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가 워크숍을 가서 어젯밤은 혼자 잤다. 따로 자기 때문에 워크숍을 안 갔어도 혼자 자지만 저녁 시간을 혼자 보내는 건 오랜만이다. 시골에 버라이어티한 오락거리가 있는 건 아니니 혼자 있으나 둘이 있으나 매한가지다. 고요하고 평온한 밤이었다. 자기 전까지 6시간을 아무 말도 하지 않아서인지 자꾸 입이 말랐다. 


 같이 있을 때도 a는 뉴스검색하느라 거실에 있고 나는 책을 보거나 음악을 듣느라 방에 있는다. '육룡이 나르샤'와 재미있는 영화를 볼 때나 함께 침대에서 자세를 바꿔가며 뒹굴댄다. 어젯밤은 허전함이 크지 않고 혼자 있다는 것을 의식하며 꿋꿋하게 저녁을 보내지 않아 좋았다. a가 채워준 소소한 생활의 편리도 아쉽지 않았고 뚝배기에 김치 사발면을 끓여먹으며 연신 감탄하는 것도 이채로웠다.


 나 혼자 잤다. 거실에서 자는데도 들리는 코고는 소리와 새벽녁에 한번씩 서로 번갈아가며 잠 안 온다며 칭얼대지 않고 나 혼자 푹 잘 잤다. 아침에 보니 a는 새벽에 잠이 안 온다며 문자를 보냈다. 짧고 귀여운 문자로 미루어선 술을 많이 먹은 것 같다. 아침에 일어나 사과를 깎고 추석 때 만든 부침개로 찌개를 만들었다. 찌개 맛이 너무 좋아서 a가 없는 게 살짝 아쉬웠다. 크하 거리면서 먹었을텐데.


 며칠 전 근처 산에 갔다가 절에서 향을 피워놓고 가만히 앉아 있은 적이 있다. 옆문으로 햇살이 쏟아졌다. 다른 종류의 풀벌레들이 리듬을 맞추며 소리를 내고 멀리서 불경소리가 들렸다. 옆문 앞에 앉아 가을 볕을 쬐며 가만히 눈을 감았다. 무릎팍이 따뜻해지고 불경소리가 은은하게 맘 속에 가라앉았다. a는 핸드폰을 만지작거다 햇살과 나를 찍더니 자기쪽을 보지 말라고 했다. a의 핸드폰 속 나는 골똘하게 생각에 잠겨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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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15-10-15 13: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풍경이 그려지면서 참 좋다,좋다 하게 만드는 글이네요, 아치님. 좋아요. 좋네요.

Arch 2015-10-16 09:41   좋아요 0 | URL
고맙습니다. 절에서 햇살 맞으며 가만히있었던 건 요근래 가장 기분좋은 경험이라 꼭 기록해두고 싶었어요!

 

자주 들어가지 않는 계정에 쌓인 일다 메일을 하나씩 읽고 있다.

성매매 여성들이 직접 말하는 이야기를 들으며 성매매 여성인지, 성노동자인지로 구분하는 논의가 얼마나 추상적인지를 느꼈다. 상황과 개인의 성향에 따라 성매매 양상과 감정, 제도적 요구사항이 다른데 단선적으로만 바라봤다는 생각이 든다.

내가 정책 입안자도 아니고 적극적으로 어떤 입장이있는건 아니지만 20대 때 알바를 하며 성과 관련된 이런저런 고민을 했고

지금 역시 현재진행형 고민이기 때문에 더 관심이 가는지도. 한때는 성역할이 고정된거나 가부장제가 굳건한 이유를 접대문화에서 찾기도 했다. 나 스스로도 여성의 범주를 이쪽 아니면 저쪽으로 나누었고 명확하게 이쪽이 아닐 때, 경계에 선 나에 대해 고민하는 경우도 종종 있었다. 아마 상대방이 내 정체를 궁금해할 때 더 여러가지 생각을 했던 것 같다.


 한창 데이트 폭력 이야기가 나오고 난 후 그 이야기를 엮은 책이 나왔다. 
















 물리적인 폭력뿐 아니라 정신적으로 의존하고 길들여지는 것도 폭력. 의식하지 못한채 나를 갉아먹는 고차원적인 폭력. 20대의 많은 날들을 '낭만적인 사랑'의 신화에 빠져서 나를 제재하고 압박하는 것조차 애정이 있기 때문이라고 믿었었다. 혹은 이상한 거부감을 갖고 통념에 저항했지만 의식적으로는 낭만적인 사랑에 콕 박혀 이도저도 못하고 사랑중독자처럼 굴었다. 지금은 상대를 바꾸려는 내 속에 있는 폭력을 자꾸 인식하고 그렇지 않으려 노력하고 있다. 데이트 폭력과 관련된 글을 읽다보면 요새 내가 하는 짓거리가 꼭 그런 것만 같아서 자꾸 경계하게 된다.















 데이트 폭력에 대해 자전적으로 회고한 '7층'을 보면 나는 저렇게까지 극적으로 사로잡히진 않았다는 생각보다 나 역시 비슷한 형태로 길들여지고 길들이길 바랐던 건 아니었을까란 생각이 든다. 사랑받지 못하는 여자, 사랑받을 자격이 없는 여자. 뭐 이런 통념에 대단한 각오로 저항을 했지만 의식할수록 더 옭죄는 관습적인 사고 같은 게 있다. 나 역시 자유롭지 않고 지금도 마찬가지다. a가 조금만 소홀해도 신경질적인 감정을 쏟아내고 당당한 개인 어쩌고 하면서도 관계에서 오는 필연적인 불안감을 상대에게 여과없이 분출하고 만다.


 성폭력에 대해서도 마찬가지. 성기삽입 성폭력을 당한적은 없지만 성희록, 성추행 등은 흔하게 보고 듣고 겪어왔다. 그럴 때마다 피해자인 내가 느끼는 감정의 결이 다르고 어떻게 대응해야할지 매번 달랐다. 서사적인 인간처럼 나이가 들수록 대응도 잘할 줄 알았는데 그렇지 못할 때도 있고 여전히 성희롱 비슷한 맥락의 얘기를 들을 때면 우왕좌왕하게 된다. 이걸 센스있게 받아쳐야할지, 인상을 써야할지, 한방 먹여줘야할지.

http://www.ildaro.com/sub_read.html?uid=7074%C2%A7ion=sc1















 이 책을 읽고 상대가 원하지 않는 몸, 관계에 대해 힌트를 얻었다. 성적인 얘기를 하면 으례 수줍어하거나 눈을 딴데로 돌리거나 화제를 바꾸는 방식을 취하곤 했다. 그런데 이건 너무 뻔한 시나리오인 것이다. 상대가 원하는 반응대로 행동하면 그 사람은 그게 당연한걸로 받아들일 수 밖에 없는거고 난 그 당연함에 일조하는 것 아닌가. 아니아니, 이렇게 다단계로 복잡하게 생각하진 않았다. 그냥 한방 먹여주고 싶었다.


 술자리에서 평상시 여자들을 좀 떠보는 남자가 그 자리에 있던 언니가 자리를 뜨자마자 옆 사람에게 '쟤 가슴 진짜 크다, 몇일까.'이러는거였다. 공격은 훅하고 들어왔는데 그 대화에 낄 생각이 없었기 때문에 짧은 순간 초집중해서 한방을 생각해야 했다.

- 아치야, 그런데 너는 몇이냐. 그 왜 있잖아. 무슨 컵

- ...... (한방아 생각나라) 나는 부랄 컵이다. 그런데 네 길이는 얼마나 하냐.

하, 빵 터지고 말았다. 남자들끼리 동양 남자 사이즈를 찾더니 포경수술을 해서 우리나라는 후진국이네 어쩌네하며 슬그머니 화제를 돌렸다. 좀 더 짖궂게 사이즈 운운하려다 꾹 참았다. 보기 드문 인내력을 발휘한 것.


 성희롱은 성별을 불문하고 일종의 권력에서 발생한다고 느낀 일도 있었다.


 나이 많은 여자란게 권력은 아니지만 좀 더 거침없는 면은 있을 것이다. 그 상대가 어리고 말수 적은 남자일 경우라면 더더욱. 한번은 어린 남자 사람이랑 얘기를 하는데 바지라인 끝에 팬티가 보이는거였다. 왠지 알려줘야할 것 같아 작게 말했는데 그걸 다른 분이 크게 전달했다. 하, 남자가 조금 당황한다. 나도 당황해서 이거 성희롱한거 같다며 나도 내 팬티 보여줄까란 얘기를 하고 말았다. 주위에 있던 분들이 그건 2차 피해다, 어쩐다 하면서 웃고 넘어갔지만 그 반응 자체가 성희롱이었겠구나 싶었다. 아포가토 사주면서 잘 지내자 어쩌고 했는데 정말 묘한 기분이었다. 마지막 대응도 좀 이상한데.


 얼마 전 예전에 스크랩해둔 자료들을 읽다가 박근혜가 대통령이 되기 전 생물학적인 여성 대통령을 밀어주자란 최보은의 주장에 대해 김규항이 '나른한 페미니즘'류의 글을 쓴걸 봤다. 김규항의 글은 나른했고 일다와 최보은의 글은 절절해서 맘이 아팠다. 메갈리안 언니들의 화끈한 미러링을 틈틈이 지켜보고 정희진의 책을 계속 읽으며 이런저런 생각을 한다. 고종석의 맨스플레인과 꼭 그렇게 맨스플레인이라고 단정지어야겠나란 싶기도 하고 페미니즘이 여성에 국한된 게 아니라 다양한 지점까지 아우르는거라면 그 정의는 무엇일까란 생각도 해본다. 


 나는 페미니스트란 해시태그가 한창 유행일 때는 SNS를 하지 않았고 지금은 하지만 굳이 나를 페미니스트라고 정의내리고 싶지 않다. 어렸을 때는 꼴통 페미니스트 소리에 대한 거부감 때문이었고 지금은 나를 어떤 지향으로 정의하는게 가당키나 싶은 맘이어서, 페미니즘은 지향의 운동이지 정의내리는 주의는 아니기 때문이다. 물론 해시태그는 페미니스트라는걸 드러내는 것만큼 여성의 목소리, 힘을 보여주자는 운동 성격이었던 것도 모르는바는 아니다. 하지만 여전히 페미니즘 관련 문제들에 관심을 갖고 이런저런 생각과 정리를 하고 나의 대응을 점검하는 건 즐겁다. 헷갈리고 혼란스러울 때가 더 많지만 페미니즘과 그 저변의 생각들을 읽다보면 나를 다시 바라볼 수 있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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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기농을 누가 망치는가 - 소비자를 위한 유기농 가이드북
백승우 외 지음 / 시금치 / 201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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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골에 살지만 농사를 짓지 않는다. 흙을 만지고 작물을 키우고 싶어서 기회가 될 때마다 일손을 거든다. 얼마 전에는 자두 따는 이장님댁에서 자두 수확을 거들었다. 감 따는 것보다 훨씬 쉬웠지만 굽혔다 일으켰다 하는게 힘들었는지 엉덩이가 당겨 선별 작업조로 발령? 좌천 됐다. 이장님을 도와서 자두를 고르고 살짝 무른건 칼로 베어내 즙을 만드는 통에 담았다. 크기별로 선별기에 들어간 자두들이 노란 박스에 가득 찼다. 겉보기에는 아무렇지 않은데 유통을 거치면서 무르거나 상할 우려가 있는 자두는 즙을 내는 통에 담겼다. 자두답게 달콤하고 살짝 말랑거리는건 즙을 내거나 아는 사람에게 줬다. 해사한 향을 내뿜은 자두들은 맛이 아닌 오랫동안 여러 단계를 거칠 수 있는지에 따라 선별했다.


 예전에도 관심이 있었지만 요근래 먹거리에 더 관심이 생긴다. 도시처럼 현란한 소스와 양념으로 입맛을 들었다놨다하는 외식이 빈번하지 않고 집에서 요리를 하다보니 좋은 재료야말로 그 자체로 완성형이란 생각이 드는 것. 퇴비로 키웠다는 고구마는 맹탕이라 샐러드를 할 수 밖에 없다. 대개의 야채들이 향이나 맛이 없다. 토마토는 선별을 해야해서 익기 전에 딴다. 황교익씨는 다 익은 맛과 향이 풍부한 토마토를 먹었으면 좋겠어서 그런 바람을 여러차례 유통상인이나 판매상인에게 얘기했지만 답은 부정적이었다고 했다. 선별하지 않은 토마토를 가판에 놓으면 누가 작고 못난 토마토를 고르겠냐는 것. 생산자나 판매자 입장에서는 크고 빛깔이 좋고 모양이 예쁜 것을 고르는 소비자를 감당하기 어렵다. 


 그렇다면 직거래를 해서 믿음을 주고 받고 얼굴있는 거래를 하면 어떨까. 이 책을 읽기 전에는 지금의 유통구조가 정말 잘못됐다고 생각했다. 원가도 보전받지 못하는 농가와 밭떼기란 형식으로 농산물 생산량이나 수요에 따라 헐값이 되는 구조는 정말 아니었다. 나는 막연하게나마 직거래만이 정답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농사처럼 불확실한 분야에서 중간 상인 없이 소비자가 원하는 물건을 개별적으로 충당하기란 어려운 일이다. 농부가 주는대로 먹는 꾸러미가 있지만 이것만으로 식단을 꾸리는 사람은 드물 것이다.


 유기농, 생협활동은 초기에 협동과 연대, 얼굴이 보이는 농산물 직거래, 농사꾼은 소비자의 안전한 밥상을, 소비자는 농사꾼의 살림을 책임지는 방식의 사회운동 성격으로 시작되었다. 이때는 결품이 있어도 물건이 기대치에 못미쳐도 이해하는 분위기였다. 웰빙 열풍이 불면서 유기농쪽으로 다양한 소비자층이 몰리면서 애초의 사회적 성격 대신 유기농 역시 소비하는 쪽으로 흐르고 말았다. 관행농처럼 농약과 화학비료는 쓰지말되 빛깔과 모양은 그럴싸해야한다. 생협 등이 땅을 살리고 농부를 살리는 애초의 성격에서 소비자의 권리를 우선하는 소비자협동조합으로 변모하면서 농사를 짓는 사람은 소외되고 말았다.


 오랫동안 유기 농사를 지은 분과 유통을 맡은 분들이 들려준 이야기는 쉽게 돈 쓰는 권리에 젖은 나 같은 소비자들을 뜨끔하게 한다. 


 내 가족만 생각한다면 그냥 일반 농산물을 먹는 게 낫다.

 

 자신에게 이익이 되는 선택만 골라 하는 똑똑한 소비자들이 늘어나면서 모양과 크기가 일정한 걸로만 아무 때나 사 먹겠다는 방식으로 농사꾼들에게 애를 먹이고 있다.


 우리 농업의 소중함, 유기농업의 가치에 대해 깊이 알고 우리 농업 환경에 대해서도 이해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왜 결품이 나는지, 농산물 상태가 왜 안 좋은지 이해하고 받아들이면 좋겠다.


 최대의 이윤 추구를 위해 어떤 것이든 훼손하는 자본주의 시장 논리에서 가치 소비, 공정무역 등에 관심을 갖고 실천하는 사람들이 많다. 하지만 일관되고 균일한 제품과 서비스에 익숙한 사람들은 '가치'에 방점을 찍은 경험이나 소비가 간혹 불편하기도 하다. 최근에 장애인들의 자립을 도모할 수 있도록 조성된 까페를 이용하면서 콧물을 훌쩍이는 한 친구가 빵을 굽는걸 보고 맘이 불편했었다. 마트보다 작은 상점을 이용하려고 하지만 유통기한을 일일이 확인하고 너무한다 싶을 정도로 가격이 비쌀 땐 고민이 된다.


 책에서 잠깐 소개한 안철환 선생님의 자연농 이야기를 들으며 싱그럽고 건강하고 씩씩하게 자란 채소들을 상상한다. 귀농학교 다닐 때 자연농으로 키운 양배추의 아삭함과 참외의 생생한 향을 여전히 기억한다. 그런 먹을거리를 상상하면 기분이 좋아지고 가슴이 벅차오른다. 소비자이기 전에 동시대를 고민하고 함께 살아가는 사람으로서 조금의 불편함을 감수하며 함께 살아간다는 생각 역시 마찬가지다. 때때로 손쉽고 습관적인 선택을 한다. 계속 관심을 갖고 알려고 노력하고 응원하는 것 밖에 할 수 있는 일이 없다는 점이 안타깝다.

  



비료 팍팍 주고 농약 팍팍 쳐! 그리고 잘 골라서 보내
진짜 가족의 건강을 위하고 잘 먹고 잘 사는 걸 원한다면 식량 작물을 생산하는 농업을 회복시키고 농업을 1차산업의 지위로 되돌려 놓는 것에 합의하고 강력한 사회적 힘을 만들어 이를 관철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혁명적인 발상과 실행이 필요하다
자동차 산업의 성과는 자동차를 생산하는 기업의 힘만으로 이루어진 게 아니다. 세금을 들여 길을 닦고 신호체계를 정비하고 면허를 쉽게 딸 수 있도록 제반 법규를 정비하고 주유소를 어디나 지을 수 있게 제도를 바꾸고 석유화하간업을 키우는 등, 전 국민의 동참으로 단시간에 세계적인 자동차 생산업체를 만들어냈다. 농업도 마찬가지다. 못할 일은 아니다. 단지 안 할 뿐. 새로운 길을 만드는 데 부족한 건 우리의 상상력이지 현실적인 장애물이 아니다.

친환경성은 실험실에서 측정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개념적 속성. 생활철학, 생활 과정 등을 찬찬히 살펴봐야 비로소 이 사람이, 혹은 농산물이 환경 친화적인지 판정할 수 있다는 것이다. 유기농은 개념적 가치. 유기성은 사회적 가치를 실현하는 과정에서 얻게 되는 속성이다. 유기농업은 유기성이라는 가치를 만들어 내는 과정이며 유기농산물을 눈에 보이지 않는 그 가치가 충분히 구현됐다고 인증된 먹을거리이다.

‘책임지는 소비’란 사회적으로 환경적으로 바람직한 제품을 선택하는 소비를 말한다. 소비자가 가치 있는 상품을 선택하는 것은 더 나은 사회와 생태 환경을 만드는 일과 같다.
물질 중심으로 사고하게 되면 유기농의 사회적 가치는 점점 퇴색하고 책임지는 생산자들의 동기도 변할 수 있다. 생산 현장과 생산과정을 모르쇠하고 결과물에만 집착할 경우, 유기농업이 갖는 가치나 사회적 이여는 사라지고 단지 부유한 소비자의 특별한 소비 욕구를 만족하게 하는 값비싼 상품으로 전락하고 말 수도 있다.

식용유는 물리적인 압착 방식보다는 석유에서 만들어진 핵산을 이용해 기름 성분을 녹여내는 추출법으로 만들어진다. 콩이나 옥수수 등을 잘게 부순 후 핵산이라는 유기용매를 이용해 추출하고, 불순물을 제거하는 탈검 공정, 가성소다를 이용한 탈산 그리고 탈색, 탈취 공정을 거쳐 투명하고 깨끗한 기름이 나온다. 식용유는 깻묵처럼 유박에 해당하는 많은 영양 물질과 항산화 물질, 레시틴과 같은 유용한 물질들이 제거된 깨끗한 이름 용액일 뿐이다.
옥수수 사료를 먹고 자란 소에는 인간의 몸에 좋은 오메가3 대신 염증과 혈전을 일으키는 오메가6가 많다.
트랜스 지방은 식물성 기름에 수소를 첨가해 고체화시켜 인위적으로 만든 기름. 트랜스지방은 식물성기름을 고체화하여 산패 방지 효과와 조리의 편리성을 도모했지만 동물성 포화지방보다 더 나쁘다. 혈관에 쌓이면 심혈관 질환을 일으키고 당뇨병과 암도 일으키는 것
저항성 전분. 감자를 섭씨 121도에서 1시간 가열하고 섭씨 4도에서 24시간 냉각하기를 세 번 반복해 소화가 늦게 되는 저항성 전분을 만든다. 소화하기 힘들지만 포만감과 맛은 느끼면서 마음껏 먹을 수 있는 다이어트 식품인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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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형아 검사에서 시작한 선택과 고민의 정점은 예방접종이었다.















 모르는 게 좋았을텐데 의식있는 부모들?이 주변에 있는 덕분에 예방접종의 위험성에 대해 직접적인 조언을 듣고 책까지 선물받았다. 예방접종 약의 낯선 성분에 수은이 들어있는지, DTP처럼 여러 백신이 합쳐진 것은 더 위험하다든지. 알아야하고 제대로 알고 있어야하는 것들이 너무 많았다. 책을 읽다가 포기, 나는 억척스런 엄마가 될 수 없는건가 잠깐 고민에 빠졌다.


 아는 언니에게 아이를 갖고 선택의 연속이었다며 이건 해도 해도 끝이 없는 것 같다고 하소연을 했다. 기형아 검사에서 시작해 태아보험, 출산 준비물까지. 한번도 상상하지 못했던 분야에 대해 전문적으로 선택하고 알고 있어야 하는 스트레스. 언니는 '자아변형게임'을 하면 어떻겠냐고 제안했다. 지금 집중하고 있는 문제 말고 내 힘과 에너지, 방향을 다른 시각으로 볼 수 있는 게임이라고 했다. 전에 한번 해본적이 있다. 그때 세웠던 초점은 '피곤함에서 벗어나 생기를 되찾고 싶다'는 거였다.


 그 당시 어깨가 너무 결리고 몸이 천근만근이어서 정말 죽을 맛이었다. 눈 다래끼는 일주일 넘게 지속되고 피곤에 절어서 사는 게 사는 것 같지 않았다. 보약이라도 먹어야하는게 아닐까 싶었고 운동을 해야하나 잠깐 고민하기도 했다. 게임을 하면서 피곤함이 육체적인데 국한된 게 아니라는걸 깨달았다. 그 즈음 신경 쓰이는 사람이 있었는데 이러지도 못하고 그 사람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아왔던게 몸으로 나타난 것. 감정영역에서 유독 힘들었었다.


 이번에 게임할 때는 '미래에 대해 불안해하지 않고 좋은 엄마가 되게 해주세요.'라는걸 초점으로 잡았다. 같이 게임을 하는 분들이 물질영역에서 고전하고 있을 때 나는 내 수호천사 '힘' 덕분에 정신, 영까지 순식간에 도달했다. 의식 영역에서 뽑은 칩들은 무척 벅차오르는 단어들이었다. 기분좋음, 생명력, 충만함, 분별력... 


 불안했다. 준비없이 덜컥 아이를 갖은 것 같고 제대로 엄마 노릇을 할 수 있을지, 내가 먹고 입고 사는 게 고스란히 아이한테 간다는 말에 거부감을 느끼면서도 혹시 그러면 어떡하지 하는 걱정이 앞섰다. 그러느라 정작 이 아이가 내게 왔다는걸 까맣게 잊고 있었다. 이 아이가 다른 사람이 아닌 나와 a를 부모로 선택했다. 편안하고 고요한 뱃속에서 어떤 일이 생길지 모를 세상 밖으로 나오려고 한다. 아이가 나를 선택해서 온 것에 대해 온전히 고마워하지 못했다는 것, 이 아이를 만나면서 담담하게 살아가는 법을 배웠다는걸 까맣게 잊고 있었다.


 언니가 말했다. 우리가 아이를 선택한 게 아니라 아이가 우리를 선택했다고. 부모는 이 세계가 아이가 있던 곳보다 안전하고 살만한 곳이란걸 전해주면 된다고. 예방접종을 안 맞춰서, 혹은 맞춰서 잘못되는 건 어쩔 수 없는거라고. 모든걸 부모가 책임지려고 하는건 오만한거라고. 조금 마음이 놓였다. 물론 태아보험을 내게 강권했던 친구를 만나서 현실적인 얘기를 듣는다면 또 다시 흔들릴지 모르겠지만.


 뱃속에서 꼬물거리던 아기는 요새 부쩍 힘이 세졌다. 발과 손으로 한번씩 배를 치는데 깜짝깜짝 놀란다. a가 배에다 손을 대면 새침하게 가만히 있다가 편안하게 누워있으면 다시 힘차게 움직인다. 나도 잘 모르겠고 내 불안과 걱정을 나 역시 책임질 수 없다. 하물며 다른 생명을 책임진다니. 꼬물거리는 아이를 이렇게 지켜보듯 아이가 태어나면 옆에서 지켜봐주고 힘내서 세상을 살 수 있도록 도와줘야지. 성향상 간섭하고 잔소리꾼 엄마가 될 우려가 크지만 안 그러도록 노력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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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V프로에서 가상 데이트 시뮬레이션 같은걸 했다. 눈빛이 마주치고 처음 손을 잡았을 때의 설렘, 망설이고 망설이다 어렵게 내뱉은 고백 같은 것. 아, 나도 저렇게 풋풋할 때가 있었지 싶은. 그런데 그런 장면들은 그다지 구미가 당기지 않는다. 본격 설렘 같은 것. '자, 봐라. 이래도 연애 생각 안 나겠어? 이래도 안 설레겠어?' 이런 느낌. 솔로의 가슴을 후벼파며 누가 더 가슴에 불이 났는지 경쟁하듯 내뱉는 얘기도 그다지 와닿지 않는다. 대신


 아는 언니들이 올 12월에 일본 여행을 가는 건 구미가 당겼다. 다들 옆구리에 남편과 아이를 주렁주렁 끼고 있지만 파격적으로 4일 정도의 휴가를 받고 간다는 여행. 언니들은 여행 일정을 얘기하면서 혼자 떠나면 게스트하우스 같은데서 남자-사람을 만날지 모른다는 얘기를 했다. 하, 혼자 여행 떠날 생각도 없고 남자 사람에 대해 관심도가 팍 줄은 요즘인데 그 얘기를 듣고 있자니 왜 이렇게 맘이 동하는지. 나도 모르게 한숨이 나오고 말았다. 향후 몇년간은 아이 때문에 옴쭉달싹 못할거라 더 그럴거라는 위로를 망고쥬스처럼 들이키며 은근히 상상해봤다.

 낯선 여행지, 낯선 사람, 낯선 분위기와 만남. 

 a에게 살짝 이 얘기를 했더니 '당신은 그럴 것 같은데'란 참으로 나를 모르는 소리를 하고 있어서 귀를 잡아당겨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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