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이 무료했거나 새로운 전환이 필요하다거나 이유를 찾으려면 뭐든 있겠지만 여전히 이유를 찾지 못하고 있다.

 내가 임신을 하기로 결심하고 지금 8개월째 꼬물거리는 태명을 가진 아이를 가지고 있는 이유 말이다.


 의학적으로 노산의 경계에 들어선 나이 때문에 조급했던 건 아니다. 엄마가 된다는 상상을 한번도 해본적이 없었다. 조카들을 키우는데 만족했다. 주위에서 조카를 키우는 것과 제 아이를 키우는건 천지 차이라고 했지만 그런 얘기를 들을 때마다 콧방귀를 뀌었다. 조카들에게 최선을 다했고 살면서 그렇게 많은 고민을 했던 적도 없었다. 물론 고민의 양이 질을 보장하는 것도 아니고 그게 다가 아닐 수 있다는 것도 안다. 하지만 조카들에게 아이랑 교감할 수 있는 모든 감정들을 다 쏟았다. 저출산이 생존투쟁이고 이렇게 불안한 세상을 아이가 살게 할 수 없다는 부정도 한몫했다. 이제 막 익숙해진 일을 그만둘지도 모르고 여유있는 지금 생활을 포기하고 싶지 않았다. 숙고했지만 결론은 늘 아직은 아니었다. 20대 때부터 생리가 불안정해서 내가 임신 가능한 몸인지도 확신할 수 없었다. 피임을 악착같이 하긴 했지만 영구피임이 아닌한 모든 방법들은 불안정 했다. 하지만 실수로라도 임신을 한적이 없는걸로 봐서 임신을 할 수 없는 몸이 아닐까란 막연함은 있었다. 그렇다면 더 늦기 전에 결정을 내려야만 했다. 라고 그 당시를 회상해본다. 그런데 정말, 뚜렷하고 확고한 무언가는 없었다.


 적극적인 피임을 멈췄지만 임신을 할줄은 몰랐다. 그즈음 규칙적이던 생리가 돌연 오지 않고 속이 더부룩한 느낌이 지속됐지만 만성적인 소화불량 탓인줄 알았다. 임신 테스트기에 두줄이 선명하고 혹시 몰라 찾아간 산부인과에서 맨발에 슬리퍼를 신은 늙은 의사가 마지막 생리 날짜를 다그치는걸(이 의사를 다시는 볼 일이 없었지만) 이상하게 생각하고서야 내 뱃속에 아이가 있다는걸 실감했다. 소식을 전하자 엄마는 거의 30분 넘게 일하는 곳 아주머니 흉을 보더니 '축하한다'라고 말했다. b는 '축하할 일이야?'라고 되물었다. a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축하를 해줬다. 나는 아직까지도 축하받을 일인지 자신하지 못하고 있다.


 아이를 낳아서 어떻게 키울지만 생각했다. 그런데 이거 참, 그동안 호르몬이 내 몸속에서 뭘하는지 몰랐는데 얘네야말로 임신을 위해 존재한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확고하게 자기 역할을 했다. 임신 초기, 순간순간의 우울감과 무기력함, 미래에 대한 불투명함이 한꺼번에 덥쳐 기분이 오락가락했다. 식욕 저하는 기본 옵션이고 비염으로 기능이 충분히 떨어진 코도 분주하게 냄새를 맡으며 입덫을 했다. 내 뱃속에서 생명이 자란다는 원초적 즐거움보다는 생리적인 이상 반응과 기분 저하, 끊임없이 쏟아지는 잠이 임신 3~4개월을 채워나갔다. 일하다 말고 욱욱 거리며 화장실을 향하는 드라마 속 상황은 연출되지 않았다. 나만 알고 기임신 경험자에게만 토로할 수 있는 생리현상이 왕왕 일어났다. 모성이 들어설 자리는 물론이고 의식적으로 만들어진 모성에 반감을 갖고 있던 터였다.


 정신 좀 차리고 호르몬도 진정 했을 때가 5개월 즈음. 증상 참고용으로 설렁설렁 봤던 책들을 본격적으로 보기 시작했다.


 






 

 임신 출산 육아의 양대산맥이라고 할 수 있는 삼성출판과 중앙북스의 책. 책을 보면서 내 몸이 한번도 해보지 않은 일, 몸의 변화에 익숙해져 갔다. 그런데 책을 읽을수록 걸리는 부분이 있었다. 그건 바로 기형아 검사로 대표되는 임신을 관리하는 문화와 임신해서도 할 수 있는 섹스 체위에 관한 것이었다. 임신을 자연스럽고 편하게 받아들이는 게 아니라 관리하고 검사하면서 안심해야하는 일로 보는 것. 물론 현대의료기술로 아이가 뱃속에 있을 때 발생할 수 있는 위험을 방지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야 정말 다행이고. 하지만 인위적인 초음파로 아이를 들여다보고 아이 얼굴을 잘 보이게 한다며 초음파 기계로 배를 험하게 누르는건 아무리 이해하려고 해도 이해가 안 됐다. 90%확률을 자랑한다는 기형아 검사도 그렇다. 비급여로 비용이 비싼 것도 흠이지만 5개월 넘게 뱃속에서 나랑 같이 먹고 자고 놀던 아이를 확률상 기형아에 속한다면 어쩌란 말인가. 의사는 자기 병원에서 낙태는 하지 않는다며 아이가 태어났을 때 대비하기 위한 검사란 설명을 덧붙였다. 선택은 없고 고민만 깊어지는 검사인 것.

 

 임신해서도 가능한 체위에 이르면 정말 성이 야만적이란, 아니 일반적인 배려가 누구를 기준으로 설정되어있는지까지 생각이 이르러 화가 날 정도였다. 기분이 격렬한 놀이기구처럼 오락가락한데 남편을 배려하는 섹스를 해야한다고 버젓이 얘기하는게 정말 이해가 안 됐다. 일반적인 생각, 남자의 성욕은 참을 수 없고 해소해야할 무언가로 확고하게 믿지 않는다면 가능한 얘기일까. 이 책들은 내가 한번도 해보지 못한 일을 배우는데 필요한 기본 지식을 제공하지만 계속 읽자니 찝찝했다.


 조산원에서 아이를 낳으면 어떨까. 후기를 보니 처음 아이를 낳는 경우에는 아이가 나오지 않아 산부인과에 가는 경우도 있다는데. 회음부절개는 꼭 해야하는걸까. 산부인과 검사는 병원에서 원하는대로 받아야할까. 예방접종은? 정보는 많고 모든 것을 선택해야만한다. 한가지 노선이 있는 게 아니라 여러갈래로 흩어진 주장과 당위는 자꾸 이런 선택이 복불복이 아닐까란 의심이 든다. 예방접종 안 맞고 건강하게 크는 아이가 있는가하면 안 맞아서 병에 걸려 고생을 하는 아이도 있다. 자연분만을 하고 싶지만 내 몸이 가능한지도 모르겠다. 태아보험을 꼭 들어야한다는 강권에서부터 우리나라 민간 보험 지급률이 몇프로 안 된다는 얘기. 아이를 낳고 금식을 시켜서 황금똥을 싸게 해야한다는 주장에서부터 그러면 위험해진다는 과학적인 얘기까지. 어느 것 하나 명확하지 않고 적절한 선에서 타협을 이루기는 어려워보인다.


 지금 한창 뱃속에서 꼬물거리는 이 아이를 생각하면 한없이 맘이 너그러워진다. 이제 막 아프기 시작한 허리와 골반 통증쯤은 아무렇지 않다, 라고 쓰려고 했는데 입이 방정이라 아무렇지 않은게 아니지 않겠나 싶어 신경쓰이긴 한다 정도로. 과민해서 이런저런 고민을 하는거고 고민의 양에 상관없이 나은 선택을 하는 것보다 귀차니즘 탓에 관행적으로 아이를 낳고 키울 확률이 더 높다. 섹스 도 귀찮고 몸이 안 따라줘서 그렇지 내 신념에 반하고 투철한 의식을 갖고 안 하는 게 아닌 것처럼. 


  다만 나와 아이를 위해 무엇이 최선인지, 내가 감당할 수 있는 선은 어느 정도인지까지 정리를 해야할 것 같다. 내 몸이고 스스로 책임을 지는 문제면 상관이 없지만 그게 아니니까. 대체 난 어떻게 이렇게 큰 일을 덜컥, 겁없이 저지른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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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15-10-02 16: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주홍색 홍시가 괜히 먹고 싶은 게 아니었군요, 아치!
아, 아치!
소식이 뜸한 동안 큰 일을 덥썩 안고 있었군요.
축하해야 할일인지 아닌지는 생기기 전에 고민할 일이고, 일단 뱃속에 자라나고 있고 또 아치랑 함께하고 있다면 축하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조카들과 이미 치열한 고민을 했던, 고민을 아는 몸이 되었으니, 아치, 잘 할거에요. 임신출산육아 서적에서도 이렇듯 걸리적거리는 부분을 짚어내는 여전한 아치라 너무 좋아요. 기운내요!

Arch 2015-10-04 14:52   좋아요 0 | URL
고민을 아는 몸? 그래서 더 염려스러운 부분이 있지만 ^^ 심각하게 쓰고 생각했지만 벅차오르고 기분 좋을 때도 많아요! 응원하는 다락방이 있으니 더 기운이 나요! 축하해줘서 고마워요~

별족 2015-10-02 17: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 대백과는 아무도 못 줄 읽었다는 게 부끄럽던 기억이^^; 저는 축하드려요. 저는 기형아 검사는 안 했습니다. 인생이 복불복인걸요. 하자면 끝도 없는 게 걱정이라.

Arch 2015-10-04 14:53   좋아요 0 | URL
맞아요, 별족님. 복불복! 해도 그만, 안 해도 그만인 걱정들이에요. 요샌 예방접종 제대로 알고 맞히자류의 책을 읽고 있어 근심이 스물스물 올라오지만, 좀 태평하게 생각하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고맙습니다.

치니 2015-10-02 22: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축하합니다. 그리고 꼭 건강하게 순산하시길.

Arch 2015-10-04 14:53   좋아요 0 | URL
치니님 감사합니다. 저도 꼭 순산했으면 좋겠어요 ^^
 














 어제 자기 전 정희진의 책을 읽었다.


 예전에는 책을 서문에서 목차까지 순서대로 읽고는 했는데 요새는 생각나는대로 책을 살짝 펼쳐들고 원하는 꼭지를 읽는다. 신문에 연재한 글인만큼 짧은 호흡으로 읽을 수 있는데 글은 짧아도 생각할거리는 짧게 끝나지만은 않는다.

 프로이트와 페미니즘이 대항이론을 갖고 있는게 아니라 페미니즘 이론의 여러면은 프로이트에 빚지고 있다, 프로이트의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는 본인의 경험에서 비롯됐다. 이 부분을 어디서 들었더라 하면서 생각하다 시간이 늦고 졸려서 잠이 들었다. 새벽녁에 잠이 깼고 화장실에 다녀와 다시 자리에 누웠다. 잠이 휙 달아났는지 정신이 말똥말똥해져 '히잉'하면서 다시 자려고 기를 쓰는데 a가 옆에 와서 누웠다.


 a는 곧바로 잠이 들었고 나는 뒤척이다 간신히 잠이 들었다. 

 오이디푸스팀으로 구성된 50여명의 사내들은 부자와 젊은 여자들을 죽이려고 한다. 사내들은 대단한 에너지를 뿜어대며 살인을 하기 전 야구경기를 한다. 그 중 한명은 야구 경기를 하고 싶어서 팀에 가입을 했다며 자신의 가족들이 피해를 받지 않도록 미리 도망치라고 했다. 나는 이제 곧 죽는구나, 얼마 없는 돈을 이불 사이에 끼워놓고 자전거를 탔다. 조카랑 같이 자전거를 탔는데 조카는 무당이 어린 아이로 만들어서 위험에서 벗어났다. '나는 곧 죽는구나.' '허망하게 죽는구나'란 생각이 턱 끝까지 차고 들어와 숨이 꽉꽉 막혔다.

 한 사내가 내 몸을 더듬는데 흥분은 커녕 숨이 막혔다. 목을 조르는 것도 아니고 지딴에는 뭔가 해보려고 애를 쓰는데 하나도 즐겁지가 않다. 숨이 막히고 가슴 위로 쇳덩어리가 내려앉는 것 같다. 이러다 죽겠다 싶어 엉엉 울었다. 옆에 있던 a가 더웠는지 덮는 이불을 뭉개고 내쪽으로 몸을 기대서 베개와 이불 틈바구니에서 갑갑하게 잠이 깨고 말았다.


 정희진 책에서 오이디푸스가 나오고 a가 좋아하는 야구와 부자연스러운 잠자리. 하루종일 숨이 차다. 생리적인건지 심리적인건지 생각하다 '나는 나에 대해 집중하는 것보다 다른걸 생각하는게 정신건강에 좋을 것 같다'는 루이제 린저의 조언이 생각나 생각하길 멈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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몬스터 2015-10-02 00: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지막 문단의 조언이 참 좋네요.

Arch 2015-10-02 11:35   좋아요 0 | URL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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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전에 기욤 뮈소와 더글라스 케네디의 책을 읽으며 12시를 훌쩍 넘긴 적이 있다. 인문/사회 계열 책을 읽을 때는 장시간 집중하지 못했는데 소설은 신기할 정도로 몰입이 된다. 아, 요나스 요나손의 책도 그랬다. 그래서 이 작가의 책을 다 읽으리란 생각에 도서관을 돌아다니며 전작주의의 탐욕스런 욕심을 품었드랬다. 그런데 특이하게도 그 다음 책은 뭐랄까, 흥미가 사라졌달까. 도저히 읽고 싶지 않다. '구해줘'를 읽고 기욤 뮈소 책은 기필코 다 읽어야겠다고 생각했는데. 요나스 요나손의 책을 재미있게 읽었고 한국소설도 그랬으면 좋겠다는 페이퍼까지 적었지만 그 다음책인 '셈을 할 줄 아는 까막눈이 여자'는 도서관에 갈 때마다 집었다 내렸다하길 반복할 뿐 선뜻 빌리지를 못한다.


 가벼운 책을 읽으면 안 된다는 무의식 때문인지 이런 책은 딱 한번이면 좋을 흥미라는 단정 때문인지는 모르겠다. 어쨌든 예능은 소모적이고 음악은 금세 익숙해지고 드라마는 중독성이 강해 또 책을 집어들었다. 잡문을 좋아하지만 요새는 통 읽을만한 잡문을 찾지 못해 이번에도 소설책이다.


 재미있다는 평이 자자했던 '허즈번드 시크릿'이 바로 그 책. 세실리아, 테스, 레이첼의 이야기가 번갈아 나오며 자니의 죽음과 존 폴의 비밀이 연관되어있다는 추측 정도를 하게 된 지금, 그만 딱 이 책에서 손을 놓고 말았다. 200페이지를 읽은 게 아까워서 다 읽을까 한번 고민했지만 결론적으로 재미가 없다. 세 여성이 자신에 대해 생각하는 바와 서로가 서로를 인식하는 부분에서 차이가 나는 점이 살짝 흥미롭긴 했지만 그 외에는 이 미스터리가 하나도 궁금하지 않다. 소설의 맛을 모르는건지, 집에 책을 읽기에 적절한 공간이 없는건지. 무척 재미있는 책을 읽고 싶은데 이번 책도 아니었다. 


 허지웅처럼 자신이 보거나 읽었을 때 너무 좋아서 추천하고 싶은 영화나 책, 혹시 없을까?




 











 그래서 허지웅이 추천한 건 아니지만 그의 생각들이 쓱쓱 나오는 이 책을 집어들었다. 그의 취향이 나랑 맞지는 않지만 그의 글은 그 자체로 흥미롭다. 자신이 갖고 있는 합리나 정의의 잣대로 남을 판단하지 말자, 언론의 그릇된 관행에 휘둘리지 말자. 각자가 간직할만한 좋은 구절을 하나씩 품고 이 세상을 버티자는 그의 얘기가 맘에 와닿는다. 비슷한 글들이 종종 겹치고 했던 말을 또하는 경우도 있지만 주의, 주장이 아닌 취향과 개성으로 수렴되는 이야기는 분명 매력적이다. 치열을 가장하지 않고 짐짓 뒷짐지며 꼰대 행세 하지 않는 글, 자신의 독특함을 과장하려고 기를 쓰는 글이 아니라 더 좋다.


 고시원 이야기는 내것과 비교해 정제되어 있고 영화에 대해 적은 글들도 재미있다. 글 쓰는 허지웅을 떠올릴 때 떠오르는 건 냉소지만 냉소에 그치지 않은 태도가 글에 담겨 있을 때, 냉소를 뛰어넘으려고 애쓰지 않지만 그 자체로 인정하고 다른 고민에 이르렀을 때 그의 글이 더 와닿는다. 진보가 그들이 주장하는 바를 좀 더 매력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전략을 구사해야한다는 점도 '싸가지 없는 진보'와 맥락이 비슷해 공감되고.


 그리고 어제는

 












 무려 이런 제목의 책을 읽었다. 한때 문고판을 미친 듯이 살 때가 있었는데 그때 사서는 막 밑줄을 긋고 공감을 했었나보다. 한 페이지는 정상인데 다른 페이지는 인쇄가 살짝 흐릿하게 나온데다 주의깊게 보지 않으면 사위도 모를 오타가 버젓이 껴있다. 내가 갖고 있는 판본만 그런건지, 베이지색 표지는 단정하고 예쁜데 들고 다니면서 보기에는 책 제목이 책에 나온 것처럼 나를 '기만'하는 느낌이다.


 지금보다 조금 팔팔했을 때는 톨스토이 인생론이나 몽테뉴의 수상록처럼 어떻게 살아야 좋을지 알려주는 책을 좋아했다. 이 나이쯤 되면 사는건 그냥 사는대로 대수롭지 않게 넘기고 삶의 다른 지평이 펼쳐질줄 알았다. 그런데 웬걸! 초조함과 불안은 여전하고 걸핏하면 눈물이 찔끔씩 나기까지. 도저히 호르몬만으로는 설명이 되지 않는 암담한 지평인걸.


 20대의 내가 그 당시 만나던 사람과 안면도로 놀러가 그 사람의 지인을 만난적이 있다. 언젠가 내가 살고 싶은 삶을 사는 것처럼 보인 지인분은 여유롭고 평화로워 보였다. 그런데 무슨 말 끝엔가 그분이 그러는거다. 자기 나이 정도 되면 한자는 쓱쓱 읽게 될 줄 알았다고. 한자 공부를 따로 하지 않았고 나이로 퉁치는 언어능력이 뿅하고 샘솟을리 없는데 그렇게 믿었다는 것. 그때 그 사람은 아련한데 그 말은 가끔 생각난다. 나이로 퉁치면서 대충 뭉개는 나잇대라는건 어디에도 없다는걸.


 재미있는 책을 찾고 뭔가에 몰두하고 싶은 건 불안의 반증일지 모르겠다. 그럭저럭 살아가면서 문득 이렇게 계속 살아도 될지, 커다란 목표나 방향 없이 하루하루에만 적정한 에너지를 쏟으며 살아도 될런지 싶은 날. 그런 날에도 저녁 무렵 연한 진분홍으로 물든 하늘을 보면서 잘한 것도 없는데 뜻밖의 선물을 받은 것 같아 기쁘다. 멸치랑 생표고를 넣은 오뎅국이 말도 못하게 맛있어서 흐뭇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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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15-09-22 13: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핑거 스미스]는 읽어봤나요, 아치? 그 책이라면 재미있는데 말이지요!

Arch 2015-09-23 12:42   좋아요 0 | URL
오랜만이에요.
알겠어요. 드라마로 나온거 말하는거죠? 읽어봐야겠어요.

Forgettable. 2015-09-23 00: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치는 엄청나게 부드러운 사람이 되었네요. 못 본 사이에.

Arch 2015-09-23 12:42   좋아요 0 | URL
에? 설마... ^^
 

*

잦은 음주와 이어지는 코곯이로 몇주째 신랑과 따로 잤는데 어제는 코를 곯지 않겠다는 확고한 다짐을 받고 같이 잤다.

어제는 낮고 가늘게 코를 곯아서 신경은 쓰였지만 따로 자진 못한채 몇번 뒤척였다.

혼자 쓰는 침대가 익숙했는지 자리도 불편했다.

- ㅇㅇ씨, 내가 작은방에서 잘게. 자기가 침대에서 자.

- 나 코 많이 곯았어?

- 아니. 어제는 그나마 괜찮았는데 자리가 좁고 불편했어.

- 알겠어. 그런 아치가 침대에서 자. 나는 내가 알아서 잘게. 옷장이든 어디든.

- 옷장에서 자면 재미있겠다.

- 그런데 옷장에서 자다 다음날 아침에 나 못볼 수도 있어.

- 응?

- 자는 동안 다른 세계로 갈 수 있거든.


*

신랑은 염장 다시마를 깨끗이 씻어서 먹기좋게 썰고 나는 초고추장을 만들기로 했다.

그런데 왠지 주말 저녁에 초고추장을 만들고 싶지 않았다. 변덕이 생긴 것.

신랑이 선뜻 자기가 초고추장을 만들겠다고 했다.

침대에 누워서 뒹글거리며 초고추장 만드는 신랑을 봤다.

조청이랑 현미식초를 조금씩 넣어가며 고추장을 찍어먹어보고

싱거운지 매실청을 넣고 깨를 갈아서 넣는다.

새콤한지 다시 고추장을 푹 퍼넣고 조청도 조금 더 넣는다.

그 모습을 보는데

ㅇㅇ씨가 나 없어도 잘 지내겠구나란 생각이 들어 울컥했다가

나 없어도 잘 지낼 수 있으니 다행이란 생각이 들었다.


*

요즘 우리 관계에서 자주 등장하는 단어 '연속 동작'

과자를 먹고 나면 봉지는? 바로 쓰레기통에 넣는다.

물통이 다 비었으면? 물을 끓여놓는다.

과일 다 먹은 접시는? 설렁설렁 헹궈서 물기를 뺀다.

둘뿐인 생활이지만 연속동작을 하지 않으면 빈틈이 발생하고 그 틈에서 '안 맞네'란 잠정적 결론을 내리고

서로를 미워할까봐 자신이 손 댄 일은 다 끝내기로 했다.

잘 지켜질 때도 있지만 그렇지 않아서 서로 싫은 소리, 잔소리를 할 때가 많아서

이번에는 냉장고에 상대가 했으면 좋겠는 일들을 적어놓는다.

냉장고에 있는 식재료로 일주일 동안 뭘 맛있게 해먹을 수 있을지 상의도 한다.

나는 이런 게

신랑과 내가 6시면 퇴근하는 삶을 살고

지금 여기에서 살기 때문에 가능한거라고 생각한다.

예전엔 외식이 잦았고 식사를 때우는 방식이었는데

지금은 왠만해선 집에서 다 해먹는다.

나가서 사먹을 곳이 없기도 하고 서로 의견조율하면서 음식 만들만큼 여유도 있기 때문이다.


이전보다 지금이 조금 더 낫다.

우릴 닮은 아이가 태어나면 소꿉장난 같은 일상보다는

좀 더 탄탄하고 계획적인 삶으로 진입할지도 모르겠다.

그때까지, 지금 잠시 외출하는 기분을 내고 있는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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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nine 2015-09-21 14: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엇! 아치님, 그동안 결혼 하셨어요??

Arch 2015-09-22 13:07   좋아요 0 | URL
^^ 본격 결혼은 아닌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