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애심과 인간적 자아(自我)의 본질은 자기만을 사랑하고 자기만을 생각하는 데 있다. 그러나 어쩌겠는가. 그는 자기가 사랑하는 이 대상이 결함과 비참으로 가득 찬 것을 막지 못할 것이다. 그는 위대하기를 원하지만 못난 자신을 본다. 그는 행복하기를 원하지만 불행한 자신을 본다. 그는 완전하기를 원하지만 불완전으로 가득 찬 자신을 본다. 그는 뭇 사람의 사랑과 존경의 대상이 되기를 원하지만 자신의 결함이 그들의 혐오와 경멸만을 받아 마땅하다는 것을 안다.

 - 파스칼, 『팡세』중에서

 

 * * *

 

득국오난(得國五難)이라는 말이 있다. 나라를 얻기 위해서는 다섯 가지 어려움이 따른다는 뜻이다. 사마천의 『사기』 가운데 제후들의 이야기를 다룬 『사기 세가』에 실린 고사에서 비롯된 말이다.

 

득국오난을 검색해 보니 네이버 지식백과에는 나타나지 않는다. 그만큼 자주 쓰이지 않는 고사성어다. 그런데 이 말이 새삼 깊은 의미로 다가오는 까닭이 있다. 바로 온나라를 떠들썩하게 만든 법무장관 후보자 때문이다.

 

애시당초에 그가 법무장관 후보자로 지명되었을 때만 하더라도 후보자가 법무장관으로 지명되는 과정에서 이만큼 수많은 문제를 드러내리라고 예상하는 사람은 별로 없었을 듯하다. 그가 비록 남들을 공격하기 위해 과거에 내뱉은 숱한 매서운 말들 때문에 도리어 자신이 화를 입는 곤욕을 치르기는 하겠지만, 자신과 가족들이 알게 모르게 뿌려놓은 부도덕한 씨앗들이 자라나서 이만큼 거대한 산사태가 되어 자신과 가족들을 덮치고, 끝끝내 만신창이가 되어 오랫동안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는 비극의 주인공으로 전락하리라고 그 누가 감히 예상이나 했겠는가?

 

뭐? 아직도 결말이 해피엔딩으로 마무리될지 모른다고? 글쎄, 사태가 이만큼에서라도 마무리되어 더 큰 비극으로 전개되지나 않았으면 좋겠다. 후보자나 집권당이나 대통령이나 버티면 버틸수록 더 큰 화를 자초할 뿐일 테니 말이다. 민심의 거대한 쓰나미를 어떻게 한 줌밖에 안되는 권력이 맞서 이길 수 있단 말인가.

 

이쯤에서 다시 득국오난 이야기로 되돌아 가자. 과거의 역사만큼 오늘을 훤히 드러내 주는 교훈적인 이야기도 찾기 어렵기 때문이다. 하물며 사마천의 이야기임에랴. 때는 지금으로부터 2,500년 전쯤이다.

 

춘추시대 초나라의 공왕(BC 600년~BC 560년)에게는 아들이 다섯이었다. 맏이부터 차례대로 강왕, 위(영왕), 자비, 자석, 기질(평왕)이라고 불렸다. 그들의 운명을 둘러싼 이야기는 치국(治國)의 어려움과 권력의 무서운 본질에 대해 새삼 숙고하게 만든다.

 

처음에 공왕은 총애하는 아들 다섯을 두었는데, 적자를 임금의 자리에 세우지 않고, 여러 신들에게 제사를 기탁하여 신령이 그중에서 한 사람을 택하면 그에게 사직을 주관하도록 하겠다고 하였다. …… 강왕은 연장자로서 자리에 올랐으나 그의 아들에 이르러 자리를 잃었고, 위圍는 영왕이 되었다가 자신에 이르러 시해되었으며, 자비는 왕이 된 것이 여남은 일 남짓하였으며, 자석은 자리에 오르지도 못하고 또한 모두 주살되었다. 이 네 아들은 후손이 끊어졌다. 오직 기질만이 후에 자리에 올라 평왕이 되어 결국 초나라의 제사를 이어 갔으니 ……(368쪽)

 

 - 사마천, 『사기 세가』 , <초 세가> 중에서

 

 

오형제 가운데 맏이인 강왕에 이르기까지는 제위가 순조롭게 이양된다, 강왕이 죽고 나서부터 격변이 일어난다. 강왕이 임금이 된 지 15년 만에 죽자, 아들이 왕의 자리에 올랐으나 4년을 넘기지 못하고 숙부인 강왕의 동생 위에게 왕위를 찬탈당한다. 숙부인 위는 이웃나라에 사신으로 가다가 중도에 왕이 병에 걸렸다는 소식을 듣고 궁궐로 되돌아와 군왕의 병을 살핀다면서 갓끈으로 조카를 시해하고, 조카의 어린 아들까지 모조리 주살했다.

 

5형제 중 둘째인 위가 영왕으로 즉위하자 셋째인 자비는 목숨을 잃을까 두려워 진晉나라로 달아난다. 영왕은 성격이 교만하고 포악했다. 나라를 다스리는 동안 민심을 잃어 백성들의 미움을 받았다. 이런 와중에 자비가 진나라로부터 돌아오자, 한선자가 숙향에게 물었다.

 

"자비는 아마도 성공하겠지요?"

 

숙향의 대답은 No였다.

 

한선자가 말했다.

 

"초나라 백성들이 한결같이 초나라 왕을 싫어하여, 새 임금을 세우려고 하는 것이 마치 시장의 장사치처럼 하니 어찌 이루지 못하겠습니까?"

 

이때 내놓은 숙향의 대답이 걸작이었다. 이른바 득국오난(得國五難)이라는 말이 여기서 태어났다.

 

"더불어 잘 지내는 사람도 없으니, 누가 함께 미워할 수 있겠습니까? 나라를 취하는 데는 다섯 가지 어려움이 있습니다. 총애하는 사람은 있지만 어진 사람이 없는 것이 첫째요, 현인은 있지만 주도하는 자가 없는 것이 둘째요, 주도하는 자는 있지만 계책이 없는 것이 세 번째요, 계책은 있지만 백성들이 따르지 않는 것이 네 번째요, 백성들은 있지만 덕이 없는 것이 다섯 번째입니다. 자비는 진나라에서 13년간 있었는데, 진나라와 초나라에 그를 따르는 사람 가운데 두루 통달한 사람이 있다는 소문을 들어 보지 못하였으니 어진 사람이 없다고 말할 수 있고, 가족이 없어지고 친족도 배반하였으니 주도하는 자가 없다고 말할 수 있으며, 때가 되지도 않았는데 정변을 일으키고자 하니 계책이 없다고 할 수 있으며, 평생을 나라 밖에서 살았으니 백성이 없다고 말할 수 있고, 나라 밖에 망명하였는데도 어느 누구도 그의 자취를 안타까워하지 않으니 덕이 없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초나라 왕이 포학하여 거리낄 바가 없긴 하지만, 자비가 다섯 가지 어려움을 뛰어넘어 군주를 시해하려는데 누가 그를 도와줄 수 있겠습니까?"(369쪽)

 

  - 사마천, 『사기 세가』 , <초 세가> 중에서

 

(나의 생각)

숙향이 날카롭게 짚어 낸 득국오난 이야기야말로 오늘날 조국 후보자가 처한 다섯 가지 어려움을 그대로 빼닮은 게 아닐까. 총애하는 사람은 있지만 어진 사람이 없는 것, 현인은 있지만 주도하는 자가 없는 것, 주도하는 자는 있지만 계책이 없는 것, 계책은 있지만 백성들이 따르지 않는 것, 백성들은 있지만 덕이 없는 것, 이 다섯 가지 어려움이야말로 조국 후보자나 문재인 대통령이 오늘날 떠안고 있는 핵심 난제가 아니고 무엇인가.

 

공왕의 다섯 아들 가운데 조카를 시해하고 왕위에 오른 위(영왕)의 비극적인 말년은 또다른 여운을 우리에게 던져 준다. 영왕의 비참한 말로에 얽힌 이야기를 조금 더 이어가 보자.

 

초나라 영왕이 나라를 통치하는 동안에 제나라 대부였던 관기觀起는 영왕에 의해 목숨을 잃었는데, 그의 아들 관종觀從이 오나라로 달아나서 초나라를 정벌하기를 권하였다. 관종은 오나라와 월나라 군대와 함께 초나라를 공격했고, 공자 비로 하여금 공자 기질을 만나게 하고, 영왕의 태자 녹을 죽이고, 비를 받들어 세워 왕으로 삼고, 공자 자석을 영윤으로 삼았으며, 기질을 사마로 삼았다. 관종은 군대를 거느리고 초나라 군사들에게 말했다.

 

"나라에 왕이 새로 생겼으니 먼저 돌아가는 사람은 원래 가지고 있던 관직과 봉읍, 전답, 집을 회복해 줄 것이며, 늦게 돌아가는 사람은 멀리 쫓아낼 것이다."

 

이렇게 해서 초나라 군사들은 모두 뿔뿔이 흩어져 영왕을 떠나갔다. 영왕은 태자 녹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자 스스로 마차 아래로 몸을 던지며 말했다.

 

"사람들이 아들을 아끼는 것이 이와 같은가?"

 

시종이 말했다.

 

"이것보다 심합니다."

 

  - 사마천, 『사기 세가』 , <초 세가> 중에서

 

 

관종의 '부친 살해범에 대한 복수극' 때문에 비롯된 영왕의 급작스러운 몰락과 비참한 최후는 뜻밖에도 저 유명한 셰익스피어의 비극 『리어 왕』이나 고대 마케도니아의 마지막 왕이었던 페르세우스를 보는 듯한 비애감을 자아 낸다. 사마천의 얘기를 조금 더 들어보자.

 

 

영왕이 말했다.

 

"내가 다른 사람들의 자식을 많이 죽였으니 이런 지경에 이르지 않을 수 있겠는가?"

 

우윤이 말했다.

 

"청하건대 [왕께서는] 교외로 나가셔서 백성들의 처분을 들으십시오."

 

영왕이 말했다.

 

"백성들이 노여워해도 나를 범하지는 못할 것이다."

 

[우윤이] 말했다.

 

"잠시 큰 현에 들어가 제후에게 군대를 빌리십시오."

 

"모두가 나를 배반할 것이다."

 

[우윤이] 다시 말했다.

 

"잠시 제후들에게 달아나 큰 나라의 생각을 들으십시오."

 

왕이 말했다.

 

"큰 복은 다시 오지 않으니 단지 치욕을 당해야 할 뿐이다."

 

이에 영왕은 배를 타고 언성에 들어가려고 했다. 우윤은 영왕이 그의 계책을 받아들이지 않을 듯하자, 함께 죽으까 두려워 영왕을 떠나 달아났다.

 

영왕은 홀로 산속을 방황했지만, 산에 사는 사람들 중에 아무도 영왕을 거두어들이지 않았다. 영왕은 길을 가다가 옛날 견인(궁정을 청소하는 사람)을 만나 그에게 말했다.

 

"내게 요기할 것 좀 주시오. 사흘이나 굶었소."

 

견인이 말했다.

 

"새 왕이 법령을 공표하여, 감히 왕에게 음식을 제공하거나 왕을 따르는 사람은 죄가 삼족에게 미칠 것이라고 한 데다 지금은 음식을 찾을 만한 곳도 없습니다."

 

영왕은 그의 다리를 베개 삼아 잠이 들었다. 견인은 흙더미를 가져다가 자신의 다리를 대신하고 달아났다. 영왕이 깨어 보니 사람은 보이지 않았고 배가 고파서 일어나지도 못했다. ……

 

여름 5월 계축일에 영왕이 신해의 집에서 죽자 신해는 두 딸을 따라 죽게 하였으며 그들을 모두 매장했다.(364∼366쪽)

 

  - 사마천, 『사기 세가』 , <초 세가> 중에서

 

 

초나라 영왕의 비참한 말로나 자비의 여남은 일 남짓한 짧은 제위 기간이 어찌 까마득한 옛날 중국에서 일어났던 일로만 여겨질 수 있겠는가.

 

사마천은 『사기』 곳곳에서 못난 정치와 그것이 초래하는 수많은 폐단을 날카롭게 지적했다. 그는 정치 중에서 가장 못난 정치를 '백성과 다투는 정치’라고 보았다. 사마천이 <초 세가>를 마무리하면서 후세에 전하는 말은 2,000년이나 지난 오늘날에도 여전히 새롭기만 하다.

 

태사공(사마천을 말함)은 말한다.

 

"초나라 영왕이 바야흐로 신읍에서 제후들과 회맹하고 제나라 경봉을 주살하고, 장화대를 만들고, 주나라의 구정을 얻고자 했을 때 마음은 천하를 하찮게 보았다. 그러나 나중에 신해의 집에서 굶어 죽으려 할 때 천하의 비웃음거리가 되었다. [영왕은] 지조와 품행을 닦지 못하였으니 정말로 슬프도다! 사람에게 권세가 있다면 정녕 신중하지 않을 수 있는가! 기질이 변란을 이용하여 왕의 자리에 오르고, 진秦나라를 총애하고 음란한 것이 너무도 심하여 거의 다시 나라를 잃을 뻔하게 되었구나!"(409쪽)

 

 

  - 사마천, 『사기 세가』 , <초 세가>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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