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잦은 음주와 이어지는 코곯이로 몇주째 신랑과 따로 잤는데 어제는 코를 곯지 않겠다는 확고한 다짐을 받고 같이 잤다.

어제는 낮고 가늘게 코를 곯아서 신경은 쓰였지만 따로 자진 못한채 몇번 뒤척였다.

혼자 쓰는 침대가 익숙했는지 자리도 불편했다.

- ㅇㅇ씨, 내가 작은방에서 잘게. 자기가 침대에서 자.

- 나 코 많이 곯았어?

- 아니. 어제는 그나마 괜찮았는데 자리가 좁고 불편했어.

- 알겠어. 그런 아치가 침대에서 자. 나는 내가 알아서 잘게. 옷장이든 어디든.

- 옷장에서 자면 재미있겠다.

- 그런데 옷장에서 자다 다음날 아침에 나 못볼 수도 있어.

- 응?

- 자는 동안 다른 세계로 갈 수 있거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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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랑은 염장 다시마를 깨끗이 씻어서 먹기좋게 썰고 나는 초고추장을 만들기로 했다.

그런데 왠지 주말 저녁에 초고추장을 만들고 싶지 않았다. 변덕이 생긴 것.

신랑이 선뜻 자기가 초고추장을 만들겠다고 했다.

침대에 누워서 뒹글거리며 초고추장 만드는 신랑을 봤다.

조청이랑 현미식초를 조금씩 넣어가며 고추장을 찍어먹어보고

싱거운지 매실청을 넣고 깨를 갈아서 넣는다.

새콤한지 다시 고추장을 푹 퍼넣고 조청도 조금 더 넣는다.

그 모습을 보는데

ㅇㅇ씨가 나 없어도 잘 지내겠구나란 생각이 들어 울컥했다가

나 없어도 잘 지낼 수 있으니 다행이란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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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우리 관계에서 자주 등장하는 단어 '연속 동작'

과자를 먹고 나면 봉지는? 바로 쓰레기통에 넣는다.

물통이 다 비었으면? 물을 끓여놓는다.

과일 다 먹은 접시는? 설렁설렁 헹궈서 물기를 뺀다.

둘뿐인 생활이지만 연속동작을 하지 않으면 빈틈이 발생하고 그 틈에서 '안 맞네'란 잠정적 결론을 내리고

서로를 미워할까봐 자신이 손 댄 일은 다 끝내기로 했다.

잘 지켜질 때도 있지만 그렇지 않아서 서로 싫은 소리, 잔소리를 할 때가 많아서

이번에는 냉장고에 상대가 했으면 좋겠는 일들을 적어놓는다.

냉장고에 있는 식재료로 일주일 동안 뭘 맛있게 해먹을 수 있을지 상의도 한다.

나는 이런 게

신랑과 내가 6시면 퇴근하는 삶을 살고

지금 여기에서 살기 때문에 가능한거라고 생각한다.

예전엔 외식이 잦았고 식사를 때우는 방식이었는데

지금은 왠만해선 집에서 다 해먹는다.

나가서 사먹을 곳이 없기도 하고 서로 의견조율하면서 음식 만들만큼 여유도 있기 때문이다.


이전보다 지금이 조금 더 낫다.

우릴 닮은 아이가 태어나면 소꿉장난 같은 일상보다는

좀 더 탄탄하고 계획적인 삶으로 진입할지도 모르겠다.

그때까지, 지금 잠시 외출하는 기분을 내고 있는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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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nine 2015-09-21 14: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엇! 아치님, 그동안 결혼 하셨어요??

Arch 2015-09-22 13:07   좋아요 0 | URL
^^ 본격 결혼은 아닌데...