 같은 형상 164


미셸 슈발리에는 제2차 합중국은행을 겨냥한 잭슨 대통령의 전쟁 선언에 대한 미국발 서신에서 "신용이 총체적으로 무너지는 현상은 아무리 그 기간이 짧아도 가장 끔찍한 지진보다 더 무섭다"고 썼다. 또 다른 프랑스인 저술가는 "재앙의 예감"이라고 적었고, 독일의 어느 비유에서는 "1782년 가을은 너무 휘어져 이제 막 부러지려는 활과 같은 형상"이라고 표현했다.


GDP 대비 대외채무비율 165


어느 나라의 국내총생산(GDP) 대비 대외채무 비율의 경우, 60%라는 경계선을 불길한 지표로 간주하는 투자자들의 인식이 자리잡고 있다; 이 비율이 60%를 훨씬 초과할 경우 그 나라는 살얼음판이 되는 셈이다. 마찬가지로 GDP 대비 정부채무의 비율이 60%를 크게 초과하면 과다한 것으로 간주된다.


국면 전환의 신호 166


불안의 원인이자 또 그 증상으로 나타나는 다음과 같은 현상들이 동시에 발생한다: 자본시장의 일부 또는 모든 영역에서 금리가 가파르게 상승한다; 우량 등급의 차입자가 지불하는 금리에 비해 우량 등급 이하 차입자가 지불하는 차등금리가 상승한다; 외환시장에서 통화가치가 급락한다; 파산 건수가 증가한다; 상품과 부동산, 유가증권의 가격 상승이 멈춘다. 이런 상황들은 서로 관계를 맺고 전개되는 경우가 많으며, 대여자들의 여신이 이미 과도하게 확장된 상태여서, 대여자들이 위험의 노출, 특히 큰 위험을 줄이기 위해 움직이기 시작했음을 말해준다.

(나의 생각)
여러차례 위기를 경험했음에도 불구하고 미련맞게 주식 포지션을 과감하게 줄이지 못했던 것이 나의 과거 경험의 '늘상 반복되는 실수'였다. 2011년이나 2012년중 이번 상승랠리의 끝이 도래하고, '국면전환' 포인트가 다가올 것이다. 이번에는 절대 실수하지 말자고 새삼 다짐해본다.



패닉이 아니라 조정 170


1987년 10월 19일 검은 월요일의 주가 폭락은 패닉이 아니라 조정이어던 것으로 판명났다; 다른 대다수 국가들(당시 일본은 예외였다)의 주식시장에서도 거의 동시에 주가 폭락이 있기는 했지만, 미국의 다른 시장으로는 폭락이 확산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주가 폭락이 다른 자산시장에 큰 충격을 줄 것인지 여부에 대해 투자자들이 관망하는 동안 불안 국면이 몇 주간 지속되었다.


LTCM 파산 171


1998년 여름의 LTCM 대란은 러시아 금융시장의 붕괴와 거의 동시에 발생했다; 임박한 러시아의 재앙이 유발한 금리와 수익률 관계의 변동이 사실 LTCM을 붕괴시킨 결정타로 작용했다. LTCM은 헤지펀드로 여겨졌지만, 사실상 규제를 벗어난 은행이나 마찬가지였다. LTCM은 최고 경영진 가운데 두 명이 노벨 경제학상 수상자였다는 점에서 "매우 똑똑한" 금융기관으로 받아들여졌다. 자본금은 50억 달러였고 부채는 1250억 달러에 달해, LTCM은 일반 은행이나 대부분의 헤지펀드에 비해 자본금 대비 차입금 비율이 훨씬 더 높았다. 더욱이 LTCM은 이 자산과 부채를 활용해 선물과 옵션 같은 파생상품 계약에서 수백 억 달러의 포지션을 움직였다. 사업 초기의 여러 해 동안 LTCM은 돈 버는 기계로 여겨졌고, 매우 유사한 금융자산들 사이에서 발생하는 미세한 가격 편차를 이용해 수익을 내는 일에 극도로 영리했다.


일본 구조조정 실패의 원인 175

일본에서의 불안 국면은 1990년대의 출발과 함께 시작해 10년 넘게 지속됐다. 일본 제조업체들은 회사의 비용을 그들의 경상적인 수익 아래로 낮추는 데 필요한 기업 규모의 축소와 구조조정을 극도로 기피했다; 이것은 지난 40년 동안 일본 기업들이 영업수지 적자를 메우고, 투자자금을 조달할 때면 언제든 은행에 의존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일본
은행들은 신규 대출을 중단하는 것을 극도로 꺼렸고, 심지어는 그 어떤 '시가평가' 기준에서도 파산 상태로 간주되는 기업들에 대해서까지 마찬가지였다; 또한 감독당국은 파산 상태로 간주되는 은행들의 폐쇄를 피했다. 일본에서는 전통적으로 금융 손실의 위험을 "사회가 떠 안았다"; 파산한 기업의 폐쇄에 수반되는 구조조정 비용을 이들 기업의 피고용자들에게 부담시키는 것보다는, 그 손실을 납세자 집단에게 분담시키는 편을 사회가 선호한 것이다.

(나의 생각)
일본 구조조정 실패의 원인을 명백히 알 수 있는 훌륭한 지적이다.


경제 성장과 고용에 대한 부정적 영향 때문에 178


그린스펀 의장은 1996년 12월 "비이성적으로 과열된" 주가에 대해 그의 유명한 논평을 하면서, 미국의 주가가 너무 높고 지나치게 빠른 속도로 상승하고 있다는 점을 우려했다. 그러나 경제성장과 고용에 대한 부정적 영향 대문에 FRB가 주가 상승을 제어하기 위한 금리 인상을 회피한 것으로 나중에 판명됐다. 1999년 FRB는 "2000년도 컴퓨터 연도표시(Y2K) 문제"-많은 소프트웨어 프로그램이 2000년으로의 날짜 전환을 인식할 수 있도록 설계되지 않아 미국의 컴퓨터 시스템이 작동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문제-를 우려했다. 1999년 마지막 수개월 동안 FRB는 일천 년 마지막 날의 날짜 전환에 수반될지 모를 문제를 미연에 방지할 수 있도록 충분한 유동성을 통화시스템에 공급했다. 그 사이 어디론가는 가야만 했던 자금이 주식시장의 투기에 에너지를 공급했다.


원인과 근인 178


어떤 위기라도 그 원인(遠因)은 신용의 팽창과 투기인 반면, 근인(近因)은 시스템에 대한 신뢰를 무너뜨려 투자자들이 상품이나 주식, 부동산, 환어음, 또는 약속어음 등을 매도하고 현금 보유액을 확대하도록 유인하는 무슨 사건이다. 파산, 자살, 도주, 사기의 폭로, 어떤 차입자들에 대한 여신 거부, 혹은 거액의 포지션을 보유한 시장 참여자의 매도를 부추기는 모종의 관점 변화 등 근인은 사소한 것일 수 있다.


일본 거품의 파열 계기 183

거품의 속성은 결국 언젠가는 구멍이 나서 아이들이 갖고 노는 풍선처럼 순식간에 바람이 빠진다는 것이다. 일본의 부동산가격과 주가 거품은 1990년 초 은행의 부동산 대출 증가율이 대출총액의 증가율(연 5∼6%로 예상됐다)을 초과할 수 없도록 제한한 신임 일본은행 총재의 명령에 의해 구멍이 났다. 부동산 대출의 증가율이 떨어진다는 것은 부동산 매수를 위해 신용을 끌어 쓰던 개인과 기업의 일부가 예전의 차입금에 대한 이자를 지불하기 위한 신규대출 자금을 충분히 얻을 수 없음을 의미했다. 따라서 이들은 취득한 부동산의 일부를 매각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이 명령이 없었다 하더라도 무언가 다른 사건이 거품을 파열시켰을 것이다.


돈 구할 데가 없다는 말 189

패닉이 절정에 달할 즈음에는 돈 구할 데가 없다는 말이 저절로 나온다. 이런 상황에 대한 묘사는 과장되는 경우가 다반사지만, 1825년의 상황은 조금도 그렇지 않다:

지방은행들의 패닉이 12월 12일 폴, 손턴 회사(Pole, Thornton & Co.)에 파급된 후 일요일에 영란은행 총재를 방문한 런던 롬바드 가의 은행장들은 47개 지방은행의 지불 청구가 걸려 있는 그런 회사의 영업이 정지된다면, 런던의 모든 은행에서 예금을 인출하려는 쇄도 사태가 벌어질 것이라고 경고했다.

결국 이 회사의 영업은 정지됐다. 지금까지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모습으로 패닉이 대중을 장악했다: 모든 사람이 돈, 돈을 찾아 헤맸다. 그러나 그 어떤 조건을 제시하더라도 돈을 구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했다. 「더 타임스」가 전하는 내용에 따르면, "담보나 보증이 어떤 것인가는 사람들의 안중에 아에 없었고, 오직 돈을 구할 방도가 없다는 것만이 문제였다."

(나의 생각)
2008년 12월에 겪었던 상황이 아직도 기억에 생생하다.


가장 지독한 일 190

허스킨슨에 따르면 당시 73개 은행의 파산으로 인해 영국에서는 24시간 동안 물물교환이 행해지는 초유의 사태가 벌어졌다. "웰링턴 경이 워털루 전투에 대해 말했던 것처럼, 그것은 "제군들이 살아생전에 겪은 가장 짧은 시간에 벌어진 가장 지독한 일"이었다."


연 60 ∼100%의 금리 190

1857년 철도회사인 뉴욕 센트럴의 주가는 93달러에서 61달러로 내려갔고, 레딩의 주가도 96달러에서 36달러로 떨어졌다. 돼지고기의 가격은 배럴 당 24달러에서 13달러로, 밀가루는 10달러에서 5∼6달러로 떨어졌다. 9월에는 펜실베이니아와 매릴랜드, 로드아일랜드, 버지니아 주의 150개 은행이 월말의 나흘 동안 파산함에 따라 금리가 15%에서 24%로 급등했다. 이 때의 패닉은 10월에 절정에 이르러 미국 전역에서 1415개 은행이 파산했고, 금리는 연 60∼100%까지 치솟았다. 이 역시 며칠간 빌려 쓰는 자금에 대한 금리였다.


되먹임의 고리 두 가지 193

부동산 가격과 주가의 상승이 국민소득의 성장 속도에 영향을 미치는 되먹임의 고리는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가계의 부의 증가가 가계 지출의 증가로 이어지는 연결 고리다. 가계는 저축과 부에 대한 목표 수준을 가지고 있으므로, 자산가격의 급등 덕분에 그들의 부가 증가하면 기존의 소득 가운데 저축하는 부분은 줄어들고 소비지출은 늘어난다. 두 번째 고리는 주가 상승이 투자지출의 증가로 이어지는 연결 고리다. 주가가 상승하게 되면 기업들은 더 적은 비용으로 기존 투자자와 신규 투자자들로부터 자금을 마련할 수 있고, 이익률이 좀 낮더라도 신규 사업을 추진할 수 있는 여력을 확보할 수 있다. 즉, 어느 한 기업이 부담하는 '자본비용'은 주가 수준과 반대로 움직인다: 이들 기업의 순이익에 비해 주가가 높을수록 자본비용은 낮아진다. 기업의 자본비용이 낮아질수록 기업의 설비투자는 증가한다; 주가가 오른다는 것은 기업이 이전보다 낮은 영업이익률로도 꽤 괜찮은 채산성을 누릴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튤립 광기 197

역사가 사이먼 샤마(Simon Schama)가 제공한 사례 하나를 보면, 화이트크라운 1파운드(네덜란드어로 'Witte Croon'이며 일반적인 품종이어서 무게 단위로 매매되었다)에 525플로린을 양도 시점(가령 돌아오는 6월)에 완납하고, 소 네 마리를 먼저 지불하는 방식으로 거래했다. 선불 계약금 지불에 쓰인 여타 현물로는 토지, 주택, 가구, 금은제 그릇, 회화작품, 양복과 코트, 마차, 회색 점박이 말 한 쌍 등이 있었다; 그리고 희귀종 튤립인 비체로이(Viceroy) 한 그루의 가치는 양도 시점의 완납 대금 2500플로린과 함께 현물 선불금으로 밀 2라스트, 돼지 네 마리, 양 열두 마리, 포도주 2옥스헤드, 버터 4톤, 치즈 수천 파운드, 침대 한 개, 몇 가지 의류, 큼지막한 은제 컵 하나였다.


대출에 부과되는 세금과 이자는 계속된다 200

경기가 하락세로 반전하면 부동산 수요와 건축 수요의 고갈이 초래된다. 하지만 대출에 부과되는 세금과 이자는 중단없이 계속된다. 호이트는 부동산 투기자들이 서서히 그러나 어김없이 넘어지게 된다고 썼다. 1933년에 200개에 달하는 시카고의 은행들 가운데 163개가 지불 불능 상태에 빠졌다. 1930년에서 1933년까지 4800개 파산은행의 손실액 가운데 개별 항목으로 가장 컸던 손실 요인은 파산한 주식중개인 계정이 아니라 채무 불이행 상태의 부동산 대출계정이었다.


일본의 부동산 버블 202

해에 따라 연간 상승률에는 차이가 있었지만, 부동산가격은 꾸준하게 상승했다. 금융규제로 인해 은행예금과 채권 같은 고정가격 자산의 실질 수익률은 1950∼70년대에 걸쳐 계속 마이너스였다. 명목 금리가 연간 물가상승률보다 낮았다. 6개 대도시의 주거용 부동산 가격지수는 1955년의 기준값을 100으로 할 때, 1970년대 중반에는 4100, 1980년에는 5800에 달했다; 이에 따라 부동산 소유자들은 플러스의 실질 수익률을 챙긴 매우 드문 집단 중의 하나였다. 1980년대 기간 중 부동산가격은 9배나 상승했다. 그 최정점에 이른 시점의 일본 부동산 가치는 미국 부동산 가치의 두 배에 달했고, GDP 대비 부동산 가치의 비율은 미국의 4배나 됐다.


중앙은행 책임자들 206


중앙은행 책임자들은 전통적으로 물가상승률이 오르는 것을 막기 위해서라면 금리 인상을 피하려 들지 않았다. 반면 그들은 자산가격 거품에 대처하기 위한 시도는 극히 꺼려한다: 심지어 사실에 기초해 거품의 존재가 인정되는 것 같아도, 거품이 존재한다거나 과거에 존재했을 가능성마저 인정하려 들지 않는다.


이 세상의 다른 사람들 모두가 미쳤다면 216


프랑스 투자자 가운데 한 사람으로 은행가 마르탱이 있었는데, 이미 언급된 바와 같이 그는 "이 세상의 다른 사람들 모두가 미쳤다면, 어느 정도는 우리도 그들을 흉내내야 한다"는 말과 함께 500파운드를 주식 청약 대금으로 지불했다고 찰스 맥케이의 기록은 전하고 있다.


최초의 전세계적 위기
(1857년) 227

오하이오 생명보험 사태가 8월 24일 밝혀지고, 런던에서 은행법의 효력이 정지된 11월 12일에 이어 함부르크에 오스트리아의 긴급차관(은화열차, Silberzug)이 제공된 12월 10일에 이르는 기간 사이에 위기가 집중된 것이 인상적이다. 클랩햄은 위기가 미국, 영국, 중부 유럽에서 거의 동시에 일어났고, 남미와 남아프리카, 극동에도 그 파장이 미쳤다고 기술했다. 로젠베르그는 이 사태를 "최초의 전세계적 위기라고 부르고 있다.


최초의 의미있는 국제적 위기
230

맥카트니(McCartney)는 1873년이 최초의 의미 있는 국제적 위기로 널리 인정되고 있다고 언급했다. 위기는 5월에 독일과 오스트리아에서 폭발해 이탈리아, 네덜란드, 벨기에로 퍼진 뒤 9월에 미국으로 파급됐으며, 영국과 프랑스, 러이사에는 나중에 충격이 미쳤다. 게다가 두 번째 패닉이 11월 1일 빈을 강타했지만 짧게 끝났다.


글래스-스티걸법 234


1932년 2월 글래스-스티걸법의 통과로 공개시장조작을 통한 통화 공급량 확대가 가능해졌으나 너무 늦은 시점이었다. 연이은 은행 파산이 되먹임 강화 작용을 동반하며 상품가격의 하락, 기업 파산, 은행 파산의 연쇄를 유발하는 부채 디플레이션 과정을 확산시켰다. 1933년 3월에 시작된 전면적인 은행 업무정지와 그해 봄의 달러화 외환가치 하락으로 경제가 그 바닥을 찾게 됐다.


조지 소로스 236


나라들간에 차이점이 존재했다; 예를 들어 태국 정부는 정직했지만 위약하고 우유부단했으며; 인도네시아 정부는 강력했지만 부패하고 결단력이 있었다. 정책 역시 달랐다. 태국은 투기세력으로부터 바트화를 방어하느라 240억 달러의 외환보유고를 상실하고는 결국 바트화의 외환가치 하락을 용인했다. 반면 인도네시아는 투기 압력이 증폭되자 곧이어 루피아화를 변동환율제에 맡겼다. 말레이시아의 마하티르 총리는 링기크화의 공매도 사실을 부인한 퀀텀펀드의 조지 소로스를 비롯해 해외 투기세력을 비난했고, 대외채무에 대해 제한적 지불유예를 결정했다.


떠도는 유동성 238

 
태국과 여타 아시아 국가의 거품은 일본의 자산가격 거품 붕괴 이후 수 년 동안 도쿄로부터 유입된 자금에 의해 형성되었다. 태국, 말레이시아, 인도네시아 및 그 이웃 국가들의 거품이 1997년 하반기에 붕괴하고, 이 붕괴로 인해 아시아 국가를 이탈하는 자금이 미국으로 대거 유입되면서, 1990년대 중반에 형성되기 시작한 미국의 주식 거품이 더욱 빠르게 가속화되었다. 1998년 연방준비제도이사회(FRB)는 롱텀 캐피탈 매니지먼트(LTCM)의 파산이 촉발한 불확실성에 대처하기 위해 미국 금융 시스템에 유동성 공급을 확대했고, 1999년에는 세기 전환과 관련된 2000년도 컴퓨터 연도표기(Y2K) 문제를 염두에 두고 다시 추가적인 유동성을 공급했다.

(나의 생각)
2009년과 2010년에 걸처 한국 등 아시아로 대거 유입되는 달러 자금들은 1997년 흐름의 대칭적 현상이 아닐까 싶은 생각도 든다.





'자본 유입 국가'
 239

자금이 한 나라에서 다른 나라로 이동할 때는 항상 보이지 않는 손이 작동하며, 자금이 유입되는 나라와 자금이 이탈하는 나라 모두에서 자동적인 조정을 일으킨다. 자본 유입 국가에 일어나는 하나의 조정은 외환시장에서 통화 가치가 상승하는 것이고, 또 다른 조정은 거의 예외 없이 자산가격이 상승하는 것이다. 해외로부터의 자금 유입은 경제 호황을 동반하며 증가하는 것이 다반사다. 닭이 먼저냐 알이 먼저냐 하는 문제가 약간은 있다: 즉, 활발한 경제 활동이 해외 자금을 유인하기도 하는 한편, 해외 자금의 유입은 기업 투자의 증가를 가져온다; 주가의 상승으로 국내 기업의 자본비용이 감소하면 투자 수익률이 개선되는 투자 프로젝트들이 많아지기 때문이다. 가계의 부가 증가하면 소비의 증가가 유발되거나, 혹은 똑같은 것이지만-자산가격의 상승은 저축 목표를 달성하는 가계가 더 많아진다는 것을 의미하므로-저축률의 하락이 유발된다.


모멘텀 투자자 241


일본, 태국, 그리고 다른 아시아 국가들과 미국의 자산가격 거품에서 나타나는 하나의 유사성은 시장 참여자들이 최근의 가격 상승에서 나타나는 추세를 미래 시점으로 비례 배분하는 방식에 의해 자산과 유가증권의 가격을 예측하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대체로 자산과 유가증권의 가격은 이들의 수익 창출 능력-업무용 빌딩의 가격은 그 건물의 임대소득을 토대로 추산되고, 소니와 제네럴 일렉트릭의 주가는 이들 회사의 기대 수익률을 반영한다-에 기초한다. 경우에 따라 일부 타자자들은 이 자산가격의 최근 상승 추이를 비례 적용해 미래의 주가와 부동산가격을 추정하기 시작한다. 이런 투자자들-이들은 어떤 때는 주가 관찰자, 어느 경우에는 모멘텀 투자자 혹은 데이트레이더라는 이름으로 불려왔다-은 개별 유가증권들의 최근 가격 변화를 가까운 미래 시점의 가격 예측을 위한 기준 비율로 활용한다.


일본 황국 대지의 땅값 242


1980년대 일본의 부동산 거품은 그 거대한 규모로 인해 일본 황궁이 들어서 있는 대지의 시장가치가 캘리포니아 전체의 부동산 가치보다 크다는 것이 1980년대 말 도쿄의 이야기거리가 될 정도였다.


일본의 육지 면적 243


일본의 육지 면적이 미국의 5%에 불과하고 일본에서 육지의 80%가 산악 지역임에도 불구하고, 일본의 부동산 시장가치는 미국의 부동산 시장가치의 두 배에 달했다. 일본의 일인당 국민소득이 미국의 60∼70%에 불과함에도 불구하고, 인구 일인당 토지의 시장가치를 기준으로 비교하면 일본은 미국의 4배를 초과하는 수준이었다.


빈센트 반 고흐 244


일본의 소비지출이 급증했다. 일본인들은 또 소더비와 크리스티를 비롯한 예술작품 경매회사가 개최하는 프랑스 인상주의 회화작품의 경매에 참여했다. 이미 살펴 보았듯이 빈센트 반 고흐의 '의사 가셰의 초상화'는 오사카 지역의 경마회사 사장에게 단일 예술작품 가격으로는 사상 최고가에 팔렸다.


일본인들의 모방 사례 245


일본은 외국인들에게 문호를 개방한 19세기 후반에 산업화를 시작했다.(왜냐하면 서구 열강들이 중국 해안지역에서 그랬던 것처럼, 문호를 개방하지 않을 경우 이 나라들이 일본에도 전초기지를 세울지 몰라 두려워했기 때문이다.) 일본 천황은 미국, 독일, 영국, 벨기에, 그리고 서구의 여러 나라에 신사유람단을 파견해 정부와 공공서비스, 은행 시스템, 중앙은행, 그리고 경제 전반을 일본이 어떻게 발전시켜야 하는지, 그 모델들을 배워오도록 했다. 도쿄의 중앙 기차역은 암스테르담의 센트럴 스테이션을 모델로 삼았고, 일본은행은 벨기에 국립은행 모델에 기초한 것이었고, 공공서비스는 프랑스의 모델을 따랐고, 도로와 철도 시스템은 영국 모델의 유형을 채용했다.(일본인들이 영국처럼 도로의 왼편에서 운전하게 된 것은 이 때문이다.) 일본의 산업경제는 봉건 가문들을 중심으로 발달했는데, 그래서 미쓰이, 미쓰비시, 스미토모 같은 고전적인 이름들이 오늘날까지 은행, 상사, 제조업체의 일부에 남아 있다. 이 가문들 각각은 하나의 은행지주회사가 상사, 조선소, 제철소 등 계열회사의 지분을 대량으로 소유하면서 이들에게 장기자본 출자와 단기대출을 통해 운영자본을 공급해주는 체제였다, 이처럼 산하 기업들이 하나로 결합되어 있는 기업집단, 즉 재벌을 형성했으며, 이는 독일식 모델과 다소 유사한 것이다.


경제적 천민, 경멸적 조소 246


1945년 여름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자폭탄이 투하된 뒤 40여 년간 일본이 달성한 경제적 성과는 아주 이례적인 것이었다. 이 나라의 산업구조는 제2차 세계대전 말기 수 년 동안 황량한 폐허로 벼했다. 일본은 한국, 대만, 만주의 경제적 식민지를 상실했고, 다른 나라들과의 상업적 관계에서도 배제됐다. 이 나라는 경제적 천민으로 간주되었고, 수출품들은 조악한 품질에다 미국과 유럽 기업의 디자인과 기술을 도용한 것이어서 경멸적인 조소를 받았다.


일본:최초의 초국가 246


일본은 1950∼60년대에 걸쳐 따라붙기 시작했고, 연간 10%를 초과하는 경제성장률을 달성했다. 고성장을 이룩한 이 20년의 기간이 허먼 칸으로 하여금 그의 1971년 저서 『일본: 최초의 초국가』를 쓰게 했다. 칸의 산술은 단순명료하다: 일본의 경제성장률이 미국, 독일, 프랑스를 비롯한 기타 산업 국가의 경제성장률을 매년 2∼4% 포인트 상회한다면, 비교적 짧은 시간 내에 일본의 일인당 국민소득이 이 나라들의 일인당 국민소득을 능가하리라는 것이다.


일본의 눈과 일본인들의 위장
 247

일본의 복잡한 규제 절차로 인해 해외 기업들은 일본 시장에서 제품을 판매하거나 일본에 자회사를 설립하는 것이 어려웠다. 미국 및 유럽 기업들이 도쿄 증권거래소에 참여할 수 있는 회원권을 사기는 무척 어려웠다. 일본인들은 미국과 유럽에서 제조된 스키가 일본의 눈(雪)에는 적합하지 않고, 일본인들의 위장은 캘리포니아에서 수확한 쌀을 소화시킬 수 없다고 주장했다.


상호출자 구조 249


상호출자 구조로 인해 주가 상승이 도쿄증권거래소 상장 주식의 시가총액을 더욱 증폭시키는 효과를 낳았다. 자동차, 전자제품, 철강의 생산으로 얻는 수익률보다 부동산가격과 주가의 상승에 따른 수익률이 훨씬 높았기 때문에, 제조업체들은 부동산과 다른 회사 주식의 매수에 쓸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차입하기 시작했다.


두 가지 속설의 붕괴 250


일본 부동산가격의 거품은 세 가지 요인에서 비롯됐다. 하나는 30년이 넘도록 다른 대부분의 유가증권이 마이너스 실질 수익률을 보일 때, 부동산의 실질 수익률은 플러스였다는 점이다. 금융계의 대표적인 속설 가운데 하나가 "땅은 좋은 투자 대상이다. 땅값은 항상 오른다"는 것이고, 이로부터 파생된 또 다른 속설은 "땅은 좋은 투자 대상이다. 땅은 당장 더 만들어 내지 못한다"는 것이다. 일본인들은 두 가지 속설을 다 믿었고, 1940년대 말부터 이어진 부동산 가격의 상승이 그들의 믿음에 확신을 주었다.


시장에 의해
저절로 252

일본의 관행에서는 대출에 부동산 담보가 설정됐고, 전통적으로 은행은 부동산 담보 가치의 70%까지 자금을 대여했다. 주센이 제공한 대출 자금의 일부는 조직폭력 집단인 야쿠자에게도 흘러 들어갔다. 이 폭력 집단은 그들의 인맥을 동원해 부동산에 이례적으로 높은 감정가를 얻어냈다. 부동산가격의 상승률이 연 30%의 속도로 진행된 덕분에 감정인이 부동산에 너무 높은 가치를 매김으로써 발생하는 웬만한 '오차'는 얼마 지나지 않아 현실 가격으로 실현되므로 시장에 의해 저절로 교정됐다.


너무 비싸서 253


일본의 거품은 1989년 말 점차 강화되는 국면에 도달했다. 부동산가격이 너무 높아 보였기 때문에 여러 사람들에게 회자된 바 있는 "너무 비싸서 아무도 거기에 거주할 엄두를 낼 수 없다"는 야구 스타 요기 베라의 말이 그럴듯해 보였다. 은행들은 100년, 3세대나 이어지는 부동산저당증서를 개발했다. 신임 일본은행 총재는 너무 높은 주택가격이 사회적 갈등을 야기할 것을 우려했다. 은행의 부동산 대출 증가율이 대출총액 증가율을 초과할 수 없도록 부동산 대출의 증가를 제한하는 새로운 규정이 도입됐다.

(나의 생각)

지금 현재 대한민국의 타워팰리스를 두고 하는 말과 닮았다.



땅값은 항상 오른다는 속설 254

일단 은행 대출의 증가율이 둔화되자, 최근에 부동산을 매입한 일부 매수자들이 현금 동결 상태에 빠졌다; 이들의 임대소득은 부동산담보 차입 이자에 여전히 모자랐지만, 예전처럼 채무잔고의 이자를 지불하는 데 필요한 현금을 신규 은행대출로 마련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에서는, 결국 투자자들 가운데 높은 유지비용으로 인해 보유 부동산의 투매자로 변하는 사람이 나타나게 마련이다. 부동산 신용 성장률의 급락에 따른 신규 매수세의 실종과 동시에 이들 투매 물량이 시장에 쏟아져 나옴으로써 부동산가격이 하락하기 시작했다. 땅값은 항상 오른다는 속설이 비로소 시험대에 올랐고 잘못된 것으로 판명났다.


영구작동기계 254

이제 영구작동 기계가 반대 방향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부동산의 매도가 부동산 가격의 하락을 초래했다. 부동산가격과 주가가 떨어진다는 것은 은행 자본이 계속 줄어든다는 것을 의미했다; 결국 은행은 자금을 대여하는 것이 훨씬 더 어려워질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미국의 주식 가치가 상승하는 시기에 일본 주식의 가치 하락이 진행되고 있었기 때문에, 글로벌 인덱스펀드들은 일본 주식을 매도하고 미국 주식을 매수했다.


너무 커서 망할 수 없다. 255

엄청난 파산 건수와 은행이 입은 거액의 대출손실에도 불구하고 일본의 예금자들은 그들의 돈을 인출하지 않았다. 비록 공식적인 예금보험제도는 존재하지 않았지만, 은행이 파산하더라도 일본 정부가 예금자들을 보전해 줄 것이라고 개인과 기업 둘 다 확신했다. 대출 자산의 시장가치가 예금부채보다 적어서 은행의 순자산이 마이너스였음에도 불구하고, 꽤 오랫동안 은행 주식의 가격이 영보다 큰 값을 유지했다는 사실은, 은행들은 "너무 커서 망할 수 없다"는 투자자들의 신념을 반영하는 것이었다.


외국 자본 유입의 결과이자 이유 258

중국, 태국 및 다른 동아시아 국가들은 성숙한 내수시장용으로 보다 저렴한 공급처를 원하는 미국, 일본, 유럽 기업들의 외주생산 기지였다. 빠른 경제성장은 외국 자본(특히 일본 자본) 유입의 결과이자 이유였다. 당초 일본의 투자는 보다 저렴한 노동비용을 활용하기 위해 제조공장을 건설하는 형태를 취했다; 고부가가치 부품은 일본에서 생산된 후 같은 계열의 해외 공장으로 선적돼 그 곳에서 조립되었다. 그 곳에서 생산된 대부분의 제품은 미국, 일본, 그리고 제3국에 각각 일정 양씩 수출되었다. 일본 기업의 해외 직접투자는 납품업체와 은행을 일본에서 함께 끌고 나갔다. 당시 최신 유행어는 수출 주도형 성장이었고, 이 개념은 통상적으로 해당 국가 통화의 낮은 외환가치를 근저에 깔고 있었다. 이 같은 수출 제품의 다수는 미국, 일본, 대만에 본사를 둔 주력 기업들에 의해 생산됐다. 한국에 본사를 둔 기업들도 국내 임금에 비해 단위 임금이 엄청나게 저렴한 중국와 인도네시아에 투자하기 시작했다.


연극대본처럼 259

위기가 터지자 앞서 일본에서 벌어진 유사한 사건들이 연극대본처럼 재연됐다. 동아시아의 기적에 대한 얘기는 사라지고, 정실 자본주의와 자발적 사유화, 교란적 투기 같은 새로운 유행어들이 등장했다.


미국 주식의 시가총액 260

1982년에서 1999년 사이에 미국의 주가는 13배의 상승을 시현했다. 미합중국의 200년 역사상 연간 상승률로는 가장 괄목할 만한 상승 행진이었다. 장기간을 놓고 보면, 미국의 주가는 매 3년에 한 번씩은 하락했지만, 지난 세기의 마지막 20년 동안에는 단지 한 해 동안만, 그것도 5%에 불과한 주가 하락밖에 나타나지 않았다. 미국 주식의 시가총액은 1982년 미국 GDP의 60%에서 1999년에는 300%로 증가했다.


부정적 요소 두 가지 261

미국의 경제적 성과 면에서 나타난 "부정적 요소"가운데 하나는 연간 무역수지 적자가 5000억 달러로 급증했다는 점과 또 다른 하나는 가계의 저축률이 새로운 저점으로 떨어졌다는 점이다.


운좋은 사람들 262

로드쇼의 마지막에 투자은행가들은 그들이 IPO 시점에 판매하게 될 주식의 금액을 산출하고, 주가와 주식 수량을 결정했다. 99.46%의 경우에서 해당 주식의 최초 거래일 종가는 IPO 가격(공모가격)을 크게 상회했기 때문에, 이 가격으로 주식을 매수할 수 있었던 운 좋은 사람들은 큰 자본이득을 실현했다.


막대한 부와 큰 이익에 매료 262

이 같은 가격 뻥튀기의 한 가지 효과는 공모가격으로 주식을 매수하려고 아우성치는 투자자들을 구름처럼 몰고 다니는 것이었다. 두 번째 효과는 그런 매수세가 과시됨에 따라 이 연출 과정의 한 꼭지를 잡으려는 사람들이 점점 늘어났다는 것이다: 창업자들은 성공적인 혁신으로 그들이 벌어들일 수 있는 막대한 부에 매료됐고, 벤처자본가들은 성공 확률이 높은 기업가들을 찾아냄으로써 얻을 수 있는 큰 이익에 매료됐으며, 투자은행가들은 일반투자자들에게 다수의 기업을 공개해서 얻는 수수료를 원했다; 그리고 투자자들은 공모가격과 이 주식의 첫 거래일 종가, 첫 거래주간 종가, 첫 거래월 종가 간의 주가 뻥튀기에서 얻는 큰 자본이득을 원했다. 이 같은 가격 뻥튀기의 규모는 다이너마이트나 니트로글리세린, 혹은 아마도 이 둘의 화합물과 같은 폭발력에 비유할 수 있다.


영구작동 기계 263

미국에도 수십 만 가정의 재산을 불리도록 설계된 그 나름의 영구작동 기계가 생긴 것처럼 보였다. 첫 거래일의 가격 뻥튀기가 클수록 IPO에 몰려드는 투자자들의 수가 늘어났다. IPO에 대한 수요가 강할수록 창업자들을 밀어주려는 벤처자본가들의 수가 늘었다. 창업자들이 이 작업에 투입하려는 자본이 커질수록 기존 기업에서 이탈해 그들 자신의 운명을 모색하려는 창업자들의 수가 늘어났다.


비이성적 과열을 경고한 시점 264

1996년 12월 그린스펀 FRB 의장은 처음으로 '비이성적 과열(irrational exuberance)'이라는 용어를 사용했다; 이 때 다우존스 산업평균 주가는 6300이었고, 나스닥 지수는 1300이었다. 그린스펀은 신중하고 자료에 대해 세심한 인물이었다. 따라서 당시 주가가 최소한 15∼20% 정도 과대평가돼 있다고 믿지 않았다면 그가 주가에 대해 이렇게 언급했을 가능성은 매우 희박하다. 2000년 초 다우존스 산업평균 주가는 11700, 나스닥 지수는 5400이었고, 나스닥 주식의 시가총액은 뉴욕증권거래소 상장 주식 시가총액의 80%에 달했다.


'신경제 주식의 특징 자체가 미래에 대한 열광' 264

1990년대 말 나스닥시장에서 거래된 신경제를 대표하는 주식들-닷컴, 전자상거래, 광섬유, 컴퓨터서버, 반도체, 소프트웨어, 정보기술, 통신분야의 주식-의 주가는 제너럴 일렉트릭, 제너럴 모터스, AT&T, 타임라이프 등 뉴욕증권거래소에서 거래되는 구경제 주식들의 주가에 비해 매우 빠르게 상승했다. 그러나 파급 효과 이상의 것이 작용했는데, 왜냐하면 신경제 주식의 특징 자체가 미래에 대한 열광이었고, 그 전염성은 구경제 주식의 주가 상승도 유발했다.



'거품이 시작된 첫날' 265

합리적 활력이 언제 비이성적 과열로 변이를 일으키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쉬운 대답은 없다. 미국의 주식에 자산가격 거품이 발행했을 것이라는 생각은 서로 다른 날에 서로 다른 투자자들에게 생겼다. 미국 주식에 거품이 시작된 첫 날은 그린스펀이 "비이성적 과열"을 언급하기 18개월 혹은 20개월 전인 1995년 봄의 어느 날이다. 주가는 1995년 연간 34% 상승했고, 1996년 1∼11월 사이 연율로 25% 상승했다; 그 이전의 1994년에는 반대로 2% 하락했었다.


불가피한 결과 267

이 저축의 유입이 가져온 반작용으로 미국의 무역수지 적자가 증가했다. 미국으로 유입된 해외 저축은 미 달러화의 외환가치 상승을 야기했고, 이로 인해 수입품의 미 달러화 기준 가격이 떨어짐으로써 미국의 물가승상을 상쇄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 당시 미국으로 자금을 이동시킨 사람들은 미 달러화 표시 유가증권을 매수했고, 따라서 유가증권의 가격을 상승시켰다; 보유 유가증권의 일정량을 외국인 투자자들에게 매도한 미국인들은 매도로 얻은 자금으로 무엇을 할 것인지 결정해야 했다. 미국인들은 이 자금의 대부분을 다른 미국인들로부터 더 많은 유가증권을 매수하는 데 사용했지만, 동시에 그들이 추구하던 부의 목표 수준이 달성됨에 따라 미국 상품의 매입도 확대했다. 미국의 저축률 하락과 무역적자의 확대는 미국으로 유입되는 해외 저축의 증가가 가져온 불가피한 결과였다.


80% 268

새로운 천 년의 도래와 함께 FRB는 유동성을 거둬 들이기 시작했다. 주가가 떨어지기 시작했다. 주식시장 전체의 하락 규모는 40%였고, 나스닥 상장 주식의 시가총액은 80%나 줄어들었다.


더 대단한 바보들이 많이 공급될 것이라는 암묵적인 도박 269

동일한 방식으로 1990년대 후반 미국의 주식 매수자들은 보유 주식을 되팔 수 있도록 매도 대상이 되어줄 더 대단한 바보들이 많이 공급될 것이라는 암묵적인 도박을 벌였다. 더 대단한 바보들은 존재했지만, 다른 때는 합리적이며 보수적이라고 생각되는 그 투자자들이 주가가 무너졌을 때 큰 손실을 피할 수 있을 정도로 많은 바보들이 나타나지는 않았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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